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11권, 효종 4년 1653년 윤7월

싸라리리 2025. 12. 21.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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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7월 1일 갑오

예조가 아뢰기를,
"가뭄이 바야흐로 심하므로 산천에 비를 빌어야 하겠습니다마는, 전에는 입추(立秋) 뒤에 비를 비는 규례가 없었으니,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였다.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는 의논드리기를,
"오늘날의 일이 급하니, 절서(節序)가 이미 지났다 하여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 될 듯합니다. 그러나 상림천리(桑林千里)의 우택(雨澤)은 실로 육사(六事)의 자책(自責)에서 말미암은 것이니093)  , 안팎으로 함께 덕을 닦는 것이 실정으로 응하는 도리에 맞겠습니다."
하고, 영돈녕부사 이경석(李景奭), 우의정 이시백(李時白)은 의논드리기를,
"가을철이 깊어 가는데 기도하여 마지않는다면 예의(禮意)상 너무 번독스럽지 않겠습니까. 신명의 도움만을 바라고 인사(人事)에서 찾지 않는 것은 기도하는 정성에 어긋나니, 빨리 옥수(獄囚)를 소결(疏決)해야 하겠습니다."
하고, 영의정 정태화(鄭太和)는 의논드리기를,
"지금 비를 얻어도 추수할 가망이 있으니, 기도하는 일은 그만둘 수 없겠습니다."
하고, 좌의정 김육(金堉)은 의논드리기를,
"근래 기도하여 다행히 적게나마 비를 얻었는데, 이 뒤에 날마다 잇따라 비가 내리면 익은 곡식을 해칠 듯하니, 비를 빌 것이 없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영상의 의논에 따라야 하겠으나, 다시 오늘 내일을 보아 처리하라."
하였다.

 

윤7월 2일 을미

함경 감사 이기조(李基祚)가 처음에 영의정 김육의 배척을 받아 북백(北伯)으로 나갔으므로 마음을 잡지 못하고 언짢아 하면서 술을 지나치게 마시다가 병이 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병이 악화되자 여러 번 상소하여 체직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이광재(李光載)가 추고에 대하여 함답(緘答)한 사연에 ‘패(牌)를 꽂았다는 말에 대해서는 눈으로 보지는 못하였으나 그때에 이미 그런 말을 들었다.’ 하였고, 또 역관(譯官) 장현(張炫)이 궁액(宮掖)을 빙자하여 폐단을 지은 정상을 끌어댔으니, 일이 매우 해괴하다. 장현을 먼저 잡아다 문초하라. 또 그 말이 전에 형조에서 핵문(覈問)하였을 때의 말과 다른 것도 괴이하다. 부사(副使)와 서장관(書狀官)도 모두 불러 물어서 아뢰라."
하였는데, 유철이 대답하기를,
"접때 대론(臺論)은 오로지 역관들이 물건을 팔 때에 내사(內司)를 핑계댔기 때문에 나온 것인데, 신이 북경(北京)에 있을 때에 어느 사람이 이런 일을 하였는지 듣지 못하였으므로, 형조에서 핵문할 때에 감히 사실대로 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광재의 말과 신의 말이 서로 다르나 사람이 보고 들은 것은 각자 같지 않는 법이니, 신이 어찌 자기 소견만을 스스로 옳다 할 수 있겠으며, 또한 어찌 처음에 말한 것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광재가 대답하기를,
"형조에서 물을 때에는 신이 탄핵받았기 때문에 대답하지 못하였으나, 이번에 특별히 추고한 것은 다른 거조에서 나왔으므로 들은 바를 상세히 아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신의 말과 신의 말이 같지 않은 것은 듣고 본 것이 다를 수도 있고 사세가 그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상이 어필(御筆)로 조목을 만들어 다시 하문하였는데, 유철이 대답하기를,
"장현이 나인(內人)의 아비라는 말은 신이 옥하관(玉河館)에 있을 때에 처음으로 들은 일이 있으나, 세력을 믿고 폐단을 지은 정상은 신이 듣지 못하였습니다. 더구나 50바리[駄]나 되었다는 말은 정녕 잘못 전해진 풍문이기에 신이 나아가 사은(謝恩)하던 날에 마침 대간(臺諫)을 만나서 말하기를 ‘내가 본 것은 한 바리뿐이었다. 그런데 내사에서 전부터 으레 무역하는 규례가 있었으므로 역관이 저희끼리 식별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더 의심하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그 뒤에 대간이 인피한 글에는 신을 직접 눈으로 본 것으로 지목하였고, 이광재가 함답한 글에도 동행(同行)이 눈으로 보았다고는 하였으나 신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 바리 수도 밝히지 않았는데, 말이 퍼지며 늘어나서 50 바리나 되었습니다. 신이 바야흐로 짤막한 상소를 갖추어 스스로 논열하려 하던 중에 마침 엄한 물음을 받았는데, 밤이 이미 깊어 자세히 아뢰지 못합니다."
하고, 광재가 대답하기를,
"장현이 세력을 믿고 폐단을 지은 일은 신이 눈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마는, 물건을 팔고 살 때에 그 이익을 마음대로 하고 내사를 핑계하여 남의 사물(私物)을 빼앗은 것은 신이 들었습니다. 또 신이 듣건대, 김상헌(金尙憲)이 대사헌이었을 때에 집이 제도를 넘었기 때문에 장현을 가두고 다스렸는데, 그때는 장현의 우익(羽翼)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었으나 대가(大家)의 청탁이 그래도 매우 어지러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재산이 더욱 많아지고 딸이 궁인(宮人)이 되었으므로 다시 그전에 비할 것이 아닙니다. 이익을 좋아하는 마음은 여느 사람이나 같은 것인데, 남의 물건을 빼앗아도 감히 말하는 이가 없는 것은 그 세력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신이 한껏 의심하면서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는 것도 대개 이 때문입니다."
하였다. 그때 인평 대군 이요가 상사(上使)로서 사사로이 무역한 것이 매우 많았고, 장현이 궁인의 아비로서 내사를 핑계하여 남잡한 일이 많았으므로 대론이 이 때문에 나왔다. 그런데 상의 뜻이 장현 등을 감싸는 데에 있었으므로 유철이 뜻을 맞추느라 그 실상을 숨기니, 청의가 더럽게 여겼다.

 

윤7월 3일 병신

상이 하교하기를,
"대사간은 백사(百司)를 바로잡는 관원인데 어찌하여 전혀 문안에 참여하지 않는가?"
하니, 정원이 병이 있다고 상소하였으나 감히 봉입하지 못하였다고 대답하자, 상이 이르기를,
"병이 있으면 어찌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는가. 체차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원이 대간을 특지(特旨)로 가는 것은 미안하다고 하니, 사직하는 상소를 들여온 뒤 가라고 명하고, 또 하교하기를,
"내사(內司)를 가탁한 죄가 무겁기는 하나 본디 죽을 죄가 아닌데, 김귀인(金貴仁) 등이 신장(訊杖)을 맞다가 죽게 되어도 승복하지 않기에 내가 비로소 의심하였으나 그 까닭을 밝히지 못하였다. 이제 이광재(李光載)가 함답(緘答)한 사연과 대답한 말을 보건대 군색하고 구차하여 한갓 군더더기 말로 스스로 버티고 있을 뿐이다. 더구나 함답한 사연 가운데에 이른바 ‘가탁한 일이 없다면 누가 두려워 움츠리겠는가.’ 한 말 등은 다 제 뜻으로 억지를 부려 무함하는 것이다. 대개 이 사람을 보면 매우 불길하다. 가탁이란 두 자를 만들어내어 일행을 일망타진하고 장차 사신까지 범하려 하였으니, 더욱 놀랍다. 이른바 ‘두 장(張)의 세력이 커서 감히 따지지 못하고 또 액정(掖庭)의 세력을 믿는다.’고 한 것이 과연 그러하다면, 기염이 하늘을 덥히고 손대면 델 만한 것인데, 어찌 서장관만이 듣고 부사가 모를 일이겠는가. 이광재는 마음 쓰는 것이 형편없어 홍명하(洪命夏) 등이 논한 말을 입증해 주려 하였고 또 액정 등의 말로 위로는 견제하고 아래로는 곧은 체하였으니, 세상에 어찌 이런 사람이 있는가. 또 우익(羽翼) 따위의 말은 누구를 가리켜 말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그 뜻이 또한 망측하기 짝이 없다. 사헌부의 조율(照律)대로 고신(告身)을 뺏은 뒤 전리(田里)로 방귀시키라."
하였다.

