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12권, 효종 5년 1654년 2월

싸라리리 2025. 12. 21.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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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임술

중사(中使)를 보내 봄옷을 이징(李澂)002)  과 이숙(李潚)003)  에게 하사하였다.

 

2월 2일 계해

청차(淸差) 한거원(韓巨源)이 서울에 들어왔다. 상이 편전에서 접견할 적에 대신들도 역시 입시하였는데, 거원이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바쳤다. 그 자문에 이르기를,
"조선에서 조창(鳥槍)을 잘 쏘는 사람 1 백 명을 선발하여, 회령부(會寧府)를 경유하여 앙방장(昂邦章)004)  의 통솔을 받아 가서 나선(羅禪)을 정벌하되, 3월 초10일에 영고탑(寧古塔)에 도착하시오."
하였다. 거원이 자리를 피하여 절을 하자, 상이 위유하고 이어 차를 하사하면서 이르기를,
"나선은 어떤 나라이오?"
하니, 거원이 아뢰기를,
"영고탑 옆에 별종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나선입니다."
하였다. 거원이 회자(回咨) 받기를 청하자, 영의정 정태화가 말하기를,
"영장(領將)은 어떤 관원으로 정하여 보내야 하겠소?"
하니, 거원이 말하기를,
"북도의 변장이나 수령을 차출하여 보내는 것이 편리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거원이 물러가자, 태화가 아뢰기를,
"우리 군사가 강을 건넌 뒤에 저들이 만일 군량을 지급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군색한 걱정거리가 있을 터이니, 그 도로를 계산하여 군량을 싸서 보내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북우후(北虞候) 변급(邊岌)이 영장에 적합합니다."
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풍정이 두 달밖에 안 남았는데 중전께서 갑자기 모친상을 당하였습니다. 신들은 바야흐로 대례(大禮)에 흠이 있을까 염려하여 아직 예관(禮官)의 품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지금 예조에서 아뢴 말을 보건대 물려서 거행할지의 여부는 언급하지 않고, 다만 소복(素服)을 입고 나아가 참석할지의 여부만을 논하였으니, 살피지 못한 것이 심합니다.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3일 갑자

사은사 구인후(具仁垕), 부사 조계원(趙啓遠), 서장관 이제형(李齊衡)이 청나라로 가게 되자, 상이 그들을 불러들여 접견하였다.

 

2월 4일 을축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이상진(李尙眞)을 정언으로, 민응형(閔應亨)을 이조 참판으로, 김좌명(金佐明)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2월 5일 병인

한거원이 대궐에 이르러 돌아갈 것을 고하자, 상이 불러들여 접견하면서 그에게 이르기를,
"요청한 포졸(砲卒)은 즉시 이미 북도(北道)에 나누어 정하였으나, 근래에 군정(軍政)이 소홀한 탓으로 염려가 없지 않소. 이 뒤의 모든 일은 그대가 모름지기 주선하여 주오."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황제의 연세가 지금 몇 살이오?"
하니, 거원이 아뢰기를,
"17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북경(北京)의 병갑(兵甲)이 아직도 정예하오?"
하니, 거원이 아뢰기를,
"예전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근일에는 오로지 학문을 숭상하여 사냥을 일삼지 않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황제가 하는 것은 무슨 일이오?"
하니, 거원이 아뢰기를,
"항상 태액지(太液池)에서 노시는데, 겨울에는 얼음에서 놀이하고 여름에는 물에서 뱃놀이하며, 또 나무 허수아비를 만들어 장난하기도 합니다."
하니, 차를 주도록 명하였다.

 

2월 7일 무진

상이 하교하였다.
"서울 안에 만일 백세 노인이 있으면 해조로 하여금 특별히 구휼하는 은전을 베풀도록 하라."

 

좌의정 김육이 풍정을 물려서 거행할 것을 청하니, 여러 대신들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여러 대신들이 아뢰기를,
"풍정은 바로 더할 수 없이 성대한 예인데, 중전 사친(私親)의 상사(喪事)로써 갑자기 정지하는 것은 일의 체통에 있어서 경중이 어긋난 것 같습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법도와 외형은 향례(享禮)의 지엽적인 것이요 뜻을 받들어 즐거움을 다하여 드리는 것은 어버이를 섬기는 근본입니다. 자전께서 만일 내전이 바야흐로 사친의 상중에 있는데, 이런 막중한 의례를 받는 것이 미안한 바가 있는 것으로 여기신다면, 옥백(玉帛)과 종고(鍾鼓)가 집에 가득하더라도 즐겁지 않은 결과를 면치 못하여 화열하게 축수드리는 경사에 유감스러움이 있을 터이니, 다른 날을 기다려 대례(大禮)를 완전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2월 8일 기사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관저장(關雎章)을 강론하였다.

 

