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21권, 현종 14년 1673년 2월

싸라리리 2025. 12. 17.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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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신축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집의 정재희(鄭載禧), 지평 안후(安垕)가 아뢰기를,
"외방 관리로서 휴가를 받고 집에 돌아갔던 자가 오랫동안 임소에 돌아오지 않아 여러 달에 이르고 있습니다. 맡은 일만 수행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또한 마부와 아전들이 양식을 꾸리고 따라 다녀야 하는 폐단이 많다고 합니다. 각도로 하여금 특별히 신칙하게 하여 휴가의 기한이 지났는데도 임소에 돌아오지 않는 자를 적발해서 죄를 주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3일 계묘

이민서(李敏叙)를 대사성으로, 김익훈(金益勳)을 수원 부사로 삼았다.

 

호조 판서 김수흥(金壽興)이 청대하여 들어와 아뢰기를,
"신이 겸직하고 있는 총융청(摠戎廳)의 차비군(差備軍)이란 것은 3초(哨)인데 용인(龍仁)·양지(陽智) 등의 고을에 있습니다. 그러나 30여 년 동안 한 번도 조련한 일이 없어 장수와 병졸 간에 서로 얼굴도 모르고 있으니 갑자기 급한 일을 당하게 된다면 어떻게 힘을 쓸 수 있겠습니까. 신이 서울에서 기수(旗手)와 취수(吹手)을 모집하여 그 수가 이미 찼으니 용인 등지에 있는 군사는 마땅히 속오군에 소속시켜야 합니다."
하고, 훈련 대장 유혁연(柳赫然)이 아뢰기를,
"이 3초(哨)의 군사는 마땅히 총융사(摠戎使)에 소속시켜 때때로 조련시켜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4일 갑진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평안 병사 유비연(柳斐然)이 사조(辭朝)하니, 상이 인견하고 이르기를,
"본도에는 군정(軍政)을 포기한 지가 오래 되어 급한 일이 있을 때 믿을 만한 것이 없다. 군사를 모아 무비에 힘쓰기는 곤란하더라도 혹 사냥을 의탁하여 군사를 모아 강습해야 할 것이다."
하니, 비연이 아뢰기를,
"마땅히 형세를 보아 하겠습니다."
하였다.

 

2월 5일 을사

상이 팔로(八路)와 강화·개성부에 유지(諭旨)하였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며 먹는 것은 백성의 근본이다. 먹는 것을 풍족하게 하는 방법은 농사에 힘쓰고 곡식을 소중히 함에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내가 부족한 탓으로 하늘이 돕지 않아 수재와 한재가 연달아 일어나고 있으니, 내가 그 때문에 잠을 자도 잠자리가 편하지 않다. 지금 봄날이 따뜻해지고 있으니 권농하는 일을 조금도 늦출 수 없다. 임금이 친경하여 권농하는 일은 옛날에 왕천하하던 정사이니, 나는 옛 제도를 본받아 사방 백성들에게 솔선이 되고자 한다. 그러나 다만 겨를이 없다. 나와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오직 관찰사가 있을 뿐이고 백성과 가깝게 지내는 직책은 수령만한 것이 없다. 나의 이 농정(農政)을 밝히고자 하는 뜻을 몸받아, 자목관(字牧官)에게 포고하여 그들로 하여금 밭두둑과 논두렁에 드나들면서 들녘의 형편을 살펴서 밭갈고 씨뿌리는 시기를 놓치지 않게 하고 김매는 일에 있어서도 적기를 잃지 않게 하고 겉치레로만 하는 태도를 보이지 말게 하라."

 

2월 6일 병오

예조 판서 정지화(鄭知和), 공조 판서 장선징(張善瀓)이 유죄로 면직되었다. 석채(釋菜)의 헌관(獻官)으로서 병을 핑계하고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덕원 부사(德源府使) 이필형(李必馨)이 배전차원(陪箋差員)으로 상경하여 조정에 나가 하직 인사를 올렸다. 상이 인견하고 본읍의 폐단과 민간의 질고(疾苦)에 대해 묻고, 이어 교시하였다.
"지금 막 권농의 교서를 내렸으니, 그대는 나의 지극한 뜻을 몸받아 백성을 사랑하고 농사에 힘써 마음을 다하여 직무를 봉행하라."

