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정해
우의정 심지원(沈之源)과 이조 판서 정유성(鄭維城)이 정고(呈告)하여 사직을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의 노령(盧令)·폐구(敝笱)·재구(載驅) 등의 장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제사(諸司)의 윤대관(輪對官)을 불러 접견하였다.
11월 2일 무자
이후(李垕)를 장령으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가 《시전》의 의차장(猗嗟章)을 강하였다.
부사직(副司直) 정두경(鄭斗卿)이 상소하기를,
"국가의 언로는 사람의 혈맥과 같아서 혈맥이 끊기면 사람이 죽듯이 언로가 끊기면 나라가 망하는 것으로, 요행히 면하는 일은 절대로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국가의 가장 큰 걱정은 언로가 끊기는 것이고 재변은 그 다음입니다. 삼가 오늘날의 인정을 보건대 김홍욱(金弘郁)이 죽은 이후 모두들 두려워하며 크게 의혹하여 언로가 끊기려 하니 어찌 매우 우려할 만한 일이 아닙니까. 진달할 일이 많은 이때에 신이 김홍욱의 일만을 거론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의혹을 깨뜨리고 한편으로는 언로를 열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성명께서는 살펴주소서.
병법(兵法)에 ‘반드시 여러번 포고하고 경계한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범하는 사람이 생길 것을 염려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명령이 있기에 앞서 범한 경우는 비록 범한 죄가 크더라도 죄를 주지 않고, 명령을 내린 뒤에 범한 자는 그것이 비록 작은 것이더라도 반드시 죄를 줍니다. 홍욱의 일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홍욱이 한말은 바로 민정중(閔鼎重)이 전에 진달한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정중은 죄주지 않고 홍욱을 죄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정중의 말은 명이 있기 전이었고 홍욱의 말은 명이 있은 뒤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전하께서 노여워하시는 이유는 명령을 어긴데 있는 것이지 내용에 있지 않음이 역시 분명합니다. 그러나 신이 삼가 정유성(鄭維城)에게서 들으니 유성이 서쪽에서 올 때에 홍욱이 그 소 이야기를 하기에 유성이 크게 놀라 그 곡절을 말한즉 홍욱 역시 크게 놀라 벌벌 떨었다고 했습니다. 요컨대 그가 정신이 없어 망각한 소치이니 고의로 범한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 홍욱은 이미 죽었고 그 자손은 금고시켰으며, 또 그 친족들을 조신(朝臣)의 명단에서 영원히 삭제했으니 이것은 지나친 듯합니다. 대순(大舜)의 벌은 사자(嗣子)에게는 미치지 않았고 중니(仲尼)는 상대를 너무 심하게 박대하지는 않았습니다. 신은 삼가 대순이나 공자를 우리 전하께 기대합니다.
그리고 홍욱이 여러 신하들 중에서 유경창(柳慶昌)과 이상일(李尙逸)만을 부르면서 구원해 주기를 요청한 것은 모르기는 합니다만 가장 친밀한 교분이 있어서 그랬거나 아니면 평소에 그들이 남의 위급을 구해주는 사람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가 비록 구원을 청했지만 이쪽에서 서로 약속한 자취가 없는데 이것 때문에 연좌되어 죄를 받는 것은 역시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삼가 성명께서는 유념하소서. 또, 도사 이이형(李以馨)은 일 처리가 분명치 못하여 먼 변방에 귀양을 갔는데, 자신은 실로 죄가 있습니다만, 들으니 칠십 노모가 있다고 합니다. 성상께서는 효로써 나라를 다스리시는데, 다른 사람의 부모를 나의 부모처럼 대접하는 은택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아, 지금 한창 변괴가 극심한데, 이를 옮겨가게 할 조처가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역(易)》의 건괘(乾卦)를 법으로 삼아 자강(自强)하시고, 《역》의 건괘(蹇卦)를 법으로 삼아 자신을 돌이켜 보시고, 《역》의 진괘(震卦)를 법으로 삼아 몸을 닦으시고, 《역》의 손괘(損卦)를 법으로 삼아 분노와 사욕을 억제하시고, 《역》의 익괘(益卦)를 법으로 삼아 착한 일을 하시고, 《역》의 함괘(咸卦)를 법으로 삼아 허심 탄회한 심정으로 받아들이시고, 《역》의 기제괘(旣濟卦)를 법으로 삼아 우환을 방비하시고, 《역》의 해괘(解卦)를 법으로 삼아 죄인을 사면하시고, 《역》의 중부괘(中浮卦)를 법으로 삼아 옥사(獄事)를 의논하신다면 재앙을 없애는 방도는 대체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국사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을 내가 매우 가상하게 생각한다. 끝부분의 《주역》을 법으로 삼으라는 말은 더욱 마음 속에 깊이 새기겠다."
하였다.
11월 3일 기축
상이 대신 및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이시백(李時白)이 아뢰기를,
"신이 병중에 풍당전(馮唐傳)을 읽다가 문제(文帝)가 풍당의 말 한 마디에 크게 깨우치고 즉시 지절(持節)을 보내 위상(魏尙)을 사면한 것을 보고 신의 마음이 늘 유쾌했습니다. 지금 박장원(朴長遠)의 노모가 서울에 있는데, 자식을 보고 싶은 심정을 이기지 못하여 뒤따라 적소(謫所)로 간다고 하니, 그 정상이 매우 불쌍합니다. 성상의 조정에서 효도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계시는데 처치가 이러해서는 참으로 부당합니다. 그리고 들으니 조석윤(趙錫胤)은 흑달(黑疸)의 증세가 있는데 요즈음은 점점 위독하다고 합니다. 먼 변방에서 갖은 고난을 겪으니 필시 손상이 많을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성상께서는 아울러 너그러운 용서를 베풀어 문제의 옛일처럼 하소서. 신 또한 오늘날의 풍당이 되고자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간절하니 마음속에 깊이 새기지 않을 수 있는가."
하고, 이어서 승지에게 이르기를,
"박장원은 방면시키도록 하라."
하고,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당초 이만(李曼)과 노협(盧協)이 만약 말을 잘 했더라면 필시 이경여(李敬輿) 등을 조사하는 등의 환난은 없었을 것이다. 원임 대신을 금고까지 시키고서 노협은 어떻게 감히 뻔뻔스레 사판(仕版)에 그대로 있는가."
하니, 양사(兩司)의 장관이 노협을 사판에서 삭제하여 문외 출송할 것을 청하자 상이 따랐다. 또 이만의 파직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만의 죄는 노협과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한 방면의 중임을 맡겼으니 쉽게 체직시킬 수 없다."
하였다.
11월 5일 신묘
헌부가 대사헌 【이행진(李行進), 장령 이후(李垕), 지평 안후직(安後稷)이다.】 아뢰기를,
"사국(史局)에서 의논하여 추천한 사람은 이조가 지레 6품직에 내보내지 못하는 것이 옛규례입니다. 지금 추천 중에 있는 김만균을 갑자기 6품에 올리는 것은 매우 불가합니다. 또 만균은 출신한 지 반년 밖에 안 되었는데 바로 낭관에 제수하였으니 갑작스레 너무 빨리 승진시키는 폐단도 없지 않습니다. 이조의 당상관과 낭관은 모두 추고하고 병조 좌랑 김만균은 개정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6일 임진
전남도에 지진이 있었다.
