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12권, 효종 5년 1654년 4월

싸라리리 2025. 12. 21.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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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경신

상이 조강에 나아가 《시전》 추우장(騶虞章)을 강론하였다. 강론이 끝나자 집의 이만영(李晩榮)이 아뢰기를,
"신이 지난날 궁료에 외람되게 끼어 누차 서연(書筵)에 참여하였는데, 강의를 받는 규례가 대단히 소략합니다. 사부(師傅)를 인접한 것은 한 달에 두 번도 안 되고, 강독은 겨우 한번 마치면 곧바로 파하고 나가니, 자못 모여서 강론하는 뜻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세자가 나이가 어리어 논란할 수 없으니, 일반적인 규정에 구애되지 말고 반복해서 말하여 그로 하여금 깨닫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또 세자가 깊숙한 궁궐에서 생장하여 외부 일에 있어서 전혀 아는 것이 없으니, 강학하는 짬에 여염간의 일도 언급해주면 좋겠다. 나도 궁중에서 세자에게 가끔 춘당대(春塘臺)에 가서 농사짓는 어려움을 보도록 하고 있다."
하였다. 특진관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신이 봉명하고 북경에 사신갔을 적에 청역(淸譯) 한거원(韓巨源)이 아문(衙門)의 뜻으로 묻기를 ‘어찌 세자 책봉을 청하지 아니하오?’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세자가 나이가 어리기 때문이오.’ 하였습니다."
하자,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저들이 만일 먼저 발론하면 일에 난처함이 있을 터이니 우리 쪽에서 청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니, 상이 대신들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금부에 수감된 사람으로서 범죄가 조금 가벼운 자에 대해서는 석방해주는 조치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죄가 장오(贓汚)를 범한 자는 심리하여 내보낼 수 없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수감된 지가 이미 오래되고 죄가 사형에 이르지 않으면 용서해 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김번(金繁) 같은 자는 범한 바가 무겁지 않고, 송상필(宋相弼)의 일도 또한 의심스러운 바가 있습니다. 김흥조(金興祖)는 이미 그 죄를 자복하였는데도 아직껏 형벌을 내리지 않고 있으니, 자못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부에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금부에서 형신하는 것이 이름만 있을 뿐이니, 어찌 두려워하여 움츠러들 리가 있겠는가. 형벌을 가볍게 하는 본뜻은 사대부들로 하여금 부끄러워할 줄을 알도록 하고자 할 뿐이니, 장오(贓汚)를 다스림에 이르러서는 법률을 극히 엄하게 적용하여야 한다. 만일 형벌을 가볍게 시행한다면 누가 기꺼이 법에 복종하여 자손에게 누를 끼치려 하겠는가."
하였다. 이때에 상이 장리(贓吏)를 엄하게 다스리고자 하였는데, 조금 세력이 있는 사람은 대체로 법망에서 많이 빠져나갔고 그 뒤에 김번도 또한 귀양가게 되었는데, 유독 김흥조만이 먼 지방 사람으로서 형벌을 받아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전남 감사(全南監司) 이만(李曼)이 사조(辭朝)하니, 대면해서 효유하여 보냈다.

 

4월 2일 신유

김해 부사 이견(李湃)이 사조하니, 대면해서 효유하여 보냈다.

 

앞서 교리 김수항(金壽恒)이 돈을 유통시키는 폐단을 말하자 상평청으로 하여금 그것을 의논하도록 하였는데, 좌의정 김육이 회계하기를,
"수항이 일방적으로 다른 의견만을 들었습니다."
하자, 수항이 상소하기를,
"신이 서도(西道)에 왕래할 적에 각 고을의 아전과 백성들이 돈을 허리에 차지 않은 사람이 없어서 도처에서 익히 보았고 그 폐단을 익히 들었으니, 수령(守令)들만 그것을 말할 뿐이 아니었습니다. 이른바 별장(別將)은 마을을 제멋대로 다니면서 백성들을 불러 모아놓고서, 그중에 혹간 돈을 차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채찍질을 가하고 또 속전(贖錢)을 징수한다고 합니다. 이러므로 민간에서 별장이 온다는 말을 들으면 모두들 도망하여 숨어버리니, 이와 같고도 돈을 유통시킨다고 이를 수 있겠습니까. 신이 서울에 있을 때에 일찍이 양서(兩西)에서 돈을 유통시킨다는 말을 들었는데, 서도(西道)에 이르러서는 다만 돈을 차고 다니는 것만 보았을 뿐이고 유통되는 실제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우연히 눈으로 본 일을 아뢰었다가 마침내 면전에서 속인 죄를 짊어졌으니, 어떻게 논사(論思)하는 지위에 부끄럽게 재임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4월 3일 임술

송시열을 특별히 임명하여 승지로 삼았다.

