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일 무오
상이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열무(閱武)042) 하고, 또 문신정시(文臣庭試)를 열었는데, 필선(弼善) 유도삼(柳道三)이 1등을 차지하였으므로 가자(加資)를 명하였다.
10월 3일 기미
상이 춘당대에 거둥하여 열무하였다.
10월 4일 경신
정유성(鄭維城)을 지경연(知經筵)으로, 홍명하(洪命夏)를 동지경연으로, 김수항(金壽恒)을 겸 중학 교수(兼中學敎授)로, 채충원(蔡忠元)을 겸 서학 교수로, 이단상(李端相)을 겸 남학 교수로, 이은상(李殷相)을 겸 동학 교수로 삼았다. 이는 김익희(金益熙)의 말을 따른 것이다.
10월 5일 신유
달이 남두(南斗)로 들어갔다.
10월 6일 임술
천둥과 번개가 쳤다.
10월 7일 계해
박증휘(朴增輝)를 지평으로, 이진(李𥘼)을 교리로, 이회(李晦)를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로 삼았다.
상이 대신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를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겨울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번쩍이는 등 근일의 재이가 극에 달하였으니 삼가 성상께서는 공구수성(恐懼修省)하시어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계기로 삼으소서. 그리고 또 조익(趙翼)·김집(金集)·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 등 여러 유신(儒臣)을 불러와 성덕(聖德)을 돕게 하소서."
하자, 상이 이르기를,
"김집은 연로(年老)한데다가 병까지 있고, 준길 등은 비록 젊지만 그들이 뜻이 나의 조정에 벼슬하고 싶어하지 않으니 개탄스러울 뿐이다."
하였다. 지원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지성으로 간곡히 부르시면 오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10월 9일 을축
이행진(李行進)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10월 10일 병인
밤에 검은 안개가 사방에 자욱하고 비린내가 났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詩傳)》의 풍우(風雨)·자금(子衿)·양지수(揚之水) 등의 장을 강(講)하였다.
청송군(靑松君) 심액(沈詻)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듣건대 사람이 죽으려 할 때는 그 말이 선(善)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은 이미 혼모하여 정신이 어지러우니 어찌 한 마디인들 선한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오나 구구한 견마의 정성을 끝내 억제할 수 없어 열 개의 ‘말라[無]’라는 글 자로써 성덕을 보좌할까 합니다.
스스로 성철(聖哲)하다 하여 신료들을 가벼이 보지 말 것, 격노하여 형벌에 중정(中正)을 잃지 말 것, 허물을 숨기고 직언 듣기를 싫어하지 말 것, 소인을 등용하여 거듭 인심을 잃지 말 것, 편벽되게 한쪽으로 쏠려 취사(取捨)가 공명하지 않게 하지 말 것, 나태하고 소홀히 하여 시작만 있고 끝은 없게 하지 말 것, 아첨하는 무리를 가까이하여 사(私)가 통할 수 있는 길을 열지 말 것, 이름만 있고 일은 헛되이 하지 말 것, 사치를 숭상하여 제도를 무너뜨리지 말 것, 재물을 손상하여 백성을 곤궁하게 하지 말 것 등입니다. 신이 이 말씀을 올리는 것은 전하께 이러한 열 가지 잘못이 있다고 해서가 아니라 바로 일이 커지기 전에 미리 막고 일의 끝을 시작할 때처럼 삼간다는 뜻에서이니, 혹시라도 살펴 주시어 노망스러운 말이라 하여 소홀히 여기지 않으신다면 신은 장차 지하(地下)에 들어가서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바의 열 가지 ‘말라’는 가르침은 진실로 충심(忠心)에서 우러나온 말이니 감탄해 마음 속에 새기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10월 11일 정묘
경상도에 지진이 있었다.
10월 13일 기사
김익희(金益熙)를 대사간 겸대사성으로, 이수인(李壽仁)을 집의로 삼았다.
