3월 1일 정미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와 삼사를 불러 진휼하는 방법의 편리 여부를 의논하였다. 여러 신하들의 의견이 제각기 달라, 혹은 마른 양식을 나누어 주는 것이 편리하다고 하고, 혹은 죽을 쑤어 주는 것이 편리하다고 하고, 혹은 곡식을 나누어 대여해 주는 것이 편리하다고 하였다. 상이 여러 의견을 참작하여, 평민에게는 호구를 계산하여 곡식을 대여해 주도록 하고, 떠돌아다니는 걸인들에게는 죽을 쑤어 구휼하도록 하였다.
3월 3일 기유
여성제(呂聖齊)를 승지로, 정유악(鄭維岳)을 지평으로 삼았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허적이 아뢰기를,
"경술년과 신해년 두 해의 기근과 돌림병은 옛날에도 없었던 일입니다. 지금의 형세는 마치 큰 난리를 막 겪은 것과 같으므로 반드시 별다른 구휼의 은혜를 베풀어야만 하늘의 견책에 대답할 수 있고 민심을 위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신역(身役)과 이웃이나 일가붙이에게 대신 징수하는 것이 오늘의 가장 큰 폐단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신역들은 모두 탕감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팔도의 군병(軍兵) 가운데 죽거나 흩어진 자들이 태반이나 되어서 실로 대신 정할 길이 없는 형편입니다. 그러니 도망갔거나 죽은 사람을 대신 채워넣는 일을 잠시 3년 동안만 중지했다가, 3년 뒤에 분수(分數)를 정하여 점차로 뽑아서 정하는 것이 편리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대사헌 이민적이, 포보(砲保)가 내는 베 가운데 이미 납부한 것은 본 고을로 되돌려 주자고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허적이 아뢰기를,
"대간이 아뢸 때에는 따르지 않다가 대신이 아뢸 때에 따르시면 반드시 밖의 물의가 있을 것이므로 신이 감히 말을 합니다. 대간의 계사를 마땅히 일찍 윤허해야 할 것인데 오래도록 윤허하지 않으신 것은 성상께서 그 일이 착실히 거행되지 않을까 염려하여 그러신 것입니다만, 이는 수령들에게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상께서 허락하지 않고 질질 끄신다면 재물을 아끼는 셈이 되므로 대체를 손상시킬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민적이 또 이찬(李纘)의 일에 대해 아뢰었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민적이 아뢰기를,
"여러 가지 신역과 각 고을의 군포(軍布)를 모두 탕감해 주고, 오래 전에 도망갔거나 죽은 사람을 잠시 동안 충정(充定)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실로 전에 없던 큰 은혜입니다. 옛날에 큰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조서를 반포하여 알렸지, 유사로 하여금 봉행하게만 하고 끝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 지금도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자신을 책망하고 애통히 여기시는 교서를 대신 초안하도록 하되 직언을 구하는 말까지 아울러 써넣게 하여 팔방에 널리 포고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리하겠다. 거행할 조목을 써서 들이면 비망기로 판하(判下)하겠다."
하였다.
3월 4일 경술
전 제용감 정(濟用監正) 조사기가 상소하기를,
"조종조 때부터 왕위를 계승하고 나면 곧바로 재궁(梓宮)015) 을 준비하고 해마다 옻칠을 했었는데 그 뜻이 심원합니다. 효종 초년에 신이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명을 받아 장생전(長生殿)의 재궁을 칠하는 데 농간을 부리는지 조사하려고 간 일이 있으니, 효종께서 깊이 유의하고 계셨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효종의 초상에는 연판(連板)의 관을 사용했으니, 이것이 신하의 정성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효종께서 승하하신 날 전하께서 대통(大統)을 이으셨으니, 이때를 당해서는 오직 어버이를 높이 받드는 도리를 다하고 마지막 보내는 예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적통(嫡統)이니 서자(庶子)이니 하는 설들이 왜 갑자기 분분하게 일어나 끝내는 지체를 깎아내려 기년상으로 하고 말았단 말입니까? 먼 뒷날에라도 필시 비난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니 불가불 후회한다는 뜻을 보이시어 하늘에 계신 효종의 영혼을 위로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옛 신하 정개청(鄭介淸)의 학문 조예는 신이 알 수 있는 바가 아니지만, 호남 일도의 유생들이 사당을 짓고 받들어 온 지 거의 백년이 되는데 하루아침에 철거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사당을 지어 받드는 것은 문묘(文廟)에 종사하는 것과는 다르고 보면 사당을 철거한 것은 너무 심한 것으로서 한 도의 유생들의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겠습니까?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하자고 청한 것은 오래 전의 일인데 영남과 호남의 유생 가운데 혹 이의를 제기한 자들을 흉칙하고 사특한 자로 지목하여 평생 폐고(廢錮)시켜 과거를 못 보게 하거나 혹 과거에 급제한 자가 있더라도 평생토록 사판(仕版)에 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릇 임금에게 죄를 진 신하도 곧 거두어 써서 영원히 내버리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유생들에게만 한때 의견이 달랐다는 것으로 평생 동안 금고시키는 죄를 줄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 역시 변통해서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해야 할 하나의 일입니다.