 

특지로 사은 부사(謝恩副使) 윤강(尹絳)을 갈고 전 대사간 홍명하(洪命夏)로 대신하게 하였는데, 명하가 사행(使行)이 사사로이 무역한 잘못을 맨 먼저 논하였기 때문이다. 정원이 아뢰기를,
"무릇 대간이 일을 논할 때 풍문으로 하는 것을 허락하고 혹 사실과 다르더라도 죄준 적이 없습니다. 명하는 자신이 언지에 있으므로 듣는 대로 일을 논하는 것은 그 직분일 뿐입니다. 특지로 갈게 하신 분부만도 이미 미안하기 짝이 없는데 또 사신으로 차출하여 보내라는 명이 있으니, 신들은 언로(言路)를 크게 방해하여 성조(聖朝)의 흠이 될까 염려됩니다. 또 수천 리의 행기(行期)가 몇 순(旬) 밖에 남지 않았으니 짐을 꾸려 준비하는 일을 어떻게 주선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도 사신을 예우하는 도리에 어긋나니, 홍명하를 사신으로 차출하여 보내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근래 사행(使行)에 남잡한 일이 많은 듯하므로 꼿꼿한 사람을 얻어서 한 번 정돈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헌부가 【집의 조복양(趙復陽), 장령 윤성(尹珹)·김옥현(金玉鉉), 지평 한진기(韓震琦)·이휴징(李休徵).】  아뢰기를,
"삼화(蔘貨)는 나라에서 크게 금하는 것인데, 장현(張炫)과 장찬(張燦)이 가져간 것이 가장 많으므로 뭇 사람의 말이 시끄럽습니다. 국법을 업신여기고 이익을 마음대로 노려 방자하게 군 정상이 가증스럽기 짝이 없으며, 아문(衙門)의 이자(移咨)에 수를 정하라는 말까지 있었고 보면, 이들이 가탁(假託)한 자취는 이것에 의거해도 알 수 있습니다. 장현을 잡아다 문초하라는 명이 내리자 물정이 시원하게 여기는데, 그 아우 장찬이 죄를 같이한 사람으로서 홀로 면할 수는 없습니다. 잡아다 국문하고 율문(律文)에 따라 죄를 정하소서.
예조 참판 유철은 사명을 받들고 강역(疆域)을 나갔는데 역관(譯官)들이 삼을 가져가 방자하게 군 일을 법에 따라 규핵(糾劾)하지 못하였고, 발문하였을 때에도 명백히 아뢰지 않은 채 전후 말을 바꾸었으므로 물의가 다 놀라워하니,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북경에 가는 사신을 전부터 가려 차출하여 보냈으니, 홍명하(洪命夏)를 부사(副使)로 삼는 것이 안될 것은 없습니다. 다만 홍명하가 역관들의 간사하고 외람한 정상을 논하자마자 이 때문에 특지(特旨)로 벼슬을 간 것만도 미안하기 짝이 없는데, 이번에 특별히 사신으로 차출하라는 하교가 또 뜻밖에 나왔으므로, 보고 듣는 자들이 모두 의혹스럽게 여깁니다. 다들 장차 ‘홍명하는 일을 말하였기 때문에 마치 벌받은 것처럼 되었다.’고 말할 것이니, 어찌 포용하는 덕에 손상이 없겠습니까. 홍명하를 부사로 차출하여 보내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역관들이 금하는 물건을 지닌 것은 다스려야 마땅하다. 다만 생각건대 김귀인(金貴仁)이 공초한 말에 일행 사람들이 모두 가져갔다 하였으니, 1백보이건 50보이건 마찬가지로 법을 어긴 것이다. 조정에서 알고도 버려두는 것이 마땅하지 않아서 모두 죄준다면 또한 어지러워질 것이므로, 해조를 시켜 대신에게 물어서 처치하게 하였다. 홍명하의 일은 이미 정원에 일렀다. 그리고 홍명하가 잘못한 것이 또한 한둘이 아닌데, 어찌하여 역관들을 논한 것을 가지고 말하는가. 이것은 내가 그대들에게 신뢰받지 못한 것이니, 참으로 부끄럽다. 유철의 일은, 들은 것이 가탁이라도 본 것은 가탁이 아니었으니, 어찌하여 반드시 죄주어야 하겠는가."
하였다.

 

윤7월 4일 정유

이응시(李應蓍)를 함경 감사로, 민응형(閔應亨)을 대사간으로, 이단상(李端相)을 교리로 삼았다.

 

간원이 【사간 권우(權堣), 정언 권대운(權大運).】  아뢰기를,
"전에 차출한 사신도 극진히 가리지 않은 것이 아니고 갈 준비를 한 것이 수개 월이며 별다른 사고도 없는데, 홍명하가 일을 말한 뒤에 이 특명이 있었으니, 신들에게는 성상의 이 거조가 죄다 화평한 데에서 나오지는 않은 듯합니다. 홍명하는 언지(言地)에 있는 신분인 이상 알면서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이에 확실하지 못한 풍문과 알맞지 않은 말이 있었더라도 그 마음을 따져보면 다른 뜻이 없습니다. 봉사(奉使)는 벌을 쓰는 곳이 아닌데 특명이 일을 말한 뒤에 있었으니, 언로를 손상하고 성덕에 흠이 되는 것이 큽니다. 홍명하를 특지로써 부사로 차출한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처음에 대간이, 장현(張炫)이 폐단을 일으키고 역관들이 사사로이 삼화(蔘貨)를 가져가서 나라를 욕되게 한 정상을 말하니, 상이 역관 김귀인(金貴仁) 등 서너 사람을 가두고 추문하라고 명하였는데, 김귀인이 형신을 받다가 죽었다. 상은 형관들이 대간의 의향을 따라 죄없는 자에게 혹독한 형신을 가하여 죽게 하였다 하여 판서 윤이지(尹履之), 참의 유경창(柳慶昌), 좌랑 어상준(魚尙儁)을 나문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상차하기를,
"윤이지는 나이가 일흔이 넘고 유경창은 병이 또한 위중합니다. 그런데 여러 날 동안 잡혀 있어도 금부가 오래도록 개좌하지 않으니, 이지가 옥중에서 병사할 경우 늙은 사람을 우대하는 인덕(仁德)에 더욱 손상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금부를 시켜 원정(原情)하지 못하였더라도 그 죄로 조율하게 하였다. 금부가 고신을 삭탈하는 것으로 조율하니, 윤이지·어상준은 관작을 삭탈하여 문외로 출송하고 유경창은 그 벼슬에 있던 기간이 짧으니 파직만 하라고 명하였다.

 

헌부가 【집의 조복양(趙復陽), 장령 윤성(尹珹)·김옥현(金玉鉉), 지평 한진기(韓震琦)·이휴징(李休徵).】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며 유철을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고 홍명하(洪命夏)를 특지(特旨)로써 부사(副使)로 차출하라한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 서장관(書狀官) 이광재(李光載)가 공초한 말에는 전도되고 경망한 것이 많긴 합니다만, 장현(張炫) 형제의 일로 말하면 들은 대로 곧장 아뢴 것인 만큼 안 될 것이 없으니, 사신을 무함하고 대론(臺論)을 실증하려 한다는 하교는 본정(本情)에 어긋나는 듯합니다. 감률(勘律)한 외에 또 방출(放黜)하는 벌을 준 것은 포용하는 덕이 아닐 듯하니, 이광재를 전리(田里)로 방귀 시키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광재의 말은 입에 올리기도 더러운데, 그대들은 도리어 옳게 여기니, 또한 대각(臺閣)의 수치가 되지 않겠는가."
하였다.

