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20권, 현종 13년 1672년 6월

싸라리리 2025. 12. 17.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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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을해

이때 전염병이 또 치열해져 팔도에서 사망한 인민이 무려 3천여 명이나 되었다.

 

6월 2일 병자

함경도 길주(吉州)의 시비(寺婢) 막례(莫禮)가 그의 남편이 죽은 사흘 만에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고 감사가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에 상이 호역(戶役)을 면제해 주라고 명하였다.

 

원임 관찰사 정언황(丁彦璜)이 죽었다.
사신은 논한다. 언황은 기국과 도량이 엄정하고 재능과 지식이 뛰어났다. 일찍 과거에 급제하여 화려한 관직을 역임하였고 사류들의 추앙을 받았다. 중년에는 원주(原州)에 물러가 살았는데, 여러 번 승지를 제수하였으나 병을 핑계로 오지 않았다. 이때에 와서 죽으니 선류(善類)들이 아까워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35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18면
【분류】역사-사학(史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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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언황은 기국과 도량이 엄정하고 재능과 지식이 뛰어났다. 일찍 과거에 급제하여 화려한 관직을 역임하였고 사류들의 추앙을 받았다. 중년에는 원주(原州)에 물러가 살았는데, 여러 번 승지를 제수하였으나 병을 핑계로 오지 않았다. 이때에 와서 죽으니 선류(善類)들이 아까워하였다.
○原任觀察使丁彦璜卒。
【史臣曰: "彦璜器度峻整, 才識過人。 早登科第, 歷敭華貫, 爲士類所推許。 中年退居原州, 累除承旨, 引疾不至。 至是卒, 善類惜之。"】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35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18면
【분류】역사-사학(史學)

 

6월 3일 정축

조원기(趙遠期)를 헌납으로, 강백년(姜栢年)을 대사간으로, 이유(李濡)·홍만종(洪萬鍾)을 정언으로 삼았다. 우의정 김수항(金壽恒)은 그대로 양관(兩館)025)  의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6월 4일 무인

수찬 이훤(李藼)이 소장을 올려 사직하면서 아뢰기를,
"삼가 요사이 일을 살펴보건대, 전하께서는 언로를 막는 것이 대신을 위안하는 길이라고 여기시는데 너무나 생각해보지 않으신 것입니다. 옛말에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냇물을 막는 것보다 지나친 일이다고 하였습니다. 백성의 입도 막아서는 안 되는데 더구나 간쟁하는 신하의 입을 다물게 할 수 있겠습니까. 요즘 관직을 삭탈하는 벌이 시골에 물러가 있는 선비에게까지 미쳤고, 다른 일로 노한 분풀이로 이미 죄준 신하에게 더 죄를 주었으니 이는 혼란한 세상에서도 드물게 있는 일입니다. 전하의 허물이 이보다 더 클 수가 없는데도 한 마디의 도움도 없이 자신의 영화만 취한다는 것은 신의 본래 뜻이 아닙니다."
하였다. 소장을 아뢰었으나 답하지 않았다.
○戊寅/修撰李藼上疏辭職, 仍曰:
竊觀近日殿下, 以杜絶言路, 爲慰安大臣之地, 不思之甚也。 古語曰: "防民之口, 甚於防川。" 凡民之口, 猶不可防, 況諍臣之喙, 其可膠乎? 今者削奪之罰, 及於林下之士, 移怒之擧, 加於已罪之臣, 此乃昏亂世之所罕有也。 殿下之過, 莫大於此, 而一言無補, 徒取身榮, 非臣之素志也。                                    疏奏, 不報。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35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18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정론-간쟁(諫諍)

 

대사간 강백년(姜栢年)도 소장을 올려 견책당한 여러 신료들을 구원하였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경기 사람 구문찬(具文粲)이 소장을 올렸는데 그 대략에,
"좨주(祭酒) 송준길(宋浚吉)이 성상의 교지에 응하여 진언하였는데 성명께서 이처럼 심히 박대하실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성상의 말씀이 한 번 전파되자 모든 사람들이 놀랐으며, 심지어는 성상의 뜻을 엿보는 무리들로 하여금 때를 틈타 간사한 꾀를 부리고 한마디 진언하여 가만히 성상의 뜻을 시험해 보게 하였습니다. 이는 실로 남곤(南袞)·심정(沈貞)이 어진이를 모함하였던 계책과 같은 것이었으니 하늘은 무엇 때문에 이런 자들을 생기게 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저들이 스스로를 변명한 소장은 올바른 사람의 태도는 결코 아니니 그들이 한을 풀려는 것이 또한 참혹합니다."
하였다. 소장이 들어갔으나 안에 두고 내리지 않았다. 어리석고 무식한 사람도 당시의 의논을 주워모아 말할 줄을 알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웃었다.
○京畿人具文粲上疏, 其略曰:

 

6월 5일 기묘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들어와 아뢰기를,
"윤경교(尹敬敎)가 앞장서서 일을 했다는 말은 과연 망령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초에 이미 외방 고을에 좌천시켜 놓고는 지금에 와서 점점 더욱 심해져 위리 안치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신은 지나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교가 장우(張禹)를 끌여들여 말하기까지 하였으므로 매우 놀라웠다. 그러나 이는 단지 경교의 뜻에서 나왔을 것으로 여겨 외방에 좌천만 시켰었는데, 이 때문에 지금까지 시끄럽구나. 만약 그때 경교를 중히 다스렸더라면 필시 이같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다. 태화가 다시 명령을 도로 거두어야 한다는 뜻을 진달하였으나, 상이 대답하지 않았다.

 

6월 9일 계미

우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차자를 올려 문형(文衡)의 직임을 사양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 뒤 간절히 사양하니 마침내 허락하였다.

