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20권, 현종 13년 1672년 10월

싸라리리 2025. 12. 17.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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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임인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윤경교(尹敬敎)를 북쪽 변방에 정배시킬 때에 재차 신의 어리석은 소견을 진달하였는데, 마침내 삭탈 관직하여 내쫓는 것으로 감하였습니다. 그 당시 성상의 하교에 신의 말을 중하게 여기시는 듯하였기에 신의 마음에 영광과 감격이 여러 신료들보다 만배나 되었습니다. 그 뒤 등대했을 때 또 하교의 말씀을 들으니, 윤경교가 귀양지에 느리게 갔다고 하여 잡아다 문초하려고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성상께서 또 실수를 하실까 매우 두려워서 서둘러 내용을 만드는 사이에 경솔하게 인조 때에 윤명은(尹鳴殷)을 압송해간 나장(羅將)만 논한 일을 인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찌 나장이 형벌을 받은 뒤에 또 윤경교를 잡아다 문초하라는 명령이 있을 줄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이는 밝은 시대의 누가 된다고 어리석은 자나 지혜로운 자나 모두들 말하고 있습니다. 신이 대신의 반열에 있으면서 일찍 한번 차자를 올리려고 하였으나, 아직까지 묵묵히 있었던 것은 성명께서 양사의 청에 윤허하시기만을 기다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래도록 윤허하지 않으시어 겨울철이 이미 닥쳤으므로 신은 참으로 탄식하면서 밤중에도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전옥서의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라는 명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는 신이 더욱 감탄스럽기 그지없기에, 속마음을 털어 놓으면서 다시 더 생각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빨리 관대하고 인애스런 은전을 베푸셔서 아랫사람들의 소망에 부응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壬寅朔/領相鄭太和, 上疏略曰:
尹敬敎之配北邊也, 再陳愚見, 竟蒙減以削黜。 而其時聖敎, 有若歸重於臣言者然, 臣心榮感, 萬倍諸臣。 厥後登對, 又聞下敎, 以敬敎緩赴謫所之故, 將欲拿問。 臣深恐聖上, 又作失中之擧, 忙急措語之間, 輕引仁祖朝, 只論尹鳴殷押去羅將之事矣。 豈料羅將受刑之後, 又有拿問敬敎之命哉? 其爲明時之累, 愚智皆言。 臣忝在大臣之列, 非不思早進一箚, 而尙今含默, 只欲待聖明允從兩司之請也。 兪音久閟, 冬月已屆, 臣誠嗟咄, 中夜無寐。 聞典獄署, 有輕囚放釋之命, 臣於此尤不勝感歎, 玆暴下情, 以祈更加思量。 亟施寬仁之典, 以副群下之望。                                    上從之。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52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26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10월 3일 갑진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료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도성의 방출곡에 대한 일을 거론하고 여러 신료에게 하문하였는데, 모두 아뢰기를,
"다 미곡으로 받아들이면 반드시 미곡값이 폭등할 근심이 있을 것이니, 백성의 소원에 따라 은화로 계산해 받느니만 못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지평 이유(李濡)가 연달아 앞전의 일을 아뢴 뒤에, 생각한 바를 진달하기를,
"윤경교(尹敬敎)를 이미 안치시키도록 형을 감하였다면 다시 잡아다 문초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잡아다 문초한다는 것은 숨긴 사실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윤경교를 아직 대면하지는 못했지만 만약에 대면하더라도 나졸들의 공초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구원하기에 급하여 며칠 지체하였다는 것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하였다. 승지 최일(崔逸)이 아뢰기를,
"대간의 계사에서 한 말은 나졸의 공초대로 말한 것에 불과합니다."
하니, 상이 큰 소리로 이르기를,
"그 대간이 어찌 눈이 없겠는가? 대간의 계사 중에 관인(寬仁) 등의 말은 온순한 말이 아니라 기롱하고 조소하는 것 같다. 나같이 매우 각박한 임금이 어찌 관인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이유가, 엄한 분부를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나갔다.

 

10월 4일 을사

지평 박태상(朴泰尙)이 처치하여 이유를 출사하게 하자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5일 병오

조원기(趙遠期)를 집의로, 강시경(姜時儆)을 장령으로, 신후재(申厚載)를 헌납으로, 조위봉(趙威鳳)을 보덕으로, 남용익(南龍翼)을 형조 판서로, 이수언(李秀彦)을 설서로, 민유중(閔維重)을 우참찬으로, 이혜(李嵆)를 승지로, 여성제(呂聖齊)를 병조 참의로 삼았다.