2월 9일 경오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장령 심총(沈棇)이 올린 상소 중의 양호(兩湖)에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자는 말은 비록 균역(均役)의 뜻에서 나왔지만, 만일 형세가 곤란하다면 애당초 시행하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러 신하들은 각각 소견을 개진하라."
하였다. 좌의정 김육이 아뢰기를,
"신이 호서(湖西)의 대동법 때문에 많은 훼방이 몸에 집중되었으므로 감히 말참견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의 소견으로는 여러 도에 균일하게 시행하는 것이 사체상 대단히 좋을 성싶습니다."
하고, 대사간 이행진이 아뢰기를,
"《서경》에 이르기를 ‘선왕이 이루어 놓은 법을 보라.’고 하였으니, 지금 난리를 겪은 백성들을 가지고서는 새로운 법을 창립하는 것이 부당합니다. 그런데 심총이 도리어 감히 세상에 아부하여 스스로 재능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람됨이 어리석으면서 스스로 총명한 척 행동하기를 좋아하니,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꼭 체차할 것까지야 있겠는가."
하였다. 김육이 아뢰기를,
"행진이 이른바 어리석으면서 스스로 총명한 척 행동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은 바로 신을 지적한 것입니다. 심총 자신이 간관의 지위에 있으면서 다만 생각한 바를 개진하였을 뿐인데, 체차를 청함에까지 이르렀으니 이와 같고서야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신은 이로부터 마땅히 물러나겠습니다."
하였다. 행진은 대신이 불안해 한다는 이유로 인혐하고서 물러났다. 김육이 따라서 물러나 엎드리니, 상이 승지에게 명하여 효유하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비록 내 곁에서 웃통을 벗거나 벌거벗을지라도 그가 어찌 나를 더럽힐 수 있으리오.’ 하였으니, 행진의 말이 어찌 해로울 것이 있겠는가. 만일 대동법을 시행하여 공물(貢物)을 더 징수하지 않고도 국가의 재용이 지탱될 수 있다면, 그 법이 좋지 않은 것이 아니다. 다만, 일찍이 신천익(愼天翊)의 말을 듣건대 삼남(三南)에 대동법을 시행하는 것을 염려하였으니, 또한 민심이 즐거워하지 않는 것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서서히 관찰하여 처리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심총 상소 중의 1건은 바로 한정(閑丁)에게 베를 징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조종조의 옛법이지 심총이 스스로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비록 선왕께서 이루어 놓은 법이라고는 하지만 이것은 정말로 호패(號牌)를 시행하기 어려운 것과 같다."
하자, 병조 판서 원두표가 아뢰기를,
"이 일은 결코 시행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김육이 아뢰기를,
"신은 노병이 날로 심하니, 본직 및 겸직을 체직하여 쇠잔한 목숨을 보전하게 해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의 진퇴를 어찌 급작스럽게 할 수 있겠는가. 경이 만일 물러나 돌아간다면, 돈을 유통시키고 둔(屯)을 설치하는 따위의 일들을 누가 다시 책임지겠는가."
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관저장을 강론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이행진이 심총을 논핵한 것은 본시 서로 바로잡아 주는 뜻인데, 무슨 인피할 만한 혐의가 있겠습니까. 출사하도록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무릇 말을 올림에 있어, 쓸 만하면 그 말을 쓰고 쓸 만하지 못하면 그냥 놓아 둘 뿐이다. 체차를 청함에까지 이른 것은 부당하니, 이행진을 체차하라."
하였다.

 

2월 10일 신미

민응협(閔應協)을 대사간으로, 이시해(李時楷)를 이조 참판으로, 정유성(鄭維城)을 예조 판서로, 권령(權坽)을 승지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갈담장(葛覃章)을 강론하였다. 강론이 끝나자 지경연 이후원(李厚源)이 아뢰기를,
"능침에 배알하는 것이 진실로 조상을 추모하는 정성에서 나온 줄은 압니다만, 봄갈이할 때를 당하여 혹시라도 폐단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그리고 태백이 대낮에 나타나 하늘이 바야흐로 경계를 보여주었으니, 재앙을 소홀히 여겨 폐단을 끼쳐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어느 때 능을 배알할 수 있는가?"
하였다.

 