 

좌의정 송시열(宋時烈)이 소장을 올려 면직을 청하였다. 그 대략에,
"선유(先儒)들이, 곽공(郭公)026)  이 망한 이유를 논해 말하기를 ‘그는 선인을 좋아하였지마는 등용하지 못하였고 악인을 미워하였지마는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지난 겨울 윤경교가 대신을 비난하였다는 이유로 흉칙 교활하다고 배척하고 악인을 멀리해야 한다고 내쫓았으니 미워함이 지극하였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또 신의 소장 내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셨으니 이는 신이 악의 우두머리에 해당되고 윤경교는 위협에 못이겨 따른 죄에 해당된 것입니다. 이 때문에 요전 사헌부 신료의 소장에, ‘전하께서 이미 신과 윤경교는 표리(表裏)라고 하셔 놓고 도리어 신의 죄를 윤경교에게만 준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하였는데, 그 말이 정말 옳았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그 말에 대해 스스로 해명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들으니, 전하께서는 또 윤경교를 근래 사건의 장본인이라 하여 안치의 법률을 더하였다고 합니다. 윤경교가 참으로 장본인이라면 신은 장본인 중의 장본인이니 그 죄는 안치에 그칠 뿐만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신의 죄를 다스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새 직임의 임명까지 있었습니다. 왜 전하께서는 악을 미워하는 도리가 이같이 전도되었으며 몸소 곽공(郭公)의 전철을 따르려고 하신단 말입니까?
그리고 허적(許積)의 소장에 신과 함께 효종(孝宗)의 명을 받았다고 하였는데, 신이 옛날을 돌이켜 생각하면 눈물이 흐르는 것을 금할 수 없습니다. 아, 이는 참으로 그렇습니다. 지금 그날의 일들을 자세히 진달하고 싶지만 차마 말할 수 없는 바가 있는데다가 전하의 효심만 괴롭힐 것이므로 감히 말씀드리지 않습니다. 대체로 조정에 함께 있는 자는 형제의 도리가 있는 것이니 그 정의가 자연 가볍지 않은 사이인데 더구나 허적은 신에게 있어 사체로나 의리로나 헤아려 볼 때 다른 사람과는 각별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허적이 국사를 담당한 뒤로부터 시골 백성들이 세금의 독촉이 너무 심하다고 원망하면, 신은 나라 살림이 급하여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하였고, 그가 너무 상의 뜻에 순종한다고 비방하는 이가 있으면, 신은 또 온 조정의 사람들이 모두 그러한데 왜 허적만 나무라는가? 그리고 성상께서 본래 아첨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인도하였다면 이 사람의 허물만은 아니라고 하였고, 혹은 그가 너무 지나치게 독단적이다고 하면, 신은 또 백관을 쓰거나 안 쓰는 것은 대신의 직분이니 의당 그가 어떻게 쓰고 안 쓰는가를 살펴볼 따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허적을 꾸짖는 말을 들을 때마다 반드시 그 말을 막아 보호할 마음이 있었는데 이는 허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효종의 밝으심에 손상이 있을까 두려워한 것이며 또한 개인적인 의리를 돌아본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늘 내심에, 허적에게 충직하고 그가 남에게 실망되지 않기를 바라는 자는 신보다 더한 자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혹 신이 허적에게만 후하게 대하는 것을 병통으로 여겼지만 신은 끝내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작년에 와서 허적에게 대단한 실망을 받고서 신의 병통을 지적한 사람에게 할말이 없었습니다.
국가가 화란을 겪은 이래로 큰 윤리와 도리가 다 없어지지 않은 것은 두세 명의 훌륭한 신하가 죽음으로써 의리를 밝히고 효종께서 포장(褒奬)하신 은전이 죽은 자나 산 자에게 빛났기 때문인데, 온 동방의 인류들이 앞으로 천하 후세에 할 말이 있게 되었습니다. 신이 작년에 마침 이미 죽은 자의 문자를 찬수하는 일로 인해 무신년 11월 등대하였을 때의 이야기 내용을 보게 되었는데, 거기에 허적이 ‘두세 명의 신하라고 하는 자는 일 벌이기를 좋아하고 명예를 낚는 사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어찌하여 허적의 소견과 마음이 이와 같단 말입니까? 이는 천하의 사람을 이끌어 오랑캐와 금수의 지역으로 가고자 하는 것이니 그 화가 어찌 홍수나 맹수의 해독 정도로 끝나겠습니까. 다행히 성상의 학문이 고명하시어 그 말을 물리치고 환하게 밝히셨기 때문에 인류가 인류다운 구실을 할 수 있었으니 성명의 공로가 우(禹) 임금보다 못하지 않은 것입니다. 아, 허적이 효종의 밝으심을 손상시키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를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신이 비록 현저하게 배척하지는 못하였지만 항상 마음이 쓰라리고 슬프게 탄식하면서 거의 침식을 잊기까지 하였는데, 이게 어찌 허적 한 몸만을 위해서였겠습니까.
송준길(宋浚吉)의 소장에 있어서는 심지어 노기(盧杞)027)  를 들어 말하였는데, 그 주된 뜻을 살펴보면 허적을 꼭 노기에다 비교한 것이 아니라 전하께서 깨닫지 못하심이 그 당시와 같은 바가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비유한 것이 딱 들어맞지 않았으므로 사람들 역시 같지 않다고 의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허적의 소장이 한 번 나오자, 사람들의 말에는 더 이상 허적에 대하여 아까워함이 없어졌으나, 신은 더욱 허적을 위해 애석하게 여겼습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대체로 어진이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술을 마셨다는 말로 송준길을 이임보(李林甫)028)  에다 비유하였으면 이는 자신을 노기에 비유했던 말에 충분히 갚은 셈이 되니 마음에 쾌히 여길 만하고 또한 여기서 그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또 반드시 권세가 위에 있지 않다는 말로 성상의 마음을 의심하게 하고 노하게 하는 일대 관건으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예로부터 군자를 모함하는 소인들이 이것으로 말하지 않은 적이 있었습니까?