헌납 박승휴(朴承休)가 인피(引避)하기를,
"대각(臺閣)의 신하는 임금의 이목이 되어 위로 임금의 부족함과 과실을 바로잡아 보충하고 아래로 관리의 부정을 규찰하여 탄핵하며, 임금과 시비를 논쟁하여 세상을 치평에 올려 놓기를 기약하는 것이 바로 그 직분이니, 어찌 신처럼 부족한 자가 감당할 수 있는 직임이겠습니까? 더구나 지금이 어떠한 때입니까? 천재와 시변(時變)이 달마다 생겨 재정은 고갈되고 백성은 곤궁한데도 구제할 방책이 없으며, 안으로는 믿을 수 있은 형세가 없고 밖으로는 매우 위급한 근심이 있으니 국가가 장차 어느 지경에 이를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대신(臺臣)으로서 말할 만한 일이 어찌 한두 가지 뿐이겠습니까마는 우선 몹시 급한 것만을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전하께서는 뜻과 기개가 크고 호탕하시어 뭇 신하를 하찮게 보시며, 덕이 작아 사욕을 극복하지 못하시며, 쉽게 성을 내시어 거조가 온당하지 못하시며, 신하를 믿지 않으시어 정의가 서로 통하지 않습니다. 이 네 가지가 전하 기질의 병통이 되고 있는데도 검속할 줄을 모르시기 때문에 대간의 말은 한결같이 완강이 거부하여, 전하의 부족함을 보완하려하면 전하의 악을 드러내는 것으로 의심하시고 억울한 사람의 원통함을 풀어주려하면 제 당(黨)을 비호하는 것으로 의심하시어 듣지 않으실 뿐만이 아니라 또 따라서 기를 꺾거나 축출하시어 혹은 북쪽으로 혹은 남쪽으로 귀양보내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전리(田里)에서 불안하게 지내는 자도 있고, 직위에 있는 것을 불안하게 여기는 자도 있습니다. 그가 정직한 것을 알고도 오히려 체직시키며, 제수하라는 명을 내리시고서도 낙점을 아끼셨던 것에 대해 전하께서 한번 스스로 살펴보소서. 말로 인하여 죄를 얻은 자가 무릇 몇명이나 됩니까. 바른 말이 위에 진달되지 않고 아첨하는 풍조가 아래에서 이루어졌으니 국사가 이 지경에 이른 것도 괴이할 것은 없습니다.
아, 전하께서는 오늘의 변괴가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궁중에는 물이 넘치고, 진산(鎭山)043) 이 무너지며, 남해의 물결이 적색으로 변하고, 북방에 비린내 나는 안개가 끼며, 달이 남두(南斗)로 들어가고, 우박의 재해가 서북 지방에서 발생하니, 무슨 일의 잘못으로 어떤 변이 초래된 것인지, 무슨 변의 감응이 어떤 난(亂)을 일으킬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재변은 헛되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당시 임금으로서 한번 비추어 보아야 할 것인즉, 지금이야말로 바로 전하께서 우려하면서 반성하시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는 예삿일로 보시고 유념하지 않고 계십니다. 처음에는 초정(椒井)에서 목욕한다고 하고 곡성(曲城)에 오르시고 친히 무예를 익힌다고 하여 후원에서 말을 달리시며, 궁가(宮家)의 기악(妓樂)이 대궐을 출입한다는 설과, 민간의 헛소문이 비밀스런 경로를 통해 진달된다는 말이 외간에 전파되는데, 성명한 세상에서 어떻게 이런 일들이 있기에 사람들의 말이 퍼져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까. 전하로서는 이러한 일이 있으면 고치시고, 없시면 더욱 힘쓸 뿐입니다.
금려(禁旅)044) 의 설치는 의도하는 바가 있겠습니다마는 교만 방자함이 날로 심하니 장차 통제하기 어려워질 것입니다. 영장(營將)의 임무는 비록 군사들을 훈련 시키는 것이기는 하지만 권한을 감사들과 나누게 되니 원근이 떠들썩합니다. 퍼지는 것은 헛소문이고 돌아오는 것은 실제의 화근으로서 드러내 분명히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있는데, 이는 모두 오늘날 숨김 없이 다 말하여 신하로서의 절조를 다해야 할 것들입니다.