 

세자 책봉을 주청하는 것이 타당한지의 여부를 대신들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는데, 대신들이 아뢰기를,
"세자 책봉을 주청하는 것이 지금도 또한 늦었습니다. 마땅히 금년 가을에 사신을 보내어 주청해야 합니다."
하니, 따랐다.

 

4월 8일 정묘

윤문거(尹文擧)를 이조 참의로, 심황(沈榥)을 지평으로, 이경억(李慶億)을 정언으로 삼았다.

 

경상도 천성(天城) 등 3 진(鎭)의 토병(土兵)들이 굴을 따먹고 갑자기 죽은 사람이 50여 명이었는데, 도신(道臣)이 그 사실을 보고하였다.

 

4월 9일 무진

상이 조강에 나아가 《시전》 백주장(柏舟章)을 강론하였다. 강론이 끝나자 집의 이만영(李晩榮)이 아뢰기를,
"황헌(黃瀗)의 죄를 논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 성상께서 어찌 통촉하지 못하셨겠습니까. 다만 공로가 있다는 까닭으로 그에게 죄를 주지 않으니, 만일 공로가 있는 것으로 여기신다면 그 품계를 높여주고 봉록을 후하게 주는 것이 좋지, 어찌 오래도록 해곤(海閫)의 임무를 주어 무고한 백성들을 학대하도록 해서야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체차하도록 명하였다. 좌의정 김육이 아뢰기를,
"지난날 유신(儒臣)이 행전 별장(行錢別將)의 폐단을 말하였으니, 도사(都事)로 하여금 주관하여 유통시키도록 하소서. 또 돈이 유통되는 것이 반드시 관가(官家)로부터 수납하는 바가 있은 뒤에야 통용될 수 있는 것이니, 평안도로 하여금 황해도의 준례에 의하여 세미(稅米) 1 두(斗)를 돈으로 대신 징수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녹의장(綠衣章)을 강론하였다.

 

상이 석강에 나아가 《대학연의》를 강론하였다. 시독관 이연년(李延年)이, 구사량(仇士良)이 그 무리들을 가르친 말을 지적하면서 아뢰기를,
"소인(小人)은 반드시 지모가 있는 뒤에야 그 간사함을 부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량의 술책이 간교하다고 이를 수 있으나 그 자신도 요행히 죽음을 모면하고 국가는 따라서 망하게 되었으니, 이로써 말한다면 그 계책이 참으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량의 이 말은 충분히 죽임을 당할 만하다."
하였다.

 

4월 10일 기사

남선(南翧)·남로성(南老星)을 승지로, 이원로(李元老)를 통제사로, 원숙(元䎘)을 경상 병사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일월장(日月章)을 강론하였다.

 

상이 석강에 나아가 《대학연의》를 강론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소인의 실태가 이미 드러난 뒤에는 사람들이 모두 알 수 있거니와 나타나지 않을 적에는 구별하기가 어렵다."
하니, 시독관 조비(趙備)가 아뢰기를,
"구별하기가 참으로 어렵지만 그를 끊어버리는 것이 더욱 어렵습니다."
하였다.

 

청차(淸差)가 후춘부(厚春部) 등의 여러 오랑캐들을 거느리고 경원부(慶源府)에 이르러 개시(開市)하였다. 이때에 북도(北道)가 흉년이 들었는데 연속해서 개시하여 물건을 사들이도록 강요하니, 백성들이 더욱 곤궁하였다.

