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계해
태백(太白)이 낮에 나타났다. 유성이 북극성 아래에서 나왔다.
12월 2일 갑자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 유성이 태미원(太微垣)의 단문(端門) 안에서 나왔는데 붉은 빛이 땅을 비추었다.
12월 3일 을축
청사(淸使)가 평양에 이르러 평안 감사 허적(許積)에게 말하였다.
"전별연이 있던 날 국왕이 세 신하의 일을 간청하였는데, 우리들이 후대한 은혜에 매우 감사하여 돌아가서 황제에게 아뢰려 한다. 그런데 본국의 자보(咨報)가 있으면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십중팔구일 것이다."
12월 5일 정묘
승지 서원리(徐元履)가 상소하기를,
"제주(濟州)에 표류하여 온 사람이 가진 녹비(鹿皮)를 국가에서 값을 주고 사 와서 장차 청사가 요구하는 데에 쓸 것이라 하는데, 신의 생각에는 먼 곳의 사람을 대우하는 도리가 이러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저 사람들이 우리 나라에 표류하여 와서 의지하여 머무를 곳이 없으므로 조정에서 돌보고 회유하여 주기만을 바라는데, 이제 이들을 보살피지 않고 문득 서로 매매하여 장삿꾼같이 한다면 어찌 국가의 대체를 손상시키지 않겠습니까."
하니, 묘당에 의논하라고 명하였는데, 의논이 마침내 행해지지 않았다.
12월 6일 무진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12월 7일 기사
남로성(南老星)을 대사간으로, 강유(姜瑜)를 남병사(南兵使)로, 민진익(閔震益)을 황해 병사(黃海兵使)로, 오준(吳竣)을 대사헌으로, 남선(南翧)·박길응(朴吉應)을 승지로 삼았다.
12월 8일 경오
숙휘 공주(淑徽公主)의 길례(吉禮)를 거행하였다. 이날은 인열 왕후(仁烈王后)의 기신(忌辰)의 재계(齋戒)가 있는데, 예관(禮官)이 흐릿하여 살피지 못하고 거행하기로 택일하여 성상이 추모하는 날에 이 혼인의 예를 거행하였으므로, 식자가 속으로 한탄하였다.
12월 9일 신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12월 11일 계유
상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중외의 사형수를 계복(啓覆)하였다.
12월 12일 갑술
형조가 사형수를 재복(再覆)하였다.
12월 13일 을해
상이 선정전에 나아가 사형수를 삼복하였다. 대신 이하가 다 김이생(金二生)·윤일남(尹一男)·굴개(屈介) 등은 참해야 한다고 말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14일 병자
김집(金集)을 좌참찬으로, 조수익(趙壽益)을 부제학으로, 심유행(沈儒行)을 장령으로 삼았다.
12월 15일 정축
지평 정석(鄭晳)이 상소하여 체직을 청하니, 답하기를,
"한 벼슬에 오래 있는 것은 본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니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이때 대각에 있는 자가 열흘만 지나면 문득 병을 핑계하여 체직을 청했으므로 상이 늘 그 폐습을 미워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 하교가 있었다.
12월 16일 무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영의정 정태화의 정고가 세 번에 이르렀으나, 다 불윤 비답하라고 명하였다.
12월 17일 기묘
인정전에서 유생을 시강(試講)하였다. 유학(幼學) 박문도(朴文道)가 으뜸을 차지하였는데 직부회시를 명하고, 그 나머지는 차등을 두어 분수(分數)를 주었다.
이경억(李慶億)을 순안 어사(巡按御史)로 삼아 영남에 가서 살피게 하였다.
12월 18일 경진
유창(兪瑒)을 설서로, 홍처량(洪處亮)을 집의로 삼았다.
