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20권, 현종 13년 1672년 5월

싸라리리 2025. 12. 17.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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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병오

승지 여성제가 돌아와서 아뢰기를,
"영의정 허적이 말하기를 ‘한밤중에 측근의 신하가 말을 달려 객사로 찾아와서 성상의 비답을 전해주시니, 신의 직책 체차를 허락하여 더러운 이름이 조정의 사판에서 삭제되게 되었습니다. 이는 모두가 성상께서 극진하게 보살펴주신 지극한 뜻입니다. 그 감사하고 다행스러움이 어찌 신의 마음만 조금 편안하고 말 뿐이겠습니까. 신의 죄명을 돌아보건대 이미 천지 사이에서 용납받기 어려웠으므로 감히 도성 안에 태연히 있지 못한 것이지 실로 직명의 유무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신이 이제 영원히 물러나면서 만 가지 생각이 모두 사라졌습니다만,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이 마음 속에 맺혀서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은 다만 상의 건강이 좋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대궐이 점차 멀어지자 한 걸음을 뗄 때마다 한 번씩 돌아보았는데, 오늘 나날이 쇠약해진다는 하교를 받았으니, 신의 마음이 더욱 어떠하겠습니까? 그렇지만 부득불 떠나는 것은 진실로 어쩔 수 없기 때문입니다. 땅에 엎드려 감읍할 뿐 아뢸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다시 여성제를 보내 전유하기를,
"어제 측근의 신하를 보내 놓고 경이 반드시 나의 뜻을 이해할 것으로 여기어 새벽까지 기다렸다. 그런데 이제 부득불 떠나야겠다고 하니, 나의 섭섭한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오늘의 일은 사체를 돌아보지 않고 단지 경의 처지만을 위해서 한 것인데, 경이 이를 이해해주지 않으니 어찌 내가 바라는 바이겠는가. 대개 경의 이번 일이 어쩔 수 없어서 하였다는 것을 내 어찌 모르겠는가. 그렇지만 내가 경이 물러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나 경이 꼭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은 그 뜻이 실로 다름이 없다. 그러니 경은 이 점을 생각하여 영원히 떠나려는 뜻을 빨리 돌이키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모름지기 이 뜻을 체득해 속히 돌아와 나의 지극한 뜻에 부응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지평 정유악과 장령 정재희가, 종친의 반열에 있는 사람이 상소로 배척했다는 이유로 피혐하고 물러가 기다렸다. 정언 조사석이 처치하여 모두 출사하게 하자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

 

5월 2일 정미

이지익(李之翼)을 승지로, 이수만(李壽曼)을 장령으로, 이상진(李尙眞)을 예조 참판으로 삼았다.

 

지평 정유악이 패초를 받고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으로 인피하여 면직되었다.

 

좌상 정치화가 차자를 올려 면직을 청하고 이판 김수항과 대사헌 이경억이 소를 올려 사직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예조 참판 이민적, 문학 조원기가 상소하여, 금리(禁吏)가 군주(郡主)의 집에서 소란을 피웠다는 일은 사실이 아니라고 변명하고, 종친의 반열에 있는 사람이 군주의 하인 말만 편파적로 믿고 사실대로 아뢰지 않았다고 공격 배척하였다. 그리고는 자신들의 허물을 열거하고 체직을 청하였는데,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답하였다.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 역시 상소하여 금리가 소란을 피운 실상을 아뢰고, 이어 그때 헌부의 관리들이 금리들만 편파적으로 두둔했다고 배척하면서 임금을 속인 죄를 받겠다고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은 잘못한 것이 없다. 이기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을 혐의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하였다. 민적과 원기가 그때의 헌관이다.

 

5월 3일 무신

경기의 수원 등 열 고을에 우박이 내렸다.

 

장령 이수만도 금리의 일로 인피하였는데, 처치하여 출사하게 하였다.

 

5월 4일 기유

강원도 고성군(高城郡)에 눈이 내리고, 양구현(楊口縣)에는 서리가 왔으며, 홍천현(洪川縣)에는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꿩알만하였으며, 삼척(三陟) 등 고을에서 굶어죽은 사람이 13명이었다.

 

5월 5일 경술

허적을 행 판중추부사로, 최후상(崔後尙)을 지평으로 삼았다.

 

대사헌 이경억이 추감(推勘)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대사간 이민적은 금리의 일이 났을 때 패초를 받고도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모두 면직되었다.