 

함경 감사 이응시가 치계하기를,
"신이 육진(六鎭)을 순회하면서 눈으로 보고 경험한 바로는 경성(鏡城)의 수성(輸城)과 부령(富寧)의 청암(靑巖)은 참으로 이 두 고을의 부고(府庫)로서, 넓이가 6, 7십 리에 한 번 바라보면 온통 평원으로서 기름진 흙이 아닌 데가 없으며, 회령(會寧)으로부터 경흥(慶興) 두만강에 이르기까지의 일대 연변은 모두 다 비옥한 밭으로서, 장마와 가뭄을 물론하고 해마다 크게 풍년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연전(年前)의 큰 수해로 갑자기 모래·자갈밭이 되어버렸으니, 마음에 놀랍고 눈에 참혹하며 농삿일이 염려스럽습니다. 신이 또 경원(慶源)에 이르러 후춘(厚春)의 형세를 자세히 탐문해 보니, 모두들 말하기를 ‘후춘 부락이 5백여 호에 이르고 활을 쏠 줄 아는 병사가 천여 명이다.’ 합니다. 저들이 만일 한 번만 발을 움직인다면 육진에 대한 걱정이 말할 수 없는데도 육진의 성과 해자가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으니, 생각이 이에 이름에 참으로 극히 한심스럽습니다.
또 육진의 성안에 거주하는 백성들의 수효가 적으니, 하루아침에 변란이 있게 되면 어떻게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고을 늙은이에게 듣건대 ‘육진의 백성들은 성밖에 흩어져 거주할 수 없기 때문에, 2월 10일 뒤에야 비로소 들에 나가 농사를 짓도록 하고, 10월 초에는 그 처자와 함께 성안으로 모두 들어오게 하는데, 일단 변란을 알려주면 모두 성으로 올라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는 점점 해이해져 평소에 성안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모두 성밖의 마을로 이주하였으니, 만일 불행한 변이 있게 되면 고을이 텅 비어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일에 앞서서 걱정하는 것을 조금도 늦출 수 없으니, 우선 추수를 기다려 바로 죄다 성안으로 들어가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러나 형세에 난처함이 있어 뜻밖의 걱정거리를 불러들일까 두렵습니다."
하고, 이어서 각 고을 및 진보(鎭堡)의 성지(城池)와 기계를 보수(補修)하는 데에 대한 근만을 낱낱이 진달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감사 이응시가 나랏일에 마음을 다하여 변보(邊堡)를 친히 순회하여, 비록 깊은 산과 궁벽한 골짜기가 있을지라도 곳곳마다 이르지 않은 데가 없고, 크고 작은 모든 기계를 빠짐없이 점검하였다. 이는 바로 수십년 동안에 없었던 일로서 대단히 가상스러우니 특별히 표리(表裏) 한 벌을 하사하고, 진달한 폐단은 비국으로 하여금 의논하도록 하라."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육진의 백성들이 성밖에 흩어져 거주할 수 없는 것은 본시 옛부터 전해오는 준례인데, 근래에 나라의 기강이 엄격하지 못하여 국토를 지키는 신하가 원망을 떠맡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아 먼 마을에 흩어져 있게 하였으니, 일이 지극히 놀랍습니다. 예전 일을 수행하는 것이 조금도 불가할 것이 없으니, 의심하여 염려하는 생각을 지나치게 낼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따랐다.

 

4월 11일 경오

상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경서(經書)를 전공하는 문신(文臣)들을 시험보였는데, 예조 정랑 남천택(南天澤)이 수석을 차지하자 구마(廐馬) 1필을 하사하였다.

 

지돈령 정광성(鄭廣成)이 와서 은명(恩命)에 대하여 사례하니, 상이 그를 불러들여 보았다. 두 소환(小宦)에게 명하여 부축해서 올라오도록 하고, 하유하기를,
"경이 오랫동안 시골에 있어 영상(領相)이 때때로 가서 뵐 수 없기에 내가 대단히 민망스럽게 여겼는데, 지금 경이 들어오니 공사간에 모두 다행이다."
하니, 광성이 대답하기를,
"신이 늙고 병들어 죽을 때가 다 되었는데, 은지(恩旨)가 누차 내리기에 감격스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부축을 받으며 끌려서 들어왔습니다."
하였다. 광성은 태화의 아비이다.

