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신묘
정원이 아뢰기를,
"남용익(南龍翼)은 몸이 경악(經幄)에 있으면서 일에 따라 진달하여 나름대로 충성된 마음으로 임금에게 아뢰려는 뜻을 두었으니, 비록 성상의 마음에 거슬림이 있더라도 진실로 용납하여 받아들여 언로(言路)를 열어주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꾸짖고 욕하였다고 분부하시니 이 어찌 신하로서 차마 들을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 분주하는 노고를 싫어한다는 것도 또한 반드시 용익의 본뜻이 아닐 것입니다. 신들이 근밀한 직책에 있으며 항상 성명께서 일호라도 잘못이 있으실까 두려워하고 있으니, 감히 하교하신 분부로써 전하의 과오를 이루어 드릴 수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거둥하는 날 결코 이 사람과 더불어 함께 갈 수 없으니, 너희들이 마음대로 하라."
하였다.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내종은 농사를 짓고 계집종은 베를 짜 제각기 맡은 바가 있는데, 국가에 무릇 일이 있기만 하면 명관(名官)이 반드시 그 사이에서 방해하니, 그 이유를 모르겠다."
하니, 교리 이연년(李延年)이 아뢰기를,
"남용익이 다만 생각한 바를 진달하였을 뿐이지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에 일찍이 척화(斥和)한 신하가 있었는데, 오늘날에는 명관이 문득, 여러 해를 계속해서 열무(閱武)하는 것이 보고 들음에 해로움이 있다는 것으로써 나를 공갈하니, 그의 정성된 마음이 오랑캐에게 있다면 어찌 북쪽으로 오랑캐에게로 달아나지 않는단 말인가. 국가에 기강이 있다면 용익이 죽음을 면할 수 있겠는가. 이상진 같은 사람은 비록 망령되다고는 하지만 모두 질박한 말이나, 용익은 융구(戎具)를 마련하는 것과 분주하는 노고를 싫어함에 불과하다. 또 말하기를 ‘세자는 열무를 관람할 수 없다.’고 하니, 그의 뜻은 세자로 하여금 인사(人事)를 모르는 임금으로 만들어 후일에 그가 마음대로 하려는 기대에서 나온 것이다. 용익이 만일 어가를 수행한다면 내가 마땅히 의장(儀仗) 밖으로 내쫓을 것이다."
하니, 강도 유수(江都留守) 정세규(鄭世規)가 아뢰기를,
"신하가 임금에게 아룀에 있어 으레 준절한 말이 있는 법입니다. 용익은 연소한 사람으로서 다만 옛사람의 글을 읽어 옛사람의 준절한 말만 사모하였을 뿐으로, 그 마음은 임금을 사랑하는 데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임금의 노여움이 이에 이르렀으니 큰 성인의 포용하는 도량에 유감스러움이 있는 듯합니다."
하였다. 이때에 상이 용익에 대하여 몹시 노하여 중도에 지나친 말을 많이 하였는데도, 대신 이하가 끝내 구제하여 바로잡는 한 마디 말도 없었다. 오직 세규가 외관(外官)으로서 홀로 능히 간하니, 당시의 의논들이 그를 훌륭하게 여겼다.
3월 2일 임진
승지 이원진(李元鎭)과 훈련 대장 이완을 보내 노량(露梁)에서 시험 삼아 진법(陣法)을 연습하도록 하였다. 이는 상이 장차 친히 거둥하여 열무하기 위해서였다.