12월 20일 임오
상이 은대(銀臺)·옥당·춘방(春坊)과 한림·주서와 병조의 낭관에게 명하여 춘회금원(春回禁苑)을 시제로 하여 십운 배율(十韻排律)을 지어 바치게 하고, 이어서 주찬(酒饌)을 내렸다. 이튿날 대제학 채유후(蔡𥙿後)를 명초(命招)하여 어제의 시제와 운(韻)으로 스스로 지어 바치게 하여 어필로 등제(等第)하여 내리고 이어서 여러 신하가 지은 시를 고교(考校)하여 들이라고 명하였다. 대제학 채유후와 도승지 이시해(李時楷)에게 각각 초피모(貂皮帽)와 귀가리개를 부수찬 이만웅(李萬雄)에게 초피립(貂皮笠)과 귀가리개를 우승지 안헌징(安獻徵), 우부승지 남훤, 설서 유창, 검열 안후열(安後說)에게 각각 삭지(朔紙) 2권과 후추 5승을 내렸다.
장령 심유행(沈儒行)이 아뢰기를,
"괴원(槐院)의 참하(參下)는 청로(淸路)의 시작인데 이번 간택은 난잡한 것이 자못 많습니다. 정숙주(鄭叔周)는 역괴(逆魁) 김자점(金自點)의 일가 사람으로서 그 문에서 길러졌고, 나만엽(羅萬葉)은 문재(文才)가 있기는 하나 가문에 흠이 있으니, 이러한 사람이 무턱대고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본원의 장무관(掌務官)은 추고하고 정숙주 등은 모두 삭제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22일 갑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정언 나이준(羅以俊)이 인피하기를,
"어제 상회(相會)하는 자리에서 대사간 이행진(李行進)이 능멸하면서 기세를 부려 처음 만나 말하는 것이 전혀 서로 공경하는 뜻이 없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전계(前啓)에 관하여 초안을 꾸미는 일 때문에 억지로 그 집에 갔더니 병을 핑계하고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전에 보지 못하던 일인데, 모두가 신처럼 어리석은 자가 깔보인 탓입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고, 대사간 이행진이 인피하기를,
"어제 상회하는 자리에서 정언 나이준이 체통을 잃은 일이 많았고 또 그 지망(地望)이 대각에 맞지 않으므로 과연 논체(論遞)하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간통(簡通)을 이미 냈으니 병을 핑계하여 만나지 않은 것은 형세상 당연한 것인데, 나이준이 이 때문에 인피하였으니 신이 태연히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하고, 사간 정기풍(鄭基豊)이 인피하기를,
"어제 대사간 이행진이 신에게 간통하여 정언 나이준을 논하려 하였는데, 신이 동료를 박체(駁遞)하는 것은 사체가 중대하다고 답하니, 이행진이 과연 멈추었습니다. 대저 나이준은 진실하고 순근(淳謹)하여 괴원(槐院)의 낭서(郞署)을 뽑을 때에도 이의가 없었으며 지망이 미천하다는 말은 더욱 그럴 듯하지도 않습니다. 신은 한 원(院)에 같이 있으면서 이미 그 논의를 들었으니, 본디 감히 처치할 수 없습니다. 신을 체차하소서."
하고, 정언 이휴징(李休徵)이 인피하기를,
"이 일은 당초에 왕복한 곡절이 모두 정기풍이 인피한 사연 가운데에 있거니와, 감히 처치할 수 없는 것은 기풍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또 신이 길에서 예조 참판 여이재(呂爾載)를 만났는데 신이 피하지 않았다 하여 배리(陪吏)를 가두려 하였습니다. 신이 변변치 못하더라도 벼슬이 언책인데 어찌 다른 사람이 배리를 가두어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모두 신이 피열(疲劣)한데도 무릅쓰고 있는 탓이니,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나이준 등이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헌부가 아뢰기를,
"시비를 막론하고 이미 탄핵받았으면 형세상 그대로 그 벼슬에 있기 어렵습니다. 이미 간통을 냈으면 진실로 나가서 만나기는 어려우나 무고한 사람을 논하려 하였으니 화평해야 할 도리를 매우 잃었습니다. 서로 왕복하였으면 처치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만나자 곧 회피한 것은 잘못이 자기에게 있지 않습니다. 정언 나이준과 대사간 이행진은 체차하고 사간 정기풍과 정언 이휴징은 출사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정기풍도 체차하라."
하였다.