 

좌상 김수항이 상차하기를,
"검전(檢田)이 잘못된 것에 대하여 마땅히 등급을 나누어 죄를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광주 부윤(廣州府尹) 이세화(李世華)는 작질이 2품이니 다른 수령과 차이가 있고, 그가 잘못한 죄는 군기(軍機)에 대한 잘못에 비할 것이 아닌데도 갑자기 매질을 했습니다. 국가의 체통을 손상할까 염려되니, 아주 용서하기 곤란하다면 마땅히 다른 벌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차자의 말이 참으로 옳다. 추고만 하라."
하였다.
○左相金壽恒上箚曰:
檢田差錯, 當分等科罪。 而廣州府尹李世華, 秩是二品, 與他守令有間, 其所坐, 非如軍機失誤之比, 遽加箠杖。 恐傷國體, 有難全宥, 則宜施他罰。                                    上曰: "箚辭誠是。 只推考。"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3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31면
【분류】사법-탄핵(彈劾)

 

2월 8일 무신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참찬 송준길은 선조(先朝)에 은례(恩禮)와 권대(眷待)가 멀리 천고에 없는 것이었고, 과인에게는 춘궁(春宮)에 있을 때부터 가르치고 깨우쳐 준 공이 감반(甘盤) 정도가 아니었다. 그러니 정의(情義)의 친밀함인들 어찌 얕고 적었다고 하겠는가. 지금 와서 생각하니, 공을 생각하는 뜻과 감상의 회포를 억제할 수 없다. 해조로 하여금 의정(議政)에 추증하여 나의 뜻을 표하게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전 판서 남용익(南龍翼)과 전 참판 홍처대(洪處大)를 서용하라."
하였다.

 

2월 9일 기유

박태상(朴泰尙)을 정언으로, 민정중(閔鼎重)을 예조 판서로, 남용익을 공조 판서로, 강백년(姜栢年)을 대사헌으로, 홍처대를 도승지로, 신정(申晸)을 승지로 삼았다.

 

병조가 아뢰기를,
"재외인(在外人) 중에 아버지의 이름과 어머니의 성 및 나이마저 모르는 자가 있으니, 도신(道臣)에게 자세히 조사하여 보고하게 해서 먹거리 제급(題給)을 일체 거행하는 근거로 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2월 10일 경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유거(柳椐)를 승지로 삼았다.

 

2월 11일 신해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복평군(福平君) 이연(李㮒) 등이 상소하였다.
"신들이 요즘 《황명통기(皇明通紀)》·《십육조광기(十六朝廣記)》·《양조종신록(兩朝從信錄)》 등의 책을 상고해 보니, 인조 대왕께서 계해년 반정하신 일에 대해 그 전기(傳記)가 사실과 틀려 망극하게도 무함을 받고 있었습니다. 신들이 책을 덮고 통곡을 하면서 비분한 마음에 죽고 싶은 심정이 아닌 적이 없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인조 대왕께서 난을 평정하고 올바른 질서로 돌려 놓으신 공렬과 덕업이야말로 정대하고 광명하여 고금에 뛰어나며 천하를 울릴 만합니다. 그런데 잘못 전하는 말과 사실을 무시한 기록이 이렇게 극도에 이르렀으니, 이런 사실이 천하 후세에 전해진다면 어찌 온 동토(東土) 안에 사는 수많은 백성들이 애통해 하고 절박해 하지 않겠습니까. 지난해 신들이 사신으로 가서 청국의 《진신편람(搢紳便覽)》을 얻어 보았는데 마침 명사 찬수관(明史纂修官)을 설치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무함을 변명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니, 속히 사신을 보내어 사실을 근거로 명백하게 변명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사서(史書)에 잘못 기록된 말을 고칠 수 있다면 하늘에 계신 인조 대왕의 존령이 반드시 저 세상에서 기뻐하실 것이며 전왕의 공덕을 빛나게 하시는 전하의 효행에 대해서도 만만세에 할 말이 있게 될 것입니다. 삼가 신들이 올린 상소를 묘당(廟堂)에 내려 물으시면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辛亥/福昌君 楨、福善君 柟、福平君 㮒等上疏曰:

 

2월 12일 임자

사간 송창(宋昌), 정언 홍만종(洪萬鍾)이 아뢰기를,
"승지 유거는 일찍이 대직(臺職)을 맡았었는데 일을 만나면 회피해서 공론에 버림받은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반열의 관직에 제수되니 물정(物情)이 달갑게 여기지 않습니다.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다가, 재차 아뢰자 곧 윤허하였다.