과거의 폐단으로 말하면, 지난해 정시(庭試)에서 어떤 시권(試券)에 표문(表文)의 넉 자 단구(短句)에서 두 개의 ‘특(特)’ 자를 양쪽에 나란히 써서 한 구절을 만든 것이 있었습니다. 이는 크게 격식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분명히 표시해 놓은 것이고 문리도 분명치 않았으나 합격하였습니다. 그의 아비가 고시관으로 있었으므로 사방에 웃음거리가 되어 사람들의 의혹을 깨뜨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이 비웃고 욕하든 말든 좋은 벼슬을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오직 박천영(朴千榮)에 대해서만 글자 하나를 고친 흔적이 있다는 이유로 합격자를 발표한 뒤에 이름을 빼버렸으니, 어떻게 인심을 복종시킬 수 있겠습니까.
또 생각건대, 죄를 받아 유배된 사람 가운데 어찌 억울한 자가 없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나라는 죄인을 모두 용서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전에 없던 흉년과 돌림병으로, 거의 다 죽어가는 때를 만났으니 살인·반역·강상(綱常)을 범한 죄인을 제외하고는, 대소 경중을 따지지 말고 특별히 크게 용서해 주는 은전을 베풀어 민심을 기쁘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소가 들어갔으나, 비답이 없었다.
삼가 살피건대, 사기가 인환의 탄핵을 받자마자 곧바로 인환의 과장(科場) 사건을 가지고 상소에 언급하여 배척했으니, 그 가운데 직절(直截)한 말이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비난을 면할 수 있겠는가. 이 상소가 만약 인환이 그를 논핵하기 전에 있었다면, 그 직절함을 어떻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도승지 장선징(張善瀓)이 나아가 아뢰기를,
"조사기의 상소는 괴이한 말이 많았습니다. 예론(禮論) 한 조목에 있어서는 이미 금령(禁令)이 있었고, 연판의 재궁을 쓴 것도 신하로서는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른바 금령이란 것은 병오년에 유세철(柳世哲)이 올린 상소로 인해 상께서 엄금시키라고 특별히 명하고 중외에 포고하라는 분부가 계셨으므로 즉시 팔도에 반포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승지가 살피지 못하고 몽롱하게 그의 소를 받아들였습니다. 대신도 승지에게 직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잘못을 면하기 어렵다고 책망하였습니다. 해당 승지를 추고하소서."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사기가 그를 탄핵한 글의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곧바로 소를 올렸으니, 매우 해괴한 일입니다. 그 소 가운데 ‘다른 사람이 비웃고 욕하든 말든’이라는 말은 이인환을 지적한 것인데, 방금 그 사람에게 호되게 논박을 받고는 곧바로 그 사람의 과거장에서의 일을 거론하였으니 역시 매우 부당한 짓입니다. 또 재궁을 전판(全板)으로 쓰지 않고 연판(連板)을 쓴 일에 있어서는 주관한 신하에게 진실로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신이 호조 판서로 있었고 정치화(鄭致和)가 공조 판서로 있으면서 힘을 다해 전판을 찾았으나 끝내 얻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어쩔 수 없어서 한 일을 이제 와서 제기했으니, 어찌 신하로서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으며, 상께서 들으시고 또한 어떤 마음이 드시겠습니까?
예를 논한 한 조항에 있어서는, 예란 이미 알기 어려운 것으로서 의논이 갖가지이니, 사기가 오늘날 말한 것만이 아닙니다. 금령을 정한 데 대해서는, 신은 그때 조정에 있지 않아서 듣지 못했습니다만, 신의 뜻에는 그것이 합당한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예론을 빙자하여 별도의 다른 뜻을 가진 자도 많았으니, 예를 들자면 윤선도(尹善道)의 상소는 극히 음험하고 참혹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상께서 특별히 금지시키게 하신 것인데, 어떻게 법을 무시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승지가 이 상소를 받아들인 것 역시 매우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상소가 들어온 뒤에 반드시 정원의 계사가 있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끝내 없었다. 병오년의 금령은 나 역시 망각하였다."
하자, 호조 판서 김수흥이 아뢰기를,
"그때 신이 도승지로 있었는데, 세철의 소를 올린 뒤에 신에게 한번 읽어보라 하시고, 성상께서 ‘별다른 조치를 취할 방도가 없으니 금령을 만들어야겠다. 이 뒤로 또 상소로 이 일을 논한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제일 큰 죄로 논하겠다.’고 하셨습니다."
하고, 선징이 아뢰기를,
"그때 대신들에게 물었더니, 정태화(鄭太和)는 혐의가 있다 하여 대답하지 않았고, 홍명하(洪命夏)는 죄를 주어야 한다고 했는데, 상께서 죄를 주지 않고, 단지 금령만 내리셨습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사기의 상소를 받아들인 승지는 이미 소를 올려 체직을 청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반드시 계자(啓字)를 찍으실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 소가 아직도 하달되지 않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기의 원래 상소는 아직 내려보내지 않았으나 내려보낸 뒤에는 마땅히 순서대로 처리할 일이 있을 것이다. 그 승지는 결국 공무를 수행하기 어려울 것이니, 먼저 체차하라."
