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20권, 현종 13년 1672년 8월

싸라리리 2025. 12. 17.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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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계묘

유성이 간방(艮方)에서 나왔는데 색깔이 붉었다.

 

8월 2일 갑진

황해도의 안악군(安岳郡)에 풍재(風災)가 매우 참혹하였다. 연백(延白) 등 고을에 또 충재(虫災)가 있었다.

 

8월 3일 을사

승지를 좌의정 송시열(宋時烈)에게 보내어 유시하도록 명하였다. 그 내용에 이르기를,
"상소를 살펴보고 경의 간절한 마음을 잘 알았다. 아, 국사는 위태롭고 민사는 끝이 없는데, 나의 질병은 한 달 동안이라도 쾌한 때가 없어서 정신과 기력이 날로 점점 감소되어 가므로 경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 날마다 더욱 간절하다. 그런데 사양만 한 채 아득히 나올 기약이 없구나. 비록 나의 정성과 예의는 천박하다 하더라도, 경이 선왕께서 특별히 대우해 주신 뜻을 추모하는 데 있어서는 어떠하겠는가? 경은 나의 지극한 뜻을 체득하여 굳이 사양하지 말고 속히 올라와서 조정과 재야의 소망에 부응하라."
하였다. 상소가 들어간 지 한 달 뒤에야 비로소 회답이 내렸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료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각도의 농사 형편에 대해 여러 신료들에게 하문하니, 모두
"관서가 가장 낫고 양남이 그 다음이며 북로의 흉작이 더욱 심합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어영청의 별마대(別馬隊) 소속인 배준학(裵俊學)이 시재 때에 편전(片箭) 세 발을 쏘아 세 번 다 맞혔는데, 상이 곧바로 전시(殿試)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라고 명하였다. 상이 대신들에게 이르기를,
"정원이, 승지에 대해서는 체직된 뒤에 잡아다 추문하는 전지를 받들어야 한다고 진달하였는데, 경들과 함께 그 가부를 의논하려고 한다."
하니,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잡아다 추문한 뒤에 석방할 만하면 석방시켜 그대로 그 직임에 제수한다는 것이 불가한 것인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우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근시의 신하에 대해서는 잡아 가두라는 명령을 경솔히 내리지 말도록 하면 됩니다. 재신이나 옥당의 관리도 잡혀 갇히고 체직된 자가 없지 않으니, 승지의 말은 시행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형조 판서 민유중(閔維重)이 아뢰기를,
"정주(定州)는 곧 청천강 이북인데도 그곳만큼은 가족을 데리고 있도록 허락하였습니다. 기타 정주와 마찬가지인 고을도 아울러 허락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태천(泰川)·영변(寧邊)·가산(嘉山)·박천(博川)의 네 고을도 모두 가족을 대동할 수 있도록 허락하라."
하였다.

 

장령 김수오(金粹五)가, 일찍이 대직(臺職)에 있으면서 그의 이름이 백간(白簡)033)  에 올랐다고 하여 인피하였는데, 패초(牌招)하여도 나오지 않자 면직되었다. 장령 이하진(李夏鎭)이 일찍이 김징(金澄)에게 무함을 당해 다시 임금을 가까이 모실 수 없으며, 또 비방을 받고 있는 중이어서 감히 동료를 처치할 수 없다는 것으로 인피하였는데, 정원이 그전 일을 가지고 인피하지 말라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하진이 억지를 쓰자 내용을 만들어 받아들였는데, 상이 되돌려 주라고 명하였다.

 

남편을 죽인 죄인 애숙(愛淑)이 처형되었다.

 

김만기(金萬基)가 세 번이나 소를 올려 대제학을 사양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뒤에 김만기가 인대하였을 때 다시 불안하다는 형편을 아뢰었는데, 상이 이르기를,
"이는 출사하기 전에는 의논할 일이 아니므로 연이어 소를 올렸으나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효종 때에 고 판서 김익희(金益熙) 역시 이런 형편에 놓여 있었으므로 청나라에 관한 문서는 별도의 지제교(知製敎)를 차출하여 주관하게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제학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김만기의 아비 김익겸(金益兼)이 정축 호란 때 강화에 들어갔다가 청나라 군병에게 죽었다. 익희는 익겸의 형이다.