 

윤7월 5일 무술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자전(慈殿)의 증후가 위중하여 뭇 신하가 근심하느라 어쩔줄 몰랐는데, 이제 다행히 회복되셨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막대한 경사이니, 축하하는 일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신이 접때 장릉(章陵)에 갔을 때에 연도(沿道)에서 본 바로는 농사가 형편없었으니,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제 내린 비가 흡족하지 못한데 오늘은 비가 오려다가 내리지 않으니, 내 마음이 타는 듯하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이징과 이숙이 어린아이이기는 하나 뭇소인들과 흉역(兇逆)의 일에 간여하였으므로 공론이 그 곳에 그대로 두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만, 신은 그 처치가 어려운 것을 염려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옥사(獄事)는 당초에 바깥 사람이 알게 하고 싶지 않았으나, 일이 자전에게 미쳤으므로 유사에게 내어 주어 다스리게 하였다. 이제 이 때문에 먼 곳에 옮겨 둔다면 입고 먹는 것과 약물(藥物)이 또한 어떻게 제때에 닿겠는가."
하였다. 병조 판서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신이 외방의 군부(軍簿)를 대충 보았는데 매우 허술하였습니다. 수령들이 다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세월을 보내며 오랜 뒤에는 다들 탕척되리라고 생각하니, 참으로 한심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을 얻어서 맡겼으니 근심이 없을 것이다. 경은 직무에 마음을 다하여 퇴폐된 것을 닦아야 한다."
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금군 별장(禁軍別將)을 가려서 오래 맡겨 효과를 이루도록 걸머지워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금군이 재능을 성취한다면 힘입는 것이 많을 것이니, 경이 오로지 살펴 검칙(檢飭)하고 별장도 옮기지 말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해조가 주의할 때에 번번이 아경(亞卿)의 인재가 모자라는 것을 걱정하니, 성충(聖衷)으로 가려서 몇 사람을 발탁하여 쓰소서."
하니, 상이 그러겠다고 하였다. 그뒤에 정태화가 조수익(趙壽益)·이행진(李行進)·김익희(金益熙)·민응협(閔應協)·이시해(李時楷) 등을 천거하니, 상이 다 차례로 발탁하여 썼다. 대사헌 김남중(金南重)이 홍명하(洪命夏)를 특지로써 부사(副使)로 차출하라는 명을 도로 거둘 것과 전 서장관(書狀官) 이광재(李光載)를 전리(田里)로 방귀시키라는 명을 거두기를 청하고, 대사간 민응형(閔應亨)도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상이 다 따르지 않았다. 정태화가 윤이지(尹履之)를 특별히 석방한 일을 감사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말하였으므로 특별히 법을 굽혀 따른 것이다. 그러나 형관의 일은 매우 놀랍다. 김귀인(金貴仁)은 죄가 없는데 혹독하게 형신하여 죽였으니, 이것은 무슨 뜻인가. 나는 오늘날의 가뭄이 반드시 김귀인이 억울하게 죽은 데에서 말미암지 않았다고 할 수 없을 듯하다. 또 이광재의 마음은 흉참하다 하겠다. 내가 그 함답(緘答)한 글을 처음 보고 벌써 형편없는 사람인 줄 알았다. 급기야 정원(政院)에 들어와 대답할 때에는 가탁(假託)이란 두 글자를 만들어내어 국가를 욕보이고 또 액정(掖庭)이니 우익(羽翼)이니 하는 따위의 말로 위로는 임금을 견제하고 아래로는 정직하다는 이름을 얻으려고 했는가 하면 사신을 무함하여 어찌될지 모르는 지경에 몰아넣었으니, 세상에 어찌 이런 사람이 있겠는가. 홍명하는 한 번도 심한데 어찌 두 번이나 쉰 바리라는 말을 할 수 있는가. 장황하게 인피하고 또 우선 이광재를 추문하기를 청하여 여러 가지 말이 나오게 하여 자기가 말한 것을 실증하려 하였으니, 그 또한 교묘하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명하는 사행 중의 사정을 몰랐으므로 쉰 바리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모르기 때문에 한 번 가서 알게 하려는 것이다. 또 이광재는 대군(大君)과 함께 만리 길을 다녀오며 반년 동안 고난을 같이하였는데, 기어이 함해하려고 기회를 타서 몰래 움직여 물여우처럼 모래를 머금었다가 그림자를 쏘아 해치려는 생각을 한 것은 대관절 무슨 마음인가."
하였다.

 

집의 조복양(趙復陽), 장령 윤성(尹珹), 지평 한진기(韓震琦)·이휴징(李休徵) 등이 인피하기를,
"신들은 어제 내리신 비답을 받고 못견디게 부끄럽고 두렵습니다. 이 일은 역관(譯官)들이 금하는 물건을 많이 가져가고 가탁하여 나라를 욕되게 한 일일 뿐입니다. 아문(衙門)의 이자는 전에 없던 말이니, 역관들이 사고 파는 사이에 가탁한 일이 아니라면 이런 말이 어찌하여 이르렀겠습니까. 국가의 수치를 이루 말할 수 없고 이들의 정상이 이미 뚜렷해졌으니, 광재가 말한 장현(張炫) 등의 일은 실상이 아니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들이 이 한 가지 말만을 거론한 것이 어찌 광재를 옳게 여긴 것이겠습니까. 광재는 진정 죄가 있습니다만, 고신을 죄다 삭탈한 것도 이미 가벼운 율(律)이 아닌데 또 방출하는 벌을 더한다면 포용하는 도리가 아닐 듯합니다. 또 그가 죄받는 것이 법을 범하고 나라를 욕되게 한 역관들보다 앞선다면 물정이 의혹하는 것은 본래 당연한 것입니다. 참으로 이제부터 역관들이 거리낌없이 방자하여 뒷날의 염려를 이루 말할 수 없게 될까 두렵습니다. 신들이 이미 엄한 비답을 받은 이상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으니, 신들을 체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그대들이 광재의 흉악하고 교활한 작태를 본뜨려고 이런 식으로 협제(脅制)하여 내가 한 마디 말도 못하게 하려는가. 광재의 죄가 어찌 여기에 그치겠는가. 전리(田里)에 편안히 있게 한 것도 너그러이 용납한 은전이다."
하였다. 장령 김옥현(金玉鉉)도 이 때문에 인피하였다. 대사헌 김남중(金南重)이 인피하기를,
"어제 계사에는 신이 어미의 병 때문에 연명(聯名)하지 못하였으나, 오늘 이미 탑전에서 연계(連啓)하였다가 미안한 하교를 신도 받았으니,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조복양 등이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형조가 역관이 금하는 물건을 함부로 가져간 죄를 대신에게 물으니, 대신이 "모두 다 죄줄 수는 없고 그 가운데 반드시 경중 다소의 구별이 있을 것이니 심한 자를 죄주어야 한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장현(張炫) 형제가 금하는 물건을 가져간 것이 가장 많다 하니, 유사(有司)를 시켜 법대로 논하게 하라."
하였다. 금부가 도 삼년(徒三年)으로 조율하였으나, 며칠 뒤에 마침 사면령을 당하여 드디어 풀려났다.

 

