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3일 무자
김익희(金益熙)를 대사헌으로, 남천택(南天澤)·윤징지(尹澄之)를 지평으로 삼았다.
상이 대신과 비국(備局)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수어사(守禦使) 이시방(李時昉)이 아뢰기를,
"남한 산성 안에 군량을 장만하여 두려 하나 달리 처리할 방책이 없으니, 강가에 있는 각 고을의 세미(稅米) 5, 6천 석을 산성에 운반하여 급할 때에 군사를 먹일 거리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수량이 1만여 석에 이르더라도 죄다 남한에 날라 두도록 하라."
하였다. 이시방이 또 아뢰기를,
"충주(忠州)는 관곡(官穀)이 가장 많으니, 재고 모곡(秏穀)의 10분의 3을 또한 산성에 날라 두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승지 홍처대(洪處大)가 아뢰기를,
"접때 연중(筵中)에서 백마 산성(白馬山城)을 【의주(義州)에 있다.】 수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들이 사적인 편지로 평안 감사에게 비밀리 물었더니, 산성의 포루(砲樓)와 창고가 거의 다 무너져서 이제 수축하려 하나 소문이 번거로울 것이므로 바야흐로 중들을 모아 절을 짓고 이어서 산성을 수리하려 한다고 회답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혹 번거롭게 누설되면 매우 염려스러울 것이니, 중들이 짓게 하는 생각은 좋을 듯하다."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올 정월 19일은 영가 부부인(永嘉府夫人)의 소상(小祥)입니다. 왕비께서 변복(變服)하시는 절차가 있어야 할 것인데, 《오례의(五禮儀)》에 왕비가 부모에 대하여 복(服)을 벗는 조목에서 ‘본복(本服)은 열석 달 만에 벗으나 공제(公除)의 예(禮)는 열사흘 만에 벗는다.’ 하였으므로 초상(初喪) 때에 이미 공제의 예를 행하였으니, 소상 날에는 벗을 상복(喪服)이 없습니다. 그 날 새벽에 소복(素服)으로 내정(內庭)에서 망곡(望哭)하고 이어서 소복을 벗고 곧 길복(吉服)을 입습니다마는, 그 날은 첫 기일(忌日)이라 길복으로 하루를 다 지낼 수 없으니, 소복을 벗고 길복을 입어 곡림(哭臨)한 뒤에 길복을 벗고 천담복(淺淡服)을 입으며 이튿날 도로 길복을 입으셔야 정(情)과 예(禮)에 맞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조(吏曹)가 아뢰기를,
"공주(公州)·금산(錦山)·용담(龍潭)의 강호(降號)와 은진(恩津)·이산(尼山)·연산(連山)·진안(鎭安)의 혁파(革罷)는 모두 연한이 찼으니, 모두 승호하고 복설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월 4일 기축
입직(入直)한 장관(將官)·군병(軍兵)에게 인정전(仁政殿) 뜰에서 술을 내리라고 명하였다.
평안 감사 심택(沈澤), 수원 부사 김수인(金壽仁)이 사조(辭朝)하니, 모두 소견(召見)하여 면유(面諭)하였다. 소환(小宦)에게 명하여 강궁을 가져오게 하여 특별히 김수인에게 내리고 이르기를,
"너는 팔의 힘이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하는데, 당겨 보라."
하매, 김수인이 황송해서 한껏 당기지 못하니, 상이 빙그레 웃고 이어서 갑주(甲胄)와 궁전(弓箭)을 내렸다.
1월 5일 경인
안악 군수(安岳郡守) 정집(鄭䌖), 강화 경력(江華經歷) 한수원(韓壽遠), 영원 군수(寧遠郡守) 유정(兪椗), 홍산 현감(鴻山縣監) 이치(李穉)가 사조하니, 면유하여 보냈다.
1월 7일 임진
성하명(成夏明)을 사간으로, 윤집(尹鏶)을 사인으로 삼았다.