신이 비록 변변치 못하오나 어찌 대궐문에서 한번 부르짖을 생각이 없겠습니까. 요즈음의 상황을 보면 상하가 의심하고 정의가 서로 막혀서 한 마디라도 성상의 뜻을 거스르면 점점 갈수록 본의에 어긋나고 과격해져서 실정 밖의 말씀이 아랫사람에게 가해지고 중도를 벗어난 거조가 위에 누가 되니 일에는 도움됨이 없고 국가에 해만 끼칩니다. 그러니 차라리 자신이 바른 말을 안한 죄에 빠질지언정 임금에게 간언을 거절한 과실을 차마 끼쳐드릴 수가 없어 쳐다보고 탄식하면서 답답한 심정으로 묵묵히 보내니 신하의 심정 역시 애처롭습니다. 그러나 알고서도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실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신에게 이와 같은 죄가 있으니 어디에 쓰겠습니까. 신을 체직하여 주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10월 14일 경오
간원이 아뢰기를,
"근대의 참혹한 재변은 관북(關北) 지방이 더욱 심한데 붉은 눈이 오고 바닷물이 적색이 되는 재변은 전에는 듣지 못하던 일입니다. 북쪽에서 온 사람들은 모두들 분명히 말하는데, 본도의 감사는 아직도 보고가 없습니다. 감사 이응시(李應蓍)를 중율(重律)에 따라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하교하였다.
"붉은 눈이 오고 바닷물이 적색이 된 재변은 관북에서 생긴 일이 아니다. 대신(臺臣)이 미처 자세히 살피지 못한 것이니 이러한 말들을 대간의 계사 가운데서 삭제하라."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詩傳)》의 출기동문(出其東門)·야유만초(野有蔓草)·진유(溱洧) 등의 장을 강하였다.
10월 15일 신미
대사간 김익희(金益熙)가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그 대략에,
"근래 홍우원(洪宇遠)의 일로 성상의 마음이 매우 번거로우시니 명백하게 분별하여 위로하고 풀어드려야 할 책임이 신하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도 진달하는 사람이 없으니 애석한 일입니다.
예로부터 인륜(人倫)의 변을 당했던 제왕은 셀 수 있을 정도로 몇사람 안 됩니다. 삼대(三代) 이후로 어진 임금으로는 한 문제(漢文帝)만한 이가 없고, 동기간에 우애가 있기로는 명제(明帝)같은 이가 없는데도 회남왕(淮南王)과 초왕(楚王)이 죄를 지으니 모두 폐사(廢死)시켰습니다. 무제(武帝)와 같은 뛰어난 재능으로도 양석(陽石)과 제읍(諸邑)의 공주(公主)가 무고(巫蠱)의 옥사에 연좌되자 복주(伏誅) 시켰으며, 당(唐)나라 영휘(永徽) 초년의 정치는 성대하여 볼만했는데도 고양 공주(高陽公主)와 부마가 모반하자 복주시켰습니다. 이들 몇몇 황제들은 모두 어진 군주라고들 칭했는데도 당시의 변에 대한 조치는 오히려 이러했습니다.
전하께서는 이징(李澂)과 그 누이에게 곡진하게 안전을 베풀고 성심을 다해 하문하고 물품을 내려, 은혜와 의리가 평소보다 더했으니 변에 대처한 도리가 더 없이 선하고 아름다와 한나라 당나라의 여러 임금들이 미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삼대의 성왕(聖王)인들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 선왕조의 후궁이 미색(美色)과 투기(妬忌), 남을 해치는 일에 연좌되어 뒤를 이은 임금이 사사(賜死)하였지만 역사를 서술하는 사람은 이것으로 뒤를 이은 임금을 잘못이라 하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역적 조(趙)의 흉악한 짓과 역모는 위로 장추(長秋)045) 에까지 미쳤으니 전하께서 비록 법을 굽혀 보전하려 하신들 하늘에 계신 선왕의 영령(英靈)께서 기꺼이 ‘나의 자손이 천토(天討)를 잘 거행하여 종묘 사직을 안정시켰다.’고 하겠습니까. 이는 대의(大義)가 분명하여 백세 이후 성인이 나더라도 의혹됨이 없을 것입니다.