 

장령 이수만과 정재희가 아뢰기를,
"송준길(宋浚吉)이 세 조정의 은혜를 받고 남달리 알아주심에 감격하다가 마침 구언(求言)하는 교지를 받아 정성을 다해 글을 올려 저촉되는 것을 돌아보지 않은 채 현임 재상을 지척하였습니다. 이는 실로 시국을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성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쫓아내려 한다고 의심하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배척한다고 지척하시는 등, 전후의 비답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거북스러웠으니 이게 바로 간사한 자의 심보를 열어 인도하고 참소하는 자의 말을 부르는 것입니다.
지평 오정창이 성상의 뜻을 엿보다가 틈을 타 상소를 올렸는데, 그 말이 교묘하고 그 뜻이 간사하여 밖으로는 화평한 척하면서 속에는 덫을 감추어, 감히 ‘의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는 등의 말로 시비를 현혹하려 하였고, 또 ‘견제되어 방황한다.’는 말로 상의 마음을 격동시키려고 꾀하였습니다. 그리고 ‘머뭇거리지 말라.’는 말에 있어서는 기회를 틈타 화를 전가하려는 작태를 숨기기가 어렵고 ‘이 일을 결론짓는 것이 아직도 늦지 않았다.’는 말로 끝을 맺었으니, 모르겠습니다만 어떻게 처리되어야 바야흐로 그의 마음에 시원하단 말입니까?
또 유신(儒臣)과 상신(相臣)의 일을 들어 은연히 그 속에 끼워넣었으니, 그의 마음씀이 음흉하고 교활하다는 것을 더욱더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깊이 미워하여 통렬히 끊어버리지 않는다면, 소장(消長)의 기미가 매우 두렵습니다. 인심이 놀라고 통분하며 공론이 지극히 엄하니, 삭출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비록 참소하는 말을 부른다고 하지만, 나는 그것이 옳은 줄 모르겠다."
하였다.

 

정언 조사석이 아뢰기를,
"오정창의 상소는 의도가 바르지 않아 논설(論說)이 간사하고 장황하게 기교를 부려 반복해서 현란케 만드는 작태를 엄폐할 수 없었는데, 사람의 말이 이런 지경에 이를 줄을 정말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유신의 시국을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글은 실로 임금을 섬길 때 숨김이 없어야 한다는 충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정창이 사사로운 생각에 끌리어 공격을 하고 싶은데도 트집잡을 만한 말을 찾지 못하자, 유신이 정승의 과오를 들어 아뢰지 않았다는 것으로 죄를 삼았고, 또 승정원이 복역(覆逆)할 적에나 경연에서 아뢸 때에 임금을 밝게 깨우쳐드리지 못한 것을 그르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그의 뜻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해와 달 같은 상의 총명을 속일 수 없고, 우레와 같은 노여움을 격발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 것입니다. 밖으로는 화평한 체하면서 안으로 기회를 엿보는 마음을 품고서 스스로 종이에 가득히 쓴 농간의 뜻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할 줄로 생각했겠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진짜 형태가 모두 드러나고 말았으니, 그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를 누가 모르겠습니까.
일에 대해 말하는 규례는 그 방법이 한 가지가 아닙니다. 어떻게 꼭 낱낱이 열거해야만 되겠습니까. 가령 전에 산림(山林)의 유신이 올린 소에 조목별로 나열해 진술하기를 정창의 말과 같이 하였다면, 정창이 끝내 그 사이에서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겠습니까? 옳고 그름을 정말로 이미 알았다면, 대각에 있는 신분으로 무엇이 꺼릴 게 있어 통렬히 분변하지 않은 채 묘당(廟堂)에 물어서 시비를 결정하라고 말하면서 도리어 다른 사람이 성상을 분명히 깨닫게 하지 못했다고 책망한단 말입니까. 공론을 끼고서 속에 숨긴 생각을 마음대로 부려 국시(國是)를 전도시키고 성상을 의혹시킨 죄를 통렬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삭출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논의가 나는 온당한 것인지 모르겠다."
하였다. 양사가 이 문제를 가지고 서로 논란한 지 반 년이 되었으나 끝내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5월 6일 신해

정태화(鄭太和)를 영의정으로, 여성제를 대사간으로, 장선징을 대사헌으로, 이은상(李殷相)을 도승지로 삼았다.