날씨가 매우 추웠다. 상이 병조에 명하여 동옷[襦衣]을 지어 옷이 없는 위사(衛士)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의 원유도(園有桃)·척호(陟岵)·십묘지간(十畝之間) 등의 장을 강하였다.
11월 7일 계사
강원도에 오얏과 복숭아꽃이 피었다.
간원이 【정언 박세모(朴世模)이다.】 아뢰기를,
"헌부가 김만균의 6품직을 개정하여 기필코 사관(史官)을 만들고자 하는 것은 매우 불가한 일입니다. 하물며 비록 의논하여 천거를 했다고는 하나 아직 확정되지도 않았는데, 사관이 승출(陞出)을 막는 것은 너무나 일의 체모를 잃은 처사입니다. 사관과 한 집안 사람이 【이후의 동생이 이무(李堥)이고, 안후직의 동생이 안후열(安後說)인데 당시 사관으로 있었다.】 또 어떻게 혐의를 무릅쓰고 논계할 수 있습니까? 본의는 비록 인재를 아끼는 데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이 일은 함부로 천단한 잘못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장령 이후와 지평 안후직을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일본에서 차왜(差倭) 평성정(評成政)을 보내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중용연의(中庸衍義)》·《의무려집(醫巫閭集)》·《성리군서(性理群書)》·《장남헌집(張南軒集)》·《자치통감(資治通鑑)》·《주자어류(朱子語類)》·《이정전서(二程全書)》·《역학계몽요해(易學啓蒙要解)》·《소학(小學)》·《사서대전(四書大全)》·《오경대전(五經大全)》·《주자대전(朱子大全)》·《퇴계집(退溪集)》을 요구하니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의논하게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왜차가 구하려는 14건의 서적 중에는 난리를 겪은 뒤 미처 간행하지 못한 것도 있으니 있는 대로 내려 주소서."
하니, 따랐다.
11월 8일 갑오
형혹성(熒惑星)이 항성(亢星)을 범하였다.
대사헌 이행진(李行進)이 피혐하면서 아뢰기를,
"신이 그저께 동료들과 회합할 적에 장령 이후가 말하기를 ‘사국에서 김만균을 의논하여 추천하였는데 이조가 오랜 규례를 따르지 않고 6품직에 승출(陞出)시켰으니 매우 불가하다. 또 만균은 출신한 지 반년 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승진시켰다. 이조를 추고하고 만균을 개정하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의 의견 역시 그렇겠다고 생각해서 상의하여 아뢰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간원의 논계에 신의 이름만 제외한 것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습니다. 이후와 안후직의 이름만 거론한 것은 사관과 한 집안이란 혐의에 허물을 돌리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과연 ‘이후와 안후직이 사관의 형이면서도 그 혐의를 피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김만균 아비의 아랫 관료로서 완석(完席)에서 만균을 트집한 것은 과연 사체에 혐의가 없겠습니까. 설사 헌부의 논계가 십분 순수하고 온당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간원의 관원으로서 그 장관의 난처함을 생각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세도(世道)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신은 한밤중에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습니다. 동료들이 이미 논박을 받고 체직되었는데, 신이 어찌 감히 얼굴을 쳐들고 뻔뻔스레 그대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을 체칙하여 주소서."
하였다. 대사간 김익희(金益熙)가 피혐하기를,
"신의 자식 만균이 요행히 과거 급제에 들어 궁료(宮僚)의 자리를 채우고 있는데, 요즈음 또 사국에서 추천 논의가 있어 신은 너무 갑자기 승진하는 것을 우려 했었습니다. 이번에 이조에서 관례에 따라 6품에 올렸는데, 설서(說書)를 오래 맡았던 자를 낭관으로 옮기는 것 또한 옛규례이어서 신 역시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사헌 이행진(李行進)이 피혐하는 말을 보니, 장황하게 멋대로 남의 마음을 헤아리고 뜻밖의 말을 많이 하였으니, 신은 적이 괴이하게 생각합니다. 신의 자식은 재주도 없으면서 외람되게 한원(翰苑)048) 의 촉망을 받았으니 실로 매우 영화롭고 행운입니다. 어찌 털끝만큼이나마 개정의 논의에 유감을 갖겠습니까. 지금 행진의 뜻은 마치 신과 만균이 불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하는데 어찌 그리도 그의 마음씀이 지나치고 남을 야박하게 대우한단 말입니까. 대각이 서로 규계(規戒)하는 것은 오랜 법도입니다. 헌부의 논의와 간원의 탄핵은 시비를 물론하고 반드시 사심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행진이 지레 의심하고 화를 내어 대단한 기세로 변론을 진달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태도입니까.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 이 일이 비록 신과는 상관이 없으나 신의 자식 일 때문에 헌장(憲章)이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고 하니 다시 무슨 얼굴로 언관의 자리에 미련을 갖고 있겠습니까. 신을 체직하여 주소서."
하고, 정언 박세모(朴世模)도 피혐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행진 등이 물러가 물론을 기다리니 옥당이 차자를 올려 모두 체차시키기를 청하자 상이 따랐다.
11월 9일 을미
심광수(沈光洙)를 장령으로, 유창(兪瑒)을 지평으로, 구인기(具仁墍)를 경기 수사(京畿水使)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의 벌단(伐檀)·석서(碩鼠) 등의 장을 강하였다.
11월 11일 정유
홍무적(洪武績)을 대사헌으로, 민응협(閔應協)을 대사간으로, 유준창(柳俊昌)을 헌납으로, 이은상(李殷相)을 지평으로, 목래선(睦來善)을 정언으로 삼았다.
11월 13일 기해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육(金堉)이 아뢰기를,
"신이 들으니 영남(嶺南)에서 속오군(束伍軍)에게 보(保)를 지급하는 조치로 인심이 소요스럽다고 하는데, 2만 8천여 명의 보를 일시에 찾아내어 채우자니 어찌 그런 폐단이 없겠습니까. 온 도내 백성들이 만약 이로 인하여 흩어진다면 다시 모으기 어려울 것이니 성상께서는 속히 정지하라는 명을 내리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영장(營將)은 별도로 뽑아 보낼 것이 없고, 수령 중에서 엄선하여 오랜 관례대로 겸임시킨다면 여러 고을에 해가 없을 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편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당시 원두표(元斗杓)가 건의하여 삼남(三南)의 각 고을로 하여금 각기 염초를 굽도록 하고 구입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굽는 비용이 사는 비용보다 더 들었다. 김육이 또 그 폐단을 말하고 시기를 늦추자고 청하였으나, 상이 또 듣지 않았다. 영의정 이시백(李時白)이 아뢰기를,
"신이 들으니 세자가 사서(四書)를 강하려 한다는데, 근일 연소한 명관(名官)들이 비록 과거 급제로 발신(發身)했지만 어찌 경학(經學)이나 유가서(儒家書)에 다 능통하겠습니까. 이후로는 노소를 따지지 말고 경술(經術)에 밝은 선비를 엄선하여 보도(輔導)의 책임을 맡기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조에 말하여 모든 궁료(宮僚)는 엄선하여 제수하라."
