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11권, 효종 4년 1653년 10월

싸라리리 2025. 12. 21.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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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계해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군아편(君牙篇)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고서 시독관(侍讀官) 채충원(蔡忠元)이 아뢰기를,
"대사(大赦)가 여러 번 내려져 경죄·중죄가 다 사유(赦宥)되었는데 월등(越等)한 무리만이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매우 고르지 못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과 의논하여 처치하겠다."
하였다. 충원이 또 아뢰기를,
"어전에서 정거(停擧)한 자는 다 이미 풀어 주었는데 관학(館學)에서 사사로이 정거한 자는 논하지 않으니, 이것도 억울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일 유생들로 하여금 풀어 주게 하려 하였으나, 경연 신하가 다 놀라서 저지하므로 그만두었다. 이들은 마치 교화가 미치지 않은 백성처럼, 말하여도 행하지 아니하여 한갓 스스로를 욕되게 하므로 애초에 말을 내지 않았다. 교리도 이 말을 하여 이들에게 죄를 얻게 될 것이다."
하였다. 충원이 아뢰기를,
"이들 삭적(削籍)된 자는 다름이 아니라 양현(兩賢)을 종사(從祀)하려 할 때에 이의를 제기한 자들입니다. 종사하는 것은 중대한 일입니다. 저들이 종사하려는 것이 지극한 정성으로 어진이를 높이는 데에서 나왔으나, 이들이 이의를 제기한 것도 그 일을 중히 여겨 신중히 한 것입니다. 모두 옳지 않을 것이 없는데 1백 년 동안 정해지지 않은 시비를 가지고 논의가 여럿으로 갈라진 때에 한 번 이의를 제기한 것 때문에 문득 사정(邪正)을 정하여 5∼6인이 삭적되어 한 해가 지나도록 풀리지 않으니, 이것은 스스로 새로워질 길을 없앤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이상진(李象震)의 일에서 보니, 조정에서 풀어 주려는 뜻을 여러 번 보였어도 고집하여 풀어 주지 않았다. 그들이 하는대로 맡겨둔다면 반드시 풀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풀어 주어 조종하는 권세가 자기들에게 있고 조정에 있지 않게 하려 할 것이다. 그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미루어 보건대 또한 무엇인들 하지 못하겠는가."
하였다.

 

10월 2일 갑자

목행선(睦行善)을 황해 감사로, 오준(吳竣)을 동지춘추로, 이후원(李厚源)을 동지경연으로, 이수창(李壽昌)을 충청 수사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경명편(冏命篇)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고서 시독관 채충원(蔡忠元)이 아뢰기를,
"신이 전에 신하들이 붕당을 맺는 버릇을 여러 번 아뢰었습니다마는, 요즈음 상께서 처치하시는 것을 보면 합당하지 않은 듯합니다. 조신 가운데에서 누가 붕당을 맺지 않았겠습니까마는, 교묘한 자는 그 형적을 벗어나므로 임금이 깨닫지 못하고 진실한 자는 번번이 촉범(觸犯) 됩니다.
조석윤(趙錫胤)은 신이 평소에 마음을 아는 자인데, 오직 질박하고 정직하며 소견이 고집스러워서 번번이 붕당으로 죄를 받습니다. 서원리(徐元履)를 논한 것을 보아도 어찌 교묘한 자가 한 짓이겠습니까. 예전에 한 문제(漢文帝)가 가의(賈誼)가 재주는 높지만 나이가 젊기 때문에 잠시 장사(長沙)로 좌천하였는데, 그 뒤에 갑자기 죽어서 쓰지 못한 것을 아깝게 여기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이제 조석윤이 청수(淸修)하고 근칙(謹飭)하여 경악에서 논사하고 춘방에서 보도한 것은 누구인들 그보다 나은 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나이가 이미 50여 세가 되어 서북에서 분주하다가 길에서 죽는다면 전하께서 아깝게 여기시더라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또 옛사람이 말하기를 ‘순(舜)이 사흉(四凶)을 주벌 하였으나 사흉에게 죄가 있으니 순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이제 전하께서는 한두 신하를 죄줄 때에 성색에 매우 드러내시니, 참으로 애석합니다."
하니, 상이 웃으며 이르기를,
"교묘한 자는 벗어날 수 있다고 그대가 말하였는데, 그렇다면 당론은 그만 둘 수 없는 일인가. 그 또한 괴이하다. 또 붕당의 걱정을 말하는 사람도 색목(色目) 가운데에 벗어나지 못하는데, 먼저 그 마음을 돌이켜 붕당을 맺지 않으면 이 폐단이 절로 없어질 것이다."
하였다. 이는 대개 상이 채충원도 색목 가운데에 있으면서 이런 말을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비의 병 때문에 가서 보겠다고 청하니, 상이 말을 주어 보내고 내국(內局)에 명하여 약료(藥料)를 내리게 하였다.