 

5월 7일 임자

상이 뜸을 떴다. 도승지 이은상이 아뢰기를,
"우의정 송시열이 올린 소와 옥당이 올린 차자를 오래도록 내리시지 않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좌상 정치화(鄭致和)가 차자를 올려 면직해 달라고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이는 그의 형 태화가 수상에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평안도 덕천군(德川郡)에 눈이 내렸다. 운산(雲山) 등의 고을에는 주먹만한 우박이 내려, 땅에 거의 한 자 가량 쌓였는데, 하루가 지나도 녹지 않았다.

 

상이 뜸을 떴다.

 

5월 10일 을묘

정치화를 행 판중추부사로, 이훤(李藼)을 헌납으로 삼았다.

 

영상 정태화가 차자를 올려 면직해 주라고 청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고 사관을 보내 전유하였다.

 

5월 11일 병진

집의 이상(李翔)이 소를 올려, 송준길을 극진히 찬양하면서 심지어는 ‘이치를 밝히고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닦는 것은 그가 일생동안 공부한 길이니, 그의 밝음은 간사한 사람을 꿰뚫어 볼 수 있고 그의 말은 믿을 만하다.’고 하였으며, 허적에 대해서는 극도로 비방하면서 심지어는 ‘경박하게 날뛰어 본래 좋은 인사가 아니고, 임기 응변이 능란한 간사스러운 자이다.’고 말하고, 또 역적 왕망(王莽)과 역적 김자점(金自點)을 인용하여 비유하였는데, 소가 들어갔으나 비답이 없었다.
삼가 살피건대, 이상은 본래 용렬한 무리로 두 송씨가 키워준 은혜를 입어 헌부의 아장(亞長) 직임을 맡고 있었다. 준길을 두호하여 하늘 높이 추켜 올리고 허적을 비방하여 땅속 깊이 밀어넣었다. 아, 당시의 의론에 휩쓸리고 기세에 겁을 먹은 자들은 너나없이 이러하였으니, 저 비루한 자야 책할 것이 있겠는가.
○丙辰/執義李翔上疏, 於宋浚吉, 極其贊揚, 至曰, "明理誠正, 是其一生, 功程, 明足以燭奸, 言足以取信" 云, 於許積, 極其醜詆, 至曰, "輕佻跳踉, 元非吉士, 機辨巧黠, 自是憸人", 又引賊莾逆點以況之, 疏入, 不報。
【謹按翔也, 本以庸闒之流, 被兩宋豢養之恩, 忝憲府亞長之任。 扶護浚吉, 躋之於九天之上, 醜詆積, 擠之於九地之下。 噫! 承望時議, 畏憚氣勢者, 無不如此, 惟彼鄙夫, 何足誅哉?】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33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17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5월 12일 정사

대사간 여성제, 정언 조이병(趙爾炳)·조사석(趙師錫)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경연을 열고, 각 아문의 둔전(屯田)과 모든 궁가(宮家)의 면세 및 산택(山澤)의 입안(立案)을 폐지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송준길의 상소는 실로 임금을 섬길 때 숨김이 없어야 한다는 정성에서 나온 것인데, 현저하게 실정에 벗어난 배척을 보이셨습니다. 진실로 바라건대 상의 비답을 도로 거두어 전후의 미안한 하교를 삭제하시고, 빨리 상소에 대한 비답을 내려 돌보아 대우하고 계신 뜻을 보이소서."
하니, 상이 알았다고 답하였다.
○丁巳/大司諫呂聖齊、正言趙爾炳ㆍ趙師錫上箚, 其略曰:
請開經筵, 罷各衙門屯田, 諸宮家免稅, 及山澤立案, 且曰, 宋浚吉封章, 實出無隱之忱, 而顯示情外之斥。 誠願繳還聖批, 抹改前後未安之敎, 亟下疏批, 以示眷遇之意。                                    上答以知道。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33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17면
【분류】왕실-경연(經筵) / 농업-전제(田制) / 재정-전세(田稅)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5월 14일 기미