 

사헌부가 윤경교를 삭탈 관직하여 내쫓으라는 명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대사간 이익상(李翊相)이 아뢰기를,
"신이 윤경교의 일로 석 달 동안 힘써 쟁론하였으나 마침내 허락을 받지 못하였는데, 대신이 말 한 마디 하자 즉시 윤허하셨습니다. 이는 신들의 말이 믿을 것도 없고 들을 것도 없다고 여기셔서 그런 것입니다. 앞으로 무슨 면목으로 언지(言地)에 무릅쓰고 있겠습니까. 체차해 주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10월 6일 정미

지평 이유(李濡)가 패초(牌招)에 나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면직되었다. 지평 박태상(朴泰尙)과 정언 안후(安垕)도 대신의 차자에 대한 비답이 거북스럽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우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첫번째 사직서를 올렸는데 상이 너그럽게 답하고 사관을 보내어 유시를 전하게 하였다.

 

10월 7일 무신

대사헌 강백년(姜栢年)이 아뢰기를,
"신의 생질 조이병(趙爾炳)이 미처 일을 마치고 복명하기도 전에 대간을 겸대한 것으로 서로 피하기를 전날과 같이 하고 있습니다. 또 신이 명을 도로 거두게 하는 의논에 참여하였으니 그 의도가 바로잡으려는 데에 있는 것인데 임금에게 믿음을 받지 못한 것이 여러 동료들과 다름이 없습니다. 체차해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부교리 이규령(李奎齡)이 처치하여, 대사간 이익상(李翊相), 정언 안후(安垕), 지평 박태상(朴泰尙)은 출사시키고, 대사헌 강백년(姜栢年)은 체차하도록 청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10일 신해

대사간 이익상이 패초에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면직되었다.

 

10월 11일 임자

좌의정 송시열이 소를 올려 사직하였는데,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고 체직을 허락하면서 사관을 보내어 유시를 전하게 하였다.

 

10월 12일 계축

송시열을 판중추부사로, 이홍연(李弘淵)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우의정 김수항이 소를 올려 면직을 청하였는데, 상이 너그럽게 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10월 14일 을묘

조사석(趙師錫)을 접위관으로 삼았다. 당초에 김해일(金海一)을 단망(單望)으로 입계하였는데,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여 가려서 차출하라고 명하였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다.

 

10월 15일 병진

지평 김해일이 동료 중에 서로 피해야 할 사람이 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면직되었다. 장령 이하진(李夏鎭)이 김해일의 처숙부(妻叔父)였다.

 

10월 17일 무오

윤심(尹深)을 헌납으로, 성호징(成虎徵)을 지평으로, 신후재(申厚載)를 부교리로, 목창명(睦昌明)을 설서로 삼았다.

 

10월 19일 경신

병조가 아뢰기를,
"무과 전시(武科殿試)의 명관(命官) 계사로 인해 ‘하임우(夏霖雨)의 부자가 같은 시험에 합격한 일에 대해 관례를 상고하여 품달해 처리하라.’는 명이 계셨습니다. 대체로 부자가 함께 문과의 초시(初試)에 합격하거나 혹은 무과의 초시에 함께 합격한 경우에 있어서는 으레 아들 이름으로 다음 시험에 응시하라는 공문을 내주었습니다. 만약 각기 문과 무과의 초시에 합격한 자가 있는 경우에도 마땅히 문과 무과의 전시(殿試)에 나누어 나가게는 하나, 함께 합격하였더라도 그 아들은 다음 시험에서 합격시켜 주었습니다. 어찌 부자가 같은 시험장에 나갈 수 있겠습니까. 이는 실로 예전에 없었던 일이니 어찌 상고할 만한 전례가 있겠습니까. 이는 누구나 알기 쉬운 일로서 하임우가 모를 리는 만무합니다. 그런데 그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부자가 함께 합격하면 앞뒤로 나누어 합격자 명단을 불러줄 수 있고 한 사람만 합격하더라도 이번 과거를 독점하는 데엔 손해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자취를 숨기고 이름을 기록하였으니 그의 의도가 음험합니다. 만약 엄중하게 다스리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을 경계할 수 없을 것이니, 하임우 부자를 합격자 명단에서 삭제하고 유사로 하여금 법률에 비추어 죄를 주게 하소서. 그리고 녹명관(錄名官)도 그 사실을 알았을 것 같으니 마땅히 하임우 등과 대질시켜 사실을 조사하게 해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21일 임술

무과 전시의 명관이 아뢰기를,
"응시자 이만방(李晩芳)이 두 기예에 합격한 뒤 녹명 단자(錄名單子)를 상고해 보니 그의 외조부는 곧 역적 조인필(趙仁弼)이었는데 학생(學生)으로 써 넣었습니다. 그가 함부로 응시한 정상이 매우 놀랍습니다. 법으로 보아 마땅히 삭제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의 아비 해천군(海川君) 이영(李映)이 신묘년의 역적 변고 때 충의의 마음을 분발하여 왕실을 부축하였다. 그래서 선왕께서 일찍이 하교하시기를, ‘이 사람이 아니었으면 종사가 위태로울 뻔하였다.’고 하셨는데, 별도로 우대하는 일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이만방을 삭제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정원 역시 아뢰어 시소(試所)의 초기(草記)가 매우 체통이 있다고 하면서 명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문과 전시에서 유명천(柳命天) 등 21명을 뽑고, 무과 전시에서 박정원(朴廷元) 등 5백 13명을 뽑았다.

