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13권, 효종 5년 1654년 8월

싸라리리 2025. 12. 22.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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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무오

채유후(蔡𥙿後)를 대사헌으로, 목행선(睦行善)을 대사간으로, 성태구(成台耉)를 집의로, 정인경(鄭麟卿)을 장령으로, 김우석(金禹錫)을 지평으로, 이경휘(李慶徽)를 교리로 삼고, 전 응교 이정영(李正英)을 가산 현감(嘉山縣監)에, 전 수찬 신혼(申混)을 안주 교수(安州敎授)에 특별히 제수하였는데, 양사를 처치할 때 남중회(南重晦)를 출사시키고 홍처대(洪處大)를 체직시키라고 했기 때문에 좌천시킨 것이다.

 

8월 2일 기미

경상도 경주부(慶州府)의 바닷물이 붉어져서 바다 고기가 많이 죽었다. 황해도에 큰 바람이 불고 우박이 내렸다.

 

8월 3일 경신

성초객(成楚客)을 장령으로, 심황(沈榥)을 정언으로 삼았다.

 

문안사(問安使) 인평대군(麟坪大君) 이요(李㴭)와 서장관 심세정(沈世鼎)이 심양(瀋陽)에 갔다. 청나라 황제가 심양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의주(義州)의 압록강(鴨綠江) 물이 끓는 물처럼 뜨거워서 고기와 자라가 모두 죽었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안흥(安興)에 이미 진(鎭)을 설치했는데 어떻게 군량을 비축해야 되겠는가?"
하니, 판윤(判尹) 이완(李浣)이 대답하기를,
"통영(統營) 관할의 양곡이 삼남(三南) 연해 지방의 각 고을에 많이 있는데, 수량이 20여만 곡(斛)이나 됩니다. 이것을 옮겨 비축하면 편리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모두 좋다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먼저 3만여 곡을 안흥 부근 고을에 옮겨 두라."
하였다.

 

8월 4일 신유

양사가 【대사헌 채유후, 장령 유도삼, 지평 김우석, 대사간 목행선, 헌납 채충원, 정언 이준구·심황이다.】 홍우원을 삭탈 관작하여 문외 출송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8월 8일 을축

이행진(李行進)을 우윤(右尹)으로 특별히 제수하였다. 행진은 홍우원의 죄를 앞장서서 거론하고 얼마 되지 않아 발탁되니 당시 의논들이 기롱하였다. 조형(趙珩)·남로성(南老星)·김진(金振)·김좌명(金佐明)을 승지로 삼고, 홍처대를 사간으로, 이진(李𥘼)을 교리로 삼았다.

 

8월 9일 병인

병조 판서 원두표가 여러번 사직을 청하고 출사하지 않다가 상이 위로하여 타이르자 나왔다. 즉시 불러 접견하고 이르기를,
"지금 한 사람도 나라 일을 자기 책임으로 여기는 자가 없어 나는 나라의 모든 일을 경에게 맡기려 하니 경은 모름지기 임금에게 근심이 있으면 신하에게도 굴욕이 된다는 의리를 생각하여 한결같이 심력을 다하라."
하니, 두표가 사례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이러하시니 신은 오직 몸과 정성을 다 바치겠습니다마는 세도(世道)가 경박해져서 시속에 꺼림을 당할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비로소 경상도에서 속오군 급보법(束伍軍給保法)을 시행하였다. 이는 본도 감사 권우(權堣)의 계청으로 병조 판서 원두표가 의논을 주장한 것이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홍처후(洪處厚)가 치계하였다.
"청사(淸使) 세 사람이 조서를 반포하기 위하여 나온다고 합니다."

 

8월 10일 정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평안도에 바람이 불고 우박이 쏟아졌다.

 

남선(南銑)을 지경연(知經筵)으로, 김익희(金益熙)를 동지경연으로, 안후직(安後稷)을 정언으로, 조귀석(趙龜錫)을 교리로, 신천익(愼天翊)을 부제학으로, 민광훈(閔光勳)을 승지로, 김광욱(金光煜)을 동지정사(冬至正使)의 정사로 남로성(南老星)을 부사로 남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의 장중자(將仲子)장을 강하였다.

 

고 유신(儒臣) 기대승(奇大升)의 서원에 사액(賜額)하였다.

 

8월 15일 임신

영의정 김육(金堉)이 정고(呈告)하여 여러 차례 사직하니 윤허하였다.

 

8월 16일 계유

김육을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로, 이재(李梓)를 교리로, 홍무적(洪茂績)을 우참찬으로 삼았다.

 

8월 17일 갑술

상이 인경궁(仁慶宮)에 행행하여 초수(椒水)로 목욕하였다.

 

8월 19일 병자

금성(金星)과 토성(土星)이 겹쳤다.

