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7월 1일 갑술
사간 조원기(趙遠期)가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순창군(淳昌郡)에 주인없이 묵은 땅을 궁가(宮家)가 떼어받은 곳이 있었는데 상께서 ‘내어주는 것은 부당하다.’는 하교가 계셨다고 하니, 신은 개탄스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백성들이 농사를 짓고 있는 곳은 궁가가 빼앗아 점유할 수 없다고 한 명백한 금령이 있습니다. 이로써 이번 일을 헤아려 본다면 너무나 어긋난 일이 아니겠습니까. 가령 미련한 백성이 역을 도피한 폐단이 있다면 곧바로 감사에게 회부할 따름이지, 그 사이에 별도의 판부(判付)를 내려 사람들의 의심을 불러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옛날 당 대종(唐代宗)이 백거(白渠)의 연애(碾磑)031) 를 헐어내고 백성의 전답에 물을 대게 하였습니다. 이에 승평 공주(昇平公主)가 하소연하자 대종이 말하기를, ‘내가 백성을 이롭게 하고 있으니 너는 마땅히 남보다 앞장서야 한다.’고 하니, 공주가 그날로 철거했다고 합니다. 이를 유념하셔야 합니다. 내주지 말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윤7월 2일 을해
이혜(李嵆)를 우승지로, 이동직(李東稷)을 좌부승지로, 이일정(李日井)을 정언으로, 윤치적(尹致績)을 봉교로 삼았다. 또 특명으로 오시수(吳始壽)를 이조 참의에 제수하였다.
윤7월 3일 병자
좌의정 송시열(宋時烈)이 소를 올려 사직하고, 또 아뢰기를,
"신이 요전 상소에서 정승에 관한 일에 대해 날짜를 잘못 썼고, 또 그 내용에서 본지는 잃지 않았으나 간혹 표현이 사실과 다른 것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상당히 물의가 있습니다."
하였다. 비답은 8월에 있었다.
○丙子/左議政宋時烈, 上疏辭職, 且言:
윤7월 5일 무인
이훤(李藼)을 북평사로 삼았다.
윤7월 6일 기묘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료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상원(祥原)에 사는 선비 주동백(周東伯)의 상소를 대신에게 내어 보였다. 그 상소에 맨 먼저 말하기를,
"명(明)의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임진년에 우리 나라를 구해준 은혜가 있으니 제사를 지내어 보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관서에 사당을 세우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회계하기 곤란할 것이기 때문에 적접 함께 의논하려고 하였다."
하니,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번방의 나라에서 신종의 사당을 세운다는 것은 사체로 보아 불가할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사세로는 더욱 시행키 어려운 바가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또 조위봉(趙威鳳)의 상소를 보였는데, 그 상소에는 재상 경차관(災傷敬差官)을 많이 보낸 폐단에 대해 말한 것이었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것은 좌의정 송시열의 말이었는데 지금은 보내도 무방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판의금 정지화(鄭知和)에게 이르기를,
"윤경교(尹敬敎)를 안치시켰는데 그 도배장(到配狀)032) 이 왔는가? 또 해방(該房)에서는 그것을 사실과 대조한 일은 없었는가?"
하니, 정지화가 대답하기를,
"도배장은 이미 왔으나 별로 대조할 규례는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미 죄인으로서 배소에 나간다면 마땅히 역참을 계산하여 가야 할 것이다. 어찌 대간(臺諫)이 그 명령을 도로 거두라는 논계가 있었다고 하여 스스로 죄가 없다고 여길 수가 있겠는가. 들으니 이민적(李敏迪)도 이달 18일에 도임하였다고 한다. 참으로 조심스런 마음이 있다면 감히 이처럼 지체할 수 있겠는가?"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민적이 미처 깊이 생각지 못하고 평소의 일정으로 갔기 때문에 저절로 이같이 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민적이 수령의 일곱 가지 일을 강하지 않은 것은, 어찌 원망을 품어서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니, 김수항이 아뢰기를,
"일찍이 승지를 지낸 전임자이기 때문이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민적의 도임장이 도착한 뒤에 죄를 더 주고 싶었지만 근일 이 일로 매우 시끄러웠는데 그렇게 하면 더 시끄럽게 될까 염려되었기 때문에 잠시 기다리고 있다."
하니, 장령 이수만(李壽曼)이 아뢰기를,
"들으니 민적이 물길을 거슬러 올라갔기 때문에 지체됨을 면치 못하였다고 합니다."
하고, 사간 조원기(趙遠期)가 아뢰기를,
"또 신병이 있어서 지체되었는데, 이 때문에 죄를 준다면 어찌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지척의 가까운 곳에서 어떻게 말을 꾸며 임금을 속일 수 있단 말인가."
하니, 이수만과 조원기가 엄한 말씀으로 크게 꾸지람을 하였으니 그대로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상이 이르기를,
"사체로써 말한다면 마땅히 잡아다 문초해야 되겠으나, 우선 꺼리어 피한 법률을 쓰겠다."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만약 꺼리어 피한 것이라고 하신다면 아마 그의 본심이 아닌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민적은 파직시켜 서용하지 말고, 윤경교와 압송해 간 나졸은 모두 잡아다 문초한 다음 처리하라."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인조 때에 윤명은(尹鳴殷)이 죄를 받아 귀양지로 갔는데 정해진 기한보다 3일을 지체하였기 때문에 나졸을 추문한 일이 있었습니다만, 이번에 모두 잡아오라는 것은 사리에 있어서 어떠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압송해 간 나졸을 먼저 잡아다 문초하라."
