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20권, 현종 13년 1672년 4월

싸라리리 2025. 12. 17.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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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병자

조수익(趙壽益)을 예조 참판으로, 조이병(趙爾炳)을 정언으로, 조위봉(趙威鳳)을 부수찬으로, 홍주삼(洪柱三)을 승지로 삼았다.

 

팔도에서 창고를 열어 백성을 진휼하였다. 경상도에 굶주린 백성이 3십 3만이었는데 여러 도 중에서 가장 많았다.

 

4월 2일 정축

대사헌 이민적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듣건대, 경술년 조의 받아들이지 못한 전세를 받아들이라는 명이 있었다 합니다. 두 해의 세금을 한꺼번에 받아 들이는 것은 비록 풍년이 든 해라 하더라도 마련해내기 어려운 것입니다. 백성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져 사방으로 떠나는가 하면 심지어는 세금을 받아들이는 색리(色吏)가 차관(差官) 앞에서 자결하고 있으니, 여기에서도 백성의 실정이 절대로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미 받아들인 것 이외에 그 나머지는 특별히 면제하라고 명하신다면, 남은 백성들을 보전할 수 있고 은혜를 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미 받아들인 것은 서울로 실어오고,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독촉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병판 민정중, 대사헌 이민적, 장령 조원기 등이 뵙기를 청하니 상이 인견하였다. 민적이 나아가 아뢰기를,
"살인한 죄는 그 법이 매우 무겁기 때문에 신들이 유호(柳濠)에 대해 이미 여러날 논열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윤허를 받지 못하니 신은 의혹스럽습니다. 유호가 살 수 있었던 것은 대개 군관(軍官)이기 때문이었으나, 전부터 매를 쳐서 사람을 죽였으니 이는 살인한 자 가운데에서도 더욱 흉악한 자입니다. 유호를 전처럼 그대로 정배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따르지 않는 것은 살인한 죄가 가볍기 때문이 아니다. 같은 죄를 짓고도 정배된 자가 있고 석방된 자도 있으며 지금 벼슬하는 자도 있다. 그러니, 널리 사면하는 이때 오직 유호에게만 법을 적용한다면, 매우 공평하지 않기 때문에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민적이 아뢰기를,
"법은 지극히 엄한 것이므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봉령(李鳳齡)도 전에 사람을 죽이지 않았는가?"
하니, 정중이 아뢰기를,
"봉령이 일찍이 평안 감사의 군관으로 있으면서 체통에 관계된 일로 사람을 매질하였는데, 그로 인해 병들어 죽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봉령은 지금 어떤 관직에 있는가?"
하니, 정중이 아뢰기를,
"지금 훈련 부정(訓鍊副正)으로 있습니다."
하였다. 민적이 아뢰기를,
"정중이 한 일이 잘못되었습니다. 사람을 죽여 죄를 받은 사람을 높은 관직에 임명하기까지 하였으니, 자못 신중히 인재를 간택하는 뜻이 없습니다. 봉령도 그 직임에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정중은 추고하고, 봉령은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중은 추고하고, 봉령은 체차하라."
하였다. 지평 정유악이 아뢰기를,
"지난 번에 좌상을 만나 유호의 일에 대해 언급한 일이 있었는데, 그가 말하기를 ‘곤장을 아홉 차례 치자 즉시 죽고 말았으니 그 실정이 매우 놀랍다.’ 하였습니다."
하니, 장령 조원기가 아뢰기를,
"유악이 감히 대신의 집에서 이야기한 말을 상에게 아뢰었으니, 대간의 체통을 손상하였고 또 뒷날의 폐단에 관계됩니다.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3일 무인

강화도의 곡물 3천 9백여 석과 해서(海西)의 관향곡 6천 석을 경기도와 황해도 가운데 재해를 입은 고을로 수송해서 나누어 주어 파종하도록 명하였다. 헌부의 계사에 따른 것이다.

 

해서의 곡물 1만 4천 석과 진휼청의 곡물 6천 석을 제주에 보내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게 하였다.

 

병판 민정중이 뵙기를 청하니 상이 인견하였다. 정중이 아뢰기를,
"강화도의 곡식을 경기 백성들에게 종자용으로 나누어 주고, 또 해서의 관향곡과 둔곡(屯穀)을 경기로 옮겨다 백성들에게 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승지 맹주서가 아뢰기를,
"사신의 명을 받고 나갔다가 이역(異域)에서 죽으면, 으레 추증하는 법이 있습니다. 서장관(書狀官) 정적(鄭樍)이 외국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뜻밖에 병들어 죽었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추증하라고 하였다.

 

4월 4일 기묘

영의정이 일곱 번째 사직서를 올렸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인피하고 들어간 지 이미 반 달이 지났으므로 병이 나았을 만도 한데 급히 사직을 청해 마지않고 있으니, 어찌 내 뜻을 이다지도 이해하지 못한단 말인가. 좌상이 이번에 또 인피하고 들어갔다. 지금의 국가 형세로 세 정승의 자리가 한꺼번에 비어버렸으니 장차 어찌한단 말인가? 경이 만약 이를 생각해 보았다면, 반드시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조정에 나올 것이다. 어찌 여러 말을 할 것이 있겠는가. 모름지기 내 뜻을 체득하여 다시는 굳이 사양하지 말고, 속히 나와 치도(治道)를 논하여 조정과 재야의 바람에 부응하라."
하고, 사관을 보내 전유하였다.