 

간원이 아뢰기를,
"한림 주서는 곧 참하관(參下官) 중에서 엄선하는 자리이니 몸가짐과 일처리가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대교(待敎) 이지익(李之翼)은 근밀한 자리에 있는 신분으로 술에 취하여 주서 김징(金澄)에게 욕설을 하였는데 말이 패악스럽고 천박하여 보고 듣는 이가 모두 경악하였습니다. 김징이 남에게 욕을 먹은 것은 비록 자신의 과실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가 평소의 몸가짐을 삼가지 못했기 때문에 남의 말을 듣게 된 것입니다. 모두 다 그대로 청반(淸班)에 있게 할 수는 없으니 이지익은 파직시키고 김징은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8월 20일 정축

상이 장릉(章陵)을 배알하려고 했는데 청사가 또 오게 되니, 비국에서 능 참배를 물려 거행할 것을 청하자, 상이 하교하기를,
"능침을 배알하는 일은 부모를 추모하는 비감(悲感)을 펴고자하는 자손의 지극한 정성인 것이다. 지난 봄에 능침을 배알하는 것이 실로 인정으로 보나 예문으로 보아 합당한 것이었다. 그런데 조정 신하들이 한갓 자신들의 편안함만 계산하여 불가하다고 힘껏 주장하므로 나도 여러 사람들의 뜻을 어기고 싶지 않아 우선 정지하였었다. 그런데 객사(客使)가 오니 또 실행하지를 못하고 지극한 정성을 펼 수가 없게 되었다. 자기들 편한 대로 하는 조정 신하들의 습성이 매우 밉다. 그때의 대관을 조사하여 추고하라."
하니, 간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들으니 성상의 하교에 대관을 조사해 추고하라는 명이 계셨다고 하는데, 신들은 삼가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대신(臺臣)들이 능침 배알을 정지하시라고 청한 것은 그 당시 형편으로 인한 것일 뿐입니다. 어찌 어가를 수행하는 수고를 꺼려 중대한 의식을 중지하도록 청하였겠습니까. 조사해 추고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8월 24일 신사

이준구(李俊耉)와 하진(河溍)을 장령으로, 심택(沈澤)을 승지로 삼았다.

 

부제학 신천익(愼天翊)이 상소하기를,
"신이 성상께서 즉위하신 초기에 ‘정심(正心)’ 두 글자를 가지고서 진달하였고, 그 뒤에 탑전(榻前)에서 또 전일의 의견을 진달했으며, 다시 이번 여름 가까이에서 모실 기회를 얻어 성상께서 천재(天災)와 시변(時變)에 걱정하시는 것을 보고 신이 지성으로 성찰하시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임금이 진실로 하나의 ‘정(正)’자에 정성을 쏟아 정으로 마음을 삼는다면 대소 신료들이 모두 바르게 될 것이니 일반 정무가 각기 바르게 되는 것은 다시 더 말할 것이 없게 됩니다. 지극한 정성은 간단됨이 없는 것이라는 일념을 언제나 중화(中和)에 쏟으면 소리도 조화롭고 기운도 조화되어, 일마다 사물마다 모두 조화롭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중화를 이룬 성인의 지극한 덕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더욱 힘쓰소서.
그리고 생각하건대 임금의 국량(局量)이 원대하고 지기(志氣)가 크면 비록 시작이 훌륭하여 국가가 조금 안정되더라도 함부로 방종하는 우환이 있기도 합니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이점에 유념하소서. 그리고 지금 당장 급한 일은 오직 백성을 안정시켜 나라의 근본을 든든하게 하는 일이며 그 방책은 서적에 실려 있으나 이것 역시 상하가 각기 정성을 다하는 데 달려있습니다. 신은 구구한 정성을 참을 수 없어 감히 이렇게 진달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계하고 깨우쳐 주는 말이 모두 지론(至論)이니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앞서 조정에서 이지형(李之馨)의 소에 따라 북로(北路)의 요충지에 성지(城池)를 쌓도록 명하였는데, 이때 와서 본도 감사 이응시(李應蓍)가 성진보(城津堡)에 성을 쌓을 것을 청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북로에 해마다 흉년이 들어 경솔히 백성들을 동원할 수 없으니 풍년이 들기를 기다렸다가 형세를 보아 아뢰어 조처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하교하기를,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 어느 때에 무슨 변이 일어날지 모르니 이 일을 절대로 범연히 보아 넘기지 말고 감사로 하여금 미리 계획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당시 조정에서 또, 전남 감사로 하여금 입암(笠岩)·금성(金城) 및 격포(格浦) 등지에 성을 수축하도록 명하였는데, 감사 이만(李曼)이 치계하여 세 곳의 형세를 자세하게 진달하였다. 그리고 기계를 비치하고 성첩(城堞)을 지킬 군졸들을 미리 정하는 등의 편의에 대해 말하고, 또 격포에는 우선 성을 쌓지 말고 만약 위급한 상황이 있을 경우 본도 감사가 위도(蝟島)로 들어가 강도(江都)를 성원할 수 있도록 할 것을 청하니 비국으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였는데, 비국이 그 말을 따를 것을 청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도신으로 하여금 편의에 따라 계획하여 금년에는 한 성을 완성하고 명년에 또 한 성을 완성하도록 하라."
하였다.

