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일 계사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수찬 이수인(李壽仁)이 상소하기를,
"신이 엎드려 살피건대, 전하께서는 남다른 총명으로 영특한 기운이 드러나, 홀로 한 세상을 통치하려는 뜻과 선비를 얕보고 마음대로 하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드리는 신하가 공손하고 근신하면 혹간 채납되기도 하지만 면전에서 반대하고 조정에서 간하면 반드시 거스르게 되며, 시사를 범연히 논하면 곧바로 응답하시지만 조금이라도 전하의 마음에 거슬리면 반드시 꾸짖음을 보이십니다. 심지어는 발끈 진노하고 말소리와 얼굴빛을 대단히 엄하게 하며 행동 거지가 어긋나서 대체(大體)를 크게 손상하니, 원근간에 전파되어 보는 사람이 어리둥절해 합니다. 말씀을 올려 죄를 얻은 자가 해마다 없지 아니하여, 삼사(三司)의 관원을 하루도 조정 안에 편안히 있지 못하게 하니, 이것이 어찌 성조(聖朝)의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천지의 떳떳함은 그 마음이 만물을 두루 감싸면서도 마음을 두지 않기 때문이고, 성인의 떳떳함은 그 마음이 만사에 순응하면서도 정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자의 학문은, 마음을 터놓고 매우 공정하게 하여 사물이 오면 순응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성인의 기뻐함은 사물에 있어서 마땅히 기뻐해야 하기 때문이요, 성인의 성냄은 사물에 있어서 마땅히 성내야 하기 때문이니, 이는 성인의 기뻐하고 성냄이 마음에 달려 있지 않고 사물에 달려 있는 것이다. 대체로 사람의 정(情) 중에서 쉽게 발로되면서도 제재하기 어려운 것은 유독 성내는 것이다. 다만 성날 때에 그 성냄을 잊어버리고 이치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면, 외물의 유혹쯤이야 또한 두려워할 것이 없음을 알 수 있으니, 그렇게 되면 그 도(道)에 대하여 대부분 깨달았다고 하겠다.’ 하였으며,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성냄을 잊어버리면 공정하고, 이치를 관찰하면 순리롭다.’ 하였으니, 이것이 오늘날 전하께서 마땅히 깊이 살펴보셔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부드럽게 비답하였다.
1월 3일 갑오
승지를 보내 전옥서(典獄署)에서 죄수를 검열하여 죄가 가벼운 사람은 석방하도록 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옥당은 청선(淸選)이므로 명망이 흡족한 사람이 아니면 일찍이 시독(侍讀)하는 직임에 바로 제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새로 제수된 교리 강호(姜鎬)는 당초 홍문록(弘文錄)에 참록될 때부터 이미 물의가 있었는데, 이제 찰방으로서 바로 교리에 제수되었으니 정사의 체통이 너무도 전도되었습니다.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1월 5일 병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거행하였다.
1월 6일 정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유준창(柳俊昌)을 장령으로, 심택(沈澤)을 전남 감사로 삼았다.
1월 7일 무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상참(常參)을 거행하였다.
상이 조강에 나아가 《서전》 문후지명(文侯之命)을 강론하였다. 강론이 끝나자 영경연 김육(金堉)이 아뢰기를,
"경성 판관(鏡城判官) 이형(李逈)의 아비가 등창이 발생하여 조석간에 죽음을 기다리고 있으니, 그 정상이 가련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형에게 벌을 준 지 이미 오래되었고 대신의 말이 또 이와 같으니, 특별히 체직을 허락하여 돌아가서 병든 아비를 보살피게 하라."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자주 병으로써 면직을 청하니, 상이 승지를 보내 돈유하였다.
연양 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이 휴가를 얻어서 귀향하여 부모의 묘소에 성묘할 것을 청하니, 말을 내주도록 명하고 또 본도로 하여금 제수(祭需)도 하사하도록 하였다.
1월 8일 기해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비서(費誓)를 강론하였다.
1월 9일 경자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간원이 아뢰기를,
"경기 도사 조사기(趙嗣基)는 일찍이 대시(臺侍)를 지낸 사람으로서, 스스로 근칙하지 않고 무부(武夫)의 노비를 가로채어 빼앗았으며, 그 본주인이 상언하여 억울함을 하소연함에 이르러서는 그의 집으로 유인하여 문권을 만들고 돌려주겠다 허락해 놓고는 그 노비를 시골에다 숨겨 놓고 끝내 돌려주지 아니하여, 물의가 자자한데도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뜻이 없으니, 징계하는 조치가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추고하도록 명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진서(秦誓)를 강론하였다.
1월 10일 신축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상소하기를,
"신이 과분하게 본직에 있음으로부터 재변이 자주 나타나고 기강이 퇴폐하여, 조정 안의 체통이 날로 무너지고 사대부 사이에 풍습이 아름답지 못하며, 공사(公事)가 사사(私事)를 이기지 못하고 일이 착실하게 되지 못하여 점차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는 모두 신처럼 형편없는 사람이 오랫동안 수상의 자리를 더럽힌 소치입니다. 또 몸의 병이 이미 고질화되어 힘을 펴 반열에 나아갈 수 없으니, 신을 속히 체직하여 병든 몸을 살려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 경이 과인의 지극한 정성을 양해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겸손하다. 경이 들어간 뒤로부터 팔다리를 잃어버린 것과 같아 어떻게 조처할 바를 모르고 있으니, 어찌 물고기가 물이 없고 소경이 인도자가 없는 정도이겠는가. 기강이 퇴폐하여 조정에 좋은 풍습이 없는 것은 모두 과인에게서 연유한 것이다. 경의 집안은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받았으니, 마땅히 보답할 도리를 생각하여야지 어찌 한가한 것을 요청할 수가 있겠는가. 속히 나와 치도(治道)를 논하여 지극한 소망에 부응하라."