하고, 상이 승지 심택(沈澤)에게 이르기를,
"날씨가 매우 추우니 옥에 갇힌 죄수들을 가서 살펴보고 그 중 죄가 가벼운 자들은 석방하라."
하였다.
전 공조 참의 안방준(安邦俊)이 졸하였다. 방준은 성품이 꿋꿋하고 절의를 숭상하였다. 평생토록 포은(圃隱) 정몽주(鄭蒙周)와 중봉(重峰) 조헌(趙憲)을 사모하여 은봉(隱峰)이라 자호(自號)하였다. 비록 시골에 물러나 세상일에 관심이 없었으나 여러 차례의 항소(抗疏)에 거리낌이 없었다. 부름을 받았으나 나오지 않다가 이때에 와서 졸하니 나이 82세였다. 저술로는 《혼정록(混定錄)》·《항의신편(抗義新編)》 등의 책이 세상에 전한다.
11월 16일 임인
대사성 김익희(金益熙)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은 들으니 천도(天道)는 현묘(玄妙)하고 심원(沈遠)해서 헤아려 알기가 쉽지 않으나 여러 전기(傳記)를 상고해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재변의 발생은 치도(治道)를 이루고자하나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많이 나타나는데, 대개 어진 임금이 큰일을 할 만한데도 정치가 혹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반드시 하늘이 견책을 내려 경동시키는 것입니다. 무도한 임금이 스스로 하늘과 관계를 끊은 경우는 하늘 역시 그를 망각하여 견책을 내려 경고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재변이 없는 재앙이 바로 천하에서 가장 큰 재앙이라고 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너그럽고 인자하시며 널리 사랑하시고, 굳굳하면서도 욕심이 없으시니 성색(聲色)이나 이욕이 마음을 고혹시키거나 덕을 손상시킬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도 교화의 정치는 이루어지지 않고 국가의 형세는 위태로워져 점점 위망으로 치닫고 있으니 인애스러운 하늘이 어찌 크게 견책을 고하여 우리 전하의 덕을 완성시키려 하지 않겠습니까. 대체로 전하께서는 정신을 가다듬어 다스리고자 하시지만 아직 확실한 요령을 얻지 못하였고, 어진이를 좋아하고 사특한 것을 미워하고자 하시지만 그다지 엄격히 분별하지 못하시고, 기강을 세우고자 하시지만, 공명정대함에 근본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시고, 붕당을 타파하고자 하시지만, 그 시비와 공사(公私)를 분명히 하실 줄을 모르십니다.
준엄한 말씀과 비답으로 국사를 말한 신하를 매양 대하시며 간혹 강개(剛介)한 신하에게 무거운 견책을 가하기도 하십니다. 이러한 몇가지는 다 전하께서 일찍이 천덕(天德)과 왕도(王道)의 학문에 마음을 두지 않으심에 기인한 것입니다. 지력(智力)으로 일세를 꽉 잡고서 신속한 효과를 얻으려 하시나 자신의 생각이나 하는 일이 꼭 옳다는 사심에 얽매이게 되고 여기서 벗어나려 하나 할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말씀을 하실 때나 일을 시행함에 있어서 대부분 분격하고 급박한 병통이 많고 화평하고 너그러운 기운이 적어 천리를 따르고 인심을 기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전하의 신하들까지도 모두 자기 개인이나 가정의 사사로움만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모든 관리들이 공무에 태만하고 기강이 무너져서 수습할 수 없이 엉망진창입니다. 이러고서도 망하지 않은 나라는 없었습니다.
전하와 같이 인자하고 슬기로우신 자질로서 참으로 치도(治道)의 대체를 약간 만이라도 통달한 자를 얻어 전하를 돕게 한다면 기강을 바로잡고 피폐한 풍습을 다스리는 일은 단지 전하의 손쉬운 조치에 속하는 일들입니다. 하물며 안으로는 권신(權臣)이 없고 밖으로는 강한 번방(藩邦)이 없으니 나라가 비록 피폐했다고는 하지만 국토는 그래도 완전합니다. 왕자(王者)가 되거나 패자(霸者)가 되는 것은 단지 힘써 행하기에 달려 있을 뿐인데,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으십니까.
옛날 부견(符堅)은 바로 오랑캐 중의 걸물(傑物)로서 군자들이 거론하는 것조차 꺼립니다. 그러나 왕맹(王猛)과 국정을 꾀하면서 뛰어난 인재를 등용하고 폐지된 관직을 재정비하였으며, 학교를 세우고 절의를 표창하였습니다. 청탁이 없어지고 관리들이 스스로 분발하였으며 내외의 관원들이 각기 그 직임에 적임자였고, 농토가 확장되어 창고가 가득가득 하였습니다. 왕맹이 어사 대부(御史大夫)가 되어 태후의 동생이 법을 범하자 상주(上奏)한 내용이 회보되기도 전에 거리에다 효시(梟示)하였는데, 수십일 사이에 권신(權臣)과 인척(姻戚) 중 죄로 벌을 받은 자가 20여 인이나 되니 온 조정이 벌벌 떨고 간사한 자들이 숨을 죽여 조그만한 나라를 강국으로 변화시켜 천하의 태반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시 세종(柴世宗)049) 은 오대(五代) 때에 다소 어진 임금이라는 칭찬을 들었는데, 왕박(王朴)을 얻어 추밀사(樞密使)에 임명, 대악(大樂)을 정하고, 전조(田租)를 고르게 하고 상벌을 분명히 하고, 쓰임새를 절약하며, 대량성(大梁城)을 넓히고, 변수(汴水)와 회수(淮水)의 운하를 넓히니 정치가 다스려지고 저축이 넉넉해져서 남북의 정벌에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이들 두 임금은 한고조 (漢高祖)와 광무제 (光武帝)의 자질을 타고 난 것도 아니고, 두 신하 역시 어찌 관중(管仲)이나 제갈량(諸葛亮) 같은 재주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서로 깊이 신임하고 전적으로 맡겼기 때문에 몇 년 사이에 법령이 다 시행되어 지금까지도 그것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임금이 훌륭한 신하를 얻어 선왕의 법도를 강구하고 역대의 옳은 일들을 참작하여 기강을 세워 내치를 닦고 외침을 물리친다면 그 성대한 공열(功烈)이 어찌 부견의 진(秦)나라나 시영(柴榮)의 주(周)나라 임금 정도에 그칠 뿐이겠습니까.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조정에 나오시면 매양 인물이 없음을 한탄하시는데 지금 인재를 찾아보기 힘드니 상의 마음에 합당한 자가 없음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자고로 큰일을 한 임금 치고 신하가 없어 스스로 좌절하였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세종 대왕(世宗大王)은 동방의 성군이십니다. 그 분이 사람을 쓰는 법은 옛 성군의 뜻을 가장 잘 터득하여 여러 관아의 모든 관료가 그 관직에 맞았습니다. 황희(黃喜)나 허조(許稠)같은 이들은 단지 보통 사람들 보다 조금 나은 사람들인데도 세종을 도와 태평을 이루어 신하와 임금이 다함께 영예로웠습니다. 만약 세종으로 하여금, 이러한 이들을 다 물리치고 다른 세대에서 인물을 빌리게 했다면 어찌 당시의 태평을 이룰 수 있었겠습니까.