우리 나라로 말하면 중종 대왕께서 기묘(己卯)의 여러 신하들에게 대우가 융숭하였으며, 심지어는 김식(金湜)이 급제하자 유달리 기쁘다는 하교가 계셨습니다. 당시 소인들이 틈을 탈 사이가 없자 마침내 이 말을 만들어서 상의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비록 중종의 명철하심으로도 망극한 사람의 말에 동요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마침내 ‘간사함이 왕망(王莽)이나 동탁(董卓)과 같다.’는 하교를 내렸으며 한 시대의 신하들이 모두 죽음을 당했던 것입니다. 이 한 마디의 말은 사실 고금 소인들의 기화(奇貨)였는데 지금 다시 대신의 입에서 나온 것입니다. 만약 우연히 한때의 노기에 격동되어 말한 것이라면 그래도 해독은 없겠지만 만약 깊은 뜻이 없지 않다면 어찌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저 시골에 있으면서 거드름을 피우는 자나 연소한 대간(臺諫)들로서 과격한 것만 일삼아 고려함이 없는 자라고 한다면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허적은 세 조정을 거친 노련한 신하로 영의정이 된 몸이니 의당 국가를 위해 여러모로 깊이 걱정하고 멀리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한때의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방금 만리 밖에 두려운 이야기가 있는 것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을 함부로 하였으니 어찌 매우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당시 사신이 북경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청나라 황제가 ‘너희 나라는 왕이 약하고 신하는 강하다.’고 한 말이 있었다고 하였다.】  처음에 송준길이 한 말이 지나쳤다고 했던 자들이 지금 와서는 그 말이 과연 들어맞았다고 합니다만, 신은 허적에 대해서 일찍이 언급한 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미 효종 때의 일을 말하였기에, 신이 슬픈 마음을 누르지 못하고서 대략 한두 가지 사실을 진달하였는데 전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시끄러운 시비는 본디 신하들의 시비 득실이니 참으로 큰일은 아닙니다만, 오직 전하의 지나친 일이 날이 갈수록 심하여 정승이 있는 줄만 알고 종사와 국가가 있는 줄은 모르시니 어찌 매우 이상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소장을 주달한 지 한 달이 되도록 답하지 않았다.
○左相宋時烈, 上疏乞免。 其略曰:
先儒論郭公之亡而曰, 以其善善而不能用, 惡惡而不能去也。 殿下於去冬, 以尹敬敎之非議大臣, 而斥之以兇狡, 黜之以遠惡, 其惡之也, 可謂至矣。 然又以爲, 出於臣之疏意, 則是臣當爲之首惡, 而敬敎當從脅從之科矣。 以故頃日憲臣之疏, 以殿下旣以臣與敬敎爲表裏, 而乃以臣罪, 獨加於敬敎爲未安, 其言誠是。 而殿下, 無以自解於其言也。 今竊聞殿下, 又以敬敎爲近事之根本, 而加之以安置之律。 敬敎苟爲根本, 則臣又是根本之根本, 其罪不止於安置而已。 而殿下不惟不治臣罪, 而乃有新命之加。 是何殿下惡惡之道, 顚倒若是, 而躬駕以隨郭公之覆轍耶? 且許積疏本, 謂與臣同受聖考之命, 臣回思前昔, 不勝涕血之交下也。 噫! 此信然矣。 今欲詳陳伊日之事, 則誠有所不忍, 而足以疚殿下之孝思, 故不敢也。 夫同朝者, 固有兄弟之道, 則其情義, 已自有不輕者矣, 況積之於臣, 揆以事體義理, 又有自別於他人者。 故自積之擔當國事, 鄕里之民, 或怨於賦斂之亟病, 則臣以爲: "國計之急而然也。" 或謗其承順之已甚, 則臣又以爲: "擧朝皆然, 何獨詬積也?" 且聖明, 素以好諛之心而導之, 則非獨此臣之過也, 或謂其專輒之太過。 則臣又以爲: "進退百官, 大臣之職也, 當觀其所進退者, 何如而已。" 每聞罵積之言, 必有遮護之心, 蓋非爲積也, 恐傷聖考之明, 而亦自顧其私義也。 是以每自謂忠於積, 而深冀其不失望於人者, 無踰於臣矣。 以故人或病臣之偏厚於積, 而臣則終不能改也。 至於去年, 而有所大段失望於積, 而無以有辭於病臣者也。 國家自禍亂以來, 大倫大經, 所以不盡殄減者, 獨有二三賢臣, 以死明義, 而聖考褒奬之典, 煥爀幽明, 環東土秉彝之類, 庶將有辭於天下後世矣。 臣於去年, 適因纂修旣骨人文字, 得見戊申十一月登對時說話, 則積乃以二三臣者, 爲喜事釣名之人。 是何積之所見所存, 乃如是耶? 是欲率天下, 歸之夷狄禽獸之域矣, 其爲禍, 豈止於洪水、猛獸之害而已? 幸而聖學高明, 闢其說而辭之廓如, 故人類得爲人類, 而聖明之功, 不在禹下矣。 噫! 不料積之傷聖考之明, 至於此極也。 自是臣雖不敢顯然觝排, 而嘗衋然而傷, 慨然而歎, 幾於忘寢與食, 此豈爲積之一身而然哉? 至於宋浚吉之疏, 至擧盧杞爲言, 觀其主意, 不必以積比擬於杞也, 以殿下之不能覺悟, 有同於當世云爾。 然其所以擬之者, 不甚襯切, 則人亦疑其不倫矣。 至於積之疏一出, 則人言無復顧藉, 而臣益爲積深惜之也。 何也? 夫旣以銜杯避賢之語, 擬浚吉於李林甫, 則足以報盧杞之云者, 而可以快於心矣, 亦可以止矣。 而又必以權不在上之語, 以爲疑怒聖心之一大關捩。 自古小人, 欲陷君子者, 何嘗不以此爲言哉? 以本朝言之, 中宗大王, 於己卯諸臣, 恩遇極隆, 至於金湜之及第, 有別有喜之之敎。 其時小人, 無間可乘, 遂爲此言, 以撼搖上心。 雖以中廟之明聖, 不能不動於罔極之人言, 遂下奸似莾、卓之敎, 而一時諸臣, 駢首就戮。 此一言者, 實古今小人之奇貨, 而今乃復發於大臣之口也。 若曰偶激於一時怒氣而發, 則猶無所害, 若曰不無深意, 則豈不可怕也哉? 彼草野而倨傲及年少臺諫, 徒事峻激, 無所顧慮者, 則固有之矣。 積以三朝老臣, 身爲元輔, 爲國家深憂遠慮, 宜無所不至。 而乃不勝一朝之忿, 不顧纔有萬里外可怖說話。                           【時, 使臣歸自北京, 言淸帝有爾國主弱臣强之語云云。】                        而言不知裁, 此豈非可惜之甚哉? 始以浚吉之言爲過者, 今則曰其言果驗矣, 臣於積, 未嘗有說及之時矣。 今旣以聖考時事爲言, 臣不勝慼慼於心, 而略陳其情實之一二, 未知殿下以爲何如爾。 雖然今日紛紜是非, 自是臣子之是非得失, 則固非大事, 而惟殿下之過擧, 日以益甚, 只知有相臣, 而不知有宗社、國家, 豈非可異之甚哉?                                    疏奏, 而閱月不報。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35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18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정론-간쟁(諫諍) / 역사-전사(前史)