하고, 사관(史官)을 보내 돈유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부총관(副摠管) 김여수(金汝水)는 일찍이 제주 목사가 되었을 적에 탐장죄를 크게 범하였다가 형벌을 모면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다시 사판(仕版)에 들어가고 또 그로 하여금 경석(經席)에 출입하도록 하였습니다. 제수 명단이 한번 내려오자 여러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장리(贓吏)를 다스리는 법과 사람을 등용하는 방도가 참으로 이와 같아서는 안 됩니다. 제주도 사람들이 여수를 언급하면 반드시 양호(梁護)에게 비하는데, 만일 여수가 다시 사판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바다 밖의 먼 백성들이 반드시 ‘국법이 양호에게는 시행되었는데 여수에게는 무너졌다.’고 할 터이니, 그 조정의 수치가 됨이 어떠하겠습니까. 김여수를 사판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양호는 바로 혼조 때 제주 목사였는데, 계해 반정 후에 탐장죄로 죽임을 당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2책 12권 1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659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한국고전번역원
1월 11일 임인
예전에 양천(陽川) 사람 이원귀(李元龜)의 아내 양씨(梁氏)가 원귀에게 소박당하여 이로 인해 물에 빠져 죽자, 양씨의 오빠가 본현에 고소하기를 ‘원귀가 그의 아내를 쳐죽여 시체를 강에 던져 버렸다.’ 하였다. 송관(訟官)이 오래도록 판결을 못하자, 경기 감사 윤순지(尹順之)가 부평 부사 이홍연(李弘淵)과 남양 부사 윤겸(尹㻩)으로 하여금 함께 그 옥사를 조사하도록 하였으나 끝내 그 진상을 캐내지 못하였다. 순지가 그 사실을 조정에 알리니, 서울 감옥으로 잡아 올려 조사하도록 명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감사 및 송관이 사사로움을 끼고 오래도록 옥사를 판결하지 않았으므로, 모두 잡아 가두어 엄중 규명하지 않을 수 없다. 형추하는 것이 마땅한지 아니한지를 대신들에게 물어라."
하였는데, 여러 대신들이 모두 아뢰기를,
"송관 등이 중대한 옥사를 느리게 처리하였으니 참으로 죄가 있습니다. 다만, 《예기》에 이르기를 ‘형벌이 대부(大夫)에게는 미치지 않는다.’ 하였으니, 형추를 적용하기까지 한다면 대단히 과중할 성싶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대신들의 뜻을 마지못해 따라 비록 형추는 집행하지 않더라도 무겁게 벌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윤순지·이홍연·윤겸은 모두 도배(徒配)하고, 양천 현감 심광사(沈光泗)와 인천 부사 이석망(李碩望)은 검시관(檢屍官)으로서 상세히 검사하지 못하였으니 역시 도배하도록 하라."
하였다.
1월 12일 계묘
윤강(尹絳)을 도승지로, 서정연(徐挺然)을 헌납으로, 이정영(李正英)을 교리로, 이연년(李延年)을 수찬으로 삼았다.
간원이 전일에 아뢰었던 것을 다시 품신하여 조사기(趙嗣基)를 파직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그의 함답(緘答)을 보고 처리해도 늦지 않을 터인데, 어찌 꼭 이 기회를 이용하여 급급히 서두르는 작태를 하느냐."
하였다. 정언 원만석(元萬石)이 인피하면서 아뢰기를,
"조사기가 남의 노비를 빼앗은 것은 사대부의 수치가 됩니다. 그러므로 신이 대석(臺席)에서 발언하여 서로 의논해서 아뢰었는데, 말이 신임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엄중한 하교를 받으니, 신은 그윽이 심중으로 개탄합니다. 전하께서는 말을 들을 적마다 옳고 그름을 구별하지 않으시고 먼저 파당을 의식하시어, 옳고 그름이 분명하지 않게 하고 사악함과 정직함이 뒤섞이게 하시니, 살피기를 좋아하는 훌륭한 덕에 해로움이 있지 않겠습니까. 사기가 당초에 범법하지 않았다면 신들이 비록 논핵하고 싶더라도 실로 틈탈 만한 기회가 없었을 터인데, 또 어찌 급급히 서두르는 작태가 있겠습니까.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고 공안(公案)이 뚜렷한데도 전하께서는 오히려 석연치 않게 여기시니, 신은 언로가 더욱 막히어 입을 다물고 말을 않는 것이 풍습으로 이루어져서 고려(高麗) 사람이 이른바 ‘간하지 않는 것이 사간(司諫)이고 말이 없는 것이 정언(正言)이다.’라고 한 것에 불행하게도 가까워질까 두려우니, 신이 어찌 개탄스럽지 않겠습니까. 엄중한 분부를 받고 감히 그대로 재직할 수 없으니, 신을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기가 세력과 지위가 있는 사람에게 죄를 얻은 처지에 갑자기 공격을 당하니 어찌 의심이 없겠느냐. 이런 풍습이 가시지 않으면 몰래 중상하는 해를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느냐. 이 말이 참으로 지극히 공정한 데서 나왔다면, 형조가 조사하여 아뢸 때 자연히 그 죄가 있게 될 터인데, 어찌 꼭 급급하게 쓸데없는 말을 하느냐.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이에 앞서 사기가 상소를 올려 조석윤(趙錫胤)을 배척하였는데, 석윤이 마침 상의 뜻을 거슬렸기 때문에 비사(批辭)가 이와 같았다. 대사간 김좌명(金佐明), 사간 심세정(沈世鼎), 정언 김우석(金禹錫) 등도 역시 이 때문에 인피하였다. 만석 등이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는데, 헌부가 모두 출사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그러나 만석은 갑자기 논핵하여 사람을 죄에 빠뜨렸다는 이유로 특별히 체차하도록 명하니, 좌명 등은 이미 만석과 더불어 일을 함께한 이상 그대로 재직할 수 없다는 이유로 또 인피하였다. 헌부가 다시 출사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좌의정 김육이 상차하기를,