하였다.
윤7월 8일 신사
호남에는 7월 보름 뒤부터 그믐까지 잇따라 비가 내렸고 또 초6일부터 3일 동안 퍼붓듯이 쏟아져 넓은 들이 마치 강이나 바다같이 질펀하였다. 전주(全州)의 성문 밖 서남 일대의 강가 3백여 집이 일시에 잠겨 떠내려 갔고 죽은 인축이 매우 많았다. 사람들이 옛날에도 드문 일이라고 말하였다. 영남에는 7월 27일부터 4일 동안 큰비가 계속 내렸다. 또 초6일부터 3 일 동안 크게 돌풍이 불고 폭우가 쏟아져서 산간 고을의 전답이 모두 급류에 손상되었고 도랑과 밭의 위치가 바뀌었다. 그리고 낙동강(洛東江) 일대는 수재가 더욱 혹심하여 벼와 곡식들이 많이 손상되었다. 관동에도 7월부터 큰물이 져서 원주(原州)·평창(平昌)·영월(寧越)의 세 고을이 참혹하게 침수를 당해 냇물이 거꾸로 흐르고 물가가 떨어져 나갔는데 온 도가 마찬가지였다. 호서에도 7월 20일 이후로 큰 비가 내려 수재가 매우 참혹하였다. 죽은 백성이 82명이고 떠내려 갔거나 잠긴 민가가 90여 채였으며, 붕괴된 무덤과 떠내려 간 재산과 빠져 죽은 소나 말들이 다 기록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공주(公州)와 궁원(弓院)이 가장 혹심하였고 경강(京江)에는 가을 물이 크게 넘쳤는데, 사람들은 정해년 홍수 이후로 처음 보았다고 말하였다.
윤7월 9일 임오
영남의 하동현(河東縣) 백성 이암회(李巖回)의 아내가 한 번에 2남 1녀를 낳았다.
윤7월 10일 계미
헌납 임규(任奎)가 아뢰기를,
"이민적이 외직에 제수된 일로 양사가 쟁론한 지 오래되었으나 상께서는 전혀 들어주지 않으셨고 이번에 또 부임을 지체하였다는 것으로 죄목을 삼아 파직시켜 서용하지 말라고 명하시기까지 하였습니다. 어찌 성명께서 잘못 조처하심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를 줄이야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이민적은 10년 동안 경연에서 모신 신하였는데 말 한마디가 상의 뜻을 거슬리자 노여움이 점점 더해 원망함이 있지는 않은가 의심했다가 또 일부러 지체하지는 않았는가 의심하여 죄를 더 주었습니다. 민적이 비록 볼품없으나 이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파직시켜 서용하지 말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민적이 죄가 없다 하여 감히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다니, 어찌 그리도 방자한가."
하였다. 또 아뢰기를,
"조원기(趙遠期)가 상의 앞에서 어찌 다른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의외의 엄한 분부를 혐의할 필요는 없으니 출사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특별히 체차하였다. 지평 조사석(趙師錫)이 이민적의 일로 역시 명을 도로 거둘 것을 계청하였으나, 비답은 간원에 내린 것과 같았다. 또 이수만(李壽曼)을 처치하여 출사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역시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정원이 ‘대간의 계사에 대한 비답에 신하로서는 차마 들을 수 없는 바가 있고 조원기와 이수만을 특별히 체차한 데 있어서는 더욱이 온당치 못하다.’ 하여 다시 생각하시기를 진달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임규(任奎)와 조사석(趙師錫)이 상의 엄한 분부를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윤7월 11일 갑신
민유중(閔維重)에게 비국의 제조를 겸임시켰다.
병조 판서 민정중(閔鼎重)이 소를 올려 면직시켜 주기를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부제학 김만기(金萬基)와 수찬 이당규(李堂揆) 등이 임규·조사석을 처치하여 출사시킬 것을 청하고, 이어 품은 생각을 진달하기를,
"원컨대 양사의 요청을 받아들여 허물을 고쳤다는 것을 시원스럽게 보이소서."
하고, 또 조원기와 이수만을 특별히 체차하라고 한 명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고 처치한 일만 윤허하였다.