3월 3일 계사
정언 유창(兪瑒)이 인피하면서 아뢰기를,
"임금의 마음은 맑은 거울이나 고요한 물과 같게 하여야 하니, 비록 성낼 만한 일이 있더라도 오직 화평스럽게 응하고 조용하게 처리하여야 할 뿐입니다. 조금이라도 불평이 있으면 말씨에 발로된 것이 그 중정(中正)을 잃어버려 마침내는 노여워하는 데로 돌아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한 마디 말씀이 비록 미미하지만 국가의 흥하고 망하는 것이 판가름나니 두렵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남용익의 상소 때문에 하교하신 말씀의 뜻이 지극히 준엄하니, 전하께서는 참으로 용익이 여항의 말로 핑계하여 꾸짖고 욕하였다고 여기십니까. 고금에 어찌 이와 같은 신하가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내심은 실지 그렇지 않으시면서 밖으로 위엄을 보여 주어, 이로써 말하는 사람의 입을 재갈 물려 제재하고자 하신다면, 한 마디 말로 나라를 망치는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지금 천재(天災)와 시변(時變)을 손가락으로 이루 꼽을 수가 없어, 위태로워 망하게 생긴 모양을 지혜가 밝은 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알 수 있으니, 군신 상하가 정말로 걱정하고 두려워하여 협심해서 함께 다스리는 데에 눈코 뜰 사이가 없어야 합니다.
능에 거둥하시는 것이야 비록 정지하였지만 열무를 바야흐로 거행하게 되어, 초췌한 경기(京畿) 백성들이 이미 도로를 정비하는 일에 고생하고, 굶주린 방민(坊民)들이 강가의 부역에 지탱할 수가 없으니, 백성들이 어찌 원망하고 비방하지 않겠습니까. 백성들의 마음이 이미 원망하면 여러 사람들의 입이 시끄러워 장차 이르지 않는 바가 없어, 여항(閭巷)에서 서로 전하는 말이 과연 용익이 이른 바와 같은 것이 있게 됩니다. 전(傳)에 말하기를 ‘신임을 얻은 뒤에 그 백성들을 부려야지 신임을 얻지 못하면 자신들을 학대한다고 한다.’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백성들에게 신임을 얻지 못하고서 백성들을 부려 군중을 동원하는 일이 많으니, 사람들의 말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을 어찌 괴이하게 여길 것이 있겠습니까. 용익이 기일이 이미 닥쳐 정지할 수 없는 시기를 당하여 경솔하게 상소하였으니, 그가 깊이 생각하지 못하였다고 이르는 것은 괜찮지만 그의 마음은 단연코 딴 마음이 없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갑자기 정외(情外)의 분부를 내리시고 심지어 이 사람은 결코 함께 갈 수 없다고까지 하셨습니다. 아, 임금의 말씀이 한번 전파되자 원근이 모두 놀라고 있으니, 신은 성명을 위하여 애석하게 여깁니다. 임금의 과오는 일식 월식과 같아 과오가 있으면 사람들이 모두 알고 고치면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보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어가를 수행하는 여부는 참으로 하찮은 일이지만, 과오에 대하여 고치기를 꺼리지 않는 것은 관계되는 바가 적지 않으니, 어리석은 마음으로 연모하는 생각에는 거의 고치리라는 희망이 있습니다. 동료들에게 간통(簡通)을 보내 도로 거둬들이시라는 주청을 진달하려고 하였는데, 동료들의 의논이 어렵게 여기니 신이 경시를 당한 소치가 아님이 없습니다. 신의 관직을 체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유창이 남용익만 구원할 뿐 아니라 또 방민(坊民)을 가지고 말하였는데, 열무하는 일이 이 무슨 불의(不義)와 비례(非禮)의 일이기에 떠들썩함이 이 지경에 이른단 말이냐. 그의 뜻이 일부러 소란을 일으켜 많은 관원들로 하여금 모두 회피하도록 하여 내일 거둥하지 못하게 하려는 데 있다. 결코 그의 술책 중에 빠져들 수 없으니 우선 체직하라."
하였다.
좌승지 윤득열(尹得說) 등이 아뢰기를,
"대간이 인피한 뒤에는 여러 사람의 논의를 기다려 처치하는 것이니, 이는 대간을 소중히 여기고 후하게 예우하는 뜻입니다. 사직하지 말라는 비답이 막 내렸다가 곧바로 특별히 체직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니, 크게 유감스러운 바가 있지 않겠습니까. 엎드려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마음을 평온히 하시고 너그러이 살펴 유창을 특별히 체직하라는 명령을 도로 거둬들이소서.
