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12권, 효종 5년 1654년 5월

싸라리리 2025. 12. 21.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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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경인

비변사가 아뢰기를,
"북쪽 지방의 인심이 이산되고 기계가 엉성함은 연신(筵臣) 홍명하(洪命夏)가 주달(奏達)한 것과 진실로 같습니다. 그런데 후춘(厚春) 부락은 날마다 점차 강성해지고 영고탑(寧古塔)은 우리 국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후일의 걱정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본도(本道)의 병사(兵使)로 하여금 군졸을 다독거리고 기계를 수리하며 누로(樓櫓)007)  를 수선하여 우뚝하게 침범하기 어려운 형세가 있도록 하시고, 또 북쪽 지방의 인재들을 수용(收用)하여 그들의 마음을 굳게 뭉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상이 주강(晝講)에 나아가 《시전》 재치장(載馳章)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지경연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날마다 경연을 열어 경의(經義)를 강구하시니 학문에 부지런히 애쓰는 뜻이 훌륭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신료(臣僚)를 나오게 하여 접견하는 것은 앞으로 그들의 말을 채용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는 실상을 보지 못하는 까닭에 조정 위에서 직언(直言)하는 풍조를 보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에게 품은 뜻이 있는가?"
하였다. 지원이 아뢰기를,
"지난번 말[言] 때문에 죄를 얻은 사람에게 모두 널리 탕감하는 은전(恩典)을 베풀면 누가 전하의 앞에서 충성하기를 원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들어주지 않았다. 지원이 또 아뢰기를,
"신이 북경(北京)에 사신으로 가서 저들의 형세를 엿보니 위망(危亡)의 조짐이 벌써 나타났습니다. 저들이 만일 관내(關內)를 잃게 되면 우리 나라의 걱정이 더욱 커질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상하가 마음과 힘을 뭉치면 나라는 그런대로 될 것이다. 옛날 구천(句踐)이 대부 종(大夫種)과 범려(范蠡)를 얻어서 오(吳)를 멸하는 전공(戰功)을 능히 이루었으니, 반드시 사람을 얻고 난 다음에 일을 성공시킬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상이 참찬관 김익희(金益熙)에게 이르기를,
"내가 송시열(宋時烈)을 발탁하여 승지로 삼았는데, 지금 그의 소(疏)를 보니 쾌(快)하지 않은 뜻이 있는 듯하다. 나의 비사(批辭)에 미진한 곳이 있어서 그러한가?"
하니, 익희가 아뢰기를,
"시열에게 어찌 그런 뜻이 있겠습니까. 지난해에 시세(時勢)를 헤아리지 않고 쉽게 나왔다가 낭패(狼狽)하여 돌아갔는데, 이 때문에 감히 다시 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강을 파하고 제사(諸司)의 윤대관(輪對官)을 소견(召見)하였다.

 

상이 석강에 나아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동지경연 이시해(李時楷)가 아뢰기를,
"신풍 부원군(新豊府院君) 장유(張維)가 세상에 살아 있을 때, 《계해반정록(癸亥反正錄)》을 지으려 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정사(靖社)에 관한 사실을 후세에 밝게 보여주지 못할까 걱정됩니다."
하니, 특진관 이시방(李時昉)이 아뢰기를,
"신의 아비가 집에 보관한 일기(日記)가 꽤나 상세한데, 장차(章箚)도 모두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가 한번 보고 싶다."
하고, 이어 시방에게 이르기를,
"강도(江都)는 보장(保障)이 되는 곳인데 양식이 부족하니 호조가 거두어들인 세공 미포(稅貢米布)의 적당량을 이송하여 뜻밖의 일에 대비하라."
하였다.

 

5월 2일 신묘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홍처량(洪處亮)을 승지로 삼았다.

 

상이 조강에 나아가 《시전》 기욱장(淇章澳)을 강하였다.

 

5월 3일 임진

강원도에 큰바람이 불었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고반장(考槃章)과 석인장(碩人章)을 강하였다.

 

5월 4일 계사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맹장(章氓)을 강하였다.

 

상이 석강에 나아가 《대학연의》를 강하였다.

 

전라도에 전염병이 크게 돌고, 제주에 기근이 들었다.

 

5월 6일 을미

정언황(丁彦璜)을 승지로, 권대운(權大運)을 헌납으로 삼았다.

 

5월 7일 병신

황해도에 바람이 불고 우박이 내렸다.