 

집의 정재희(鄭載禧), 장령 성호징(成虎徵), 지평 안후(安垕)·이당규(李堂揆)가 아뢰기를,
"진주 목사 김하량(金厦樑)은 본래 탐욕스럽고 교활한데 늙으면서 더욱 심해졌습니다. 본직을 제수받고는 오로지 자신을 살찌우는 것만 일삼아 관저(官儲)가 이미 고갈되었고, 그 피해가 쇠잔한 백성에게 미치고 있습니다. 적곡(糴穀)을 나누어 줄 때 원곡(元穀)을 덜어 내어 자기 집에 몰래 실어가고 가을이 되어 곡식을 받아 들일 적에는 공공연히 민간에게 넘치게 징수하여 그 나머지를 가지고 모자라는 원곡의 수를 채웠으니, 파직하소서.
자산 군수(慈山郡守) 조상주(趙相周)는 본디 행검(行檢)이 없어서 두루 읍비(邑婢)들을 간음하였고, 심지어 계복 죄인(啓覆罪人)004)  으로 옥중에 갇혀있는 본군 품관(品官)의 딸을 밤마다 관아 안으로 끌어들여 머물려두고 밤을 지내는 등 추문(醜聞)이 전파되었습니다. 그러니 사판(仕版)에서 깎아 내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모두 잡아다 신문하여 처치하라."
하였다.

 

2월 13일 계축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재신을 인견하였다. 상이 왜관(倭館)을 옮겨 설치하는 일에 대해 언급하니, 여러 신하들이 반복하여 논란하였지만 끝내 의견이 모아지지 않았다. 상이 복창군(福昌君) 등의 소본(疏本)을 내어 보이면서 이르기를,
"선왕이 이 지경에 이르도록 무함을 받고 있으니 신원하고 변무하는 거조를 그만둘 수 없게 되었는데, 그대들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좌상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이 말은 인조조 때부터 있었습니다. 반정을 한 초기에는 조사 심문하는 일까지 있게 되어, 그때 조정의 백관들이 정문(呈文)으로 변무하였는데, 신의 할아버지 김상헌(金尙憲)이 진주사(陳奏使)로 연경에 사신을 갔었습니다. 그런데 예부(禮部)가 글을 보내어 묻기를 ‘팔로(八路)의 백성들이 모두 새임금에게 귀순하지는 않았다고 하는데, 따르지 않는 자들은 누가 주동하고 있는가…….’ 하자, 신의 조부가 즉시 정문하여 변명하였고, 돌아올 때에는 등채무신(登菜撫臣)이 또한 그에 대해 물었다고 합니다. 이는 필시 폐조(廢朝)의 흉얼(凶孼)들이 가도(椵島)에 말을 퍼뜨려 중국에 흘러 들어가게 한 것입니다. 필부가 무함을 당해도 반드시 원통함을 풀려고 할 것인데, 하물며 선왕이 무함을 당하는 것이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뒤로 신하의 마음에 어찌 하루인들 편안하겠습니까. 시세와 사체가 종계(宗系)를 고칠 때와는 다름이 있습니다만, 이 글을 보게 되니 차마 보아 넘길 수 없습니다. 비록 책망을 받게 되더라도 그냥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고, 병판 김만기(金萬基)가 아뢰기를,
"조종(祖宗)이 이런 무함을 받고 있으니, 신원하고 변무하는 일을 조금도 늦춰서는 안 됩니다. 다만 신의 어리석은 견해로는 종계를 고치던 때와는 그 도리와 사체 및 시세가 모두 다르다고 봅니다. 도리에 대해서는 번거로운 말을 기다리지 않아도 성명께서 반드시 생각하실 것입니다. 시세라고 말한 것은, 비록 변무라고 하더라도 때가 다르고 일이 변한 뒤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명나라가 기록한 것을 저네들이 고친들 어찌 후세 자손에게 빛날 것이 있겠습니까. 사체라고 말한 것은, 대신이 시작만 해놓고 끝맺음을 못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회전(會典)》은 황제와 학사가 직접 점검하고 문장을 고친 것이니, 이 책에 사실과 틀리는 말이 있다면 마땅히 진달하여 변명해서 고쳐야 합니다. 그러나 《명사(明史)》의 경우는 모두 야사(野史)로서 한 사람이 잘못 전해진 것을 잘못 듣고 수록한 것에 지나지 않는데, 어떻게 그 기록한 것마다 번번이 고치기를 청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강화 유수 민시중(閔蓍重), 응교 이선(李選)은 김만기와 의논이 같았고, 훈련 대장 유혁연과 집의 정재희(鄭載禧)는 아뢰기를,
"변무해야만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상 이경억(李慶億)이 출사하거든 원임 대신 및 2품 이상과 회의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그러나 뒤에 변무하는 일은 실제로 시행하지는 않았다. 이선(李選)이 청하기를,
"노산군(魯山君) 묘에 수졸(守卒)를 두고 관청에서 사시제 및 기제의 제수(祭需)를 주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반정(反正) 때의 훈신으로 능풍군(綾豊君) 구인기(具仁墍) 및 원종 공신 두어 사람만이 있으니, 아울러 옷감과 먹을거리를 내리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15일 을묘

이세익(李世翊)을 승지로 삼았다.