정언 이상진(李尙眞)이 상소하기를,
"전하의 나라가 다스려져야 하는데도 다스려지지 않고 망하지 않아야 하는데도 장차 망하려 하는 것을 전하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모르고 계십니까? 전하께서 조정에서 탄식하시는 것을 들어보면 이미 그것을 알고 계시는 것 같은데, 전하의 조치하시는 사이를 보고 가만히 생각하면 전하께서 비단 모르실 뿐만 아니라, 반드시 스스로 이미 다스려져 다시는 망하는 걱정이 없을 것으로 여기시는 듯합니다. 왜냐하면 하늘의 노여움이 두려울 만한데도 전하의 두려워하심은 형식으로만 하고 실지로 하지 않으시며, 백성들의 원망이 두려울 만한데도 전하의 두려워하심은 말로만 하고 실지로는 하지 않으시며, 바야흐로 재변이 거듭 나타나는 때에 두려워하고 수성하는 뜻은 말씀 밖에 넘치시지만 재변을 없애는 방도를 구함에 있어서는 끝내 한 가지 일도 재변을 없앨 만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시일이 조금 지나자 그 두려워하여 수성하던 뜻마저도 모두 잊어버리고 심지어는 때 아닌 일과 긴급하지 않은 일로 하늘의 마음을 위반하고 백성들의 뜻을 거스르기까지 하니, 하늘의 재앙이 어느 때나 그칠 것이며 백성들의 원망이 어느 때나 끊어지겠습니까. 이와 같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적이 옛날부터 있지 않았는데, 전하께서는 어찌 생각이 여기에 미치지 않으십니까.
태백이 대낮에 나타나는 현상이 해마다 없는 때가 없고 갖가지 변괴를 손가락으로 이루 셀 수 없습니다. 바야흐로 또 군사를 동원하여 멀리 다른 나라로 들어가니, 그 수효야 비록 적지만 나라의 큰일에 관계됩니다. 정말로 마땅히 배나 더 경계하고 분발하여 하늘에 부응하고 백성들을 위안하는 데에도 겨를이 없을 터인데, 토목 공사가 궐내에서 크게 일고 있으니 전하께서는 마음에 편안하십니까. 주방(廚房)을 개조하는 것이 비록 부득이한 일이지만 그 시기가 아니고, 수정당(壽靜堂)은 노는 장소일 뿐인데 확장하여 웅장하고 화려하게 만들고 있으니, 이때에 해야만 하는 무슨 급한 사정이라도 있습니까. 지금에 이르러서는 전하의 두려워하시는 뜻이 참으로 종식되었고 형식적으로나마 수성하시는 것도 다시는 볼 수 없습니다. 헌부의 의론이 막 나왔다가 도로 정지되었으니 그 뜻을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강력하게 간할 만한 것이 아닙니까. 두 곳의 물력(物力)에 대한 값이 비단 보통 사람 열 집의 재산 이상인데도, 성비(聖批)에서 도리어 노대(露臺)를 잘못 인용하였다고 하교하셨으니, 이는 더욱 타당하지 않습니다. 비록 한 줌의 흙과 한 그루의 나무일지라도 공사가 그 시기가 아니면, 물력의 많고 적음은 의논할 바가 아닙니다.
그리고 전요(田傜)와 병정(兵政)이 고르지 못하게 편중되고 내수사(內需司)와 궁가(宮家)가 널리 차지하고 불법으로 침탈하니, 이 때문에 서울과 지방의 백성들에게 원망을 산 것이 많은데, 지난날 또 시비(侍婢)를 뽑는 일로써 서울 안의 인심을 크게 잃었습니다. 그때에 가만히 들어보니, 별감(別監)들이 여염에 갑작스럽게 들이닥쳐 수색하여 잡아가는 통에 양인(良人)·서리(胥吏)·의관(醫官)·역관(譯官)으로서 딸을 둔 사람들은 모두 그 환난을 당하였는데, 그 사이에 잡아가고 풀어주는 것이 돈의 많고 적음에 좌우되므로, 사람들이 두려운 마음을 품어 혹은 8세에 시집가기도 하고 혹은 서로 이끌고 도망가기도 했다고 합니다. 궐내의 시비는 공예(公隸)로 뽑는 것이 본시 금석지전(金石之典)인데, 전하께서 차마 사령(使令)의 일 때문에 양민(良民)을 침범하여 조종의 법을 무너뜨리실 수 있습니까. 설령 양민이 마땅히 뽑힐 대상에 있다고 하더라도, 한성부(漢城府)와 오부(五部)가 있는데 노복을 풀어 양민들을 학대한 것이 이 무슨 정령입니까. 아, 사령이 부족하여 나라를 다스릴 수 없습니까. 인심이 이반하여 나라가 따라서 망하게 되면 전하께서는 오직 비복들만 데리고 임금 노릇을 하시렵니까. 신은 일찍이 이것으로써 나라가 망하는 한 가지 큰 징조를 삼았는데, 그때에 마을들이 병화(兵火)를 겪은 것처럼 통곡 소리가 도로에 가득하여, 어떤 사람은 그 소요가 경인년005)  보다 【시녀(侍女)를 뽑아서 청(淸)나라로 보낸 때를 가리킴.】  더 심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신하가 차마 들을 수 없는 것인데도, 처음부터 지금까지 대신이나 삼사가 끝내 한 마디 말도 없으니, 바로잡아 구제하는 책임이 어떤 사람에게로 돌아가겠습니까. 임금이 실수가 있어 원망을 산 것이 이와 같은데도, 모든 신하들이 잠자코 말을 하지 않고 마치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처럼 보고 있으니, 전하의 나라가 망하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겠습니까. 아, 이것도 또한 전하의 잘못입니다.
말 때문에 죄를 얻은 사람이 전후에 걸쳐 몇 사람입니까. 그러나 그 중에 조석윤(趙錫胤)이 외직에 보임된 것에 있어서는, 당초에 공주(公主)의 저택이 제도에 벗어난 것을 논한 데서 거슬렸기 때문에 우여곡절 끝에 이 지경에 이르렀고, 석윤을 두둔한 사람까지도 아울러 죄를 주고 심지어는 대신으로서 구원한 사람까지도 물리쳤다고 사람들이 모두 말합니다. 전하께서 대간과 대신을 대우함이 이와 같으시니, 지금에 이르러 삼사와 대신이 말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지금 이후부터는 설혹 전하께서 큰 불의를 행하고 위에서 마음대로 하여 사슴과 말이 어전에서 형체가 바뀔지라도, 또한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시험삼아 신료들이 성교에 대하여 우러러 대답한 것으로써 관찰해 보소서. 그들이 탑전에 있을 적에는 가부를 논하지 않고 다만 지당하다고만 말하며, 그들이 하교에 대해서는 한 번도 거스르지 않고 다만 받들어서 전하기만 하니, 사람들이 모두 비위를 맞추어 순종하는 것이 풍습이 되어 점점 국사가 날로 잘못되어가 구제하여 바로잡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유폐로 하관이 상관을 섬김에 있어서도 역시 아첨하는 것으로써 일삼고 있으니, 무부(武夫) 소관(小官)은 참으로 말할 것이 없습니다.
가만히 듣건대, 병조 판서 원두표가 주찬(酒饌)을 준비하고 기악(妓樂)을 챙기어 수상(首相)의 집으로 가서 한바탕 연음(宴飮)을 벌였다고 합니다. 품계가 높은 중신이 어떻게 감히 주찬과 기악을 준비하여 대신에게 아첨할 수 있으며, 대신도 또한 어떻게 그것을 받을 수 있습니까. 세종조(世宗朝)에 호조 판서 김종서(金宗瑞)가 물을 만 밥을 상신(相臣) 황희(黃喜)에게 올리자, 황희가 그것을 물리치고 종서를 불러 뜰 아래에 세워 놓고서 아첨한다고 꾸짖었으니, 지금까지 전해 오면서 이야기하며 그것을 아름답게 여기고 있는데, 두 신하들은 아직까지 그것을 듣지 못하였단 말입니까. 두 신하의 이 일에서 조정 기강이 무너졌는데도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말하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볼 수 있으니, 대단히 나약한 풍습이 더욱 한탄스럽습니다. 아, 소관이 대관의 잘못을 논하지 못하는 것은 정말로 여러 신하들이 전하의 과오를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윗사람이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아랫사람은 반드시 더 좋아하는 법입니다. 전하께서 이미 직간(直諫)을 좋아하시지 않기 때문에 관원끼리 서로 규간하는 도리도 따라서 무너졌습니다. 상께서 과오를 듣기 싫어하시므로, 아랫사람들이 구차히 용납되는 것만을 구하여 크고 작은 온갖 일들에 안일만을 일삼고 있으니, 비록 당장에 그럭저럭 지내고자 하나 마침내 국가의 일을 어디에 두시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이처럼 그럭저럭 지낸다면 당장 망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위태로움에서 벗어나 편안하게 되는 것이 다만 전하에게 달려 있을 뿐입니다. 고질화된 폐단을 제거하고자 하면 먼저 언로를 열어 주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고, 언로를 열어 주고자 하면 일을 말하다가 죄를 얻은 여러 신하들을 수용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원망을 위로하고 풀어 주는 방도에 있어서는 마땅히 먼저 새로 차출한 시비(侍婢)들을 방송해 주어야 하고, 기타 크고 작은 백성들의 폐해에 있어서는 스스로 차례대로 조치함에 있을 뿐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잠시 살펴 보소서.
신이 말하는 지위를 차지하고 있기에 언로가 바야흐로 막힘을 민망스럽게 여겨, 감히 이로써 먼저 말씀드리는 것이요, 성학(聖學)의 얕고 깊음에 있어서는 진실로 신과 같은 자가 엿보아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기뻐하고 노하시는 말씨가 때로 중도를 잃음이 있어 위의와 행동 거지가 모두 보고 듣는 사람을 놀라게 하시니, 신의 망령된 생각에는 학문의 실지가 도달하지 못한 곳이 있다고 여깁니다. 사람이 죄가 있으면 죄의 경중을 오직 법대로만 하는 것이니, 성낼 것이 저에게 있는데 내가 어찌 관여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큰소리로 분노하고 꾸짖어 뚜렷이 혈기에 부림을 당하시니, 임금의 큰 도량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습니까. 이러므로 사람들이 비록 떨면서 두려워하지만 마음으로는 실지로 복종하지 않고, 또한 간혹 전하의 죄준 것이 법에 타당하지 않고 억지로 씌운 죄라고도 하니, 급작스럽게 진노하는 폐해가 이와 같습니다. 승여(乘輿)가 빨리 달리면 재갈이 풀려 전복될 걱정이 있는 법이니, 지존의 위의를 착하고 근신하게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능(陵)을 배알하는 행차에 어수(御手)로 채찍을 재촉하고, 또 도중에서 어가를 멈추고 활쏘는 것을 구경하셨으니, 수많은 눈이 보는 바에 있어서 누군들 놀라고 괴이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깨끗이 재계하고 제사를 지내 남은 감회가 아직 있을 터인데, 말을 달려 무위(武威)를 뽐내는 것이 먼 조상을 추모하는 의리에 해롭지 않겠습니까.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되도록이면 성량을 넓히고 성심을 안정하여, 중도에 지나친 일과 무익한 일을 하지 말아 이로써 진작하고 분발하는 근본을 삼으소서.
또 신이 엎드려 생각하건대 지금 온갖 폐단 중에 병정(兵政)이 가장 형편이 없어 위급할 경우에 전혀 조금도 힘을 얻을 수가 없으니, 반드시 변통하여야 합니다. 국조 이래로 북관(北關)을 가장 중하게 여기어, 방어하고 수비하는 이외에 인민과 물화(物貨)의 금지가 지극히 엄격하고 분명하였는데, 근년 이래로는 방어가 이미 폐지되고 법금(法禁)도 무너져, 인민들이 거의 다 도망하여 토지가 절반쯤은 황무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병사(兵使) 이하로 수령·변장이 모두들 무인(武人)으로서 자신을 살찌우기 위해서 뇌물을 받아들이고 약탈을 자행하니, 본토의 백성들이 생계가 이미 박한데다가 한 해 동안 수확한 것이 모조리 관부(官府)로 들어가기 때문이니, 마을들이 텅 비게 된 것을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또 그 방어에 증파한 군사에 대해서도 모조리 베를 징수하여 모두 병사나 변장의 주머니로 들어가고, 이른바 수비하는 군사라는 자는 활을 잡을 줄도 모르고 다만 침탈하는 것만을 괴롭게 여기어 원망을 나라에 돌려보낼 뿐입니다. 지금 나선(羅禪)에 파병하는 일은 참으로 걱정스러운 형세가 있습니다. 만일 강변(江邊)이 함락되면 어느 군졸로써 방어하시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마땅히 문신(文臣) 중에서 청렴하고 재능이 있는 사람을 선택하여 북로(北路)의 병사(兵使)를 맡겨, 그 백성들로 하여금 조정에서 염려하고 구휼하는 덕을 알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민심을 거의 수습할 수 있고 군정(軍政)도 수선하고 정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말이 대단히 절실하고 곧으니 내가 가상하게 여긴다."
하였다.