"병사(兵士)는 정예에 주력하고 많은 것에 주력하지 않아야 합니다. 국가의 재력이 이미 바닥났으니 병사를 기르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습니다. 도성의 병사를 마땅히 5천 명으로 정원을 정하고, 늙고 병든 사람은 면제시키고 빠진 사람은 보충하여 그 수효를 잃지 않게 해야 할 뿐입니다. 또 경대부 및 사서인의 자제로서 직역(職役)이 없고 나이 20세 이상인 자에게는 해마다 베 1 필씩을 납부하여 국가의 재용을 돕도록 하고, 떠돌아다니는 백성으로서 산골짜기에 흩어져 사는 사람에 대해서는 각각 둔진(屯陣)을 설치하고 전답을 개간하여 영원히 농사짓도록 해 그에 대한 조세를 거둬들여 군사들을 먹여 살리는 비용에 보태소서."
하니, 그 차자를 비국으로 내려보냈으나 의론이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1월 13일 갑진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달이 토성(土星)을 범하였다.
1월 14일 을사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1월 15일 병오
홍처량(洪處亮)을 집의로, 박세성(朴世城)을 정언으로, 남선(南銑)을 우빈객으로, 민응형(閔應亨)을 대사헌으로, 유정익(柳廷益)을 전남 병사로 삼았다.
홍청도(洪淸道) 대흥현(大興縣) 백성이 한 번에 세 딸을 출산하니, 본도로 하여금 준례에 의거하여 쌀을 하사하도록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봄 기운이 막 발동하여 온갖 물건들이 모두 화창하니, 임금은 하늘을 본받아 마땅히 살려주기를 좋아하는 것으로써 근본을 삼아야지, 만일 한 사람이라도 억울한 자가 있다면 화기(和氣)를 손상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지금 수감된 죄수가 많이 체류되어 형리(刑吏)와 옥졸이 빙자하여 침해함이 끝이 없으니, 옛사람이 이른바 ‘땅을 그어 감옥을 만들고 나무를 깎아 가혹한 관리를 만들었다.’는 것이 어찌 슬프고 괴로운 말이 아니겠습니까. 자주 죄수를 검열하여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가납하였다.
영돈녕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상차하였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신이 입시하지 못한 지가 지금 벌써 오래되었습니다. 다행히 이달 초 조회하는 반열에 재차 나아가 청아한 풍채는 바라뵈었지만, 옥음을 친히 듣지는 못하였습니다. 물러나와 사실(私室)에 돌아옴에 성상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생겨나고 이 새해를 맞이하여 축원하는 정성이 배나 간절하여, 삼가 탕반(湯盤)의 명(銘)인 ‘진실로 어느 날 새로워졌으면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라.’는 세 글귀를 가지고 북향하고서 외우기를 자주하였습니다. 이어 가만히 생각건대, 탕임금이 날로 새로워진 것은 그 덕을 닦았기 때문입니다. 덕을 닦는 데에는 그 또한 요체가 있는데 말하자면 반성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니, 반성하는 방도에 있어서 그 부지런히 힘쓴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활달하고 너그러우며 총명하고 효성스러워 정신을 가다듬고 정치를 도모하여 부지런히 경연에 납시니, 그 시일로 고찰해 본다면 풍속을 바꿈이 거의 이루어졌어야 했을 터인데, 비단 소망에 부응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강의 퇴폐함이 날로 더욱 심화되었으니,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아래에 있으면서 봉행하는 사람들이 그 방도를 다하지 못하여 그렇게 된 것입니까. 아니면 전하께서 스스로 반성하여 찾아보심에 그 정치를 하는 방도에 있어서 그 요체를 얻지 못하여 그렇게 된 것입니까. 봉행함에 있어 그 방도를 다하지 못한 것은 진실로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책임이지만, 그 스스로 반성하는 방도에 있어서는 또한 어찌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옛날 잘 다스려진 세상에 백성들의 풍속이 변화된 것은, 애당초 윗사람이 몸소 실행하고 마음에 체득하여 그들을 인도함에 연유치 않은 것이 없습니다. 삼대(三代) 이후로 한·당·송의 정치가 비록 고대와 같지는 못하였지만, 또한 각각 다스림을 이룬 시대도 있었고, 그 다스림도 역시 각각 숭상한 바가 있어 혹은 절검(節儉)을 숭상하기도 하고, 혹은 인의(仁義)를 가장하기도 하며, 혹은 인후(仁厚)를 토대로 하기도 하여, 그 숭상한 바의 깊고 낮음에 따라 다스려짐의 크고 작음이 똑같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숭상하는 것은 어디에 있습니까. 문(文)을 숭상합니까, 무(武)를 숭상합니까. 덕(德)을 숭상합니까, 엄격함을 숭상합니까. 이 서너 가지 것에 있어서 숭상한 바가 없다고 이를 수 없을 터인데, 안일한 습관이 고쳐지지 않고 사치하는 풍습이 극성을 부리니, 아마 숭상한 바가 진실하지 못함이 있어서 그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찌 그리도 효험이 없습니까.