 

정제현(鄭齊賢)을 인평위(寅平尉)로 삼아 숙휘 공주(淑徽公主)를 시집보냈는데 제현은 우참찬 정유성(鄭維城)의 손자이다.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둘째 딸을 감역(監役) 박세기(朴世基)의 아들 태정(泰定)에게 시집보냈다.

 

10월 3일 을축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육(金堉)이 아뢰기를,
"신은 병 때문에 오래 정고(呈告) 중에 있었으므로 접때 여러 신하가 죄 받을 때에 한 마디 말도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박장원(朴長遠)은 정상이 매우 가엾으므로 신이 감히 상차하였는데 위에서 특별히 너그러운 법을 쓰셨으니, 신은 실로 다행으로 여깁니다. 또 격동하여 이 일을 만든 것은 이태연(李泰淵)이 으뜸인데 태연이 이미 석방되었으니, 그 나머지 신하들도 마찬가지로 용서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국가에 관계되므로 쉽사리 석방할 수 없다."
하였다. 상이 하문하기를,
"풍정(豊呈)의 대례는 자전을 위하여 설행하는 것이다마는, 혹 ‘올해는 곡식이 여물지 않아서 내년 봄에 반드시 기근의 걱정이 있을 것이니 우선 내년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서 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하는데, 이 말이 어떠한가?"
하니, 김육이 대답하기를,
"그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사고는 미리 헤아릴 수 없으니, 내년에 풍년들 것을 어찌 반드시 그러리라고 장담하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미루어 거행할 것은 없고 헛된 예절만 줄이고 말아야 할 듯합니다."
하였다. 김육이 또 아뢰기를,
"전화(錢貨)는 거의 통용되나 올해에는 쌀이 귀하여 사는 시민이 없으니, 강화(江華)의 쌀 수천 석을 상평청에 옮겨서 돈을 쓸 길을 열고, 이어서 전세미로 그 수를 채우게 하소서."
하니, 상이 어렵게 여기고 호조에 의논하게 하였다. 김육이 또 아뢰기를,
"영의정 정태화는 그 아비가 외방에 있고 병이 있어서 귀근(歸覲)하는 일이 잦으므로 이 때문에 정승 자리가 오래 비게 됩니다. 듣건대 대명법(大明法)은 그 아비에게 아들의 벼슬을 준다 하며, 또 우리 나라의 고사에도 가자한 자가 있습니다. 지금 태화의 아비는 나이가 여든에 가까우니 또한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이 있어야 하겠고, 또 서울에 옮겨 살게 하는 것이 더욱 편리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뜻도 그렇다마는, 영상이 마음에 불안해할 것이므로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10월 4일 병인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경명편(冏命篇)을 강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풍정하는 날에 삼전(三殿)과 양궁(兩宮)에서 쓸 그릇이 지나치게 많으니, 유사를 시켜 적당히 줄이게 하라."

 

10월 5일 정묘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여형편(呂刑篇)을 강하였다.

 

10월 6일 무진

우의정 이시백(李時白)이 체직되었다. 이시백은 정승이 되어 일을 두루 원만하게 하는 재주는 없었으나 청렴 검약하다는 이름이 자못 있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해직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은산 현감(恩山縣監) 이정기(李廷䕫)와 직산 현감(稷山縣監) 이정악(李挺岳)을 충군(充軍)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안흥진(安興鎭)의 수군 훈련이 있던 날 소속 각 고을 군인이 오지 않은 자가 많았으므로 그 모자라는 액수를 미처 채우지 않은 고을을 조사하라고 명하였는데, 두 고을이 가장 심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었다.

 

10월 9일 신미

이시백(李時白)을 연양 부원군(延陽府院君)으로, 성하명(成夏明)을 사간으로, 이석(李晳)을 부응교로, 박세성(朴世城)을 겸설서로, 이지익(李之翼)을 검열로 삼았다.