 

2월 11일 임신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권이장(卷耳章)과 규목장(樛木章)을 강론하였다. 강론이 끝나자 특진관 원두표가 아뢰기를,
"사변이 항상 뜻하지 않은 데서 발생하니, 남방의 16영(營)에 영장(營將)을 차출하여 보내 군무(軍務)를 전적으로 다스리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수령으로서 으레 겸직하도록 한다면 임시해서 일을 그르칠 걱정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삼남(三南)에 우선적으로 차출하여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인재가 부족하니, 묘당으로 하여금 무변(武弁) 중에서 발탁 등용에 가합한 사람을 뽑아내 영장을 제수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어서 제사(諸司)의 윤대관(輪對官)을 불러 보았다.

 

좌의정 김육이 상소하기를,
"신이 나라의 후한 은혜를 받아 외람되이 차지해서는 안 될 관직에 있으면서, 아무 것도 모르면서 끊임없이 행하다가 일을 처리한 것이 정당하지 못하므로 신의 죄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더욱 심합니다. 지금 장차 사퇴하면서 절급한 폐해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는 능침을 참배하는 일을 속히 정지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조상을 받들고 효도를 생각하심이 지성에서 나와, 봄 가을로 서리와 이슬이 내릴 적에 이미 낱낱이 배알하는 제도를 정해 놓으셨으니, 신자(臣子)가 된 사람이 누군들 받들어 순종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다만 일의 형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백성들의 폐해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해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바야흐로 굶주리고 있고, 농사철이 이미 닥쳐 정말로 보리갈기가 급한데, 궂은 비가 멈추지 아니하여 진흙이 마르지 않으니 들길을 미처 제때에 정비하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경강(京江)의 배가 공조(公漕)와 사운(私運)으로 멀리 호외(湖外)에 나가는데, 나가지 않은 배는 매어 놓고 내보지 아니하고 이미 나간 배는 이문(移文)하여 돌아와 정박하도록 하니, 강과 바다가 떠들썩하고 원망함이 떼로 일어나 먹여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기대할 만한 곳이 없고, 고기잡이하는 백성들이 장차 그 시기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북방에서도 징발하자 온 도(道)가 놀라고 소란하니, 머나먼 외방의 보지 못한 일이라고 해서 방치하고 구휼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이는 정말로 위로는 하늘의 재변을 걱정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고통을 근심하여 조용한 것으로써 길함에 나아가야 하는 때입니다. 곡식이 익고 도로가 마른 뒤나 추수 뒤로 물려서 거행하더라도 또한 무엇이 늦겠습니까.
둘째는 장수를 임명하는 데 있어 적임자를 얻는 것입니다. 어영청 및 훈련 도감은 바야흐로 좌·우상(左右廂)의 군대입니다. 이완(李浣)이 처음으로 대장이 되어서 그 군사들을 엄중 단속하여 번드는 차례를 나누어 정하고, 또 영사(營舍)도 지어 각각 조리가 있으니, 그 군사들이 모두 이완이 대장인 줄로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도감으로 전임되었고, 신준(申埈)은 장수 가문의 장수로서 도감의 일을 익숙히 알고 있는데 갑자기 어영의 임무를 맡겼습니다. 신은 가만히 생각하건대 임무를 바꾸어 적임자를 얻는 것만 못한 듯합니다. 이 두 가지 사항은 모두 신의 망령된 말입니다만, 신은 차라리 전하께 죄를 얻을지언정 차마 일이 잘못된 것을 보고도 잠자코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탑전에서 은연중 사람에게 배척당하였습니다. 이행진이 심총을 탄핵하면서, 기존 법을 따르지 않고 어리석으면서 스스로 총명한 척 제멋대로 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모두 신을 가리켜서 말한 것입니다. 비록 오척 동자라도 어찌 그 심중을 모르겠습니까. 신이 재차 상부(相府)에 욕되게 있어 지위나 명예가 이미 극에 달하였으니, 이와 같은 무리들이 반드시 신을 제거하고야 말려고 합니다. 전하께서 신의 사직을 윤허하지 않으시는 것은, 다만 신의 죄를 증가시켜 구제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일 뿐입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속히 신의 본직 및 겸직을 체차하여 남은 목숨을 보전하도록 해주소서."
하니, 상이 비답하기를,
"대신의 도리가 본시 소관과 같지 않은데, 저와 같은 망령된 말을 어찌 꼭 신경 쓸 것이 있겠는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아 나의 지극한 뜻에 부응하라. 능을 배알하는 일은 마땅히 형세를 보아 처리하겠으며, 장수를 바꾸는 것은 일이 중대하므로 경솔하게 의논하기 어려울 것같다."
하였다.