 

8월 4일 병오

강백년(姜栢年)을 대사헌으로, 이유(李濡)를 지평으로, 신후재(申厚載)를 필선으로, 장선징(張善瀓)을 좌부빈객으로, 홍처량(洪處亮)을 우부빈객으로, 김휘(金徽)를 도승지로, 조위봉(趙威鳳)을 사간으로, 윤형성(尹衡聖)을 문학으로, 윤천뢰(尹天賚)를 북도 병사로 삼았다.

 

8월 5일 정미

지평 조창기(趙昌期)가 아뢰기를,
"신은 본래 성품이 어리석어 기휘해야 할 바를 몰라서 한 번 미친 말을 하게 되면 비방이 시끄럽게 일어나고 사실에 벗어난 비평도 갖가지로 받습니다. 체차하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집의 임규(任奎)와 장령 이하진(李夏鎭)이 처치하기를,
"비방의 유무는 알 수 없으나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다면 혐의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출사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8월 6일 무신

지평 조창기가 아뢰기를,
"신이 망령스럽게 소를 진달하여 비방을 몹시 받았습니다. 그저께 나와서 사은한 것은 대체로 인혐하여 체차받으려고 했던 것인데, 출사하게 하자고 처치하였으니 참으로 뜻밖의 일로서 신은 의심스러워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신이 미치고 망령된 말로 거듭 때의 기휘를 범하여 벼슬아치나 선비들의 의논이 들끓고 있으므로 처치한 대관이 필시 자세히 들었을 터인데도 계사의 내용에 끝내 명확하게 말하지 않았고, 비방의 유무를 모른다고 핑계대었으니, 무슨 의도란 말입니까?
신의 상소 뜻은 참으로 위로는 성명을 규계하여 비상한 대업을 일으키고 아래로는 누적된 폐단을 바로잡아 오래 전할 수 있는 큰 공렬을 넓히려고 한 것입니다. 이른바 공도(公道)를 넓히고 당파를 철거해야 한다는 것은, 반드시 동쪽을 부축하고 서쪽을 억제하여 알력의 근심이 되도록 할 것이 없다는 것이며, 또한 서쪽으로써 동쪽을 억제하게 해서 불공평한 폐단만 더하게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며, 또한 사람 쓰는 것을 색목(色目) 내에서 허덕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것을 조정해서 세력을 균등하게 하려고 한다면 이는 밖으로는 평균한 것 같으나 사실은 도움이 없으니, 오직 피차를 묻지 말고 색목을 탈피하여 훌륭한 인재만 등용시키고 불초한 자를 물리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털끝만큼이라도 한쪽만 편드는 뜻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대각의 논의가 지나쳐서 화평의 도리에 어긋나면 그 양쪽 끝을 들어 시비를 참작해서 그 중간을 밝게 택하여 성상의 마음을 확실하게 열어 보이므로써, 위로는 의심으로 막힌 병을 풀어주고 아래로는 다른 의논을 화합하게 하라는 것이었으니, 털끝만큼도 성상의 뜻에 순종하려는 생각은 더욱이 없었습니다.
신의 상소 내용이 이와 같은데 불과하니 심술에 있어 공평하다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시속의 보통 생각들은 그 본심은 추구해 보지도 않은 채 현저하게 지적의 대상을 세워 놓고 억지로 사실에 벗어난 비방을 가하였습니다. 세도(世道)의 박절함은 참으로 한심스러우나 신의 마음을 돌아볼 때 신명에게도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처치한 관원이 만약 자기의 견해와 다르다고 하여 배척하거나 어리석고 망령스럽다고 하여 꾸짖는다면 괜찮습니다. 그런데 억지로 출사시키자고 청하면서 말속에는 조롱기가 끼고, 결말이 명확치 못하여 시비의 귀추가 없었으니, 그 뜻을 반복하여 생각해봐도 참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신은 이미 여론의 엄한 배척을 당하였고 명패가 문앞에 이르렀으나 또 나아가지 않았으니, 거만한 죄가 큽니다. 체차해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8월 7일 기유

우창적(禹昌績)을 장령으로, 송규렴(宋奎濂)을 부교리로, 정재희(鄭載禧)를 헌납으로 삼았다.