 

2월 18일 무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이휘진(李彙晋)을 장령으로 삼았다.

 

집의 정재희, 지평 이당규 등이 아뢰기를,
"나라의 기강이 해이하여 사람들이 법을 아랑곳 않고 있습니다. 외방의 당하(堂下) 관리들이 출입할 때마다 유옥교(有屋轎)를 타는데, 심지어 현감과 찰방도 모두 그 잘못된 것을 본받고 있습니다. 법을 무릅쓰고 스스로 방자하게 구는 습관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여러 도로 하여금 일체 금단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20일 경신

사간 송창(宋昌), 정언 홍만종(洪萬鍾)이 아뢰기를,
"해주(海州) 지방의 죄인 조은금(早隱金)의 죄범은 강상(綱常)을 범한 관계로 조정에서 자세히 조사하여야 할 일이기에 본주(本州)에 분부하여 잡아오게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전후하여 공초에 연루되어 응당 추문해야 할 각 사람들을 엄히 가두고 기다려야 마땅할 것인데, 겸임 청단 찰방(靑丹察訪) 김응성(金應聲)은 계책을 세워 은밀히 체포하지 못하였고, 심지어 죄인의 형제마저도 다 놓치고 말았습니다. 조정의 명령을 봉행하는 데 신중하지 못한 죄를 통렬하게 징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잡아다 문초하고 죄를 정하소서.
전 감사 최관(崔寬)은 비록 체임되었더라도 아직 교귀(交龜)를 하지 않았으니 바로 도를 책임진 신하입니다. 그런데 분부를 엄히 하지 못하여 범인을 놓치게 하였으니, 중률로 추고하소서. 무안 현감(務安縣監) 박이문(朴以文)은 관리로서 일을 처리한 것이 형편없으므로 이웃 고을에서, 겸관(兼官)을 정하지 말라고 상사(上司)에 정소(呈訴)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고, 감사도 파직시키라고 하였다.

 

2월 21일 신유

윤심(尹深)을 헌납으로, 조위봉(趙威鳳)을 수찬으로 삼았다.

 

정언 홍만종(洪萬鍾)이, 법을 적용함에 합당함을 잃어서 응당 피혐해야 하는데도 피혐하지 않아 물의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체직을 청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이는 최관을 추고하라고 청하자 상이 특별히 파직시켰기 때문이었다.

 

2월 22일 임술

집의 정재희, 장령 성호징, 지평 안후 등이 아뢰기를,
"대사헌 강백년(姜栢年)이 사직 상소를 아침에 입계(入啓)하였는데, 정원이 곧바로 패초를 내었다가 그것이 잘못임을 깨닫고 사람을 보내어 뒤쫓아가 되돌렸으니 매우 잘못되었습니다. 해거름에야 상소에 대한 비답이 비로소 내려와 그대로 즉시 패초를 내었으니 사체가 진실로 그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시관(試官)의 낙점(落點)이 마침 이즈음에 내렸는데 백년이 수점(受點)되지 못하자, 정원이 들어올 것이 없다는 뜻을 일편 말로 전하고 소패(召牌)를 환수하였습니다. 막중한 명패(命牌)를 두 번씩이나 헛되게 사문(私門)에 임하게 하였으니 정원이 일을 잘못함이 매우 형편없습니다.
그리고 이미 소명(召命)을 받은 뒤에도 처음에는 부르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는 이유로 핑계를 하고, 두 번째는 나아가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핑계를 하였으니, 분의(分義)로써 헤아려 보건대 또한 매우 온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해당 승지는 체차하고 백년은 두 번이나 패초를 내었어도 나오지 않은 것을 죄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두 번이나 패초를 내었는데 나오지 않았다는 것으로 죄를 주라는 것이 온당한지를 모르겠다."
하였다. 해당 승지를 추고하라고 세 번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백년이 패초를 내었는데 나오지 않은 것은 사체가 참으로 그런 것인데, 패초에 나오지 않았다고 죄주는 율을 감정하라고 헌부가 아뢴 것은 전에 없던 것이어서 물의(物議)가 모두 비웃었다. 그러므로 정재희 등이 인피하였는데 체직되었다.