 

2월 12일 계유

이만(李曼)을 전라 감사로, 정세규(鄭世規)를 강화 유수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의 종사장(螽斯章)·도요장(桃夭章)·토저장(兎罝章)을 강론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니 【이상진(李尙眞)이 상소하여 그가 연회를 벌여 술마신 것을 논의하였기 때문이다.】  답하기를,
"이상진의 말이 망령되어 두서가 없으니 족히 말할 것이 없다. 심지어 은어(隱語)로써 나를 진 이세(秦二世)에게 비하여 곤욕을 주기까지 하였으니, 난들 어찌 노여운 생각이 없었겠는가만 너그러이 그를 용납하여 준 것은 언로(言路)를 위해서였다. 경이 나의 뜻을 본받을 수 없겠는가. 평온한 마음으로 생각하여 다시는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2월 13일 갑술

좌의정 김육이 병으로 핑계하여 면직을 청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양사가, 이상진이 상소 중에 양사가 말하지 않은 것을 기롱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자, 옥당이 처치하여 출사(出仕)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병조 판서 원두표(元斗杓), 이조 판서 이후원(李厚源)이 이상진의 상소 중에 자신들이 대신과 더불어 연회를 벌여 술을 마신 것을 규탄하였다는 이유로 모두 상소를 올려 면직을 청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정언 이상진이 인피하면서 아뢰기를,
"신의 망령된 말로 인하여 대신과 중신이 불안해 하고 이어서 양사마저 인피하게 되어 소란스러움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미 황송스러워 숨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대신에게 답하신 비답을 엎드려 보건대 지극히 엄격하고 준절하니, 신이 더욱 두려워서 몸 둘 곳이 없습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말이 망령되어 두서가 없다는 것은 신이 스스로 반성하여 잘못을 찾아보아야 하겠거니와, 곤욕을 주었다는 한 글자는 이것이 어찌 위대한 임금의 말씀이겠습니까. 예로부터 임금의 과오를 말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만, 다만 신하로서 임금을 간하였다는 말만 들었고 임금으로서 신하에게 곤욕을 당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전하의 조정에 만일 옷자락을 끌어당기고 난간을 부러뜨리면서까지 간하는 신하가 있었다면, 다시 어떤 엄지(嚴旨)를 내리어 곤욕을 주었다는 글자 이외에 몇 배나 더한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신의 말이 아무리 참람되더라도 전하께서는 힘쓰고 고치실 뿐이지, 아마도 뒤집어서 신을 죄주는 자료로 삼는 것은 부당한 듯합니다. 신이 말씀드린 것은 다만 보고 들은 것에 의거하여 바로 아뢰었을 뿐이니, 참으로 우직한 마음과 피맺힌 정성에서 나왔습니다. 조금이라도 속인 것이 있다면 도끼 아래에서 죄를 받겠습니다.
신이 두 신하를 논핵한 것도 역시 대단한 것이 아니라 다만 조정의 체통을 보존하고자 한 것일 뿐이니, 두 신하들이 각각 스스로 노력하여 자중하기를 황희(黃喜)처럼 하고 과오 알기를 김종서(金宗瑞)처럼 한다면 또한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아, 나랏일이 날로 잘못되어 가는데, 누가 그 허물을 책임질 것입니까. 임금과 정승의 과오를 말하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그 폐단을 초래한 근원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지금 한 번 입을 열어서 상하에 죄를 얻었으니, 감히 그대로 재직할 수 없습니다. 신을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대 말은 다 좋다. 대신과 중신이 다만 감히 스스로 편안히 여기지 않는다는 뜻일 뿐이지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느냐. 그대는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2월 14일 을해

성초객(成楚客)을 헌납으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부이장(芣苢章)과 한광장(漢廣章)을 강론하였다. 강론이 끝나자 특진관 홍무적(洪茂績)이 아뢰기를,
"신은 늙고 재능이 없으니 결코 형옥(刑獄)을 담당하는 중요한 지위에 오래도록 있기가 어렵습니다. 또 근래에 인심이 좋지 않아서 심지어는 대낮에 사람을 죽이고도 권세에 의지하여 형관(刑官)을 동요시키기도 하니, 이는 대단히 놀라운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인심이 이와 같으니 참으로 가탄스럽다. 형관으로서 법을 지켜 흔들리지 않는 데 있어 오늘날 경과 같은 이가 다시 있겠는가. 늙은 것을 가지고 구실삼지 말고 더욱 힘쓰라."
하였다.

 

2월 17일 무인

중사(中使)를 보내어 이징(李澂)과 이숙(李潚)에게 의복과 이불을 하사하였다.