신은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위로 세종을 본받아 정성을 다해 인재를 널리 구하여 그릇에 맞게 일을 맡기되,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이 구비되기를 요구하지 마시고, 세상을 업수이 보지 마시어, 그중에서 공심을 가지고 국사를 걱정하고, 국법 적용에 민첩하며, 고금의 치란에 밝은 사람을 가려서 국정을 함께 의논하여 믿고 맡긴다면 또한 한 시대의 치적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제도를 고치고 변통해서 폐단을 없애고 정치를 바로잡을 방책에 있어서 한두 가지 관견(管見)이 있으므로 감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신은 들으니 다스리는 방도는 한 가지만은 아니나, 그 강령(綱領)을 세우지 않고서는 말단의 법이 제대로 시행되는 경우는 없다고 했습니다. 옛날 주왕(周王)은 만방을 위무하면서 ‘다스리는 관리들을 감독하여 바로잡는다.’는 말을 먼저 하였고, 소공(召公)은 강왕(康王)에게 고하기를 ‘육군(六軍)을 크게 유지하여 우리의 덕이 높으신 할아버지의 얻기 힘든 명을 손상하지 말라.’하였고, 맹자(孟子)는 왕도 정치를 논하면서 경계를 바르게 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습니다. 이 세 가지가 어찌 치도의 대강(大綱)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나라는 주나라 제도를 본받아 관직을 설치하고 직임을 나누어서 삼공(三公)은 육경(六卿)을 통솔하고, 육경은 여러 관아를 거느리는데 체제가 통솔되고 분직(分職)이 분명하니, 조리가 있어 문란하지 않습니다. 인재 선발이나 예·악(禮樂)에 관한 문제, 재정(財政)이나 군사 문제, 그리고 형옥(刑獄)이나 공사를 일으키는 등의 일이 있으면 의정부와 해당 조의 당상들이 서로 의논해 거행했습니다. 이것은 정부가 육조의 모든 일을 통솔한 것이고, 육조 또한 그 직임을 제대로 수행한 것으로 백년 동안 시행해 왔지만 조금도 차질이 없었습니다.
성묘조(成廟朝)에 건주위(建州衛)의 역(役)에 임시로 비변사(備邊司)를 설치했는데,050) 재신(宰臣)으로서 이 일을 맡은 사람을 지변 재상(知邊宰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전쟁 때문에 설치한 것으로서 국가의 중요한 모든 일들을 참으로 다 맡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는 큰 일이건 작은 일이건 중요한 것으로 취급되지 않는 것이 없는데, 정부는 한갓 헛 이름만 지니고 육조는 모두 그 직임을 상실하였습니다. 명칭은 ‘변방의 방비를 담당하는 것[備邊]’이라고 하면서 과거에 대한 판하(判下)나 비빈(妃嬪)을 간택하는 등의 일까지도 모두 여기를 경유하여 나옵니다. 명분이 바르지 못하고 말이 순하지 않음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비변사를 혁파하여 정당(政堂)으로 개칭하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육조의 판서와 참판으로 하여금 각기 해당 사항을 대신에게 품의 결정하게 해서 조종조의 옛법을 회복한 뒤에야 체통이 바르게 되고 각자의 직무에 충실하게 될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치도를 논할 때 먼저 그 명분을 바로잡는다는 것입니다. 만약 ‘비변사를 혁파한 후에 군국(軍國)의 중요한 기밀을 어디에 맡길 것인가.’라고 한다면 이것은 바로 병조 판서의 직무입니다. 육군(六軍)을 장악하고 국가를 태평하게 하는 자의 권위와 명망이 비국의 일개 유사(有司)만 못하겠습니까.
대체로 삼대(三代)나 양한(兩漢) 시대에는 문(文)과 무(武)가 실로 두 갈래가 아니었습니다. 당(唐)나라 이후로 구별하기 시작하여 관직의 관련이나 반열의 차례 또한 나누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비록 도총부(都摠府)나 오위(五衛)가 있으나 모두 실직(實職)이 아닌데 지금 만약 도총관(都摠管)·부총관·위장(衛將) 등을 실직으로 바꾸어 무관의 자리로 만들어, 자격이나 경력에 따라 제수하고 간간이 문음(文蔭)을 등용하면 무신의 마음을 위로하고 흥기시키는 점이 있을 것입니다. 신은 들으니 군사는 국가를 호위하는 것이지만 정예(精銳)하지 않으면 나라를 적에게 넘겨주는 환란이 있게 되고, 양성하지 않으면 난리를 만났을 때 질시하는 변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옛날의 성왕(聖王)들은 모두 군대를 나라 다스리는 일의 급선무로 삼았습니다.
삼대 때에는 군사를 농민에 붙이었는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한나라 때에는 남북군(南北軍)이 있었고, 당(唐)나라 때에는 부병(府兵)이 있었고, 송(宋)나라 때는 상병(廂兵)이 있었습니다. 한나라와 당나라에서는 군대를 농민에게 붙인다는 의미가 다소 있었으나 그 제도는 미비했고, 송나라 명나라에 이르러서 군대와 농민을 둘로 분리했으니 이는 때에 따라 알맞은 제도로 고친 것으로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실로 가난한 나라여서 군사를 기를 만한 물력이 없으나 성주(成周)의 제도 한 가지만은 강구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모든 백성은 8세가 되면 다 소학(小學)에 입학시키고 15세가 되면 대학(大學)에 들여보내 교육하는데 재능이 이루어진 자는 사마(司馬)로 올리고, 재능이 이루어지지 않은 자는 공전(公田)을 지급 받아 조부(租賦)를 바쳤습니다. 당나라의 조(租)·용(庸)·조(調)는 토지가 있으면 조가 있고, 사람[身]이 있으면 용(庸)이 있고, 집[戶]이 있으면 조(調)가 있다는 것으로, 바로 천하에 노는 백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로 말하더라도 조종조의 신역(身役)의 법이 매우 엄하여 공경 대부(公卿大夫)의 자제들도 각각 소속이 없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를테면 문음(門蔭)이 있는 자는 충순위(忠順衛)가 되고, 문음이 없는 자는 보인(保人)이 되어 온 나라에 한가히 노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멀리는 성주(成周)의 제도를 모방하고, 중간의 당(唐)나라 제도를 참작하고, 가까이는 조종조의 옛 제도를 복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직 관리, 생원 진사시의 초시 입격자 및 본디 다른 신역(身役)이 있는 자와 심한 질병이 있거나 불구인 자를 제하고는 귀하고 권세 있는 집 자식이거나, 충의(忠義)051) 와 품관(品官)이거나, 향교 학생이거나 서얼이거나를 불문하고 나이가 30이상이 된 자이거나, 과거 공부를 하지 않은 자들로 나이가 25세 이상인 자들에게 각각 1년에 정포(正布) 2필씩을 거두면 거두는 양은 매우 가벼워 비록 가난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마련할 수 있으며, 납부하는 자는 매우 많으니 작은 것이 모여 큰 것이 될 것입니다. 또 갑작스럽게 군역에 충정(充定)하는 것도 아니므로 필시 그다지 소요스럽지 않을 것이니, 충의위(忠義衛)의 의공(議功)이나 의친(議親)에 해당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구애될 것이 없습니다. 양반의 자손들이 용포(庸布)052) 를 내는데, 천민이나 하례들이 어찌 감히 신역을 피할 마음을 먹겠습니까. 의당 명령을 따르기에 바쁠 것입니다. 이는 군사와 농민의 분별도 은연중 그 속에 있게 되는 것이니, 그렇게 되면 1 년에 베 70∼80만 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니, 10만 군사를 양성하는데 넉넉하지 않겠습니까. 양성할 밑천이 충분하게 되면 군제(軍制)를 변통하거나 군율(軍律)을 정비하는 일들은 바로 그 다음 일들일 뿐입니다.