 

상이 하교하기를,
"이만방의 아비는 신묘년의 역적 변고를 당하여 죽도록 힘을 써 왕실을 부축하였다. 비록 정훈(正勳)에는 참여되지 못하였으나 그의 아들을 금고(禁錮)하는 것은 부당할 듯하다. 그 당시에 혹 조정에서 처분한 일이 있는가? 신묘년의 《일기(日記)》 중에는 이 일이 누락되었다고 한다. 영의정은 이 일의 전말을 자세히 알 것 같으니 사관을 보내 문의하여 아뢰라."
하였다. 정태화가 대답하기를,
"해원령(海原令) 이영(李映)과 진사 신호(申壕) 등이 연명으로 소를 올려 그의 장인 조인필(趙仁弼)의 역모 사실을 고발하였습니다. 국청이 이 소에 따라 문초하여 죄인의 자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조인필이 매를 맞다가 죽어서 비록 사형시키지는 못하였으나, 전교로 인하여 가산을 적몰하는 등의 일을 한결같이 사형 죄인의 전례대로 시행하였습니다. 그후 선왕께서 논상하여 두 사람이 모두 3등의 자품에 승진하였으며, 특별히 영을 부총관으로 삼고 호를 동지중추부사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신이 아는 바입니다. 그러나 조인필의 외손을 금고시켰는지 여부에 있어서는 그 당시 조정에서 처분한 일이 없었던 듯합니다. 또한 역률에 죽은 자의 외손은 함부로 과거에 응시할 수 없다는 것도 의거할 만한 관례가 생각나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양심합(養心閤)에 나아가 뜸을 떴다. 도제조 김수항이 아뢰기를,
"하임우(夏霖雨) 부자가 합격한 것을 취소한 데 대해 외부의 의논도 억울하다고 하는 자가 많습니다. 하임우는 먼 외방의 사람이므로 필시 무식하여 망령된 짓을 한 것일 겁니다."
하니, 상이, 그 아들만 취소시키고 이어서 그 죄를 논하여 다스리게 하라고 명하였다.

 

10월 23일 갑자

집의 조원기(趙遠期)와 지평 박태상(朴泰尙)이 아뢰기를,
"이만방의 아비 영(映)에게 비록 변고를 고발한 공로가 있으나, 이만방이 역적의 외손으로서 함부로 과거장에 나왔으니 국법이 너무나 엄하지 못한 것입니다. 합격을 취소하지 말라고 명하신 것은 참으로 성상의 의도가 격려시키는 데에 있다는 것을 알겠습니다마는, 국가가 사람을 뽑는 법이 매우 엄중하니 단연코 그 아비에게 공로가 있다고 하여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학생(學生)이라는 칭호를 흉측한 사람에게 쓴 것은 더욱 놀랍습니다. 방목(榜目)036)  에서 삭제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보거인(保擧人)037)  이 서명한 것과 녹명관(錄名官)이 기록하게 허락한 것도 매우 놀랍습니다. 모두 파직시키고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추고만 하라고 하였다.

 

10월 24일 을축

지평 안후(安垕)가 패초에 나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면직되었다.

 

10월 25일 병인

집의 조원기(趙遠期)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듣건대, 대궐의 전각에 비가 새고 기울어진 곳이 있어서 재목과 돌을 운반하는 등의 역사를 이미 요리하여 시작하였으나 그 비용이 적지 않다고 하니, 아마도 시기가 아닌 듯합니다. 국운이 불행하여 백성이 다 죽어가는데 이런 때를 당하여 만약 다시 재력을 허비해가면서 때아닌 역사를 일으킨다면, 국가가 어떻게 지탱할 수 있겠으며 백성이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또 원근에서 전해 듣고 이 일을 어떻게 여기겠습니까. 만약 전하께서 국가 형편의 위태로움과, 백성의 곤궁한 형편과, 재물의 비축이 고갈되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셨다면 얼마 안 되는 돈과 비단이라도 백성을 위해 아끼고 차마 헛되이 쓰지 않으실 터인데 어느 겨를에 건축의 일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속히 개수하라는 명령을 중지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각에 비가 새고 기울어진 곳을 개수하는 일은 시기를 기다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의 말도 우연한 것이 아니니 해조로 하여금 명년 가을에 거행케 하라."
하였다.