그러나 수령을 선발하고 금군(禁軍)을 훈련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일찍이 정녕코 경계하였기 때문에 퍽 효험이 있었습니다. 정성이 있고서도 효험이 없는 것을 신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본원이 되는 곳에 대해 만일 두렵게 생각하여 힘쓴다면 날로 새로워지는 효험을 어찌 이루기 어렵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유자(儒者)의 말이 오활한 데로 귀착됨을 면치 못하여 당연한 이치에 있어서도 간혹 성찰하는 즈음에 소홀히 하시니, 전하께서 마땅히 힘을 써야 하는 것은 도(道)의 대요(大要)에 있지 않겠습니까. 대요는 무엇을 이르는 것이냐 하면 자기의 사욕을 이기는 것과 지식을 극진히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사욕을 이기지 못하면 마음이 공정하지 못하고, 지식이 극진하지 못하면 이치가 밝지 못하게 됩니다. 필부도 학문을 함에 진실로 깊이 나아가는 데에 뜻이 있다면 참으로 감히 이것에 힘쓰지 않을 수 없는데, 더구나 제왕으로서 다스림을 이루는 데에 뜻이 있다면 이것을 놔두고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음악·여색·사냥 등을 좋아하지 않으시니 그 안일(安逸)과 기욕(嗜欲)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기(己)’라는 것은 사욕이니, 자기 주장대로 하는 것도 사욕이요, 간함을 거절하는 것도 사욕이요, 말을 경솔히 하는 것도 사욕이요, 갑자기 성내는 것도 사욕이요, 남이 나만 못하다고 여기는 것도 사욕이요, 동정 언행이 도를 따르지 않는 것도 모두 이 사욕입니다. 진실로 능히 자기의 사욕을 이겨 내고 용감하게 성찰하고 힘껏 실행하여 구차하고 황급할 때라도 잘 생각하여 안팎이 서로 수양되면, 정치가 나오는 근원이 맑고 허명(虛明)하여 중심에 보존된 것이 치우친 바가 없고 외부에 발로된 것이 언제나 모두 절도에 맞을 터인데, 무슨 말이 귀에 거슬리겠으며, 무슨 과오인들 고치기를 꺼리겠으며, 무슨 일을 잘못하겠습니까. 하늘과 땅이 덮어주고 싣고 있음에 만물이 수용되는 것처럼, 기상이 화평한데 어찌 흔연히 스스로 만족스럽지 않겠습니까.
여조겸(呂祖謙)은 일개 보통 선비입니다. 젊었을 때에 성질이 거칠고 포악하여 음식이 뜻에 맞지 않으면 바로 가구를 쳐부셨는데, 후일에 오랫동안 병이 들어 다만 《논어》 한 책만을 가지고 한가롭게 보아가다가 ‘자기 몸에 대해서는 스스로 엄중하게 꾸짖고 남에 대해서는 가볍게 꾸짖어야 한다.’는 구절에 이르러서 홀연히 깨달아 생각이 일시에 평화로워져 마침내 종신토록 갑자기 성내는 일이 없었는데, 주자가 말하기를 ‘이것은 기질(氣質)을 변화시키는 법이 될 만하다.’ 하였습니다. 전하의 고명하신 자질로서 자기의 사욕을 이기는 공부에 마음을 더 쓰신다면, 사욕이 큰 화로 위의 한 송이 눈처럼 사라지는 것이야 어찌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기를 ‘하루라도 자기의 사욕을 이겨 예(禮)에 돌아가면 천하 사람이 허여할 것이다.’ 하였으니, 성인께서 어찌 빈말을 하였겠습니까.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오직 성인의 가르침을 반드시 법 받을 만한 것으로 삼아 날로 새로워지는 근본을 삼으소서.