 

예조가 아뢰기를,
"영가 부부인(永嘉府夫人)의 장삿날에 왕비가 망곡(望哭)하는 예가 있어야 할 것 같으니, 대신들에게 의논하소서."
하였는데, 대신들이 다 아뢰기를,
"내전께서 망곡하는 것이 비록 옛날의 준례는 없지마는, 정례(情禮)로써 헤아려 봄에 그만둘 수 없는 것 같습니다."
하니, 따랐다.

 

4월 12일 신미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격고장(擊鼓章)과 개풍장(凱風章)을 강론하였다.

 

4월 13일 임신

정기풍(鄭基豊)을 사간으로, 심세정(沈世鼎)을 부교리로, 홍위(洪葳)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병조 판서 원두표가 아뢰기를,
"영장(營將)이 여러 고을들을 통제하는데 품계가 낮고 사람이 미천하면 누가 기꺼이 명령을 따르겠습니까. 여론이 비록 갑자기 승진하는 것으로써 비방하지만 그 자급을 올려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이미 3, 4품 중에서 등용할 만한 사람 20여 명을 선택하여, 빈 자리가 생기면 임명하여 보내고자 합니다."
하자, 대사헌 채유후가 아뢰기를,
"자급은 매우 중요하니 헛되이 줄 수 없습니다. 경력이 없는데다 또 공로도 없는데 하루아침에 영장으로 발탁하여 임명하는 것이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간(臺諫)은 뒷날의 폐단이 있을까 염려하고 정관(政官)은 인물이 모자라는 것을 걱정하니, 이 의논이 모두 없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다투며 시비(是非)를 말하여 서로 이견이 있자, 상이 이르기를,
"많은 말 할 것 없다. 나이가 젊고 기운이 날랜 사람을 지금 우선 시험해 보다가, 만일 그 효력이 없으면 자급을 빼앗는 것도 늦지 않다."
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웅치장(雄雉章)과 포유고엽장(匏有苦葉章)을 강론하였다.

 

상이 석강에 나아가 《대학연의》를 강론하였다.

 

4월 15일 갑술

경기·충청도 등에 황해(蝗害)가 있었다.

 

4월 16일 을해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곡풍장(谷風章)을 강론하였다.

 

4월 17일 병자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식미장(式微章)과 모구장(旄丘章)을 강론하였다. 강론이 끝나자 상이 이르기를,
"오랜 가뭄 끝에 비를 얻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기뻐서 잠을 이룰 수 없게 한다."
하니, 동지경연 채유후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걱정하며 반성하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하늘이 단비를 내린 것입니다. 만일 종시 게을리 않으시면 하늘이 도와주어 이롭지 아니함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때가 기회로서 도모함이 있을 수 있으니,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들이 마음과 힘을 하나로 합치면 거의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참찬관 김익희(金益熙)가 아뢰기를,
"참으로 인재를 선택하여 국사를 맡기면 누군들 마음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예로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반드시 근로한 뒤에야 성공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대소 관원들이 한가로이 세월만 보내니 어떻게 일을 이루겠는가."
하고, 특진관 윤강(尹絳)이 아뢰기를,
"속오군(束伍軍)은 모두 농민들로서 끝내 연습하는 실효가 없으니, 지금 다시 영장(營將)을 둔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전일에 이미 폐단만 있고 유익함이 없다는 까닭으로 혁파하였으니,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다시 둘 필요가 없을 성싶습니다."
하였다.

 

4월 18일 정축

달이 남두(南斗)로 들어갔다.

 

심지원(沈之源)을 지경연으로, 채충원(蔡忠元)을 수찬으로, 서필원(徐必遠)을 헌납으로, 홍명하(洪命夏)를 부제학으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간혜장(簡兮章)과 천수장(泉水章)을 강론하였다.

 

동부승지 송시열이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그 대략에 아뢰기를,
"신이 누차 은명을 외람되이 받고서도 한결같이 규피하여 태만히 하였는데, 형벌을 내리지 않으시고 도리어 총애하여 발탁하시니, 신이 처음에는 헛된 명성을 훔쳐 태평 성대를 속였고, 마침내 조정의 명령을 어기어 밝은 법을 범하였습니다. 이미 성덕을 보좌해 드린 것이 없는데 또한 어떻게 차마 명기(名器)를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세상이 쇠퇴하고 도(道)가 희미하여, 사대부들이 진실한 척 가장하여 거짓을 팔고 물러남을 구하다가 벼슬에 나아감을 얻으며, 낮은 벼슬을 사양하고 높은 벼슬을 노리니, 청환과 요직을 편안히 앉아서 갑자기 얻는 것을 진실로 신이 계도하였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의 말이 비록 절실하지만, 분의가 존재하는 데 불가한 점이 없는가. 말을 두 번 하지 않을 터이니 모름지기 속히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다.