삼가 들으니 지난번 전하께서 경연에 납시어 우원(宇遠)의 논의에 대해 후세에 구실이나 되지 않을까 자못 염려하셨다 하는데 신은 지나친 염려라고 생각합니다. 임금의 처사가 진실로 천리(天理)나 인심을 어겼다면 그 당시 아무리 힘을 다해 미봉하여 억지로 국시를 정하더라도 후세의 공론을 면할 수 없겠지만 실로 청천 백일과 같아서 조그만 하자도 없다면 아무리 교묘하고 괴이한 말로도 일시나마 속일 수 없는 것인데, 어찌 먼 후세까지 속일 수 있겠습니까. 우원과 같은 일개 망녕된 자가 어찌 성덕에 손상을 끼칠 수 있겠으며 또 어떻게 후세에서 그 말을 믿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우원이 망녕되고 패려하여 죄를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법을 굽혀 용서하시어 대간의 소장을 윤허하지 않으시는 것은 바로 옛사람이 말한 ‘그는 일개 망녕된 인간이다. 망녕된 사람을 어떻게 죽이겠는가.’라는 뜻인데 전하의 신하된 자들만이 홀로 임금의 그러한 미덕을 따라 도와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구구한 생각을 감히 상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계사의 내용을 다 잘 알았다. 경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10월 16일 임신
암행 어사 이경억(李慶億)과 이상진(李尙眞)을 불러 봉서(封書)를 주어 보냈다.
정언 김우석(金禹錫)이 피혐하면서 아뢰기를,
"관북 지방에 붉은 눈이 내리고 바닷물이 적색으로 된 변괴에 대해 말하는 많은 사람들의 얘기가 정녕스러울 뿐 아니라 적접 목격했다고 분명히 말하는 자까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동료들과 의논하여 이것을 논계했었는데 어제 ‘대간이 자세히 살피지 못하였다.’는 하교를 받들게 되니 신은 두렵기 그지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어디로부터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아셨기에 이런 하교를 하시는 것입니까. 변괴는 숨길 일이 아니며 대간의 논의는 일반인들의 말과는 달라 전하께서는 마땅히 마음속으로 경계하시면서 몸을 닦으며 반성하시는 방도에 더욱 힘쓰셔야 합니다. 그런데 도리어 신의 말을 허언이라고 하면서 미안한 하교까지 내리시니 신이 아무리 변변찮지만 어찌 감히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말할 수 없이 용렬한 자가 외람되이 자리를 차지하여 군부에게 신임을 받지 못한 소치입니다. 신을 체직하여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앞으로 임금에게 고하는 내용은 반드시 자세히 살피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어제 대간의 계사 중에 붉은 눈이 내리고 바닷물빛이 적색이라는 등의 말을 삭제하라고 한 것은 재변을 듣기 싫어해서 그런 뜻이 아니었다. 붉은 눈이 내린 변은 강원도에서 일찍이 치계한 것이고, 바닷물빛이 적색으로 변한 재변은 경상도에서 이미 치계하였다. 그런데 죄를 모두 이응시(李應蓍)에게 돌린 것은 무슨 뜻인가. 정원에서는 양도의 장계(狀啓) 원본을 찾아내어 이 사람에게 보여 주어 그 의혹을 풀도록 하라."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장계의 원본까지 대간에게 내보이는 것은 일의 체모를 헤아릴 때 아마도 부당한 듯합니다."
하니, 또 하교하기를,
"만약 내보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의혹을 풀겠는가. 대간 역시 신하이다. 자기가 자세히 살피지 못한 사실을 가지고 추한 비방을 이렇게 함부로 할 수 있는 것인가.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억누른다는 말은 옛날부터 있었으나 임금을 억누르고 신하를 높인다는 말은 지금 처음 듣는 말이다. 계사는 매우 내용이 잘못되었다."