 

5월 8일 정유

함경도에 큰눈이 내렸다.

 

5월 10일 기해

황해도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5월 11일 경자

경기에 큰물이 졌다.

 

상이 조강에 나아가 《시전》 죽간(竹竽)·환란(芄蘭)·하광(河廣) 등의 장(章)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참찬관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신이 신천익(愼天翊)의 말을 듣건대, 호남의 온 도(道)에 전염병이 아주 심한데 연해(沿海)가 더욱 심하여 사망자가 연이어서 폐농(廢農)한 경우가 많다고 하니, 불쌍하고 측은합니다."
하니, 상이 승지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백성의 부모된 사람으로서 어떻게 차마 이 말을 듣겠는가. 모쪼록 나의 뜻을 본도의 방백(方伯)에게 유시해서 곡식을 내어 구휼토록 하라. 또 전염병에 걸린 집안의 전토(田土)는 필시 묵을 것이니 회생하더라도 어떻게 생활을 꾸리겠는가. 그들의 이웃과 족인(族人)으로 하여금 서로 돌보고 돕게 할 것은 물론 약품도 의사(醫司)로 하여금 내려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강을 파하고 제사(諸司)의 윤대관(輪對官)을 불러보았다. 사복시 정 심광수(沈光洙)에게 이르기를,
"품고 있는 생각이 있으면 숨김없이 모두 진술하라."
하니, 광수가 아뢰기를,
"이 무더운 계절을 당하여 날마다 경연에 나오시니 학문에 애쓰는 정성을 누군들 우러러보지 않겠습니까. 다만 말씀하시는 사이에 감정을 지나치게 드러내시는데 이는 성학(聖學)이 다 성취되지 못하여 그러한 듯합니다.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군자(君子)가 후중(厚重)하지 않으면 위엄스럽지 못한데, 그런 상태에서는 배워도 견고하지 못하다.’ 하였습니다. 성인(聖人)의 학문은 ‘주충신(主忠信)’으로써 근본을 삼으니, 증삼(曾參)의 삼성(三省)과 안자(顔子)의 사물(四勿)008)  이 학문의 종지(宗旨)가 됩니다. 무릇 학문하는 방법은 종지를 알지 못하면 온종일 아무리 애쓰더라도 끝내 실효가 없는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말한 것이 이와 같은데,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상이 석강에 나아가 《대학연의》를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상이 이르기를,
"내가 함경 감사의 장본(狀本)을 보니 정평(定平)·삼수(三水)에 연일 큰눈이 내렸다 한다. 3월에 내리는 눈도 이변이라고 할 것인데 더구나 4월이겠는가. 근일 북방 변경에 걱정스러운 조짐이 벌써 나타났는데, 재이(災異)가 이와 같으니 매우 우려스럽다."
하니, 지경연 정유성(鄭維城)이 아뢰기를,
"재이를 소멸시키는 방법은 오직 성상의 공구 수성(恐懼修省)이 어떠한지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5월 12일 신축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의 백혜(伯兮)·유호(有狐)·모과(木瓜) 등의 장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지경연 오준(吳竣)이 아뢰기를,
"근일 전옥(典獄)에 전염병이 크게 돌아 죄수들이 잇따라 병이 든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승지 홍처량(洪處亮)에게 이르기를,
"이런 더위를 당하여 갇힌 것도 불쌍한데 더구나 병까지 걸리다니 내가 더욱 가엾게 여긴다. 승지는 가서 죄수들을 검열하여 가벼운 죄인은 석방하라."
하였다.

 

5월 13일 임인

신천익(愼天翊)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5월 14일 계묘

충청도에 큰물이 졌다.

 

5월 16일 을사

이조 참의 신천익(愼天翊)이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이어 하교하였다.
"천익이 이런 심한 더위를 당하여 먼 곳에서 왔으니 얼마나 수고했을지 상상할 수 있다. 더구나 객지(客地)에서 생활하자면 넉넉하지 못한 걱정이 있을 것이니 특별히 식량과 땔감을 주도록 하라."

 

5월 19일 무신

이상진(李尙眞)을 지평으로 삼았다. 상진의 성품이 우직하여 때때로 규간(規諫)하니 상이 그리워하였다. 언젠가 연석(筵席)에서 하교하기를,
"내가 오랫동안 상진을 만나지 못하였다."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이 관직을 제수하였다.

