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일 기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이조 판서 심지원(沈之源)을 우의정으로, 정유성(鄭維城)을 이조 판서로, 권대운(權大運)을 이조 정랑으로, 이원진(李元鎭)을 승지로, 이시해(李時楷)를 대사헌으로, 정지화(鄭知和)를 이조 참의로, 이후원(李厚源)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집의 홍처대(洪處大)가 인피(引避)하기를,
"홍우원(洪宇遠)의 상소 내용이 너무나 터무니 없어 그대로 두고 논하지 않는다면 의리가 밝혀지지 않고 시비도 결정되지 않을 것입니다. 옛날부터 흉한 역변이 어느 시대고 없었겠습니까마는 역적 조(趙)와 같이 흉악한 자는 없었습니다. 죄가 종사(宗社)와 관계되므로 이미 천토(天討)를 가하고 역적의 입에서 이름이 나온 자들을 가벼운 율에 따라 옮겨서 안치해 놓았으니, 성상께서 변에 대처한 방도와 생명을 보전해 준 의리가 모두 합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건이 끝난 뒤에 감히 ‘총희(寵姬)와 사랑하는 아들을 사형에 처하고, 유배시켰다.’는 말들을 글로 써서 마치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이 억울하게 죄를 받은 것처럼 하여 사람들의 귀를 혼란시키니 그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이징(李澂)과 이숙(李潚)을 기필코 보전해 주고자 하여 해도(海島)에 안치하고는 춥지나 않는지 굶주리지나 않는지 곡진히 보살폈으며, 병이라도 조금 있으면 의원을 파견한다 약을 보낸다 하시였으니 애호하신 방도가 지극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에 ‘하늘에 계신 선왕의 영혼이 저승에서 슬퍼서 가슴아파한다.’하고, 또 ‘오르내리는 선왕의 혼령이 상제(上帝)의 좌우에 계시어 하늘과 같으시니 상서롭지 못한 재앙을 내린 것이다.’고 하여 조금도 꺼림이 없이 드러내놓고 악평을 하였고 심지어는 진(秦)의 이세(二世)와 제(齊)의 명제(明帝)를 인용하여 비유하기까지 하였으니 더욱 조리가 없습니다. 이것을 외방에서 듣거나 후세에 전해진다면 어떻겠습니까. ‘말한 자는 죄주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이 임금에 관한 말이거나 궁중의 하례에 관계된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말에 조리가 없고 전혀 의리에 어두운 것은 분명히 밝혀 통렬히 배척하여 시비가 당대에 밝혀지고 공론이 후세에 정해지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말을 한 자는 죄주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해석하여 군부로 하여금 그릇되게 악명을 뒤집어 쓰게 하였는데도 조금도 애석해 하지 않으니 신은 삼가 이를 분개하게 여겼습니다.
신의 의견이 이러하였으므로 동료에게 간통(簡通)을 내어 논계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모두들 따르려 하지 않으니 이는 실로 동료들에게 가볍게 보인 소치입니다. 어찌 감히 체면 없이 그대로 있겠습니까. 신의 직을 갈아 주소서."
하고, 지평 이상진(李尙眞)이 인피하기를,
"어제 집의 홍처대가 간통을 띄워 홍우원을 죄 주도록 청하려 하기에 신은 구차하게 의견을 같이 할 수 없다는 뜻으로 대답해 보냈는데 이어서 그가 인피한 사연을 보고는 신은 삼가 괴이하게 여겼습니다. 저 우원이 상소에서 주장한 근본 뜻에 처음부터 끝까지 역적을 비호한 실정이 정말 조금이라도 있으면 그 죄는 참으로 용서하기 어려우니 지체없이 치죄를 청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말을 구성하는 문자 사이에서 구절을 쫓아 발췌하여서 죄안을 꾸며 만든다면 결코 성명한 시대의 아름다운 일이 아니니 어떻게 인심을 승복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고려하지 않고 기필코 철저히 다스리려고 하여 ‘임금으로 하여금 그릇되이 악명을 덮어 쓰게 하였는데도 조금도 애석해하지 않는다.’는 등의 말로 온 힘을 다하여 동료를 마구 욕하면서 자신은 충신이 되고 남은 죄에 빠트렸습니다. 그의 뜻이 비록 음흉하지만 성명께서 위에 계시니 많은 변명이 필요 없겠습니다. 그러나 이미 배척을 받았으니 감히 구차하게 그대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신의 직을 갈아 주소서."
하고, 장령 서정연(徐挺然)·조진석(趙晋錫), 대사간 민응협(閔應協), 사간 정기풍(鄭基豊), 정언 이경억(李慶億)·강호(姜鎬)가 모두 이일로 인피하니
"사직하지 말라."
고 답하였다. 처대 등이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리니 옥당이 【교리 이연년(李延年)이다.】 차자를 올리기를,
"자신이 대간으로 있으면서 말한 자에게 죄를 주라고 청하는 것은 너무나 말이 안 됩니다. 그리고 ‘악명’이라느니 ‘악평을 한다.’는 등의 말은 매우 심각한 문자이기는 하나 광망(狂妄)한 자는 죄를 주지 않는다고 성상의 하교에서 분명히 밝혔으니 논열(論列)하지 않으려고 한 뜻이 가상합니다. 집의 홍처대는 체차하고, 이상진·서정연·조진석·민응협·정기풍·이경억·강호는 출사케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청사(淸使)가 오는 이유를 모르겠는데 무엇 때문일까?"
하자, 여러 신하들이 모두들,
"저들의 사정은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으로는 필시 이경여(李敬輿)·이경석(李景奭)·조경(趙絅) 등을 조사하는 일일 것이다."
했는데, 얼마 안 되어 원접사(遠接使)가 계문하였는데 청나라 사신의 임무는 과연 상의 예측과 같았다.
북우후(北虞候) 변급(邊岌)이 청병(淸兵)과 함께 러시아[羅禪]를 격파하고 군사를 거느리고 영고탑(寧古塔)으로 귀환하였다.
왕세자가 시민당(時敏堂)에서 조강을 하였다.
7월 3일 경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변급이 외로운 군사를 거느리고 이역(異域)에 깊이 들어갔다가 군사들을 온전히 데리고 돌아왔으니 상이 없을 수 없습니다. 병조로 하여금 논상하게 하소서. 군인들은 거주지 고을로 하여금 호역(戶役)을 면제하게 하고 쌀과 베를 하사하게 하는 한편 호궤(犒饋)를 실시하여 위로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르고 특명으로 변급을 가자하였다.
7월 4일 신묘
양남(兩南)의 조운선(漕運船)이 바다 가운데서 침몰하여 많은 조군이 익사하였는데 구호하는 은전을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대사헌 이시해(李時楷)가 상소하기를,
"근일 홍우원의 상소로 대각의 논의가 비꼬이게 되었으니 신은 개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당초 홍우원이 소를 올린 뒤에 사람들이 전하는 몇 마디 말에 의아심과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다가 등본(謄本)을 본즉 전편의 논지가 모두 해괴하고 조리 없는 것들 뿐이라 사람의 말이 이 지경에까지 이를 줄은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예로부터 진언(進言)하는 방도가 한결같지 않아 멀리 둘러서 간하기도 하고, 가까운 비유를 들어 간하기도 하고, 혹 바른 말로 간하기도 하며, 풍간(風諫)하는 자도 있는데 모두 임금의 과실을 지적하거나 당시 정치의 잘못을 열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후세 사람들이 이를 칭찬하고, 역사에서 이를 아름답게 여겼습니다. 어찌 타당한 일을 도리어 잘못이라고 말하고, 전혀 그런 일이 없는데도 잘못을 덮어 씌우면서 방자하고 기탄없이 마치 죄를 들추듯이 하는 경우가 있었겠습니까?
원소(原疏)를 가지고 면밀히 그 본의를 따져 보면 앞과 뒤의 말이 서로 맞지 않아 횡설수설한 것이 도대체 괴상망측하여 요망한 소리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소의 내용 중에 이른바 ‘역적 조(趙)의 흉악한 반역 행위는 천지가 용서하지 않고 왕법이 용서하지 않아 이미 복주(伏誅)되었고, 두 아이를 해도에 안치한 것은 종묘사직의 행복이다.’고 했으니 이는 죄인이 정당한 벌을 받아 인심이 모두 기뻐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어 ‘역적 조는 선왕의 총희(寵姬)이고, 이징(李澂)과 이숙(李潚)은 선왕의 사랑하는 아들인데, 겨우 3년이 지나 선왕의 능침의 흙이 마르기도 전에 총희는 죽음을 당하고 사랑하는 아들은 유배되었다.’고 말했으니, 이것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원망이 있는 듯한 말입니다. 앞뒤의 말이 서로 모순이 되는 것이 흑백이 상반되는 정도 만이 아닙니다. 앞의 말대로라면 어찌 3년이니, 능침의 흙이니, 총희니, 사랑하는 자식이니 하는 등의 말을 문자로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뒤의 말대로라면 복주하고 안치되었으니 종묘사직의 다행이라는 등의 말을 하는 것은 부당한 것입니다. 그의 본 뜻은 사람들이 모두 기뻐한다는 것인지 불쌍해 하고 원통해 한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신은 실로 이를 괴이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총희라고 하는 것은 은(殷)나라의 달기(妲己)나 주(周)나라의 포사(褒似), 진 헌공(晋獻公)의 여희(驪姬)나 당 현종(唐玄宗)의 귀비(貴妃)같은 류의 지칭입니다. 역적 모의를 꾸민 일이 없더라도 이 총희 두 글자만 가지고서도 충분히 죽을 만합니다. 하물며 하(夏)나라의 걸왕(桀王)이나 주나라의 유왕(幽王), 헌공·명황(明皇) 등이 어떤 부류의 임금입니까? 감히 이 말로 선왕까지 범하였으니 이것 또한 심한 불경입니다. 능침의 흙이 마르지 않았다는 말은 이경업(李敬業)032) 이 무씨(武氏)033) 를 성토하는 격문(檄文)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말인데, 만약 죄를 묻는 거조가 아니라면 이러한 말들을 인용함은 부당함이 분명합니다. 신하된 자로서 어떻게 차마 이러한 발언을 한단 말입니까.
