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13권, 효종 5년 1654년 9월

싸라리리 2025. 12. 22.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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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일 무자

곽지흠(郭之欽)을 장령으로, 오정원(吳挺垣)을 수찬으로 삼았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대사간 목행선(睦行善)이 홍우원(洪宇遠)을 삭탈 관작하여 문외 출송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원을 죄주지 않는다는 뜻을 저번에 이미 연신(筵臣)들에게 말했는데, 그대들이 달이 넘도록 논집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렇게 올바르지 못한 태도를 나는 보고싶지 않다. 오늘날의 조신들은 모두가 깊은 사려들이 없다고 생각한다. 지난번에 연신 또한 ‘우원의 소가 성덕에 아무런 손상됨이 없다.’고 했으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선왕(先王)께서 난세를 평정하여 세상을 바로잡은 일은 더할 수 없이 광명정대한데도 정두원(鄭斗源)이 연경(燕京)에 갔을 때 《명사(明史)》를 보니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 있었고, 우리 태조(太祖)께서 개국(開國)하신 일은 천리(天理)나 인정에 순응(順應)한 것으로 명분이 바르고 말이 자연스러운데도 《명사》에서 또 이루 상상할 수 없는 말을 가하여 종계(宗系)를 개정함에 미쳐서야 비로소 거짓이 판별되었다.041)   옛날부터 어찌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었는가. 대체로 역사 기록은 세상이 바뀐 뒤에 나오는 것이니 후일의 시비를 어찌 예측할 수 있겠는가.
이시해(李時楷)의 상소가 비록 지나치기는 하나 그 죄가 분명히 우원과는 다르다. 그런데 일전에 이만영(李晩榮)·정석(鄭晳) 등이 우원의 체직을 청하면서 시해도 아울러 거론하여 논박하였으니 어찌 이와 같은 공론이 있는가. 내가 아직 만영 등을 죄주지 않는 것은 우선 홍우원에 대한 결말을 기다렸던 것이다. 이제 우원을 죄주지 않는다는 뜻을 이미 다 말했으니 만영과 정석을 모두 멀리 정배하고, 서정연(徐挺然)은 사람됨이 그다지 책망할 것까지 없으니 파직만 시키라. 이상진(李尙眞)의 죄는 조진석(趙晋錫)과 같은데 그가 전일 진언(盡言)한 것을 가상히 여겨 현임만 체직시킨다."
하였다. 목행선이 황공하여 땀을 흘리며 어쩔 줄 몰라 하고, 대신 이하도 감히 한 마디 말도 꺼내지 못하였다.

 

9월 4일 경인

의금부가 이만영을 명천(明川)으로, 정석을 영산(靈山)으로 유배하니, 상이 명하여 삼수(三水)와 갑산(甲山)으로 고쳤다.

 

헌부가 아뢰기를,
"이만영 등의 당초 행위는 분명 정당함을 잃었으니 특별히 견책을 내림은 실로 시비를 정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겠습니다마는 그 실정을 따져 보면 실로 별 다른 의도는 없었는데 유배까지 시킨 것은 실로 너무 과중합니다. 먼 곳으로 유배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상이 주강(晝講)에 나아가 《시전》의 준대로(遵大路)·여왈계명(女曰鷄鳴)장을 강하였다.

 

9월 5일 신묘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조익(趙翼)이 광주(廣州)에 있으면서 상소하여 치사(致仕)를 청했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9월 6일 임진

구인후(具仁垕)를 좌의정으로, 이시백(李時白)을 영의정으로 올리고, 홍무적(洪茂績)을 우참찬으로, 홍위(洪葳)를 수찬으로, 채유후(蔡𥙿後)를 대사헌으로 삼았다.

 

9월 7일 계사

영의정 이시백이 상소하여 영의정을 면직하여 주기를 청하니 상이 위로하여 타이르고 윤허하지 않았다.

 

9월 8일 갑오

좌의정 구인후가 상소하여 좌의정을 면직하여 주기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9월 9일 을미

정지화(鄭知和)를 대사간으로, 임선백(任善伯)을 장령으로 삼았다.

 

9월 10일 병신

권격(權格)을 지평으로 삼았다.

 

전남도(全南道)에 큰 기근이 들어 도신(道臣)이 치계하여 노인직(老人職)의 직첩(職帖)으로 곡식을 사들여 진휼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9월 11일 정유

상이 서교(西郊)에 행행하여 청사(淸使)를 맞이하고 인정전(仁政殿)에서 접견하였다.