 

4월 19일 무인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북문장(北門章)과 북풍장(北風章)을 강론하였다. 시독관 이연년(李延年)이 아뢰기를,
"북풍의 시는 어진 사람이 위태로운 나라에 살다가 기미를 보고 떠나가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임금이 되어서 어진 사람으로 하여금 이와 같게 한다면, 어찌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임금으로서 말한다면 선비들이 조정에 벼슬하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 참으로 부끄럼 직하거니와, 신하로서 말한다면 위태로운데도 붙잡아 주지 않고 다만 버리고 떠나가는 것만 생각하는 사람도 또한 어찌 그 도리를 다하는 것이겠는가."
하였다. 강론이 끝나자 지경연 심지원(沁之源)이 아뢰기를,
"선조조 실록(宣祖朝實錄)은 바로 광해(光海) 시대에 기자헌(奇自獻)·이이첨(李爾瞻) 등이 편찬한 것으로서, 거짓말을 한 것이 많습니다. 때문에 선왕께서 대제학 이식(李植)으로 하여금 다시 고쳐서 편찬하도록 하였는데 끝내지 못하고 죽었으니, 지금 마땅히 계속해서 완성해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20일 기묘

경상도 순안 어사(慶尙道巡按御史) 이경억(李慶億)이 돌아와 본도의 군정(軍政)에 대한 폐단을 극진히 아뢰니, 비국으로 하여금 의논하도록 하였다.

 

4월 21일 경진

각사(各司)의 해유법(解由法)을 거듭 표명하였다. 이때에 각사의 관원들이 교체가 빈번하여 역사(驛舍)같으므로, 간교한 아전들이 이를 이용해서 관청의 물건을 훔쳤는데, 이에 이르러 비국이 건의하여 고과(考課)하는 날 반드시 담당 직무에 빠뜨린 것이 없음을 기다린 뒤에, 전조(銓曹)에 전달 보고하면 전임(轉任)을 허락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조 참의 윤문거(尹文擧)가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그 대략에 아뢰기를,
"신의 아비 윤황(尹煌)은 일찍이 선조(先朝)에 외람되이 특별한 대우를 받아, 오직 말을 숨김없이 다할 것만을 생각하였습니다. 대체 본디 성품이 되돌리기 어려워 그릇된 소견을 자신하고서 온 세상이 그르다고 할지라도 변통할 줄을 모르고 척화론(斥和論)을 끝까지 주장하였습니다. 신도 참으로 어리석어 망령되이 아비의 뜻을 답습하여 부자가 함께 화를 받게 되었지만, 스스로 저지른 것이기 때문에 도피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남한 산성이 함락당한 때에 이르러 체부(體府)에서 척화한 사람은 자수하라는 명령이 있었는데도, 신이 아비의 병환이 위중한 것을 민망스럽게 여기어 숨겨 말씀드리지 않고, 이에 척화한 신하 몇 사람의 성명만을 조정에 보고하여 신의 아비가 다행히 지극히 위험한 지역으로 가는 것을 모면하였습니다. 신이 다만 아비의 죽음을 늦춰드릴 줄만 알고 아비의 뜻을 무너뜨렸으며, 아비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 참으로 신의 몸에서 연유할 줄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자식으로서 불초하고 사람으로서도 불쌍한 존재이니, 오직 마땅히 짐승처럼 엎드려 있고 새처럼 쉬고 있을 따름이지, 어찌 감히 사람 축에 다시 끼여 청반(淸班)을 욕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지나간 일을 추후하여 진달할 필요가 없다. 더구나 분의가 존재하는 바에 있어서 한결같이 사퇴할 수 없으니, 그대는 속히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다.

 

나주 영장(羅州營將) 성익(成弋)과 상주 영장(尙州營將) 이인하(李仁夏) 등이 사조(辭朝)하니, 대면해서 효유하여 보냈다.