장령 심유행(沈儒行)이 인피하기를,
"이번 괴원의 간택은 실로 외람하므로 공론이 시끄러운 대상이 한두 사람에 그치지 않았지만 신은 가장 심하게 드러난 자에 대하여 논하였습니다. 이제 물의를 들으니 모두 신을 그르다 합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김만기(金萬基)는 한 눈이 병으로 멀었습니다. 괴원의 선택에서 삭제하고 괴원의 장무관도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그의 죄가 아니라 하여 따르지 않았다.
12월 24일 병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영의정 정태화가 정고하여 면직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25일 정해
부교리 조귀석(趙龜錫), 부수찬 이만웅(李萬雄) 등이 상소하기를,
"정숙주(鄭叔周)는 과연 역괴(逆魁)의 처족(妻族)입니다마는, 역괴에게서 길러졌다는 말은 억울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나만엽(羅萬葉)은 그 형 만기(萬紀)가 혼조(昏朝)의 현관(顯官)이었기 때문에 가문의 흠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가운데 얼신(孼臣) 희분(希奮)은 항부민(降俘民) 환(寏)의 손자이니 또한 어찌 면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김만기(金萬基)는 가문이 재화(才華)가 있고 나이가 젊고 총민(聰敏)한데 어찌 한눈이 병으로 멀었다 하여 괴원에 이미 참여된 뒤에 뒤미처 삭제할 수 있겠습니까. 헌부가 논한 것은 실로 어그러지므로 신들이 동료와 함께 발론한 대관을 논체하려 하였으나 말이 믿음받지 못하여 동료의 의논이 들쭉날쭉하니, 이는 모두 신들이 피열하여 깔보인 탓입니다. 신들을 체직하소서."
하고, 교리 채충원(蔡忠元)도 상소하기를,
"이 일은 옥당이 논할 일이 아니므로 장관과 상의하면서 감히 구차하게 따를 수 없었습니다. 이제 조귀석 등이 상소한 사연을 보니 저들은 공론을 주장하고 신은 실로 사정(私情)을 따랐습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다 윤허하지 않았다.
종실 밀산군(密山君) 이찬(李澯) 등이 상소하기를,
"중묘(中廟)의 후궁 창빈(昌嬪) 안씨(安氏)의 부모 분묘가 경기 안산(安山) 땅에 있는데, 안산 사람 유중임(柳重任)이 그 부형을 몰래 묻었으니, 파내라고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 상소의 사연을 보니 일이 매우 놀랍다. 유중임을 나문(拿問)하여 처치하고, 또 수호(守護)하는 등의 일을 해조를 시켜 더욱 밝혀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창빈은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의 어머니인데, 대원군이 선조 대왕(宣祖大王)을 낳아서 길렀으므로, 선조 때에 특별히 수호군(守護軍)을 정하여 불을 금하고 벌채를 금했었다.
12월 26일 무자
도목정을 하였다. 김좌명(金佐明)을 대사간으로, 이재(李梓)를 집의로, 김우석(金禹錫)을 정언으로, 신혼(申混)을 수찬으로, 조비(趙備)를 부수찬으로, 조수익(趙壽益)을 경기 감사로, 이준구(李俊耉)를 필선으로, 심황(沈榥)을 사서로, 원만석(元萬石)을 정언으로, 신유(申濡)를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삼았다.
장령 심유행(沈儒行)이 상소하여 체직을 청하였는데, 그 대략에,
"사람에게 중죄가 있더라도 본디 외손에게까지 말이 미쳐서는 안되고, 자신의 흠과 눈병이 있는 자라면 괴원(槐院)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이제 도리어 옥당의 논핵을 받았으니, 공론을 알 만합니다. 신을 체직하여 남들의 말에 사죄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 소를 이조에 내렸다. 이조가 회계하여 체직을 청하니, 상이 따르고 조귀석(趙龜錫)·이만웅(李萬雄)도 체차하게 하였다.
12월 27일 기축
태백(太白)이 낮에 나타났다.
이어서 도목정을 하였다. 이지익(李之翼)을 검열로, 남용익(南龍翼)을 부수찬으로, 심총(沈棇)을 장령으로 삼았다.
12월 28일 경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함경도 고원군(高原郡) 이남에 큰 눈이 내려 길이 통하지 않았다. 강원도 강릉부(江陵府)에 큰 눈이 내려 눌려 죽은 자가 있었다.
12월 29일 신묘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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