윤7월 6일 기해

대사간 민응형(閔應亨)이 청대하니, 생각하는 바를 써서 바치라고 명하였다. 응형이 서계하기를,
"신은 쇠약하고 병이 깊은 중에 죽음을 견디고 성안에 들어왔습니다. 소명이 있는데 감히 물러가 있을 수도 없고 또 천안을 뵙고도 싶었으나, 병이 나고 정신이 어두워서 생각하는 것이 있어도 아뢰지 못한 채 제 집으로 물러갔습니다. 그런데 삼가 피사에 대한 비답을 보건대 말씀이 매우 엄하였으므로 신은 나름대로 개탄하며 밤새도록 불안하여 앉아서 아침이 되기를 기다리면서 어제의 말을 다 아뢸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런 뒤에는 물러가 죽어도 여한이 없겠기에 죽음을 무릅쓰고 청대하였는데, 서계하라는 명이 있었으므로 감히 대강을 아뢰어 만분의 일이라도 채택하여 시행하시기를 기다립니다.
예전부터 언로가 닫히고 열리는 것은 나라의 흥망에 관계되니, 전하께서도 어찌 여기에 생각이 미치지 않으시겠습니까. 대관이 무릇 듣고 본 것이 있으면 아뢰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 직분을 다하려는 것이니, 풍문이 혹 사실과 다르더라도 너그러이 용납하여 대우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의 일로 말하면, 홍명하(洪命夏)가 논한 것이 사실과 다른 풍문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항간에서 시끄럽게 전하는 것을 이미 막을 수 없게 되었는데, 명하가 말하지 않았다면 성상께서 어떻게 듣고 그 허실을 살피실 수 있었겠습니까. 논한 것이 거짓이 아니면 경중에 따라서 다스려야 할 것이고 사실과 다르더라도 백성의 의혹을 깨뜨릴 수 있으니, 무슨 손해가 있겠습니까. 명하를 사신으로 차출하셨으니 성상의 뜻이 과연 화평한 데에서 나왔습니까. 도로 거두기를 청한 것이 어찌 명하의 처지를 위한 것이겠습니까. 이광재(李光載)가 전후에 대답한 것은 참으로 전도된 것이 많으나 뒤미처 벌을 더한 것으로 말하면 또한 지나치게 무거우므로 대신이 논열한 것은 알맞게 하려는 데에 뜻이 있었던 것인데, 전하께서는 협제한다는 등의 말로 현저하게 꺾으셨으니, 신은 전하께서 기뻐하고 노여워하심에 대해 못 견디게 슬픕니다. 신이 이미 생각하는 바를 아뢰었는데, 돌아보면 신의 나이가 이미 여든에 가까워 근력과 정신이 한낱 마른 나무가 되었습니다. 어찌 대각에 있으면서 잘잘못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벼슬을 갈아 물리치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홍명하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경은 사직하지 말고 내려가지도 말아서 내 뜻에 부응하라."
하였다. 민응형은 서계한 뒤에 비답을 기다리지 않고 나가서 곧바로 양근(楊根)으로 돌아갔다.

 

도승지 채유후(蔡𥙿後)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어제 헌부의 여러 관원이 인피한 사연에 대한 비답을 보고 서로 돌아보며 놀라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성명의 지나친 하교가 한결같이 이에 이를 줄은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광재가 전후에 말한 것이 모호하고 전도되었으니 어리석고 망령되다고 한다면 옳겠습니다마는, ‘흉교(兇狡)’ 두 자로 말하면 매우 그럴듯하지 않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이광재가 무슨 마음을 가지고 반드시 거짓을 꾸며 남을 빠뜨리려고 했겠으며, 대간은 또 무슨 뜻을 가지고 감히 임금을 협제(脅制)할 생각을 내겠습니까.
이광재의 말이 전도된 잘못을 방출로 죄주고, 홍명하(洪命夏)가 사실과 다른 풍문을 들은 허물에 대해 원행(遠行)으로 벌주셨습니다. 위노(威怒)를 대뜸 가하여 책벌(責罰)이 지나치게 무거우므로 대간이 연장(連章)하여 힘껏 다투었는데, 이것이 어찌 한 사람의 처지를 위하는 것이겠습니까. 그 말이 옳다면 내가 능히 받아들이는 것을 밝힐 만하고 그 말이 옳지 않다면 더욱 내가 능히 용납하는 것을 밝힐 만했으니, 신들은 성명을 위하여 아깝게 여깁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화평한 마음으로 사리를 살피고 성량을 넓히도록 힘쓰시어 뭇 사람의 뜻이 펴질 수 있고 공론이 행해질 수 있어서 상하가 막힐 걱정이 없게 하소서. 그러면 임금이 허물을 고치는 것을 사람들이 다 우러러볼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광재의 불길한 정태가 그 글에 모두 실려 있는데, 어찌하여 나에게 묻는가. 논한 말은 내가 다 용납할 수 있으나, 넌지시 신구하는 뜻은 내가 결단코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하였다.

 

간원이 【헌납 서정연(徐挺然), 정언 권대운(權大運).】  아뢰기를,
"조복양(趙復陽) 등이 인혐하고 물러갔습니다. 이광재를 율외(律外)로 죄준 것이 지나치다면 대간이 논집하여도 안 될 것이 없고, 미안한 하교가 뜻밖에 나왔으면 이미 낸 논계를 입시하여 연계(連啓)하는 것은 본디 상례입니다. 집의 조복양, 장령 윤성, 지평 한진기·이휴징, 대사헌 김남중, 장령 김옥현을 모두 출사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조복양 등은 의도가 보통이 아닌 듯하니, 매우 놀랍다."
하였다. 복양 등이 또 인피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대사헌 김남중이 인피하기를,
"이광재에 대한 논의는 신도 연계(連啓)하였습니다. 일의 시비가 동료와 다를 것이 없는데 동료들이 엄한 비답을 다시 받고 또 인피하였으니, 신이 일을 같이한 사람으로서 처치할 수 없습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복양 등이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간원이 또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고(故) 참판 정온(鄭蘊)의 시장(諡狀)을 바치니, 천천히 하라고 하교하였다. 정온은 병자년의 난리 때에 호종(扈從)하여 산성(山城)에 들어가 가슴을 찔렸으나 죽지 않았다. 그뒤 시골에 돌아가서 절의(節義)가 뛰어났으나 역명(易名)의 은전이 오래도록 거행되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상이 또 윤허하지 않았다. 이는 대개 시장에 꺼릴 말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윤7월 8일 신축

간원이 아뢰기를,
"그저께 대사간 민응형(閔應亨)이 대궐에 나아가 서계(書啓)를 정원에 전하고 곧 시골에 내려갔으니, 비답이 내려진 이상 이미 떠났다는 뜻을 정원이 아뢰었어야 할 것인데 끝내 아뢰어 알리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성비(聖批) 가운데에 내려가지 말라는 하교가 있었는데도 정원이 후설의 지위에 있으면서 성상께서 그가 간 것을 모르시게 하였으니, 당해 승지를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집의 조복양(趙復陽)이 상소하여 체직되었다.

 

강원도 강릉(江陵) 등지에서 바다 고기가 많이 죽어 수면에 떴는데, 도신(道臣)이 아뢰었다.

 

윤7월 9일 임인

정유성(鄭維城)을 형조 판서로, 윤순지(尹順之)를 경기 감사로, 윤집(尹鏶)을 집의로, 이정영(李正英)을 이조 정랑으로, 이석(李晳)을 부교리로, 홍명하(洪命夏)를 동지 부사(冬至副使)로 삼았다. 상이 이미 민응형의 서계에 대한 비답에서 사람을 바꿀 것을 윤허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다시 차출하여 보냈다.

 

윤7월 10일 계묘

왕대비(王大妃)가 평복(平復)되었기 때문에 상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하례를 받고 종묘(宗廟)에 고한 뒤 교서(敎書)를 반포하였다. 교문(敎文)은 다음과 같다.
"왕은 이르노라. 자성(慈聖)께서 편찮으시어 바야흐로 근심하며 약시중을 하였는데 하늘이 인자하게 돌보아 곧 회복하시는 경사를 가져왔으니, 함께 기뻐할 때를 당하여 정성을 보이는 말을 선포한다. 생각하면 내가 외람되게 기업(基業)을 이어받고서 자전을 잘 받들려고 늘 효성을 다하였다. 사제(思齊)094)  한 성덕(聖德)은 실로 주시(周詩)에 어울리고 가르침의 깊은 은혜는 송후(宋后)보다 훨씬 더하셨는데, 어찌 병환이 생겨 얼마 안 가서 매우 위독해지실 줄 생각하였겠는가. 안부를 살피느라 분주하여 신을 바로 신고 다닐 겨를이 없었으며, 탕약을 드시고 침을 맞으시는 동안 오랜 고통을 어찌 참으시겠는가. 다행이 원기가 도로 나아져 드디어 깊은 병이 회복되시는 것을 보게 되니, 끝없는 수(壽)를 점칠 수 있어 강릉(岡陵)처럼 길기를 빌 것도 없다. 뭇 신하가 함께 기뻐하니, 어찌 궁위(宮闈)의 지극한 정뿐이겠는가.
이미 종묘에 공경히 고하고 이어서 중외에 널리 고한다. 이달 10일 새벽 이전의 사죄(死罪) 이하의 잡범(雜犯)은 모두 사유한다. 아, 선행으로 복을 얻으면 길이 아름다운 데로 돌아가 복을 나타내기를 꾀할 수 있고, 가르치고 사랑하여 친족을 가까이하면 또한 가까운 데를 다스려 먼데까지 이르기를 바랄 수 있을 것이다. 뭇백성과 함께 하는 것이 제일이니 대사(大赦)의 은전을 베풀어야 하고, 차라리 상법(常法)에 어그러지는 잘못에 빠지더라도 모두 살리는 은택을 다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시(敎示)하니 잘 알아야 할 것이다." 【 제학 채유후(蔡𥙿後)가 지은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11책 11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642면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사법-행형(行刑)


[註 094] 사제(思齊) : 《시경》 편명으로 장엄하고 공경스러운 의미.

