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20권, 현종 13년 1672년 12월

싸라리리 2025. 12. 17.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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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임인

김만기(金萬基)를 발탁하여 병조 판서로 삼고, 최석정(崔錫鼎)을 설서로, 민유중(閔維重)을 지경연으로 삼았다.

 

간원이, 양제신(梁濟臣)과 윤완(尹完)은 국법상 마땅히 율을 상고하여 죄주어야 한다는 것으로 해를 넘기며 힘써 쟁론하였으나 마침내 허락받지 못하였다.

 

12월 4일 을사

상이 시임·원임 대신과 여러 재신 및 삼사와 함께 세 번째 복심하여 처분하였는데 재차 복심 때와 같이 하였다. 그리하여 서울과 지방의 죄수 중에 사정이 용서할 만한 자 14명에 대해 사형을 감해주었다. 형조 판서 남용익(南龍翼)이 아뢰기를,
"사적으로 돈을 주조한 죄인에 대해 이미 사형을 면해 주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후로 사적인 주조의 금지에 대해서 하나의 정식을 지적하여 안팎에 포고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고, 행 판중추 정치화(鄭致和), 좌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는 중국과 달라서 돈이 통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오직 송도(松都) 근처의 몇 고을에만 통용되고 있는데다가 또 관청에서 주조하는 규례마저 없으니 사적인 주조만을 금지한다는 것은 실로 형식적인 일입니다."
하니, 상이 지금부터는 금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12월 5일 병오

경상도 각 고을에 7월 이후로 가뭄이 매우 심하였고 11월 이전에는 한 점의 눈도 내리지 않았다.

 

상이 정원에 전교하였다.
"참찬 송준길(宋浚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놀랍고 슬퍼서 마음을 가눌 수 없다. 본도 감사로 하여금 관곽(棺槨)과 조묘군(造墓軍) 및 모든 상례의 소용에 미진한 것을 모두 제때에 지급하게 하라."

 

12월 9일 경술

우의정 이경억(李慶億)이 소를 올려 면직을 청하였는데,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10일 신해

정재희(鄭載禧)를 집의로, 여성제(呂聖齊)를 대사간으로, 송규렴(宋奎濂)을 헌납으로 삼았다.

 

12월 13일 갑인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료들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수항이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수양하고 반성하는 도리에 대해 반복해 진달하면서 경계하니, 상이 기꺼이 받아들이고, 또한 정성으로 직임을 이행하여 하늘이 마음을 돌리기를 바래야 한다고 여러 신료들에게 신칙하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충청도의 재해 고을로서 피해입은 면(面)의 포병 보인의 가포(價布)를 감해 받을 것을 감사가 계청하였습니다. 다른 도의 예에 따라 3필에서 1필을 감해 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호조 판서 김수흥(金壽興)이 아뢰기를,
"숙천(肅川)의 색리(色吏)가 관청의 방출곡 3천여 석을 빈민에게 주지 않고 중간에서 가져다 판매하다가 손해를 보아 지금 갚을 길이 없다고 합니다. 이같이 간교한 색리는 전례대로 변방 고을에 이주시키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별도로 처치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색리는 효시하고 그 곡물은 전부 면제하라."
하였다.

 

12월 14일 을묘

형조 판서 남용익(南龍翼), 참판 홍처대(洪處大), 참의 이지무(李枝茂)가 죄를 지어 파직되었다. 이는 사형수를 심리할 때에, 이미 죽은 자와 옥을 탈출하여 도망한 자들을 초계(抄啓) 속에 싸잡아 기록하였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었다.

 

12월 15일 병진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12월 16일 정사

민유중(閔維重)을 형조 판서로, 이익(李翊)을 이조 참의로, 강백년(姜栢年)을 대사간으로, 황준구(黃儁耉)를 황해 감사로, 민정중(閔鼎重)을 대사헌으로, 김휘(金徽)를 도승지로, 이혜(李嵆)를 우승지로, 유병연(柳炳然)을 남도 병사로, 구일(具鎰)을 경기 수사로, 노정(盧錠)을 통제사로, 유비연(柳斐然)을 평안 병사로 삼았다.