 

영의정 이시백, 좌의정 구인후, 우의정 심지원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전하께서 변에 대처하시는 도리는 지극하시어 비록 옛날의 성왕(聖王)도 이에 더할 수가 없습니다. 홍우원은 자신이 시종의 반열에 있으면서 감히 조리 없는 소를 올려, 이징(李澂)과 이숙(李潚)이 역적의 공초에서 나온 것을 모르는 이가 없는데도 그의 어미의 죄에 연좌된 것일 뿐이다.’고 하고, 또 가까운 지방에다 안치한 것은 실로 보전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조처인데도 ‘그 몸을 괴롭힌다.’고 하였습니다. 솥[鼎鐺]도 귀가 있는 법인데 우원이 어찌 감히 이러한 말을 한단 말입니까. 하물며 진 이세(秦二世)나 송 명제(宋明帝)는 더욱 오늘날 말할 수 없는 것인데도 인용하여 증거로 삼았으니 우원의 상소 내용보다도 패망(悖妄)스런 말은 없을 것입니다. 양사에서 삭탈 관작하여 문외 출송하자고 한 것도 가벼운 율을 따른 것인데 달이 넘도록 잇따라 글을 올렸으되 그 직만 갈았습니다. 삼사의 신하로서 일개 우원 때문에 죄를 받은 자가 그동안 잇따라 마침내는 조정의 기상이 아름답지 못하게 되였으니 신들은 삼가 민망하게 여깁니다.
대각(臺閣)은 당대의 공론을 주도하는 곳인데, 이만영(李晩榮)과 정석(鄭晳) 등은 전혀 시비에 어둡고 논의도 또한 전도 되었으니 성명께서 깊이 미워하여 배척하신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다만 그 죄의 경중을 말한다면 우원에게 비하여 만영 등은 크게 다르다고 하겠는데 유배하라는 엄명이 특별히 만영 등에게만 미치니 어찌 지나치지 않습니까. 임금이 세상을 다루는 방도는 상벌(賞罰)보다 중한 것이 없으니, 상벌이 중도를 얻은 뒤에야 사람들이 천지와 같은 광대함에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성명께서는 멀리 유배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시고 보다 가벼운 벌을 헤아려 시행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 사람들의 죄상을 이미 경연에서 말하였는데 덧붙여야 할 것이 있는가. 경들의 말도 불가하다."
하였다.

 

9월 13일 기해

성하명(成夏明)을 사간으로, 김우석(金禹錫)과 이제형(李齊衡)을 정언으로, 안후직(安後稷)을 지평으로 삼았다.

 

헌부가          【대사헌            채유후(蔡𥙿後)·집의            성태구(成台耉)·장령            임선백(任善伯)이다.】         아뢰기를
"홍우원(洪宇遠)은 감히 차마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는 말을 전혀 거리낌 없이 드러내었으며 심지어는 하늘에 계신 선왕의 영혼까지 꾸며대었으니 신하의 분의(分義)로 보아 어찌 감히 이럴 수 있습니까. 멀리 유배하도록 명을 내리소서."
하고, 간원이          【대사간            정지화(鄭知和)·헌납            박승휴(朴承休)이다.】         아뢰기를,
"홍우원 자신은 다른 사람이 하기 어려운 말을 했다고 하면서 명성을 낚으려고 하늘에 계신 선왕의 영혼을 꾸며대어 들먹이면서 조금도 거리낌 없이 군부(君父)를 비난했으니 그의 태도가 바르지 못하고 말뜻이 두서가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미루어 용서하려 하시지만 선왕에 대해 거짓을 말한 것은 결코 사사로이 용서할 수 없는 일입니다. 멀리 유배하라는 명을 내리소서."
하였으나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당시 대간은 상이 우원에 대한 율(律) 적용이 가볍다고 생각할까 두려웠기 때문에 이렇게 아뢴 것이다.

 

9월 15일 신축

남선(南銑)을 우빈객(右賓客)으로, 채유후(蔡𥙿後)를 좌부빈객(左副賓客)으로, 이시해(李時楷)를 우부빈객으로 삼았다.

 

9월 16일 임인

상이 하교하기를,
"이만영과 정석을 전에 정한 명천(明川)과 영산(靈山)으로 고쳐 정배하라."
하였다. 이때 대간 역시 정계(停啓)하자 만영 등이 드디어 배소(配所)로 갔다.