그 소에 또 이르기를, ‘이징과 이숙은 어리고 지식도 없어서 자기 어미의 모의를 필시 미리 알지 못했을 것이며 단지 그 어미의 죄로 인하여 연좌된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옥사를 다스리는 곡절을 전혀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숙은 비록 어렸지만 그 적당들이 한창 내외로 결탁하여 반역의 음모를 모의할 적에 누구의 명(命)이 나은가를 평해서 가려 세우려 했다는 말이 여러 역적의 공초에서 뒤섞여 나왔고, 징은 그 어미의 음모를 미리 알고 스스로 의대(衣帶)를 훔쳐 내오기까지 했으니 반역의 계략을 스스로 꾸민 것은 아니더라도 흉모를 저지른 단서는 그들 역시 참여해 알았습니다. 적당의 공술한 문안에 분명히 기재되어 있는데도 홍우원은 ‘실정을 가지고 말한다면 필시 몰랐을 것이다.’라고 한 것은 무엇을 근거로 이렇게까지 구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옥성(玉成) 등의 말은 실로 하나의 웃음거리도 되지 못합니다.
그 소에 또 말하기를, ‘하늘에 계신 선왕의 혼령이 슬퍼서 애통해 하실 것이며 하늘과 같으시니 재앙을 내리는 것이 이것 때문이 아니라고 기필할 수 없다.’는 말은 어찌 그리도 요망스럽습니까. 난역을 다스려 국가를 보전한 것은 실로 종묘사직의 경사로서 조종의 혼령이 하늘에서 밝게 살피시며 중외 신민들의 하례(賀禮)를 함께 하실 것인데 어찌 애통해 하며 재앙을 내릴 이치가 있겠습니까. 재변의 설을 애써 주장하여 위로 선왕의 혼령을 속이니 더욱 해괴합니다.
그 소에 또 말하기를, ‘진 이세(秦二世)는 열 두 공자(公子)를 죽였다가 끝내 망이궁(望夷宮)에서 살해되는 화를 면하지 못하였고, 제 명제(齊明帝)는 15∼16인의 왕들을 죽이고는 마침내 소도성(簫道成)에게 찬탈당하였다. 시기와 의심으로 많은 사람을 죽이고 끝내는 멸망을 재촉하였다.’고 했는데 여기까지 읽게 되면 모골이 송연해집니다.
국가가 불행하여 변란이 궁액(宮掖) 가운데서 나와 자점(自點)의 온 집안이 역모를 꾀하였고, 역적 조(趙)의 모녀가 흉모를 함께하여 안팎으로 결탁 화가 조석간에 임박하여 종묘 사직의 위기가 일촉즉발이었다가 다행이 발각되어 여러 흉적들이 법에 따라 복주되었습니다. 역적 조와 같은 경우는 역모의 죄상이 역적 중에서도 우두머리였으나 성명께서 오히려 불쌍히 여기시고 차마 법대로 적용하지 않으시다가, 조정 신하들이 반대하며 청하자 오랜 뒤에야 비로소 허락하셨으며 그것도 집에서 자진(自盡)하도록만 하시었습니다. 세룡(世龍)의 처는 제손으로 직접 흉측한 물건을 싸가지고 오는 등 저지른 역모가 많아 성상의 옥체를 해치려 했을 뿐만 아니라 자전까지도 범하려 했으니 법(法)으로 헤아려 볼 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죄인데도 전하께서는 특별히 동기를 사랑하는 인애를 미루어 홀로 온 나라 사람들의 공론을 어기면서까지 그의 목숨을 용서하여 가까운 고을에서 편안히 살게 하시었습니다. 이는 전하께서 은혜를 온전히 하시려는 생각이 지나쳐 법을 굽히신 것으로, 우애의 성대함과 곡진히 보호하신 본의가 지극하시어 전대 제왕(帝王)에게서는 볼 수 없던 일입니다.
이러한 악이 있는데도 오히려 목숨을 보전하였으니 하물며 골육 지친 중에 누가 죄없이 죽음을 당한 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우원은 천고에 없는 폭군이 죄없는 공자나 왕들을 마구 죽이다가 끝내는 시해을 당하고 나라를 잃은 자들을 증거로 인용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제왕의 골육과 친척이니 또한 슬프다.’라고 했는데, 이러한 말들을 신하로서는 차마 할 수도 들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실로 군부(君父)의 죄상을 기롱하는 것이 아니라면 관원으로서 이러한 말은 할 수 없는데 우원이 함부로 이런 말을 하였으니 또한 무슨 의도이겠습니까? 우원이 풍병이 들어 실성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찌 이런 말이 윤리나 도리에 어긋나는 줄을 모를 것이며, 또한 어찌 감히 이미 죽은 흉역을 위해 사리를 밝혀 따질 생각을 갖겠습니까. 그런데도 ‘죽음을 무릅쓴다.’고 했으니 이는 그의 의도가 새로운 기이한 의를 펴서 남이 말하지 못하는 일을 말함으로써 강직하다는 이름은 자신이 차지하고 악명은 상에게 돌리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말하는 자들로 하여금 실정은 버리고 그 의론만을 칭찬하고, 진실은 버리고 허명만을 드날려서 헛된 명예를 낚아 출세를 하고자하는 것으로 임금을 기롱하고 헐뜯는 행위가 되는 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마음 속으로 계획하고 행동으로 옮긴 그의 행위가 어찌 너무나도 가증스럽지 않습니까. 조리 없는 말과 요망한 생각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비록 곧바로 기롱하고 헐뜯었다는 죄목을 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시비는 분명히 밝혀 간사한 주장을 통박하고 조정에서 몰아 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우원이 올린 한 장의 요망한 상소는 임금을 기롱하고 헐뜯는 것에 관련되어 죄를 얻어 내쫓겼다는 것을 알게 한 뒤에야 올바른 논의가 시행되고 교활한 실정이 비로소 드러날 것입니다.
오늘날 이러한 발의를 하는 것은 참으로 그만 둘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대간들 사이에 의견이 서로 어긋나서 왜곡된 말을 주장하면서 공평하고 사리에 맞는 길을 버리고 사특하고 험한 길로 치달으면서 장황하게 기력을 다하여 다른 의견들을 내는데, 너무 과격하여 미안하다고도 하고 혹은 망발이라고도 하며, 혹은 말을 가려 쓰지 않았다고도 하고, 혹은 상도를 벗어난 지나친 말이기는 하나 무슨 해로울 것이 있느냐고도 하고, 혹은 거리낌없이 다 말했으니 다른 사람은 그렇게 못한다는 등 모두들 ‘말을 한 사람은 죄주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마치 상의 분부에 따라 진달한 말로서 그 논의가 더 할 수 없이 곧은 것인양 하니, 그들 마음으로는 과연 우원의 상소가 참으로 직언이라 여겨서인지 아니면 내심으로는 그의 잘못을 알면서도 짐짓 큰 소리를 쳐서 스스로 아름다운 이름을 차지할 수 있는 입장에 서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실로 그 점이 괴이합니다.
아, 지금 세상은 의리가 꽉 막히고, 시비가 전도되어 사람들은 주견이 없고, 선비들은 분명한 공론이 없습니다. 다투어 명예를 좇고 권세있는 자를 뒤따릅니다. 한 사람이 선창하면 뭇사람이 다투어 화답하는데 사리의 옳고 그름을 전혀 모르며 시비를 가릴 줄을 모르므로 차라리 임금에게 악명을 돌릴지언정 동류들과는 어긋나지 않으려 합니다. 습성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한심합니다.