하였다.
○庚戌/前濟用監正趙嗣基上疏曰:
自祖宗朝, 嗣服之初, 卽成梓宮, 逐年加漆, 其意深遠。 孝廟初年, 臣以史官, 承命, 摘奸于長生殿, 漆梓宮, 孝廟之深留聖意, 亦可見矣。 孝廟初喪, 梓宮以連板用之, 此可謂盡臣子之誠乎? 孝廟禮陟之日, 殿下承大統, 當此之時, 惟當極尊親之道, 盡送終之禮。 而嫡統、庶子之說, 何遽爲紛紜, 終未免貶降短喪之歸? 百世之下, 終必有議之者, 不可不以示追悔之意, 以慰孝廟在天之靈也。 且故臣鄭介淸之所造詣, 非臣之所能知, 而湖南一道儒生, 創祠宇崇奉, 幾近百年, 而一朝命毁撤之。 祠宇之奉, 有異於從祀文廟, 則毁撤祠宇, 不幾於〔已〕 甚, 而失一道儒生之心乎? 李珥、成渾從祀之請久矣, 嶺湖儒生之或爲異論者, 目之以凶邪, 一生廢痼, 不得赴擧, 或有登科者, 終身不齒仕版。 凡臣子之獲罪君父者, 旋卽收敍, 無一永棄之人, 何獨於儒生, 以一時論議之異, 爲平生禁錮之罪乎? 此亦變通慰悅之一事也。 以言乎科擧之弊, 則頃年庭試, 有一試券表文, 四字短句雙峙兩特字爲一句。 非但爲大段違格分明, 有表文理未瑩而登第。 其父實爲考官, 八方傳笑, 人疑不可破。 而從他笑罵, 好官自爲, 獨於朴千榮, 以一字點改之迹, 拔榜於唱榜之後, 其何以服人心也? 且念徒配之中, 豈無負屈者? 而我國曾未有罪人盡宥之法。 當此無前饑疫死亡殆盡之日, 除罪犯殺逆綱常外, 毋論大小輕重, 特用曠蕩之典, 以悅民心, 可也 疏入不報。 【謹按嗣基, 纔爲寅煥所劾, 而旋以寅煥科場事, 及於疏中, 以斥之, 雖有直截之言, 安得免人之譏議哉? 此疏若在於寅煥未及論劾之前, 則其直截, 何可言也?】 都承旨張善徵進曰: "趙嗣基疏多怪語。 至於論禮一款, 旣有禁令, 梓宮連板之說, 亦非人臣所可忍言。 所謂禁令, 丙午年, 因柳世哲疏, 自上特命嚴禁, 有布告中外之敎, 卽爲頒示八方。 而承旨不能覺察, 矇然捧入。 大臣亦責以難免不職之失, 請當該承旨推考。" 積曰: "嗣基彈墨未乾, 旋爲投疏, 已極駭異。 而其疏中, 從他笑罵之說, 指李寅煥也, 纔被重(䮕)〔駁〕 於其人, 而乃論其人科第上事, 亦甚無謂。 且梓宮一事, 有全板不用, 而用連板, 則主管之臣, 固有罪矣。 其時, 臣爲戶判, 鄭致和爲工判, 極力求索全板, 而終不得。 爲此不得已之擧, 到今提起, 豈臣子所忍, 而自上聞之, 亦當作何如懷耶? 論禮一款, 禮旣難知, 論議多岐, 非但嗣基今日之言也。 至於著爲禁令, 則其時, 臣不在朝, 未得與聞, 而臣意則未知其洽當, 但假托論禮, 別有他意者亦多, 如尹善道之疏, 極其陰慘。 故自上特令禁之, 則何可冒法而言乎? 承旨之捧入此疏, 亦甚無據矣。" 上曰: "其疏入啓後, 意必有政院之啓, 而終無之。 丙午禁令, 予亦未之覺矣。" 戶判金壽興曰: "其時, 臣爲都承旨, 世哲疏入啓後, 命臣讀一遍, 聖敎以爲: ‘無他處置之道, 著爲禁令。 日後又有疏論之人, 則以一罪論斷矣。’" 善瀓曰: "其時, 問于大臣, 則鄭太和引嫌不對, 洪命夏以爲可罪, 自上不之罪, 只令禁之矣。" 積曰: "嗣基疏捧入承旨, 旣已陳疏乞遞。 臣意以爲, 必踏啓字, 而疏尙未下矣。" 上曰: "嗣基元疏, 姑未下, 旣下之後, 當有次第處置之事。 而其承旨終難行公, 爲先遞差。"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11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정론-정론(政論) / 왕실-의식(儀式) / 사법-탄핵(彈劾) / 사법-법제(法制) / 인사-선발(選拔) / 인사-임면(任免) / 사상-유학(儒學)
疏入不報。