지평 조창기(趙昌期)가 소를 올려 사직하였는데 그 조목이 여섯 가지였다. 그것은 곧 정치의 근본을 세울 것, 권(權)과 강(綱)을 총괄할 것, 관리를 가릴 것, 상벌을 밝힐 것, 당파를 깨트릴 것, 민생을 걱정할 것 등 무릇 만여 마디나 되었는데 채용할 만한 것이 많았다. 정치의 근본을 세워야 한다는 것에 대해 말하기를,
"천하의 이치는 지극히 은미하여 드러내기 어렵고, 천하의 일은 지극히 번거로워 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한 마음은 넉넉히 이를 관철하고 총괄할 수 있으므로, 옛날의 제왕들은 마음에 얻어진 것을 미루어 나아가 정치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폐단을 없애고 이치를 밝히려면 실로 학문을 해야 됩니다. 경서를 읽을 때에는 성현이 논리를 세운 본뜻을 깊이 연구하여 자기에게 절실한 응용의 자료로 삼고, 사기를 읽을 때에는 치란과 흥폐의 큰 틀을 통체적으로 보아 이를 정치나 일을 하는 사이에 이용하면 읽은 바가 헛된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아, 학문을 강론하여 이치를 밝힌다는 말은 이미 듣기 싫은 묵은 말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정무는 지극히 많고 도리는 끝이 없으므로 만약 옛날을 배우는 기술이 없고 지혜와 생각이 밝지 못하면, 시비를 분변할 수 없고 득실을 징험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비록 어진 보필과 유능한 신하가 마음을 다하여 도운다 하더라도 동쪽에서 실수하고 서쪽에서 전도되며 이쪽에서 구원되면 저쪽에서 잃을 것이니, 참으로 실수할 때마다 규간할 수도 없을 것이며 일에 따라 의논을 드릴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근원을 탐구하고 근본을 미루어 보는 데는 학문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권과 강을 총괄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말하기를,
"권이라는 것은 사물을 저울질하는 도구이며 강이란 것은 그물을 펴는 도구입니다. 권이 옮겨지면 경중이 저절로 드러나고 강이 움직이면 온갖 그물의 줄이 모두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백관의 위에 앉아 만민을 다스릴 때 조종하여 움직이게 하며 돌아가게 하고 합해지게 하고 펴지게 하는 것을 권과 강이라고 하는데,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거느리고 높은 자가 낮은 자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먼저 대체를 세우고 사정을 살피신 다음 이로써 일정한 견해를 세우고 권과 강을 운용하여 서무를 관리하는 도리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국사가 위급하고 조정이 궤란되었으니 전하께서는 먼저 전철을 한 번 변경시켜, 반드시 옛 도를 본받고 주관을 세워서 사무를 결단하고 신하들을 독려하소서. 그리하여 사람들이 옛 도는 회복할 수 없다고 말하더라도 듣지 말 것이며, 전철은 변경할 수 없다고 말하더라도 듣지 마소서. 이미 사리를 알았으면 고침이 없이 굳게 정하여 반드시 신료들로 하여금 모두 나의 영을 따르게 하고 나의 영으로 하여금 신료들의 말에 흔들리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전에 국사를 생각지 않고 태만하여 방자하던 자들이 너나없이 두려워하여 마음을 고쳐 먹고 쉴 사이 없이 상의 명령을 받들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들뜨고 망령스런 말이 현혹시킬 수 없을 것이며 허위의 일들이 행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정령이 하나로 통일될 것이며 조종이 모두 상에게서 나오게 되어 대소가 마음을 같이 하고 위령이 사방에 통해져 이모저모로 운영하는 데 있어서 여의치 않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당파를 깨트리는 일에 대해 말하기를,
"당파의 근심은 옛날부터 있었으나, 이는 대체로 소인이 군자를 무함하는 것으로 한때 서로 배척만하고 말았지, 어찌 우리 나라와 같이 온 나라에 파급되어 여러 대 동안 그 해독을 받은 적이 있었겠습니까. 동서의 당이 비롯된 이야기는 성명께서도 이미 알고 계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심의겸(沈義謙)이 옛날 잘못을 버리지 않은 것과, 김효원(金孝元)이 한때 굴복을 당한 것이 국사에 있어 무슨 영향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두 사람에게 틈이 생겨 사이가 좋지 않자 나이 젊은 명사들은 모두 김효원을 따르고 노성한 인사들은 심의겸과 친하였으므로 형적이 나누어지고 시기와 불화가 날로 조성되어 왕실과 백성에게 해독을 끼쳤습니다. 그리하여 서로 반복되어 성하기도 하고 쇠하기도 하면서 사대부들이 대대로 가법으로 전해 국법같이 지키고 더없는 가르침으로 여겨, 색목(色目) 밖으로 빠져나오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으니 아, 괴이한 일입니다.
대개 정축년 이후는 동쪽이 성하고 서쪽이 쇠하였으며, 계해년 이후부터는 서쪽이 득세하고 동쪽이 위축되었는데, 오늘날까지 그 형세가 점차로 성해져서 득세한 쪽은 점점 날카로운 칼자루를 쥐게 되고 위축된 쪽은 더욱 분노를 품게 되었습니다. 재기(才器)가 서로 같아 별로 고하를 분별할 것도 없는데 서쪽 사람이면 끌어들이지 못하지나 않을까 서두르고, 동쪽 사람이면 머뭇거리면서 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비록 겉으로는 남의 말이 혐의로워서 약간 등용시키지마는 한 계급은 반드시 아끼면서도 작은 벌은 꼭 시행합니다. 그래서 같은 반열에서 함께 일을 하더라도 호(胡)와 월(越)이 서로 등지는 것처럼 미워하고 있으니 함께 공경한다는 아름다움은 물론 가망이 없습니다만, 떼 지어 일어나 서로 공격하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서쪽이 강하고 동쪽이 약한 것은 참으로 지금의 오래된 폐단입니다. 근래 성상의 의향을 징험해 보건대 매양 한쪽을 곡진히 옹호하려고 하시는데, 이는 물론 성인의 공평 정대한 체통이며 강한 것을 억누르고 약한 것을 부축하려는 뜻입니다만, 신의 트이지 못한 생각에는 옳다고 보여지지 않습니다. 만약 한쪽만 도와 세력과 체제가 균등하게 된다면 피차간에 알력이 생길 근심이 도리어 금일보다 심할 것이니, 이는 무기를 마련해주어 서로 공격하도록 도우는 격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상의 생각은 이런 점을 혹 빠트린 것이 있습니다.