신은 삼가 생각하건대 오늘의 금군(禁軍)은 곧 한(漢)나라의 우림기(羽林騎)이며, 당(唐)나라의 사생(射生)이며, 송(宋)나라의 전전병(殿前兵)이고, 명(明)나라의 금의위(錦衣衛)입니다. 여러 군사들 중에서 유독 임금을 위한 친병(親兵)인데, 옛날의 주 세종(周世宗)은 날래고 용맹한 군사를 제도(諸道)에 모아두고 장사(將士)를 모집해 전전(殿前)의 여러 반열에 소속시키니 이로부터 사졸이 정예화되고 강성해져서 가는 곳마다 이겼습니다. 송 태조(宋太祖)는 사신을 제도에 나누어 보내 재능과 기예(技藝)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자들을 모두 거두어서 금군에 충원하고 군량과 물품을 후하게 주고 몸소 훈련을 시켜 일당백(一當百)의 정예병을 만드니 여러 번진(藩鎭)들이 자기들의 병력이 경사(京師)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서 감히 다른 생각을 갖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원줄기를 강하게, 가지를 약하게 하는 기술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도적들이 서로 모여 의외의 변이라도 일으키지 않을까 항상 우려하시는데, 만약 제도로 하여금 날래고 씩씩하여 재능이 있는 자들을 모두 모집하여 서울로 보내 금군에 충원, 1천 명을 채우고, 군량과 하사품 그리고 훈련을 주(周)나라나 송(宋)나라의 고사에 따르고, 특별히 근신을 가려 통제하게 한다면 비상 사태시 힘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초야의 불량한 무리들도 서울의 군사가 강한 것을 두려워 할 것이니, 난동의 싹이 사그러질 것입니다.
신은 또 들으니 왕자(王者)는 토지 제도와 공부(貢賦)의 법이 있어서 모두들 이것으로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태었는데 후세에 와서는 경계(經界)가 느슨해져서 가렴주구(苛斂誅求)가 자행되었다 합니다. 우리 나라의 세금 거두는 법은 본디 헐하였는데 유독 공법(貢法)만은 연산(燕山)의 혼란한 정치를 거치면서 전결(田結)의 다소와 산물의 유무를 따지지 않았고, 함부로 덧붙여 정해서 백성들이 곤궁하게 되었으니 모름지기 대대적으로 균등하고 엄정하게 조절하여 지나치게 경중의 차이가 없게 한 뒤에야 민역(民役)이 균등하고 민력(民力)이 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백성이 살아가는데 곤궁함이 있으면 성왕의 법이라도 고칠 수가 있다.’고 했는데 하물며 이것은 연산의 혼란한 정치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까. 신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속히 묘당에 명하시어 사무를 잘 아는 여러 신하들과 성심을 다해 강구하여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한 호서(湖西)를 제외하고 그 나머지 모든 도의 공안(貢案)은 일체 바르게 개정하는 한편 손익과 가감은 중도를 얻도록 하소서. 이것이 바로 백성을 편하게 하는 급선무요, 고락이 반반이고 논의가 분분한 대동법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저 삼남(三南) 지방을 양전(量田)한 뒤에는 백성들이 날마다 번창하고 개간되는 토지도 날로 늘어나 옛날에는 경작하지 않았던 땅도 개간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각 고을에서 보고하는 바는 실제와 다른 것이 많으니 조금 풍년 든 해를 기다렸다가 관원을 보내 다시 양전을 해야 합니다. 전결(田結)이 이미 많으므로 세입이 자연 많아질 것이니 작은 수고로움은 꺼릴 것이 없습니다. 신이 앞서 말한 다스리는 대강(大綱)에 대해서는 이제 이미 대략 진달하였으니 그 자세한 항목이야 우선 논할 겨를이 없겠습니다만, 신이 삼가 보건대 오늘날 국사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모두 상하가 일개 사(私) 자를 타파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이 폐단을 바로잡고 공을 이룩하고자 함에는 지공(至公)한 마음으로 기강을 정돈하고, 지엄(至嚴)한 태도로 명분과 실제를 명확히 밝혀야 한다고 여깁니다. 기강이 정돈되고 나면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할 줄 알게 되고, 명분과 실제가 분명히 밝혀지고 나면 매사에 허위가 없게 될 것이니, 나라가 어찌 다스려지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삼가 생각하건대 지금 선비들의 습속이 경박하고 이익만 추구하여 특별히 교양하는 조치가 아니고서는 아무리 선비들이 학사(學舍)에 넘쳐난다 해도 끝내 인재가 이루어지는 효과는 없을 것입니다. 옛날 정자(程子)가 학제(學制)를 자세히 상고할 것을 명령받고 존현당(尊賢堂)과 대빈재(待賓齋)·이사재(吏師齋) 등을 두어 천하의 선비들을 맞아들일 것을 청하고, 이어 선비들의 행실을 검찰(檢察)하는 조목을 세웠습니다. 사람을 뽑는 법에 대해서는 일찍이 명도 선생(明道先生)이 조정에서 아뢰기를 ‘예로써 근시(近侍)들에게 명하여 어진 유자(儒者)를 마음을 다해 찾게 하되 성행(性行)이 단아하고, 집안에서 효제(孝悌)하며, 예의와 염치가 있고, 학업에 통달하며, 치도(治道)에 밝은 자를 태학(太學)에 뽑아 올려 조석으로 서로 정학(正學)을 강명(講明)하게 해서 해마다 조정에서 어진이와 유능한 자를 평론하게 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바로 삼대(三代) 때로부터 전해오는 선비를 가르치던 뜻인데, 두 정자053) 가 자기 임금에게 말하여 그 조정에서 시행하고자 한 것입니다. 지금 만약 이러한 뜻을 약간 본받아 근시의 신하로 하여금 자기가 아는 사람을 추천하게 하고, 제도(諸道)의 감사로 하여금 각기 자기 도의 현량(賢良)을 추천하게 해서 선발 방법을 한결같이 명도의 논의와 같이 하되, 전직 관원이나 생원 진사나 유학(幼學)을 불문하고 재주와 행실이 있는 자는 맞아들입니다. 그리하여 태학의 재(齋) 옆에 하나의 연영원(延英院)을 지어서 그 곳에 거처하게 하고, 본관(本館)의 당상(堂上) 및 사유(師儒) 이상과 날마다 경전(經傳)을 토론하고 치도(治道)를 논의하게 하는데, 아래로 농업이나 수리(水利), 군사 계획이나 군율(軍律), 제도나 문장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강론(講論) 연마하게 해서 마치 호안국(胡安國)의 호주(湖州)의 학규(學規)와 같이 하여 그 학문이 통달하고 재주와 지혜가 숙련되기를 기다려 조정에 보고해서 특별히 제수한다면 아마도 나라를 진흥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만약 성상의 마음에 느낌이 계신다면 대신과 예관으로 하여금 의논해서 조처하게 하소서.