하니, 정원이 두 도의 장계 원본을 대청(臺廳)에 보내 보여 주었다. 대사간 김익희(金益熙)가 아뢰기를,
"이렇게 두려워하고 삼가며 걱정하는 때에는 재이 듣기를 꺼리는 것이야 우려할만한 일이 아닌데도 나이 어린 신진이 일의 대체를 알지 못하여 피혐하는 말을 만들면서 다른 뜻을 첨가하였습니다. 김우석을 체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17일 계유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10월 18일 갑술
우레가 울리고 번개가 쳤다.
10월 19일 을해
이지온(李之馧)을 장령으로, 박일성(朴日省)을 정언으로, 이단상(李端相)을 교리로, 심황(沈榥)을 헌납으로 삼았다.
10월 20일 병자
상이 하교하였다.
"근래 재변이 잇따라 발생하는데 눈과 우레의 변은 옛날에도 별로 없던 일이라 나는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승지는 나를 대신하여 교서를 초안, 널리 직언을 구하여 덕이 적고 사리에 어두운 나의 부족함을 보완토록 하라. 다만 염려되는 것은 지진과 겨울 우레에 대해서는 고인의 논의가 분명히 있으나 지금 후비(后妃)나 외척으로서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는 자가 없는데, 그렇다면 그 허물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가. 중외(中外)로 하여금 숨김없이 다 말하도록 하라. 또 모든 관리들을 책려(策勵)하여 서로 직분을 닦는 방도를 극진히 하도록 하라."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의 계명장(鷄鳴章)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고 경연의 신하들과 재변을 그치게 할 방도를 강구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조귀석(趙龜錫)이 아뢰기를,
"재이를 그치게 하는 방책으로는 두려운 마음으로 몸을 닦고 반성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근래 언로가 막히고 곧바른 기운이 꺾여서 과감하게 말하는 자가 없으니 이는 작은 염려가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직언을 너그러이 수용하소서."
하고, 검토관 홍위(洪葳)는 아뢰기를,
"남의 말을 듣는 방도는 한 가지만이 아니나 절실하고 곧바른 말을 너그러이 수용한 뒤에야 비로소 간언을 받아들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옛날 조간자(趙簡子)는 열국(列國)의 대부(大夫)였는데도 오히려 ‘여러 대부들이 조회에서 한갓 순순히 대답하는 소리만 들릴 뿐 주사(周舍)와 같이 바른 말 하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또 아뢰기를,
"접때 박승휴(朴承休)가 피혐하는 말 중에 궁금(宮禁)에 관한 일을 많이 말했는데, 이것은 외부 사람이 비록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전하께서는 의당 스스로 돌이켜보셔야 합니다. 그런 일이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욱 힘쓰시면 되는 것이니 임금이 남의 말을 듣는 도리는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의 말이 비록 옳기는 하다만, 궁가(宮家)의 기악(妓樂)이 금중(禁中)을 출입한다는 말은 승휴가 누구에게서 들은 것인지 모르겠다."
하였다. 귀석이 아뢰기를,
"김우석(金禹錫)이 피혐한 말 중에는 비록 온당함을 잃은 말이 많기는 하였지만 신하를 높이고 임금을 억누른다는 하교까지 하신 것은, 신은 삼가 지나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뒤에 생각해 보니 나 역시 지나쳤다고 생각되었다."
하였다.