 

6월 11일 을유

오시수(吳始壽)를 우부승지로, 조원기(趙遠期)를 사간으로, 임규(任奎)를 장령으로, 최석정(崔錫鼎)을 검열로 삼았다.

 

6월 13일 정해

정언        이유(李濡)가, 김화 현감(金化縣監)        목임형(睦林馨)이 전에 없는 규례를 만들어, 민간으로 하여금 호피(狐皮)와 응련(鷹連)을 납부하도록 독촉하여 온 경내가 원망한다는 것을 논핵하여 파직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6월 16일 경인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 및 대신(臺臣)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왜관에 시장을 열었을 때 난잡한 폐단이 많았습니다. 이 폐단을 염려하여 시장 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필시 우리 나라 사람들이 왜관에 가서 몰래 사들여 연경(燕京)에 갖다 팔 것입니다. 국법이 점점 해이되고 인심이 점점 악해져 잇속이 있는 곳엔 금령도 행해지지 않으니 이것이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우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폐단이 비록 이 지경에 이르게 되더라도 덮어두고 문책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의당 동래(東萊)와 의주(義州)로 하여금 엄히 밝혀 신칙해서 통렬히 금지시켜야 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여겼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윤경교(尹敬敎)의 일에 대해 해가 지난 뒤에 무거운 법을 적용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신은 말이 졸렬하고 정성이 얕아서 상의 뜻을 돌이키지 못하였으니 실로 황공스럽기만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교의 일은 하루아침에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근일의 풍파는 실로 경교에게서 말미암은 것이다. 이상(李翔)이 이미 삭탈 관직의 벌을 받았는데 경교가 어찌 임소에 편안히 앉아있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신은 비록 늙었으나 경교의 일에 있어서는 결단코 지나친 줄로 압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명철한 임금의 마음은 이치로써 빼앗을 수 있다.’고 하였으므로 신의 생각엔 이치로서 상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으리라고 여기었으나 신은 말을 잘하지 못하였습니다. 김수항의 말이 매우 명백하니 성상께서는 다시 생각하시고 헤아려 처리하소서."
하자, 김수항이 아뢰기를,
"정태화가 어찌 사사로이 경교를 옹호하겠습니까. 옛사람이 말하기를 ‘노여움을 잊으면 마음이 공평해진다.’고 하였으니, 마음을 평정시켜 느긋하게 생각해 보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상의 말이 과연 거만스러움에서 나온 것인가?"
하자, 김수항이 아뢰기를,
"인정이란 그리 크게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이상이 어찌 대신을 적신(賊臣)에다 비교하였겠습니까. 신의 생각엔 이름자를 빌려 쓰다가 자신도 모르게 망발한 것으로 여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소장의 말뜻은 글을 잘못 쓴 소치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가 인용한 주운(朱雲)의 말에 대해 괴이하고 망령되기 짝이 없다고 여기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반드시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하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상의 하교에 ‘굳게 결탁하여 괴롭히고 해쳤다.’는 등의 말씀이 계셨습니다만, 어찌 이상 등이 서로 약속해서 이 일을 만들었겠습니까. 임금이 벌을 씀에 있어 억지로 죄명을 정해서야 되겠습니까. 정태화는 머리털이 하얀 늙은 신하로 나라를 위한 정성이 다른 사람보다 각별하여 그가 진달한 말이 이와 같으니, 의당 살피시는 바가 있어야 합니다."
하자, 정태화가 아뢰기를,
"볼품없는 신이 외람되게 이 직위에 있어 세 조정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신이 감히 다시 진달하지 못한 것은, 만약 외부 사람들이 신이 누누이 말씀드렸으나 가납되지 못하였다는 말을 듣게 된다면, 신의 마음이 황공스럽고 부끄러울 뿐만 아니라 성상의 덕에 손상이 있을까 염려되었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늙은 이 신하로 말미암아 성상의 덕에 거듭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의 말이 이와 같으니, 경교를 안치시키지 말고 삭탈 관직하여 성문 밖으로 내쫓으라."
하였다. 장령 임규(任奎)가 아뢰기를,
"지금 대신의 말로 인해 윤경교의 벌을 감등시켜 삭탈 관직하고 내쫓으라는 명이 계셨으니 성상의 덕이 참으로 큽니다. 그러나 당초 외직에 제수한 것이 이미 그의 죄가 아니라면 완전히 사면시켜 성상의 덕이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삭탈 관직하여 내쫓으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은 그렇지 않지만 대신의 진달이 이러하므로 감등시킨 것이다. 꼭 직임을 제수해야만 쾌하게 여기겠는가?"
하였다.

 

6월 19일 계사

정석(鄭晳)을 승지로 삼았다.

 