전라도 곡성(谷城)·광양(光陽) 등 10여 고을이 우박의 피해를 입었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집의 이상을 지금 우선 체차하라."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 및 삼사를 인견하였다. 예조 판서 정지화(鄭知和)가 아뢰기를,
"왕세자의 가례(嘉禮)에 따른 별시(別試)의 규정을 오늘 여쭈어 결정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가례에 따른 별시는 이미 6백 관시(六百館試)로 설행하자고 결정했는데, 또 한 경사를 합한다면, 강경(講經)을 제외시키는 것이 편리할 듯합니다. 그리고 지금 널리 인재를 뽑는다 하더라도, 상께서 인원수를 정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문과는 그때에 가서 숫자를 정하고, 무과는 1천 명을 뽑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지화가 아뢰기를,
"별시는 애초에 초장(初場)에서 논(論)과 부(賦)를 보이라고 명하셨는데, 이제 만약 널리 인재를 뽑는다면 부(賦)와 표(表)로 바꾸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또 강경을 제외하고 널리 뽑으라고 명하였다. 부제학 김만기가 오정창의 상소 문제를 제기하여 몹시 배척하고는 성상의 비답이 온당치 않은 것은 어진 인사를 예우하는 뜻이 아니라고 하고, 이상을 특별히 체차한 것은 대신(臺臣)을 우대하는 도리에 어긋난다고 하면서 누누이 진달하였으나, 상이 끝내 답하지 않았다. 대간도 이상을 특별히 체차한 것은 온당치 않다고 하면서 그 명을 환수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5월 15일 경신

민시중(閔蓍重)·민종도(閔宗道)를 승지로, 이흥발(李興浡)을 사간으로, 유상운(柳尙運)을 지평으로 삼았다.

 

5월 16일 신유

송시열을 좌의정으로, 김수항을 우의정으로, 이경억을 이조 판서로, 이동직(李東稷)을 승지로, 이당규(李堂揆)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평안도 양덕현(陽德縣)에서 까마귀가 흰 새끼를 깠다.

 

5월 19일 갑자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이상이 산림의 선비에게 몸을 의탁해 오직 당론(黨論)만 일삼고 있다. 조정에서 유신(儒臣)을 후하게 대우하느냐 박하게 대우하느냐는 문제에 있어서는 자연 공론이 있는 것인데, 이상이 기회를 틈타 올린 상소는 말의 뜻이 간교하고 망령되어 반드시 해를 입히고야 말려고 하였으니, 진실로 놀랍고 분하다. 아, 자신이 초야에 있으면서 논리를 공평하게 세운 다음에야 사람들의 마음을 복종시키고 당시의 인군에게 중시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상소 가운데 인용한 역적 김자점의 말이나 왕망의 설은 음험하기 이를 데 없으니, 이는 정대한 사람의 태도가 아니다. 더구나 지금 동서(東西) 당파의 병폐가 나날이 깊어져 나라가 나라 꼴이 아닌 지경에 이르렀는데 주자(朱子)의 말을 빌려 ‘오직 당인(黨人)이 많지 않을까 걱정한다.’고 하였으니 끝내 어떤 지경에 이르겠는가? 아, 이상이 선비의 이름을 지니고서 그의 분수를 지키지 않고 세로(世路)에 분주하여 오직 따라가지 못할까 염려하고 있으니, 그의 태도와 처신은 길가는 사람들도 알 것이다. 이상을 삭탈 관직하라."
하니, 승지 민시중이 하교를 다시 아뢰면서 이상을 삭탈 관직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어줄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5월 20일 을축