 

좌의정 정치화가 병으로 차자를 올려 면직을 청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나의 지극한 뜻을 체득하여 다시는 고사하지 말고, 나의 갈망에 부응하라."
하고, 사관을 보내 전유하였다.

 

동래의 한 백성이 왜관의 왜인에게 베를 꾸어서 쓰고는 오랫동안 갚지 않았는데, 하루는 왜인이 몰래 와서 꾸어간 베를 급히 조르자, 그 사람이 왜인을 죽였다. 일이 발각되어 그를 효수하였다. 나라의 기강이 점차 무너지고 방금(防禁)이 날로 해이해져서 변방의 백성들이 왜인과 교통(交通)하는 것을 예삿일로 여기고, 변방을 지키는 자도 적임자가 아니어서 엄하게 금하지 못해, 모욕을 당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진실로 가슴 아픈 일이다.

 

4월 5일 경진

이우정을 지평으로, 여성제를 대사간으로, 김만균(金萬均)을 승지로, 박세당(朴世堂)을 부응교로, 이여발(李汝發)을 우윤으로 삼았다.

 

원양도의 강릉·삼척 등 네 고을에 산불이 크게 나서 불타버린 민가가, 1천 9백여 호이고, 강릉 우계(羽溪)의 창고 곡물과 군기(軍器) 등의 물건이 한꺼번에 다 타버렸으며, 불에 타 죽은 사람이 65명이었다. 네 고을의 백성들이 기근을 겪은 뒤에 또 이 화재를 당해 울부짖는 소리가 하늘에 닿았다. 도신이 이를 아뢰니, 상이 영서(嶺西)의 곡식 1천 석을 옮겨 구제하라고 명하였다.

 

4월 6일 신사

상이 중완혈(中脘穴)과 전중혈(膻中穴)에 뜸을 떴다.

 

4월 8일 계미

대사헌 이민적 등이 아뢰기를,
"무릇 세초(歲抄)의 규정은 비록 평년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그 해 안에 감정(勘定)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는 뜻하는 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근자에 들으니, 지방에서 조정의 뜻을 따르지 않고 혹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기 위해 여름철이 이미 다가왔는데도 괄정(括丁)017)  하느라 바쁘다고 합니다. 백성을 구휼하는 일이 한창 급하고 농사철이 점차 다가오고 있으니, 이때가 어느 때입니까. 그런데 백성을 어린아이처럼 보호하시는 성상의 뜻을 어기고 멋대로 법도에 없는 일을 자행하여, 백성을 곤궁하게 한단 말입니까? 청컨대 해당 도의 감사·수사·병사 및 군대를 주관하는 각 아문으로 하여금 일체 금지하도록 하고, 그 가운데 특히 심한 수령들은 적발하여 아뢰게 한 다음 죄를 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11일 병술

신해년 봄과 여름 사이에 떠돌아 다니다 죽은 시체가 길에 즐비하였는데, 진휼청에서 수레로 그 시체를 실어다가 동서 근교와 목멱산(木覔山) 바깥 기슭에 매장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서울과 가까운 곳에 매장해서는 안 된다는 의론이 있었으므로 한성부로 하여금 10리 밖으로 옮겨 매장하도록 하였는데, 그 숫자가 3천 6백여 구였다.

 

4월 13일 무자

전라도의 제주(濟州)·정의(旌義)·대정(大靜) 등 세 고을에 기근이 들었는데, 호남의 쌀을 옮겨다 구제하였다.

 

4월 14일 기축

경기도 양주(楊州) 등의 고을에 나흘 밤을 연이어 서리가 내렸다.

 

대사헌 이민적이 거둥할 때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면직되었다.

 

4월 17일 임진

이경억(李慶億)을 대사헌으로, 민종도를 사간으로, 윤진(尹搢)을 헌납으로 삼았다.

 

장령 조원기(趙遠期)와 이수만(李壽曼)이 아뢰기를,
"부수찬 신후재(申厚載)는 지난번에 사신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고 하여 하옥되기까지 하였습니다. 당초 사세가 비록 자유롭지 못하기는 했으나, 모욕을 당하고 국가에 치욕을 끼친 죄는 실로 면하기 어렵습니다. 비록 널리 죄를 용서해주는 은전으로 인해 서용되었습니다만 곧바로 경연관의 자리에 두니 여론이 분분하여 모두 너무나 빠르다고들 합니다. 그래서 신들이 그를 논박하여 체직시키고자 했는데, 동료들의 의견이 불가하다고 고집하였습니다. 이는 모두가 신들의 말이 신뢰받지 못한 데서 초래된 것입니다. 체직해 주소서."
하고, 물러가 기다렸다. 처치하여 모두 체차하였다.

 