 

집의 임규(任奎)가 아뢰기를,
"신이 동료들과 함께 상회례(相會禮)를 행하고 조창기(趙昌期)의 피혐한 내용을 보니 헛된 말을 억지로 꾸며 피혐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그의 행사를 추적해 보면 의심할 만하나 그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니 한갓 그 자취만 가지고 곧바로 그르다고 한다면 이 또한 적당한 도리가 아니라고 여겨졌기 때문에 동료들과 함께 그의 상소를 익히 강론해 보고 나서 출사시키도록 처치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출사하게 하자고 청한 뒤에도 소명(召命)을 따르지 않음은 더욱 이유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조창기의 마음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상소를 가져다가 내용을 자세히 보니 결코 단정한 사람이나 올바른 선비의 소행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설령 조창기로서는 지극히 공정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오늘날 이전이나 오늘날 이후에 있었으면 그래도 괜찮습니다마는 오늘날에 있어서는 단연코 불가한 일입니다. 더구나 그 마음이 꼭 지극히 공정한 데서 나온 것도 아닌데다가, 오늘날 상께서 고민하시고 대중이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이때에 불쑥 소를 올려, 전하 마음의 깊이를 엿보려 하였고 전하의 조처를 살펴보려고 한 것이겠습니까.
아깝습니다. 조창기는 젊은 나이로 벼슬길에 올랐는데 무슨 바쁘고 급박한 일이 있기에 기회를 틈타 마음을 써서 이같이 단정치 못한 짓을 한단 말입니까? 신은 훗날 전하의 조정을 어지럽히는 자가 꼭 이 사람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으며, 괴이한 생각으로 틈을 엿보는 무리들이 이를 따라 발을 붙이고 일어날까 염려됩니다. 신은 참으로 지붕을 바라보고 깊게 탄식하면서 그저께 출사하기를 청했던 실수를 후회하고 있습니다. 또 어저께 조창기가 패초(牌招)에 나오지 않고 피혐한 내용을 보니, 종이에 가득히 늘여놓은 말들에 그의 속마음이 더욱 노출되었습니다. 당파의 말을 빌려 성상의 총명을 현란시켜 교묘하게 맞추어 보려고 한 꾀가 불을 보듯 환할 뿐만이 아니었으므로 신은 차마 바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신이 만약 이 사람의 마음씀이 이같은 줄을 알았더라면 그저께의 처치에서 어찌 감히 출사시킬 것을 청하였겠습니까. 사람을 헤아림이 밝지 못하여 마땅히 배척할 자를 배척하지 않았으니 이는 신이 어둡기 때문이며 또한 신의 잘못입니다. 처치가 잘못되었음은 조창기가 말하지 않더라도 참으로 신 자신이 알고 있으니, 체차해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창기의 마음이 얼마나 단정치 못한지는 모르겠다만, 너의 피혐한 내용을 보니 용의가 매우 음험함을 면치 못하였다. 사직하지 말라."
하였는데, 임규가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삼가 살피건대, 임규의 나이 50이 넘었다. 요행히 과거에 급제하여 세력에 빌붙어 기꺼이 매와 사냥개 노릇을 하였으므로 그와 서로 왕래하는 자들도 침을 뱉으며 비루하게 여긴 자들이 많았다. 이번 조창기의 상소에 동서 색목에 관한 설을 개괄적으로 들면서 서쪽이 강하고 동쪽이 약하며 인재의 진퇴에 사정(私情)을 따르는 폐단을 논하였다. 그래서 당시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자들이 너나없이 자신들을 해롭게 한다고 미워하였다. 