이른바 지식을 극진히 한다는 것도 역시 요체가 있습니다. 제왕의 격치(格致) 공부는 일반 선비와 같지 않은데, 어찌 일마다 궁구할 수 있으며 사물마다 연구할 수 있겠습니까. 역대의 흥망을 검열하고 한 시대의 어진 사람과 사악한 사람을 밝혀내어, 선(善)을 따르면 흥성하고 간함을 거절하면 멸망하며 어진 사람에게 맡기면 다스려지고 사악한 사람을 쓰면 어지러워지는 것이, 각각 그 이치가 있습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 그 이치를 연구하면 제왕으로서의 지식을 극진히 하는 것이니 무엇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미 지나간 자취는 알기가 어렵지 않은데도 그 이치를 밝힌 사람은 적습니다. 이러므로 혼란과 패망이 서로 연속된 것입니다. 그 이치의 원인을 추측해 보면, 선(善)을 따르지 않을 수 없고 간함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으며, 어진 사람을 임용하지 않을 수 없고 사악한 사람을 물리치지 않을 수 없으며, 정치를 그 어진 사람들과 더불어 길을 같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이치가 분명하니 결연히 그 당연한 것을 알아내고 용감하게 실행하여 의심하지 않는다면, 바람이 불고 물이 흐르는 것처럼 아무리 중지시키려 하여도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과 허위를 구분하기가 어렵고 붉은빛과 자주빛은 혼동되기가 쉽습니다. 더구나 군자는 친근히 하기가 어렵고 소인은 친압하기 쉬우며, 크게 속이는 자는 신실한 것 같고 크게 간사한 자는 충성스러운 것 같습니다. 만일 먼저 이치에 밝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면, 비유컨대 먼지가 낀 거울 속에 예쁜 것과 미운 것이 서로 뒤섞여 있는 것과 같아서, 옳고 그른 것이 분명하지 않고 허위와 진실이 드러나지 않으며, 굽은 것이 곧음이 되고 진실한 것이 망령됨이 되어, 처음에는 심한 지경에 이르지 않지만 끝내는 또한 어려움을 면치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물의 이치가 다 연구되어 극진하고 지식이 모르는 것 없이 다하기 때문에 천하 사람들의 뜻을 꿰뚫어 보아 천만 사람의 마음이 바로 한 사람의 마음임을 알 수 있고, 뜻이 성실하고 마음이 바르기 때문에 자기 한 몸의 사욕을 이기어 능히 한 사람의 마음으로써 천만 사람의 마음을 삼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사사로운 뜻이 그 사이에 끼어 있으면 한 꺼풀 밖이 바로 호월(胡越)처럼 멀어지니 만일 이와 같다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이 꼭 마땅히 하고자 해야 할 것이 아닐 수도 있고, 내가 싫어하는 것이 꼭 마땅히 싫어해야 할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좋은 정치를 하고 싶어도 그것이 될 수 있겠는가.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극진히 하는 것은 자신에게서 살피는 것만 같지 못하니 그 얻는 것이 더욱 절실하기 때문이다.’는 것은, 바로 또한 선유(先儒)의 말씀입니다. 이 말이 무엇을 이르는 것이냐 하면, 지식을 극진히 하는 요체는 모름지기 지선(至善)이 있는 곳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사람의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그치고, 사람의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그치고, 사람의 자식이 되어서는 효(孝)에 그치고, 사람의 어버이가 되어서는 자(慈)에 그치고, 나라 사람들과 사귐에는 신(信)에 그치는 따위가 그것입니다. 만일 몸과 마음 위에서 성찰하지 않고 다만 만물의 이치만을 널리 관찰하고자 한다면, 절대로 돌이켜서 자신에게로 들어오게 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정자(程子)가 말씀하기를 ‘함양(涵養)은 모름지기 경(敬)을 써야 하고 학문을 진취시킴은 지식을 궁구함에 있다.’ 하였으니, 공경하면 사욕을 이기는 것이 그 가운데 있고 지식을 궁구하면 학문이 더욱 진취되어, 마음이 바르지 아니함이 없을 것입니다. 임금이 이것으로써 위에서 표준을 세운다면, 좋아하고 미워하며 취하고 버리는 것이 모두 치우침이 없고 하나라도 올바름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신이 비록 일찍이 경전(經傳)을 대략 읽었지만, 궤만 사고 구슬은 되돌려주어 망연히 아무 것도 얻은 바가 없고, 다만 입과 귀로써 말하고 듣기만 하면서 세월을 낭비하여, 지금 노쇠한 나이에 이르러서는 곤궁한 집에서 슬피 탄식하는 한 사람이 되고 말았으니, 그 마음을 닦는 학문상에 있어서 어찌 감히 망령되이 의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간절히 충성을 원하는 뜻은 늙었다고 해서 조금도 쇠퇴하지 않으니, 이에 말한 것은 바로 서책 중에서 나온 것이요 신이 근거없이 억측으로 지어낸 것이 아닙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물정에 오활하다고 여기시어 사람 때문에 말까지 폐기하지 마소서.
또 엎드려 생각건대 풍정(豊呈)을 거행하는 것은 본래 국가가 재물이 풍족하여 만사가 형통할 때에 거행하는 융성한 예이니, 오늘날 이 일은 그 시기가 아닌 것같습니다. 그러나 상께서 자전(慈殿)을 봉양함에 있어 약을 쓰지 않고도 병환이 나은 경사를 거듭 겪으셨으니, 인정과 도리로써 헤아려 봄에 한번 장수를 축원해 드리는 예를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의장(儀章)과 도수(度數)의 사이에 과연 능히 절약 감축하여 거행한다면 누가 불가하다고 말하겠습니까. 신은 가만히 생각하건대 연회를 베풀고 풍악을 연주하면서 만수(萬壽)의 술잔을 올리는 것은 예이고, 인(仁)을 미루어 나가고 덕을 베풀어 오래도록 즐거워하는 기쁨을 다하는 것은 정성입니다. 만일 그 기쁨을 다하고자 할진대 어찌 만백성들의 환심을 얻는 것에서 벗어나겠습니까. 만백성들의 환심을 얻어 국가의 복록을 공고히 하는 것은 제왕의 효도입니다. 이른바 만백성들의 환심을 얻는다는 것은 꼭 사람사람마다 기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행동 거지가 적의함을 얻으면 인심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시경》에 이르지 않았습니까. ‘효도에 대한 생각이 결핍되지 않기 때문에 길이 같은 무리들에게 파급시킨다.’ 하였습니다. 지금 만일 효도를 다하는 마음을 미루어 나가고 동료에게 파급시키는 인(仁)을 베풀어, 외로운 신하와 귀양간 사람으로 하여금 양기(陽氣)의 화창함에 따라 귀가하여 어버이와 자식이 서로 만나 보아 이별하는 한이 없게 해준다면, 또한 훌륭한 덕이 되지 않겠습니까.