신이 아뢴 말씀들은 경장(更張)이나 개혁에 관한 것이 많아 시론(時論)에 부합되지 않으니, 전하께서 비록 관례대로 묘당에 내리시더라도 필시 논자들의 반대가 있을 것임을 신은 알고 있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불러 접견하고 격려하며 하유하기를,
"나는 평소에 경을 심상한 일개 명사로만 알았는데, 시무(時務)에 이렇게 밝을 줄은 미처 헤아리지 못하였다. 경의 소에 대해 범연히 답할 수 없기 때문에 특별히 경을 불러 유시하는 것이다."
하고, 이어 그 소장을 책상 위에 펴 놓고 조목 조목 논란하면서 이르기를,
"경이 진달한 소장은 실로 차례대로 거행할 것이나 내가 기필코 먼저 시험하고자 하는 것은 마지막에 진달한 베[布]를 징수하고, 원을 설치하는 등의 일이다.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들과 익히 강론하여 시행하겠다. 다만 새로이 연영원을 설치하는 일은 유속(流俗)의 웃음거리가 될까 염려된다."
하였다.
11월 18일 갑진
홍중보(洪重普)를 승지로, 이진(李𥘼)을 집의로, 조귀석(趙龜錫)을 교리로, 이정기(李廷䕫)를 헌납으로, 이경억(李慶億)을 정언으로, 박경지(朴敬祉)를 경상 좌병사로 삼았다.
영돈녕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상소하기를,
"신이 비록 병으로 엎드려 있으나 잊지 못하는 작은 정성이야 어찌 조정에 있을 때와 다르겠습니까. 또한 추운 집에서 기나긴 밤에 엎치락 뒤치락 잠못 이룰 때면 번민이 더욱 심합니다. 하물며 상께서 재변을 만나 두려운 마음으로 반성하시는 때를 당하여 차마 한마디 말도 없이 남몰래 탄식만 하고 말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생각하건대 하늘의 견책에 답하는 도리로는, 먼저 임금의 덕을 닦아 화기(和氣)를 널리 펴고, 허물을 씻어 주어 인재를 거두어 들이는 일만한 것이 없는데, 변변찮은 말씀을 전일에 대강 진술했으니 지금 감히 다시 번거롭게 되풀이 하지 않겠습니다. 신은 지방에서 갓돌아 왔으니 도중에서 들은 말이 없지는 않으나 바쁘게 지나오다 보니 전말을 자세히 알 수 없고 조정의 처분이 또 어떠했는지 모르면서 성상께 갑자기 아뢰는 것은 성급한 일이기 때문에 묵묵히 날짜를 보낸지도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아, 신은 들으니 천재를 소멸시키려면 먼저 백성들의 원망부터 없애야 한다고 했습니다. 대개 하늘과 사람은 하나여서 백성이 원망하면 하늘이 노하고 노여움이 없어지면 재변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지금 백성들의 원한은 한두 가지만이 아니니 어찌 한 가지를 지적해서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한 귀퉁이 알고나면 나머지 세 귀퉁이는 자연히 알 수 있듯이 그 원한을 알고나서 즉시 따라 고치는 것 역시 재앙을 사라지게 하는 방도가 아니겠습니까?
신이 들으니 호서(湖西) 지방에는 염초(焰硝)를 굽는 일이 온 도내의 큰 폐단이 된다고 하는데 다달이 사들이는 외에 또 구워서 거두어 들이는데 사들이면 폐단은 줄고 수량은 넉넉한 반면, 구우면 비용은 많이 들면서 공력은 배나 됩니다. 조정에서 분부가 있었다 하면 모든 고을로 하여금 굽도록 하기 때문에 영남 지방같은 곳에서는 사사로이 사지도 못합니다. 신의 얕은 소견으로는 백성들을 괴롭히는 결과만 초래할 뿐 국가에는 이로움이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백리나 천리 사이에는 풍속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옛말에 ‘연(燕)나라에는 갑옷을 만드는 함인(函人)이 없다.’고 했는데 이것은 연나라에서는 누구나 갑옷을 만들기 때문에 별도로 장인(匠人)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으로 말하자면 제(齊)나라는 연나라에 가까우니 제나라에도 함인이 없어야 할 터인데 그렇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것은 풍속이 다른 때문입니다. 그러니 일의 쉽고 어려움이나 백성들의 폐단은 고려하지 않고 국가의 위엄으로 몰아 붙여 시킨다면 어찌 이루어지지 못할까를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마는, 비유하자면 길을 가는 사람이 평탄한 길을 버리고 험난한 길을 따라 가는 격이며, 의원이 원기는 가벼이 여기면서 사지(四肢)는 중히 여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불쌍한 우리 백성들은 너무나 고통이 많아서 비록 아무 일이 없을 때라고 농사짓는 여가에 공사(公私)의 온갖 역(役)에 밤낮으로 겨를이 없어 쉬는 날이 거의 없습니다. 다행히 금년에는 남쪽 지방에 흉년이 들지 않아 굶주리던 백성들이 배불리 먹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때에도 염초(焰硝)의 역을 책임지우니, 가난한 백성들의 집에 함토(鹹土)054) 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땔나무의 운송이 길에 잇달아 말이나 사람이나 마을에 편히 있지 못하고, 눈속을 헤매는 자들은 모두가 누더기 옷을 입은 자들로 원근이 소요스럽고, 탄식하는 소리가 들에 가득합니다. 이러한 현상들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장 써야 할 급박한 것이라면 다른 것은 헤아릴 겨를이 없겠지만 이러한 것은 우선 후일을 기다려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또 고을 중에는 쇠잔한 곳과 은성한 곳이 있고, 염초를 굽는 기능도 서툴거나 익숙한 정도가 다르니 구울 만하면 굽고 사들일 만하면 사들여서, 각기 편리한 쪽을 따르되 그 수량만 충족하면 되는 것이지 어찌하여 반드시 고을마다 구운 뒤에야 국가에 이익이 되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성명께서는 묘당으로 하여금 신중하게 품의하여 결정하게 하소서 그리고 영장(營將)의 설치는 폐단이 있으니 모두들 즉시 혁파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로는 애초에 잘 헤아려서 설치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인데, 지금 이미 임명하여 보냈으니 당분간 그대로 두고 대강 두서를 잡아 부서를 정돈하게 했다가 봄에 농사철이 되거든 편의에 따라 정지하게 한다면 백성들은 그 혜택을 입을 것이고 일에는 큰 탈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 직무를 잘 수행한 자를 선발하여 곤수(閫帥)를 시키거나 우후(虞候)를 삼기도 하고, 혹은 감영(監營)의 중군(中軍)이나 수령을 삼아 혹시라고 사변이 있을 경우 자기들 무리를 거느리게 한다면 이는 영장의 명목은 없으면서 영장의 실효는 있는 것입니다. 