그리고 이른바 ‘망발’이라고 하는 것은 말을 만들다가 한두 자 잘못 놓는 것을 말함이지, 어찌 한 편의 논지가 구절마다 놀라운 것을 가지고 망말이라고 핑계댈 수 있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또 이른바 ‘자취가 역적을 보호한 것과 관련이 있으니 실로 죄를 용서할 수 없다.’고 한 것은 더욱 가소로운 말입니다. 신하로서 참으로 역적을 보호할 의도가 있었다면 이것은 바로 역적입니다. 법은 지극히 엄하고 국가에는 일정한 형벌이 있는데, 그에 대한 논죄가 어찌 쫓아내는 벌만으로 그칠 뿐이겠습니까. 만약 흉악한 역적도 사리를 밝혀 따진 뒤에야 벌을 시행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밖의 작은 죄는 모두 논란할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우원의 소가 이와 같이 요망한데도 끝내 한 마디 흑백을 가리는 말이 없이 드러내 놓고 공격한 내용이 역사책에 기록되어 사람들의 입에 전파된다면, 필시 그 상소를 당시의 공론으로 여길 것이니, 모르겠습니다마는 아름다운 이름이 과연 성상께 돌아가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습속을 통탄스럽게 여기는 까닭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우원의 말에 대해 죄를 주어야 될 뿐만아니라 앞장서서 헛된 의논을 주창하여 구원하기를 힘써 주장한 이상진(李尙眞)·조진석(趙晋錫)·서정연(徐挺然) 등도 모두 죄를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옛날 선왕조 때에 공(珙)의 이름이 역적의 입에서 나와 공이 유배되었을 때 목성선(睦性善) 등이 구언(求言)하는 분부에 따라 소를 올려 구원했었는데, 삼사가 일시에 발론하여 죄를 주라고 청하기도 하고 소장을 불태우라고 청하기도 했습니다. 그 뒤에 강학년(姜鶴年)도 구언하는 부분에 따라 진언하였는데 ‘포악한 것으로 포악한 자를 대신했다.’는 설이 있자 양사가 번갈아 소를 올려 심지어는 형률을 적용하자고 청하기까지 했습니다. 그 당시 구언하는 날에는 ‘말하는 자에게 죄를 주지 않겠다.’는 하교가 있었고, 당시의 삼사에 있던 신하 또한 노성한 사람이 많았으되 ‘말한 자에게 죄주지 않는 것이다.’는 주장을 한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이는 실로 법은 지극히 중하고 공론은 더 없이 엄한 까닭인 것입니다. 어찌 소견이 지금 사람들만 못해서 그랬겠습니까. 그리고 당시 옥당의 처치를 보면 어찌 이다지도 거리낌이 없단 말입니까. 공론을 담당한 곳으로서 같은 입장이라는 혐의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힘써 정당한 논의를 저지하여 시비를 도치시키고 있는 오늘날 삼사의 의논은 어찌 이다지도 논거가 없단 말입니까.
신은 실로 이 논의가 한번 나아가면 뭇 비방이 따라 일어날 것을 압니다. 그러나 언관의 자리에 있는 몸으로 논의가 어긋나고 시비가 도착됨을 목격하고서 침묵을 지키면서 차마 성명을 저버릴 수 없기에 감히 구구한 견해를 진달합니다. 삼가 성명께서는 굽어살피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은 사양하지 말고, 속히 출사하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심하도다. 이시해(李時楷)가 사람을 공격함이여. 우원의 상소 내용이 역적 조의 원통함을 말하고 징과 숙을 구원하였다면 이 또한 역적의 무리이니, 혈기가 있는 사람이라면 엄숙하게 토죄할 것을 청하여 곧바로 역적을 감싸고 구원한 데 대한 형벌을 가해야 옳다. 그 죄가 어찌 기롱하고 헐뜯은 자에 대한 율이나 내쳐서 유배하는 벌에 그칠 뿐이겠는가. 우원의 본의는, 역적 조의 흉한 역모는 비록 천지간에 용납할 수 없고 왕법에 용서할 수 없는 것이지만 징과 숙은 당시 임금의 동기이고 어린 아이이니 만약 섬에서 어느날 갑자기 죽기라도 한다면 동기를 사랑하는 지극한 덕에 흠결이라도 될까 염려하였기 때문에 우리 임금의 변에 대처하는 도리가 지극히 훌륭한 경지에 이르게 하고자 해서였다. 그러나 다만 말이 망녕될 뿐이었다. 지금 시해는 본의는 따지지 않고 단지 글자만 들추어 내어 고사를 인용 비유하면서 구절마다 주해하였다. 심지어는 총희(寵姬) 등의 말까지 하면서 우원의 불경한 죄를 만들었으니 아, 심하다.
【태백산사고본】 13책 13권 2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680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왕실-종친(宗親) / 왕실-비빈(妃嬪) / 변란-정변(政變) / 역사-사학(史學)
[註 032] 이경업(李敬業) : 당 이적(李勣)의 손자.[註 033] 무씨(武氏) : 측천 무후(則天武后).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심하도다. 이시해(李時楷)가 사람을 공격함이여. 우원의 상소 내용이 역적 조의 원통함을 말하고 징과 숙을 구원하였다면 이 또한 역적의 무리이니, 혈기가 있는 사람이라면 엄숙하게 토죄할 것을 청하여 곧바로 역적을 감싸고 구원한 데 대한 형벌을 가해야 옳다. 그 죄가 어찌 기롱하고 헐뜯은 자에 대한 율이나 내쳐서 유배하는 벌에 그칠 뿐이겠는가. 우원의 본의는, 역적 조의 흉한 역모는 비록 천지간에 용납할 수 없고 왕법에 용서할 수 없는 것이지만 징과 숙은 당시 임금의 동기이고 어린 아이이니 만약 섬에서 어느날 갑자기 죽기라도 한다면 동기를 사랑하는 지극한 덕에 흠결이라도 될까 염려하였기 때문에 우리 임금의 변에 대처하는 도리가 지극히 훌륭한 경지에 이르게 하고자 해서였다. 그러나 다만 말이 망녕될 뿐이었다. 지금 시해는 본의는 따지지 않고 단지 글자만 들추어 내어 고사를 인용 비유하면서 구절마다 주해하였다. 심지어는 총희(寵姬) 등의 말까지 하면서 우원의 불경한 죄를 만들었으니 아, 심하다.
7월 5일 임진
남로성(南老星)·김진(金振)·김좌명(金佐明)을 승지로, 이만영(李晩榮)을 집의로, 정석(鄭晳)을 지평으로, 심유행(沈儒行)·오정원(吳挺垣)을 교리로 삼았다.
7월 6일 계사
지평 이상진(李尙眞), 장령 서정연(徐挺然)·조진석(趙晋錫), 대사간 민응협(閔應協), 사간 정기풍(鄭基豊), 정언 이경억(李慶億)·강호(姜鎬) 등이, 이시해의 상소 내용에 ‘부박한 논의를 앞장서서 주창하고 힘을 다해 신구(伸救)했다.’는 등의 말이 있음을 들어 모두 인혐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옥당이 다시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상진 등이 출사했다가 또 인피하니 헌부가 외람되게 소요스럽게 한다고 아울러 체직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7월 7일 갑오
황해 감사 김홍욱(金弘郁)이 상소하기를,
"신이 얼마 전 구언하는 교서를 보았는데 이어서 죄인을 심리하라는 하교를 내리니 전하께서 재변을 만나 반성하며 몸을 닦는 방도가 지극하다고 하겠습니다. 그 뒤에 조정 신하들이 잇달아 소를 올렸는데 그 내용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실제로 채택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한갓 형식적인 일로 돌아가 결국에는 죄수를 소결(疏決)하여 도년(徒年)의 죄인 몇명을 방면하였을 뿐입니다. 이렇게 하고서 하늘의 견책에 응하여 재변이 그치기를 기대한다면 또한 어림없습니다. 아, 재변의 발생이 어느 세상이고 없었겠습니까마는 오늘날처럼 심한 때는 없었습니다. 영남에서는 붉은 비가 오고 관동 지방에는 붉은 눈이 내려 이미 놀랍고 참혹하기가 그지없는데 금성(金星)이 도수(度數)를 벗어나 날마다 낮에 나타나 가뭄이 든 날에 태양과 밝기를 다툽니다. 그 이외에 갖가지 별의 이변과 사물의 변괴가 이루 셀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달에는 고금에 없이 경성에 큰물이 져서 물에 휩쓸려 죽은 도성 백성이 매우 많고 대궐 안에서 도랑물이 넘쳐 사람이 죽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더욱 경악스러운 일입니다. 또 수백리 밖은 홍수와 가뭄이 각각이어서 송도 서쪽의 황해도 지방은 가뭄이 극심하여 5 월 보름 이후로 비가 내리지 않아 모든 곡식이 다 타죽었고 초목은 누렇게 낙엽이 졌습니다. 농촌과 해변이 더욱 참혹하여 농민들이 울부짖으며 목숨이 거의 끊어지려 하는데, 이것은 다른 재변과 비할 바가 아니니 어찌 초미(焦眉)의 절박한 근심이 아니겠습니까. 참혹한 재변이 이와 같이 두려운데도 대응하는 방법은 매우 소홀하니, 비단 재변을 없애고 화기(和氣)를 불러올 수 없을 뿐만아니라 도리어 하늘이 흠향하지 않아 노여움만 돋우게 될까 두렵습니다. 옛날부터 비상한 재변을 만난 경우에는 비상한 조치를 반드시 취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가장 듣기 싫어하는 것이 어떤 일이며 국가의 큰 옥사로 의심스러울 만한 것이 무슨 일입니까? 