임규가 그러한 뜻을 보고는 앞장서서 나와 힘을 남기지 않고 공박하여 권력가에게 잘보임으로써 자기 진취의 계책으로 삼았으니 비루한 자들 중에서도 심한 자라고 하겠다. 그가 조창기를 공박한 말에, ‘기미를 틈타 의도적으로 차마 이런 짓을 하였다.’ 하고, 또 ‘종이에 가득히 늘어 놓아 속마음이 더욱 노출되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참으로 자신을 두고 한 말이다. 성상의 비답에 ‘마음씀이 매우 음험하다.’고 배척하였는데, 옛 사람이 이른바 ‘신하를 아는 데는 임금보다 더 잘 아는 자가 없다.’고 한 말이 참으로 그러하다.
○執義任奎啓曰: "臣與同僚, 行相會禮, 見趙昌期避辭, 則架虛鑿空, 强引爲避。 臣以爲跡其行事, 則雖涉可疑, 其心所在, 旣不能灼知, 則徒以其跡, 徑先非貶, 亦非的當之道, 故與同僚熟講文字, 處置請出矣。 請出之後, 又不赴召命, 尤涉無端, 故且不能無疑於昌期之心跡。 取其疏本, 詳覽辭意, 則決知其非端人正士之所爲也。 設使昌期, 或出於至公之心, 在於今日之前, 則猶之可也, 在於今日之後, 則亦猶之可也, 而在今日, 則斷然不可。 況其心未必出於至公, 當今日, 天心激惱, 衆情疑懼之際, 闖然投疏, 欲以窺殿下之淺深, 欲以觀殿下之俯仰? 惜乎! 昌期, 以年少得途之人, 有何忙迫, 而乘機用意, 忍爲此不靖之態也? 臣恐他日亂殿下朝廷者, 未必非此人, 而怪鬼凱覦之輩, 從此接跡而起也。 臣誠仰屋長吁, 方悔再昨請出之失當矣。 昨又接昌期牌不進避辭, 則滿紙張皇, 肝肺益露。 假借朋黨之說, 眩亂聖聰, 欲售巧中之計, 不趐觀火, 臣不忍正視也。 臣若知此人用意之若此, 則再昨處置, 臣, 何敢請出? 揣人不明, 當斥不斥, 此則臣之昏也, 亦臣之謬也。 處置乖當, 不待昌期之言, 而臣實自知, 請遞。" 上曰: "未知昌期心迹不端之如何, 而觀爾避辭, 難免用意之深險也。 勿辭。" 奎, 退待。
【謹按奎, 年過五十。 倖竊科名, 趨附形勢, 甘爲鷹犬, 其所相與來往者, 亦多有唾鄙者矣。 今昌期大疏, 槪擧東西色目之說, 而論西强東弱, 進退循私之弊。 時輩之擅權柄者, 莫不惡其害己也。 奎也承望其意, 挺身而出, 攻斥之不遺餘力, 以取媚於權要, 以爲自己進取計, 可謂鄙夫之甚者也。 其攻昌期之言曰: "乘幾用意, 忍爲此態。" 又曰: "滿紙張皇, 肝肺益露。" 誠自道也。 聖批斥之, 以用意深險, 古人曰: "知臣莫如君。" 信然矣。】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49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25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8월 8일 경술

대사간 이홍연(李弘淵) 등이 처치하였는데, 조창기에 대해 말하기를,
"이미 생각한 바를 진달하였으면 조용히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에 피혐한 것이 부족하여 다시 자신을 과시하는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았으니 자못 가소롭습니다. 또한 소명(召命)을 어겼으니 규례에 있어 체차해야 됩니다."
하였고, 임규에 대해 말하기를,
"당초에 출사하게 하자고 청한 것은 그 의도가 너그럽게 용서하자는 데 있었는데 도리어 배척을 당하였으니, 비록 이것이 억울한 일이기는 하나 말을 허비하면서 인피한 것은 역시 평온을 잃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언관(言官)을 경솔히 교체할 수는 없습니다. 조창기는 체차하고 임규는 출사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이미 평온을 잃은 줄을 알았다면, 억지로 출사하게 하자고 청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임규도 체차시키라."
하였다.