모든 우려는 살피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깊은 말은 글로 아뢰기가 어렵습니다. 이점에 대하여 성명께서는 어찌 모르시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성명께서는 깊이 생각하시어 선처하소서 아직 닥쳐오지 않은 걱정을 신이 분명히 말하고 싶지는 않으나 재변의 감응은 가까이에도 있고 멀리에도 있으며, 화란의 발생은 언제나 소홀함에서 비릇되는 것입니다. 근래 재변의 발생을 살펴보건대 간혹 대란(大亂) 전 1, 2년 간에 일어났던 것과 흡사한 것도 있는데 무슨 일입니까? 아, 괴이합니다. 만약 깊이 사려하지 않는다면 우환을 방지하려던 것이 도리어 화를 불러들이는 것으로 귀결될는지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군기(軍器)의 폐단에 있어서는 신이 일찍이 전일의 상소에서 그 대강을 진달했으나 묘당의 복계(覆啓)가 없었으니 그만 두어야 할 것입니다마는 일이 민폐와 관련되기 때문에 다시 성상의 총명을 번거롭게 하니 혹시라도 재결하여 따라주시기를 기대합니다. 대체로 쇠로 만든 화살촉도 세월이 오래 지나면 점차 가늘어지는데 하물며 나무와 뿔과 대나무와 깃털과 힘줄을 합쳐서 만든 것이 어찌 유독 오래도록 보존되어 망가지지 않겠습니까. 그 중에는 세월이 그다지 오래 경과하지 않아 수선할 수 있는 것을 수선하는 것은 당연합니다만, 세월이 오래되어 수선할 수 없는 것은 이름이 수선이지 실제는 새로 마련하는 것입니다. 다소간 물력(物力)이 있는 고을에서는 백성들을 번거롭게할 것도 없이 그런대로 마련할 수 있겠으나 그 숫자가 많고 물력이 부족한 경우에는 백성들에게 책임지우지 않고는 마련할 형편이 못 되는데 자기의 죄를 벗으려면 어느 여가에 백성들을 보살피겠습니까? 그 중에서 전쟁을 겪지 않은 고을이라면 전해 내려온 군기의 그 수량이 다른 곳의 십배 백배 뿐이 아닐터인데 또한 차등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변방의 쇠잔한 진보(鎭堡)는 더욱 가련하니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변장(邊將)이 무엇으로 마련할 수 있겠으며, 혈혈 단신으로 떨어진 가난한 군졸은 또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설사 군기가 많이 쌓여 있더라도 위급한 사태가 일어날 경우 얼마 안 되는 병력으로 다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임진 왜란 때의 사실은 들어서 알고 있고 갑자년055) 과 정묘년056) 이후의 사실은 목격을 해서 아는데, 대개는 위급을 당해서 군기를 버리는 자들이 무수했을뿐 군기가 부족해서 적을 막을수 없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지금 해야 할 계책으로는 고을의 쇠잔 여부를 구분하고 얼마나 오래된 것인가를 따져서 수리할 수 없는 것은 감축하여 기한을 정해서 새로 마련하게 하는 것입니다. 변방 진보(鎭堡)의 무기 비축은 현재의 군졸이 충분히 쓸 수 있을 정도로만 하고, 힘써 여분을 비축해 두었다가 공연히 적을 도와주는 자료가 되지 않도록 한다면 백성들의 폐단을 없애고 실용에는 부족이 없어 모든 일이 타당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허위가 뒤섞일 것을 염려한다면 병사(兵使)가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병사가 없다면 감사가 살펴서 일일이 검열하게 한다면 어찌 허위가 있겠습니까. 옛말에 이른바 ‘저의 병기는 밖에 있고, 나의 병기는 안에 있는 것이다.’라고 했으니 병기는 말단이고 민심은 근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심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그 근본을 먼저하고 말단은 뒤로 미루시고, 또 묘당으로 하여금 계획하고 품의하여 조처하게 하소서.
옛날 역사를 상고해 보니, 겨울철에 우레와 지진이 일어나는 변은 후비(后妃)나 외척의 전횡(專橫) 때문에 많이 나타난다고 했는데, 지금은 성명께서 위에 계시어 옛날과 같은 근심이 없는데도 옛날과 같은 재변은 있습니다. 이것이 성상께서 더욱 두려워하시면서 진언(陳言)을 듣고자 하는 것인데, 모르겠습니다마는 진언한 자 중에 전하를 위하여 진술한 자가 있었습니까? 아, 궁실의 화려함이나 담장과 가옥의 아름다움 때문에 어찌 갑자기 쇠망에 이르겠습니까마는 성왕(聖王)들이 이것을 자책하고 옛사람들이 이것으로 경계하였으니, 이는 아마도 사치하면 재화를 손상시키고 재화를 손상시키면 반드시 백성들에게 해가 돌아가기 때문이 아니었겠습니까? 공자도 ‘천승(千乘)의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용도를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해야한다.’는 것으로 훈계 하였으니, 어찌 헛말을 공자가 했겠습니까?
지금 궁중이나 외척중에 세도를 부리는 사람은 없으나 가옥이나 누대(樓臺)는 흡사 태평성대와 같습니다. 도성 안의 경치 좋은 곳에 웅장하고 화려한 가옥이 즐비한데 이는 선조조(宣祖朝)의 왕자나 옹주(翁主)들은 임진년 이후 수십여년 동안에는 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바로 소유하고 있습니다. 병자·정묘년의 난리가 어떠했는데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른단 말입니까? 그 비용을 따진다면 어찌 열 사람의 중인(中人)집 재산정도일 뿐이겠습니까? 아래에는 그 폐해가 더 심합니다. 토목 공사가 유행이 되어 곳곳에서 공사를 일으키고 다투어 크고 사치스럽게 하여 목재와 기와 값은 날마다 오르니, 재화를 손상시키고 백성을 해침이 이보다 심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산림과 천택(川澤)에는 공한지(空閑地)라곤 없고, 토지와 전원(田園)은 간간이 불법으로 점탈당하는 근심이 있는데, 국가에서도 자세하고 곡진하게 금하지 못하고, 백성들이 호소해도 그 원통함을 펼 수가 없으니, 이것 하나로도 민원을 초래하고 천재(天災)을 불러 올 충분한 이유는 되는 것입니다. 중첩되는 재변이 어찌 유래가 없이 그렇겠습니까?