 

좌의정 김육이 겨울 천둥의 이변 때문에 인책하여 면직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10일 임신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여형편을 강하였다. 시독관 채충원(蔡忠元)이 아뢰기를,
"이 편은 덕을 위주로 하였으므로 덕위(德威)·덕명(德明)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임금은 덕을 정치를 내는 근본으로 삼고, 형벌을 정치를 돕는 도구로 삼아야 합니다."
하고, 지경연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근일 태백성이 낮에 보이고 백홍이 해를 꿰고 달이 남두성(南斗星)을 범하고 또 겨울 천둥의 이변이 있습니다. 두렵게 여겨 덕을 닦고 허물을 살펴야 한다는 것은 늘 하는 이야기이기는 하나, 삼가 전하께서는 여기에 소홀히 하지 마시어 재변을 그치게 하는 도리를 다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하늘의 재변이 거듭 나타나니 나도 송구스럽다. 경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지원이 아뢰기를,
"밖으로는 변방이 허술하고 안으로는 백관이 직무에 태만하니, 나라의 일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헌부는 법을 집행하는 관사인데 태만하기가 다른 관사보다 심하여 추함(推緘)이 쌓여도 전혀 개좌(開坐)하지 않으니, 참으로 놀랍다."
하였다. 참찬관 안헌징(安獻徵)이 아뢰기를,
"문신 전경(文臣專經)의 강(講)은 국가가 권장하는 방도인데, 응강(應講)하는 자가 10여 인뿐이니, 일이 매우 드러나지 않습니다. 예조를 시켜 더 뽑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10월 11일 계유

심지한(沈之漢)을 승지로, 권격(權格)을 설서로, 민응형(閔應亨)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선정전(宣政殿)에서 전경 문신(專經文臣)을 시강(試講)하였다. 승문 정자 김하현(金夏鉉)이 으뜸을 차지하였는데, 말을 내려 주었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육이 아뢰기를,
"선왕의 실록을 이제 네 곳에 봉안해야 하겠는데 한꺼번에 나누어 두기 어려운 형세이니, 적상성(赤裳城)과 오대산(五臺山)에 먼저 배왕(陪往)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접때 조복양(趙復陽)·이단상(李端相) 등이 나라의 일이 중대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사천(史薦)에서 분란을 일으켜, 사국(史局)이 텅 비게 하여 실록의 봉안을 이제까지 지체시켰으니, 참으로 놀랍다. 모두 관작을 삭탈하라."
하였다. 김육이 아뢰기를,
"당초에 조복양 등이 일이 굴러서 이렇게까지 될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또한 한 가지 일로 거듭 벌주는 것은 성도(聖度)의 화평에 어그러질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라의 일이 지극히 중대하니 용서할 수 없다."
하였다.

 

10월 12일 갑술

정언 이후(李垕)가 상소하기를,
"신이 듣건대, 정자는 ‘사람의 정이 쉽게 일어나서 누르기 어려운 것은 오직 노여움이 가장 심하다.’ 하고, 주자는 ‘사람이 노여워할 때에는 본디 이처럼 불쑥 일어나는 법이다.’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옛 유자는 마음을 다스리는 데에 노여움을 누르는 것을 첫째 의리로 삼았습니다. 더구나 임금의 경우는 일을 처리할 즈음에 조금이라도 절도에 맞지 않으면 벌이 율에 맞지 않아서 사람들이 손발을 둘 수 없을 것이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접때 조석윤(趙錫胤)이 말한 것이 지나치더라도 그 마음은 성실 전일하여 다른 뜻이 없는데 벌을 적용한 것이 너무 무겁습니다. 조복양(趙復陽) 등이 사천(史薦)에 대하여 가부를 말하는 것은 본디 규례인데, 나라의 일에 분란을 일으킬 무슨 뜻이 있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마음을 화평히하여 너그러이 용서하소서."
하였으나, 답하지 않았다.