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인원이 그 수효가 많지 않은데도, 어려움이 많은 때를 당하여 미처 연회를 베풀어 주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풍정을 거행한 뒤에 기로소의 여러 신하들이 담로(湛露)001) 의 은택을 받는다면, 이는 진실로 세상에 드문 융성한 은전이 될 것입니다. 기로소의 신하로서 일찍이 법을 집행하는 관리가 되었던 자가 우연히 잘못을 저질러서 이 때문에 견책을 당하여 성밖에 움츠리고 엎드려 있은 지 벌써 해가 바뀌었습니다. 나이가 80에 가까운데다가 벌이 이미 시행되었으니, 이것도 또한 용서하여 줄 수 없겠습니까. 세시(歲時)에 고령자에 대하여 위문하는 것도 예전의 준례를 상고할 수 있으니, 이에 유사에게 명하여 서울과 지방에 신칙하여 80세 이상에게는 두루 선물을 보내주면서 위문하도록 하고, 봄철이 화창하여 구휼을 의론할 때이므로, 홀아비·과부·고아·독신자로서 하소연할 데가 없는 사람에 대하여 먼저 적곡(穀糴)을 지급해 주며, 나라를 위하여 죽은 사람의 집안에 대하여 별도로 구휼해 주는 바가 있으면, 늙은이를 존경하는 은혜가 널리 미치고 자식처럼 사랑하는 인(仁)이 모두 덮일 것입니다.
이처럼 인재가 결핍된 때를 당하여 진실로 한 가지 장점이라도 있으면 모두 아낄 만한 것입니다. 더구나 언로(言路)가 열리고 막힘에 따라 흥하고 망하는 근원이 구분되니, 말이 비록 중도를 잃었더라도 그것을 용납하고자 하는 것은 그 염려함이 깊은 것입니다. 지금 헌장(憲章)의 임무에서 방금 떠나가 바로 변방의 관리로 보임된 사람이 있으니, 만일 소환을 받게 된다면 다행스럽겠습니다. 기타 근시(近侍)의 신하로서 한 때에 죄를 얻은 사람들도 모두 죄명을 씻어 주는 중에 포함된다면, 조정의 조치가 적의함을 얻어 사방의 인심이 기쁘게 복종할 것입니다. 그리고 어사가 안핵(按劾)한 것에 이르러서는 혹간 원한을 품은 자의 지나친 훼방에서 기인하여 간간이 청렴하고 근신하게 공무를 봉행하다가 한번 법망에 걸려 오랫동안 죄적(罪籍)에 실려 있는 사람도 있고, 또한 간혹 재능을 지니고도 파직되거나 산관(散官) 중에 묻혀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무리들을 특별히 묘당에 명하여 해조와 함께 공론을 채취하고 널리 방문하여, 별단(別單)으로 품계하도록 하여 하자를 씻어주고 등용한다면, 이것도 역시 이미 요직에 있는 사람을 현달시키고 미천한 사람을 등용하는 뜻입니다. 은택이 널리 흐르고 우로(雨露)가 고르게 적시어 만물이 봄철을 함께하여 훈훈하게 태화(太和)가 된다면, 어찌 성세(聖世)의 아름다운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아, 곤란하고 걱정스러운 것이 눈에 넘치고 나라가 불안하여, 하늘의 재앙과 물건의 괴이한 것을 역사에 이루 다 기록할 수도 없고, 인심과 세도(世道)가 흘러간 물처럼 돌이키기 어려워, 걱정스럽고 말할 만한 일을 모두 열거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사치하는 폐해가 현재 고질적인 병폐가 되고 있습니다. 옛날을 상고해 봄에 심할 경우 나라를 멸망시키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어찌 대단히 두렵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이 분수를 지키지 않고 귀천에 법도가 없어 마침내 화려한 것에 주력하여 온갖 물건이 값이 오르고, 노복과 하인들이 비단옷이 아니면 혼인을 하지 않으며, 시정의 천한 무리들이 그 아내를 교여(轎輿)에 태우니, 풍기가 대단히 문란함이 끝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혼조 때에도 또한 듣지 못하였던 것인데도, 법사가 금지하지 않고 금리가 체포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과연 마침내 어찌 할 수가 없어 그대로 방임해 둘 뿐입니까.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이것은 《대전(大典)》의 법이 세상에 시행되지 않고 있음에 연유하여 그렇게 된 것이요, 대전이 시행되지 않는 것은 역시 윗사람들이 그 법을 범하기 때문입니다. 사라(紗羅)와 능견(綾絹)의 경우 당하관은 감히 입지 못하는 것이 법인데도, 삼사(三司)에 출입하는 관원 가운데 공공연히 웃옷을 만든 사람이 많되, 사람들이 역시 괴이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하고서 하인들이 참람하게 범법하는 것을 금지하려고 한다면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옛말에 이르기를 ‘성안에는 넓은 소매를 좋아하고, 사방에는 모두 비단이다.’ 하였는데, 이로써 미루어 본다면 지금 궁중에도 혹간 사치하는 풍습에 대하여 말할 만한 것이 없겠습니까. 궁궐은 대단히 은밀하여 신이 감히 상세하게 알 수는 없지만, 사람들이 눈으로 보고 말한 것으로써 말씀드린다면, 새로 지은 공주(公主)의 저택이 제도를 초과함이 퍽 심하다고 합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사치하는 풍속이 날로 번성하는 것에 대하여 괴상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대전(大典)》은 선왕(先王)의 법이니 성왕의 법을 준행하고서 과오를 범하는 자는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국가에서 준행하지 않고 명색이 사대부들도 역시 그 법을 준행하지 않으니, 저 무식한 하천배들이 무엇을 보고 느껴서 스스로 법제를 위반하지 않겠습니까.