신이 요즈음 또 마음 속으로 개탄스럽게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관서(關西) 지방 선비로서 신에게 내방한 자가 있었는데 그의 말에 ‘평양에서 자산(資産)으로 삼고 있는 것은 동쪽과 서쪽 교외에 있는 초장(草場)과 부근의 둔전(屯田) 및 중화(中和)의 해변에 딸린 취철소(取鐵所)인데, 갑자기 두 부마(駙馬)의 집에 절수(折受)되었다. 감사 허적(許積)이 사유를 갖추어 치계했지만, 환급하라는 명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준엄한 하교를 하시어 왕자(王者)다운 덕에 어긋남이 있었다. 지금 소를 올려 진달하고 싶지만 허적의 지시를 받은 것이라고 조정에서 의심할까 보아 감히 하지 못한다.’하였습니다. 그 말이 참으로 사실입니까. 신은 감히 믿을 수가 없어서 두번 세번 물었으나 대답은 처음과 같았습니다. 아, 이 말이 사실이라면 서쪽 지방 백성들의 실망이 큽니다. 객사(客使)의 행차가 잇달아, 접대해야 할 일이 갖가지이니, 비록 위에서 덜어 아래를 보태 주는 정사를 한다고 해도 오히려 지탱할 수 없을 것인데, 관부(官府)에서 밑천으로 삼고 있는 땅을 빼앗아 궁가(宮家)의 사유물로 만들었으니 백성들이 장차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만약 민간의 폐해와 고통을 들으시거든 하나하나 철저히 혁파하여 다시는 아끼고 숨기는 마음을 갖지 마시어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일분의 혜택이나마 입에 하소서,
아, 전하께서는 큰일을 할 수 있는 분이시니, 마음을 비우고 받아드리는 도량을 힘써 넓히시면 어찌하여 옛날처럼 다스리지 못하겠으며, 이찌 원망을 사라지게 할 수 없겠습니까. 지금의 계절은 바로 양(陽)이 회복되는 때입니다. 복괘(復卦)의 초구(初九)에 이르기를 ‘머지 않아서 되돌아오니 후회가 없다. 크게 길하다. ’고 하였고, 정자(程字)의 전(傳)에 이르기를 ‘잃어버린 뒤에야 회복할 것이 있는 것이다.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다시 무슨회복할 것이 있겠는가. 다만 잃어버린 지 오래지 않아 회복한다면 후회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아 매우 좋고 길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학문하는 방도도 다른 것이 아니라 좋지 않은 것은 속히 고쳐서 좋은 쪽으로 따라가는 것일 뿐입니다. 이 괘의 뜻이 지금의 형세에 가장 절실한 것이니 성상께서는 깊이 생각하시고 몸소 실천하신다면, 일을 하고 덕을 닦는 데에 크게 좋고 길하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힘쓰소서.
신은 은혜가 뼈에 사무치나 보답한 길이없습니다. 오직 품고 있는 생각은 반드시 아뢰어야 한다는 것이 평소의 마음이기 때문에 감히 들은 것을 전하를 위하여 아뢰는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의 충성스런 마음은 나오거나 물러가거나 다름이 없이 이렇게 간절하니, 경탄하고 가상한 마음이 끝이 있겠는가. 내가 비록 불민하나 깊이 생각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11월 19일 을사
달이 헌원성(軒轅星)을 범하였다.
전남도에 해일이 있었다.
이조 판서 정유성(鄭維城)이 여러 차례 소를 올려 사직을 청하니 상이 우대하는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23일 기유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했는데, 특별히 사관(史官)을 보내 심지원(沈之源)을 불렀다. 지원이 명을 받들고 예궐하니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근래 인심이 위태하고 뜬소문에 인심이 동요되는 것이 지난번과 다름이 없는가? 심지어는 밤중에 남산에 올라 큰 소리를 외치는 자까지 있다고 하는데 그런가?"
하니, 지원이 아뢰기를,
"그것이 사실입니다. 재신(宰臣)중에 직접 들은 이도 있습니다."
하고, 대사헌 홍무적(洪茂績)이 아뢰기를,
"이는 반드시 난민(亂民)일 것이니 잡아다 효시(梟示)해야 합니다."
하고, 이조 참판 홍명하(洪命夏)는 아뢰기를,
"민심의 동요가 나날이 심하고 변괴의 발생이 갈수록 많아지니 신은 뜻밖의 우환이 외적의 침입에 있지 않고 내부에 있지 않을까 우려합니다. 일찍이 선조(先祖) 때 호위 대장(扈衛大將) 네 사람을 대신이 겸임하여 서울의 형세를 강하게 했었는데, 난리 이후에는 경비 부족으로 인하여 두 대장은 파하였습니다. 이제 이렇게 위태하니 두 대장을 다시 두어 김육(金堉)과 심지원으로 겸임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시백(李時白)·구인후(具仁垕)에게 묻자, 모두들 가하다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들의 의사가 이와 같으니 신중히 의논하여 조처하겠다."
하였다.
11월 24일 경술
박세모(朴世模)·정식(鄭植)을 정언으로 삼고, 이경억(李慶億)을 특별히 수찬에 제수하였다. 이조가 아뢰기를,
"경억의 재주나 명망은 실로 이 직에 합당합니다. 그러나 다만 홍문록(弘文綠)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상규(常規)와는 어긋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내가 발탁한 것인데, 이찌 한두 옥당 관원이 사정(私情)에 따라 권점(圈点)을 한 홍문록이라 하는 것만 못하겠는가."
하였다.
헌부가 【대사헌 홍무적, 지평 유창(兪暢)이다.】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홍문록 제도는 그 유래가 오래된 것으로 반드시 홍문록에 든사람을 주의(注擬)하는 것은 바꿀 수 없는 법입니다. 이번의 이경억은 재주나 명망이 다른 사람에게 뒤지지않으니 그의 홍문관직에 누가 이의를 달겠습니까. 다만 조종조의 고사이기 때문에 가벼이 허물어뜨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사(政事)의 체모로 살펴보더라도 실로 뒷폐단이 있을 것이니 특별히 제수하신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고,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함경도에 기근이 들었다.
11월 25일 신해
이행진(李行進)을 도승지로 삼았다.
11월 26일 임자
금부가 대간의 아룀에 따라 전 통제사(統制使) 황헌(黃瀗)이 범한 장물(贓物)을 조사했는데, 쌀과 콩이 수백 곡(斛)이고, 면포가 5백여 필, 다른 물화도 이와 맞먹었다. 상이 하교하기를,
"황헌이 이미 장오죄(贓汚罪)를 크게 범했으니 마땅히 형신(刑訊)을 가해야겠다. 그러나 다만, 선왕조에 역적이 난을 꾸며 일이 급박하게 되었을 때 이 사람이 먼저 고발함으로써 종사가 그 덕택으로 편안하게 되었다. 굳은 맹약으로 후세까지 영원히 변치 말자고 맹세했으니 법을 굽혀 사형을 용서해 주지 않을 수 없다. 멀리 유배만 시켜서 그 목숨을 보존하도록 하라."
하였다. 금부가 강계(江界)에 정배하니 양사가 여러 차례 율에 따라 죄를 정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11월 30일 병진
윤강(尹絳)을 대사헌으로, 안후직(安後稷)을 지평으로, 오정원(吳挺垣)을 수찬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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