 

정언 홍만종(洪萬鍾)·이일정(李日井) 등이 아뢰기를,
"작년에 조정에서 경기 각 고을에 분부하여 각종 방출곡을 정해진 수량대로 거두어 들이게 한 뒤에 경관(京官)을 파견하여 창고 조사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각 고을이 대부분 수량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이미 경중을 나누어 죄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또 들으니, 그중에는 관청에서 쓸 것을 가져다 채워 놓거나 혹은 석수(石數)를 나누어 만든 다음 창고로 옮겨다 채워서 조사할 때 죄를 면하려고 한 일이 번번이 있었다고 합니다. 올 가을에 이르러서 지난해 받아들이지 못한 방출곡을 연기시켜 받으라는 명령이 있게 되자, 허위로 기록했던 고을은 정해진 한도 외의 것을 추징해 받아 축난 수량을 채우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민가에 아무 것도 없는 이런 때를 당하여 평년과 다름없이 마구 독촉하여 조정의 은혜로운 뜻이 아래에 미치지 못하고, 빈궁한 백성들이 국가를 원망하게 하였습니다. 당초 창고 조사를 할 때 허위로 기록한 수령은 감사로 하여금 조사하여 보고하게 해서 죄를 주고 허위로 기록된 곡물도 조사하게 해서 지난해 받지 못한 예에 따라 똑같이 연기시켜 받아들임으로써 백성들의 원망을 풀어주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여쭈어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이 대간의 계사를 살펴보니, 과연 이런 일이 있었다면 참으로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본도로 하여금 엄명하게 사실을 조사해낸 다음 보고하게 해서, 여쭈어 처리할 수 있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12월 18일 기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대마도 태수(對馬島太守) 평의진(平義眞)이 예조에 글을 보냈는데 그 내용은 모두 왜관을 옮기게 해 달라고 간청하는 뜻이었다.

 

12월 19일 경신

김휘(金徽)를 대사간으로, 강백년(姜栢年)을 도승지로, 민시중(閔蓍重)을 우부승지로, 이유상(李有相)을 부응교로 삼았다.

 

충청도의 수재를 살피러 간 어사 유상운(柳尙運)이 소를 올려 아뢰기를,
"신이 관활하고 있는 18개 고을 중에 영춘(永春)·단양(丹陽)·청풍(淸風)·연풍(延豊)·청산(靑山)·황간(黃澗)·회인(懷仁)·보은(報恩) 등 고을은 산이 높고 들이 좁습니다. 그래서 목면이 제대로 선 밭이 적고 벼의 이삭이 패지 못한 논이 많은가 하면 심지어 기장·조·콩도 거의 다 말라 버렸습니다. 그러니 8개 고을의 모든 가포와 신역을 적당하게 견감시키고 죽어버린 포병의 보인들도 마땅히 가포를 감해 주어야 이웃과 일가붙이가 보전키 어려운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그 상소를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다른 도의 재해 고을의 예대로 포병 보인의 군포(軍布)는 3필 중 1필을 감해 주고 모든 가포와 신역은 3분의 1을 감해 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忠淸道水災看審御史柳尙運上疏, 言:
臣所管十八邑中, 永春、丹陽、淸風、延豐、靑山、黃澗、懷仁、報恩等邑, 山高野窄。 木綿少立苗之田, 禾穀多未穗之畓, 至於黍、粟、豆太, 擧皆枯損。 八邑諸般布役, 量宜蠲減, 砲保身死之類, 亦宜減布, 然後可無隣族難保之弊。                                    上, 下其疏于備局。 回啓云: "依他道災邑例, 砲保則三匹減一匹, 諸般布役, 減三分之一。" 上從之。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58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29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재정-역(役) / 군사-군역(軍役)

 

12월 21일 임술

김만중(金萬重)을 부교리로, 박순(朴純)을 장령으로, 박진한(朴振翰)을 충청 병사로, 이상경(李尙敬)을 전라 병사로 삼았다.

 

전라도 해남(海南)과 능주(綾州) 등의 고을에 우레와 번개가 크게 치면서 비와 우박이 섞여 내렸다.

 

12월 22일 계해

민시중(閔蓍重)을 대사성으로, 신후재(申厚載)를 부수찬으로, 이익상(李翊相)을 이조 참의로, 맹주서(孟胄瑞)·이관징(李觀徵)을 승지로 삼았다.

 

12월 26일 정묘

임상원(任相元)을 지평으로 삼았다.