하니, 답하기를,
"내가 비록 약하고 용렬하지만 한 대관(臺官)의 말만 못한가. 그대들이 임금을 대우하는 것도 역시 너무나 야박하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윤득열이 임금을 업신여긴 죄를 그대로 방치할 수 없으니 나추하라."
하였다.
정지화(鄭知和)를 승지로 삼았다.
사간 홍처량(洪處亮)이 인피하면서 아뢰기를,
"유창이 간통(簡通)을 보내왔을 적에, 신은 동료들이 서로 모였을 때를 기다린 뒤에 진계해야 한다고 여겨 그렇게 답하여 보냈는데, 동료가 앞질러서 먼저 인피하여 특별히 체직당함에 이르렀으니, 어찌 감히 편안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의 직책을 체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내자시(內資寺)에서 명절 떡을 올리니, 상이 일렀다.
"일찍이 특별히 감소하라는 분부가 있었는데도 해관이 멍청하게 봉진하였으니 추고하도록 명하라."
3월 4일 갑오
상이 노량(露梁)에 거둥하니 훈련·어영 두 대장들이 진을 치고서 기다렸으며, 어가가 진문(陣門)에 다다르자 수행한 신하들이 모두 도보로 걸었다. 상이 장단(將壇)에 오르자 중군(中軍) 김체건(金體乾)이 무릎을 꿇고서 진법(陣法)에 대하여 아뢰었다. 대사헌 홍무적(洪茂績)이 아뢰기를,
"남용익의 말이 비록 우직하였지만 어찌 그와 더불어 서로 따질 것이 있겠습니까. 유창을 특별히 체직하라는 명령도 참으로 이미 지나치거니와, 심지어 윤득열을 수감한 것은 더욱 놀랍습니다. 성덕에 누가 될까 두려우니, 이미 내린 명령을 도로 거둬들이소서."
하니, 따르지 않았다. 대사간 민응협(閔應協)이 아뢰기를,
"유창은 다만 생각한 바를 아뢰었을 뿐이요 결코 딴뜻이 없으니, 특별히 체직하라는 명령을 도로 거둬들이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가 임금은 미약하고 신하는 강성함이 이와 같이 종식되지 않는다면 임금 노릇을 할 수가 없다. 그대는 속히 물러가라."
하자, 응협이 감히 한 마디 말도 못하고 물러나왔다. 상이 판의금 원두표를 불러 이르기를,
"윤득열을 형틀을 씌워 엄하게 수감하라."
하니,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나추도 이미 지나친데 형틀을 씌움에까지 이르면 더욱 온당하지 못합니다."
하고, 영돈녕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정원에 외람되게 재임할 적에도 역시 교지를 봉환(封還)하는 법규가 있었습니다. 윤득열이 아뢴 바는 바로 그의 직책일 뿐입니다. 또 유창의 연고 때문에 많은 관원들에게까지 벌이 미쳤으니, 성상의 잘못이 이 지경에까지 이를 줄을 생각도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들의 말이 이와 같으니 민응협을 다시 들어오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금군 별장(禁軍別將) 남두병(南斗柄)·조필달(趙必達)을 불러 비밀히 분부하기를,
"그대들이 만일 마대(馬隊)를 거느리고 출몰하면서 충격하여 도감(都監)의 진중(陣中)으로 달려 들어온다면, 그대들의 능력을 볼 수 있겠다."
하니, 이에 마병(馬兵)이 앞다투며 치달려 갑자기 어전(御前)에 다다르되 대장 이완이 능히 금지하지 못하자, 상이 선전관으로 하여금 징을 울리도록 하니, 한참만에야 물러갔다. 저녁무렵에 환궁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윤득열에 대하여 형틀을 풀어주도록 하라."
3월 5일 을미
상이 하교하였다.
"어제 열무할 때에 마병과 금군(禁軍)이 치달려 어전에 돌입하여 징을 울렸는데도 물러가지 않았으니, 능히 절제하지 못한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마병 별장(馬兵別將) 윤천뢰(尹天賚)와 금군 별장(禁軍別將) 남두병·조필달을 모두 나추하라."
