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일 무오
함경도에 큰 눈이 내려 얼어 죽은 백성까지 있었다.
12월 5일 신유
총융사(摠戎使) 김응해(金應海)를 보내 경기 여러 고을의 군사와 병기들을 점검했는데, 수원(水原)이 도내에서 최고였다. 부사 유혁연(柳赫然)에게 내구마(內廐馬)를 하사하라 명하였다.
12월 6일 임술
전 판서 남선(南銑)이 졸하였다.
12월 12일 무진
충청도에 우레가 쳤다.
연소한 무신들을 뽑아 《무경칠서(武經七書)》를 강하였는데, 도승지 윤강의 말을 채용한 것이다.
12월 13일 기사
조귀석(趙龜錫)을 헌납으로, 이정기(李廷䕫)를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전 판서 심액(沈詻)이 졸하였다.
12월 15일 신미
홍종운(洪鍾韻)을 장령으로, 송시철(宋時喆)을 정언으로, 이경휘(李慶徽)를 부수찬으로 삼고, 종성 부사(城鍾府使) 조석윤(趙錫胤)을 동지중추부사로 특별히 제수하였다.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여러 대신에게 묻기를,
"일전에 홍명하가 호위 대장을 더 두어 김육(金堉)과 심지원(沈之源)에게 겸직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떤가?"
하니, 영의정 이시백, 좌의정 구인후(具仁垕)가 대답하기를,
"이렇게 인심이 위태로운 때를 당하여 특별히 노신(老臣) 등으로 이런 중임을 겸임시켜야 한다는 명하의 말은 매우 옳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만약 사변이라도 생길 경우 네 대장으로 하여금 교대하여 호위하게 한다면 어찌 의지하는 형세가 되지 않겠는가."
하고, 상이 또 여러 신하들과 연영원(延英院)의 일을 의논하였다. 시백이 아뢰기를,
"만약 별도로 이 원을 설치하였는데도 부름에 응하는 선비가 없을 경우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설사 부름에 응하는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부박한 무리들의 조소거리가 될터이니 선발되는 사람 또한 어찌 능히 편안할 수 있겠는가."
하고, 모두들 아뢰기를,
"지금과 옛날은 다르니 가벼이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대신에게 이르기를,
"나는 이경여(李敬輿)·이경석(李景奭) 등을 당분간 외방으로 피해 나가 있게 했으면 하니, 경은 나의 뜻으로 은밀히 하유하라."
하였다. 이는 조정에서 일찍이 경여 등이 먼 변방에 물러나 칩거하도록 했다고 청국에 말했는데, 이때 청나라 사신이 도착하게 되었으므로 일이 누설될까 두려워 이런 전교가 있었다. 이에 경여는 충주(忠州)로 가고 경석은 안협(安峽)으로 갔다. 길을 떠나면서 모두 소를 올려 사직하니, 사관을 보내 은밀히 하유하였다.
12월 16일 임신
상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중외(中外)의 사형수들을 초복(初覆)하였다.
12월 18일 갑술
상이 선정전에 나아가 중외의 사형수들을 또 복심(覆心)하였는데 곧 삼복(三覆)이다. 우의정 심지원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죄인을 신중히 다루시는 인자하심은 지극하십니다. 그런데 감사나 병사 및 수령들이 성상의 뜻을 체득하지 못하고 간혹 형장(刑杖)을 남용하여 가벼이 인명을 해치는 자가 있으니 참으로 한심합니다."
하니, 상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근일 여러 차례 형벌을 신중히하라는 하교를 했으나 외방의 대소 관원들이 그대로 봉행하지 못하여 형벌을 과용, 인명을 죽게까지 한다니 이를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인명은 지극히 중한 것이니 비록 사죄를 범하였더라도 오히려 두 번 세 번 복심(覆審)해야 하는데, 하물며 일시적인 분노로 사람을 죽게 해서야 되겠는가. 모름지기 이러한 뜻을 팔도에 전유(傳諭)하여 멋대로 형벌을 가하지 말도록 해서 형벌을 신중히 시행하는 조정의 뜻을 체득하게 하라."
하였다.
12월 19일 을해
조계원(趙啓遠)을 경기 감사로, 심택(沈澤)을 평안 감사로, 윤집(尹鏶)을 사간으로, 이연년(李延年)을 부교리로 삼고, 특별히 유혁연(柳赫然)을 승지로 제수하였다. 혁연은 무인 형(珩)의 손자요. 효걸(孝傑)의 아들인데, 수원 부사(水原府使)가 되어 병사들의 훈련과 병기의 수리를 잘 하였는데 상이 유능하다고 여겨 특별히 이 직에 제수한 것이다.
12월 20일 병자
목행선(睦行善)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헌부가 아뢰기를,
"승지의 직임은 근밀(近密)한 자리인데, 무신으로서 여기에 선임된 경우는 국조 이래 전혀 없었습니다. 유혁연이 비록 약간의 재능과 인망이 있다고는 하지만 특별히 제수하시는 명을 뜻밖에 내리니, 제수의 명이 한번 내리자 여론이 모두 놀라워합니다. 내리신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12월 22일 무인
함경도에 큰 눈이 와서 백성 중에 눈에 깔려 죽은 자도 있었다.
김소(金素)를 승지로 삼았다.
12월 24일 경진
사관을 보내 전옥서(典獄署)에 갇혀 있는 죄수들을 점검하게 하고, 하교하기를,
"지금 사관이 서계(書啓)한 것을 보니 죄수 8인의 옷이 홑옷이어서 조석을 보전하지 못할 것이라 하는데, 이렇게 추운 겨울에 오래도록 같혀 굶주리고 헐벗고 있으니 불쌍함을 이루말할 수 없다. 해조로 하여금 유의(襦衣)를 지어 나누어 주도록 하고, 또 땔나무를 지급하라. 그리고 이러한 뜻을 각도에 하유하여 옥에 갇힌 죄수들에게 땔나무를 지급하여 불쌍히 여기는 나의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25일 임오
도목 정사(都目政事)가 있었다. 유도삼(柳道三)을 승지로, 채충원(蔡忠元)을 부응교로, 이단상(李端相)을 이조 좌랑으로, 이형(李逈)을 헌납으로, 이재(李梓)를 보덕(輔德)으로 삼았다.
12월 26일 계미
조수익(趙壽益)을 부제학으로, 오준(吳竣)을 우빈객(右賓客)으로, 강호(姜鎬)를 장령으로, 심유행(沈儒行)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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