10월 21일 정축
상이 주강에 나아갔다. 《시전》의 동방지일(東方之日)·동방미명(東方未明) 등의 장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상이 이르기를,
"겨울철 우레와 지진이 동시에 중첩해서 발생하니 매우 두렵다. 앞으로 어떤 화란이 생기려는지 모르겠다. 만약 군신 사이에 서로 면려해서 모두 와신상담(臥薪嘗膽)하는 생각을 가진다면 위태로움을 안정으로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하니, 동지경연(同知經筵) 김익희(金益熙)가 아뢰기를,
"예로부터 국가가 어지러워져서 망하게 되는 것은 모두 밖에는 강한 제후가 있고 안에는 강한 신하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성명(聖明)께서 위에 계시고 아래에는 이런 걱정이 없으니 전하께서 만약 분발하여 다스리신다면 성공하지 못하는 일이 없을 것이고 시행되지 않는 정책이 없을 것인데, 어찌 아무 대책도 세우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멸망만을 기다리겠습니까. 다만 우리 나라는 조종조(祖宗朝)이래로 군대와 농민을 구분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하고서 군사를 기르고 병정(兵政)을 다스리려는 것은 역시 오활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병정을 다스리려면 먼저 한민(閑民)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한민이 없도록 하려면 그 계책은 어떻게 내야 하는가?"
하니, 익희가 아뢰기를,
"그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비록 사대부의 자제일지라도 학문이 과거 응시에 부족한 자는 모두 명목을 두어 하는 일 없이 놀지 못하게 한다면 군사를 기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법은 명문대가에로 부터 먼저 시행된 뒤에야 서민에게까지 미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은 시무를 안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갑자기 시행하기는 불가하다."
하였다.
전 판서 조경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금년에 들어 도성에 물난리가 나고, 삼각산(三角山)이 무너지고, 강과 바다가 붉게 변하는데 어찌하여 이런 일이 성명한 시대에 잇따라 발생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화란이 은미한 가운데 잠복해 있는데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니 하늘이 알려 주어 경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 재변은 노신(老臣)이 목격한 것이 아니나 흑기(黑氣)의 경우는 신이 목격한 것입니다. 그 기운은 비 같기도 하면서 비도 아니고, 연기 같기도 하면서 연기도 아닌 것이 북쪽에서 오는데 소리는 바람이 몰아치듯, 냄새는 비린내 같기도 한데 잠깐 사이에 산골짜기에 가득 차서 빛을 가려 지척에 있는 소와 말도 분별을 못할 정도였으니, 아, 역시 괴이한 일입니다. 가까이는 적성(積城)과 장단(長湍) 사이와 멀리는 함경도의 남쪽 경계까지 모두 그러하였다고 합니다.
신이 비록 천문학(天文學)에는 본디 아는 것이 없으나 상식과 육안으로 헤아려 보건대 이는 필시 요기(妖氣)의 종류인 것입니다. 신이 삼가 천관서(天官書)046) 를 보니 ‘안개같기도 하나 안개가 아니며 의관이 젖지도 않는 것이 나타난 경우는 그 지역이 병란의 화를 당한다.’ 하였고, 또 오행지(五行志)를 상고해 보니 ‘말을 듣고도 분명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지모(智謀)가 없다고 하는데 이런 때에는 흑생(黑眚)047) 이 발생한다.’ 하였고, 전(傳)에 이르기를 ‘아래에서 인사(人事)가 잘못되므로 위에서 천변이 응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인사의 잘못을 하나하나 셀 만큼 두로 알지는 못하나 김홍욱(金弘郁) 옥사(獄事)에서부터 대신은 광보(匡輔)하는 도리를 상실했고, 대간은 입을 다물고 있는 습관이 조장되었으며, 언로가 막히고 아첨하는 풍조를 이루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전사(前史)를 널리 보시었으니 천고(千古)의 치란과 흥망을 밝게 살피시어 거울삼지 않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신은 모르겠습니다마는 언로가 막히고 아첨하는 것이 풍조를 이룬 나라치고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었습니까? 전하께서는 성덕과 총명을 가지시고 날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시어 날마다 경연에 납시어 성현의 훌륭한 교훈을 깊이 강독하지 않는 것이 없으시니 희노애락을 중도에 맞도록 하는 것이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조회하는 석상에서 갑자기 화를 내시는가하면 우레와 같은 위엄을 부리시어 모르는 사이에 온 조정의 신하들로 하여금 기가 꺾여 위축되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대체로 말세의 인품은 강직한 사람은 적고 나약한 사람은 많은 법이니, 강직한 자는 비록 펄펄 끓는 가마솥이 앞에 있어도 자기의 지조를 바꾸지 않지만, 나약한 자는 조그마한 이해에 부닥쳐도 오히려 안색을 바꾸는 것인데 하물며 욕을 당하고 처벌을 받는 것이 순간사이에 뒤바뀌게 되는데도 처음의 마음을 고치지 않는 자가 있겠습니까. 오늘날 언로가 막히고 아첨하는 것이 풍조를 이룬 것은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임금을 사랑하고 국사를 걱정하는 경의 정성이 나이가 들수록 더욱 독실하니 가상하여 나도 모르게 감탄하였다. 재변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두려운 생각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진달한 말은 내 마땅히 가슴속에 깊이 새기겠다. 경은 선왕조의 원로 신하로서 이렇게 걱정이 많은 때에 향리에 물러가 있는 것은 불가하니, 나의 지극한 뜻을 깊이 이해하여 속히 올라 오라."