【謹按嗣基, 纔爲寅煥所劾, 而旋以寅煥科場事, 及於疏中, 以斥之, 雖有直截之言, 安得免人之譏議哉? 此疏若在於寅煥未及論劾之前, 則其直截, 何可言也?】 都承旨張善徵進曰: "趙嗣基疏多怪語。 至於論禮一款, 旣有禁令, 梓宮連板之說, 亦非人臣所可忍言。 所謂禁令, 丙午年, 因柳世哲疏, 自上特命嚴禁, 有布告中外之敎, 卽爲頒示八方。 而承旨不能覺察, 矇然捧入。 大臣亦責以難免不職之失, 請當該承旨推考。" 積曰: "嗣基彈墨未乾, 旋爲投疏, 已極駭異。 而其疏中, 從他笑罵之說, 指李寅煥也, 纔被重(䮕)〔駁〕 於其人, 而乃論其人科第上事, 亦甚無謂。 且梓宮一事, 有全板不用, 而用連板, 則主管之臣, 固有罪矣。 其時, 臣爲戶判, 鄭致和爲工判, 極力求索全板, 而終不得。 爲此不得已之擧, 到今提起, 豈臣子所忍, 而自上聞之, 亦當作何如懷耶? 論禮一款, 禮旣難知, 論議多岐, 非但嗣基今日之言也。 至於著爲禁令, 則其時, 臣不在朝, 未得與聞, 而臣意則未知其洽當, 但假托論禮, 別有他意者亦多, 如尹善道之疏, 極其陰慘。 故自上特令禁之, 則何可冒法而言乎? 承旨之捧入此疏, 亦甚無據矣。" 上曰: "其疏入啓後, 意必有政院之啓, 而終無之。 丙午禁令, 予亦未之覺矣。" 戶判金壽興曰: "其時, 臣爲都承旨, 世哲疏入啓後, 命臣讀一遍, 聖敎以爲: ‘無他處置之道, 著爲禁令。 日後又有疏論之人, 則以一罪論斷矣。’" 善瀓曰: "其時, 問于大臣, 則鄭太和引嫌不對, 洪命夏以爲可罪, 自上不之罪, 只令禁之矣。" 積曰: "嗣基疏捧入承旨, 旣已陳疏乞遞。 臣意以爲, 必踏啓字, 而疏尙未下矣。" 上曰: "嗣基元疏, 姑未下, 旣下之後, 當有次第處置之事。 而其承旨終難行公, 爲先遞差。"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11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정론-정론(政論) / 왕실-의식(儀式) / 사법-탄핵(彈劾) / 사법-법제(法制) / 인사-선발(選拔) / 인사-임면(任免) / 사상-유학(儒學)
【謹按嗣基, 纔爲寅煥所劾, 而旋以寅煥科場事, 及於疏中, 以斥之, 雖有直截之言, 安得免人之譏議哉? 此疏若在於寅煥未及論劾之前, 則其直截, 何可言也?】
이조 참의 이단하(李端夏)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은 다음과 같이 들었습니다. 중종 대왕의 폐비 신씨(廢妃愼氏)는 그의 조카 신사원(愼思元)에게 의탁하라 명하였고, 그가 죽자 또 예를 갖추어 장사지내도록 명하고는 이어 사원으로 하여금 상을 주관하고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습니다. 사원이 아들이 없이 죽었으므로 그 딸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그 딸의 아들에게 또 아들이 없자 그의 딸에게 전하였습니다. 그 딸에게 아들이 있는데 이진황(李震璜)입니다. 지금 살아있으나 의지할 데 없이 가난하고 궁색하여 조석간에 굶어죽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폐비의 신주를 그 집에서 모시고는 있으나 제사와 전(奠)을 모두 폐지하였고 향화도 끊겼습니다. 대개 들으니, 국가에서 처음에는 그의 묘소 아래 수호하는 사람을 두었으나 오래 되어 흩어져 없어지자 인조조에서 이어 몇 명을 두었는데 병자년 난리에 또 남김없이 죽고 그 뒤로는 다시금 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 살아서 국모(國母)가 되었고 폐비가 된 것은 그의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죽은 뒤에 사당의 제사와 묘소의 제사가 모두 끊겼으니, 진실로 마음 아픈 일입니다. 청컨대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대신과 의논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만약 ‘이미 서인(庶人)이 되었으니 뭇사람들과 같다.’고 하면 그 신주를 묻어버려야 할 것이고, 만약 이렇게 하는 것이 미안하다고 하면 그 사당과 무덤의 제수(祭需)를 모두 관에서 주도록 하고 묘소를 수호하는 사람을 다시금 두어야 할 것입니다.