옥당이 상차하기를,
"지난번 남용익의 상소는 진실로 거리낌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다만 용납하여 놔두고 타일러 풀어주셔야 할 뿐인데, 어찌 그의 몸을 물리쳐 그로 하여금 어가를 수행하지 못하도록 할 것까지야 있겠습니까. 도로 거둬들여야 한다는 유창의 논의도 나름대로 임금을 과오가 없는 데로 들여놓는 의리에 붙였는데, 인피하면서 한 말이 간혹 절실함이 부족했으므로 임금의 노여움이 몹시 발하여 전도되어 이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진실로 신하의 죄에 연유한 것이니, 어찌 감히 오로지 전하의 과오로만 여기겠습니까. 그러나 전하께서 시험삼아 마음을 누그러뜨려 생각해 보시면, 이 두 신하가 과연 모두들 자신을 위하여 꾀한 것이겠습니까. 열무를 정지할 것을 주청한 것이 어찌 명예를 사는 일이라고 이를 수 있으며, 어가를 수행하도록 주청한 것도 또한 사사로움을 경영한 계책이라고 이를 수 있겠습니까. 연소한 사람으로서 말이 적당하지 못하고 지리하고 불분명하여 스스로 잘못을 초래하였으니, 그 말은 비록 채택할 것이 없지만 그 뜻은 참으로 죄를 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성명께서 갑자기 정외(情外)의 말씀으로써 억측하여 그를 꺾어버리셨습니다. 윤득열(尹得說)에 있어서는 몸소 왕명을 출납하는 지위에 있으면서 중도에 지나친 일을 눈으로 보고 창졸히 아뢰었고 결코 딴뜻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두어 글귀의 말 때문에 갑자기 사패(司敗)에 넘기니, 조정의 관원들이 기운을 잃어 의혹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신들은 이것이 얼마나 큰 행동 거지이기에 성색을 크게 노하심이 이와 같음에 이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제 양사가 등대(登對)할 때에 말씀이 더욱 준엄하셨으니, 이것이 어찌 신들이 성명께 바라던 바이겠습니까. 바람과 천둥은 종일토록 성냄이 없고 해와 달은 모두 우러러 보는 밝음이 있는 것이라서, 간한 신하를 이미 물리쳤다가 다시 부르고 수감한 신하를 장차 형틀을 씌우려다가 도로 벗겼으니, 신들은 더욱 성상께서 간함을 어기는 데에 뜻이 있지 않으심을 알겠습니다. 진실로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이로 인해서 노여움을 확 풀으셔서 통쾌하게 모든 신하들에게 보여주고, 죄를 입었거나 배척당한 신하들로 하여금 모두 큰 도량 안에 감싸이게 하소서. 그런다면 어찌 성덕의 일이 되지 아니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3월 6일 병신
장령 이지온(李之馧)이 인피하면서 아뢰기를,
"승지 윤득열(尹得說)이 체포당한 것이 뜻밖에서 나왔는데도, 동참한 여러 승지들이 편안히 그대로 재직하여 염치가 모두 상실되었으니, 마땅히 파직을 청하여야 합니다. 판윤(判尹) 이완은 탑전에 병부(兵符)를 풀어놓고 말과 얼굴빛이 공손하지 아니하여 너무나 신하의 예의가 없었으니, 마땅히 나추를 청하여 죄를 정하여야 합니다. 병조 판서 원두표는 중신으로서 대신에게 아첨하였다는 나무람을 당하고서도 아직껏 그 직위에 앉아 있어 대단히 수치심이 없으니, 또한 마땅히 파직을 청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이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말을 꺼냈는데도 동료들의 의논이 통일되지 않았으니, 이는 신이 경시당한 소치가 아님이 없습니다. 신의 직책을 파직하소서."