 

단천(端川)에 큰비가 오고 큰바람이 불어 지붕의 기와가 다 날아가고 곡식 열매가 죄다 떨어졌다.

 

8월 9일 신해

조원기(趙遠期)를 집의로, 최후상(崔後尙)을 지평으로, 윤진(尹搢)을 헌납으로, 이익상(李翊相)을 대사간으로, 안후(安垕)를 정언으로, 김익경(金益炅)을 승지로 삼았다.

 

대사간 이홍연(李弘淵)이, 상이 임규를 특별히 체차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이어 임규를 옹호하고 조창기를 배척하면서, 처치하여 결말지은 이유를 모두 진달하고는 체차시켜 주기를 청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정언 홍만종(洪萬鍾)이 처치하여 체차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8월 11일 계축

제주 목사 윤계(尹堦)가 하옥되었다. 이에 앞서 제주에 극성스런 도적이 있었는데, 윤계가 부임하여 8명을 체포하고 자복을 받은 뒤에 보고하지도 않고 참수하였다. 뒤에 도적을 체포한 자에게 상을 주자고 청한 계사로 인해 형조가 마음대로 죽인 것은 불가하다고 하여 추고하기를 청하자, 상이 특별히 잡아다 문초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의금부에서 고신(告身)을 빼앗는 것이 마땅하다고 아뢰니, 상이 따랐다.

 

8월 12일 갑인

상이 뜸을 떴다.

 

8월 15일 정사

좌의정 송시열(宋時烈)이 소를 올려 면직시켜 줄 것을 청하였다.

 

8월 16일 무오

경산 현감(慶山縣監) 이원귀(李元龜)를 통정 대부에 승진시키고, 개령 현감(開寧縣監) 이시현(李時顯)을 준직(準職)에 제수할 것을 명하였는데, 진휼의 정사를 잘했기 때문이다. 그 나머지 수령들은 별도로 곡물을 마련한 일로 감사가 포상하기를 계청하여 차등있게 상을 주었다.
사신은 논한다. 곡물은 땅에서 나는 것으로 한정이 있는 것인데 지금 이른바 별도로 마련하였다고 하는 것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당(唐)의 말기에 이른바 ‘선여(羨餘)’034)  라는 것과 다를 게 있겠는가. 신해년의 큰 흉년을 겪은 끝에 비록 속된 관리가 가혹하게 세를 거두는 정치로 백성들의 고혈을 짜서 상 받기를 바랬다 하더라도 윗사람이 이를 금할 줄을 모르고 도리어 포상하였으니, 어떻게 법지키는 관리를 권장할 수 있겠으며 피폐한 백성을 소생시킬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50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25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역사-사학(史學)


[註 034] ‘선여(羨餘)’ : 포상을 노리어 바치는 공물.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곡물은 땅에서 나는 것으로 한정이 있는 것인데 지금 이른바 별도로 마련하였다고 하는 것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당(唐)의 말기에 이른바 ‘선여(羨餘)’034)  라는 것과 다를 게 있겠는가. 신해년의 큰 흉년을 겪은 끝에 비록 속된 관리가 가혹하게 세를 거두는 정치로 백성들의 고혈을 짜서 상 받기를 바랬다 하더라도 윗사람이 이를 금할 줄을 모르고 도리어 포상하였으니, 어떻게 법지키는 관리를 권장할 수 있겠으며 피폐한 백성을 소생시킬 수 있겠는가.
○戊午/命慶山縣監李元龜, 陞通政, 開寧縣監李時顯, 除授準職, 以能於賑政故也。 其餘守令, 以別備穀物, 因道臣褒啓, 賞賜有差。
【史臣曰: "穀者, 出於地而有限, 今所謂別備者, 抑未知從何出耶。 與唐末所謂羡餘, 有以異乎? 當辛亥大荒之餘, 縱俗吏掊克之政, 刻民膚血, 以徼功賞, 而上之人不知禁, 反褒崇之, 則何以勸循吏, 而蘇疲氓哉?"】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50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25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역사-사학(史學)