1월 8일 계사
대제학 채유후(蔡𥙿後)·대사성 김익희(金益熙)를 명소(命召)하여 좌승지 김좌명(金佐明)과 함께 성균관에서 유생에게 제술(製述)을 시험하게 하였다. 진사 서문상(徐文尙)이 수석을 차지하였는데, 직부 회시(直赴會試)를 명하고, 그 나머지에게는 급분(給分)001) 하고 차등을 두어 물건을 내렸다.
1월 9일 갑오
허적(許積)을 원접사로 삼았다. 정2품 중에는 합당한 사람이 없으므로 대신이 연중(筵中)에서 허적을 천거하니, 자급을 높여서 차출하여 보냈다.
1월 12일 정유
상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하였다.
상이 조강(朝講)에 나아가 《시전(詩傳)》 실솔장(蟋蟀章)을 강독하였다.
대사헌 김익희(金益熙)가 황헌(黃瀗)이 범장(犯贓)한 물건을 관에 몰수하기를 청하니,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대신이 아뢰기를,
"황헌은 이미 그 사죄(死罪)를 용서하였으니 관에 몰수하는 법은 경솔히 의논하기 어려울 듯합니다마는, 두 도(道)에서 나타난 범장한 쌀과 베는 대신(臺臣)이 아뢴 대로 모두 속공(屬公)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월 15일 경자
전창군(全昌君) 유정량(柳廷亮)을 사은사로, 오정일(吳挺一)을 부사로, 강호(姜鎬)를 서장관으로, 채충원(蔡忠元)을 집의로, 이경휘(李慶徽)를 교리로 삼았다.
1월 16일 신축
관상감(觀象監)이 아뢰기를,
"역서(曆書)를 고치는 것은 왕법(王法)의 급선무입니다. 역법(曆法)이 오래되면 차이가 나므로 수시로 개정하니, 1백 년이 지나도 수정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수시력(授時曆)》은 이미 3백 년이 지나서 천문에 어그러지는 증험이 많이 나타나므로 숭정 초(崇禎初)에 비로소 서양의 역법을 구하여 여러 해 시험하면서 그 논설이 정밀한 것을 살피어 제가(諸家)의 허술한 것을 한결 새롭게 변모시켰는데, 이따금 이의하는 자가 있었으나 다들 그 까닭은 지적하여 말하지 못했습니다. 일찍이 성상의 하교에 따라 술관(術官) 김상범(金尙範)을 북경에 두 번 보내어 그 방법을 배워 오게 하였는데 중도에서 병으로 죽었습니다. 역법에 정통한 자를 다시 가려서 사신의 행차에 딸려 보내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월 17일 임인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양지수장(揚之水章)을 강독하였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강화 유수 정세규(鄭世規)도 입시하였다. 상이 강도(江都) 연변에 보(堡)를 설치하는 것이 편리한지를 신하들에게 물었는데, 신하들의 대답이 각각 달랐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반드시 물가에 보를 미리 설치하려는 것은 강도의 관부(官府)가 깊은 곳에 치우쳐 있고 물가에는 방비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유수는 관부 안에 깊이 있으니, 변이 갑자기 일어나면 어찌 손을 쓸 수 있겠는가. 관부 안에 무기가 있더라도 일이 급해진 뒤에야 비로소 물가에 옮기므로 형세가 미치지 못하는 것을 병자년002) 의 난 때에 내가 친히 보았다. 물가에 보를 설치하면 국가가 난을 당하여 들어가 있더라도, 각보의 변장(邊將)이 스스로 방비할 것이다. 보를 설치하고 백성을 모집하여 살게 하면 유랑하며 할 일 없는 백성은 반드시 응모하여 들어갈 자가 있을 것이다. 다른 곳에 있는 소속 진졸(鎭卒)에게서 베를 거두어 진하(鎭下)의 군졸에게 주면 또한 좋지 않겠는가. 대개 토병(土兵)으로서 옮기려 하는 자는 옮기고 옮기기를 바라지 않는 자는 굳이 옮길 필요가 없을 것이다. 승천부진(昇天府津) 연미정(燕尾亭)부터 덕포(德浦)까지 안팎의 형세를 굳히면 방어에도 이롭지 않겠는가. 무릇 병가(兵家)의 형세에는 안이 충실하고 밖이 허술한 것이 있으나, 지금은 안팎이 다 허술하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다른 일을 모두 치워버리고 빨리 보를 설치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또 이르기를,
"물가에 변장을 설치하는 것은 바로 급할 때에 쓰기 위한 것이다. 강도가 하늘이 낸 참호라고 하는 것은 지킬 수 있기 때문인데, 지키지 못한다면 하늘이 낸 참호가 무슨 소용인가. 국가에 인재가 모자란다고는 하나 어찌 변장에 합당한 한두 사람을 얻지 못하겠는가."