만약 여기에 대해 생각지 않으시고 한갓 구구하고 자잘한 일에만 신경을 쓰신다면 신은 그점을 크게 민망히 여기는 바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강(姜)의 옥사가 가장 의심스러운 일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말하느냐 하면, 저주의 변이 경덕궁(慶德宮)으로 이어(移御)하였을 때 일어났는데 그 당시는 궁중 상하가 화락하고 편안하였으니 강(姜)이 무슨 원한이 있어서 그렇게 불측한 큰 역모를 했겠습니까. 만약 그때는 강의 짓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궁중에서의 저주가 어떤 일들이기에 아무나의 손에서 행해질 수 있는 것입니까. 신은 여기에 대해서 크게 의심을 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강이 심양(瀋陽)에 간 뒤라고 한다면 아무리 기세가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만리 밖에 있으면서 비복(婢僕)을 시켜 흉악한 일을 저질렀다는 것인데 그 기밀이 누설되지 않았을 리가 절대로 없습니다. 하물며 소현(昭顯)이 갑자기 서거한 뒤에는 명색은 금중(禁中)에 거처한다고 하나 역적 조(趙)에게 미움을 받아 별도의 처소에서 갇혀 있다시피 하면서 안팎이 차단당하여 방수(防守)가 매우 엄했으니 아무리 흉악한 짓을 하려고 했더라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저주가 이때 심했다고 하니 어찌 크게 의심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저승전(儲承殿)을 수리할 때에 저주하는 더러운 물건들이 더욱 많이 발굴되었는데, 이 또한 의심스러운 일입니다. 만약 전일에 묻어 둔 것이라고 한다면 소현이 졸하기 전에 어떻게 미리 예측하고서 흉악한 짓을 저질렀겠으며 졸한 뒤에 한 것이라고 한다면 얼마 안되어 곧 대계(大計)를 결정하여 세자의 자리가 정해 졌으니, 그의 세력은 더욱 외롭게 되어 궁중의 일개 과부에 불과했습니다. 비록 흉한 물건을 묻고자 한들 누가 그의 말을 듣고 따르겠습니까. 어선(御膳)에 독을 넣었다는 설에 있어서는 더욱 가깝지 않습니다. 그당시 역적 조의 세력이 후궁에 진동하여 날마다 초방(椒房)에서 모시었기 때문에 전후 좌우 모두가 역적 조가의 사람이었는데 그가 아무리 흉악하고 교묘하다고 해도 틈을 탈 수 없었을 것이니 이것이 또한 매우 의심스러운 점입니다. 기타 의심스러운 점을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역적 조는 안에서 날조하고, 역적 자점은 밖에서 조작해내어 견강 부회로 옥사를 일으켜 끝내는 사사(賜死)의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고 온 가문의 노소를 남김없이 주륙하였으니 아, 참혹합니다. 그리고 소현의 두 자식의 죽음도 모두가 자점이 빚어낸 것입니다. ‘청장(淸將)이 운운했다.’는 설은 처음에 정 역관(譯官)에게서 나오고, 다시 형장(馨長)의 입으로 전해진 것으로 은밀한 기밀이라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는 것인데도 자점이 연좌(緣坐)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또 후환을 막아야 한다고 하면서 외방에 멀리 유배시키기를 굳이 청했습니다. 나이 어린 연약한 아이들이 고생스레 방황하면서 서로 이끌고 한꺼번에 남쪽으로 옮겨 가게 되자 길에서 보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유배지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잇따라 죽게 되니 자점의 사주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설사 그 어미에게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나이어린 연약한 아이들은 애당초 몰랐을 것인데, 하물며 그 어미의 죄가 그다지 명백하지도 않는데 갑자기 유배의 유을 적용하여 끝내는 애매하게 죽게 만들어 구천(九泉)의 아래에서 영원히 원한을 품도록 만들었으니, 이를 듣고 사람이라면 누군들 불쌍해서 가슴아파하지 않겠습니까. 인조 대왕께서는 궁인을 엄하게 국문하여, 간호를 신중하게 하지 못한 죄를 다스리다가 곤장을 맞고 죽게까지 하였으니 또한 지극한 자애심을 볼 수 있으며 그들이 죄없이 죽은 것으로 의심됩니다.
아, 천리(天理)는 밝고 보응(報應)은 매우 신속하여 역적 자점과 조는 나란히 함께 주륙되었으나 강의 원통한 정상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는 이점에 대해서 모르시지 않으면서도 선왕조에 관련된 일이라는 것만으로 신하들을 위엄으로 제어하여 감히 말을 못하게 하시는데 신은 삼가 그렇지 않다고 여깁니다. 성인이 성인을 계승했어도 오히려 변경이 있었으니 요(堯)임금 시대의 사흉(四凶)을 순(舜)임금 때에 와서 처벌하였지만 승계(承繼)하는 의에 무슨 해 될 것이 있었습니까. 우리 나라에 와서도 중종조(中宗朝)의 간흉들이 여러 어진 이들을 기묘년에 죽이고 해쳤으되 명종 때에 와서 신원(伸冤)했으며, 명종조(明宗朝)에 권간(權奸)이 사림(士林)에 해를 덮어 씌우고 위훈(僞勳)에까지 책록되었지만 선조께서 즉위하신 초기에 여러 신하들이 청하여 훈적(勳籍)을 혁파하고 그 작위를 모두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해와 달의 광명에도 오히려 일식이나 월식으로 가리워질 수 있듯이 간흉이 가리운 환란을 아무리 성군이라도 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그 뒤를 이어받은 군왕이 시비를 분명히 밝혀 억울한 것을 씻어준다면 공업(功業)은 앞에 빛나고 명예는 후대에 드리워질 것이니 실로 계술(繼述)034) 하는 효도에 부합한 것입니다. 선정(先正)의 말씀에 ‘준수해야 할 것을 준수한 것이 계술하는 것이며, 변통해야 할 것을 변통하는 것 역시 계술하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아, 한 지어미가 품은 원한에도 3년간 가뭄이 들었었고 외로운 신하의 통곡에도 5 월달에 서리가 내렸습니다.035) 지금 강(姜)의 일문(一門)이 죽음을 당한 것은 단지 한 지어미의 원한이 맺힌 정도일 뿐만이 아니고 외로운 신하가 통곡한 것보다도 더 하니 화기(和氣)를 손상시켜 재앙을 불러 온 것이 괴이할 것도 없습니다. 지금 조정 신하 중에 누군들 이 옥사가 매우 원통하다는 사실을 모르겠습니까마는 입을 다물고 감히 분명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은 자기 몸을 아껴서 입니다. 대신은 전하의 팔다리이며, 대간은 전하의 이목이며, 옥당(玉堂)은 전하의 복심(腹心)인데 불충하게도 전하를 저버리고 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 나머지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지금 전하께서 대신과 삼사를 특별히 앞에다 불러 놓고 시험 삼아 신의 소를 하문해 보소서. 만약 신의 말이 망령되지 않다고 한다면 두루 의논하여 원한을 풀어주게 하시고, 신의 말이 망령된 것이라면 역적을 감싼 죄에 대한 형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그리고 그 어미의 억울함을 씻어 주고나면 세 아이들도 의당 방면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징(李澂)과 이숙(李潚)도 모두 어린 아이이니 그 어미가 흉모를 저지를 때 어찌 간여한 일이 있었겠습니까. 설사 간여한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실로 그 어미가 윽박지른 결과였을 것이니 그 정상이 용서할 만합니다. 그런데 해도(海島)에 유배된 지 이제 여러 해가 지났으니 국법은 이미 시행된 것입니다. 특별히 명하여 은사(恩赦)를 내려 서울로 방환시켜 한 곳에 두고 외부 인사와 접촉하지 못하게 하면서 가정을 갖게해서 일생을 마치게 한다면 어찌 성조(聖朝)의 관대한 은전이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숙은 그 당시 가장 어렸으니 더욱 불쌍한 점입니다. 오직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
신이 일찍이 서울에 있을 때 지극히 참람한 수재를 목격했었는데, 지금 또 서쪽 변방에 와서 극심한 가뭄을 보게 되니 실로 국가의 위태로운 화가 조석간에 박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심상한 폐단을 진달하는 소장으로는 성명(聖明)의 조서에 보답할 수 없고, 하늘의 노여움을 그치게 할 수 없기 때문에 감히 평소에 개탄하던 점을 천일(天日) 아래에 진달하여 성상께서 한 번 깨달으시기를 기대하옵니다."
하였는데, 소장이 들어가자 상이 진노하여 하교하기를,
"역적 강에 관한 일은 일찍이 전교가 있었으니, 그 당시의 내용을 정원은 고찰하여 아뢰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임진년036) 6월 대신들을 인견했을 때에 하교하시기를, ‘비록 여러 세대가 지난 뒤에라도 만약 역적 강의 말을 조정에 아뢰는 자가 있으면 역당(逆黨)으로 논죄하여 궐정(闕庭)에서 국문한다는 것을 각사(各司)에 분명히 하유하라.’ 하였습니다."