하였는데, 대사헌 홍무적(洪茂績) 등이 인피하면서 아뢰기를,
"이지온이 원두표·이완 및 여러 승지들을 추론하고자 하기에 신들의 생각에는 과당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반복해서 개유하였는데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이는 신들의 말이 신임받지 못한 소치가 아님이 없습니다. 신들의 직책을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하였는데, 지온 등이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도승지 김익희(金益熙)가 아뢰기를,
"내일 춘당대(春塘臺)에 친히 거둥하실 때에 승지의 인원수를 갖추지 않을 수 없는데, 승지 이원진(李元鎭)·박길응(朴吉應)·조한영(曺漢永)·권령(權坽) 등이 대론(臺論)을 무겁게 입어 모두들 공무를 집행하기가 어려우니, 마땅히 처치하는 방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모두 체차하도록 명하고 남선(南翧)·심지한(沈之漢)·서원리(徐元履)·홍처량(洪處亮)을 승지로 삼았다. 처량은 유탕의 의논을 따르지 아니하여 곧바로 총탁(寵擢)을 입으니 사람들이 많이 기롱하였다. 심세정(沈世鼎)을 사간으로 삼았다.
3월 7일 정유
상이 춘당대에 거둥하여 무사(武士) 및 양영(兩營)의 군사들에게 활쏘는 것을 시험보이고, 문신으로서 통정(通政) 이하에게 제술을 시험보였는데, 승문 정자 이홍상(李弘相)이 수석을 차지하자 구마(廐馬)를 하사하였다.
정언 이은상이 입시하여 아뢰기를,
"사헌부의 여러 관원들이 인혐하고 물러갔는데, 이지온(李之馧)의 의논은 풍채가 가상스럽고 무적(茂績) 등이 말한 것은 퍽 졸렬합니다. 장령 이지온은 출사토록 하고 대사헌 홍무적 등은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의 시비(是非)는 나와 다름이 있다. 지온이 의논한 바가 대단히 각박하였으니 역시 체차하라."
하였다. 영돈녕부사 이경석이 아뢰기를,
"말한 사람을 임금이 관대히 용납하는 이유는 그가 말을 다하게 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말씨를 엄준하게 보여준다면, 사람마다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말을 하고 싶어도 감히 못할 것입니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성의가 미쁘지 않으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의 말이 이와 같으니 이지온은 체직하지 말라."
하였다.
동지사(冬至使) 심지원(沈之源)과 부사(副使) 홍명하(洪命夏) 등이 북경으로부터 돌아오니, 상이 그들을 불러 보았다.
3월 8일 무술
상이 춘당대에 거둥하여 기사(騎射)를 시험보였다.
3월 9일 기해
심지원을 형조 판서로, 오준(吳竣)을 대사헌으로, 홍명하(洪命夏)를 대사간으로, 이상진(李尙眞)과 허열(許悅)을 지평으로 삼았다.
전라도 순천·광양 등 고을에 여역이 크게 번성하여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예조가 여러 도(道)의 삭선(朔膳)을 다시 베풀도록 청하니, 하교하였다.
"연이어 삼남(三南) 도신(道臣)의 치계를 보니, 여역이 바야흐로 번성하여 백성들이 많이 죽어 놀랍고 참혹한 생각이 진실로 마음에 절실한데, 내가 무슨 마음으로 매달마다 이런 연향을 받겠느냐."
상이 하교하였다.
"금군 별장(禁軍別將) 남두병(南斗柄)은 80세 노모가 있다고 하니, 그를 석방하여 다른 사람과 똑같이 죄를 논하도록 하라."
3월 11일 신축
상이 춘당대에 거둥하여 정시(庭試)를 베풀어 박세모(朴世模) 등 6인을 뽑았다.
3월 12일 임인
박세성(朴世城)을 정언으로 삼았다.
3월 14일 갑진
상이 하교하였다.
"금군 별장 조필달(趙必達) 등은 조율하고, 마병 별장(馬兵別將) 윤천뢰(尹天賚)는 형추하라."
3월 16일 병오
김응해(金應海)를 총융사(摠戎使)로 삼았다.
간원 등이 【대사간 홍명하, 사간 심세정, 정언 박세성.】 아뢰기를,
"병조 판서 원두표가 이미 대탄(臺彈)을 당하였으니, 물러나 움츠리고 있으면서 여론에 사죄하여야 하는데도, 끝내 인책하고 들어가지 않으니 중신의 처신을 이처럼 해서는 안 됩니다.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3월 18일 무신
심지원을 대사간으로, 정유성(鄭維城)을 예조 판서로, 홍무적을 형조 판서로, 채충원(蔡忠元)을 헌납으로, 서필원(徐必遠)을 부수찬으로, 신경호(申景琥)를 경기 수사로 삼았다.