 

10월 13일 을해

간원이 아뢰기를,
"사관(史官)의 신천(新薦)을 전에 이 벼슬을 지낸 자에게 두루 묻는 것은 국조에서 행하여 온 구규인데, 이는 대개 사국을 중히 여기기 위한 뜻입니다. 이제 조복양 등이 신천에 대하여 가부를 말한 것이 있다 하여 또 중벌을 준다면, 뒤에 천거를 주관하는 자가 공론을 따르지 않고 임의로 낮추거나 높이는 경우가 설사 있더라도 천거에 대하여 물을 때 누가 한 마디라도 말하려 하겠습니까. 뒷날의 폐단을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니, 조복양·이단상 등의 관작을 삭탈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대들은 자신이 신하이면서 국가의 중대한 일을 도리어 조복양 등 두어 사람들의 일만도 못하게 여기는가. 이들이 마음 쓰는 것이 방자한 정상은 나라 사람들이 아는 바로서, 이들 때문에 실록의 봉안이 이제까지 지체되었다. 이것으로 논하면 그 죄는 만 번 죽어도 갚기 어려우니, 사천의 뒷 폐단은 논할 성질이 못된다."
하였다.

 

강원 감사 민광훈(閔光勳)의 고신(告身)을 뺏었다. 강릉(江陵)에서 6월에 서리가 내린 이변이 있었는데도 민광훈이 바로 치계하지 않았으므로 이 명이 있었다.

 

10월 14일 병자

우참찬 김수현(金壽賢)이 죽었다.

 

10월 16일 무인

인정전에서 유생을 시강(試講)하였다. 생원 도여원(都汝垣)이 으뜸을 차지하였는데 직부회시를 명하고 그 나머지는 분수(分數)를 주고 차등을 두어 물건을 내렸다.

 

10월 17일 기묘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여형편(呂刑篇)을 강하였다. 시강관 이석(李晳)이 아뢰기를,
"이 편 가운데에 ‘백성을 형(刑)의 중(中)에 단속한다.’ 하였는데, 중이라는 것은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형벌이 알맞고서야 사람들에게 권장되고 징계되는 마음이 있어서 덕을 공경하게 되니, 이것은 임금이 유념해야 할 곳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형벌이 알맞지 않으면 혹 죄가 없는데 억울하게 죽는 자가 있을 것이니, 그 폐해가 어찌 적겠는가."
하였다. 지경연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이 편의 뜻을 보면 형벌을 쓰는 도리를 더욱이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제도(諸道)의 도사(都事)가 형신을 남용하고 뜻대로 가두어 꺼리는 것이 없으니,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법을 벗어나 형벌을 쓰는 것을 감사가 된 자도 금지하지 않으니, 매우 한심스럽다. 빨리 제도에 분부하여 도사들이 남형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호종(扈從)한 사람으로서 은상(恩賞)을 입지 못하여 상언(上言)하는 자가 많으니, 병조를 시켜 조용(調用)하게 하라."

 

10월 18일 경진

민응협(閔應協)을 이조 참의로, 김익희(金益熙)를 대사성으로 삼았다.

 

이때 실록을 네 곳에 나누어 두려 하였다. 춘추관의 당상이 배왕(陪往)해야 할 것인데 현존 인원이 없으므로, 상이 대신에게 명하여 3품 가운데 발탁할 만한 자를 의논하여 천거하게 하였다. 대신이 이시해(李時楷)·조수익(趙壽益)·민응협(閔應協)·김익희(金益熙)·이행진(李行進)을 천거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여형편을 강하였다.

 

10월 20일 임오

구인후(具仁垕)를 우의정으로 삼고, 이시해(李時楷)를 도승지로 삼고 이어 가선(嘉善)의 계자(階資)를 주었다. 이완(李浣)을 훈련 대장으로, 신준(申埈)을 어영 대장으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여형편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고서 상이 판의금 원두표(元斗杓)와 형조 판서 이후원(李厚源)에게 일렀다.
"이 편은 다 형벌을 삼가라는 말이니, 위에 있는 자만 유념해야 할 뿐이 아니다. 경들은 지금 형벌을 맡은 관원이니 또한 이 뜻을 공경히 따르지 않아서는 안 된다."

 

10월 21일 계미

대사헌 민응형(閔應亨)이 상소하기를,
"신은 나이가 여든에 가까워 실날같은 목숨을 겨우 이어 가므로 자연히 벼슬에 힘쓰지 못하니, 원하건대 직명을 풀어 주어 고향에서 목숨을 다하게 해 주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10월 22일 갑신

우의정 구인후(具仁垕)가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24일 병술

정세규(鄭世規)를 대사헌으로, 서원리(徐元履)를 집의로, 권대운(權大運)·이만웅(李萬雄)을 부수찬으로, 이정영(李正英)을 부교리로, 조진석(趙晋錫)을 정언으로, 최혜길(崔惠吉)을 강원 감사로, 이문위(李文偉)를 경상 수사(慶尙水使)로 삼았다.