하니, 또 하교하기를,
"지금 김홍욱(金弘郁)의 상소 내용을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모골이 송연해진다. 임진년 전교에 따라 시행함이 마땅하다. 즉시 인사 맡은 관원을 불러 정사(政事)를 해서 서울에 있는 별다른 연고가 없는 사람을 차출, 홍욱을 대신하게 하고, 금부도사도 함께 내려 보내 홍욱을 잡아오도록 하라."
하였다. 홍욱의 소장을 의정부에 내려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모두 보게 하였다.
여이재(呂爾載)를 황해 감사로 삼았다.
7월 8일 을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헌부가 【집의 이만영(李晩榮), 지평 정석(鄭晳)이다.】 아뢰기를,
"경악(經幄)의 신하는 초야에서 구속없이 살고 있는 자와는 다르니, 임금에게 고하는 말도 십분 자세하고 신중하게 해서 곧바로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진달할 뿐입니다. 그런데 수찬 홍우원(洪宇遠)은 가까이 모시고 있는 신하로서 분부에 따라 소를 올리면서 말을 잘 선택하지 않았고 인용한 비유도 타당성을 잃어 말을 구성한 것이 잘못되었습니다. 비록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아뢴다고는 하지만 말을 할 때에는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체차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무릇 남의 소 내용을 볼 때는 그 전편의 주장을 보고서 시비를 따지는 것이 가합니다. 홍우원의 소 내용이 매우 잘못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주장을 따져 보면 단연코 다른 뜻은 없는데, 대사헌 이시해는 구절구절 주해하면서 고사를 비유로 끌어대며 문자간의 잘못을 꼬집어내어 저지른 죄 이상의 죄안을 만들었으니, 무슨 의도입니까. 시해는 식견있는 재신(宰臣)으로 그릇된 상소 한 장만을 가지고 여러 사람의 의견을 떨쳐버린 채 지나치게 말단만을 따짐을 면치 못하였으니, 또한 그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판중추 조익(趙翼)이 상소하기를,
"신은 들으니, 옛사람의 말에 ‘이유없이 저절로 이르는 재이(災異)는 없고, 재이가 발생하고서도 그에 상응하는 변(變)이 없는 적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이번 재이가 무슨 실책 때문에 초래된 것인지를 모르겠고 그에 상응하는 어떠한 변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체로 옛날부터 수재(水災)는 그것을 초래한 원인과 그에 상응하는 변에 대한 단서가 하나뿐만이 아니라서 신이 다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기억되는 것은 송(宋)나라 선화(宣和) 연간에 변경(汴京)에 대홍수가 나자 이강(李綱)이 ‘이것은 이적(夷狄)이 전쟁을 일으킬 조짐이니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며 상소하여 극언하였는데, 그 뒤 수년 만에 정강(靖康)의 화037) 가 있었습니다. 또 삼가 생각건대 지난 병자년 6월의 경성 대홍수는 모두들 전에 없던 일이라고 했는데 마침내 큰 환란이 있었습니다.
이번 수재는 모두들 병자년보다 심하다고들 하니, 이것이 오늘날 경성의 모든 사람들이 놀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 재변 만은 아무런 상응이 없으면 다행이겠습니다마는 만에 하나라도 전일과 같은 환란이 있게 된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를 생각하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이 철렁합니다. 전하께서도 필시 이점을 염려하시고 두려워 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여러 신하들의 진계(陳誡)에는 반드시 쓸만한 계책이 있을 것입니다마는 어리석은 신은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계책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다만 생각해보면 옛날 등문공(謄文公)이 맹자(孟子)에게 묻기를 ‘제(齊)나라가 설(薛) 땅에 성을 쌓으려 하는데 내가 매우 두렵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니, 맹자는 대답하기를, ‘임금께서 제나라 사람들을 어찌하겠습니까. 힘써 선을 행하실 따름입니다.’하였습니다. 그러니 위급한 시기를 당하여 환란을 방비하는 방도는 오직 선을 행하는 것이 가장 절실한 계책입니다. 또 삼가 생각해 보니, 이윤(伊尹)이 태갑(太甲)에게 고하기를 ‘오직 하느님은 일정하지 않으시어 선을 행하면 모든 상서를 내려 주고 선하지 않은 일을 하면 온갖 재앙을 내린다.’고 했는데, 이것은 하늘이 사람에 대해서 애당초 일정하게 사랑하거나 미워함이 없고 오직 하는 일이 선한가 선하지 않은가를 보고 복을 내리거나 재앙을 내린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늘을 섬기는 도리는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간절한 것은 없습니다.
대체로 선이란 사람의 본성이니 사람으로서 선하지 않다면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은 사람마다 누구나 당연히 해야되는 것입니다. 다만 보통 사람의 선행은 자기 자신을 선하게 하는데 그칠 따름이지만 임금인 경우에는 정치를 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도가 모두 선에 있으며, 국가의 안위와 사람들의 이합 집산이 바로 여기에서 결정되기 때문에 더욱 진력해야 함이 보통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비단 평상시 나라를 다스릴 때에 선을 기본으로 해야 될 뿐아니라 위급한 때에 부지하고 떨쳐 일어날 계책에 있어서도 오직 이것이 가장 절실한 일입니다.
그 주력하는 방법은, 이제038) 나 삼왕(三王)039) 의 군신(君臣)간에 논한 것이나 공자 맹자의 말씀으로 서책에 실려 있는 것들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을 하는 방법은 오직 성심을 쏟고 힘껏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제와 삼왕 및 공자와 맹자가 말한 것은 바로 최고 선의 이치로서, 후세 임금들의 사사로운 자기견해와는 그 크기의 대소에 있어서나 좋고 나쁨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임금이 진실로 이것을 깊이 살핀다면 자기의 사심을 따라서는 안 되고 성인의 교훈은 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의 위엄이나 환란이 생기는 것은 모두 인간사에 선하지 못한 점이 있기 때문에 초래된 것임을 깊이 생각하여 통절히 자기의 사심을 버리고 오직 옛날 성현의 말씀을 본받아 몸을 닦고 국사를 처리하며, 명령을 내릴 때 한결같이 성현의 말씀을 따른다면 나의 일신과 내외가 선하지 않는 것이 없어서 내 마음이 바로 옛 성인의 마음이요. 내 덕이 바로 옛 성인의 덕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하늘은 저절로 기뻐할 것이고 민심도 모두 감격하여 떠받들 것이니, 어떠한 환란인들 염려될 것이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누군들 선을 행함이 치도의 근본인 줄을 몰랐겠습니까마는, 그 마음을 높이 세우지 못해 사정(私情)을 위주로 하여 선을 따르지 못하고, 혹은 선과 배치되는 경우도 있어 하늘의 노여움을 사고, 백성들의 원망을 초래, 패망한 자가 비일비재하니 애석하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인후하신 성품을 천품으로 타고 나신데다, 경연 석상의 강의 내용이 모두 성현의 격언(格言)이고, 치도(治道)를 구하시는 정성이 더욱 돈독하시어 선을 행하는 공력이 의당 충분하실 것이니 어찌 다시 말할 만한 불선이 있겠습니까. 민생이 곤궁한 것을 보면, 신은 삼가 전하께서 정사에 임하여 일을 처리하실 때에 혹시라도 선을 다하지 못한 것이 있고, 사심이 혹 다 제거되지 않은 것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염려됩니다.
옛날 송 효종(宋孝宗)은 오래도록 가뭄이 들자 재계하고 비를 빌었는데, 하루 저녁 만에 감응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유공(劉珙)이 아뢰기를, ‘폐하의 정성에 하늘이 감격하여 그 감응이 이와 같으니 하늘과 사람이 서로 접할 때에 참으로 털끝만큼도 어긋남이 없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은미한 가운데서의 사소한 실수에 대한 감응도 이러하지 않겠습니까?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이를 살피시어 더욱 혼자 계실 때를 삼가소서.’하였습니다. 《시경》에 이른바 ‘저 높이 위에 있다고 하지 말라’라고 한 것도 이런 뜻입니다. 그런즉 임금의 선과 불선은 하늘이 모두 지켜 보는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만약 깊숙한 곳에서 어떤 생각이 떠오를 때에 혹 사심에 이끌리어 도리에 부합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이 생각은 선하지 않은 것이며, 만약 일을 처리할 때에 그 행위가 혹시라도 사심에 이끌리어 도리에 부합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이 행위는 선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여기에 안주하여 고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늘의 뜻을 어기고도 재앙을 불러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은 것은 임금이 해 될 것이 없으니 안주할 만하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은 해로움이 있다고 여겨 견책을 보이는 것이니 견책을 보이는데도 고치지 않으면 환란과 패망이 따르게 됩니다. 임금이 지성으로 선을 행한다면 미처 선하지 못한 부분을 모두 살펴서 고칠 수 있을 것이니 자연 하늘의 뜻에 부합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은 하늘을 섬기는 도리는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절실한 것이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진실로 선을 위주로 하고 한결같이 옛날의 교훈을 본받아, 마음을 다스리고 일을 처리할 때에 혹시라도 사심에 이끌리어 도리에 부합되지 않는 것이 없지나 않은가 살펴서 모두 고쳐 순리를 따른다면, 은미할 때나 드러날 때나 겉이나 속이 한결같이 모두 선하여 선하지 않은 것은 털끝만큼도 섞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고서 하늘을 기쁘게 하고 인심을 복종시키지 못하는 경우는 없었으며 하늘이 기뻐하고 백성들이 심복하는데도 패망에 이르는 자는 역시 없었습니다.