또 고 판서 박장원(朴長遠)은 효행(孝行)이 특별히 뛰어났는데, 불행히도 그의 어머니보다 먼저 죽었습니다. 지금 들으니, 그 집안이 지금 끼니조차 굶고 있어서 80이 된 그의 어머니를 봉양할 길이 없다 하는데 진실로 가긍한 생각이 듭니다. 이 역시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그의 어머니에게 급료를 주어 3년상을 마치게 하고 그의 아들이 상을 마치고 녹을 받아 봉양할 수 있게 해 주신다면, 효도로 다스리는 데에 있어서 실로 적합한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경연에서 단하의 상소를 허적에게 주어 읽게 하였다. 읽고 난 뒤에 허적이 아뢰기를,
"폐비의 일을 전하께서는 자세히 알고 계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중종 조의 폐비 신씨의 일이다."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폐위된 것은 매우 원통한 일이었습니다. 당초 중종께서 훈신(勳臣)들의 의논에 못이겨 부득이 폐위시켰는데, 장경 왕후(章敬王后)가 승하하신 뒤에 유신(儒臣) 가운데 신씨를 복위시키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러는 ‘장경 왕후께서 이미 중전의 자리에 올라 원자(元子)를 낳으셨는데 만약 신씨가 복위(復位)되어 아들을 낳고 가례(嘉禮)의 선후를 따질 경우 동궁(東宮)을 어느 위치에 두어야 할 것인가?’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 의논이 끝내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그 상소를 예조에 내렸다. 예조가 복계(覆啓)하기를,
"신비의 신주를 묻는 것과 묘소를 수호할 인원을 결정하여 주는 것과 제수를 관에서 주는 것은 중대한 일이므로 대신과 의논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박장원의 노모에게는 살아있는 동안까지 해조로 하여금 월료(月料)를 지급하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가 대신에게 의논하니, 정태화·김수항이 의논드리기를,
"신씨 집의 직계 자손으로 생존한 자가 있으니, 신주를 모셔서는 안될 집에 그대로 모시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신주를 본가에 돌려주고 제수는 관에서 헤아려 지급하여 향화가 끊이지 않게 하고, 묘소에는 몇 명의 인원을 정해 주어 나무꾼이나 목동이 들어가지 않도록 금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吏曹參議李端夏上疏, 略曰:
臣聞中宗大王廢妃愼氏, 命依于其(娚)[姪] 愼思元, 旣沒, 又命禮葬, 仍使思元主喪奉祭。 思元無子而死, 傳祀於其女, 其女之子, 又無子, 傳於其女。 其女有子曰李震璜。 今方生存, 而窮貧無依, 朝夕餓死。 廢妃神主, 奉於其家, 而祭奠俱廢, 香火亦絶。 蓋聞國家初置守護之人於墓下, 久而散亡, 仁祖朝繼置若干名, 而丙子之亂, 又死亡無餘, 仍不復置云。 噫! 生爲國母, 廢非其罪, 而旣沒之後, 祠祭、墓祭, 竝至廢閣, 誠爲痛傷。 請令禮官, 議于大臣。 如曰旣爲庶人, 卽同凡庶, 則埋安其主可也, 如以此爲未安, 則其祠墓祭奠, 竝令官給, 復置墓戶, 使之守護可也。 又念故判書朴長遠孝行卓異, 不幸先沒。 今聞其家, 方在飢餓中, 其母大耋之年, 無以爲養, 誠可矜念。 亦令攸司, 賑給其母月料, 終其三年, 以待其孤之免喪祿養, 其於孝理, 實爲合宜。 上於筵中, 以端夏疏, 授許積讀之。 訖, 積曰: "廢妃事, 殿下詳知之乎?" 上曰: "中廟廢妃愼氏事也。" 積曰: "廢之甚冤。 當初中廟, 迫於勳臣之議, 不得已廢之, 章敬王后昇遐之後, 儒臣有愼氏復位之議, 而或以爲, 章敬旣升正位, 誕生元子, 若愼氏復位而生子, 論嘉禮先後, 則當置東宮於何地云? 故議竟不行矣。" 上下其疏于禮曹, 禮曹覆啓: "愼妃神主埋安、墓戶定給、祭奠官給, 事係重大, 宜議大臣。" 上曰: "朴長遠老母, 限生前, 令該曹題給月料。" 禮曹議于大臣, 則鄭太和、金壽恒獻議以爲: "愼家直孫, 猶有存者, 則不宜仍奉其主於不當奉之家。 神主歸之本家, 祭需自官量給, 不絶香火, 墓所則定給若干戶, 俾禁樵牧。" 上許之。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12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가족-가족(家族) / 윤리-강상(綱常) /
3월 5일 신해
상이 하교하였다.
"오늘날 국사가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별도로 변통하는 조치가 없어서는 안 되겠다. 경술년을 포함한 그 이전의 각종 신역(身役)은 모두 탕감해주고, 신해년의 각종 신역도 감면해주어, 백성의 힘이 조금이나마 펴지게 하라."
승지 장선징 등이 아뢰기를,
"전 정(正) 조사기가 올린 소의 말이 괴상하기 짝이 없는 점은 우선 놔두고 논하지 않는다 치더라도 그 가운데 금령(禁令)을 범한 것이 있으니 그냥 놔둘 수 없습니다. 이 상소는 마땅히 유사에게 보내 죄를 결정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3월 6일 임자
상이 하교하였다.