아, 하늘을 순응하는 도리는 형식에 있지 않고 오직 실지에 있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재앙을 당하고서 두려워하여 자신을 탓하는 교지(敎旨)가 전후에 걸쳐 누차 내렸는데, 말씀이 매우 간절하여 성탕(成湯)의 육책(六責) 이상이었습니다. 상림(桑林)의 육책 중에 궁실(宮室)이 한 조목에 해당하니, 집을 높게 짓는 것에 대한 경계를 감히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이루어진 일은 말할 수 없거니와 장래 것은 뒤이어 개선할 수 있으니, 만일 장차 더 짓게 되면 절대로 다시는 그렇게 짓지 말도록 하고, 이 뒤에 비록 혹간 부득이하여 공사를 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 칸수를 《대전》의 제도에서 벗어나지 말도록 하소서. 따라서 해조에 명하여 《대전》을 거듭 밝히게 하여 서울과 지방으로 하여금 모두 준수할 것을 알도록 하고, 또한 법관(法官)으로 하여금 사치하고 참람한 것을 엄금하도록 하여 정치를 돕는 일이 그 사이에 아울러 행해지면, 위에서 좋아하는 것이 있음에 아래에서는 반드시 더 좋아하는 것이 있는 법이니, 어찌 명령한 바가 그 좋아하는 바와 반대되는 걱정이 있겠습니까.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마땅히 조종(祖宗)을 본받는 것으로써 마음을 삼으소서."
1월 16일 정미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경석에게 이르기를,
"경의 차자 내용이 진심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으며 바로 나의 병통에 적중하여, 경솔히 비답할 수 없기 때문에 경을 불러 대면하여 말하는 것이다."
하니, 경석이 아뢰기를,
"신은 정신이 이미 소모되고 또 문견도 없으니 차자 중의 말뜻에 무슨 도움되는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장려하여 높여주신 말씀이 이에 이르니 감격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과인이 비록 능히 체행하지는 못하지만 경의 말이 간절하니 감히 가슴속에 새겨두지 않겠는가."
하니, 경석이 아뢰기를,
"지금 성상께서 비록 정신을 가다듬고 다스림을 도모하고 계십니다만, 요순 같은 성인도 반드시 자기의 사견을 버리고 남의 의견을 따랐으니, 신의 말이 비록 노망하지만 오직 성상께서 가려 쓰심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경에게 바라는 것이 다른 대신과는 다른데, 경이 생각하는 바가 있으면 어찌 다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쓰고 안 쓰는 것은 내게 달려 있을 뿐이다."
하고, 상이 이어서 경석의 차자를 앞에다 놓고서 마땅히 시행하여야 할 일들을 집어내 입시한 승지에게 하교하기를,
"고령자를 위문하고 고아와 과부를 구휼하는 일에 대해서는 호조로 하여금 시행하도록 하고, 나랏일로 죽은 사람에 대해서도 특별히 구휼하는 은전을 내리도록 하라. 어사의 안핵(按劾)으로 오랫동안 죄적(罪籍)에 실려 있는 사람과, 재능을 지니고서도 파직되거나 산관(散官)에 파묻혀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묘당과 이조로 하여금 공론을 채취하여 하자를 씻어주고 수용하도록 하라. 전 판서 윤이지(尹履之)에 대해서는 이미 벌을 내렸고 대신이 또 그의 사정을 말하였고 앞으로 또 기로소(耆老所)의 연회도 있으니, 외톨이가 된 탄식이 있게 해서는 안 되므로 그를 석방하도록 하라. 조석윤(趙錫胤)은 본래 명망이 있으니 잠시 변방에 놔두어 백성을 진정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신이 병 때문에 면직을 청하였는데도 윤허를 받지 못하여 애써서 입궐하였지만, 한 가지도 도움된 것이 없고 죄만 끼치고 있어 마음에 부끄러울 뿐만이 아니니 나랏일에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오랫동안 일어나지 못하기에 내 마음이 결연스럽더니만 오늘 경을 보니 기쁨을 말할 수 없다."
하였다. 경석이 아뢰기를,
"하늘의 재앙이 거듭 닥치니, 성상께서 마땅히 몸을 닦아 성찰하는 실지를 극진하게 하여 재앙을 중지시키는 방도로 삼는 것이 가장 급선무입니다."