이에 앞서 대마주 태수(對馬主太守) 평의진(平義眞)이 강호(江戶)에 들어갔다가 이때에 대마도로 돌아와 귤성진(橘成陳)을 보내어 보고하니, 조정에서 역관에게 명하여 위로하게 하였다. 예조가 평의진에게 글을 보내 꾸짖기를,
"우리 양국이 서로 잘지낸 지 이제 백년이 되어 갑니다. 그러므로 양국 사이에 사신이 오고 가는 데 있어서 만약 예의를 멸시하고 금령을 범한 일이 있으면 더욱 서로 고해주고 경계하여 앞날이 잘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정관(正官) 평성태(平成太) 등이 사신으로 왔을 때 조정의 처분이 이미 결정되었는데도 사리가 어떠한지 돌아보지도 않고 오직 억지만 부렸으니 이것만도 불가한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관문(館門)을 뛰쳐나와 방호군(防護軍)을 구타하고 곧바로 동래부(東萊府)까지 갔으니 이 어찌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조정에서는 평소의 우호를 생각하고 관대한 덕의를 미루어 변신(邊臣)으로 하여금 조용히 타이르게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성태 등은 끝내 개전하지 않았고 급기야 평성태가 죽자 부관(副官) 등이 다시 한결같이 시일을 끌면서 왜관으로 돌아갈 뜻이 없는 지가 이미 오래입니다. 그리고 기타 종종 횡포를 부린 일들도 일일이 세기가 어렵습니다. 조정의 명을 받고 사신 접대의 임무를 맡은 관리에 있어서는 체면이 자별한데도 감히 핍박하고 욕되게 하여 거리낌이 없었는가 하면 또 그의 수행인을 풀어놓아 다른 고을로 넘어가게 하였으니 이는 방자한 짓 중에서도 더욱 방자한 짓이었습니다.
대체로 예의를 멸시하고 금령을 범하는 것은 국가를 다스리는 사람이면 다같이 미워하는 일입니다. 가령 우리 나라 사람이 귀국에 사신으로 가서 이같은 짓을 하였다면 우리 조정에서는 반드시 법으로 다스리지 용서하는 일이 없을 것이고, 귀국 역시 어찌 사신을 곡진하게 옹호하여 멋대로 횡포를 부리게 놔두겠습니까. 이에 역관을 시켜 이 뜻을 알리게 하니, 한결같이 법으로 다스려서 맹약이 더욱 굳건해지고 성의와 신의가 끊임이 없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先是, 對馬州太守平義眞, 入江戶, 至是還島, 遣橘成陳報之, 朝廷命譯官問慰。 禮曹致書義眞責之曰:

 

6월 21일 을미

관서의 벽동군(碧潼郡)에 우박이 내려 기장, 피, 콩 등이 손상을 입었다. 관동의 춘천부(春川府)에도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비둘기알만하였고 밭곡식과 목화가 손상을 입었다.

 

6월 22일 병신

이흥발(李興浡)을 사간으로, 유송제(柳松齊)를 정언으로, 홍만용(洪萬容)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이흥발은 전주(全州) 사람인데 정축 호란 이후로 벼슬에 뜻을 끊었다. 그의 부친 묘소의 비석에 ‘아들 흥발은 벼슬이 현감에 머물렀다.[子興浡官止縣監]’라고 쓰고 이를 스스로 맹서한 다음, 모든 관직의 제수에 한 번도 나가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훌륭하게 여겼다.

 

6월 23일 정유

남용익(南龍翼)·이민적(李敏迪)에게 비변사의 제조를 겸임시켰다.

 

전 정(前正) 조사기(趙嗣基) 등 5명을 서용하라고 명하였다.

 

부산 첨사(釜山僉使) 이연정(李延禎)을 옥리(獄吏)에게 내렸다. 이에 앞서 부산진(釜山鎭)의 군관 정종필(丁宗弼)이 왜인들과 밀무역을 하다가 발각되었는데, 비국이 경내에 효시할 것을 청하면서 첨사도 잘 단속하지 못한 죄를 면키 어렵다고 하여 잡아다 문초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이에 이연정에게 공초를 받은 뒤에 그의 고신(告身)을 박탈하였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병조 판서 민정중(閔鼎重)이 아뢰기를,
"흉년으로 인해 세초(歲抄)029)  를 정지하였습니다만, 정초군(精抄軍)과 포보(砲保)에 있어서는 세초를 기다리지 않고 채우는데 이는 대궐의 숙직과 호위를 중하게 여긴 것입니다. 응사(鷹師)030)  도 날마다 어공(御供)을 진상하는 역이므로 결원에 따라 충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전 대간의 계사로 인해 군병의 정원을 보충시키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외방에서 와 물어보는 자가 많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응사도 포보의 예에 따라 일체로 충당시키라."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는, 어영군에 결원이 있을 때는 그들의 보인을 승호(陞戶)하는 것이 편리하겠다는 것을 진달하였고, 민정중(閔鼎重)도, 그들이 스스로 대신자를 얻는 것은 한정(閑丁)을 찾아내는 것과는 다르다는 상황을 진달하였다. 한흥군(韓興君) 이여발(李汝發)은, 한정으로서 소속되기를 원하는 자로 충당시키는 것이 편리하다는 것을 진달하였는데, 상이 모두 허락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신의는 임금의 보배이니, 옛날부터 백성에게 신의를 잃고서 치업을 이룩한 자는 없었다. 금년 봄에 상이 특별히 자신에게 죄를 돌린다는 하교를 내렸는데, 그중에 각종 군병의 결원은 3년 동안 보충시키지 말아서 민력이 펴지게 하라고 하였다. 이런 임금의 말씀이 한 번 내리자 누가 귀담아 듣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교묘하게 명목을 만들어, 대궐 숙직은 중대하다는 이유로 정초군을 보충시켰고, 조련을 정교하게 해야 한다는 이유로 포보를 정하였으며, 어공의 역이라는 이유로 응사를 충당시키는 등 평소와 다름없이 한정을 찾아내었다. 그리하여 간신히 살아남은 백성이 소요 속에 편치 못하였으니 백성에게 신의를 크게 잃은 것이다. 일을 맡은 신하들이 성상의 뜻을 받들어 이행하지 못하여 마침내 조정으로 하여금 신의를 잃게 하고 말았으니 애석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38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19면
【분류】군사-특수군(特殊軍) / 군사-군정(軍政) / 군사-군역(軍役) / 왕실-국왕(國王) / 역사-사학(史學)