좌의정 김육이 상차하기를,
"전하께서, 남두병이 노모(老母)가 있는 까닭으로 특별히 먼저 석방해 주니, 듣는 사람들이 감읍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윤득열·윤천뢰도 역시 80 세 홀어미가 있고, 조필달은 늙은 아비가 시골에 있어, 사정이 두병과 더불어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태양이 엎어놓은 동이 밑에는 비추지 못하여 성은이 세 신하에게는 고르게 미치지 않았습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속히 관대히 처결하여 똑같이 은혜를 베푸소서."
하니, 윤천뢰에 대한 형추를 정지할 것을 명령하고 금부로 하여금 속히 처결하도록 하였다.
3월 19일 기유
유준창(柳俊昌)을 장령으로 삼았다.
상이 금부가 윤득열 등에게 죄를 의정한 것이 너무 가볍다고 여기어, 득열은 관작을 삭탈하여 도성 밖으로 축출하고, 윤천뢰는 관직을 삭탈하고, 조필달은 곤장 1백 대를 때리고, 남두병은 한 자급을 강등하도록 명하였다.
3월 20일 경술
간원이 아뢰기를,
"근일에 정사의 체통이 뒤바뀌고 관원의 기강이 많이 문란하여, 무변(武弁)의 승자(陞資)와 천탁(遷擢)에 일정한 규정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견(李湃)이 형조 정랑으로서 계급을 뛰어넘어 김해 부사에 제수된 것이 이미 급작스럽게 승진된 것인데도 또 당상 계급에 올랐고, 이화악(李華岳)은 당하(堂下) 첨사(僉使)로서 갑자기 영장(營將)에 제수되었으며, 이인하(李仁夏)는 전 현감(縣監)으로서 갑자기 도총(都摠)·경력(經歷)에 제수되었다가 또 영장에 제수되었습니다.
관작과 봉록은 세상을 권면하고 둔한 사람을 연마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을 얻은 사람이 이미 공로가 없으면 얻지 못한 사람들도 또한 반드시 바랄 터이니, 어찌 자급을 가볍게 더하여 명기(名器)를 중하지 않게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성익(成釴)과 신단(申檀)은 모두 당하관으로서 자급이 올라 첨사(僉使)가 되었는데, 혹은 반 년도 못 되고 혹은 기한도 차지 않아 군직(軍職)으로 전임된 것입니다. 변진(邊鎭)을 설치한 것이 어찌 이 무리들의 자급이 오르는 계제가 될 뿐이겠습니까. 이견·이화악·이인하에게 가자한 것을 개정하고, 성익과 신단은 그대로 재임시켜 기한을 채우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것은 인재가 모자라는 데에서 나와 부득이한 것인데, 어찌 꼭 이와 같이 논할 것이 있는가."
하였다.
3월 22일 임자
헌부가 아뢰기를,
"통제사(統制使) 황헌(黃瀗)은 본디 성품이 탐욕스러워, 전에 평안 병사가 되었을 적에 병영(兵營)에 저장된 무명베 2만여 필을 꺼내다가 가벼운 돈으로 환매(換買)하여 모조리 싣고 오니, 서도(西道) 사람들이 지금까지 침뱉으며 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직에 제수되어서도 오히려 옛날 습관을 답습하여, 여러 고을의 장인(匠人)들을 독촉 취합해서는 날마다 물건을 만들고 많은 배를 건조하여 모조리 자신의 재산으로 귀납시켰습니다. 전후에 걸쳐 탐장의 흔적이 이와 같이 낭자하니, 나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3월 25일 을묘
채유후(蔡𥙿後)를 대사헌으로, 남선(南銑)을 우참찬으로 삼았다.
병조 판서 원두표가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행로장(行露章)과 고양장(羔羊章)을 강론하였다.