 

10월 26일 무자

집의 서원리(徐元履)가 상소하기를,
"신이 일을 논한 데에는 마디마디 잘못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몽롱한 것이고 하나는 과격한 것이니, 조석윤(趙錫胤)이 신의 말을 그르다하고 또 조복양(趙復陽)을 아깝게 여긴 것이 마땅합니다. 이어서 조석윤을 생각하면 형적을 피하지 않고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다 아뢰었으니, 성상께서 평온한 마음으로 사리를 살펴 화평을 간직하도록 힘쓰셨다면, 이 세 신하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아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가령 그 말이 과연 당론에서 나왔더라도 본디 절충하여 처치할 방도가 있었을 것인데, 어찌 한때의 희노(喜怒) 때문에 쉽사리 착각하실 수 있겠습니까.
예전부터 붕당의 해독은 당말(唐末)보다 심한 때가 없었습니다. 문종(文宗)이 개탄하여 그 폐단을 고치려 생각하였고 무종(武宗)·선종(宣宗)도 진퇴할 즈음에 용동(聳動)하여 일신하려는 뜻이 없지 않았으나, 그 진퇴하는 것은 우승유(牛僧孺)가 나아가고 이덕유(李德裕)가 물러가거나 이덕유가 나아가고 우승유가 물러간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진퇴가 정해지고 난 뒤에 조정에 앉아 보면 여전히 당론이어서 천하의 인재는 늘 그 반을 얻을 뿐이니, 이것이 문종이 조정의 붕당을 없애기 어려움을 한탄한 까닭입니다. 이른바 없애기 어렵다는 것은 대개 사람을 제거하기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폐습을 없애기 어렵다는 것인데, 그 폐습을 없애려면 시비를 밝히고 사정(邪正)을 가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어질고 재능 있는 사람이 모두 나아가서 치우치게 쓰이거나 치우치게 버려질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저 세 신하는 모두 가장 먼저 거두어 써야 할 사람인데 문득 배척하여 쫓았으니 작은 잘못이 아닐 듯합니다. 쇠세(衰世)의 인재는 본디 치세만큼 많지 못하니, 배양하여 만드는 데에 그 방도를 갖추어 다하더라도 반드시 순식간에 보람을 거두지는 못할 것인데, 진퇴할 즈음에 어찌 애석해하는 마음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전일에 이단상(李端相) 형제에게 분개한 것은 그 당론을 미워한 것이고, 재화(才華)와 문벌로 말하면 끝내 버릴 수 없는 자들입니다. 신이 이단상을 죄주기를 청할 때에 추고로 말한 것은 대개 또한 조정을 위하여 인재를 아끼는 뜻이었습니다. 성명께서 신의 말에 대하여 혹 양찰하신 것이 있었다면 세 신하의 일을 어찌 형적이 그럴 듯하다 하여 죄주실 수 있었겠습니까.
아, 인재가 있는데 정사가 수거(修擧)되지 않는 경우는 없으며, 인재가 모자라는데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경우 또한 없습니다. 전하께서 여기에 대하여 마음에 두렵게 여기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또 이 조정의 시끄러운 꼬투리를 가져온 것은 실로 신의 잘못에서 말미암았으니, 신의 죄는 만 번 죽어도 갚기 어렵습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27일 기축

조수익(趙壽益)을 대사헌으로, 홍무적(洪茂績)을 좌참찬으로 삼았다. 홍무적은 강직을 자부하여 여러 번 대각에 있으면서 과감히 말하는 풍도가 자못 있었으나, 만년에 이르러서는 처음같지 않은 것이 많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여형편을 강하였다.

 

원주(原州)의 유학(幼學) 이석량(李碩亮) 등이 상소하여 그들이 사는 고을이 인열 왕후(仁烈王后)가 탄생한 곳이라 하여 과거를 설행하기를 청하니, 해조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였는데, 예조가 회계하기를,
"해주(海州)는 인조 대왕께서 탄강하신 곳이므로 특별히 과거를 설행하였으나, 왕비가 탄생한 고을은 일찍이 이런 규례가 없었습니다.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김육, 우의정 구인후가 아뢰기를,
"왕비가 탄강한 곳에서 특별히 과거를 설행하는 것은 예전에 규례가 없었으니, 고을 사람의 청 때문에 전에 없던 일을 창설할 수 없습니다."
하니,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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