하고,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가 아뢰기를,
"옛사람이 이르기를 ‘한 마디 착한 말이 화기(和氣)를 불러들이기에 충분하다.’ 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고령자를 존경하고 빈궁한 자를 구휼하라는 분부가 있었으니, 만일 이 마음을 미루어 나간다면 비 오고 갬이 알맞음을 얻는 것이 또한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전하께서 언제나 형벌로써 징계 권면하는 바탕을 삼으시는데, 포용하는 덕에 매우 흠이 됩니다. 임금은 기뻐하고 노하는 데 중도를 얻음이 귀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경석이 아뢰기를,
"박장원(朴長遠)은 충신 심현(沈誢)의 외손인데, 그의 어미가 병환이 심한데도 서로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국가에 풍정을 거행하게 되었으니, 마땅히 파급시켜 나가 어짐을 미루어 나가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귀양간 지가 오래되지 않았으니 아직 놔두라."
하였다.
1월 17일 무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우의정 구인후(具仁垕)가 장차 연경(燕京)에 가게 된 까닭으로 휴가를 얻어 귀향하여 부모의 묘소를 성묘할 것을 청하니, 말을 내주도록 명하고 또 본도로 하여금 제수(祭需)도 하사하도록 하였다.
1월 18일 기유
심노(沈𢋡)를 승지로, 남로성(南老星)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1월 19일 경술
영가 부부인(永嘉府夫人) 김씨(金氏)가 죽었다. 정승을 지낸 고 김상용(金尙容)의 딸이요 신풍 부원군(新豊府院君) 장유(張維)의 아내이니, 바로 왕비의 어머니이다.
1월 21일 임자
상이 하교하였다.
"정광성(鄭廣成)의 나이가 80에 가까우니 참으로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이 있어야 한다. 더구나 대신의 아비에 대해서 은혜를 추급하는 일이 없어서야 되겠느냐. 이조로 하여금 가자하도록 하라. 또 거주하는 곳이 퍽 멀어 영상(領相)이 때때로 부모의 안부를 물어볼 수 없어 언제나 어버이를 사모하는 생각이 간절할 터인데, 나랏일에 전심할 수 있겠느냐. 내 몹시 민망스럽게 여긴다. 승지는 이 뜻을 특별히 하유하여 그로 하여금 화창한 봄을 이용해서 들어와 부자의 정을 편안하게 하고, 또 나의 뜻에도 부응하도록 하라."
1월 22일 계축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함경도 갑산부 민가에서 소가 송아지를 낳았는데, 머리가 둘, 눈이 넷, 귀가 넷이었다.
장령 심총(沈棇)이 상소하여 양호(兩湖)에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고, 사대부의 자제로서 부역이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해마다 베 1필씩을 징수할 것을 청하니, 그 상소를 비국으로 내려보냈다.
1월 23일 갑인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의 서문을 강론하였다. 강론이 끝나자 상이 참찬관 심노(沈𢋡)에게 이르기를,
"내가 경문(經文)을 전공한 문신으로 하여금 돌려가면서 경연에 입시하여 문의(文義)를 강론하도록 하고 싶으니,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는데, 여러 대신들이 아뢰기를,
"문신이 전강(殿講)하는 규칙이 국전(國典)에 실려 있어 나이가 젊은 문관도 모두 참여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만약 준수한 사람 수십 명을 선택하여 돌려가면서 강연(講筵)에 입시하도록 한다면, 그 사람의 어질고 어질지 아니함과 그 학문의 얕고 깊은 것이 반드시 예감의 아래에서 도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고문(顧問)하는 사이에 또한 반드시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또 독서당(讀書堂)에 들어갈 사람을 뽑아서 휴가를 주어 제술(製述)을 부과하여 진작시키는 방도를 삼고, 또 서울과 지방에 신칙하여 어린이들을 가르쳐 구습을 씻어버리고 새로운 것을 오게 하여 습속을 크게 변혁하소서."
하니, 따랐다.
1월 24일 을묘
달이 남두(南斗)를 침범하였다.
이행진(李行進)을 대사간으로 삼고, 정광성(鄭廣成)을 자헌(資憲)의 품계로 올려주었다.
1월 26일 정사
채유후(蔡𥙿後)를 대사헌으로, 이만영(李晩榮)을 사간으로 삼았다.
1월 27일 무오
강원도 흡곡 등 고을에 눈이 내렸는데 그 색깔이 약간 붉었다.
1월 29일 경신
홍청도(洪淸道)에 지진이 있었다.
김익희(金益熙)를 도승지로 삼고 이어서 가선(嘉善)의 품계로 올려주었다.
헌부가 아뢰기를,
"근일에 천재와 시변이 끝이 없으며, 백성들이 곤궁하고 재물이 다한 것이 또한 이 때와 같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엎드려 듣건대 궐내에서 풍정을 거행함으로 인하여 토목 공사를 새로 일으켜 간가(間架)가 너무 많다고 하니, 신들은 놀랍고 의혹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옛날 한 문제(漢文帝)는 노대(露臺)를 경영하려다가 백금(百金)이 아까워 중지하였고, 명제(明帝)는 북궁(北宮)을 크게 기공하였다가 얼마 후에 그만두었습니다. 두 임금의 세대에는 국가가 평안하고 백성들이 부유하여 즐거워하였는데도, 재물을 소비하고 백성들을 부리는 것을 난중하게 여기어 장차 경영하려다가 중지하고 크게 기공하였다가 그만두었습니다. 더구나 지금이 어떤 때인데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참으로 하늘을 공경하는 도리와 백성들을 구휼하는 뜻에 어긋남이 있으니, 궐내 영선(營繕)의 명령을 빨리 취소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노대와 북궁을 인용 비유한 것은 부당한 것 같고, 간가가 너무 많다는 것도 역시 상세히 살피지 못한 것이다."
하였다.
1월 30일 신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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