하였다. 또 정세규에게 이르기를,
"철곶(鐵串)은 벽란도(碧瀾渡) 하류인데 실로 요충지이고, 정포(井浦)는 교동(喬桐) 하류인데 긴요한 곳이 아닌 듯하다. 정포를 철곶에 옮겨 설치하면 어떠한가? 한 섬 안에서 동쪽을 헐어 서쪽을 채우는 것이 실로 구차하나 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하매, 정세규가 아뢰기를,
"정포는 실로 난바다[外洋]를 망보는 중요한 곳인데 이미 설치한 진(鎭)을 어찌 도로 철폐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먼저 화량진(花梁鎭)을 옮기고 해서(海西)의 한 진도 옮겨 들여와야 하겠다. 연변에 네 진을 아울러 설치하고 또 각각 변장을 두어 늘 그 진에 머무르게 하면 유수의 영을 기다리지 않아도 급할 때에 스스로 대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병조 판서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이제 정세규를 시켜 강도에 돌아가서 땅의 형세와 토병이 들어가 살 만한 형편을 상세히 살펴보고 혹 비국에 비밀리에 보고하거나 비밀리에 계문하게 하여 처치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해서의 진보(鎭堡)는 긴요한지 아닌지를 살펴서 천천히 옮겨 들여오는 것이 또한 옳겠습니다."
하고, 우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네 진을 한꺼번에 죄다 설치할 수는 없더라도, 연미(燕尾)·갑곶(甲串)은 가장 요충지이니, 먼저 두 진을 설치하고 본부(本府)의 장관(將官)이 본부의 군졸을 거느리게 하되 혹 중군(中軍)이라 부르거나 천총(千摠)이라 부르고 늘 물가에 있게 하는 것이 또한 방비하는 도리에 맞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 진에는 본부 사람이 있고 한 진에는 화량진의 군졸을 옮기는 것이 옳다."
하였다. 원두표가 아뢰기를,
"본부의 조곡(糶穀)을 아직 거두지 못한 것 6천 석만은 그 갑절을 거두어야 하겠으나, 그 나머지는 탕감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정세규가 아뢰기를,
"거두지 못한 곡물은 이자를 더 이상 거두지 않는 자모정식(子母停息)의 법으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법은 법령인가?"
하였다. 영의정 이시백(李時白)이 아뢰기를,
"강도는 다른 곳과 다릅니다. 자모의 법으로 거두더라도 잃는 것은 많지 않고 민심을 얻는 것은 클 것입니다."
하고, 심지원이 아뢰기를,
"자모정식은 예전에 그 법이 있었으니, 이 법으로 거두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하고, 원두표가 아뢰기를,
"강도는 국가가 의지하는 곳입니다. 이번에 유수가 입조(入朝)하였다가 돌아가면 온 경내의 백성이 모두 바람이 있을 것인데, 어찌 위로하여 기쁘게 하는 일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정세규가 아뢰기를,
"강도의 백성은 병자년의 난 때에 열 사람 가운데에서 한 사람도 남지 않았고 다행히 살아 남은 자도 아비는 아들을 잃고 아내는 지아비를 잃었으므로 난리를 언급하면 지금까지도 눈물을 흘립니다. 지금 주민이 드물고 살길이 어려운 것이 다른 곳보다 휠씬 더하므로, 보장(保障)이 아니더라도 국가가 조세를 감면하여 그 힘을 펴게 해야 할 것인데, 부역(賦役)을 내는 것이 다른 고을과 같으니, 돌보는 뜻이 전혀 없습니다. 게다가 전후의 유수가 혹 관사를 짓거나 창고를 지어 토목일이 없는 해가 없었으므로 살아 남은 백성이 편히 살지 못합니다."