 

2월 24일 갑자

병조가 아뢰기를,
"어제 신시(申時)에 결속리(結束吏)가 말하기를, 지금 신부(信符)도 없이 함부로 들어오는 한 사람이 있기에 잡아들이려고 했는데 옆에 있던 술취한 놈이 그 사람을 구하려고 여러모로 가로막아 그를 도망가게 하고는 자신을 구타하고 또 쓰고 있던 입자(笠子)까지 갈기갈기 찢었다고 하기에, 술취한 자를 잡아들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곳을 살펴보니 입자(笠子)를 찢어버린 것이 과연 호소한 말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술취한 놈에게 곡절을 물어보니 내역(內役)하는 인출장(印出匠)이라고 칭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법에 따라 결곤(決棍)하지 않고 다만 약간 볼기만 쳐서 놓아 보내고, 또 그의 차지(次知)를 가두고 그 입자를 보상해 갚아 주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내관(內官)이 결속리를 잡아다가 무겁게 태장(笞杖)을 쳤습니다. 설령 내역하는 자들에게는 금하지 말라는 규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만약 신부(信符)가 없다면 함부로 들어오는 허다한 사람들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 술취한 자는 당초 신부가 있는지 없는지도 물어보지 않고 다만 금제받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결속리를 구타했기 때문에 조금 볼기를 쳐 벌을 주었던 것인데, 이 일로 인하여 하리(下吏)들이 중죄를 받기에 이르렀으니 신은 탄식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대체로 궐안의 시끄러움을 금지하는 일은 모두 결속리가 관장하는 것인데, 지금 함부로 들어오는 사람을 붙잡은 사람이 도리어 구타를 당하고 또 뒤따라 죄를 받고 있으니, 이와 같은 일이 그치지 않는다면 궐안의 시끄러움을 금하고 잡인의 출입을 금하는 일은 장차 거행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사체로 헤아려 보건대 아마도 이와 같이 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며 후일의 폐단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결속리가 차비문에서 장을 고분고분 안 맞은 실상은 분명하게 드러나 의심할 것이 없는데도 도피한 하리를 비호하려는 행위가 매우 해괴하다."
하였다. 승지 이관징(李觀徵)이 아뢰기를,
"서방색(書房色) 이계립(李繼立)의 수본(手本)을 보니 ‘결속리를 차비문에서 잡아다가 치죄하려고 하였는데 스스로 그 죄를 알아 차리고 금방 도피하고 나타나지 않으므로 다시 별감(別監)을 시켜 잡아오게 하니, 같은 하인들이 끌어잡고 여러 말을 하면서 즉시 일으켜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결속리 서성해(徐成海) 및 끌어잡은 하인 등을 가두고 엄형을 청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병조의 초기(草記)를 보니 내관이 결속리를 잡아다가 중한 태장을 쳤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수본과 초기의 사연이 크게 서로 다르기에 신이 괴이하게 생각하여 병조의 관리를 불러서 그 곡절을 물어 보니, 결속리 서성해가 과연 장 육십(杖六十)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수본에서 이른바 도피하고 나타나지 않았으며 끌어잡으며 여러 말을 하였다는 등의 말은 실상이 아닙니다. 더없이 중대한 선계(先啓) 수본이 이같이 실상을 잃었으니 일이 매우 놀라우며 뒷날의 폐단이 될 것입니다. 해당 내관을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즉시[趁]라고 하는 한 글자를 보면 이미 장벌(杖罰)을 받았다는 뜻은 자연히 그 속에 있는 것이다. 본원에서 이른바 크게 서로 다르다고 하면서 실상을 잃었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매우 살피지 못한 것이다. 더구나 선계한 것이 다른 수본과 다르다면 추고를 청한 것은 더욱더 해괴하다."
하였다.

 