하였다.
10월 22일 무인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의 남산(南山)·보전(甫田) 등의 장을 강하였다.
10월 23일 기묘
옥당이 【수찬 홍위, 부수찬 오정원·조귀석(趙龜錫)이다.】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마음은 저절로 바르게 되지 않는 것이니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는 법도가 있습니다. 삼가고 나태함이 없게 하고, 보존하여 방심하지 않아야 하며, 음악이나 여색, 혹은 애완물(愛玩物) 등 내 마음과 뜻을 좀먹을 만한 것은 일체 가까이하지 말아 조용한 곳에 홀로 편안히 있을 때에도 마치 조정 백관을 대하듯 엄연하게 앉아 있게 되면 마음이 바르게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학문은 역시 그 근본입니다. 임금의 학문은 보통 사람들의 그것과는 달라 고문(古文)을 해석이나 하고 입으로 읽기만 하는 것은 임금의 학문이 아니며, 잡다한 것을 널리 섭렵하는 것도 임금의 학문이 아닙니다. 반드시 정밀하게 생각하고 몸으로 직접 체득하며 이치를 밝혀 활용에 통달한 뒤에야 비로소 학문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선 요즈음 강(講)하는 것을 예로 들어 말한다면 관저(關雎)나 규목(樛木) 같은 시를 읽게 되면 문왕(文王)이 집안 다스린 방법을 생각하고, 한광(漢廣)이나 작소(鵲巢)의 시를 읽으면 문왕이 교화를 이룩한 까닭을 생각하고, 서리(黍離) 같은 시를 읽으면 동천(東遷)하여 떨치지 못한 까닭을 알고, 정풍(鄭風)이나 위풍(衛風)의 시를 읽으면 성정(性情)이 그 정도를 잃었다는 것을 알고, 계명(鷄鳴)의 시를 읽으면 서로 도와 주어 경계하는 것을 알고, 선(還)에서는 습속이 한 사람에게 달려 있음을 경계하고, 보전(甫田)에서는 원대한 것도 근소한 것에서 시작함을 살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동류(同類)에 감촉하여 그 마음을 더 확장하고 일에 따라 증험해간다면 이것이 이른바 학문을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방법입니다."
하니 상이 가납하였다.
10월 25일 신사
채충원(蔡忠元)을 사간으로, 민선(閔墡)을 전남 좌수사로 삼았다.
10월 27일 계미
무지개가 나타났다.
10월 29일 을유
경상도에 지진이 일어나고 충청도에 우레가 쳤다.
진하사 인평대군(麟坪大君) 이요(李㴭)와 부사(副使) 이일상(李一相), 서장관 심세정(沈世鼎)이 청국으로 갔다.
10월 30일 병술
낮이 어두컴컴했다.
박세모(朴世模)를 정언으로, 이준구(李俊耉)를 헌납으로, 서필원(徐必遠)을 이조 좌랑으로, 강유(姜瑜)를 북병사(北兵使)로 삼았다.
