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20권, 현종 13년 1672년 9월

싸라리리 2025. 12. 17.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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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계유

박증휘(朴增輝)를 사간으로, 민정중(閔鼎重)을 대사헌으로, 조위봉(趙威鳳)을 수찬으로, 이항(李沆)을 주서로 삼았다.

 

9월 2일 갑술

상이 뜸을 떴다. 도제조 김수항(金壽恒)이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삼가 차자에 대한 비답을 보니, 신은 망령되고 경솔한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원의 계사를 살펴보니, 내가 처음에는 허락했다가 뒤에 고치는 것처럼 여기고 있는데 자못 사실이 아니다. 윤경교가 범한 것이 죽을 죄인지는 모르겠으나, 정원이 재차 아뢰고 대간이 쟁론하여 기화(奇貨)로 삼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였다.

 

9월 5일 정축

강백년(姜栢年)을 대사성으로, 신여철(申汝哲)을 평안 병사로 삼았다.

 

9월 8일 경진

상이 뜸을 떴다. 도승지 김휘(金徽)에게 일렀다.
"희정당(熙政堂)과 통명전(通明殿), 양화당(養和堂)에 기울고 무너진 곳이 있으며, 인정전(仁政殿)에도 기와를 고칠 곳이 있다. 3조(三曹)에 말하여 개수하게 하라."

 

9월 10일 임오

이휴징(李休徵)을 장령으로, 심유(沈濡)를 사서로 삼았다.

 

상이 뜸을 떴다.

 

9월 12일 갑신

상이 사은 부사(謝恩副使) 민점(閔點)의 사양하는 상소로 인해 그대로 평안 병사를 맡도록 명하고 이정영(李正英)을 차출해 보내게 하였다.

 

9월 15일 정해

영의정 정태화가 아홉 번째 사직서를 올렸는데, 상이 너그럽게 답하고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였다.

 

9월 18일 경인

대사간 이익상(李翊相) 등이 아뢰기를,
"요전에 내린 대사면령으로 인해 병오년 이전에 방출된 곡물을 탕감시키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이는 참으로 궁한 백성에게 은혜를 베푼 성스러운 혜택이었습니다. 그러나 들으니, 통영과 병영에서 방출한 곡물은 원회부(元會付)의 곡물과 다르므로 각 고을이 엄한 명령에 겁을 먹고서 간혹 받아들이지 못한 것을 이미 받아들인 것으로 기록한 것이 있다고 합니다. 없어진 곡물을 탕감시키는 이런 때에 이것만이 혜택을 받지 못한다면, 이웃이나 일가붙이에게 징수하는 폐단이 옛날과 같고야 말 것입니다. 해도의 감사로 하여금 통영과 병영에서 곡물을 나누어 주었던 문서를 가져다가 자세히 조사한 다음 보고케 하여 일체로 탕감시킬 수 있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평안 병사 민점(閔點)이 사은 부사에 제수된 뒤에 감히 거만스럽게 소를 올려 병을 끌어대어 면직되기를 바랬으니, 이는 참으로 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후일의 폐단에 관계되고 듣기에 놀라우니, 파직시키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9월 19일 신묘

상이 양심합(養心閤)에 나아가 비국의 여러 신료와 김만기(金萬基)·이단하(李端夏) 등을 인견하였는데, 이조 판서 이경억(李慶億)과 호조 판서 김수흥(金壽興)도 명패로 불러 입시하였다. 이단하가 나아가 아뢰기를,
"우리 나라에는 일찍이 늠료를 주는 군병이 없었는데, 선조(宣祖) 때에 정승 유성룡(柳成龍)이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는 일로 인해 그중 장정들을 뽑아 병법을 가르쳤습니다. 그 숫자가 처음에는 수백명도 채 못되었으나 현재는 도성에 포수(砲手) 5천 5백여 명이 있고, 이 밖에도 별대(別隊)가 1천 명, 어영병(御營兵)이 1천 명, 정초병(精抄兵)이 5백 명, 금군(禁軍)이 7백 명이며, 각청의 군관들도 1만 명에 가까운데, 병자년 이전에 비하면 그 숫자가 여러 배나 됩니다. 지금 일정한 세입(稅入)이 12만 석인데, 군병을 양성하는 데에 8만 석이 소비되므로 나머지 4만 석만 가지고 국가 경비에 쓰고 있으니 너무나 부족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덜어내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려고 하니 역시 어려운 일입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는 인심을 얻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듣자니 작년에 지급한 곡물을 모두 받아들이게 하였다는데 이러고도 인심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인심을 얻는다면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군병의 역할을 할 수 있어서 급할 때 믿을 수 있을 것인데, 어찌 반드시 장부에 올려진 군병들의 이름만 기다릴 것이 있겠습니까. 이로써 말한다면 용도를 넉넉히 하는 방법은 군병을 감축시키는 것보다 먼저 할일이 없습니다."
하였는데, 결국은 시행되지 않았다.