ⓒ 한국고전번역원

 

헌부가 아뢰기를,
"예조 참판 유철은 접때 공청(公廳)에서 대간에게 말할 때에는 약간의 내패(內牌)를 보았다 하고 핵문(覈問)할 때에는 전혀 듣지 못하였다 하고 그 뒤에는 한 바리를 보았다 하였으니, 한 가지 말을 세 번 바꾸어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 달랐습니다. 죄주지 않을 수 없으니,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윤7월 11일 갑진

대사간 민응형(閔應亨)이 양근(楊根)에 돌아가서 상소하기를,
"신이 접때 서계한 뒤에 묵은 병이 갑자기 심해져서 미처 아뢰지 못하고 지레 도성 문을 나갔으니, 명을 어기고 게을리한 죄는 본디 만 번 죽어 마땅한데 직명이 아직도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을 먼저 체직시킨 뒤에 신의 죄를 다스리소서. 또 신이 삼가 듣건대, 성명께서 이미 신의 말을 받아들이고 또 온유까지 하셨다 하니, 신은 서쪽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며 더욱 매우 황송하게 여깁니다. 신의 하찮은 말을 전하께서 죄주시지 않을 뿐더러 곧이어 받아들이셨으니, 이는 전하께서 본디 희노가 지나친 것을 뉘우쳐 신의 어리석고 경망한 것을 용서하신 것입니다. 어리석고 경망한 것을 이미 용서하셨으니 충직한 말이 반드시 나올 것이고, 희노를 능히 삼가시니 정령에 실착이 없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 마음을 신중하게 지녀서 끝까지 힘쓰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은 사직하지 말고 올라오라."
하였다.

 

이에 앞서 전 수원 부사(水原府使) 윤창구(尹昌耉)가 관곡(官穀)을 1천 석(石) 가까이 축낸 것을 대신이 논계하였으므로 금부(禁府)에 갇혀 여러 번 형신을 받았는데,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대신이 아뢰기를,
"창구가 관곡을 함부로 쓰기는 하였으나 훔쳐서 제 것으로 한 자취가 없고 오래도록 옥에 갇혀 누차 형신을 받았으니, 가볍게 벌주는 법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하니, 멀리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이에 울산부(蔚山府)에 정배하였다.

 

장악원 정(掌樂院正) 심광수(沈光洙)가 상소하기를,
"임금이 신하를 대하는 것은 아버지가 아들을 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허물의 경중을 살피지 않고 대뜸 노여움을 베풀면 부자의 은혜도 보전할 수 없는데, 더구나 소원하기 쉽고 친근하기 어려운 군신 사이이겠습니까. 전 대사간 홍명하(洪命夏)는 망설이고 구차하게 용납되려 하지 않고 반드시 말을 다하는 것을 자기 책임으로 삼았으니, 쇠세(衰世)에서 이처럼 지조가 있는 자는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뜻이 날카롭고 말이 잦으면 사실보다 지나친 말이 있을 수도 있으나, 장려해야 할 것이고 꺾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접때 역관(譯官)들을 논핵한 것도 풍문에 따라 규탄한 것에 지나지 않으니, 과연 이런 일이 있다면 위엄을 보여 징계하여 뒷날을 경계해야 할 것이고, 그런 일이 없어서 그냥 두더라도 역관들에게는 또한 두려워 움츠리는 바가 있게 될 것인데, 무슨 손상이 있겠습니까. 이광재(李光載)의 전도된 잘못 때문에 상의 노여움이 다른 데로 옮겨져 드디어 명하로 갈음하여 부사(副使)를 삼으셨으니, 뭇 사람이 의혹스럽게 여기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다행이 내리신 명이 도로 거두어져서 뭇신하가 모두 기뻐하였는데 며칠 안 가서 또 차출하여 보내게 하셨으니, 우리 성상께서 희노가 무상하고 호령이 전도되시는 것이 어찌하여 이에 이르렀습니까. 전하께서 몸과 마음에 착실한 공부가 없어 병근이 늘 남아 있다가 잠시 동안에 문득 문득 나타나는 것을 신은 애석하게 여깁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유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상소한 사연이 이처럼 충직하니, 매우 아름답게 여기고 기뻐한다."
하였다.

 

윤7월 12일 을사

상이 조강에 나아가 《서전》 입정편(立政篇)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집의 윤집(尹鏶)이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어 유철을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상이 이르기를,
"본부(本府)의 개좌(開坐)가 매우 드물다. 백사를 규검하는 관원으로서 이처럼 태만하여도 되는가."
하니, 윤집이 아뢰기를,
"근래 대간이 잇따라 미안한 하교를 받아 자주 인피하므로 안좌할 날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 달이면 서른 날을 다 날마다 피혐하는가."
하니, 윤집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이토록 책려하시게 된 것은 신들에게도 죄가 있습니다마는, 전하께서 대간의 말을 받아들이시지 않는 것도 매우 심합니다. 근일의 일로 말하면, 직언을 구하는 하교는 여러 번 내리셨으나 실지로 채용하신 것은 전혀 없습니다. 이광재(李光載)의 경우 그가 변변치 못하기는 하나 흉교(兇狡)하다는 등의 하교는 실로 뜻밖입니다."
하였다. 사간 권우(權堣)가 아뢰기를,
"근일 조정에 어찌 직언이 있었겠습니까마는, 이따금 한둘 말하는 자가 있으면 문득 꺾이니,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홍명하(洪命夏)는 말을 다한다고 조금 일컬어졌는데 여러 번 엄한 하교를 내리고 또 원행(遠行)으로 벌주신 반면 장현(張炫)은 도리어 곧 사유(赦宥)를 받았으니, 이것은 매우 미안한 것입니다."
하고, 윤집이 아뢰기를,
"바깥 사람들이 다 대사간은 장현의 일 때문에 죄받았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매우 노하여 이르기를,
"집의도 죄 없는 유철을 파직하기를 청하고 괴망한 이광재를 여러 번 신구하니, 이것은 무슨 뜻인가?"
하였다. 윤집이 인피하며 체직시켜 주기를 청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이어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는데, 권우가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따랐다. 상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사람들의 말이 이러하니, 역관의 가자를 도로 거두게 하라."
하였다. 영경연(領經筵) 이시백(李時白)이 아뢰기를,
"대간도 어찌 대군(大君)을 침해하는 것이겠습니까. 역관들이 인삼을 가져갔다는 말이 중외에 크게 돌았으므로 대신이 논한 것입니다. 이제 와서 그 가자를 도로 거두라고 명하셨지만 전하의 사기(辭氣)가 이처럼 화평하지 않으시니, 참으로 매우 미안합니다. 부자 형제라도 소견이 각각 절로 같지 않은데, 신하의 소견이 어찌 죄다 성명의 뜻에 맞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청사(淸使)의 행차가 한 번도 나오지 않게 한 것은 실로 백성의 다행이므로 가자하게 하였으나, 물정이 좋게 여기지 않으므로 곧 도로 거두게 한 것이다."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홍명하도 사신으로 차출하지 말라."
하였다. 상이 목소리와 얼굴빛을 모두 돋우어 이르기를,
"세도(世道)가 놀랍다. 골육을 이간한다는 이름을 사람이면 누구나 듣기 싫어 하는데, 이제는 알 만큼 배운 사람도 꺼림없이 하니, 매우 괴이하다."
하니, 지경연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군신은 부자와 같습니다. 전하께서 어찌하여 이런 말씀을 갑자기 하십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망룡의(蟒龍衣)에 관한 말이 어찌 이간하는 꼬투리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이시백이 매우 힘써 변론하였으나, 상이 들으려하지 않았다. 시독관 이단상(李端相)이 아뢰기를,
"홍명하를 보내지 말라는 하교는 더욱 미안합니다. 홍명하도 어찌 이 일행이 될 수 없겠습니까."
하고, 이시백이 아뢰기를,
"홍명하를 차출하여 보내더라도 안 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상께서 이 하교를 도로 거두시기 바랍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후에 고쳐 차출한 것이 전도된 듯하기는 하나, 오늘날의 일에 두려운 것이 있으니,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였다. 이시백이 아뢰기를,
"두렵다는 하교 또한 황공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지 않다. 임금이 어찌 사람의 말을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오늘날의 일은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경들도 바깥의 시비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이시백이 아뢰기를,
"신이 대신으로 있으면서 이처럼 작은 일로 애써 아뢰어도 살펴 주시지 않으니, 신이 어찌 감히 이 직책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그처럼 간절하니 애써 따르지 않을 수 없으나, 내 마음은 미안하다."
하였다. 권우가 외방의 과시(科試)에서 시제(試題)를 고치지 못하게 하고 또 감사·병사의 군관은 그 도의 과시에 나아가지 못하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단상이 아뢰기를,
"자문(咨文)에는 국왕(國王) 삼(蔘) 30포(包)라는 말이 있는데 회자(回咨) 가운데에서 거론하지 않았으므로 마치 참으로 이 일이 있는 듯해졌으니, 그 조어를 고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매우 놀랍다. 그 말이 옳다. 회자의 조어를 고치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자전의 환후가 회복되시어 이미 종묘에 고하고 진하하였으니, 특별히 설행하는 과시도 차례로 거행해야 할 것입니다. 일찍이 신미년095)  에 인목 왕대비(仁穆王大妃)께서 편찮았다가 회복되셨기 때문에 별시(別試)를 설행하였는데, 그 때에는 서울에 모두 모아 초시(初試)에 6백 인을 뽑았고, 또 신묘년096)  에도 자전의 환후가 회복되셨기 때문에 정시(庭試)를 설행하였습니다. 이번에 설행할 과시도 신미년의 전례에 따라 널리 뽑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대신에게 물으소서."
하였는데, 대신들이 다 신미년의 전례에 따라 별시를 설행해야 마땅하다 하니, 따랐다.