호군(護軍) 송준길(宋浚吉)이 상소하기를,
"신이 지난 겨울에 들었는데 전하께서 윤경교(尹敬敎)의 일로 인해 지나치게 노하시어 언성이 너무나 매서웠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그 사이에 잘못된 명령과 전도된 일이 붓으로 이루 다 형용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형세(形勢)018)  가 있는 곳으로 온 조정이 휩쓸려, 끝내는 전하로 하여금 천고에 없었던 은례(恩例)를 내리게 하여, 그로 하여금 든든하게 기반을 잡고 뭇 관료의 윗자리에 도로 앉게 하였습니다. 총애하는 정승의 입장을 위하신 것은 지극하다고 하겠습니다만, 성상께서 먼 후세에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비난과 비웃음을 남기게 되었으니 어찌한단 말입니까? 지금 경교의 일에 대해 성상의 분부가 분노의 마음에서 나와 옳지 못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흉칙 교활하다느니 금수(禽獸)와 같다느니 귀신의 심보라느니 붕당과 동류를 끌어들인다는 등의 하교는 모두 신하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입니다. 진실로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빨리 명확한 분부를 내리시되 그 말들을 모두 표를 붙이거나 붓으로 삭제하여 뉘우친다는 뜻을 통쾌하게 보이신 다음 경교를 소환하여 다시 헌직(憲職)에 두어 곧은 기개를 표창하소서.
당 덕종(唐德宗)이 이필(李泌)에게 말하기를 ‘사람들은 노기(盧杞)가 간사하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런지 모르겠다.’ 하니, 이필이 대답하기를 ‘이것이 바로 간사한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덕종이 간사한 아첨에 미혹된 것은 후세 군주들의 귀감이 될 만합니다. 그리고 이필이 대답한 말은 어쩌면 그리도 적절하고 의미가 있단 말입니까. 아, 지금 전하께서는 모르시는 정도가 아니니 통곡을 해도 부족합니다. 신이 일찍이 탑전(榻前)에서 ‘그림자를 통해서 형체를 살피고 사전에 경계할 바를 알아야 한다.’는 말씀을 올리면서 ‘성명께서 시비 사정(是非邪正)의 차이를 만약 정밀하게 살피고 분명하게 구별하지 못하시면, 후일의 근심을 어떻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만, 전하께서는 아직 기억하시고 계십니까? 신의 이 말 때문에 여러 사람의 노여움이 불꽃같이 일어나 신의 몸을 보존하지 못할 뻔하였습니다. 그러나 옛사람의 말에 ‘신의 말대로 되지 않은 것은 나라의 복이다.’ 하였는데, 지금 신의 말처럼 점차로 되어가는 것 같으니, 진실로 국가의 복이 아닙니다. 어찌 크게 두렵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소를 올렸으나, 비답이 없었다.
사신은 논한다. 이른바 총애하는 신하란 영의정 허적을 지적한 것이다. 바야흐로 그의 재주와 명망이 상에게 중시되었는데, 이 상소가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는 곧 성밖으로 나갔다. 이어 고향의 집으로 돌아갔다.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14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역사-고사(故事)


[註 018] 형세(形勢) : 세력, 허적을 가르킴.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이른바 총애하는 신하란 영의정 허적을 지적한 것이다. 바야흐로 그의 재주와 명망이 상에게 중시되었는데, 이 상소가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는 곧 성밖으로 나갔다. 이어 고향의 집으로 돌아갔다.
○護軍宋浚吉上疏曰:
臣於前冬, 聞以尹敬敎之事, 殿下怒太暴聲太厲, 其間命令之失當, 擧措之顚錯, 有不可以筆札形言。 形勢所在, 擧朝風靡, 終使殿下, 施之以千古所無之恩例, 俾彼委蛇盤礴, 還坐於百僚之首。 其爲倖相地, 則至矣。 其於聖明, 大貽千萬古千萬人譏且笑, 何哉? 今於敬敎之事, 聖敎之發於忿懥, 不得其正者, 非止一二, 其兇狡禽獸鬼心, 呼朋引類等敎, 皆臣子之所不忍聞。 誠願殿下, 亟下明旨, 悉皆付標爻去, 快示悔悟之意, 召還敬敎, 復置憲職, 以旌直氣。 唐 德宗謂李泌曰: ‘人言盧杞奸邪, 朕則不知。’ 泌對曰: ‘此所以爲奸邪也。’ 德宗邪媚之惑, 可爲後主之鑑戒。 而泌之所對, 何其切中而有味耶? 噫! 今殿下, 不但不知而已, 可爲痛哭之不足也。 臣曾於榻前, 以由影而察形, 先事而知戒, 獻言, 以爲: ‘聖明, 於是非邪正之間, 若不能精察而明辨, 日後之憂, 何可勝言?’ 云者。 不省天聰, 尙有以識之否也? 緣臣此言, 衆怒如火, 臣身幾不能保。 然古人有言曰: ‘臣言之不效, 國之福也。’ 今臣所言, 漸似有效, 誠非國家之福。 豈不大可懼哉?                                    疏上, 不報。  【史臣曰: "所謂倖臣, 指領議政許積也。 方以才望, 爲上所重, 聞此疏之入, 卽出城外, 仍還鄕庄。"】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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疏上, 不報。
【史臣曰: "所謂倖臣, 指領議政許積也。 方以才望, 爲上所重, 聞此疏之入, 卽出城外, 仍還鄕庄。"】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14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역사-고사(故事)

 

4월 19일 갑오

정언 정재희(鄭載禧)가, 지평 이우정이 동료들을 처치할 때 시비를 가리지 않고 모두 체차하자고 청한 것은 대간의 체통이 아니라고 탄핵하면서 체차하자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

 

황해도 평산(平山) 등 다섯 고을에 서리가 내리고, 경기도 음죽(陰竹) 등 세 고을에는 우박이 내렸다.

 

4월 20일 을미

상이 승지 홍주삼(洪柱三)을 영의정 허적에게 보내 유시하였다.
"아, 국사가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러 이미 믿을 만한 형세가 없게 되었다. 그런데 세도(世道)가 크게 변하고 공도(公道)가 날로 사라짐에 따라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위해 힘쓰는 자는 없고, 당파를 두호하고 자기들과 다른 자를 배척하지 못할까 걱정하는 자만 있어, 경으로 하여금 그 지위에 편안히 있지 못하게 하니, 내 매우 통탄스럽다. 경을 내쫓고자 한다면 트집잡을 말이 없을까 걱정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대신이 교외(郊外)로 나가 있는 것은 실로 이보다 큰일이 없으니 경은 사체를 손상해서는 안 된다. 속히 돌아와 조용히 일처리를 하는 것이 불가하지 않으니, 모름지기 내 뜻을 체득하여 빨리 들어오도록 하라."