 

9월 20일 임진

지평 이유(李濡)가 아뢰기를,
"주서를 단망(單望)으로 하라고 계하(啓下)하셨는데, 사체에 손상되고 또 후일의 폐단에 관계됩니다. 해당 승지를 추고하고 이항(李沆)은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21일 계사

경최(慶㝡)를 동부승지로, 남용익(南龍翼)을 공조 판서로, 윤증(尹拯)을 집의로, 서문상(徐文尙)을 문학으로, 신선온(申善溫)을 설서로 삼았다.

 

9월 22일 갑오

사은사 복평군(福平君) 이연(李㮒)과 부사 홍처대(洪處大) 등이 북경에서 돌아왔다.

 

상이 모든 의원들을 들어와 진찰하게 하였다. 승지 이지익(李之翼)이 아뢰기를,
"정원의 낭청에 실무자가 없은 지 오래되었는데 이항(李沆)마저 논계를 당하여 체차되었으니, 앞으로 천망할 길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후일의 정사에 이항을 다시 단망(單望)하라고 비답을 내리겠다."
하였다.

 

9월 26일 무술

강백년(姜栢年)을 대사헌으로, 이항(李沆)을 주서로, 김해일(金海一)·김두익(金斗翼)·민암(閔黯)을 겸 춘추로 삼았다. 고사에 6조·사간원·종부시·승문원의 당하관 1명이 춘추를 겸하고, 춘방(春坊)035)  은 2명이 나누어 겸하고, 옥당의 제학 이하와 사헌부의 집의 이하 및 승지는 으레 겸하고, 외방에는 8도의 도사가 으레 겸하며 수령 중에서도 택하여 겸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듣고 보는 것을 모두 기록하여 사관(史館)에 보내게 한 다음 전최(殿最)에 참고토록 하였는데, 그 의도가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근래에는 직임의 폐지가 풍습이 되어 날짜와 날씨만 기록하여 성적을 매기는 데에 응할 뿐이며 성적을 매기는 일을 맡은 자도 책망하지 않으니, 식자들이 탄식하였다.

 

9월 27일 기해

정원이 민점(閔點)을 파직시킬 것을 아뢰니, 상이 중하게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9월 29일 신축

수어사 이완(李浣)이 뵙기를 청하니, 상이 인견하였다. 이완이 아뢰기를,
"남한 산성의 곡물로 경기 고을에 방출된 수량이 1만 5천 2백 석입니다. 그중 마땅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 4분의 1인데, 아직도 다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양주(楊州)는 4분의 1내에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80석이며, 포천(抱川)은 30석, 영평(永平)은 10석입니다. 세 고을의 수령에 대해 마땅히 죄주자고 청해야 하겠습니다만, 교체시키면 폐단이 있으니 먼저 추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이완이 또 아뢰기를,
"산성의 여덟 절에 거주하는 중의 수를 합하면 4백 명인데, 중들에게도 먹을 것이 모자라서 늘 군량으로 대여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한 절에 미곡 백여 석을 유치해두면 군량이 소비되지 않을 것이고 외부에서 왕래하는 중들 역시 편리할 것입니다. 김좌명(金佐明)이 재임시에 절마다 곡물을 모으게 하였는데 많은 곳은 80석, 적은 곳은 수십 석이었습니다. 지금 곡물을 더 모아두려 하는데 공명첩(空名帖)과 고신첩(告身帖)으로 곡식을 모으는 규례를 써서 모은다면 8백여 석은 모을 수 있을 것입니다. 중의 통정첩(通政帖) 3백 장, 가선첩(嘉善帖) 50장과 노직(老職)의 통정첩·가선첩 각 50장을 해조로 하여금 만들어 주게 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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