 

2월 18일 기묘

홍무적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여분장(汝墳章)과 인지지장(麟之趾章)을 강론하였다.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이 상차하기를,
"임금은 하늘과 더불어 도(道)를 행하여 그 도가 다름이 없으니 가을에 죽이고 봄에 살리는 것이 각각 그 때가 있습니다. 지금 자라나는 시절을 맞아 무더기로 생장하는 초목들도 또한 스스로 즐기며 모두 전하의 덕화에 감싸여 있는데, 유독 일을 말한 신하에게만 영해(嶺海)의 바닷가에서 고립됨을 면치 못하게 한다면, 그것이 성조(聖朝)의 잘못이 됨이 돌아보건대 어떻겠습니까. 요사이 여러 신하들이 간혹 조석윤(趙錫胤)과 박장원(朴長遠)의 일로써 진달한 바가 있었는데도 아직까지 뇌우(雷雨)의 덕택을 입지 못하고 있으니, 신은 전하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깁니다. 대체 두 신하에게 죄가 있는지 없는지를 신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신이 만리로부터 돌아오다가 도중에서 저보(邸報)를 보고 속으로 뇌까리기를 ‘어찌 성명이 위에 계시는데 도리어 이와 같이 중도에 지나친 일이 있단 말인가. 아니면 두 신하가 혹시라도 잘못한 바가 있어서 그러한 것인가.’ 하였습니다. 이어 생각하건대 석윤은 선대왕께서 총애하신 중신으로서 전후에 걸쳐 경악(經幄)에 입시한 지가 장차 30년에 이르게 되니, 전하께서 총애하여 발탁한 것과 동료들의 기뻐함이 어찌 보통 사람에게 비할 바이겠습니까. 성명의 세상에 이런 만남이 있으면서도 3년 동안에 세 번씩이나 축출당하는 탄식이 있음을 면치 못할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신은 그윽이 개탄스럽게 여깁니다.
신이 요사이 북쪽에서 온 사람을 통하여 석윤이 임소에 있으면서 시(詩)를 지었다고 들었는데, 그 내용에
변방에서 도깨비와 한동아리 되고 보니
꿈속에서 때때로 대궐에 근접했네
세간의 위험한 길 모두 다 겪더라도
마음이야 끝끝내 우리 임금 안 버리리
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가 임금을 사랑하는 무한한 뜻이 시를 읊는 사이에 발로되기까지 하였는데, 전하께서는 여기에서 홀로 측연한 마음이 없으십니까. 옛날에 송 신종(宋神宗)이 말 때문에 소식(蘇軾)을 귀양보냈다가, 수조가(水調歌)의 글귀가 있음을 듣고는 바로 돌아오도록 하는 윤음을 내렸습니다. 비록 석윤의 범한 바가 소식과 더불어 경중이 어떠한지는 모르겠지만, 전하의 넓고 큰 도량으로써 어찌 송나라 시대의 중등가는 임금보다야 못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장원의 경우 이미 그에게 말하게 하고는 또 그에게 죄를 내려, 백발 노모(老母)가 영원히 결별하고 죽기를 기다리고 있는 처지입니다. 근래에는 자식을 염려한 나머지 더욱 고질병이 되어 이미 치료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러, 오직 죽기 전에 서로 만나 볼 수 있기만을 기원하고 있다 합니다. 전하께서는 여기에 또 어찌 측연한 마음이 없으시겠습니까. 옛날에 당 헌종(唐憲宗)이 일로 인하여 유우석(劉禹錫)을 축출하였는데, 우석에게는 노모가 집에 있었습니다. 그때에 헌종이 배도(裴度)의 진언으로 인하여 모자(母子)가 차마 서로 이별하지 못하는 것을 불쌍히 여겨 바로 가까운 지역의 자사로 바꾸어 임명하는 은혜를 내렸습니다. 신이 아뢴 바가 진실로 감히 옛사람에게는 비견할 수 없지마는, 전하 같이 효도로 다스리는 훌륭한 마음을 가지고 또 어찌 당나라 시대의 중등가는 임금보다야 못하시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전하에게 깊이 바라는 바입니다. 장원의 어미 병환이 위독한 것은 조정이 다 알고 있으니, 전하께서 만일 신료들에게 물어보시면 신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다시 불쌍히 여겨 주소서."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본조(本朝)의 제도에 의빈(儀賓)과 종척(宗戚)은 국정에 간여할 수 없으니 대체로 심원한 뜻이다. 그런데 이때에 홍주원이 국법을 무시하고 명관(名官)과 서로 결탁하고 당론(黨論)을 세워 임금을 풍자하면서 거만스럽게 석윤과 장원 등을 석방해 줄 것을 청하였으니, 명예를 추구하여 아부한 그의 마음이 참으로 매우 놀랍다. 국가의 법을 범한 것에 이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우선 파직하라."
하였다.

 

2월 19일 경진

한성부(漢城府)가 사족(士族)·서인(庶人)으로서 연로한 사람 4백 74명을 뽑아 아뢰니, 통정(通政)의 품계를 특별히 내려주도록 명하고, 통정 이상에 대해서는 1계급씩 올려주고, 부녀에 대해서는 호조로 하여금 물품을 하사하도록 하되 1백세 이상에 대해서는 명주와 솜을 더 하사하도록 하였다. 판중추 김신국(金藎國)과 청송군(靑松君) 심액(沈詻)은 나이가 모두 80 여 세인데도 뽑아서 아뢴 중에 들어 있지 않았는데, 모두 가자하여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을 보여주도록 명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채번장(采蘩章)을 강론하였다.

 

호조에 명하여 이징·이숙 및 세룡(世龍)의 아내에게 옷감을 보내 주도록 하였다.

 

2월 20일 신사

영의정 정태화가 상차하여, 봄비가 장마가 되어 도로가 질척거린다는 이유로 능에 참배하는 행차를 오는 가을로 물릴 것을 청하니, 따랐다.

 

2월 21일 임오

남선(南銑)을 우참찬으로 삼았다.

 

상이 하교하였다.
"다음달 초에 내가 노량(鷺梁)에서 열무(閱武)하려고 하니 본병(本兵)에게 분부하라."

 

훈련 대장 이완이 김육의 상소 중에 장수를 바꾸라는 말이 있다는 이유로 병을 핑계하고 나오지 않으니, 상이 하교하기를,
"열무하는 날 대장이 없어서는 안 된다."
하고, 불러서 임무를 살피도록 명하였다.