 

5월 20일 기유

사은사(謝恩使) 구인후(具仁垕)와 부사(副使) 조계원(趙啓遠) 등이 청(淸)나라에서 돌아오니, 상이 소견(召見)하였다.

 

5월 21일 경술

김익희(金益熙)를 대사성으로 삼았다.

 

상이 조강에 나아가 《시전》의 서리(黍離) 군자우역(君子于役) 등의 장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영경연 김육(金堉)이 아뢰기를,
"장맛비가 크게 쏟아져 반드시 농사에 피해를 줄 것이니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승지 홍처량(洪處亮)에게 이르기를,
"장맛비로 재해를 입고 있는 상황이니, 지금이 어찌 하례를 받을 때인가. 탄일(誕日) 하례는 정지하는 것이 온당하다."
하였다. 강을 파하고 제사의 윤대관을 소견하였다.

 

충청도 천안군(天安郡)에 거주하는 백성의 아내가 한 태(胎)에 세 쌍둥이를 낳았는데, 본도로 하여금 전례에 따라 쌀을 주도록 하였다.

 

5월 24일 계축

태백(太白)이 낮에 나타났다.

 

이숙(李潚)009)  이 교동(喬桐)에서 병이 들자, 내의(內醫)를 보내 약을 싸가지고 가서 구료(救療)하게 하였다.

 

5월 25일 갑인

경상도 양산군(梁山郡)의 시냇물이 붉어졌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군자양양(君子陽陽)·양지수(揚之水) 등의 장을 강하였다.

 

장령 서정연(徐挺然)이 상소하기를,
"신이 전일 왕세자(王世子)의 조강(朝講)에 입시하여 삼가 보건대 옥같은 자질은 어려서 뚜렷하고 금성(金聲)을 일찍 떨쳤으니010)   실로 종사(宗社)의 복입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교도(敎導)하는 방법을 《소학(小學)》과 《효경(孝經)》에 근본하지 않으면 중선(衆善)의 으뜸과 백행(百行)의 근본이 세워지지 못하는 점이 있을 것입니다. 또 대인(大人)의 학문을 하면서 한 부의 《대학(大學)》에 밝지 못하면 역시 몸을 닦고 남을 다스리는 도리가 없어서 천성(千聖)의 묘법(妙法)과 군경(群經)의 종지(宗旨)를 깨우치지 못하는 바가 있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세자가 이미 《소학》을 읽었으니 그 다음은 《효경》을 읽고 또 그 다음은 《대학》을 읽어야 하는데, 도리어 《통감(通鑑)》으로 진강(進講)하는 도구를 삼고 있습니다. 대체로 《통감》이란 원래 고금의 흥망을 통하고 제왕의 잘잘못을 비춰보기에 넉넉하니 참으로 임금의 학문에 있어서 한 가지 공부는 됩니다. 그러나 신의 어리석은 견해로는 우리 세자의 덕성(德性)이 미처 굳게 정하여지지 못하였고 학문이 아직 정수(精粹)해지지 않았다고 여겨집니다. 이런 때에 《효경》을 익숙하게 강하여 간절히 묻고 가까운 것을 생각하는 학문에 급급히 힘쓰지 않고서 범연히 사서(史書)를 보아 점차 쓸데없는 물건에 팔리어 본마음을 잃는 해로움에 이르게 되면 신이 앞에서 말한바 세워지지 못하고 깨우치지 못한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니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송(宋)나라 신하 주희(朱熹)는 ‘공부는 하다가 끊어지기 쉽고, 의리(義理)011)  는 미루어 연구하기 어렵다.’ 하였고, 정이(程頣)도 사서(史書)를 통째로 외우는 것을 쓸데없는 것에 팔려 본마음을 잃는 일이라 하였습니다. 신의 이 말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전수한 바가 있는 것입니다."
하니, 세자의 사(師)와 부(傅)에게 의논하도록 하였다. 사와 부가 불가하다고 하니, 따랐다.