 

10월 26일 정묘

신석번(申碩蕃)을 장령으로, 김해일(金海一)·심유(沈濡)를 정언으로, 조사석(趙師錫)을 사서로 삼았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료를 인견하여 전곡(錢穀)과 군사(軍事)에 관한 몇 건의 일을 의논해서 결정하였다. 이를 마친 뒤에 우의정 김수항이 나아가 아뢰기를,
"외간에서는 대궐의 금령이 엄하지 못하다고 말하니 듣기에 놀랍습니다. 듣자니, 의관 양제신(梁濟臣)이 군관으로서 북경에 들어가고자 사신인 창성군(昌城君) 이필(李佖)에게 청하였는데 필이 허락하지 않고 물리쳤다 합니다. 뒤에 양제신이 상의 하교를 전하면서 따라가려고 하자 필이 듣고 크게 놀라며 꾸짖어 물리쳤다고 합니다. 일전에 필이 신을 찾아왔기에 그 일에 대해 물었더니 필이 말하기를, ‘양제신이 따라가고 싶다는 뜻을 내관에게 말하였는데 내관이 조금 후에 상의 하교를 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자들을 나타나는 대로 중하게 다스리지 않으면 간사한 길을 막고 대중의 의혹을 풀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곡절이 있다. 들으니, 창성군에게 병이 있어 데리고 가려 하였으나 어의(御醫)이므로 어렵게 여긴다고 하였다. 그래서 내가 데리고 가고 싶으면 불가할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고 하였다. 그런데 그가 어찌 감히 결정이 났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양제신에게 약을 의논하는 직임부터 먼저 없애고 이어 잡아다 문초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해당 내관(內官)도 마찬가지로 잡아다 문초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먼저 파직시키고 뒤에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집의 조원기(趙遠期)가 아뢰기를,
"내관이 감히 사사로운 말을 외람스럽게 임금에게 진달하였으니 안팎에서 쑥덕거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후일의 폐단에 관계됩니다. 해당 내관을 양제신과 마찬가지로 잡아다 문초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른 곡절이 있었다."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27일 무진

집의 조원기(趙遠期) 등이 아뢰기를,
"근년 이래로 흉년과 전염병이 잇따라서 꼭 참혹한 병란을 겪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안팎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놀랄 줄을 모르고 있으므로 지식있는 자들이 걱정해온 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문과와 무과의 합격자를 발표한 뒤에 풍년이 든 때와 같이 사치스럽게 허비하는 것을 버려 둘 수가 없습니다. 신은(新恩)·창악(倡樂)·경연(慶宴) 등의 일을 모두 금지시키소서."
하였는데, 재차 아뢰어서야 윤허를 받았다.

 

10월 30일 신미

한성부에서 호구(戶口)의 수를 올렸는데 식년(式年)이기 때문이다.
경중 5부(京中五部)는 원래 호수가 2만 4천 8백 호인데, 남자는 9만 8천 7백 13명이고, 여자는 9만 3천 4백 41명이다.
경기는 호수가 10만 7천 1백 86호인데, 인구는 46만 9천 3백 31명이다.
관동은 호수가 4만 6천 1백 45호인데, 인구는 21만 7천 4백 명이다.
해서는 호수가 9만 6천 49호인데, 인구는 38만 6천 6백 85명이다.
관북은 호수가 6만 8천 4백 93호인데, 인구는 29만 6백 14명이다.
호서는 호수가 17만 8천 4백 44호인데, 인구은 65만 2천 8백 명이다.
영남은 호수가 26만 5천 8백 호인데, 인구은 96만 60명이다.
호남은 호수가 23만 6천 9백 63호인데, 인구는 84만 9천 9백 44명이다.
관서는 호수가 15만 4천 2백 64호인데, 인구는 68만 2천 3백 71명이다.
경외 도합은 호수가 1백 17만 6천 9백 17호인데, 인구는 4백 69만 5천 6백 11명으로, 남자가 2백 54만 1천 5백 52명이고, 여자는 2백 15만 4천 59명이다.
제주는 호수가 8천 4백 90호인데, 인구는 남자가 1만 2천 5백 57명이고, 여자가 1만 7천 21명이다.
대체로 우리 나라는 여자가 많고 남자가 적은데 호적에 들지 않은 여자가 매우 많다. 신해년의 기근과 전염병에 죽은 백성이 즐비하고 떠돌아 다니는 자가 잇따랐다. 그런데 이것은 호적에 들어 있는 숫자만 의거해서 기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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