신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잠시 당파를 도외시하고 나의 정치와 형벌을 맑게 하고 나의 기강을 정돈해서, 먼저 어질고 어리석은 사람을 분별하시는 것으로 업무를 삼으시고 상벌을 밝게 베푸는 것으로 급무를 삼으소서. 그리하여 참으로 훌륭하면 동서에 구애하거나 비천에 혐의하지 말고 조금도 의심없이 발탁하여 쓰고, 참으로 어리석으면 귀현(貴顯)을 묻거나 형세에 끌리지 말고 가차없이 물리치소서. 가령 훌륭한 인재가 이쪽에 있다면 한쪽만 수용하게 되더라도 치우친 게 아니라 훌륭한 인재가 한쪽에만 몰려 있기 때문이며, 용렬한 자가 저쪽에 있다면 한쪽만 으레 배척을 당하게 되더라도 치우친 게 아니라 한쪽에만 용렬한 자가 많기 때문입니다. 등용하거나 물리치는 것이 색목에 구애받지 않고 오직 훌륭한 인재만 모두 등용되고 불초한 자는 으레 폐출을 당한다면, 대권이 윗사람에게로 돌아가고 만민이 모두 그들의 분수에 편안히 여길 것이니,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 어디서 생기겠으며 당파의 근심이 어디서 일어나겠습니까. 훌륭한 인재가 등용되면 직위에 있는 자가 모두 군자일 것이며, 상벌이 마땅하게 주어지면 백관이 모두 분발하려고 할 것입니다. 군자가 직위에 있고 백관이 분발하려고 한다면 조정이 청명해지고 공도(公道)가 크게 행해질 것이니, 비록 당파를 지으라고 시키더라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요점을 조종하여 효과가 넓게 하는 것은 전하께서 힘써 행하시는데 달렸습니다."
하였다. 상소의 끝에 또 말하기를,
"조정의 처사는 화평이 귀중합니다. 조정이 화평하지 못하면 사방이 어찌 우러러보겠습니까. 지난번 영의정의 일로 인하여 조정에 하나의 소요가 일어났는데 그 조처가 마땅함을 잃어 분위기가 아름답지 못하였므로 신은 애석하게 여겼습니다. 허적(許積)은 상의 특별한 대우를 받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위로는 성상을 보필하여 조그만 도움도 주지 못하였으며, 아래로는 곤궁한 백성을 걱정하여 하나의 폐단도 없애지 못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당(私黨)만 굳이 진취시키려 하여 공평한 도량이 적었으며 대부분 당시 의논의 눈치를 보아가며 우물쭈물하는 병통이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허물을 삼아 대의로 꾸짖는다면 비록 허적더러 말해 보라고 하더라도 스스로 해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역적 김자점(金自點)에다 비유한 것은 어긋나게 인용하였고, 권간(權奸)이라고 배척하였지만 그 자취는 볼 수 없습니다. 걸맞지 않게 비유했으니 어떻게 그의 마음을 승복시킬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상(李翔)을 논하는 자가 혹은 마음에 음험한 꾀를 품어 사람을 망측한 지경에다 밀어넣으려 한다고 하기도 하고, 혹은 충의로운 분노에 격동되어 사람을 논함이 착오가 없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 그의 그릇된 점만 밝게 배척하여 망령스럽게 한 말을 꾸짖으면 족합니다. 저 사람은 초야에 있던 사람으로 언지(言地)에 있게 되었고 또한 별도의 유시를 받은 때에 그런 논계를 올린 것이고 보면, 그의 죄를 깊이 다스린다는 것은 옳은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아끼는 너의 정성이 가상하다.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너는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보라."