 

부호군 송시열(宋時烈)이 상소하기를,
"신이 발탁해 주신 은총을 잘못 입어 두 번 간절하게 진달드렸는데, 다행히 너그럽게 허락하는 성은(聖恩)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품질(品秩)만은 고쳐지지 않아 참람함이 전과 같으니, 삼가 바라건대 성상(聖上)께서는 모두 삭제하여 명기(名器)를 중하게 하소서. 신은 체직(遞職)을 허락받은 뒤에 즉시 이 간절한 심정을 말씀드렸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뒤따라 듣건대 신이 상소하여 성교(聖敎)를 수고롭게 하였는데 신이 성교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바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이 말을 들은 이후로 온통 떨리면서 몸둘 곳이 없었습니다.
다만 신이 앞의 상소에서 인용한 것은 모두 주자(朱子)가 말한 교훈들로서 그 뜻은 ‘신하가 명령을 듣고 달려가는 것은 참으로 직분(職分)이다. 그러나 자신의 자질과 분수를 헤아리지 않고 능력의 여부를 따져보지도 않은 채 오직 작록(爵祿)만을 탐내어 임금을 속이고 나라를 그르치게 되면, 분수와 의리를 지키던 것만 상하게 되기에 족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신하가 일단 사양할 것인지 받을 것인지를 살핀다면 비단 그 자신이 관직을 비우거나 함부로 나아가는 경계를 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임금도 인재가 아닌 사람을 잘못 임명하는 잘못을 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자가 힘써 대방을 두어 벼슬을 탐내어 임금을 저버리는 신하를 경계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말은 각각 해당되는 곳이 있으며 의미 내용은 경우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는 법인데, 신은 그 말이 있다는 것만 알았지 그 의미 내용에 대해서는 살필 줄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말이 생경(生硬)하게 되고 이치는 묻혀 버린 채 이름만 옛 가르침을 빌렸지 실상은 함부로 지어낸 결과가 되고 말았으니, 이에 신의 죄가 더욱 도망할 곳이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는 나의 정성과 예(禮)가 부족하여 그렇게 된 것이니 다시 누굴 탓하겠는가. 자급(資級)을 사양하는 것은 본디 그런 전례가 없으니 굳이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5월 26일 을묘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의 중곡유퇴(中谷有推)·토원(兔爰) 등의 장을 강하였다. 검토관 홍우원(洪宇遠)이 아뢰기를,
"‘내가 태어난 처음에는 그래도 무사했는데, 내가 태어난 이후에 이 온갖 걱정을 만났다.[我生之初 尙無爲 我生之後 逢此百罹]’고 한 것은 근심하고 탄식하는 말입니다. 주(周)나라의 선왕(先王)은 음악과 여색 및 재물 등에 대한 욕심이 없었으며 궁실(宮室)과 여마(輿馬)도 즐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라는 잘 다스려지고 백성은 편안했는데, 평왕(平王) 때에 이르러 정형(政刑)이 혼란해져서 백성들이 근심하고 원망하였습니다. 그래서 시인이 ‘죽지 않고서 이 온갖 걱정을 당하느니 죽어서 모르는 것이 낫겠다.’고 한 것입니다. 신의 견해로 오늘을 보면 국가는 치평(治平)하다고 이를 수 없고 백성은 안락하다고 이를 수 없습니다. 성상께서 정신을 가다듬고 뜻을 굳게 가지시어 반드시 나라의 근본을 굳건히 하는 것으로 급선무를 삼는다면 종사(宗社)와 신민(臣民)의 복(福)이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가납(嘉納)하였다. 강을 파하고, 이조 참의 신천익(愼天翊)을 소견(召見)하여 호남의 기근과 전염병에 대한 상황을 하문하니, 천익이 아뢰기를,
"거듭 기근이 든 나머지에 전염병이 또 크게 돌고 있는데, 온 도가 똑같으나 강진(康津)과 해남(海南) 등의 고을이 더욱 심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는 내가 실덕(失德)한 소치이다. 품은 생각이 있거든 숨김없이 모두 펼쳐서 나의 미치지 못한 점을 도우라."
하니, 천익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허물을 들으려 하는 그것이 바로 허물을 없게 하는 방법입니다."
하였다. 천익이 물러가자, 상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천익은 말을 번드르르하게 꾸미지 않으니, 이것이 가상하다."
하였다.

 

전남 감사 이만(李曼)이 치계(馳啓)하기를,
"도내의 인민들이 지금 극도로 굶주리는데 관청의 비축이 벌써 다하여 구휼할 방책이 없습니다. 강도미(江都米) 수천 여석을 꾸어주어 진구하소서."
하니, 상이 비국으로 하여금 의논하도록 하였다. 비국이 쌀 5천석을 보내자고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숫자는 매우 적으니 1만 석을 이송하라."
하였다.

 

5월 27일 병진

윤문거(尹文擧)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5월 29일 무오

황해도에 황충이 발생했다.

 

홍처대(洪處大)를 집의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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