"천하에 국가가 있은 이래로 기근이 없는 시대가 있었겠는가마는 어찌 오늘날처럼 참혹한 적이 있었겠는가. 지난 역사에서 찾아보아도 들어보지 못한 것이다. 아, 내가 덕이 박하고 재주가 둔한 자질로 왕위에 있은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하늘이 기뻐하지 않아 재이가 거듭 나타나고 수재·한재·풍재(風災)·상재(霜災) 등 천지의 변괴가 없는 해가 없었다. 그런데도 어리석고 혼미하여 하늘의 견책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였기에 크게 노하여 경술년과 신해년의 망극한 기근과 돌림병을 내려 우리 동방의 수천리 억만 백성들로 하여금 길거리에 죽어 넘어져 쌓인 시체가 서로 겹치고 성시(城市)와 촌락(村落)이 거의 다 비어 버렸다. 백성의 부모된 자로서 이 참혹한 재앙을 보니 심장을 도려내는 것 같으나 단지 스스로 슬피 울먹이면서 하늘을 우러러 부르짖으며 사경에 놓인 만백성의 생명을 이 몸으로 대신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아, 이게 무슨 때이며,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인리(人理)가 모두 사라져 어미와 자식이 서로 버리는 등 윤기의 변괴가 자주 발생하고 있으니 맹자(孟子)가 이른바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보호하지 못하고 아내와 자식이 뿔뿔이 흩어진다.’는 말은 오늘에 비하면 오히려 나은 것 같다. 국가의 일이 이미 백척 간두에 이르러 내를 건너는데 끝이 보이지 않고 사나운 파도 속에 배가 새는 것으로도 그 위태로움을 비유하기에 부족하다. 진휼의 정사가 한창 급한데도 국가의 곡식이 매우 적으니, 장차 어떻게 구제하여 살려낸단 말인가.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면 차라리 죽는 것만도 못하다.
아, 마침 발육하는 따뜻한 봄의 시기를 만나 만물이 모두 살아나는데, 오직 우리 백성들만 유독 무슨 죄가 있기에 이처럼 망극한 재난에 시달리고 있단 말인가? 애통한 마음이 급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만 생각건대, 덕이 부족하고 몽매한 나의 과실 중에 말할 만한 점이 많을 것이며, 국사에 이익되는 점과 해가 되는 것 중에 말할 만한 점이 많을 것이며, 백성을 구제하는 계책에도 말할 만한 점이 많을 것으로 여긴다. 그러니 승지는 나를 대신해 교서를 초안하여 널리 직언(直言)을 구해 시국의 어려움을 구제하도록 하라.
그리고 인재를 뽑아 등용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릴 때 첫번째의 일이다. 그러므로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평상시의 규례에 구애하지 말고 각기 재주와 국량이 넉넉한 사람을 전조에 보내 재주에 따라 쓰도록 해야 할 것이다. 또 수십 년 동안 등용되지 못한 사람도 많이 있으니, 국가에서 사람을 쓰는 도리로 볼 때 매우 잘못된 것이다. 이 역시 전조로 하여금 일체 거두어 쓰도록 하라. 아, 오늘날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너희 대소 신료와 서민들은, 각기 품은 생각을 말하여 나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도록 하라."
3월 7일 계축
오정위(吳挺緯)를 형조 판서로, 김만기(金萬基)를 부제학으로, 민시중(閔蓍重)을 예조 참의로, 신정(申晸)을 전라 감사로 삼았다.
3월 9일 을묘
원만리(元萬里)를 승지로, 임유후(任有後)를 경기 감사로, 최후상(崔後尙)을 교리로, 이훤(李藼)을 수찬으로 삼았다.
평양부의 민간에서 병아리 한 마리를 깠는데, 머리 하나에 날개가 셋, 다리가 넷이었다.
상이 영상 허적과 호조 판서 김수흥을 불러 보았다. 허적이 아뢰기를,
"빌려준 곡식을 모두 탕감해주는 일에 대해 오늘 의논해서 결정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병오년을 포함한 그 이전의 빌려준 것 중에서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얼마나 되는가?"
하니, 수흥이 대답하기를,
"10만여 석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모두 탕감하라."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상평청(常平廳) 등의 곡식 외에, 각영에서 빌려준 곡식 가운데는 호조와 관계없는 것도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각 고을에서 조적(糶糴)하는 예에 따라, 병오년을 포함한 이전의 것 중에서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모두 면제해 주어야 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상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권시(權諰)가 죽었다니, 내 매우 놀랍고 애통스럽다. 선조(先朝)에서 예우하던 신하에게 추도하는 은전이 없을 수 없으니, 이조에 말하여 정이품(正二品)을 추증하도록 하라."
하였다.
3월 12일 무오
민종도(閔宗道)를 필선으로, 서문상(徐文尙)을 정언으로 삼았다.