[註 029] 세초(歲抄) : 정기적으로 군병의 결원을 보충함.[註 030] 응사(鷹師) : 응방(鷹坊)에 속한 잡직.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신의는 임금의 보배이니, 옛날부터 백성에게 신의를 잃고서 치업을 이룩한 자는 없었다. 금년 봄에 상이 특별히 자신에게 죄를 돌린다는 하교를 내렸는데, 그중에 각종 군병의 결원은 3년 동안 보충시키지 말아서 민력이 펴지게 하라고 하였다. 이런 임금의 말씀이 한 번 내리자 누가 귀담아 듣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교묘하게 명목을 만들어, 대궐 숙직은 중대하다는 이유로 정초군을 보충시켰고, 조련을 정교하게 해야 한다는 이유로 포보를 정하였으며, 어공의 역이라는 이유로 응사를 충당시키는 등 평소와 다름없이 한정을 찾아내었다. 그리하여 간신히 살아남은 백성이 소요 속에 편치 못하였으니 백성에게 신의를 크게 잃은 것이다. 일을 맡은 신하들이 성상의 뜻을 받들어 이행하지 못하여 마침내 조정으로 하여금 신의를 잃게 하고 말았으니 애석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上引見大臣、備局諸臣。 兵判閔鼎重曰: "以年凶, 停歲抄, 而精抄軍及砲保, 不待歲抄而充定, 所以重宿衛也。 鷹師亦排日御供之役也, 亦令隨闕充定。 而頃因臺啓, 有軍額勿補之令, 故外方多有來問者矣。" 上曰: "鷹師依砲保, 一體充定。" 領相鄭太和, 陳御營軍有闕, 以其保陞戶之便, 鼎重亦陳自得其代, 異於括丁之狀。 韓興君 李汝發, 陳閑丁願屬者, 充定之便, 上竝許之。
【史臣曰: "信者, 人君之寶也, 自古有國者, 未有失信於民, 而能成其治者也。 是年春, 上特下罪己之敎, 其中諸色軍兵闕額, 限三年勿補, 以紓民力。 王言一下, 孰不聳聽? 曾未幾何, 巧作名色, 以宿衛之重而補精抄矣, 以操鍊之精而定砲保矣, 以御供之役而充鷹師矣, 搜括閑丁, 殆同平日。 孑遺之民, 騷然不寧, 其失信於民大矣。 任事之臣, 不能將順聖意, 終使朝廷, 未免爲失信之歸, 可勝惜哉。"】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38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19면
【분류】군사-특수군(特殊軍) / 군사-군정(軍政) / 군사-군역(軍役) / 왕실-국왕(國王) / 역사-사학(史學)

 

선혜청에서 관리하는 충청도·전라도의 패선(敗船)한 미곡 3천 8백 석, 콩 1백 50석과 작년 서울에 방출하였다가 미수된 미곡 1천 8백 석 중 징수할 곳이 없는 3백 석을 모두 탕감하도록 명하였다.

 

왕세자는 인품이 준수하고 총명이 뛰어나서 모든 행동이 의젓하게 자연적으로 이루어졌고 문장과 사기를 외우는 데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다. 나이 12세에 《동몽선습(童蒙先習)》과 《소학(小學)》 등의 글에 통달하였고, 작년부터는 《소미통감(少微通鑑)》을 배워 문리가 날로 진보하였다. 처음 배울 때는 보양관(輔養官)으로 하여금 앞으로 나아와 글자를 짚어가며 글 뜻을 해석하게 하였고, 세자에 책봉되자, 빈객(賓客)으로 하여금 강론케 하면서 앞으로 나아와 가르키는 규례는 그대로 두었다. 이날 인대하였을 때 민정중이 상에게 아뢰기를,
"세자의 문리가 이미 진보되었는데 앞으로 나아가 글을 가르치는 것은 사체에 손상됩니다. 고사에 따라 지금부터는 뒤로 물러 앉아 별도로 책을 가지고 강론케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어 《통감(通鑑)》의 촉한기(蜀漢紀)를 다 강론한 뒤에는 《대학(大學)》를 가르치도록 하였는데 대체로 경학(經學)을 급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6월 24일 무술

홍문본관록(弘文本館錄)에 5점은 조사석(趙師錫)과 신익상(申翼相)이고, 4점은 심유(沈攸)·정재희(鄭載禧)·조원기(趙遠期)·김계광(金啓光)·이옥(李沃)·윤지선(尹趾善)·윤가적(尹嘉績)·강석창(姜碩昌)·이인환(李寅煥)·임상원(任相元)·이하진(李夏鎭)·홍만종(洪萬鍾)·조근(趙根)·정유악(鄭維岳)·유상운(柳尙運)·이유(李濡)·서문상(徐文尙)이다. 또 이조록(吏曹錄)에는 조사석(趙師錫)이다.

 

도목 대정(都目大政)에서 박태상(朴泰尙)을 정언으로, 정유악(鄭維岳)을 지평으로, 이수만(李壽曼)을 장령으로, 심유(沈濡)를 설서로, 서문상(徐文尙)을 문학으로, 조원기(趙遠期)를 사간으로, 이민적(李敏迪)을 대사성으로, 조사석(趙師錫)을 사서로, 이선(李選)을 응교로, 임규(任奎)를 필선으로, 조위봉(趙威鳳)을 헌납으로 삼았다. 또 이정영(李正英)을 동지사(冬至使)로, 목내선(睦來善)을 부사(副使)로, 강석창(姜碩昌)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으며, 음관(蔭官)의 승진을 전례와 같이 하였다.

 

6월 26일 경자

상이 비변사로 하여금 아홉 가지의 천거 조목을 정하게 하고 2품 이상과 6조의 참의 및 삼사(三司)에게 각기 인재를 천거하게 하였다. 그 조목은, 몸가짐이 방정하고 재주와 행실이 있는 자, 의리에 마음을 기울이고 학술이 있는 자, 지모가 뛰어나 장수의 직임을 감당할 수 있는 자, 용력이 출중하여 급할 때 쓸 수 있는 자, 과감하고 확고하여 강한 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 세상 일에 마음을 두고 일처리에 밝고 민첩한 자, 자상하고 청렴하여 수령에 적합한 자, 집안에서 효성과 우애가 있어 고을에서 칭찬을 받는 자, 문장의 재주가 특이하여 글을 잘 짓는 자 등이었다.