 

12월 30일 신미

보덕 조원기(趙遠期)가 소를 올려 세자에게 글읽기를 권하도록 청하였다. 이어서 설날을 맞아 단본(端本), 진학(進學), 교질(矯質), 신독(愼獨), 권강문(勸講問), 친궁료(親宮僚), 택좌우(擇左右), 병완호(屛玩好) 등 여덟 가지 잠계(箴戒)를 올렸는데, 상이 기꺼이 받아들였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료들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수항(金壽恒), 우의정 이경억(李慶億)이 지난해 감했던 물종을 복구시키는 것이 마땅한지의 여부에 대해 의논하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무릇 진상하는 물품에 대해서는 신이 감히 의논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성명께서 절충하여 처리하시는 데에 달렸을 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상하는 물품 중에 긴요한 것은 복구시키고 그 나머지는 모두 원래 수량 중에서 반만 복구시키라. 제주(濟州)는 농사가 흉작이니 작년에 다달이 진상하였던 것과 각사에 상납할 물종은 모두 복구시키지 말라."
하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접위관 조사석(趙師錫)이 지금 내려갈 것인데 저들과 응수할 말을 대략 강구해서 결정해 보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왜관 이전을 허락할 것인지의 여부에 대해서도 각기 소견을 말하라."
하였다. 김수항과 이경억이 아뢰기를,
"허락하거나 허락하지 않는 것은 그리 결정하기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번 서계(書契)를 보건대, 두드러지게 애걸하는 태도가 있으니 다시 다른 걱정거리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이 또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와 판중추 정치화(鄭致和)의 말을 들으니, ‘우리 나라는 일본과 수로로 통신하고 있는데, 저들이 수로의 불편을 걱정하여 이미 포구(浦口)를 팠고 보면 이웃 나라와 사귀는 도리에 있어서 끝내 허락하지 않는 것이 옳은 일이지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예조 판서 정지화(鄭知和)가 아뢰기를,
"근래 왜관 이전을 허락할 것인지의 여부에 대해 논의가 같지 않으므로 신이 밤낮으로 생각해 보았으나 좋은 계책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근일 너무나 소요스럽고 인심이 크게 변하였으니, 이로 인해 불화의 불씨가 생기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염려스럽습니다."
하고, 지중추부사 유혁연(柳赫然)이 아뢰기를,
"저들이 청한 왜관을 이전할 곳은 순천(順天)·웅천(熊川)·거제(巨濟) 등의 세 곳을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순천을 허락한다면 호남 조운(漕運)의 길이 끊어질 것이며, 웅천과 거제를 허락한다면 통영이 제 구실을 할 수 없을 것인데 어떻게 허락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포구를 팠다는 말은 본래 믿을 수 없는 것인데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접위관으로 하여금 우선 그 요청을 막도록 하고 바다를 건너간 역관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다시 의논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또 근일 시장을 여는 일을 제외하고는 부산 첨사로 하여금 왜관 근처에 사람이 왕래하지 못하도록 엄히 금지하게 하고 금령을 범하는 자는 즉시 효시하게 하되, 만일 첨사가 엄히 금지시키지 못할 경우에는 동래 부사로 하여금 규찰하여 논죄하도록 명하였다.
○上引見大臣、備局諸臣。 左相金壽恒、右相李慶億, 以往年裁減物種, 議復舊當否。 壽恒曰: "凡係上供, 臣不敢容議。 惟在聖明折衷處之耳。" 上曰: "上供之物, 其中緊要者復舊, 其餘竝令元數中, 一半復舊。 濟州年事失稔; 上年月令進上, 及各司上納物種, 竝勿復舊。" 壽恒曰: "接慰官趙師錫, 今當下去, 與彼酬應之言, 大約講定, 以送宜矣。" 上曰: "然。 移館許否, 亦各陳所見可也。" 壽恒、慶億曰: "許與不許, 無大段難決之事。 以今書契見之, 則顯有哀乞之狀, 不知其更有他憂也。 臣且聞領相鄭太和、判中樞鄭致和之言: ‘我國與日本, 水路通信, 而渠憂水路之不便, 旣已掘浦, 則其在交隣之道, 終不之許, 未知其可。’ 云矣。" 禮判鄭知和曰: "近以移館許否, 論議不齊, 臣蚤夜以思, 未得善策。 而第近日騷屑太甚, 人心大變, 因此生釁, 亦何難乎? 是可慮也。" 知中樞柳赫然曰: "彼所請移館之地, 不出於順天、熊川、巨濟三處。 許順天, 則湖南漕運之路絶矣, 許熊川、巨濟, 則統營不得措手足矣, 如何其許之? 況掘浦之說, 本不可信者乎?" 上曰: "令接慰官, 姑塞其請, 待渡海譯官之歸, 更議可也。" 且命近日開市之外, 令釜山僉使, 嚴禁倭館近處往來之人, 其犯禁者, 卽令梟示, 如僉使不能嚴禁, 則令東萊府使, 糾察論罪。"
顯宗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實錄卷之二十終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58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29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외교-왜(倭) / 재정-상공(上供) / 재정-진상(進上)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법-치안(治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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