의금부에서 조사기의 죄를 논하여, 도삼년(徒三年)에 정배하기로 법을 적용하였다.
사간 이합(李柙)이 아뢰기를,
"조사기의 상소 가운데 종통이니 적통이니 하는 말은 윤선도가 앞에서 창도하고 세철이 뒤에서 이었던 것인데 그들의 음험 간사하고 도깨비 같은 행적들이 해와 달 아래 피할 수 없었으므로 특별히 금제를 만들어 중외에 반포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기가 방자하게 소를 올려 전혀 꺼린바 없이 감히 지체를 깎아내리고 상례 기간을 줄였다는 등의 말로 속이여 시험해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 실제로 범한 죄를 따져보면 마땅히 먼 곳에 유배하는 법을 시행해야 하는데, 이제 적용한 법이 겨우 도년(徒年)에 그치고 말았으니, 이게 어찌 당초에 제도를 정한 뜻이겠습니까. 멀리 유배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합 등이 여러 날 논계하였으나, 끝내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사기가 인환의 탄핵을 받고도 지금 소를 올려 도리어 인환을 공격하였으니, 이는 보복한다는 혐의를 피하지 않은 것으로서 정말 지나쳤다고 하겠다. 그러나 종통이니 적통이니 하는 말은 세상의 함정이 되어 사람들이 말하기 어려운 바인데 더구나 금령이 반포된 뒤에 말하였으니, 사기와 같은 자는 곧고 아부하지 않은 자라고 하겠다. 그런데도 대간이 거듭 논박하여 심지어는 변방으로 내치자고 청하였으니, 참으로 괴이한 일이다. 아, 이합과 같은 비루한 위인이야 어찌 책망할 것조차 있겠는가.
○司諫李柙啓曰: "趙嗣基疏中宗嫡統之說, 善道倡於前, 世哲繼於後, 而陰奸怪鬼之跡, 罔逃於日月之下, 特有禁制, 頒布中外。 而嗣基肆然投疏, 略無顧忌, 敢以貶降短喪等說, 敢爲譸張嘗試之計。 論其情犯, 宜施投畀之典, 今其擬律, 止於徒年, 此豈當初定制之意哉? 請遠竄。" 上不從。 柙等累日論啓, 而終不蒙允。
【謹按嗣基爲寅煥所劾, 而今乃陳疏, 反攻寅煥, 不避脩郄之嫌, 誠過矣。 然宗嫡統之說, 爲世陷阱, 人所難言, 況能言於禁令之後, 如嗣基者, 可謂棘棘不阿者矣。 而臺論重發, 至請投畀, 良可異也。 噫! 如柙鄙夫, 安足責哉?】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25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13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함경도에서 굶주려 죽은 백성이 1백 10명이었다. 도신이 보고하였다.
3월 13일 기미
상이 양심합(養心閤)에 나아가 서울과 지방의 죄수들을 소결(疏決)016) 하였다. 의금부와 형조의 당상관이 각기 문안(文案)을 가지고 입시하였고, 대신과 비국의 여러 재신과 양사 및 옥당 역시 입시하였다. 저녁까지 석방할 죄수를 결정하였는데, 사면을 받은 자는 잡범(雜犯)과 사죄(死罪) 이하의 죄수로서 경기도와 충청도 등을 합해 1백 40여 명이었다.
3월 14일 경신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양남(兩南)과 함경도에 유배된 죄인 및 현재 수감된 죄수의 석방을 결정하였는데, 2백 40여 명이 사면을 받았다.
3월 15일 신유
대사헌 이민적 등이 아뢰기를,
"강상(綱常)·살인(殺人)·장오(贓汚) 및 유배된 죄인 가운데 정리(情理)가 매우 중한 자는 대사령 속에서도 사면할 수 없는데 어떻게 소결하는 날에 사면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죄인 면(冕) 등 6명과 김조(金𥶏) 등 27명은 전처럼 그대로 정배(定配)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사간 이합과 헌납 윤심이 아뢰기를,
"사복 정(司僕正) 박지(朴贄)는 조정에서 하는 행동이 사대부의 풍습을 많이 잃었으니,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3월 16일 임술
홍만용(洪萬容)을 승지로, 홍주국(洪柱國)을 보덕으로, 유헌(兪櫶)을 문학으로, 윤가적(尹嘉績)을 사서(司書)로, 이우정(李宇鼎)을 정언으로, 조사석(趙師錫)을 봉교로, 목창명(睦昌明)을 검열로 삼았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죄수들을 소결하였다. 함경도와 평안도에 유배된 죄인 1백 90여 인이 사면을 받았다.
3월 17일 계해
상이 대신·삼사·의금부 당상·형조 당상과 함께 죄수를 소결하였다. 정리상 용서할 수 있는 자 1백 40명을 사면하도록 하고, 도류(徒流) 이하의 죄인은 모두 사면하였다.