 

4월 21일 병신

홍주삼이 돌아와 아뢰니, 상이 주삼으로 하여금 다시 속히 들어오라는 뜻을 전유하게 하였다.

 

4월 22일 정유

승지 이연년(李延年)·홍주삼·원만리(元萬里)가 아뢰기를,
"영의정 허적에게 전유한 글 가운데 ‘자기와 다른 사람을 배척한다.’는 말씀이 있는데, 이는 비록 대신을 위안하기 위한 뜻에서 하신 말씀입니다만, 유신(儒臣)019)  을 예우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부족함이 있는 듯하기에 황공하게도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를 견제하기 위해 감히 ‘자기와 다른 자를 배척한다.’고 한 말을 가지고 다투니, 매우 놀랍다."
하였다. 정원이 상의 엄한 비답을 받았다는 이유로 대죄하니, 상이 대죄하지 말라고 하였다.

 

여성제를 승지로, 정재희·어진익(魚震翼)을 장령으로, 정유악을 지평으로, 홍주국(洪柱國)을 부응교로, 홍만용(洪萬容)을 대사간으로, 조사석(趙師錫)을 정언으로 삼았다.

 

경상도 태백산(太白山)과 문수산(文殊山)에 눈이 내렸다.

 

4월 23일 무술

상이 승지 원만리를 영상 허적에게 보내 전유하기를,
"죄명(罪名)을 억지로 뒤집어 씌우는 것은 일반 관료에게도 할 수 없는 일인데, 하물며 대신이겠는가. 경이 더욱 굳이 사양한 채 아직까지도 들어오지 않고 있으니, 너무 지나치지 않는가? 서둘러 들어와 내 뜻에 부응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부제학 김만기 등이 ‘자기와 다른 자를 배척한다.’는 하교를 유신(儒臣)에게 내리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차자를 올려 간쟁하였는데, 상이 차자의 말을 알았다고 하였다.

 

4월 25일 경자

상이 승지 이연년을 영의정 허적에게 보내서 들어오라는 뜻을 전유하였다.

 

충청도 공산(公山) 등 세 고을에 서리가 내리고, 청주 등 열네 고을에 우박이 내렸다.

 

4월 26일 신축

지평 정유악이 아뢰기를,
"종친부(宗親府)의 아룀에 따라, 특명으로 금리(禁吏)에게 엄한 형벌을 가하고 궁노(宮奴)는 석방하도록 하셨습니다. 신은 진실로 성상의 마음이 친한 이를 친하게 대하는 뜻에서 하신 일로 알고 있습니다만, 공주가(公主家)에서 올린 글에 이른바 ‘금리가 내당(內堂)에 함부로 들어왔다.’는 것은 인근에서 본 사람들의 증언를 참조해 보면, 아예 그런 사실이 없었습니다. 궁노들은 권세를 믿고 금리들은 법을 고수하다보면 한때 싸움이 벌어짐은 형세상 필연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허실(虛實)을 따져보지도 않은 채 내당에 함부로 들어갔다는 죄로 단정하여, 끝내 엄한 형벌을 주라고 특별히 명하셨으니, 국가의 법이 이 일로 인해 무너지고 사체도 몹시 손상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청컨대 금리에게 엄한 형벌을 주라는 명을 도로 거두시고 이어 공주가의 궁노를 가두어 금령을 거듭 밝히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여러날 논계하였으나, 끝내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그 뒤에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이 상소를 올려 유악을 극력 배척하니, 유악이 인피하여 면직되었다. 장령 정재희가 ‘종친이 대신(臺臣)을 배척하여 사체를 손상시키고, 또 사실이 아닌 말로 여러번 성상을 번거롭게 하여 마치 고자질하는 자와 같았다.’ 하여 추고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여러 번 엄한 비답을 내리고 끝내 따르지 않았다.

 

4월 27일 임인

개성부에 우박이 내렸다.

 

개성부에 우박이 내렸다.

 

개성부에 우박이 내렸다.

 