 

2월 22일 계미

이지온(李之馧)을 장령으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초충장(草蟲章)과 채빈장(采蘋章)을 강론하였다. 강론이 끝나자 상이 참찬관 이원진(李元鎭)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3년 동안 해외(海外)에 있더니만 수염과 머리가 모두 희어졌구나."
하니, 원진이 아뢰기를.
"신이 사조(辭朝)하던 날 교화를 선양하여 밝히라는 분부를 친히 받들었으나, 재주가 용렬하여 능히 봉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신의 죄입니다. 제주도 사람들이 본래 글을 읽을 줄 몰랐는데, 조정에서 교수(敎授)를 차출하여 보내 《소학》·《대학》·《가례》 등 서적을 가르쳐, 신이 가끔 시강(試講)해 보니 능히 통달한 자가 매우 많았고, 또한 시(詩)와 부(賦)를 능히 짓는 자도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예로부터 본주(本州) 사람으로서 등과(登科)한 자가 있었는가?"
하니, 원진이 아뢰기를,
"고려 시대에 고씨(高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에 오른 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2월 23일 갑신

정기풍(鄭基豊)을 집의로 삼았다.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영의정 정태화에게 이르기를,
"경이 이상진(李尙眞)의 말 때문에 오랫동안 출사하지 않으니 내가 불가하게 여긴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신이 참으로 과실이 있었으니 어찌 사람들의 말이 없겠습니까. 곧바로 상진에게 본직을 제수하셨으니, 이는 참으로 성세(聖世)의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상진의 상소 내용 가운데 몹시 부당한 곳이 있었다. 조석윤이 외직에 보임된 것을 가지고 공주(公主)의 저택이 제도에 지나친 것을 말한 데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하였다. 내가 비록 이 일로 인하여 석윤을 미워하기는 하였지만, 석윤이 만일 죄가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그를 죄줄 수 있었겠는가."
하니, 이조 판서 이후원(李厚源)이 아뢰기를,
"외부의 의논들이 이와 같기 때문에 상진이 상소 중에 언급하였던 것입니다. 성상께서는 또한 마땅히 그 말을 가납하셨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석윤을 명류(名流)로 여겼는데, 지금 도리어 영안위(永安尉)와 교제하여 그로 하여금 상차하여 석방을 청하도록 하였으니, 참으로 비루한 사람이다. 나는 매우 좋지 않게 여긴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홍주원(洪柱元)이 차자를 올린 것이 어찌 석윤이 부탁한 바이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석윤이 주원에게 시(詩)를 부쳐 그것이 내게 전달되기를 바랐으니 더욱 가소롭다."
하였다. 이완이 훈련 대장을 체직하여 달라고 청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는 임금인데도 가끔 비방하는 말을 들음을 면치 못하는데, 경은 어찌 굳이 사직하려 함이 이 지경에 이르는가."
하니, 이완이 밀부(密符)를 풀어서 상의 앞에 놓고서 아뢰기를,
"신은 결코 감히 이것을 차고서 공무를 집행하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이어서 물러나 뜰 아래에 엎드렸다. 상이 중관(中官)에게 명하여 타일러서 정전으로 올라오도록 하였으나, 이완이 굳이 사양하니, 상이 이르기를,
"분의(分義)가 있는 바에는 마땅히 이와 같아서는 안 된다."
하자, 이완이 비로소 정전으로 올라왔다. 태화가 아뢰기를,
"계해년006)   이후로 항상 훈척(勳戚)으로써 대장을 삼았기 때문에 이완이 항상 불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김육이 또 직책을 바꾸어 줄 것을 청하니 이완이 민망스럽고 움츠러드는 것은 형세상 당연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당초에 이완이 굳이 사직하려는 것을 지나치다고 여겼는데, 지금 영상의 말을 들어보니 참으로 놀랍다. 일을 책임진 신하가 어찌 떠도는 말에 동요되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이완이 아뢰기를,
"신이 만일 어영 대장(御營大將)으로 바뀌어 제수된다면 감히 마음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군신간에는 서로 마음을 아는 것이 귀중하니, 경은 다시는 사직하지 말라."
하자, 태화가 이완을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성상께서 마음을 알아야 한다는 분부가 계셨는데도 공은 어찌 그러하오."
하였다. 강화 유수 정세규(鄭世規)가 아뢰기를,
"신의 소견으로는 조정이 대단히 엄격하지 못합니다. 성상의 분부가 이와 같을진대 이완이 어찌 감히 한결같이 굳이 사직할 수 있단 말입니까. 지난번 군보(軍保)를 충당하던 날 사람들이 퍽 원망하는 말이 있었는데, 김육이 아뢴 바가 또한 이 때문이지 어찌 다른 까닭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군신은 부자와 같은데 어찌 숨기는 바가 있겠는가. 듣자하니 이완에게는 지나치게 강직한 병통이 있다고들 한다."
하였다. 이때에 이완이 말씨가 교만하고 오만하되 상이 끝내 따뜻한 말로써 그를 일깨웠고, 모든 신하들도 또한 감히 그의 불공스러움을 탄핵하는 사람이 없었다. 무부(武夫)가 교만하고 횡포함이 이로부터 심해졌다.

 

2월 24일 을유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셋째 아이가 교동(喬桐)에 있으면서 병이 나자, 내의(內醫)에게 명하여 약을 싸가지고 가서 구제하도록 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감당장(甘棠章)을 강론하였다. 강론이 끝나자 참찬관 김익희(金益熙)가 아뢰기를,
"어제 경연 중에서 내리신 분부를 엎드려 듣건대, 조석윤이 홍주원에게 시(詩)를 부친 것으로 여기셨는데, 신은 삼가 성명께서 통촉하지 못하신 바가 있는 것같습니다. 귀양간 사람은 임금을 연모하는 생각이 있어 스스로 시를 읊어 회포를 읊조리는 것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석윤이 또한 신에게도 부쳐온 시가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시도 또한 경에게 부쳐온 것인가?"
하자, 특진관 원두표가 아뢰기를,
"이일상(李一相)에게 부쳐온 것이라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일상은 바로 주원의 일가 사람이니 주원이 이 시를 들은 것은 괴이할 것이 없다."
하였다. 익희가 아뢰기를,
"석윤이 만일 임금 측근의 신하에게 시를 부쳐 은택을 바랐다면 간교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한 때의 벌을 받았을지라도 신하를 알아보기는 임금만한 분이 없는데 석윤이 어찌 차마 이러한 작태야 하였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도 그렇다."
하였다.