 

4월 22일 신사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정녀장(靜女章)·신대장(新臺章)·이자승주장(二子乘舟章)을 강론하였다.

 

지돈령부사 정광성(鄭廣成)이 졸(卒)하였다. 광성은 고 정승 정창연(鄭昌衍)의 아들이다. 젊어서 과거에 급제하여 화려한 벼슬을 두루 역임하였고 혼조(昏朝)에 있어서는 수립한 것이 적지만, 평소에 재능과 명망을 짊어지고서 몸가짐이 간소 검약하였다. 때문에 반정 이후에 위임하고 대우함에 쇠퇴한 적이 없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물러나 전리(田里)로 돌아가 벼슬에 뜻을 끊어버렸다. 상이 그의 아들 정태화가 바야흐로 국정을 맡아 항상 귀근(歸覲)을 청한다는 까닭으로, 누차 그를 부르자 광성이 부득이 조정으로 돌아왔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졸하니, 나이가 79세였다.

 

4월 24일 계미

심택(沈澤)을 승지로, 임규(林葵)·서정연(徐挺然)을 장령으로, 홍우원(洪宇遠)을 수찬으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백주장(栢舟章)과 장유자장(墻有茨章)을 강론하였다.

 

4월 25일 갑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군자해로장(君子偕老章)을 강론하였다.

 

4월 26일 을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승지를 보내 전옥서(典獄署)에서 죄수를 검열하여 죄가 가벼운 사람은 석방해 주도록 하였다.

 

4월 27일 병술

상이 하교하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요·순을 본받고자 할진대 마땅히 조종(祖宗)을 본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자손으로서 마땅히 준행하여야 할 것이 《국조보감(國朝寶鑑)》과 【태조조(太祖朝)로부터 문종조(文宗朝)에 이르기까지 아름다운 말과 좋은 정치를 발췌하여 《국조보감》이라고 칭하였는데, 상이 이 책을 보고 이 하교가 있었다.】  만한 것이 없는데, 근세에 이 책이 드무니 대단히 한탄스럽다. 교서관(校書館)으로 하여금 인출하여 널리 반포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치평요람(治平要覽)》 전질을 혹간 간직하여 둔 사람이 있느냐? 내가 한번 보고 싶다."
하였는데, 【《치평요람》도 역시 조종조의 아름다운 말과 좋은 정치를 기록한 책이다.】  승지 김익희(金益熙)가 아뢰기를,
"엎드려 상의 하교를 받고 즉시 교서관으로 하여금 민간에서 찾아보도록 하였지만, 병화(兵火) 끝이라서 꼭 얻는다고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가만히 듣건대 경상도의 재 아래 약간의 고을이 유독 병화를 모면하여, 향교(鄕校)·서원(書院) 및 사대부 집에 평시의 서적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합니다. 도신에게 하유하여 널리 더 찾아서 얻는 대로 올려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4월 28일 정해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상중장(桑中章)과 순지분분장(鶉之奔奔章)을 강론하였다. 강론이 끝나자 참찬관 김익희가 아뢰기를,
"어제 《국조보감》을 간행하라는 하교가 있었는데, 이것은 바로 문종(文宗) 이상까지의 일입니다. 세조(世祖) 이하로 선조조(宣祖朝)까지의 사실은 민간에서 또한 수집한 것이 있으니, 이번에 인출할 때를 당하여 대신과 약간의 문사(文士)에게 명하여, 전부 계속해서 편찬하여 전서(全書)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대단히 옳다. 대신들에게 의논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 뒤에 대신들이 모두 좋다고 하니, 따랐다.

 

4월 29일 무자

오준(吳竣)을 형조 판서로, 오정원(吳挺垣)을 교리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정지방중장(定之方中章)을 강론하였다. 강론이 끝나자 참찬관 남로성(南老星)이 아뢰기를,
"지난날 《치평요람》을 찾아서 올리라는 하교가 있었는데, 신이 이 책을 보건대 기사(紀事)가 번잡하여 예람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만일 사기(史記)를 보고 싶으시다면 《자치강목(資治綱目)》만한 것이 없습니다. 《강목》은 바로 사기의 조종으로서 가장 열람하기에 적합한데, 하필이면 쓸데없는 책에 정신을 허비하려 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치평요람》은 바로 조종조에서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편성한 책이다. 이러므로 그것을 한번 보고 싶었을 뿐이다.
하였다.