사간 송창(宋昌), 정언 홍만종(洪萬鍾) 등이 아뢰기를,
"장단 부사(長湍府使) 윤창형(尹昌亨)은 도임한 뒤로 아문에 있는 일이 매우 드물어 심지어 관적(官糴)을 거둬 들이고 나누어 주는 일까지도 모두 감색(監色)의 손에 맡기고 있으니, 업무를 수행하지 않고서 태만하게 자신만 편하려는 태도가 놀랍습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영중추부사 허적(許積)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신이 한 번 좌절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뒤로 망극한 말이 나올수록 더욱 혹독해져서 심지어는 고금의 흉적(凶賊)에 비유하여 족속을 멸망시킬 중죄에 빠뜨리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자는 아무 관계없는 사람이라도 경악하고 진동하여 두려워할 것인데, 하물며 신은 몸으로 직접 당하고 있는데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남은 목숨을 보존하여 지금까지 끊어지지 않은 것은 비록 성상께서 생성(生成)해 주신 은덕을 힘입은 것입니다만, 또한 여기에서 신이 사리에 어둡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의 죄명은 이미 차마 말로 담을 수 없게 되었으며, 또한 그 사람들과 시끄럽게 변명을 하여 사체(事體)를 거듭 손상시켜서 다시 화망(禍網)에 저촉되는 일을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다만 괴이한 것은 재야(在野)의 유상(儒相)도 운운하는 바가 있으니, 아, 지난해 일에 대해서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나라의 형세가 어수선하고 위급한 때를 만나 부끄러움을 참고 후일을 꾀한 월(越)나라 대부 문종(文種)·범려(范蠡)는 진실로 송(宋)나라의 진회(秦檜)·왕윤(王倫)에 비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의(大義)를 부르짖고 강상(綱常)을 세워서 국가로 하여금 천하 후세에 할 말이 있게 한 자에 대해서는 마땅히 북돋아주는 데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이요, 결코 원망을 도발하여 화를 불렀다고 뒤밟아 탓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신의 이 논의는 온 조정이 다같이 알고 있는 바입니다. 더구나 저 세 신하의 죽음이야말로 더욱 슬프게 여길 점이 있으니, 위협과 공갈에 쫓겨 잔인한 해를 당하는 일을 면치 못한 것입니다. 이는 세 신하의 불행일 뿐 아니라 실로 우리 나라의 영원한 수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은 일찍이 그들이 처음에는 과격했음을 애석하게 여겼고 나중에는 절개를 지킨 것에 탄복을 하였으며, 평소에 그들의 일에 대해 언급하게 되면 일찍이 약한 나라의 신하가 된 것을 통렬하게 가슴아파하였는데, 어찌 그 사람을 기롱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겠습니까. 무신년005)  에 등대(登對)할 적에 한 말은 세월이 이미 오래 되었고, 신 또한 늙고 정신이 혼미하여 비록 명백하게 기억할 수는 없으나 그때 입시했던 신하들 중에는 조정에서 사당을 세워주어서는 안 된다고 말을 진달한 자도 있었으나, 추가 증직하고 자손을 수록(收錄)해 주자는 청은 오히려 신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을 신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만약 신이 일 만들기를 좋아하고 명예를 낚는다고 한다면 신이 어찌 이를 청할 리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도 많은 변론이 필요치 않습니다. 신이 전에 올린 상소에 있는 한 구절의 말을 가지고 더없이 큰 신의 죄안(罪案)으로 삼고 있는 데 이르러서는, 신 또한 이렇게 된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권강(權綱)을 거머잡는 일에 대해서는 옛날 철인들이 항상 하던 말이고, 건강(乾剛)에 부족함이 있음은 요즘에 함께 걱정하는 형편이기에, 신이 전하의 앞자리에서 이것으로 규잠(規箴)을 올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대체로 조정에는 기율(紀律)이 없고 아랫사람들은 법을 조롱하고 있어 조정 의논을 장악하고 사사로운 붕당을 세우는 그러한 사람이 없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이 도성을 떠나던 날에 다시 지난날에 한 말을 거듭하였던 것이지 애당초 조정에 있지 않은 사람을 지척한 것이 아니었는데, 도리어 신을 너무 지나치게 의심하고 신을 너무 심하게 공격하여 보통 마음으로 언급하지 못할 말까지 하였으니, 이는 신이 더욱 이해하지 못하는 바입니다. 신은 이미 천지 사이에 용납되기 어려운 죄명을 입었으니,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신의 죄를 의논하게 하여 사람들의 말에 답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이 황급히 고향으로 돌아간 뒤부터 병든 중에 그리워하는 마음을 어찌 무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아, 인심과 세도가 오늘날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다. 이상(李翔)이 음험하고 간교하여 반드시 해치려고 하고 있으니 생각하기에도 참혹한데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리고 경연에서 말한 것들은 지금 생각을 해봐도 끝내 기억나지 않는다. 여러 신하들이 문답한 말들을 합하여 경이 한 말로 여긴 것이 아닌가. 근래 경연에서 한 말을 초출할 즈음에 착오가 심했으므로 판부사가 보고 괴이하게 여긴 것은 진실로 그럴 법한 것이다. 경이 어찌 이것을 중히 여겨 불안해 하는가. 안심하여 사직하지 말고 속히 올라와서 나의 지극한 바람에 부응하라."
하였다.
○領中樞府事許積上疏言:
一自臣顚沛東歸之後, 罔極之言, 愈出愈酷, 至擬於古今之凶賊, 欲陷於沈族之重誅。 人之聞之者, 亦必爲之驚愕而震悸, 況於臣身親當之者乎? 保得殘喘, 尙今不絶者, 縱賴聖慈生成之渥, 亦可見臣之冥頑處也。 臣之罪名, 旣不忍掛諸齒舌間, 又不欲與其人呶呶辨明, 以重傷事體, 更觸禍網。 而獨怪夫在野之儒相, 亦有所云云也, 悲夫! 昔年之事, 尙忍言哉? 當國勢蒼黃危急之日, 忍恥圖後之種、蠡, 固非檜、倫之比, 而聲大義樹綱常, 使國家有辭於天下後世者, 惟當培植之不暇, 決不可追咎, 其挑怨而速禍。 臣之此論, 通朝之所共知也。 況如三臣者, 其死也尤有可悲者, 迫於威喝, 不免有割忍之擧。 此非三臣之不幸, 實我國百世之羞也。 臣嘗惜其過激於初, 而歎其伏節於後, 平居語及, 未嘗不痛愍於弱國之臣, 曷嘗有譏議其人之心也? 戊申登對說話, 歲月已久, 臣且老昏, 雖不能明白記得, 入侍諸臣, 或有陳其不可自朝家立廟之說者, 而加贈收錄之請, 臣猶記其發自臣口。 如使臣謂其喜事而釣名, 則寧有是請也哉? 然此亦不必多辨也。 至若臣前疏一句話, 爲臣莫大罪案者, 臣又不知其所以致此也。 摠攬權綱, 往喆恒言, 乾剛有歉, 近日共憂, 臣於前席, 以此箴規者, 亦不止一二。 蓋以朝無紀律, 群下玩法, 握朝論而植私黨者, 不無其人故也。 方臣去國之日, 更申疇昔之言, 初非指斥, 不在朝之人, 而乃反疑臣太過, 攻臣太深, 至有常情所不及之言, 此尤臣之所未解也。 臣旣被覆載難容之罪名, 乞命有司, 議臣罪律以謝人言。            上答曰: "自卿之蒼黃東歸, 病裏思想之懷, 曷可云喩? 噫! 人心、世道, 至于今日而極矣。 翔之陰險奸巧, 必欲陷害, 思之慘矣, 夫復何言? 至於筵中說話, 尙今思之, 終未憶得。 無乃以諸臣問答之說, 合以爲卿言耶? 近來筵中說話, 抄出之際, 錯誤甚矣, 判府事之見而怪之, 固其然也。 卿何以此, 重爲不安耶? 安心勿辭, 從速上來, 以副至望。"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6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33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2월 27일 정묘