 

예조가 주성청(鑄成廳)을 시켜 산천에 제사지낼 때의 제기(祭器)와 친제 때의 제기를 새로 만들게 하기를 청하니, 따랐다.

 

윤7월 13일 병오

왕대비가 임시로 도총부(都摠府)에 이어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접때 강릉부(江陵府)에서 6월에 서리가 내렸으므로 감사에게 명하여 그 곳에 혹 지극히 억울한 일을 풀지 못한 자가 있는지를 알아보아 아뢰게 하였는데, 어찌하여 이제까지 아뢰지 않는가. 감사 민광훈(閔光勳)을 추고하라."

 

사비(私婢) 예진(禮眞)이 그 주인을 죽였으므로 삼성 추국을 명하였는데, 승복하였으므로 드디어 죽였다.

 

윤7월 14일 정미

전 대사헌 김남중(金南重)이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듣건대, 그저께 조강 때에 전하께서 대군(大君)이 망룡의를 입었다는 말을 거론하여 골육을 이간한다고 대간을 죄책하셨는데 대신(大臣)이 신의 이름만을 거론하여 대답하였다 합니다. 대개 신이 처음에 듣건대, 대군이 그 곳에 있을 때에 저들이 우대하여 망룡의를 입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이 말을 듣고 놀랍고 의혹되어 그때 동행한 사신에게 물었더니, 진짜 용포(龍袍)가 아니라 여러 가지로 수놓은 옷이라 하기에 신이 이에 전해 들은 것이 부실한 줄 알았습니다. 자초지종은 이러할 뿐입니다. 보통 사람에 대해서도 윤리를 벗어난 말이나 망측한 이야기로 골육 사이를 갈라놓아서는 안 되는데, 더구나 대군이 어떤 지위라고 천일(天日) 아래에서 무함하려 하겠습니까. 신이 이미 엄한 하교를 들은 이상 감히 이미 갈린 대관(臺官)이라 하여 감히 태연하게 그만둘 수 없으므로 감히 이렇게 아룁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지 않고 정원에 명하여 조보(朝報)에 내지 말게 하였다.

 

황해도 수안(遂安) 사람 정홍기(鄭弘基)의 비(婢) 예향(禮香)이 주인을 죽였으므로, 드디어 죄상을 살펴 죽이고 수안군을 현(縣)으로 낮추었다.

 

윤7월 15일 무신

정휘 옹주(貞徽翁主)가 죽었는데, 선조(宣祖)의 여섯 번째 딸이다.

 

윤7월 16일 기유

개기 월식(皆旣月飾)이 있었다.

 

윤7월 17일 경술

예조 참판 유철이 진정하여 면직을 청하니, 답하였다.
"경은 오늘날의 나라 형세를 살펴보라. 지금이 어떠한 때인가. 경을 논하면서 그냥 두지 않는 것은 그들의 심심풀이일 뿐이다. 경이 일찍부터 광재에게 붙어서 그 계책을 이루어줬더라면 경의 화현(華顯)이 어찌 헤아릴 수 있었겠는가. 세태에 아부하는 꼴을 하지 못하였으므로 이렇게 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군자의 처심(處心) 행사(行事)는 본디 이러하여야 한다. 어찌 반드시 근심하며 남을 탓하겠는가. 경은 줄곧 굳이 사직하여 사체를 손상시켜서는 안 되니 빨리 나와서 행공하라."

 

오위 장(五衛將) 김혼(金渾)이 상소하기를,
"신은 연전에 외람되게 북우후(北虞候)에 제배되었으므로 북쪽 변방의 폐단을 대략 압니다. 북쪽 변방은 호(胡)와 이웃하고 있는데 백성이 적습니다. 그래서 변방의 수령들이 양족(良族)을 등록하여 죄다 군액(軍額)에 채운 뒤 늠료(廩料)를 넉넉히 주고 날마다 함께 조련하여 급할 때의 소용에 대비하고, 봉족(奉足)을 주고 또 고공(雇工)을 주어 농사의 노고를 대신하게 하며 처자가 입고 먹을 밑천을 넉넉하게 하였으므로 북쪽 변방의 군사는 정예하다고 가장 일컬어졌습니다. 그런데 근일에는 조련하지도 않을 뿐더러 늠료도 없고 양족인 자가 또 다들 교안(校案)에 들어가서 군부(軍簿)를 피하는가 하면 영(嶺)을 넘어오는 말은 많으나 전마(戰馬)는 점점 적어지며 품관(品官)은 다 고공이 있으나 군사는 보인(保人)이 없으니, 늠료를 적당히 주어야 하겠습니다.
또 감사·병사와 우후(虞候)를 시켜 돌아다니며 시재(試才)하게 하고, 수령과 변장도 이것으로 출척하게 하고, 또 근신(近臣)을 따로 보내어 명천(明川) 길주(吉州) 등에서 한 과시(科試)를 특별히 설행(設行)하여 교생(校生) 무학(武學)들이 응시하게 해 널리 뽑으면, 이것이 군사를 풍족하게 하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말이 있는 자는 죄다 등록하게 하여 사고 팔지 못하게 하고 반드시 군사에게만 팔게 하면, 군사가 다 말이 있게 될 것입니다. 또 제 고장을 떠난 백성을 일체 쇄환하되 감히 받아들여 붙여 둔 자에게 죄를 주면, 민호(民戶)가 절로 늘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변방을 맡았던 무신이 원래 한둘이 아니었으나, 어찌 그대처럼 유념한 자가 있었겠는가. 묘당을 시켜 의논하여 처치하게 하겠다."
하였다.

 

윤7월 18일 신해

이기조(李基祚)를 공조 판서로, 조석윤(趙錫胤)을 대사헌 겸 대사성 좌부빈객으로, 목행선(睦行善)을 대사간으로, 서원리(徐元履)·임선백(任善伯)을 장령으로, 권우(權堣)를 사인으로, 정석(鄭晳)을 정언으로, 이행진(李行進)을 승지로, 심지원(沈之源)을 좌빈객으로, 조귀석(趙龜錫)을 지평으로 삼았다.