 

8월 25일 임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양사(兩司)가 다시 전계(前啓)를 아뢰면서 홍우원(洪宇遠)을 삭탈 관작하여 문외 출송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우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우원을 죄주지 않는 것이 비록 훌륭한 덕이기는 하지만 옥당은 일반 관원들과는 다릅니다. 논의가 한창 일고 있는데도 직명(職名)을 그대로 두고 있으니 일의 체모에 있어서 지극히 미안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체직시키라."
하였다.

 

8월 26일 계미

문안사(問安使) 인평대군(麟坪大君) 이요(李㴭)와 서장관 심세정(沈世鼎)이 평양(平壤)에 도착했다가 청(淸)나라 황제가 심양(瀋陽) 행차를 중지했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돌아왔다.

 

8월 27일 갑신

상이 하교하였다.
"전 부원군 구인후(具仁垕)를 서용하라."

 

8월 28일 을유

조익(趙翼)을 영중추부사로, 김육(金堉)을 영돈녕부사로, 구인후를 능천 부원군(綾川府院君)으로, 홍무적(洪茂績)을 대사헌으로, 남로성(南老星)을 이조 참의로, 박승휴(朴承休)를 헌납으로, 남용익(南龍翼)을 교리로, 이후산(李後山)을 충홍 감사(忠洪監司)로, 남두병(南斗柄)을 통제사(統制使)로, 구의준(具義俊)을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로, 이일상(李一相)을 정조 부사(正朝副使)로, 심세정을 서장관으로 삼았다.

 

전 장령 조진석(趙晋錫)이 병으로 죽으니 그의 관작을 복구하도록 명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詩傳)》 숙우전(叔于田) 장을 강하였다.

 

8월 29일 병술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청인(淸人)장과 고구(羔裘)장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상이 특진관(特進官) 홍명하(洪命夏)에게 이르기를,
"홍우원의 일을 양사가 굳이 고집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내가 죄주려 했다면 어찌 처음에 죄를 주지 않고, 이미 죄줄 수 없다는 뜻을 하교하고 나서 죄를 주겠는가."
하니, 명하가 대답하기를,
"이미 성상의 하교를 받들었는데 감히 생각한 바를 감추겠습니까. 홍우원의 망언을 누군들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혹자는 이 소장으로 인하여 악명이 성상께 돌아간다고 합니다마는 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일찍이 반정(反正) 초기에 강학년(姜鶴年)이 인성군(仁城君)을 구원하면서 심지어 포악으로 포악을 대신하였다는 말까지 하였으나 선왕의 성덕에 무슨 손상이 있었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밖의 사람이 내 본의를 깨닫지 못할까 염려해서이다."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옛날 상(象)이 항상 순(舜)을 죽이려고 하였지만 순임금이 천자가 된 뒤에 그를 유비(有庳) 땅에 봉한 일이 있었는데 지금 성상께서 변에 대처하신 도리는 대순(大舜)과 다를 것이 없으니 어찌 우원의 망언을 가지고서 후세에 시비를 전도시킬 리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홍욱(金弘郁)의 상소 내용을 가지고 본다면 시대가 바뀌고 세상이 변한 뒤에 어떻게 시비를 알 수 있겠는가. 우원의 논의같은 것은 아랫사람으로서는 당연히 엄하게 배척해야겠지만 죄를 주고 주지 않는 것은 위에 있는 사람의 소관이다."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역적 조(趙)의 옥사는 분명하여 의심할 것이 없는데, 우원이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신구(伸救)할 마음이 있었다면 죽어도 죄가 남을 것이니 지금 대간의 논의도 가벼운 편입니다. 우원의 소가 망녕된 점은 있으나 그 본심이야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르고 내릴 때 상서롭지 못하다는 등의 말을 보니 그의 의도를 헤아리기 어렵다. 그리고 이시해(李時楷)의 소를 모든 사람들이 공격하는데, 세간의 논의가 어찌 한 가지만 가지고 시비를 결정하겠는가."
하자, 명하가 아뢰기를,
"시해의 상소 중에 있는 ‘군부(君父)를 기롱하고 헐뜯었다.’는 등의 말은 너무 지나칩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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