하니, 상이 슬퍼하며 이르기를,
"옛사람이 ‘고치에서 실 뽑듯이 가혹하게 거둘 것인가, 백성을 울타리로 삼을 것인가?’ 하였거니와, 울타리로 삼는 방도는 백성의 마음을 얻는 것이 상책이다. 민심을 잃는다면 백만의 곡물을 저축하더라도 무엇이 이롭겠는가."
하였다. 정세규가 선혜청이 받아들여야 할 쌀을 반으로 줄이기를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원두표가 아뢰기를,
"인천부(仁川府)부터 제물도(濟物島)까지는 7, 8리이고 제물부터 자연도(紫燕島) 태평암(太平巖)까지는 10리이고 자연부터 강도 덕포까지는 30리인데, 수로(水路)가 매우 좁아서 한겨울에는 혹 얼어 막히게 되나 며칠 지나지 않아서 녹아 흐르므로 오히려 경쾌선(輕快船)은 다닐 수 있고, 제물과 자연 사이에 또 작은 섬이 있는데 녹아 흐를 때에는 또한 모두 다닙니다. 태평암의 바다 어귀에는 30여 척의 배를 정박할 수 있고, 자연도의 둘레는 20여 리입니다. 섬 이름은 제물이고 바위 이름은 태평이라 하여 주민이 복지(福地)라고 자랑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강도로 가는 길은 반드시 갑곶을 거쳐야 하는 줄 알 뿐이고 자연으로 해서 강도로 들어가는 것을 모르니 더욱 좋다."
하였다. 이조 참판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신이 이제 자연의 일을 주관하는데 배가 가장 장만하기 어렵습니다. 통영(統營)과 삼남(三南)의 병영(兵營)·수영(水營)을 시켜 배를 만들어 올려보내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헌 김익희(金益熙)가 아뢰기를,
"강도에 진을 설치할 때에 반드시 동쪽을 헐어서 서쪽을 채울 것이 없습니다. 공천(公賤)과 내노(內奴) 수천 인을 옮겨 들여 보내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신이 일찍이 강원 감사이었을 때에 조종조(祖宗朝)에서도 공천을 잔폐한 여러 역(驛)에 옮겨 준 것을 보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것도 좋겠다."
하였다. 또 정세규에게 강도 둘레의 원근(遠近)과 험이(險易)의 형세를 물으매, 정세규가 그 형상을 가리켜 아뢰었다. 상이 정세규와 형편을 논란하고, 이어서 이르기를,
"여느 때에 벽돌을 많이 만들어 두어야 한다."
하였다.
이때 상이 중원(中原)이 오래도록 어지러운데 피폐(皮幣)003) 만을 일삼고 눈앞의 편안한 것을 꾀하며 세월을 보낼 수 없다 하여, 성지(城池)를 수리하고 군사를 단련하여 스스로 강해지는 방책으로 삼으려 하였다. 좌우 별장(左右別將)을 따로 두어 금려(禁旅)를 나누어 거느리게 하고 친히 금중(禁中)에서 시열(試閱)하고, 또 삼남에 영장(營將)을 두었다. 원두표는 강화(江華)를 맡고, 이후원(李厚源)은 안흥(安興)을 맡고, 이시방(李時昉)은 남한 산성(南漢山城)을 맡고, 홍명하는 자연도를 맡아, 각자 수선(修繕)하고 저치(儲峙)하게 하였다. 번번이 연석(筵席)에 임하면 원두표 등과 강론하고 계획하되 해가 기울어도 피곤해하지 않았다.