지평 오정창(吳挺昌)이 상소하기를,
"유신(儒臣)의 상소가 한번 나오자 대신(大臣)의 죄명이 지극히 무겁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드디어는 성상의 생각이 어지럽게 얽히고 여러 신하들은 놀라 의혹하며 조정의 분위기는 삭막하게 되었으니, 이는 진실로 이상한 일입니다. ‘상신(相臣)의 도량과 지식이 한 시대의 여망에 맞지 않고, 계획과 시행이 당세의 요구에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말한다면, 반드시 후한 말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고 상신 자신도 변명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유신이 의견을 아뢸 때는 중도에 맞아야 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안이 가벼우면 그 허물을 들어 바로잡고 무거우면 그 악(惡)을 하나하나 들어 배척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곧바로 귀신과 같은 간사한 사람이라고 뒤집어 씌웠으니, 정말 사람을 너무나 각박하게 논하였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인심을 복종시킬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그 사람에 비겨보아 끝내 비슷한 점이 없다면, 마음속에 의아심을 안 가질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먼저 마음을 맑게 가져 치우침이 없이 살펴보셔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그 상소를 재상에게 내려 물으시되 송 인종(宋仁宗)이 이부(二府)를 불러 문언박(文彦博)에 대해 의논하게 한 고사020)  처럼 하신다면,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어떠한지를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유신이 일찍부터 그가 간사한 인물임을 알아채기를 과연 곽자의(郭子儀)가 노기(盧杞)를 상대한 것021)  처럼 하였고, 상소 가운데 조목별로 나열한 것이 노기와 같은 간신임을 밝힌데다가 측근의 신하와 나라 사람들도 모두 노기라고 말한다면, 정말로 노기인 것입니다. 전하께서 비록 아무리 곡진히 두호해서 온전하게 해주고 싶어도 안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공론이 저절로 정해져 대신이 어디에 머물러야 할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니, 전하께서 어찌 한 마디 말과 한 마디 엄한 언성으로 시비를 결정하시겠습니까?
이렇게 하시지 않고 한갓 언성만 엄하게 하시다가 이에 ‘자기와 다른 자를 배척한다.’라는 말로 필승의 힘을 겨루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억지로 유입(流入)이라는 하교를 내려 끝내는 대신이 견제를 당해 방황하고 있다고 돌려버렸습니다. 그리하여 대성인의 정대(正大)한 거조를 상실해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상의 마음이 어떠한지 엿보게 하였습니다. 임금과 신하 사이는 심복(心腹)처럼 막힘이 없이 따르건 안 따르건 간에 서로 진지하게 토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가부(可否)에 대해서는 그 사람에게 말해 주지 않고 격분한 하교를 다른 사람에게 내리시니, 이 또한 진언(進言)한 자가 전하에게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전하의 앞뒤 처분이 이와 같이 잘못되었는데도 일찍이 전하를 치우침이 없는 공평한 지경으로 인도하는 자가 없으니, 오늘날 거리낌이 사람을 병들게 하는 것이 심하다고 하겠습니다. 일을 말한 자는 재야의 선비이고 배척을 받은 자는 대신입니다. 온 조정의 신하가 유신을 그르다 하면 시론(時論)에 죄를 얻고, 대신을 그르다 하면 상에게 노여움을 산다는 것만 알기 때문에 승정원에서 이견을 아뢸 적에나 경연에서 견해를 아뢸 때에 전혀 이 일에 대한 시비를 들어 임금을 분명히 깨우치는 자는 없고, 어진이를 대우하는 예(禮)로 말을 떠벌리면서 겨우 ‘자기와 다른 자를 배척한다.’는 몇 마디 말에 대해서만 간쟁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전하 혼자서만 신경을 써 병을 조섭하시는 데 불편하게 하고 있으니 전하의 측근에 과연 충고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임금이 존중하고 사방에서 우러러보는 사람으로서 대신과 유신보다 더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시비가 결정되지 않고 죄명(罪名)이 분명하지 않으면, 장차 들뜬 의논을 진정시켜 한 시대의 모범이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신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마음을 공평하게 갖고 일에 임해 통쾌하게 결정을 내려 망설이지 말고 시비를 가리소서. 그러면, 이 일을 처리하기에 아직도 늦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소가 들어갔으나, 비답이 없었다.
○持平吳挺昌上疏曰:
儒臣之章奏一發, 相臣之罪名至重。 遂致聖慮紛糾, 群下驚疑, 朝廷之上, 風色索然, 是誠咄咄怪事也。 相臣之器度識量, 匪稱於一時之具瞻, 謀猷施設, 未厭於當世之所責, 以此爲言, 未必不厚, 而相臣亦無辭矣。 儒臣進言, 貴適其中。 輕則擧其過, 而規之, 重則數其惡, 而斥之可也。 一朝直加之以鬼色之奸, 論人誠太薄。 而亦何以服人心乎? 殿下聞其言擬其人, 而終不髣髴乎, 則能不疑訝於宸衷乎? 殿下先宜澄澈天鑑, 燭照無偏。 下其章詢于宰輔, 如宋 仁宗召二府, 議文彦博故事, 則衆論可見矣。 儒臣之宿昔辨奸, 果如郭子儀之待杞, 疏中條列, 明其爲杞, 而左右, 國人皆曰, 杞則是眞杞矣。 殿下雖欲曲護, 而全安之, 不可得矣。 不然則公議自定, 而大臣知稅駕之所矣, 殿下何嘗發一辭厲一聲, 而定其是非也哉? 不此之爲, 徒事於聲色之末, 乃以伐異之說, 角必勝之力而不得, 則强爲流入之敎, 終歸於索制周徨。 頓失大聖人正大之擧措, 使群下窺覷其淺深矣。 君臣之際, 心腹無阻, 從違之間, 貴相兪咈。 而可否之辭, 不及其人, 慍激之敎, 反施於他, 亦非進言者之所望於殿下也。 殿下前後處分, 乖誤若此, 而曾無導殿下於平蕩無偏之地者, 甚矣, 今日忌禁之痼人也。 言事者山林也, 被斥者大臣也。 擧朝之臣, 徒知非儒臣, 則得罪於時論, 大臣則觸怒於上, 故喉司覆逆, 經幄進奏, 全無擧玆事是非, 明曉君上, 而虛張於待賢之禮, 所爭者伐異數字。 獨使殿下激惱, 不怡於靜攝之中, 殿下左右, 可謂有忠告之人乎? 人君之所尊重, 四方之所瞻視, 宜莫如大臣與儒臣。 而於此焉, 是非不定, 罪名不明, 則將無以鎭定其浮議, 而範式於一世矣。 臣願殿下, 宅心平正, 臨事夬決, 祛違依而辨是非。 則句當此事, 猶未晩也。                                    疏入, 不報。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29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15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역사-고사(故事)

 

4월 28일 계묘

정륜(鄭錀)을 승지로, 이민적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승지 여성제가 돌아와 보고하니, 상이 또 그를 영의정 허적에게 보내 전유하였다.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속히 들어와 나의 갈망에 부응하라."