신은 또 삼가 생각하건대 요(堯) 순(舜)이 십이목(十二牧)에게 ‘덕 있는 이를 후대하고 인후한 사람을 신임하라.’ 하였고, 대우(大禹)에 대한 대답에 ‘초야에 버려진 현인이 없게 하라.’ 하였으며, 고요모(皋陶謨)에는 이르기를 ‘의논하는 일이 고명하고 보필이 어울린다.’ 하였고, 부열(傅說)이 고종(高宗)에게 ‘널리 어진이를 초빙하라.’고 하였습니다. 정치를 잘 하는 방도는 임금이 자신의 몸을 닦는 이외에 어진이를 등용하는 것보다 먼저 할일이 없습니다. 예로부터 제왕이 어진이를 등용하지 않고서 치도를 이룰 수 있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대개, 어진 사람이 조정에 모이면 위로는 임금의 덕을 보필하게 되고 아래로는 모든 정사를 밝게 할 수 있어 조정이 밝아지고 백성들에게 살 곳을 얻게 하여, 전도되고 위태로운 것을 부지(扶持)하고, 잠복하고 있는 간사한 싹을 사라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나라가 나라답게 되려면 오직 어진이의 힘을 빌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옛날의 성왕들은 모두 어진이를 구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으니 이것이 임금의 직무로서 당연한 것이고, 또 선을 행하는 한 가지 일입니다. 임금이 참으로 몸가짐과 일 처리를 한결같이 선을 근본으로 하고 또 당대의 어진 선비와 군자들을 등용하여 조정에 모두 모이게 해 군신 상하가 한 마음이 되어 협력하면 나라를 다스리고 천변에 대응함에 있어서 안 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일시적으로 환란을 막는 길일 뿐만이 아니라 실로 위로는 먼 옛날과 견주어 더 훌륭한 정치를 할 수 있고, 아래로는 후손들에게 복을 물려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선을 실천하는 말들은 실로 경전에서 늘 이야기하는 것들로서 이렇게 재변이 극심하여 인심이 위태롭고 국사가 조석간을 보존할 수 없을 것 같은 시기에 기이한 계책은 진달하지 않고 단지 선을 실천하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진달하니 실로 오활하여 절실하지 않은 것 같으나 어리석은 신으로서는 기이한 계책을 내기에는 실로 지혜나 사려가 미치지 못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신은 오랫 동안 초야에 묻혀 있어서 세상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잘못 되었고, 무슨 계책이 시행할 만한지를 모릅니다. 또 삼가 헤아려 보건대 지금 위로 하늘의 재변에 대응하고 아래로 인심을 수습하는 뛰어난 선을 행하라는 한 마디 말보다 더 절실한 것은 없습니다. 비록 장량(張良)과 진평(陳平) 같은 깊은 계책으로도 아마 이 보다 더 낫지 못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신이 어리석다 하여 가벼이 여기지 마시고, 진실로 이것을 반복해서 깊이 살피신다면, 절실한 것이지 오활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소장 내에 경계하고 깨우친 말들은 모두가 곧고 바른 말이니 마음속에 깊이 새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은 모름지기 어려운 국사를 생각하여 이 서늘한 가을에 속히 올라와서 나의 뜻에 부응하라."
하였다.
7월 9일 병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7월 10일 정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7월 12일 기해
오준(吳竣)을 대사헌으로, 유경창(柳慶昌)을 대사간으로, 이진(李𥘼)을 사간으로, 유준창(柳俊昌)·이제형(李齊衡)을 장령으로, 남중회(南重晦)를 지평으로, 박세성(朴世城)·권격(權格)을 정언으로 삼았다.
7월 13일 경자
상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김홍욱(金弘郁)을 친국하였다. 상이 추관(推官)에게 이르기를,
"그 소장에 있는 말들을 초록(抄錄)해 와서 심문하라."
하였다. 홍욱이 공초하기를,
"삼가 전에 없던 재변을 만나 성상께서 직접 내리신 구언(求言)의 하교를 보니 말씀이 간절하여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거기에 ‘모든 일을 숨김없이 다 말하라. 말이 비록 거칠거나 참람하더라도 나는 죄를 주지 않을 것이다.’하셨으므로 어리석은 소견에 ‘이러한 때를 당하여 품고 있는 생각이 있는데도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는다면 신하된 자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때문에 평소에 의심스럽게 여겼던 바를 성상께 진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임진년의 하교는 그 당시 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그 대강만 들었을 뿐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했었는데 소장을 올리고 난 며칠 후 원접사(遠接使) 정유성(鄭維城)을 만나고서야 그 당시의 하교가 매우 엄했으며, 지금까지도 각사(各司)에는 벽에 써서 붙여 놓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말을 듣고서 황공하였으나 이미 어쩔 수 없었습니다.
대개 항간에 전하는 말들은 의심스러운 점이 있었기 때문에 뜬 소문에 동요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후 역적 조(趙)와 김자점(金自點)이 역모를 꾸민 뒤에는 의혹스러운 마음이 더욱 심하여져서 이렇게 진소(陳疏)하기에까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궁중에서 흉모(兇謀)를 저지른 일은 외부 사람으로서는 자세히 알 수 없는 일이라, 이 때문에 소장안에서 말을 만들 때도 의심스럽다는 글자를 사용하여 진달했던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성난 목소리로 이르기를,
"어찌하여 속히 형신(刑訊)을 가하지 않는가."
하니, 영의정 김육(金堉), 좌의정 이시백(李時白), 우의정 심지원(沈之源) 등이 아뢰기를,
"홍욱의 소장 내용이 조리가 없어 비록 괴이하기는 하나 만약 곧바로 역률(逆律)로 논하게 되면 신들은 삼가 성상의 덕에 손상이 될까 염려됩니다."
하자, 상이 노하여 이르기를,
"대신들이 이와 같이 신구(伸救)하는데 그 의도가 형신하고 싶지 않아서인가? 후세에 비록 악명이 있더라도 내가 책임질 것인데 경들에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였다. 능천 부원군(綾川府院君) 구인후(具仁垕)가 아뢰기를,
"신이 어찌 홍욱을 추호인들 구원할 생각이 있겠습니까. 홍욱이 만약 역적 강(姜)과 공모했는데 신이 신구하려 한다면 신은 의당 역적을 비호한 죄를 받겠습니다."
하니, 상이 노하여 이르기를,
"경은 병을 칭탁하고 들어가더니 오늘은 홍욱을 구원하려고 왔는가? 어찌 속히 물러가지 않는가."
하자, 인후가 드디어 나갔다. 대사간 유경창(柳慶昌)이 아뢰기를,
"대신이 아뢴 것은 홍욱을 위해서가 아니라, 군부를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엄한 분부를 내리시어 심하게 꺾으시니, 신은 삼가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간흉의 무리가 국가를 시험하려고 군부와 대신을 속박하니 이런 무리들에게 죄를 주지 않는다면 내가 임금 노릇을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경창이 아뢰기를,
"홍욱이 어찌 감히 역적 강을 구원하겠으며, 대신 또한 어찌 감히 홍욱을 구호하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화평한 마음으로 헤아리소서."
하였다. 대사헌 오준(吳竣)은 감히 한 마디도 입밖에 내지 못했다. 상이 판의금(判義禁) 원두표를 꾸짖으며 이르기를,
"판의금은 어찌하여 편안히 앉아 엄형을 가하도록 명하지 않는가."
하였다. 홍욱이 곤장을 견디지 못하여 대신과 삼사를 부르면서, 부르짖기를,
"어찌하여 말하지 않는가. 어찌하여 말하지 않는가. 옛날부터 말한 자를 죽이고도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었습니까? 신은 용방(龍逄)이 비간(比干)040) 과 더불어 지하에서 함께 놀겠습니다. 내가 죽거든 내 눈은 빼내어 도성 문에 걸어 두면 국가가 망해 가는 것을 보겠습니다."
하고, 또 부르짖기를,
"유경창은 어찌하여 소매를 당기며 간쟁하지 않는가."
하였다. 연달아 세 차례 형신(刑訊)한 뒤에 우선 파하라고 명하고, 하교하기를,
"양사의 관원이 많은데 죄인이 대사간만 부르면서 구호해 달라고 하니 매우 해괴하다. 대사간 유경창을 체차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홍욱을 잡아온 도사 이이형(李以馨)은 지체하였으니 역시 형신하라."
하였다.
제주(濟州)에 큰 바람이 불고 비가 왔다.