하였다. 상소를 비국에 내렸으나, 삼공(三公)이 모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후일에 조용히 회계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持平趙昌期, 上疏辭職, 其條六。 立治本也, 總權綱也, 擇庶官也, 明賞罰也, 破朋黨也, 䘏民生也, 凡萬餘言, 多有可採用者。 其立治本, 則曰:
天下之理, 至微而難著, 天下之務, 至煩而難悉。 而人之一心, 足以貫徹摠攝, 是以古之帝王, 推其得於心者, 出而制乎治。 而祛弊明理, 固待於學。 讀經則深究聖賢立言之本旨, 以爲切己應用之資, 讀史則統看治亂興廢之大機, 措諸政令事爲之間, 則所讀不爲虛語矣。 嗚呼! 講學明理之說, 已作厭聞之陳言。 而萬機至多, 道理無窮, 若學古無術, 智慮未明, 則是非莫辨, 得失無徵。 雖有喆輔能臣, 竭心輔贊, 而失於東而倒於西, 救於此而失於彼, 固不可隨失獻規, 又不可逐事論列。 探原推本, 宜莫如學。 其摠權綱則曰: 權者稱物之器, 綱者張網之具。 權移而輕重自懸, 綱動而萬目皆隨。 故人君處百僚之上, 御萬民之衆, 其操縱運動, 斡旋翕張者, 謂之權綱, 而上所以御下, 尊所以御卑者也。 伏願殿下, 先立大體, 審察事情, 以此立定見運權綱, 以爲弛張庶務之道可也。 今國事危急, 朝廷潰亂, 殿下先以一變前轍, 必法古道, 立定主見, 以之斷事務督臣工。 人或曰古道不可復也, 勿聽也, 人或曰前轍不可變也, 勿聽也。 旣知事宜堅定無改, 必使群臣, 莫不從吾之令, 而勿使吾令, 遷撓於群臣之言。 則彼前日之不念國事, 怠惰自肆者, 莫不竦然改心, 鞠躬奔走, 秪承上令矣。 如此則浮妄之說, 無所眩, 虛僞之事, 不得售。 政令統會于一, 操縱皆出於上, 大小齊心, 威令四達, 縱橫伸縮, 無不如意矣。 其破朋黨, 則曰: 朋黨之患, 自古有之, 蓋以小人而誣君子, 止於一時, 相排擯而已, 豈有如擧國波蕩, 累世受毒, 如我朝也? 東西肇黨之說, 聖明想已俯燭矣。 彼沈義謙之不棄舊疵, 金孝元之一時被屈, 顧於國事, 何所輕重? 二人構隙, 旣不相能, 年少淸流, 皆趨於金, 老成耆舊, 與沈相親, 形跡斯分, 猜釁日成, 毒被王室, 害及生靈。 遞相反覆, 互有盛衰, 搢紳士夫, 世傳家法, 守之如令典, 視之如謨訓, 無一人自拔於色目之外, 嗚呼! 可怪也已。 蓋自丁丑以來, 東盛西衰, 自癸亥以後, 西伸東屈, 至于今〔日〕 , 其勢轉盛, 伸者轉操利柄, 屈者益懷憤怒。 雖其才器相等, 別無高下可辨, 而西則汲引如不及, 東則逗撓而不肯進。 雖或外嫌人言, 略加收敍, 而一級必慳, 小罰必行。 齊班共武, 胡、越相背, 同寅之美, 固不可望, 其不至於群起相擊者, 亦幸耳。 西强東弱, 固今積弊。 比驗聖意所在, 每欲曲護一邊, 此固大聖人公平正大之體, 抑强扶弱之意, 而以臣蔽滯, 未見其可。 若果偏佑一邊, 至於勢均體敵, 則彼此傾軋之患, 反有甚於今日, 是資其甲兵, 助其相攻也。 聖慮於此, 或有所遺。 臣願殿下, 姑置朋黨於度外, 淸吾政刑, 整吾紀綱, 先以辨別賢愚爲務, 明施賞罰爲急。 苟其賢也, 則勿拘東西, 勿嫌卑賤, 超而擢之, 無少疑慮, 苟其愚也, 則勿問貴顯, 勿牽形勢, 斥而退之, 無所顧貸。 假使賢才在此, 則一邊獨被收用, 而非爲偏也, 爲賢才之偏在一邊也, 愚庸在彼, 則一邊例被擯斥, 而非爲偏也, 爲一邊之偏多愚庸也。 其進其退, 毋拘於色目, 惟是賢才, 咸被錄用, 不肖例被黜廢, 則大權歸於上, 萬人咸安其分, 僥倖之心, 何自而生, 朋黨之患, 何自而起乎? 賢才登庸, 則在位皆君子矣, 賞罰有當, 則百僚皆思奮矣。 君子在位, 百僚思奮, 則朝廷淸明, 公道大行, 雖使爲朋黨, 亦不可得矣。 操要而效博, 在殿下勉而行之。 疏末又言曰: 朝廷處事, 貴在和平。 朝廷不和, 則四方安仰? 頃因首相事, 朝家起一鬧端, 擧措失當, 景色不佳, 臣竊惜之。 許積之蒙被眷遇, 已有年矣。 上不能輔導聖躬, 有少裨補, 下不能軫恤窮民, 除一弊瘼。 私黨固欲援進, 而少公平之量, 時論多所顧瞻, 而有依違之病。 以此爲咎, 責以大義, 則雖使積爲辭, 亦無以自解矣。 至於賊點之比, 引喩乖刺, 權奸之斥, 無跡可見。 擬人不以其倫, 豈能厭服其心乎? 今之論李翔者, 或曰: "心懷險詖, 擠人不測;" 或曰: "忠憤所激, 論人不差," 兩言皆非也。 今但明斥其非, 以責妄言足矣。 彼以山野之人, 身居言地, 且當別諭之日, 有所論列, 則深治其罪, 未知其可也。 上答曰: "喜爾憂國愛君之誠。 可不留心焉? 爾其勿辭察職。" 疏下備局, 而以三公不備, 請待後日從容回啓, 上從之。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45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23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정론-정론(政論)