교리 이진(李𥘼)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임금의 희노(喜怒)는 가벼이 나타내서는 안 됩니다. 희노가 중도를 잃게 되면 위의(威儀)에 나타나는 것이 자연스럽지 못해서 모든 일의 조처가 전도(顚倒) 되는 실수가 있게 되고, 상과 벌이 중도를 벗어나게 되어 위 아래가 의구심을 갖게되고 서로 멀리하게 되는 것이니 어찌 심히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전하 같으신 총명과 성덕으로 희노가 중도를 잃은 일이 없을 듯합니다만 삼가 들으니 전하께서 신료(臣僚)들을 접견하실 때에 간혹 화평한 기색을 아끼시고 노여운 말씀을 많이 하신다고 합니다. 감정이 발로되기 전에 치우침이 없지 않고, 감정이 발로된 뒤에 사리에 어긋남이 없지 못한 것은 신료들이 성명한 전하께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지난번 김홍욱(金弘郁)의 죄는 용서할 점이 없으니 전하께서 언어나 안색에 크게 드러내지 않으시고 조용히 처분하셨더라면 비록 사형에 처했더라도 전하의 노여움을 누군들 의리의 발로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한가지 일로 인하여 대신들의 기를 꺾고 대간을 물리치셨으며, 말씀이 지나치게 엄하셨으니 신은 전하를 위하여 매우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동안 죄를 받은 신하들이 단지 소견을 진달했을 뿐 단연코 다른 마음은 없었는데 화내고 죄줄 일이 무엇이 있기에 전하의 노여움이 그렇게 급하시며 죄를 줌이 그리 과중하십니까. 전하의 노여움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절도에 맞지 않을 뿐만이 아닙니다. 신은 삼가 전하께서 한밤중에 화평한 마음으로 살피신다면 참으로 벌을 받은 신하들이 과연 모두 그 죄에 합당한 벌을 받았다고 여기실지 모르겠습니다. 정자(程子)의 말에 ‘드러내기는 쉽고 억제하기 어려운 것은 성내는 것이 가장 그러하다. 그러나 성이 날 때는 문득 그 성나는 것을 잊고 사리의 옳고 그름을 살피라.’고 하였고, 장재(張載)의 말에는 ‘이 사람에게 성낼만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성내는 것이니 성인은 본디 성냄이 없는 것이다.’고 하였으니 의미가 있는 말이 아닙니까.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마음을 비우시고 이치를 살피시어 성냄이 없는 경지가 되도록 힘쓰셔서 죄받은 여러 신하들에게 관대한 석방을 특별히 내리소서. 그리하면 일식 월식이 끝나고 다시 새로워진 모든 일월을 사람이 우러러 보듯 할 것이며, 근심에 찬 기상이 화락한 기운으로 변할 것이니 재변에 응하여 몸을 닦고 반성하는 방법으로 이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임금이 관작을 제수할 때에는 신중히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제수할 때에 비록 공심(公心)에서 나왔더라도 결과가 혹시라도 사심에 관련이 되면 반드시 민간의 논의를 불러일으키고 후세의 기롱을 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 모든 임용에는 신중한 도리를 다하셨습니다. 그런데 신이 요즈음의 일을 보니 인척인 두 신하를 몇 달도 안 되어 대신에 앉히기도 하고 전형(銓衡)을 맡기기도 하였습니다. 【우상 심지원(沈之源)은 청평위(靑平尉)의 부친이고, 이조 판서 정유성(鄭維城)은 인평위(寅平尉)의 조부이다.】 이들은 모두 한 시대의 명류들로서 부적합한 점이 없습니다만 《서경》에 이른바 벼슬은 사정(私情)에 따라 주지 말라.’는 경계에 어긋난 바가 아니겠습니까? 신은 실로 전하께서 사심이 없고 단지 뭇사람의 기대 때문일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마는 《시경》에 이른바 ‘인척에게는 큰 관작을 주지 않는다.’고 한 도리에 흡족하지 못한 경우가 아니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우대하는 비답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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