상이 석강에 나아가 《대학연의》를 강론하다가 노기(盧杞)의 일에 이르러 강관(講官)에게 일렀다.
"노기가 간사하고 아첨하여 충성스러운 것 같아 보이자 덕종(德宗)이 현혹되어 마침내 나라가 전복되고야 말았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3월 26일 병진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은기뢰장(殷其雷章)과 표유매장(摽有梅章)을 강론하였다. 강론이 끝나자 시독관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신이 서도(西道)에 가서 각읍 백성들이 모두 돈을 허리에 차고 있는 것을 보고, 신이 괴이하게 여기어 그 까닭을 물어보니, 모두들 말하기를 ‘상평청(常平廳)에서 새로운 법을 시행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각각 50 전(錢)씩을 차고 다니도록 하였는데, 차고 다니지 않는 사람은 죄를 받는다.’ 하였습니다. 대체 돈이라는 것은 샘물처럼 흘러 떨어지지 않는 재물인데 어찌 찰 수만 있는 것이겠습니까. 돈을 유통시키는 것이 비록 좋은 법이지만 백성들이 하고자 하지 않는데 어찌할 것입니까. 또 이른바 행전 별장(行錢別將)이라는 것도 폐단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행전청(行錢廳)에 의논하도록 하였다. 정언 박세성(朴世城)이 입시하여 전에 아뢰었던 것을 다시 품신하며 이견(李湃) 등에게 가자한 것을 개정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臺臣)들이 급작스럽게 승진시켰다고 논한 것은 체례(體例)에 진실로 당연한 것이나, 국가에서 발탁하여 등용한 것은 사세가 또한 그러한 것이다. 지금 우선 그들을 시험해 보다가 만일 합당하지 않으면 자급을 깎아내리는 것이 무슨 어려움이 있겠느냐. 영장(營將)을 오랫동안 폐지한 끝에 두었으니, 이들에게 신설된 임무를 위임함에 있어 용동시키는 일이 없을 수 없다."
하였다.
상이 석강에 나아가 《대학연의》를 강론하다가, 노기(盧杞)가 안진경(顔眞卿)을 죽이고 이규(李揆)를 축출한 일에 이르러 강관(講官)에게 일렀다.
"소인의 정상은 몹시 간교하여 반드시 임금을 헤아려 본 뒤에 그 생각을 펴는 것이다. 노기가 덕종(德宗) 보기를 어린아이 놀리듯이 하였는데도 마침내 깨닫지 못하였으니, 덕종은 대단히 어리석고 사리에 어두웠다. 또 역사서를 읽는 것은 장차 거울삼아 경계하려는 것이니, 오늘날 군신 상하는 모두들 각기 노력하여 후세에서 오늘날 보기를 오늘날 덕종의 시대를 보는 것처럼 되지 않게 해야 한다."
3월 27일 정사
신천익(愼天翊)을 대사간으로, 조비(趙備)를 부교리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강유사(江有汜)·야유사균(野有死麕)·하피농의(何彼穠矣)장 등을 강론하였다. 강론이 끝나자 상이 무신(武臣) 김응해(金應海)에게 이르기를,
"경이 방금 북도(北道)에서 왔는데, 육진(六鎭)의 형세는 어떠한가?"
하자, 응해가 아뢰기를,
"육진이 매년 연이어 흉년이 들어 지난번 청나라에서 군사를 증집할 때에, 무명베 15필로 군사를 모집하자 사람들이 모두 가기를 자원하였으니, 그 정상이 불쌍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곳은 바로 죽는 땅인데도 백성들이 가기를 좋아하니 굶주려 곤궁함을 상상할 수 있다. 어찌 측은하지 않으리오."
하였다.
상이 석강에 나아가 《대학연의》를 강론하였다. 강론이 끝나자 이조 판서 이후원(李厚源)이 아뢰기를,
"설서(說書) 윤징지(尹澄之)가, 그의 아비가 법에 의해 죽은 까닭으로, 시골에 은퇴하고 벼슬하기를 원하지 않아 출신(出身)한 지 30년이 되도록 6품에 옮기지 못하였으니, 6품직을 제수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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