 

제주에 크게 흉년이 드니, 곡식을 이송하여 구제하도록 명하였다.

 

2월 26일 정해

상이 하교하였다.
"열무(閱武)하는 일이 가까운 시일안에 있고 군무를 경영하는 것이 모두 대장에게 있으니, 마땅히 총애하는 은전을 베풀어 장병들을 격려해 주어야겠다. 금·은(金銀)을 박아 넣은 어갑주(御甲胄), 백우대전(白羽大箭), 각궁통(角弓筒)을 이완에게 하사하라."

 

상이 하교하였다.
"이행진이 대신을 침욕한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으니 추고하라."

 

동지사(冬至使) 심지원(沈之源) 등이 치계하였다.
"청나라 경경왕(敬景王)이 호광(湖廣)에 나가 싸우다가 크게 패전하여 죽자, 또 왕자를 보내 병사 7만 명을 거느리고 나가 정벌하도록 하니, 우진왕(右眞王)이 금방 패전한 뒤에 군사를 고생시키지 말 것을 주청하였으나, 청나라 황제가 듣지 않았습니다. 영력 황제(永曆皇帝)가 바야흐로 호광에 있으면서 장득일(張得一)을 대장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2월 27일 무자

송시열을 집의로 삼았다.

 

헌부가 아뢰기를,
"훈련 대장 이완이 병부(兵符)를 탑전에 풀어 놓고서, 얼굴을 들이대고 큰소리를 지르며 감히 불평스러운 말을 아뢰어 송사(訟事)에 나온 사람 같이 하였습니다. 이완은 바로 일개 무장(武將)인데 조정을 멸시하는 것을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무겁게 추고하소서. 입시한 승지가 이완의 소행을 목격하고서도 잠자코 한 마디 말도 없이 물러나 직무를 잘못 수행한 책임을 면하기 어려우니, 추고하소서. 전 대사간 이행진이 말한 것은 서로 규간한 뜻에 불과하니 그대로 놔두는 것이 좋은데, 대신을 침욕하였다는 것을 가지고 강제로 죄안(罪案)을 씌우니 또한 지나치지 않습니까. 추고의 명령을 도로 거둬들이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고 다만 이완만 추고하도록 윤허하였다.

 

2월 28일 기축

보덕 심세정(沈世鼎)이 상소하기를,
"왕세자가 어린 나이로서 이미 영가 부인(永嘉夫人)의 상사(喪事)에도 임하지 않았으니, 열무(閱武)하는 날 배종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하니, 답하지 않았다.

 

2월 29일 경인

부교리 남용익(南龍翼)이 상소하기를,
"성상께서 바야흐로 능을 참배하려는 행차를 정지하신 것은 정성이 지극하지 못해서가 아니요, 이미 결정하였다가 도로 중지한 것은 특별히 여러 신하들의 주청을 따르신 것이니, 무릇 보고 들음에 있어 누군들 기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어서 엎드려 듣건대 친히 옥지(玉趾)를 거둥하여 강가에서 조련하신다고 하니, 이는 열무(閱武)하는 예전 법에서 나온 것이고 우리 임금께서 병환이 없다는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신이 삼가 《한지(漢志)》를 살펴보건대 ‘입추(立秋) 날 전진(戰陣)의 거동을 연습하는 것을 추유(貙劉)라고 한다.’ 하였으며, 또 월령(月令)을 살펴보건대 ‘봄철을 당하여 대중들을 취합하지 말라.’ 하였고, 또 ‘큰일을 일으켜 농사를 방해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바야흐로 지금 단비가 이미 내려 흙의 맥이 참으로 부드러워졌으니, 농삿일을 시작하는 시기를 진실로 빼앗을 수 없고, 또 시세가 위험스러워 날로 점점 두려워하고 있는데, 여러 해를 계속하여 친히 열무하는 것이 어찌 보고 들음에 해롭지 않겠습니까. 여항 사람들이 모두 ‘전하께서 오랫동안 밖에서 고생하여 안마(鞍馬)에 익숙하시기 때문에 자못 구중 궁궐에서 단정히 팔짱끼고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시고 이렇게 즐겁게 노는 행사가 있다.’고들 말합니다. 이것이 비록 매우 어리석은 필부의 말들이지만 식자들의 걱정도 일찍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말을 달려 사냥하는 조짐이 이로부터 싹틀까 두렵습니다.
이어서 가만히 엎드려 듣건대 왕세자도 어가(御駕)를 수행한다고 하니, 신은 더욱 대단히 염려스럽고 몹시 걱정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왕세자는 춘추(春秋)가 어리어 정말로 어린이 교육을 받을 시기에 해당하니, 전하의 조석 문안을 여쭙고 수라를 보살피는 이외에는 다만 마땅히 서연(書筵)을 열어 글을 강론하여야 할 뿐이지, 어찌 군려(軍旅)의 일을 보여주어 그를 인도할 수 있단 말입니까. 현재 천재(天災)와 시변(時變)이 자주 일어나, 금성(金星)이 날마다 나타나고 전에 없던 붉은 눈이 내렸으며 여역(癘疫)이 크게 번성하여 서울과 지방이 모두 그러합니다. 신이 눈으로 본 것을 가지고 말하건대 아산현에서 사망한 사람이 1 백 40여 명입니다. 한 고을이 이와 같다면 한 도를 알 수 있고 한 도가 이와 같다면 8 로(路)를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정말로 군신 상하가 두려워하고 경계하여 창고를 열고 진대(賑貸)를 의논하기를 불에 타고 물에 빠진 사람을 구제하듯이 급히 하여 딴 겨를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생각하지 않고 조치와 시행하는 것이 느긋하게 평시와 다름이 없으니, 만일 가의(賈誼)가 이때에 태어난다면 반드시 통곡하면서 눈물만 흘리고 말지는 않을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다시 더 심사 숙고하여 친히 거둥하여 진법(陣法)을 연습하려는 명령을 속히 정지하소서."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열무는 바로 국가의 법전상 마땅히 거행하여야 할 일인데, 어찌 감히 바르지 못한 생각을 가지고서 망령되이 스스로 억측하면서 여항의 말로써 핑계하여 바로 꾸짖고 욕하는 말을 할 수 있는가. 이는 그 분주하는 노고를 싫어하는 것에 불과하다. 앞으로 열무하는 날 남용익은 어가를 수행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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