대사간 여성제, 헌납 이헌, 정언 조이병이 아뢰기를,
"이상이 산림의 선비로 언론의 직책에 있으면서 자신의 몸을 잊고 말씀을 올렸는데, 갑자기 크게 노하시어 죄안을 만들어 언론자들을 견제하려고 하셨으니, 예우하는 도리에 어긋나고 성상의 덕에 큰 누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돌이킬 수 없는 실언을 하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언로(言路)가 이로부터 영영 막히고 사기(士氣)가 이로부터 영영 좌절될 것이니, 삭탈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사헌 장선징(張善瀓), 장령 정재희(鄭載禧), 지평 유상운(柳尙運)이 아뢰기를,
"이상은 산림의 선비로 두 조정의 은혜를 받은 데다가 언관의 직책에 있었기 때문에 마음에 정성이 복받쳐 그의 말이 질박하고 숨김이 없었으니, 모두가 충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지나치게 노하시어 실정에 벗어난 분부로 지척하실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체차하시더니 이제 또 관작을 삭탈하시니 갈수록 더욱 엄하십니다. 한 번은 ‘말 뜻이 교묘하고 망령되다.’ 하시더니, 한 번은 ‘반드시 모함하여 해치려 한다.’ 하시니, 신들은 해와 달같이 총명하신 상에게 유감이 있습니다. 역적 김자점과 적신 왕망의 설에 있어서는 문장이 완곡하지 못하고 글의 비유가 좀 덜 들어맞습니다만, 이는 실로 초야(草野)의 선비들이 거리낌없이 하는 말입니다.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세속의 교활한 자의 태도가 있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그가 음험하고 바르지 않다 하시니, 어찌 전하의 헤아리지 않으심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신들이 크게 두려워하고 크게 걱정하는 것은 일개 이상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만에 하나 상께서 판단을 잘못내려 국시(國是)가 정해지지 않는다면 소장(消長)의 기미와 치란(治亂)의 판가름이 여기에 매여있기 때문입니다. 관직을 삭탈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양사가 한 해가 다하도록 논집하였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이상의 죄는 결코 관작을 삭탈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오늘의 처벌 역시 줄여준 것인데, 이제 헌부의 계사를 보니, 앞장 서서 구해주되 갖은 방법을 다 썼다. 비록 당론(黨論)이 급하다고 하더라도 어찌 국사(國事)를 생각하지 않는단 말인가. 조목에 따라 변명하면서도 음험한 끝맺음 말에 대해서는 분변하지 아니하고 이상의 비유가 좀 덜 들어맞았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상의 상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아, 대신을 역적에다 비유한 것을 초야의 선비가 거리낌없이 말하는 태도라 하고, 또 충심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였으니, 그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정말로 모르겠다. 사적인 일을 먼저 하고 공적인 일을 뒤로 제치면서 국가의 법을 돌아보지 않는 작태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대사헌 장선징, 장령 정재희, 지평 유상운은 우선 모두 체차하라. 요즈음 이 일은 윤경교(尹敬敎)한테서 발단이 되었고 장우(張禹)가 말한 헛된 칭찬이라는 등의 말까지 전후로 이어지고 있으니, 당을 굳게 결속하여 사람을 해치려고 꾀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런데도 경교의 벌이 이에 비해 너무 가벼웠기 때문에 그의 나쁜 짓을 징계하지 못한 것이다. 그 죄를 더욱 엄하게 다스리지 않을 수 없으니, 경교를 갑산(甲山)에 안치하라."
하였다. 도승지 이은상, 우승지 이지익, 좌부승지 이동직(李東稷), 우부승지 민시중(閔蓍重), 동부승지 민종도가 비망기를 두 차례에 걸쳐 봉환(封還)하면서 다른 견해를 아뢰었는데, 그 말이 매우 간절하였다. 그리고 선징 이하와 경교를 안치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라고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두 차례 세 차례까지 아뢰었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5월 21일 병인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진시에 계하(啓下)한 일을 오시에야 비로소 천천히 입계하였으니, 그 태만함이 진실로 매우 놀랍다. 낭청은 잡아다 문초하여 처리하라. 정원도 마땅히 서둘러야 하는데 마치 관망하는 자처럼 한 번도 언급하지 않으니, 매우 해괴하다. 해당 승지를 먼저 파직한 다음 추고하라."
하였다. 해당 승지는 민시중이다. 정원이 장선징 등과 윤경교의 일로 세 번 다른 견해를 아뢰었으나 허락받지 못하자, 오늘에서야 비로소 전지(傳旨)를 봉행하였다. 그런데 금부(禁府)가 유배지를 즉시 아뢰어 결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대사간 여성제, 헌납 이헌, 정언 조이병 등이, 헌부의 여러 관원을 특별히 체직한 일과 윤경교를 안치한 일 그리고 해당 승지를 파면하고 추고한 일을 가지고 힘써 간쟁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옥당이 차자를 올리고 헌부의 신하들이 이어서 일어나 한 달 남짓 논집하였으나, 끝내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진사 윤징주(尹徵周) 등이 소를 올려 허적을 공박 배척하고 송준길을 찬양하였다. 소가 들어갔으나, 비답이 없었다.

 

5월 23일 무진

우의정 김수항이 상소하여 면직해 달라고 청하니 상이 너그러이 답하기를,
"지금 세상에 재주와 덕망이 높은 사람을 찾아볼 때 경 말고 누가 있겠는가?"
하고, 체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5월 26일 신미

좌의정 송시열이 소를 올려 면직해 줄 것을 청하고, 또 봉록(俸祿)을 사양하였는데, 상이 너그러이 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5월 29일 갑술

헌납 이헌, 정언 조이병, 대사간 여성제가 여러 번 엄한 비답을 받은 데다가 패초를 받고도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모두 체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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