其摠權綱則曰:
權者稱物之器, 綱者張網之具。 權移而輕重自懸, 綱動而萬目皆隨。 故人君處百僚之上, 御萬民之衆, 其操縱運動, 斡旋翕張者, 謂之權綱, 而上所以御下, 尊所以御卑者也。 伏願殿下, 先立大體, 審察事情, 以此立定見運權綱, 以爲弛張庶務之道可也。 今國事危急, 朝廷潰亂, 殿下先以一變前轍, 必法古道, 立定主見, 以之斷事務督臣工。 人或曰古道不可復也, 勿聽也, 人或曰前轍不可變也, 勿聽也。 旣知事宜堅定無改, 必使群臣, 莫不從吾之令, 而勿使吾令, 遷撓於群臣之言。 則彼前日之不念國事, 怠惰自肆者, 莫不竦然改心, 鞠躬奔走, 秪承上令矣。 如此則浮妄之說, 無所眩, 虛僞之事, 不得售。 政令統會于一, 操縱皆出於上, 大小齊心, 威令四達, 縱橫伸縮, 無不如意矣。 其破朋黨, 則曰: 朋黨之患, 自古有之, 蓋以小人而誣君子, 止於一時, 相排擯而已, 豈有如擧國波蕩, 累世受毒, 如我朝也? 東西肇黨之說, 聖明想已俯燭矣。 彼沈義謙之不棄舊疵, 金孝元之一時被屈, 顧於國事, 何所輕重? 二人構隙, 旣不相能, 年少淸流, 皆趨於金, 老成耆舊, 與沈相親, 形跡斯分, 猜釁日成, 毒被王室, 害及生靈。 遞相反覆, 互有盛衰, 搢紳士夫, 世傳家法, 守之如令典, 視之如謨訓, 無一人自拔於色目之外, 嗚呼! 可怪也已。 蓋自丁丑以來, 東盛西衰, 自癸亥以後, 西伸東屈, 至于今〔日〕 , 其勢轉盛, 伸者轉操利柄, 屈者益懷憤怒。 雖其才器相等, 別無高下可辨, 而西則汲引如不及, 東則逗撓而不肯進。 雖或外嫌人言, 略加收敍, 而一級必慳, 小罰必行。 齊班共武, 胡、越相背, 同寅之美, 固不可望, 其不至於群起相擊者, 亦幸耳。 西强東弱, 固今積弊。 比驗聖意所在, 每欲曲護一邊, 此固大聖人公平正大之體, 抑强扶弱之意, 而以臣蔽滯, 未見其可。 若果偏佑一邊, 至於勢均體敵, 則彼此傾軋之患, 反有甚於今日, 是資其甲兵, 助其相攻也。 聖慮於此, 或有所遺。 臣願殿下, 姑置朋黨於度外, 淸吾政刑, 整吾紀綱, 先以辨別賢愚爲務, 明施賞罰爲急。 苟其賢也, 則勿拘東西, 勿嫌卑賤, 超而擢之, 無少疑慮, 苟其愚也, 則勿問貴顯, 勿牽形勢, 斥而退之, 無所顧貸。 假使賢才在此, 則一邊獨被收用, 而非爲偏也, 爲賢才之偏在一邊也, 愚庸在彼, 則一邊例被擯斥, 而非爲偏也, 爲一邊之偏多愚庸也。 其進其退, 毋拘於色目, 惟是賢才, 咸被錄用, 不肖例被黜廢, 則大權歸於上, 萬人咸安其分, 僥倖之心, 何自而生, 朋黨之患, 何自而起乎? 賢才登庸, 則在位皆君子矣, 賞罰有當, 則百僚皆思奮矣。 君子在位, 百僚思奮, 則朝廷淸明, 公道大行, 雖使爲朋黨, 亦不可得矣。 操要而效博, 在殿下勉而行之。 疏末又言曰: 朝廷處事, 貴在和平。 朝廷不和, 則四方安仰? 頃因首相事, 朝家起一鬧端, 擧措失當, 景色不佳, 臣竊惜之。 許積之蒙被眷遇, 已有年矣。 上不能輔導聖躬, 有少裨補, 下不能軫恤窮民, 除一弊瘼。 私黨固欲援進, 而少公平之量, 時論多所顧瞻, 而有依違之病。 以此爲咎, 責以大義, 則雖使積爲辭, 亦無以自解矣。 至於賊點之比, 引喩乖刺, 權奸之斥, 無跡可見。 擬人不以其倫, 豈能厭服其心乎? 今之論李翔者, 或曰: "心懷險詖, 擠人不測;" 或曰: "忠憤所激, 論人不差," 兩言皆非也。 今但明斥其非, 以責妄言足矣。 彼以山野之人, 身居言地, 且當別諭之日, 有所論列, 則深治其罪, 未知其可也。 上答曰: "喜爾憂國愛君之誠。 可不留心焉? 爾其勿辭察職。" 疏下備局, 而以三公不備, 請待後日從容回啓, 上從之。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45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23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정론-정론(政論)
其破朋黨, 則曰:
朋黨之患, 自古有之, 蓋以小人而誣君子, 止於一時, 相排擯而已, 豈有如擧國波蕩, 累世受毒, 如我朝也? 東西肇黨之說, 聖明想已俯燭矣。 彼沈義謙之不棄舊疵, 金孝元之一時被屈, 顧於國事, 何所輕重? 二人構隙, 旣不相能, 年少淸流, 皆趨於金, 老成耆舊, 與沈相親, 形跡斯分, 猜釁日成, 毒被王室, 害及生靈。 遞相反覆, 互有盛衰, 搢紳士夫, 世傳家法, 守之如令典, 視之如謨訓, 無一人自拔於色目之外, 嗚呼! 可怪也已。 蓋自丁丑以來, 東盛西衰, 自癸亥以後, 西伸東屈, 至于今〔日〕 , 其勢轉盛, 伸者轉操利柄, 屈者益懷憤怒。 雖其才器相等, 別無高下可辨, 而西則汲引如不及, 東則逗撓而不肯進。 雖或外嫌人言, 略加收敍, 而一級必慳, 小罰必行。 齊班共武, 胡、越相背, 同寅之美, 固不可望, 其不至於群起相擊者, 亦幸耳。 西强東弱, 固今積弊。 比驗聖意所在, 每欲曲護一邊, 此固大聖人公平正大之體, 抑强扶弱之意, 而以臣蔽滯, 未見其可。 若果偏佑一邊, 至於勢均體敵, 則彼此傾軋之患, 反有甚於今日, 是資其甲兵, 助其相攻也。 聖慮於此, 或有所遺。 臣願殿下, 姑置朋黨於度外, 淸吾政刑, 整吾紀綱, 先以辨別賢愚爲務, 明施賞罰爲急。 苟其賢也, 則勿拘東西, 勿嫌卑賤, 超而擢之, 無少疑慮, 苟其愚也, 則勿問貴顯, 勿牽形勢, 斥而退之, 無所顧貸。 假使賢才在此, 則一邊獨被收用, 而非爲偏也, 爲賢才之偏在一邊也, 愚庸在彼, 則一邊例被擯斥, 而非爲偏也, 爲一邊之偏多愚庸也。 其進其退, 毋拘於色目, 惟是賢才, 咸被錄用, 不肖例被黜廢, 則大權歸於上, 萬人咸安其分, 僥倖之心, 何自而生, 朋黨之患, 何自而起乎? 賢才登庸, 則在位皆君子矣, 賞罰有當, 則百僚皆思奮矣。 君子在位, 百僚思奮, 則朝廷淸明, 公道大行, 雖使爲朋黨, 亦不可得矣。 操要而效博, 在殿下勉而行之。 疏末又言曰: 朝廷處事, 貴在和平。 朝廷不和, 則四方安仰? 頃因首相事, 朝家起一鬧端, 擧措失當, 景色不佳, 臣竊惜之。 許積之蒙被眷遇, 已有年矣。 上不能輔導聖躬, 有少裨補, 下不能軫恤窮民, 除一弊瘼。 私黨固欲援進, 而少公平之量, 時論多所顧瞻, 而有依違之病。 以此爲咎, 責以大義, 則雖使積爲辭, 亦無以自解矣。 至於賊點之比, 引喩乖刺, 權奸之斥, 無跡可見。 擬人不以其倫, 豈能厭服其心乎? 今之論李翔者, 或曰: "心懷險詖, 擠人不測;" 或曰: "忠憤所激, 論人不差," 兩言皆非也。 今但明斥其非, 以責妄言足矣。 彼以山野之人, 身居言地, 且當別諭之日, 有所論列, 則深治其罪, 未知其可也。 上答曰: "喜爾憂國愛君之誠。 可不留心焉? 爾其勿辭察職。" 疏下備局, 而以三公不備, 請待後日從容回啓, 上從之。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45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23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정론-정론(政論)
疏末又言曰:
朝廷處事, 貴在和平。 朝廷不和, 則四方安仰? 頃因首相事, 朝家起一鬧端, 擧措失當, 景色不佳, 臣竊惜之。 許積之蒙被眷遇, 已有年矣。 上不能輔導聖躬, 有少裨補, 下不能軫恤窮民, 除一弊瘼。 私黨固欲援進, 而少公平之量, 時論多所顧瞻, 而有依違之病。 以此爲咎, 責以大義, 則雖使積爲辭, 亦無以自解矣。 至於賊點之比, 引喩乖刺, 權奸之斥, 無跡可見。 擬人不以其倫, 豈能厭服其心乎? 今之論李翔者, 或曰: "心懷險詖, 擠人不測;" 或曰: "忠憤所激, 論人不差," 兩言皆非也。 今但明斥其非, 以責妄言足矣。 彼以山野之人, 身居言地, 且當別諭之日, 有所論列, 則深治其罪, 未知其可也。 上答曰: "喜爾憂國愛君之誠。 可不留心焉? 爾其勿辭察職。" 疏下備局, 而以三公不備, 請待後日從容回啓, 上從之。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45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23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정론-정론(政論)
윤7월 12일 을유
강백년(姜栢年)을 승지로, 이홍연(李弘淵)을 대사간으로, 권유(權愈)를 사서로, 남용익(南龍翼)을 홍문 제학으로, 이단하(李端夏)를 대사성으로, 이상진(李尙眞)을 병조 판서로, 조위봉(趙威鳳)을 사간으로, 민정중(閔鼎重)을 대사헌으로, 신석번(申碩藩)을 장령으로 삼았다.
윤7월 15일 무자
헌납 임규(任奎)와 지평 조사석(趙師錫)이 상의 엄한 분부를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패초(牌招)하여도 나오지 않자 면직되었다.