 

6월 27일 신축

헌납 조위봉(趙威鳳)이 아뢰기를,
"신이 현재 언지(言地)에 있으면서 이번의 논계(論啓)를 당하고 보니 신의 정세가 더욱 어렵기에 감히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소회를 낱낱히 진달하겠습니다. 신의 아비 조임년(趙臨年)이 한 번 올린 소로 인하여 유림들의 비위를 거슬려서 거의 귀양가게 되었다가 성상의 은혜를 입어 마침내 고향에서 살게 되었으니, 신의 몸이 가루가 된들 어떻게 티끌만큼이라도 은혜를 갚을 수 있겠습니까. 그 당시와 지금의 소견이 비록 다르나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저절로 혐의와 구애가 됩니다. 신이 이런 때에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아첨한다고 하여 침을 뱉을 것이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하면 세상은 앙갚음을 하기 위해서라고 할 것입니다. 아첨하는 것은 마음에 차마 못할 일이며 앙갚음을 하기 위한 것은 용서받기 어려운 죄가 되니, 신의 말이 이번 논계에 끼이기 어렵다는 것은 단연코 명백합니다. 그래서 신이 일찍이 옥당의 말석에서도 동료들에게 언급한 일이 있었습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이에 대사간 홍만용(洪萬容)이 처치하기를,
"이왕의 일이 지금과는 다르다면 공의(公議)가 있는 바이니 논계에 참여하더라도 무슨 지장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아첨이니 앙갚음을 한다느니 한 말은 어긋난 것이니 교체시키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삼가 살피건대, 홍만용은 본래 용렬한 인품으로 권력가에게 아첨하고 빌붙어 기꺼이 그들의 매와 사냥개가 되어서는 모든 논의에 반드시 그들의 지휘를 받았는데, 그가 앞뒤로 한 짓을 사류들이 침을 뱉고 더럽게 여긴 지 오래되었다. 아, 벼슬의 욕망이 마음속에 움직이고 위세가 뒤에서 몰아부친다면 굴하지 않는 사람이 적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 홍만용처럼 심한 자야 있겠는가.
○辛丑/獻納趙威鳳啓曰: "臣今忝言地, 當此論啓, 惟臣情勢, 到斯益礙, 敢冒萬死, 歷陳心緖。 先臣臨年一疏, 見忤山林, 幾至流竄, 得蒙聖恩, 終保鄕居, 韲粉臣身, 曷報涓埃? 伊時卽今, 所見雖別, 激泒泝源, 自抵嫌拘。 臣於此際, 是而曰是, 人唾病畦, 非而曰非, 世謂修郄, 病畦心不忍也, 修郄罪難赦也, 臣之口舌, 難掛此論, 斷較然矣。 故臣曾躡後塵於玉堂, 亦嘗言及於僚儕矣。 請遞退待。" 大司諫洪萬容處置曰: "旣往之事, 與今有別, 則公議所在, 參論何傷? 而病畦修郄, 語涉乖違, 請遞差。" 上從之。
【謹按萬容, 本以庸品, 諂附時輩, 甘爲鷹犬, 凡諸論議, 必受其指揮, 其前後所做作爲, 士類唾鄙者久矣。 噫! 爵祿動於中, 威勢驅於後, 則人鮮有不屈者。 而豈有如萬容之甚者哉?】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39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20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6월 28일 임인

예조가 명선 공주(明善公主)의 가례(嘉禮) 차비를 그전 정식에 비추어 계달하였는데, 상이 상당히 감소시켰으며 심지어는 채선(彩扇)에 장식할 진주(眞珠)의 값도 삼분의 일이나 감하였으므로 신료들이 그 검소한 덕을 흠앙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6월 29일 계묘

행 대사성 이민적(李敏迪)이 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전 찬선 송준길(宋浚吉)은 덕망있고 노숙한 선비로 사림의 표상이고, 전 집의 이상(李翔)은 시골에 묻혀사는 숨은 선비로 본래부터 두터운 명망이 있었습니다. 지금 국가의 원기와 세상의 모범이 되는 자는 이 몇 사람들 뿐입니다. 원기의 소재가 이 사람들 말고 누구이겠습니까. 전하께서 평소 두 신료에게 공경과 정성을 다하여 예우하셨습니다만, 일을 논하다가 조금 성상의 뜻에 합당하지 않자 갑자기 당인(黨人)으로 지목하고 삭탈 관직하여 내쫓는 법을 가하셨습니다. 이런 위압적인 명령이 내리자 너나없이 당황하고 실색하여 사기(士氣)가 떨어져서 이미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 전임 정승이 중외의 비방을 받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지금 하늘은 위에서 노하고 백성은 아래에서 원망하며 국가에는 큰 재앙이 있어 사람들이 거의 다 죽어가는데 기강이 날로 무너지고 아첨하는 것이 풍속이 되었으니 일을 맡은 신하가 어떻게 그 책임을 면할 수 있습니까.
신들처럼 구차하게 국록이나 도둑질하는 자는 실로 한 테두리 안에 든 혐의라도 있습니다만 초야에서 자신을 깨끗이 닦는 선비들이야 무엇을 꺼리어 전하를 위해 한 마디의 말을 하여 대우해 주신 은혜에 보답하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약 일을 맡긴 지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시종 그들을 보전하려고 예의로써 진퇴시키는 것은 괜찮습니다만, 크게 위엄과 노여움을 내시면서 힘써 공의와 싸우신 데 있어서는 역시 전하에게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원컨대 성명께서는 깊이 국가의 원기를 배양하는 데에다 뜻을 두소서."
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조정에서 떵떵거리고 있는 자는 모두가 송준길과 이상의 당류였으니 이번 이민적의 소장에 이같이 말한 것은 실로 이상히 여길 것조차도 없다. 그러나 국가 원기가 성하거나 쇠한 것을 이상 같은 자들의 진퇴에 달렸다고 한 것은 역시 너무나 어리석은 것이다.
○癸卯/行大司成李敏迪, 上疏, 其略曰:
前贊善宋浚吉, 宿德舊儒, 士林山斗, 前執義李翔, 林下逸士, 素負重名。 今之爲國元氣, 作世模範者, 此數人而已。 元氣之所在, 舍此而誰也? 殿下平日, 禮遇二臣, 非不致敬盡誠, 而論事一不當於聖意, 遽加以黨人之目, 削黜之典。 威命之下, 莫不失色蒼黃, 士氣之蕭然, 已不可爲矣, 前相之被中外之謗, 不是異事。 況今天怒於上, 民怨於下, 國有大災, 人死亡幾盡, 而紀綱日〔壞〕                        , 謟佞成風, 則承事之臣, 又何以辭其責乎? 如臣輩苟容竊祿者, 固有同浴之嫌, 而彼山林潔己之士, 何所憚而不爲殿下一言, 以爲知遇之報耶? 殿下若以任事之久, 欲終始保全, 以禮進退則可也, 至於盛張威怒, 力戰公議, 則亦非所望於殿下者也。 願聖明, 深以培養國家之元氣爲意焉。                                     【謹按在朝翺翔者, 無非浚吉、翔之黨也, 今者李敏迪措語之如此者, 固無足惑矣。 然以國家元氣之盛衰, 歸之於翔輩之進退, 其愚亦甚矣。】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39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20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謹按在朝翺翔者, 無非浚吉、翔之黨也, 今者李敏迪措語之如此者, 固無足惑矣。 然以國家元氣之盛衰, 歸之於翔輩之進退, 其愚亦甚矣。】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39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20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송규렴(宋奎濂)을 헌납으로, 임규(任奎)를 장령으로, 이경억(李慶億)·민정중(閔鼎重)을 겸 지경연사로 삼았다.