 

공조 판서 이기조(李基祚)가 금화(金化)에 이르러 죽었다.

 

상이 조강에 나아가 《서전(書傳)》 입정편(立政篇)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집의 윤집(尹鏶)이 인피하기를,
"유철에 대한 논의는 이미 정계(停啓)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엄한 하교를 받았으므로 재직할 수 없을 듯한데, 이제 또 잘난 체하고 입시하였습니다. 또 듣건대 유철이 스스로 변명한 상소에 대각(臺閣)을 침해한 말이 많았다 합니다. 유철이 스스로 엄폐하려 하더라도 여러 사람이 있는 데에서 들은 말을 어찌 엄폐할 수 있겠습니까. 성비(聖批)가 이미 엄하셨고 유철이 상소 가운데에 이처럼 공박하여 배척하였으니,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윤집이 아뢰기를,
"김남중(金南重)이 편안할 수 없는 일 때문에 상소하였으나 안에 두고 내리지 않으시고, 유철의 상소에 대한 비답은 이처럼 지나치게 너그러우셨으니, 이것도 미안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윤집이 또 아뢰기를,
"어제 유철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지금이 어떠한 때인가’ 하셨습니다. 성교가 참으로 옳습니다마는, 뭇 신하가 말하는 것도 그러합니다."
하니, 상이 또 답하지 않았다. 사간 권우가 아뢰기를,
"별시(別試)는 10월로 정해졌습니다마는, 외방의 거자(擧子)가 감시(監試) 뒤에 시기에 맞추어 과시(科試)에 나아가기 어려울 듯하니, 감시 전으로 고쳐 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김육(金堉)에게 하문하기를,
"이 말이 어떠한가?"
하였다. 김육이 아뢰기를,
"사자(士子)에게 폐단이 있다고 한다면 진퇴하는 것이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사간의 말대로 하라."
하였다. 상이 예조 판서 남선(南銑)에게 이르기를,
"북쪽 변방은 영북(嶺北) 수천리 밖에 떨어져 있으므로 멀리 경시(京試)에 나아올 수 없으니, 이제 그 곳에서 따로 과시를 설행하여 먼 외방 사람을 위로하려 하는데, 어떠한가?"
하니, 남선과 김육이 다 편리하다고 하자, 상이 따랐다. 김육이 또 평안도에서도 마찬가지로 과시를 설행하기를 바라니, 상이 번거롭다 하여 어렵게 여겼다. 육이 아뢰기를,
"전에 평안도에 별장(別將)을 보내어 돈을 통용하게 하였는데, 이제 듣건대 관서(關西)에서는 거의 다 통용하나 다만 돈이 통용하기에 모자란다 하니, 이제 더 보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백성이 반드시 관가에 바친 뒤에야 민간에서 쓸 수 있을 것이니, 혹 모곡(耗穀)을 덜어서 돈으로 거두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평안감사 허적(許積)이 요리하여 계품할 것이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계문하기를 기다려서 의논하여 처치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육이 아뢰기를,
"실록(實錄)은 여러 곳에 나누어 두어야 하겠습니다마는, 사관(史官)이 갖추어지지 않았으니, 강도(江都)에 먼저 보내소서."
하니, 따랐다.

 

관원을 보내어 노산(魯山)과 연산(燕山)의 묘소에 제사하라고 명하였다. 처음에는 노산의 묘소에 제사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예조가 아뢰기를,
"노산을 제사한다면 연산과 광해(光海)도 제사해야 합니다."
하니,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가 아뢰기를,
"이 세 군(君)은 다 동토(東土)에서 남면(南面)한 자이니, 향화(香火)의 은전은 실로 한 때의 아름다운 뜻에 관계됩니다."
하니, 우선 노산과 연산 두 군의 묘소에 제사하라고 명하였다.

 

알성 무과(謁聖武科) 초시(初試)를 설행(設行)하였다.

 

윤7월 19일 임자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가뭄을 근심한 나머지 이제는 비가 너무 많아서 농사를 해칠까 염려되니, 다시 오늘 내일의 형세를 보아 기청제(祈晴祭)를 거행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를 빈 지 오래지 않아서 또 다시 개기를 비는 것은 매우 번거로운 듯하나, 비가 그치지 않으면 형세를 보아 거행하라."
하였다. 예조 판서 남선(南銑)이 아뢰기를,
"북도(北道)에서 따로 설행하는 과시(科試)는 별시(別試) 6백의 수를 나누어 보내어 시취(試取)합니까. 또는 이 수 밖에 따로 액수를 정합니까?"
하니, 상이 태화에게 하문하였다. 태화가 대답하기를,
"따로 근신(近臣)을 보내는 것은 거조(擧措)가 절로 다르니, 정시(庭試)의 규례에 따라 미리 액수를 정하지 말고 시취하여 와서 등제(等第)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겠다고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오늘 빈청(賓廳)의 한림 취재(翰林取才) 때에 천거된 사람이 책을 대하여 입을 다물고 뚫어지게 쳐다만 보면서 강독하지 않았는데, 신들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사람이 누구인가?"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설서(說書) 유창(兪瑒)과 주서(注書) 심유(沈攸)입니다."
하였다. 대사간 목행선(睦行善)이 아뢰기를,
"사체가 미안하니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추고할 일이 아니다."
하였다. 상이 좌우의 사관(史官)에게 이르기를,
"한림을 모두 입시하게 하여 곡절을 상세히 말하게 하라."
하니, 검열 이민서(李敏敍)가 아뢰기를,
"신들이 당초에 의논하여 네 사람을 천거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는 돌려 보이며 가부를 물었을 때에 선생(先生)에게 저지당하였고 하나는 이조에서 미리 6품(品)에 올렸습니다. 저지당한 사람은 민점(閔點)이고 미리 올려진 사람은 정만화(鄭萬和)입니다. 그뒤에 어쩔 수 없이 남은 두 사람으로 완천(完薦)하고 분향(焚香)하였는데, 오늘 취재 때에 또 다들 강독하지 않았습니다. 마땅하지 않은 사람을 잘못 천거하고 해조에게 속은 것은 신들의 죄이므로 당초에 상소하여 스스로 탄핵하려 하였으나 일이 번잡스럽고 외람한 데에 관계되기에 감히 할 수 없었습니다. 신들이 일을 그르친 탓으로 실록(實錄)을 아직도 봉안할 기약이 없으니, 먼저 신들을 죄주소서."
하자, 상이 이르기를,
"조정의 명령를 따르지 않은 사람을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고 새로 천거하는 일을 빨리 행하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대사(大赦)는 멀리 귀양보내거나 안치한 자도 다 적어 아뢰어 재결받는데, 전리에 방귀한 자에 대해서 거론하지 않는 것은 매우 괴이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적어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이조 판서 심지원이 아뢰기를,
"별천(別薦) 중에서 가장 많이 천거받은 자는 각별히 기용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윤선거(尹宣擧)를 천거한 사람이 가장 많은데, 초탁하여 6품으로 올립니까?"
하니, 상이 그리하라고 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書傳)》 입정편(立政篇)을 강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해마다 봄 가을에는 배릉(拜陵)하는 일이 있습니다. 올 가을은 8월 29일과 9월 10일이 길일(吉日)이라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8월 29일로 정하여 거행하라."
하였다.

 

윤7월 20일 계축

달이 천름성(天廩星)을 범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주관편(周官篇)을 강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근래 나라의 기강이 풀려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으므로 멀고 나쁜 곳은 다들 꺼리고 피하려 생각합니다. 전 길주 목사(吉州牧使) 홍전(洪瑑)은 감히 어버이의 나이가 일흔이라 하여 감사(監司)에게 신보(申報)하였는데 감사마저 태연히 치계하였으니, 일이 매우 놀랍습니다. 다만 홍전에게는 늙고 병든 어버이가 있다 하니, 정상이 용서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문득 중률(重律)을 적용할 수 없으니,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하였는데, 여러 번 아뢰자 따랐다.