3월 19일 을축
지평 김환(金奐)과 정유악(鄭維岳)이 아뢰기를,
"이번 경기도에서 대여해준 곡식을 받아 들이면서 허위로 기록한 수령들에게 곤장을 치라는 명령을 9일에 내렸고 보면, 이는 전 감사 오정위가 인수를 교부하기 전이므로 즉시 명을 받들어 거행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신 감사 임유후(任有後)가 그곳에 도착한 것이 12일인데 그 사이 3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아예 각 고을에 분부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만약 장단(長湍)이나 고양(高陽) 등이 품의할 일이 있어서 그랬다고 한다면 이 이외의 다른 고을에는 또 무엇 때문에 공문을 보내지 않았단 말입니까? 조정의 명령이 내려진 지 이미 7, 8일이나 되었는데, 지방관이 즉시 거행하지 않아서 사면령에 의하여 깨끗이 면제되고 말았으니, 기강에 관계되는 일이므로 죄를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신임 감사에게만 죄를 주었으니 처벌이 공평하지 못합니다. 형조 판서 오정위도 함께 잡아다가 문초하소서. 또 수령 가운데 이미 임지에 도착하였는데도 도신(道臣)에게 알리지 않아 그가 온 것을 모르게 한 자가 있습니다. 이 역시 도신으로 하여금 적발하여 아뢰게 하여 죄를 다스릴 수 있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고 단지 수령을 적발하여 아뢰는 일만 따랐다.
3월 20일 병인
맹주서(孟胄瑞)를 승지로, 김우형(金宇亨)을 경기 관찰사로, 이흥발(李興浡)을 사간으로, 민종도를 헌납으로, 장응일(張應一)을 공조 참의로, 윤심을 부수찬으로 삼고, 예조 판서 정지화에게는 숭정 대부를 가자(加資)하고, 도승지 장선징에게는 자헌 대부를 가자하였다.
영의정 허적이 차자를 올려 사직하였는데 상이 너그럽게 답하고 사관을 보내 전유(傳諭)하였다.
3월 21일 정묘
영의정 허적이 첫번째 사직서를 제출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을 내렸다.
3월 23일 기사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지금 도류(徒流) 이하를 모두 사면하는 날을 당해, 널리 죄과를 씻어주는 법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다. 두 전조에서 세초(歲抄)할 때, 사면 받은 자들도 아울러 서용하도록 하라."
3월 25일 신미
헌납 민종도가 아뢰기를,
"조사기의 상소 가운데 예를 논한 한 가지 일은, 이미 법으로 제정해 중외에 반포하여 영구히 준행할 터전을 삼아 앞으로 분분해지는 폐단을 막게 하였으니, 성상의 생각이 심원하고 나라의 금법이 엄합니다. 그런데 사기가 감히 다시 이 문제를 제기하여 전혀 꺼리는 바가 없는가 하면 심지어는 지체를 깎아내리고 상기를 줄였다고 말하였으니, 그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가 지은 죄를 따져보면 실로 멀리 유배보내야 합니다. 멀리 유배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3월 27일 계유
좌상 정치화가 소를 올려 사직하니, 상이 너그럽게 답하고 사관을 보내 전유하였다.
충주의 선비 한치상(韓致相) 등이 상소하여, 우참찬 이자(李耔), 교리 이연경(李延慶), 참판 김세필(金世弼), 영의정 노수신(盧守愼)을 함께 제향하는 서원에 편액을 하사해달라고 청하니, 소를 예조에 내렸다. 예조가 회계하기를,
"서원을 창건하여 한 당(堂)에다 함께 제사지낸 지 지금 60년이나 되었으니, 존모하여 제사지낸 것이 이미 오래되었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금령(禁令)이 내린 뒤에 신설한 것과는 다르니, 선비들의 바람에 따라 편액을 하사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3월 29일 을해
경술년과 신해년 두 해의 기근은 옛날을 통틀어봐도 없었던 것인데다 신해년부터 올봄까지 돌림병이 크게 번져 2월 이후로 굶주림과 병으로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었다. 함경도가 7백여 명, 황해도가 4백 70여 명, 평안도가 4백여 명, 전라도가 4백 30여 명, 경기가 3백여 명, 충청도가 2백 60여 명, 경상도가 5백여 명, 원양도가 1백여 명이었다. 이때 상평청과 진휼청에서 진휼할 죽을 쑤는 곳을 나누어 설치하여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였는데, 조석으로 와서 먹는 자가 많을 때는 4천 3백여 명이었고 적을 때는 2천여 명이었다. 외방의 백성들은 먹을 곳이 없자 서로 모여 도둑질을 하였는데 명화적(明火賊)처럼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는 도적이 곳곳에서 생겨났다. 그런데 민간의 저축이 이미 고갈되어 그들이 훔쳐 봤자 겨우 한 되나 한 말 밖에 안 되었으므로 길에서 장사꾼을 만나면 서로 앞을 다투어 죽이고 빼앗는데 호남과 영남 사이가 더욱 그들의 소굴이었다. 충청도 청주 등의 고을에서는 반 달 동안에 무려 열네 군데에서 인명이 살상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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