7월 14일 신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목행선(睦行善)을 대사간으로, 남선(南銑)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대신 및 금부의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궐정에서 김홍욱을 국문하라 하였다. 사간 이진(李𥘼)이 국청(鞫廳)에서 헌부와 더불어 이이형을 형신하라는 명을 거두기를 청하려고 하자 대사헌 오준(吳竣)은 머뭇거리면서 어렵게 여겼다. 대청(臺廳)에 이르러 승지 이행진(李行進)이 비답을 전하고 이어 오준에게 말하기를,
"상이 노여움이 한창 대단하시니 연계(連啓)할 수 없다."
하자, 오준이 말하기를,
"나는 본래 한번 아뢰고 즉시 정지하려 한다. 영공(令公)이 부디 이러한 뜻을 사간에게 말하라."
하였는데, 이는 이진이 정계하자는 논의를 따르지 않을까 두려워해서였다. 오준은 과연 그날로 정계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전일 홍우원(洪宇遠)의 일로 양사가 인피했는데, 조진석(趙晋錫)만은 한집안 이라는 혐의를 피하지 않고 장황한 말로 혼자 담당하였다. 태연하게 전혀 거리낌이 없었으니 어찌 이런 도리가 있는가. 삭탈 관작하고 문외 출송하여 그의 방자한 버릇을 징계하라.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은 바로 진석의 사촌 매부이기 때문에 이런 하교가 있었다.】 능천 부원군(綾川府院君) 구인후(具仁垕)는 역당을 구원하는 행동을 제일 먼저 했는데, 대신의 신분으로서 하는 짓이 이러하였으니, 파직시키라. 교리 이연년(李延年)은 전일 양사를 처치할 때에 이미 한 집안이라는 혐의가 있었으니 마땅히 상소하여 스스로 논열(論列)했어야 했는데도 사심에 급급하여 공의(公義)를 돌아보지 않고 자기의 속셈대로 했으니 지극히 해괴하다. 파직시키라. 【우원은 바로 연년의 집안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태백산사고본】 13책 13권 9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684면
【분류】사법-탄핵(彈劾) / 변란-정변(政變)
ⓒ 한국고전번역원
7월 15일 임인
좌의정 이시백(李時白), 우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예궐하여 아뢰기를,
"김홍욱(金弘郁)의 소가 구언(求言)하는 때에 나왔는데 형륙(刑戮)을 면할 수 없게 된다면 원근에서 듣기에 어찌 성상의 덕에 손상이 없겠습니까. 임금을 사랑하는 구구한 정성을 그만 둘 수 없어 친국하시던 날 감히 소견을 진달하였습니다. 장황한 말로 성상의 귀를 시끄럽게 한 것은 신들이 구인후보다 심했었는데, 특별히 파면시키라는 명이 구인후에게만 미쳤으니 신들이 아무리 염치가 없다고 한들 어찌 감히 그것을 영화롭게 여겨 뻔뻔스런 얼굴로 대신의 반열에 서겠습니까. 신 등의 직을 삭탈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들은 안심하고 대죄하지 말라."
하였다.
상이 서교(西郊)에 행행(行幸)하여 청사(淸使)를 영접하려고 하면서 영의정 김육(金堉), 좌의정 이시백(李時白), 우의정 심지원(沈之源), 병조 판서 원두표, 호조 판서 이시방(李時昉), 이조 참판 홍명하(洪命夏) 등을 소견(召見)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 경들과 함께 홍욱의 일을 의논하려고 하는데 나를 그르다고 한다면 내 스스로 책임을 지겠다. 경들은 생각을 다 말하라."
하니, 김육 등이 대답하기를,
"홍욱의 죄는 실로 용서할 수 없으나 분부에 응하여 진언한 것이기 때문에 적용 율문(律文)을 완화했으면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들은 훌륭하다는 명예는 자신들이 얻고 악명은 나에게 돌리려 하는데 이 참으로 무슨 마음인가. 홍우원의 소 중에 있는 ‘능침(陵寢) 위의 흙이 마르기도 전에’라는 등의 말은 실로 자식된 자로서 차마 듣지 못할 말이니 나에게 어찌 뼈가 부러지는 듯한 고통이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죄를 주지 않은 것은 분부에 응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홍욱의 소를 어찌 우원에 비교할 수 있는가. 우원을 언관이기 때문에 죄를 주지 않은 것이고, 홍욱은 앞서의 전교(傳敎)에 근거하여 죄를 준 것일 뿐이다. 이이형(李以馨) 역시 죄를 주지 않을 수 없다. 도중에 지체하면서 홍욱으로 하여금 자기 동류들과 통지하여 멋대로 모의하게 했기 때문에 유경창(柳慶昌)을 불러 구원해주기를 요구한 것이다. 법으로 말한다면 경창도 형신(刑訊)을 해야 마땅하다."
하였다. 지원이 아뢰기를,
"홍욱은 경창만을 부르지 않았고 신도 불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을 부른 것은 그 의도가 대개 대신이란 중한 지위를 빌리기 위해서였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물러가자 하교하기를,
"문사 낭관(問事郞官) 이상일(李尙逸)도 체차하라."
하였는데, 국문할 때에 홍욱이 그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이다.
7월 16일 계묘
전에 상이 남천택(南天澤)을 지평에 특별히 제수했는데, 천택이 소를 올려 사직하면서 간원이 논박하려고 하다가 중지했다고 하였다. 하교하기를,
"천택을 논박하려고 했던 간관이 누구인지 자진해서 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대사간 민응협(閔應協)이 "헌납 서필원(徐必遠)이 실제로 이 논의를 주장하였다."고 정원에 간통(簡通)하니, 정원이 아뢰자, 하교하기를,
"서필원이 천택을 논박하려고 하였으니 이는 임금으로 하여금 관직 제수를 못하게 한 것이다. 그의 임금을 무시한 부도한 죄는 옛날의 권간(權奸)과 다를 것이 없으니 즉시 잡아다 심문하여 죄를 주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 임금의 노여움이 갈수록 더하여 엄한 분부가 계속 내리니 조정 신하들이 감히 그 시비를 말하지 못하고, 정원이 겨우 두어구절의 문자로 합당한 율문을 실시하도록 청하니, 답하기를,
"나는 합당한 율문을 모르니 정원이 조율하여 아뢰라."
하였기 때문에 승지들이 황송하고 두려워서 감히 다시 말을 못하였다.
상이 삼공·육경·양사 장관 및 금부 당상을 거느리고 남별궁(南別宮)에 행행(行幸)하여 청사(淸使)와 함께 이경여(李敬輿) 등 세 신하의 죄를 조사하였다. 청사가 말하기를,
"이경여·이경석(李景奭)·조경(趙絅) 등은 죄를 주어 폐고(廢錮)시켜 수용하지 말라고 했는데, 본국의 자문(咨文)에 ‘형장(馨長)과 정명수(鄭命守)가 꾸몄다.’고 하여 마치 아무 죄도 없이 무함을 당했다는 것처럼 하였기 때문에 황제가 특별히 대신을 파견하여 조사하게 하시었습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세 신하가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명수도 중간에서 헐뜯었기 때문에 자문 속에 언급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대사(大赦)를 여러 번 거쳤기 때문에 어리석은 소견에 그렇게 청한 것입니다."
하니, 청사가 말하기를,
"경여는 강남(江南)과 교통했으니 본조를 거역한 죄이며, 조경은 표류해 온 한인(漢人)을 왜국으로 놓아 보낸 죄이며, 경석은 이러한 죄명을 모두 스스로 도맡았으니 어찌 감히 다시 수용하겠다고 청합니까."
하였는데, 상과 여러 신하들이 힘을 다해 구원했으나 청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7월 17일 갑진
대신과 금부의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김홍욱(金弘郁)을 궐정에서 다시 국문하니, 홍욱이 곤장을 맞다가 죽었다. 당초 홍욱은 항상 강씨(姜氏)의 옥사를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고 하여, 평소 다른 사람을 만나면 문득 이것을 이야기했다. 또 그 의심스러운 단서를 소장을 올려 그 원통함을 풀어 주려고 한 지 오래였는데 이때에 와서 분부에 따라 진언했다가 마침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니 듣고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상이 하교하였다.
"보덕(輔德) 이상일(李尙逸)은 곧 홍욱이 제말로 절친한 자라고 하였으니 어찌 청반(淸班)에 그대로 두어 조정을 더렵혀서 되겠는가. 속히 파면시키라. 홍욱이 이미 죽었으나 그의 직을 삭탈하고, 그의 자제 및 그와 가까운 친속들은 대대로 조정 반열에 서지 못하게 하라."
7월 18일 을사
이시해(李時楷)를 대사간으로, 심세정(沈世鼎)을 사간으로, 홍처대(洪處大)를 집의로, 성초객(成楚客)을 헌납으로, 심황(沈榥)을 지평으로, 한진(韓縝)을 정언으로, 채충원(蔡忠元)을 교리로 삼았다.