 

영의정 허적이 상소하기를,
"신이 그릇 정승의 직임을 맡은 이래로 9년 동안 사람들의 비난과 배척을 받은 것이 앞뒤로 한두 번이 아닙니다만, 지난 겨울 윤경교의 상소에 이르러 극도에 달했습니다. 신이 비록 어리석고 완고하지만, 역시 이 몸이 결코 금세에 용납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향리로 돌아가고픈 뜻이 어찌 강남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제비만큼만 되겠습니까마는, 단지 그때 정승의 자리가 텅 비고 조정에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신의 불안한 형편을 헤아려 주시지 않고 매일 측근의 신하를 보내 교서를 선유(宣諭)하신 것이 수십 일이 지나도록 그치지 않았고, 끝내는 천고에도 없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신이 이에 어쩔 줄을 몰라 일신의 염치나 훗날의 곤경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얼굴을 들고 조정에 나갔는데, 이는 대개 성상의 은혜를 갚고 잠시 동료 정승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려고 한 것입니다. 어진이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술을 마셨노라고 옛 사람이 말하였는데 머뭇거리다가 도로 정승의 자리에 앉으려는 것이 어찌 신의 본심이겠습니까.
신이 물러나게 해달라고 청한 지 이미 한 달이 넘었으나 상께서 요청을 들어주지 않으시므로 신이 바야흐로 정황이 군색하여 몸둘 곳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재야의 신하가 신이 든든하게 기반을 잡고 떠나지 않는 것을 지나치게 염려하다가 소를 올려 있는 힘을 다해 신을 공격하면서 심지어는 신을 만세의 간사하고 흉측한 자에게다 비하였습니다. 신이 정신없이 곤두박질하여 밤에 도성 밖으로 나왔습니다만, 신의 죄명(罪名)이 극히 무거워서 국법(國法)으로 볼 때 용서받기 어려웠으므로 공손히 처벌을 기다린 지 열흘 가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기에 부득불 천지 부모의 앞에서 부르짖게 되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시험삼아 살펴주소서.
아, 나라를 그르친 소인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마는, 흉악하기 짝이 없는 자로는 노기와 같이 심한 자가 없었습니다. 그 임금의 성질이 편벽하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여우처럼 홀리는 방법을 써서 총애를 받고, 그 임금이 재물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면 백성을 수탈하여 욕구를 채워줍니다. 그렇게 하고서는 임금의 권력을 훔쳐 농락하고 화복(禍福)의 권한을 키워 당류를 심으며, 자기와 다른 자를 배척하고 충량(忠良)한 사람을 해쳐 위세를 세우며, 장사(將士)들의 노여움을 불러일으켜 재앙의 씨앗을 길러서 끝내 봉천성(奉天城)이 포위되고 양주(梁州)로 파천하게 한 것이 모두 노기의 짓입니다.
신이 사기를 읽을 때면 책을 덮고 팔뚝을 휘두르며 덕종(德宗)이 그의 죄를 다스리지 못한 것을 매우 한스러워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지금 신이 정사를 하면서 과연 이와 유사한 일이 있었습니까? 간가(間架)의 세금022)  과 파천(播遷)의 변023)  은 물론 성조(聖朝)에서 걱정할 바가 아닙니다만, 임기응변의 말과 꿀처럼 비위를 맞추는 행실로 어깨를 추스르고 아첨하는 짓은 신이 실로 부끄럽게 여기는 바이며, 분노를 감추고 유감을 풀어 선류(善類)를 중상하는 것은 신이 전부터 매우 미워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한 시대를 농락하고 조정의 권세를 쥐고서 잇속을 주는 자는 반드시 상을 받게 하고 취향이 다른 자는 반드시 화를 받게 하다가 드디어는 서리와 이슬을 머금고 토해내어 그 형세가 임금을 뒤흔들어 천하의 백성으로 하여금 감히 말하거나 감히 성내지 못하게 한 것이 바로 노기의 가장 큰 죄입니다. 신은 그와 성격이 서로 크게 다를 뿐만 아니라, 형세 역시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흰머리가 된 나이에 이르렀는데 이러한 짓을 늦게 배워서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아, 사특과 정직을 분변하기 어렵다는 것은 진실로 그 사람의 말과 같습니다만, 세 조정의 명철하심으로도 이미 신의 사특함을 살피지 못하셨고 보면, 신이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것 역시 괴이하게 여길 것조차도 없습니다. 유신이 사전에 경계했다는 것이 과연 어느 때였으며, 그의 몸을 거의 보존하지 못할 뻔했다는 것 또한 과연 어떤 일이었습니까? 신이 혼자 기억하기로는, 유신이 김징(金澄)을 신구하던 날 심지어 사특과 정직이라는 말을 꺼내기에 신이 묵묵히 있을 수 없어서 대략 그 비교한 말이 걸맞지 않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가 말하기를 ‘시비(是非)라고 써야 할 것인데 사정(邪正)이라고 잘못 썼다.’ 하고는 실언한 것을 사과하였는데, 성상께서도 필시 식별하셨을 줄로 사료됩니다. 그런데 한때 가부(可否)를 논한 말이 굴러서 오늘날 사(邪)를 분변하는 증거가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신이 지금의 우의정 송시열(宋時烈)과 같이 선왕의 명을 받았는데 그 역시 알고 있는 바입니다. 오늘의 신이 바로 어제의 신인데, 사특과 정직의 논의가 지금 처음으로 나왔으니, 어쩌면 신의 죄상을 교묘하게 얽으려는 자가 사람들로 하여금 귀를 기울이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보잘것없는 신으로 인하여 성상의 덕이 도리어 어둡고 용렬한 덕종보다 못하게 되어버렸고, 지금 또 천고에도 볼 수 없는 은혜를 베푸셨으니, 만고의 모든 사람들에게 비웃음거리를 남기는 것이 어찌 지난날의 그 정도에 그치고 말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빨리 신을 형관에게 회부하여 나라의 법을 바로잡고 나라 사람들에게 사례함으로써 나라의 복을 구하고 신하로서 당파를 심어 나라를 그르치는 자의 경계로 삼으소서. 그러면 그지없이 다행이겠습니다.