 

4월 30일 기축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체동장(蝃蝀章)·상서장(相鼠章)·간모장(干旄章)을 강론하였다. 강론이 끝나자 동지경연 정유성(鄭維城)이 아뢰기를,
"신은 지금 종부시 제조의 직임을 맡고 있습니다. 조종조의 종학법(宗學法)은 지극히 엄격하여, 비록 왕자(王子)·대군(大君)일지라도 모두 머리를 숙이고 나아가 배우도록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연소한 종실(宗室)들이 게으름이 습관화하여, 한 사람도 와서 배우는 자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근일에 종실들이 자포 자기를 달게 여기어 불학 무식하고, 임금을 섬기고 어비이를 섬기는 도리에 있어서 전혀 어떤 일인지를 모르니, 참으로 한심스럽다. 유독 종실 뿐만이 아니라 부마(駙馬)도 역시 그러하니, 경이 모름지기 부지런히 가르쳐 달라."
하고, 상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인재가 절핍됨이 갈수록 더욱 심하다. 일찍이 선조(先朝)에 귀천군(龜川君)의 학식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 선왕께서 항상 의지하여 소중하게 여기셨으니, 이는 참으로 종실 중의 영재였다."
하니, 참찬관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귀천군의 학식이 남보다 뛰어나 혼조(昏朝)에서 절개를 세웠으니, 이 사람은 참으로 가상스럽습니다."
하였다. 【귀천군이 혼조에서 상소하여 적신(賊臣) 이이첨(李爾瞻)을 죄줄 것을 청하여 유배당하였다.】 유성이 아뢰기를,
"서울 유생(儒生)이 혹간 청금록(靑衿錄)에 기록되지 않은 자가 있고, 지방 유생도 역시 향교(鄕校)의 유적(儒籍)에 들어가지 않은 자가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이와 같은 유생들은 과거에 응시를 허락해 주지 마소서."
하니, 따랐다.

 

부호군 송시열이 상소하기를,
"신이 무모하게 위험스러운 정성을 진달하여 잘못된 은혜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는데, 이에 비유(批諭)를 받자오니 말뜻이 엄절하여 군신(君臣)의 분의(分義)로써 꾸짖으셨습니다. 신이 듣건대 자로(子路)가 삼태기를 멘 사람에게 이르기를 ‘벼슬하지 않는 것은 의리가 없는 것이니, 군신의 의리를 어찌 폐기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주 부자(朱夫子)가 그 말을 해석하기를 ‘벼슬하는 것은 군신의 의리를 행하는 것이니, 의리라고 이를진대 일의 옳고 그름과 몸의 떠나고 나아가는 것에 구차스럽게 할 수 없는 것이 자연히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신이 그 재분(才分)을 헤아리지 않고 용렬하고 어리석음을 고려하지도 않으며, 오직 명령을 받드는 것만 생각하여 바삐 달려가면서 말하기를 ‘나는 군신의 의리를 행할 뿐이다.’고 한다면, 그것은 벼슬자리를 탐내어 염치를 상실한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까. 벼슬할 만한데도 벼슬하지 않고 그칠 만한데도 그치지 않는 것이, 의리가 없음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주 부자가 일찍이 여기에 정성을 쓰지 않음이 없어 후세의 구차스럽게 봉록을 구하는 사람을 경계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초야에서 본분을 지키면서 평생을 마치는 사람이 꼭 분의가 없는 사람만은 아닐 것이며, 주 부자가 이른바 ‘이 몸과 마음을 가지고 티끌 같은 세상에 봉사하면 이것이 부처의 은혜를 받드는 것이라고 이름한다.’는 것도, 역시 혹 한 가지 방도일 것입니다. 전하께서 만일 분의(分義) 두 글자를 가지고 온 세상을 각박하게 조이시면, 나아가기는 어렵게 하고 물러나기는 쉽게 하는 사람이 전하의 조정에 나아갈 길이 없고, 오직 이끗을 보고 의리를 잊어버린 사람만이 발자취를 접속하여 이르게 될까 두렵습니다. 신은 이 때문에 몹시 두렵습니다."
하니, 후한 비답으로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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