윤7월 17일 경인
호남 감사에게 명하여 경서를 인쇄해서 제주(濟州)에 들여보내게 하였다. 이에 앞서 조정이 어사 이하(李夏)를 제주에 보내 수령을 염찰하고 풍속을 알아보게 하였는데, 이하가 돌아와 말하기를 ‘외딴 곳이라서 서적이 많지 않으니 경서를 인쇄해 보내 선비 기풍을 진작시키자.’고 하였으므로 이때 와서 들여보냈다.
윤7월 18일 신묘
송규렴(宋奎濂)을 헌납으로, 권유(權愈)를 지평으로, 이선(李選)을 겸보덕으로, 조원기(趙遠期)를 필선으로, 김만중(金萬重)을 겸문학으로, 강석창(姜碩昌)을 사서로, 이흥발(李興浡)을 집의로 삼았다. 또 특명으로 이연년(李延年)을 발탁하여 좌윤으로 삼고, 최일(崔逸)을 승지로 삼았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료를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작년에 각종 감한 것을 금년 가을 곡식이 익을 때까지로 한정하였습니다. 그런데 금년 가을 곡식이 잘 익을 것도 미리 헤아리기 어려우니 옛날처럼 회복하는 일은 너무 갑작스러울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금년까지는 당분간 옛날처럼 회복하지 말라."
하였다. 상이 호남의 수재가 참혹하다고 하여 별도로 순심 어사(巡審御史)를 보내 살피게 하였는데, 정태화의 말을 따른 것이다.
함경도의 갑산(甲山)·삼수(三水) 등의 고을에 3일을 연이어 서리가 내렸다.
대제학의 권점(圈點)이 있었는데 김만기(金萬基)는 9점, 이단하(李端夏)·이은상(李殷相)·강백년(姜栢年)은 8점, 남용익(南龍翼)은 7점, 정두경(鄭斗卿)은 6점이었다.
사신은 논한다. 정두경은 젊어서부터 문망(文望)이 있었는데 문장을 지으면 기특한 기운이 있어 사기의 사마천(司馬遷) 문장 법도를 얻었으며 시(詩)도 근세에서 뛰어났다. 성품이 간략하고 얽매이지 않았으며 평소에 늘 술을 마시며 스스로 즐겼다. 또한 교유에 뜻을 끊고 세상과 멀리하였기 때문에 명예는 높았으나 권점은 가장 적었는데, 세상이 모두 아까워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47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24면
【분류】인사-선발(選拔) / 역사-사학(史學) /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정두경은 젊어서부터 문망(文望)이 있었는데 문장을 지으면 기특한 기운이 있어 사기의 사마천(司馬遷) 문장 법도를 얻었으며 시(詩)도 근세에서 뛰어났다. 성품이 간략하고 얽매이지 않았으며 평소에 늘 술을 마시며 스스로 즐겼다. 또한 교유에 뜻을 끊고 세상과 멀리하였기 때문에 명예는 높았으나 권점은 가장 적었는데, 세상이 모두 아까워하였다.
○大提學圈點, 金萬基九點, 李端夏、李殷相、姜栢年八點, 南龍翼七點, 鄭斗卿六點也。
【史臣曰: "斗卿少有文望, 爲文有奇氣, 得史遷法, 詩亦近世絶響。 性踈簡倜儻, 平居常置酒自娛。 絶意交遊, 與世抹摋, 故名譽雖高, 圈點最少, 世共惜之。"】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47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24면
【분류】인사-선발(選拔) / 역사-사학(史學) /
김만기(金萬基)를 좌윤 겸 대제학으로, 임규(任奎)를 사간으로 삼았다.
윤7월 23일 병신
이관징(李觀徵)을 동부승지로, 이단하(李端夏)를 대사성으로, 이선(李選)을 응교로, 조위봉(趙威鳳)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윤7월 27일 경자
홍주국(洪柱國)을 사간으로, 김만기(金萬基)를 호조 참판으로 삼았다.
윤7월 28일 신축
임규(任奎)를 집의로, 김수오(金粹五)·이하진(李夏鎭)을 장령으로, 이여발(李汝發)을 좌윤으로 삼았다.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외방의 죄수들을 소결하였는데,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료들이 입시하였다. 형조 판서 민유중(閔維重)이 나아가 죄수들의 문안을 낭독하면 상이 여러 신료들에게 두루 물어 각기 소견을 진달하게 하였다. 죄수 69명 중 석방된 자가 27명이었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서흥(瑞興)에 수령을 죽인 변고가 있어서 온 고을에 과거를 보지 못하게 한 명령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옮겨 왔다가 옮겨 가는 자가 매우 많다고 하니, 이는 대체로 과거를 보려고 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일체 과거를 보지 못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윤7월 29일 임인
도성에서 전염병으로 죽은 백성이 1백 10여 명이었으며, 외방에서도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현종실록20권, 현종 13년 1672년 9월 (0) | 2025.12.17 |
|---|---|
| 현종실록20권, 현종 13년 1672년 8월 (1) | 2025.12.17 |
| 현종실록20권, 현종 13년 1672년 7월 (0) | 2025.12.17 |
| 현종실록20권, 현종 13년 1672년 6월 (0) | 2025.12.17 |
| 현종실록20권, 현종 13년 1672년 5월 (0) | 2025.1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