 

8월 17일 기미

김익경(金益炅)·이지익(李之翼)을 승지로, 이연년(李延年)을 예조 참판으로 삼았다.

 

8월 24일 병인

정시성(鄭始成)을 장령으로, 신후재(申厚載)를 교리로, 최후상(崔後尙)을 부수찬으로, 박태상(朴泰尙)을 지평으로, 오시수(吳始壽)를 평안 감사로 삼았다.

 

8월 26일 무진

상이 정원으로 하여금 교서를 대신 기초하게 하여 송시열의 상소에 정중하게 답하고 승지를 보내어 돈유하게 하였다.

 

8월 27일 기사

의금부 나졸들의 지만 공사로 인하여 죄인 윤경교(尹敬敎)를 마찬가지로 잡아다 문초하라고 명하였다. 정원이 다시 아뢰어 명령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8월 28일 경오

조수익(趙壽益)을 좌윤으로, 송규렴(宋奎濂)을 헌납으로, 정시성(鄭始成)을 장령으로, 이단하(李端夏)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양사가, 윤경교를 잡아다 문초하는 것은 성덕(聖德)에 흠이 된다고 간쟁하였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8월 29일 신미

우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옛날 당 태종(唐太宗) 말년에 귀양가는 자들이 길에서 지체한다고 하여, 하루에 10역(驛)을 가도록 칙령을 내렸는데 이때부터 좌천된 관리가 대부분 온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주자(朱子)가 이를 사기에 특별히 써서 그 잘못을 드러냈으니 법령이 너무 각박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뒷날의 법식을 정한 것에 불과하였을 뿐이지, 그 사람에게 죄를 주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의령(宜寧)에서 갑산(甲山)까지는 수천리의 길이므로 윤경교가 7, 8일을 지체한 것은 사세상 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로써 죄를 준다면 법률 적용의 잘못이 당나라 때보다 더한 것입니다. 신은 성명께서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상이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요전 경연에서 한 이야기를 경도 자세히 들었을 것인데 지금 이같이 말한단 말인가? 정원의 경솔한 말은 말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마는, 죄인을 압송해갈 적에 30, 40리에 불과한 것이 또한 많은데 하루에 10역을 가도록 한 것과 동일시한 것은 무슨 뜻인가? 나는 이해가 안 간다."
하였다. 부수찬 최후상(崔後尙)도 차자를 올려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辛未/右相金壽恒, 上疏略曰:
昔唐 太宗末年, 以流貶之人, 在途逗遛, 勑令日馳十驛, 自是左降官多不全云。 朱子特書于史, 以著其失, 可見法令之深刻也。 然其時亦不過定爲後式而已, 未聞罪其人也。 宜寧之距甲山, 數千餘里也, 敬敎之七八日遲滯者, 勢所難免。 而以此爲罪, 則其爲用法之乖謬, 又不止唐朝之失也。 臣願聖明, 裁察焉。                                    上不納曰: "曩者筵中說話, 卿聞之詳矣, 而今乃若是云云? 政院妄率之言, 尙何足道, 罪人之押去, 不過三四十里者亦多, 乃與日馳十驛者, 比而同之, 抑何意也? 予未可曉也。" 副修撰崔後尙, 亦上箚請還收成命, 上不聽。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50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25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사법-행형(行刑) / 역사-고사(故事)

 

8월 30일 임신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신병을 이유로 사직서를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을 내렸다.

 

대사헌 강백년(姜栢年)이 신병 때문에 소명(召命)에 나아가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면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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