7월 19일 병오
이준구(李俊耉)를 정언으로, 김수항(金壽恒)을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7월 21일 무신
일본이 사신을 보내어 등롱(燈籠)의 주조(鑄造)를 요청하고. 또 일광산(日光山)의 명(銘)을 청하니 대제학 채유후(蔡𥙿後)에게 명하여 그 명을 짓게 하고, 판서 오준(吳竣)에게 명하여 써서 보내게 하였다.
상이 청사(淸使)에게 인정전(仁政殿)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7월 22일 기유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하였다. 심세정(沈世鼎)·이수인(李壽仁)을 교리로 삼았다.
7월 23일 경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성하명(成夏明)을 사간으로, 이정영(李正英)을 응교로, 목겸선(睦兼善)을 수찬으로 삼았다.
7월 24일 신해
헌부가 【대사헌 오준, 집의 홍처대, 장령 이제형, 지평 심황이다.】 아뢰기를,
"홍우원의 소는 내용이 패만(悖慢)하고 인용한 비유도 조리가 없는 줄은 실로 온 나라 사람이 다 아는 바이며, 성명께서도 통촉하신 바이니 다시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둔다면 실로 시비가 분명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7월 25일 임자
지평 남중회(南重晦)가 인피하기를,
"어제 본부(本府)에서 회좌(會坐)할 때 신은 휴가로 집에 있었는데 동료들이 간통(簡通)을 보냈으나 신이 보지 못하다가 져녁에 저보(邸報)를 보고서야 홍우원의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우원의 상소 내용이 비록 지극히 광망하나 진언한 자를 죄주지 않겠다는 성상의 하교가 분명했었는데 갑자기 사판에서 삭제하기를 청하는 것은 신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신의 잘못된 견해가 많은 동료 관원과 다른데 어찌 감히 그대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을 체직하소서."
하자, 대사헌 오준(吳竣) 등이 중회가 이견을 세웠다고 해서 역시 피혐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중회 등이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7월 26일 계축
채충원(蔡忠元)을 헌납으로 삼았다.
7월 27일 갑인
옥당이 【응교 이정영(李正英), 교리 심세정(沈世鼎), 수찬 신혼(申混)이다.】 차자를 올리기를,
"홍우원의 상소 내용이 매우 거칠고 망령되기는 하지만 진언한 자를 죄주지 않겠다는 성상의 하교가 분명하고, 더구나 그 당시 간통(簡通)을 하여 피혐하기도 하고, 혹은 소를 올려 논열(論列)하기도 하여 더이상 미진한 점이 없이 변명하고 통척(痛斥)하여 조정의 시비가 분명해졌는데도 이제 다시 제기하여 기필코 죄를 주고야 말려는 것은 실로 성대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지평 남중회는 출사시키고, 대사헌 오준, 집의 홍처대, 장령 이제형, 지평 심황은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아, 사정(私情)이 횡행하고 의리가 막혀 시비가 전도되고 사람들은 주견이 없다. 이처럼 알기 쉬운 일도 오히려 분변하지 못하니 매우 애석하다. 지금 이 차자를 보니 나도 모르게 한심한 생각이 들어 부득불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간통을 하여 피혐하기도 하고 혹은 소를 올려 논열하고, 더 이상 미진한 점이 없이 변명하고 통척하였다.’고 했는데, 어찌 이토록 방자하고 나오는 대로 말을 하여 이렇게 광패(狂悖)하단 말인가. 간통을 하고 피혐한 자는 홍처대인데 말이 나오자마자 배척을 당해 낭패스러워 물러갔고, 소를 올려 논열한 자는 이시해(李時楷)인데 아침에 소를 올리자 저녁에는 뭇사람들이 떠들어 대면서 너무 심각하다고 배척하기도 하고 아첨한다고 기롱하는 등 탄핵하는 상소에 이름이 오르고 뭇 질시가 집중되어 위축된 채 물러가 감히 머리를 들지 못하니, 이러한 것으로 말하자면 악당을 지어 임금을 무시하는 짓이라고 하더라도 틀린 말이라고 하지 못할 것이다. 어찌 이토록 지나치게 속인단 말인가. 한(漢)나라 때의 법으로 논한다면 옥당의 사람들은 저자에서 처형당하는 벌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이러하고서도 공론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우선 모두 체직시키고 즉시 그 대체할 인물을 차출해서 다시 처치하여 시비를 밝히도록 하라.
이미 군신 관계는 부자 사이와 같다고 했는데, 지금 어떤 사람이 자기 부친이 억울함을 당했을 경우, 그의 자식된 자는 철저히 분별하여 부친의 억울함을 풀어주어야겠는가. 아니면 버려두고 따지지 않으면서 ‘이는 우리 부친께서 노여워할 일이 아니니 남들의 말에 마음쓸 필요가 없다.’고 말만 해야 하겠는가. 만약 후인들이 오늘의 역사기록을 보면서 ‘그 당시 누가 논변하다가 배척을 받았으니 일의 시비는 이로써 알 수가 있다.’고 한다면 장차 어떻게 스스로 해명할 것인가. 내가 비록 홍우원을 죄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신하된 사람으로서는 결코 이것을 구실로 삼을 수는 없을 것이다. 대개 요즈음의 일을 보건대 당초 한두 사람이 고집하여 마음을 돌리지 않고 전전하면서 서로 격렬해져서 마치 이기기 좋아하는 이들처럼 하니 이 역시 이상하지 않는가. 남중회(南重晦)는 남이 한 말들을 주워모아 명예를 살려고, 이런 괴상망측한 행동을 하였다. 한 때의 논의가 전도되는 것은 그다지 걱정할 것이 없다 하더라도 그러한 폐해가 후세에 관계가 있으리란 우려때문에 내가 굳이 많은 말을 한 것이다."
하였다. 이에 정원이 정관(政官)을 패초(牌招)하여 정사(政事)를 하였다. 신천익(愼天翊)을 부제학으로, 남용익(南龍翼)을 수찬으로 삼았는데 천익 등이 예궐하여 사은할 때는 밤이 이미 4고(鼓)를 칠 때였다. 마침내 상차하기를,
"홍우원(洪宇遠)의 상소 내용은 비단 거칠고 망측할 뿐만 아니라 인용하여 비유한 것이 조리가 없으니 헌부가 죄를 논하는 것도 불가할 것이 없는데, 이론을 세워 소란을 피운 것이 실로 의혹을 일으키게 된 원인입니다. 오준·홍처대·이제형·심황을 출사시키고, 남중회(南重晦)는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사신은 논한다. 신천익은 일찍부터 중한 명망을 얻었으나 물러나 벼슬을 하지 않았으므로 온 세상이 칭찬하였는데, 이제 엄한 분부에 겁을 먹고 명을 받고는 허겁지겁 달려와 감히 한 마디도 시비를 다투지 못하고 단독으로 처치하니 아첨하였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였다. 애석하기 그지없다.
【태백산사고본】 13책 13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685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역사-사학(史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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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신천익은 일찍부터 중한 명망을 얻었으나 물러나 벼슬을 하지 않았으므로 온 세상이 칭찬하였는데, 이제 엄한 분부에 겁을 먹고 명을 받고는 허겁지겁 달려와 감히 한 마디도 시비를 다투지 못하고 단독으로 처치하니 아첨하였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였다. 애석하기 그지없다.
7월 28일 을묘
이진(李𥘼)을 사간으로, 임선백(任善伯)을 장령으로, 남천택(南天澤)을 지평으로, 목래선(睦來善)을 정언으로 삼고, 전 지평 남중회(南重晦)를 정의 현감(旌義縣監)에 특별히 제수하였다.
7월 29일 병진
청사(淸使)가 돌아가니 상이 서교(西郊)에 행행(行幸)하여 전송하였다.
의금부가 전 헌납 서필원(徐必遠)을 【이때 필원은 충홍도(忠洪道) 은진현(恩津縣)에 있었기 때문에 지금에야 수금한 것이다.】 잡아다 가두었다. 공초(供招)하기를,
"신이 일찍이 외람되게 간관의 직에 있을 적에 남천택(南天澤)을 특별히 지평에 제수하는 명을 듣고 논계할 생각을 했습니다. 이는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언젠가 들으니 성묘조(成廟朝)에 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字) 구종직(丘從直)이 《춘추(春秋)》에 능통하므로 옥당에 특별히 제수하자, 대신(臺臣)이 간쟁하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마침 이번의 일과 서로 부합되었으므로 신은 본원(本院)에 회좌(會坐)했을 때 관례에 따라 논계해야 한다는 뜻을 말했습니다. 그 말이 원의석(圓議席)에까지 전달되자 장관 민응협(閔應協) 역시 구종직의 일을 인용하면서 ‘상이 간택하여 특별히 제수한 전례가 있고, 또 그 사람됨이 실로 청반(淸班)에 합당하다.’고 하므로, 신은 굳이 고집할 생각이 없어졌고 또 동료의 말을 믿고 곧바로 정지했습니다."
하였다. 전 대사간 민응협을 명초하여 필원의 공초 내용을 보여주면서 묻기를,
"필원이 과연 다른 뜻이 없었는가. 사실대로 대답하라."
하니, 응협이 대답하기를,
"필원이 천택을 논박하려고 한 그간의 내용은 이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니, 파직만 시키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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