상이 소대(召對)하고 《강목(綱目)》을 강론하였다. 강론을 마치자, 우의정 김수항이 병조의 결속리에 대한 일로 발언하기를,
"상께서 차비문에서 결죄한 일이 있는데, 죄를 참으로 다스려야 한다면 마땅히 유사에게 붙여 다스려야 합니다. 하찮은 일을 어찌 반드시 차비문에서 치죄하십니까. 그들이 이미 서로 힐난한 일이 있었고 보면 피차간의 잘잘못은 비록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시끄러움을 금지한 일로 하여 하리(下吏)가 차비문에서 죄를 받는다면 중외의 백성들이 해괴하게 여길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본(手本)에 의하여 치죄하는 것은 규례이다."
하였다. 수항이 아뢰기를,
"일이 매우 미세하지만 성명의 처분이 중도를 잃은 것이 걱정되었기 때문에 감히 진달하였습니다."
하고, 정언 박태상(朴泰尙)이 아뢰기를,
"결속리에 대한 일은 대신이 이미 진달하였으나 이는 신이 동료들과 조당(朝堂)에 모여 상차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일이 비록 미세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살피지 않아서는 안 되겠지만 차비문에서 치죄하는 것만은 실로 매우 온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이미 전교가 있는 뒤인데 하인이 어찌 감히 도피하겠습니까? 비록 그 실상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그 중간에서 조종을 한 일이 있을까 걱정되니, 그 근본이 어지럽고도 그 끝이 다스려지는 경우는 없는 것입니다. 병조 초기(兵曹草記)에 대한 비답에 하인을 감싸주고 비호한다는 하교까지 계셨으니 비록 하찮은 직에 있는 관리라도 감히 이렇게 하지 못할 것인데, 더구나 일찍이 시종(侍從)을 지냈고 작질과 녹봉이 낮지 않은 자가 어찌 하인을 용서하고 비호해 주는 일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차비문에서 곤장을 친 것을 부당하다고 하면 위를 범하여 부도(不道)한 자가 있더라도 앞으로는 버려두고 문초하지 않아야겠는가."
하였다. 박태상이 아뢰기를,
"신이 진달한 것은 하인이 죄가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신이 진달하는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여 온당치 못한 하교를 내리게 하였으니,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김수항이 아뢰기를,
"한낱 미세한 일로 인하여 사기(辭氣)의 불편함이 이와 같으니 손실되는 바가 클까 신은 걱정입니다."
하니, 상이 잠자코 있었다. 시독관 김만중(金萬重)이 아뢰기를,
"왕세자(王世子)가 《대학(大學)》을 강하는데, 《대학》은 바로 덕에 들어가는 문입니다. 지금 강원(講院)은 모두 한때의 선발된 자들인데, 이유태(李惟泰)와 같은 사람으로 하여금 양연(兩筵)006)  에 출입하게 하면 반드시 보익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 성의있게 부른다면 어찌 오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원에서 별도로 하유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윤증과 박세채(朴世采)는 모두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고 있으므로 조정 신하로서 문학(文學)에 있어 두 신하보다 나은 자가 없을 것이니, 만약 춘방관(春坊官)을 겸대하게 하면 또한 반드시 보익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전최(殿最)의 법이 비록 엄하더라도 초야의 선비는 나오기는 어렵게 여기고 물러가기는 쉽게 여깁니다. 윤증은 군직(軍職)의 포폄(褒貶)에 중(中)을 차지하여 의망(擬望)되지 못했으니 마땅히 변통하여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윤증의 중고(中考)는 탕척하라."
하였다. 김만중이 아뢰기를,
"진선·찬선의 직책은 합당한 자가 극히 없습니다. 그러므로 해조가 망(望)을 구비하기가 어려워서 차출하지 못하고 있으니, 비록 3망을 갖추지 못했더라도 마땅히 2망으로 차출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을 해조에 분부하라."
하였다. 박태상이 아뢰기를,
"신이 생각하고 있던 것을 감히 우러러 진달하였으나 이미 미안한 하교를 받았으니, 어찌 감히 편안히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피혐할 만한 일이 아니다."
하자, 수항이 아뢰기를,
"상의 하교가 이와 같으시니 인피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겠습니다."
하니, 박태상이 인피하지 않고 물러갔다.