신은 또 처벌을 기다리는 것 외에 또 스스로 슬퍼하는 바가 있습니다. 신이 일찍이 한밤중에 일어나 앉아 벼개를 어루만지며 슬퍼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악을 미워하는 마음은 본성에 뿌리박힌 것이므로 늙도록 쇠하지 않을 것으로 여겼는데, 어찌 오늘날 스스로 악에 빠질 줄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지금 신에게 죄주려고 하는 자가 만약 ‘위복(威福)의 권한이 위에 있지 않으니, 임금의 가까운 위치에 있으면서 세월이나 보내고 일찍이 진언한 적도 없다. 이를 죄주어야 한다.’고 한다면 비록 죽음을 당한다 해도 신 역시 스스로를 변명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다시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신이 지위에 있으면서 말하지 않은 죄까지 아울러 다스려 그 태만한 것을 드러내소서."
하였다. 상이 승지 정륜을 보내어 전유하기를,
"아, 오늘날 국사가 어떠한 때라고 하겠는가? 백성들은 굶주려 죽어가고 있다. 비록 구휼하고 있지마는 나라의 곡식이 이미 바닥이 났으므로 장래의 근심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이런 때를 만나 세 정승이 힘을 다한다 해도 극복해내지 못할까 염려되는데, 더구나 오늘날 정승의 자리가 텅 빈데다가 세도(世道)와 인심(人心)은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고, 조정에는 당론(黨論)만 분분하여, 사사로운 일보다 공적인 일을 먼저 돌보는 사람이 없으니 진실로 매우 한스럽다.
다만 생각건대, 경에게는 노기와 같은 죄악이 없고 나는 덕종과 같은 문답이 없는데, 경은 왜 그리도 지나치게 죄를 청한단 말인가? 죄를 지었다고 쓴 데 있어서는 더욱 과격하였다. 내 마음이 불안하니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 경은 모름지기 내 뜻을 체득하여 빨리 들어와 나의 지극한 바람에 부응하라."
하였다. 허적의 상소 가운데 스스로 직명을 깎아내리고 죄를 지은 신하라고 썼기 때문에 상의 분부가 이와 같았다.
○領議政許積上疏曰:
臣謬當鼎軸以來, 九年間, 被人詆斥, 前後非一, 而至於前冬尹敬敎之疏而極矣。 臣雖愚頑, 亦知此身之決不容於此世。 賦歸之志, 奚特歸燕之詠, 而只緣其時鼎席一空, 朝家有事。 聖明不諒臣(扤捏)〔杌隉〕        之形迹, 日遣近侍, 宣諭宸翰者, 過十數日而不止, 終施之以千古所無之恩例。 臣於是乎, 不知死所, 身上廉隅, 日後顚沛, 有不暇恤者, 抗顔造朝, 蓋欲以塞聖恩, 而少待僚相之還也。 避賢銜杯, 昔人所云, 委蛇還坐, 豈臣本心然哉? 臣之乞退, 已月餘日矣, 而聖明不允所請, 臣方情窮勢蹙, 置身無地。 猝聞在野之臣, 過慮臣盤礴不去, 上章攻臣, 不遺餘力, 而至擬臣於萬代之奸兇。 臣蒼黃顚倒, 夜出國門, 而念臣罪名至重, 國法難貸, 恭竢鈇鉞, 且近十日, 而迄未有聞, 玆不得不疾號於天地父母之前。 伏願聖明, 試垂察焉。 噫! 誤國小人, 何代無之, 窮兇極惡, 未有如盧杞之甚者也。 知其君之性僻, 則逞狐綏而取媚, 知其君之好貨, 則剝蒼生而中慾。 竊弄神柄, 廣張禍福, 以樹黨, 排擯異己, 戕害忠良, 以立威, 激怒將士, 釀成禍胎, 終使城圍奉天, 駕幸梁州者, 皆杞也。 臣於靑史中, 未嘗不掩卷扼腕, 痛恨德宗之不能正其罪也。 今臣爲政, 其果有近於此者耶? 間架之稅, 播越之變, 固非聖朝之所宜憂, 而〔卮〕          言蠟行, 脅肩諂笑, 臣實羞其爲矣, 藏怒逞憾, 中傷善類, 臣曾嫉之甚矣。 至於籠絡一世, 把握朝權, 啗利者必受賞, 異趣者必受禍, 遂至呼吸霜露, 勢撼人主, 使天下之民, 不敢言而敢怒者, 乃杞之極罪。 臣則不但性相遠也, 亦勢不能爾。 到今白首之年, 其可晩學而能之乎? 噫! 邪正之難辨, 果若人言, 以三朝則哲之明, 旣不能察臣之邪, 則臣之不自悟, 亦無足怪者。 儒臣先事之戒, 果在何時, 而其身之幾不能保, 亦何事耶? 臣獨記儒臣伸救金澄之日, 至發邪正之說, 臣不能含默, 略言其比擬不倫, 則乃曰: "是非二字, 誤下以邪正。’ 仍謝其失言, 仰惟聖聰, 亦必識別矣。 不料一時可否之言, 轉成今日卞邪之證也。 臣與今右議政宋時烈, 同受先王之命, 亦其所知也。 今日之臣, 卽前日之臣也, 而邪正之論, 始發於今, 無乃有巧織臣罪狀者, 使人信聽耶? 緣臣無狀, 致令聖明之德, 反有歉於昏庸之德宗, 今又施之以千古所無之恩例, 其所以貽譏笑於千萬古千萬人者, 又豈特前日而已哉? 伏乞亟下, 臣司敗, 以正邦刑, 以謝國人, 以求國家之福, 以爲人臣樹黨誤國者戒。 不勝幸甚。 臣於竢譴之外, 又有所自悼於心者。 臣嘗中夜起坐, 撫枕竊悲者, 蓋亦久矣。 然而疾惡之心, 爲是性之所根, 自謂老而不衰, 豈意今者, 自陷於惡耶? 今之罪臣者, 苟以威福之權, 不在於上, 而身居近君之位, 維縶度日, 曾不進言。 此可罪也云爾, 則雖伏斧鑕, 臣亦無辭自解。 更乞聖明, 竝治臣在位不言之罪, 以彰其慢。            上遣承旨鄭錀諭之曰: "嗚呼! 今日國事, 可謂何〔樣〕        時乎? 赤子饑饉死亡。 雖有賑政, 國穀已盡, 將來之憂, 有不可言。 當此之時, 三公戮力盡悴, 猶恐其不及, 況今日鼎席一空, 而世道人心, 無一可恃, 朝廷之上, 黨論紛挐, 無先公後私之人心, 誠痛恨也。 第念卿無盧杞之罪惡, 予無德宗之問答, 卿之請罪, 何乃太過? 至於書以負罪, 尤爲過激。 予心不安, 更勿復言。 卿其須體予意, 從速入來, 以副至望。" 積疏中自貶其職名, 書以負罪臣, 故聖敎如此。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15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사법-치안(治安) /