 

상이 박빈(朴鑌)의 상소에 답하기를,
"그대 선친이 죽음에 임하여 진언한 상소를 살펴보니 걱정하고 아낀 정성이 평소보다 배나 되었다. 재삼 관람하면서 깊이 슬퍼하였다."
하였다. 작년 겨울 박장원(朴長遠)이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있으면서 병으로 죽었는데 병을 앓을 때 소를 지었다. 첫머리에는 재이를 없애고 백성을 구제하는 방법에 대해 진달하고 중간에는 인재를 수습하는 도리에 대해 기술하고, 마지막에는 보필할 사람을 구하기에 힘쓰는 공효로 권면하였는데, 애쓴 정성이 간절하여 넉넉히 임금의 마음을 감동시킬 만하였다. 미쳐 올리지 못하고 죽었는데 그의 아들 박빈이 아비가 남긴 소를 올리자, 상이 이와 같이 답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박장원은 사람됨이 근후하여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으나 자못 검소한 풍도가 있었다. 젊어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었는데, 어머니의 얼굴 빛을 잘 받들어 봉양하여 늙도록 쇠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어려운 일로 여겼다.
○上答朴鑌疏曰: "觀先卿臨死進言之疏, 憂愛之誠, 有倍他日。 觀覽再三, 深用悲悼矣。" 上年冬, 朴長遠以開城留守, 病卒, 病時構疏。 首陳消災䘏民之方, 中述收拾人材之道, 其終勉以求助勤勞之功, 而勤懃懇懇, 有足以感動天心者。 未及上而沒, 其子鑌, 以其遺疏, 投進, 上答之如此。
【謹按長遠爲人謹厚, 位至卿宰, 而頗有寒素風。 少孤, 事母至孝, 以色爲養, 至老不衰, 人以爲難。】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40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20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경상 도사 정도성(鄭道成)이 조정을 하직하였다. 이에 앞서 차왜(差倭) 평성태(平成太) 등이 왜관 이전의 일로 나왔으나 조정에서 왜관의 이전을 허락하지 않자 차왜가 해가 지나도록 머물렀다. 이때 향접위관(鄕接慰官)인 경상도 도사 민홍도(閔弘道)가 동래부(東萊府)에 있었는데, 이 해 여름 석 달 동안의 전최(殿最)를 감정(勘定)하는 일로 순찰사 영문으로 돌아가려고 하였으나 차왜가 그가 가는 것을 들어주지 않았다. 고사(故事)에 도사가 전최에 참여하지 않으면 법률상 파직에 해당하므로 감사가 전례에 따라 파직시켰다. 민홍도는 파직되자 즉시 행장을 꾸려 가지고 서울로 향하였고, 동래부에서는 역관을 시켜 민홍도가 파직되어 돌아간 사유를 말하게 하였다. 이에 차왜 등이 화를 내어 통사(通事) 왜인과 졸개들을 시켜 역관을 붙잡아 놓고 칼을 들고 빙둘러 서서 칼날을 목에 들이대며 온갖 위압과 공갈을 하였다. 동래부에서 별차역(別差譯)을 시켜 꾸짖기를,
"접위관이 파직되어 돌아간 것은 실로 너희들이 그가 순찰사 영문에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반성할 줄은 모르고 허물을 역관에게 돌린단 말인가. 역관이 비록 낮고 미약하나 곧 왕의 심부름을 하는 자인데 어찌 감히 이같이 욕을 보일 수 있단 말인가?"
하니, 차왜 등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이 역관과 함께 순찰사 영문에 가서 자세히 사유를 알아본 다음 서울로 가려고 한다."
하였다. 동래부에서 또 사람을 보내 꾸짖으면서 반복해서 효유시켰으나 마침내 듣지를 않았다. 마침 그 이튿날 두모포 만호(豆毛浦萬戶) 김원상(金元祥)이 왔는데 차왜가 만나게 해 달라고 간절히 요청하였다. 대개 김원상이 일찍이 제주(濟州)로 가다가 바람에 배가 표류되어 일본에 닿아 해가 넘어서야 돌아왔기 때문에 일본의 사정을 상당히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조정에서 두모진에 차출해 보낸 것이다. 김원상이 차왜를 만나 여러 가지로 꾸짖고 개유하자 차왜가 비로소 뜻을 돌려 역관을 내보내고 또 철수해 돌아갈 마음을 가졌다. 다만 반드시 접위관이 오기를 기다려 거취를 결정하려 하였으므로 동래부에서 속히 도사를 차출해 보낼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역관으로서 붙잡혀 국가를 욕되게 하였으니 그대로 차왜를 접대하게 할 수는 없다고 하여 다른 역관을 보낼 것을 요청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이 달에 도성 백성 중 전염병에 걸려 야외로 옮긴 자가 5백 20여 명이었고 죽은 자가 12명이었고 굶어 죽은 자가 14명이었다. 관북 지방에는 전염병으로 죽은 자가 1천 2백 60여 명이었고 굶어 죽은 자가 50여 명이었다. 영남은 전염병으로 죽은 자가 2백 20여 명이었고 호남은 전염병으로 죽은 자가 2백 70여 명이었고 관서는 전염병으로 죽은 자가 4백 80여 명이었다. 그리고 명화적(明火賊)이 인명을 해친 일이 곳곳에 있었다.

 

해서(海西)에서 고을 원을 죽인 죄인 조대립(趙大立)과 같은 패거리 2인을 체포하여 효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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