 

2월 28일 무진

상이 소대(召對)하고 《강목(綱目)》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좌상 김수항이 아뢰기를,
"고려 태조 이하의 능묘(陵墓)는 모두 송도(松都)·풍덕(豊德)·장단(長湍) 등지에 있기 때문에 이미 왕씨 자손 중에 그 땅에 사는 자에게 아울러 수호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공양왕의 능묘는 고양(高陽)에 있어서 송도와의 거리가 멀므로 왕씨 자손이 형세상 수호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도로 하여금 본읍에 분부하여 별도로 수호를 더하게 하라."
하였다. 수항이 아뢰기를,
"경상 감사 이숙(李䎘)은 병세가 매우 중하여 직무를 오래 폐하고 있는데 그 증세가 수토(水土)에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합니다. 죽을까 염려되니 마땅히 변통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체차하라고 하였다.

 

이준구(李俊耉)를 집의로, 최문식(崔文湜)을 장령으로, 권유(權愈)를 지평으로, 송규렴(宋奎濂)를 사간으로, 이세화(李世華)를 경상 감사로, 윤심(尹深)을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사간 송창(宋昌) 등이 아뢰기를,
"남원 부사 홍석기(洪錫箕)가 술주정을 함부로 한 사실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다 함께 알고 있는 바입니다. 그는 부임한 뒤에 포학함이 날로 심해져 백성들이 그 명령을 견디지 못하여 물불 속에 있는 것과 같으니,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2월 30일 경오

수어사(守禦使) 이완이 청대(請對)하고 들어와 아뢰기를,
"조령(鳥嶺)은 험조(險阻)하여 적을 막을 만하니, 마땅히 영진(營鎭)을 설치하여 산성 하나를 쌓고 남한 산성에 소속된 충주군(忠州軍) 3백 90여 명을 분급하여 지키게 한다면 위급한 일이 있을 때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충주군을 나누어 조령에 소속시키면 그 대용병은 어떻게 하려 하는가?"
하자, 이완이 아뢰기를,
"반드시 그 지역의 백성으로 성을 지켜야 사수(死守)할 수 있습니다. 신은 민병법(民兵法)을 만들어서 남한 산성을 지키고자 합니다. 부윤 이세화(李世華)의 말을 들으니 ‘광주(廣州)의 민호(民戶)가 8천여 남짓하니 병사 1만 명은 얻을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만하면 지키기에 충분합니다. 신이 세화와 이 일을 의논하고 있으니, 민병을 단속하여 성을 지킬 계획을 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이완이 아뢰기를,
"이 일을 완성하려면 세화가 아니고는 할 수 없는데 세화가 경상 감사로 옮겨 제수되었습니다. 광주 부윤에 잉임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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