 

9월 17일 계묘

판중추(判中樞) 김집(金集)이 연산(連山)에 있으면서 소를 올려 면직을 청하자, 답하였다.
"내가 경을 연모한 지 오래여서 한번 만나보고자 하는데, 날씨가 추우니 어찌하겠는가. 경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9월 18일 갑진

북도에 큰 기근이 들어 이산하는 백성들이 많다고 하니 상이 듣고 호조와 병조에 명하여 면포 1천여 필을 보내 나누어 주어 진휼하게 하였다.

 

평안도 용강현(龍岡縣)의 백성 옥남(玉男)이 바다에 익사하였는데 그의 아내가 젖먹이 아이를 이웃 사람에게 부탁하고 드디어 자살하였다. 그 가문에 정려(旌閭)를 명하였다.

 

9월 20일 병오

주청 사은사(奏請謝恩使) 영풍군(靈豊君) 이식(李湜)과 부사 이시해(李時楷), 서장관 성초객(成楚客)이 하직 인사를 드리니 상이 불러 접견하고 각각 초피 모자[貂帽]를 하사하였다.

 

9월 21일 정미

이재(李梓)를 교리로, 조귀석(趙龜錫)을 수찬으로, 정인경(鄭麟卿)을 장령으로 삼았다.

 

9월 22일 무신

청나라 사신이 돌아갔다. 영의정 이시백(李時白)과 병조 판서 원두표(元斗杓)에게 명하여 서교(西郊)에서 전송하게 하였다. 【이날이 국기일(國忌日)인 때문이었다.】

【태백산사고본】 13책 13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687면
【분류】외교-야(野)

ⓒ 한국고전번역원

 

9월 24일 경술

심황(沈榥)을 지평으로 삼았다.

 

9월 28일 갑인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詩傳)》의 유녀동거(有女同車)·산유부소(山有扶蘇)·탁혜(蘀兮) 등의 장을 강하였다.

 

9월 29일 을묘

통제사 남두병(南斗柄)이 하직 인사를 하니, 면대하고 유시하여 보냈다.

 

상이 주강(晝講)에 나아가 《시전》의 교동(狡童)·건상(蹇裳)·봉(丰)·동문지선(東門之蟬) 등의 장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동지경연(同知經筵) 김익희(金益熙)가 아뢰기를,
"명망있는 관원 중에 문학(文學)에 재능이 있는 자를 특별히 사학 교수(四學敎授)를 겸임시켜 그로 하여금 사학의 일을 전담하여 관리하게 한다면 아마도 선비들의 부박한 풍습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30일 병진

홍위(洪葳)를 수찬으로, 홍무적(洪茂績)을 우참찬으로 삼고, 신준(申埈)을 형조 판서에 특별히 제수하였다. 준은 훈척(勳戚)으로서 재상의 반열에 올랐으나 사람됨이 용렬하였으므로 발탁하여 이 직을 제수하자 물의가 해괴하게 여겼다. 사성(司成) 홍처대(洪處大)를 특별히 승지에 제수했는데, 처대가 앞장서서 홍우원의 죄를 논박했다가 이내 은총을 입어 발탁되니 여론이 기롱(譏弄)하였다.

 

헌부가 【장령 임선백(任善伯)·정인경(鄭麟卿), 지평 안후직(安後稷)이다.】  아뢰기를,
"회흥군(檜興君) 황헌(黃瀗)은 장관(將官)으로 있으면서 법을 무시하고 탐욕을 멋대로 부리다가 형벌을 받기까지 했는데도 개전(改悛)의 정상이 없었고, 그 뒤 여러 차례 곤수(閫帥)를 역임하면서 더욱 한없는 탐욕을 부렸으니, 대개 그의 탐욕은 천성이 그런 것이어서 형벌로도 그의 마음을 징계할 수 없습니다. 일찍이 통제사(統制使)로 있으면서 군사와 백성들의 재물을 갈취하여 수로와 육로로 실어옴으로써 대간의 논박을 받았으나 성명께서 법을 굽혀 용서하셨으니 황헌으로서 취해야할 도리는 마땅히 더러운 마음을 깨끗이 씻어버렸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체직되어 올 때에 군영(軍營)에 비축된 물품을 죄다 훔쳐내어 사사로이 세선(稅船)에다 실어온 장물이 널렸고 연해의 진(鎭)과 보(堡)에서 거두어 들인 실상을 도신(道臣)이 이미 보고해 왔으니 범죄는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잡아다 심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강원도 삼척부(三陟府)에 여염집 아내가 한번에 사내아이 셋을 낳으니 쌀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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