 

윤7월 21일 갑인

홍무적(洪茂績)을 대사헌으로, 조수익(趙壽益)을 부제학으로, 오준(吳竣)을 우참찬으로, 김종일(金宗一)을 교리로, 박승휴(朴承休)를 지평으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주관편을 강하였다.

 

윤7월 22일 을묘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주관편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상이 무신(武臣) 정익(鄭榏)에게 서방 사정을 물으니, 정익이 대답하기를,
"관서(關西)의 융무(戎務)가 오래 폐기되었으므로 일도(一道)의 군사가 구액(舊額)은 7만인데 이제는 3만에 불과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충정하지 못한 것이 그처럼 많은가?"
하니, 정익이 아뢰기를,
"양서(兩西)에는 유민(流民)이 많으므로 병액(兵額)이 날로 줄어 갑니다. 박서(朴遾)가 논한 유민을 금속(禁束)하는 법을 시행한다면 어찌 편리하지 않겠습니까. 또 마병(馬兵)은 2천 5백뿐인데 그 가운데에는 베[布]를 거두는 자도 있으니, 베를 거두지 말고 모두 말[馬]을 갖추게 한다면 마병은 다 쓸 만한 군사가 될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비국에 말하라."
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이단상(李端相)이 아뢰기를,
"이번 대사(大赦)에서 사죄(死罪)도 다 용서하였는데 정거(停擧)된 유생(儒生)은 오히려 정거를 풀어 주라는 하교가 없으니, 이들 30여 인이 어찌 억울해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해조를 시켜 적어 아뢰게 하였는데, 그 뒤에 다 정거를 풀어 주라고 명하였다.

 

윤7월 23일 병진

강원도 양양(襄陽) 등의 고을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히고 바다 고기가 많이 죽어 떠서 바닷가로 나왔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주관편(周官篇)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특진관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배릉(拜陵) 때 어영군(御營軍)도 어가를 따라가야 합니까. 군사들에게 출입을 분주하게 하여 노고를 익숙하게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리하라고 하였다. 원두표가 아뢰기를,
"유도(留都)하는 군사는 으레 수원(水原)의 군사를 썼으나, 이제는 타영(他營)의 군사를 징발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지경연 남선(南銑)이 아뢰기를,
"아침에 동래 부사(東萊府使)의 계본(啓本)을 보니, 차왜(差倭) 귤성정(橘成正)이 관중(館中)에서 죽었고 관왜(館倭) 중에도 죽은 자가 있다 합니다. 관왜는 으레 관(館) 뒤에 묻습니다마는 귤성정은 별차(別差)이니 예(禮)에 구별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대신과 재신(宰臣)들이 다 ‘예조 참의를 시켜 제문을 만들고 수령을 정하여 치제하고 동래 부사를 시켜 관왜에게 치부(致賻)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관왜에게는 치부할 것 없다. 귤성정에게는 치제해야 할 것인지, 대신에게 물으라."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동래 부사를 시켜 치전(致奠)하게 하고 예조의 답서(答書) 가운데에 상도(傷悼)하는 뜻을 대략 언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윤7월 24일 정사

실록청(實錄廳)의 전후 총재관(摠裁官)인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와 좌의정 김육(金堉)에게 안마(鞍馬)를 내리고, 도청당상(都廳堂上)인 대제학 채유후(蔡𥙿後)와 전 판서 이후원(李厚源)에게 모두 한 자급(資級)을 더하고, 낭청(郞廳) 조한영(曹漢英)·이천기(李天基)·권우(權堣)를 모두 당상에 올리고, 각방의 당상과 낭청에게 차등을 두어 물건을 내렸다.

 

호조 판서 이시방(李時昉)이 군량을 댈 수 없다 하여 경기의 삼수량(三手粮)을 【삼수라는 것은 훈국(訓局)의 군사이다.】  회복하기를 청하니,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 영돈녕부사 이경석(李景奭)은 아뢰기를,
"경기는 왕도(王都)의 근본이므로 외방보다 너그러이 돌보아야 합니다. 더구나 경기는 병화를 입은 것이 다른 도보다 참혹하므로 삼수량을 감면한 지 거의 20년이 되는데, 유사(有司)가 이제 와서 회복하기를 청하였으니, 어쩔 수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올해 농사를 생각하면 조금 익어 간다고는 하나 아직 여물기 전이므로 수확이 있다고 보장할 수 없는데, 이런 때에 몹시 가난한 경기 백성에게서 다시 거둔다면 크게 불편한 점이 있을까 매우 염려됩니다."
하고, 영의정 정태화(鄭太和)는 아뢰기를,
"오래 멈추었던 부세(賦稅)를 갑자기 거둘 수는 없으나, 어쩔수 없다면 앞으로 청사(淸使)에게 드는 비용을 민결(民結)에서 가져다 장만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좌의정 김육(金堉), 우의정 이시백(李時白)은 아뢰기를,
"경비는 모자라고 농사는 조금 잘되었으니, 죄다 회복할 수는 없더라도 3분의 2는 취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우선 내년을 기다리라고 명하였다.

 

윤7월 25일 무오

이수인(李壽仁)을 사간으로, 정유성(鄭維城)을 지경연으로, 민응형(閔應亨)을 동지경연으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書傳)》 군진편(君陳篇)을 강하였다.

 

내승(內乘) 안발(安釵)을 하옥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늘 마정(馬政)에 유의하여 내구마(內廐馬)의 상수(常數) 이외에 잘 달리는 말 10필을 따로 기르게 하여 혹 후원(後苑)에서 환관(宦官)과 위사(衛士)를 시켜 말을 타고 달리며 활을 쏘게 하고 보았다. 그 뒤에 또 가교마(駕轎馬) 20필을 갖추었는데, 내승 김익훈(金益勳) 등이 차비문 밖에 환관과 함께 때없이 드나드는 것을 바깥 사람들은 몰랐다. 김익훈은 성질이 알랑거렸으나 말을 잘 알아보므로 상이 매우 좋아하였고 안발은 직무를 게을리한다 하여 어떤 일 때문에 하옥을 명하였다.

 

상이 석강에 나아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하였다.

 

윤7월 26일 기미

병조 판서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군안(軍案)의 공호(空戶)를 충정하는 데에는 이미 정해진 기한이 있는데 백성의 소요를 염려하여 번번이 그 기한을 물리면 액수를 채울 기약이 없습니다. 일찍이 무자년097)  에 본조가 계품(啓稟)하여 비국과 의논을 거쳐서 5년에 한 번 충정하기로 법식을 정하였습니다. 경상도는 7백, 전라도는 6백, 충청도는 3백, 평안도는 1백 50, 황해도는 1백 20, 강원도는 80, 함경도는 90, 경기는 70, 경사(京師)와 송도(松都)는 각각 15, 강도(江都)는 8인으로 액수를 정하였습니다. 무자년부터 올해까지는 이미 5년을 넘었는데, 임성익(林聖翊)의 상소 때문에 또 5년을 물린다면 이는 10년 동안 전폐하는 것이 될 것이니, 당초의 정식에 따라 올해부터 충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개 지금의 군적(軍籍)을 임진란 이전에 비하면 충정하지 못한 자가 25만이고 지금 있는 자는 겨우 15만입니다. 영동(嶺東)과 삼남(三南)은 백성이 날로 번성하여 가는데, 수령과 방백(方伯)이 민정(民情)에 굽혀 따르는 것만을 능사로 여기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이 법을 각도에 두로 시행해야 하겠습니다마는, 오래 폐기된 끝에 해조(該曹)가 감히 독단할 수 없으니, 비국을 시켜 다시 의논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빈 자리에 충정하는 것이야말로 군정(軍政)의 막중한 일인데, 10년의 기한에 얽매이면 충정할 기약이 없을 것이니, 병조의 계사(啓辭)대로 시행하소서. 다만 오래 폐기한 끝에 2천 1백 40여 인을 한꺼번에 충정하면 소요스러운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니, 원수(元數)의 3분의 2를 각도에 나누어 정하여 충정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윤7월 27일 경신

사은사(謝恩使) 홍주원(洪柱元), 부사(副使) 윤강(尹絳), 서장관(書狀官) 임규(林葵)가 청국(淸國)에 가는데 상이 소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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