 

원양도 원주 등의 고을에 서리가 내리고 정선(旌善) 등의 고을에 눈이 내렸다.함경도 문천군(文川郡)에 서리가 내리고, 삼수(三水)·갑산(甲山) 두 고을에는 눈이 거의 반 자나 내렸으며, 길주(吉州) 등 여섯 고을에는 서리가 내렸다.

 

4월 29일 갑진

부산의 왜인 차사와 그의 수행 왜인들이 오랫동안 작은 집에 거처하다 보니 답답함을 견딜 수 없다고 하면서 때때로 구역을 벗어나는가 하면 심지어는 동래 향교와 온천 및 냇가와 야외 등 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 소통사(小通事)들이 옷을 잡아당기면서 만류하면, 결박하거나 환도(環刀)로 때리면서 막지 못하게 하였다. 하루는 왜관의 왜인 14명이 온천에 가서 목욕을 하고는 앞에 있는 언덕에 올라가 감동창(甘同倉)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통사가 따라가 막자 막대기를 휘둘러 쫓아버리고 강변을 배회하며 두루 구경한 뒤에 돌아갔다. 이른바 감동창이란 곧 양산(梁山) 땅이다. 이는 전에 없었던 일이다.

 

4월 30일 을사

영의정 허적이 충주(忠州)로 돌아갔다. 상이 승지 이연년을 뒤쫓아보내, 영원히 떠나려는 뜻을 속히 돌이켜 병중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라는 등의 하교로 전유하게 하였다.

 

영의정 허적이 상소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 줄 것을 청하고, 이어 명부(命符)를 봉해 돌려보냈다. 상이 또 승지 여성제를 보내 전유하였다.
"내 뜻은 저번의 비답에서 이미 유시하였다. 경은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오지 않겠는가? 경이 마음에 불안하게 여겨 반드시 향리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은 직책이 몸에 있기 때문이므로 내 경의 지극한 뜻을 체득하여 지금 잠시 애써 경의 뜻을 따라주겠으니, 경도 나의 지극한 뜻을 헤아려 영원히 가버리려는 뜻을 속히 바꾸라. 지금 애써 따라주는 것은 사체로 따져볼 때 매우 불가한 일이지만, 실로 경의 처지를 위해서 하는 것이다. 경이 어떻게 생각하지 않고 서둘러서 떠나갈 수 있겠는가? 아, 맹자(孟子)는 성인에 버금가는 분인데다가 또 부를 수 없는 신하인데도 사흘을 묵고 주(晝) 땅을 떠났다024)   경이 만약 이를 생각해 보았다면 내 말을 듣지 않고도 스스로 깨달았을 것이다. 경의 마음에는 시원하겠지만 사리에 있어서 어떠한가? 더구나 내 병이 나날이 더욱 심해지는데, 경은 또 어찌하여 결단코 버리고 떠난단 말인가? 내 뜻이 다하고 말도 다했으니, 경은 내 뜻을 헤아려 마음을 가라앉혀 대죄하지 말고, 빨리 생각을 돌려 돌아와 나의 갈망에 부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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