나주(羅州)에서 전패(殿牌)를 파손한 변이 있었는데 도신(道臣)이 아뢰니, 그 읍호를 낮추어 금성현(錦城縣)으로 하였다.
1월 19일 갑진
목내선(睦來善)을 지평으로 삼았다.
헌부가 아뢰기를,
"맹산 현감(孟山縣監) 이응선(李應善)은 부사(府使) 이홍기(李弘箕)의 아직 양인(良人)이 되지 못한 종입니다. 법조(法曹)를 시켜 천파(賤派)를 살피게 하되 그것이 확실하거든 제수한 고신(告身)을 불사르고 불법으로 벼슬길에 통한 그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20일 을사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詩傳)》 초료장(椒聊章)·주규장(綢繆章)·체두장(杕杜章)을 강독하였다.
1월 22일 정미
달이 심전성(心前星)을 범하였다.
1월 24일 기유
상이 예조에 하교하여 해마다 정월에 조참(朝參)을 여쭈어 행하게 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고구장(羔裘章)·무의장(無衣章)을 강독하였다. 강독이 끝나고서 예조 판서 이후원(李厚源)이 아뢰기를,
"강도(江都)는 원두표(元斗杓)가 주관하여 이미 성취한 것이 되었으나, 안흥진(安興鎭)으로 말하면 성지(城池)·기계(器械)가 없습니다. 이는 격포(格浦)와 함께 다 같은 요충지인데, 장차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람들의 소문을 번거롭게 하지 말고 경이 반드시 가서 형편을 살핀 뒤에야 섬의 크기와 배가 정박할 만한지를 알아서 조처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안흥에 가 보도록 하라."
하였다. 이후원이 아뢰기를,
"동몽교관(童蒙敎官) 4원(員) 이외에 따로 분교관(分敎官) 4원을 두고 그 근만(勤慢)을 살펴서 성취한 사람이 있으면 혹 실교관(實敎官)으로 높이거나 다른 벼슬을 제수하는 것이 당초 창설한 본의입니다. 요즈음 보면 분교관이 된 자는 전 교관이라는 이름을 노려 처음 입사하는 계제를 삼으려 할 뿐이고 직무를 거행하는 자가 전혀 없어서 차출되었다가 곧 갈리므로 실효가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이조를 시켜 도목정(都目政) 때마다 예조의 이문(移文) 가운데에 성효(成効)한 자가 있으면 당초에 아뢴 뜻에 따라 혹 실교관으로 높이거나 다른 벼슬을 제수하고, 성효가 없고 곧 갈린 무리는 전함(前銜)으로 시행하지 마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월 25일 경술
상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하였다.
상이 전 동래 부사(東萊府使) 임의백(任義伯)을 소견(召見)하여 묻기를,
"너는 동래에 오래 있었으니 일본(日本)의 사정에 대해 보고 들은 것을 아뢰도록 하라."
하매, 임의백이 아뢰기를,
"신이 동래에 있을 때에 들으니, 일본은 백성이 매우 번성하고 살길은 매우 어려우므로 저희끼리 도륙하여 강한 자가 약한 자의 고기를 삼킨다 합니다. 원가강(源哥康)004) 이 심처왜(深處倭)를 진복(鎭服)하려고 강호(江戶)로 거처를 옮겼는데, 강호와 왜경(倭京) 사이는 길이 머나 인가가 촘촘히 잇달아서 여염이 번성한 것이 우리 나라의 종가(鍾街)와 같고 군사가 많기도 예전에 없던 것이라 합니다. 남조(南朝)의 신사(信使)가 서로 통하고부터 상선(商船)이 잇달아 와서 왜경에 정박한다 합니다. 접때 남조에서 왜국에게 군사를 청하니, 왜인이 ‘조선은 교린(交隣)의 정분이 두터우므로 급한 일이 있으면 구제할 수 있으나 남조는 일찍이 서로 통한 의리가 없으므로 구제할 수 없다.’ 하므로 남조의 사신이 통곡하며 가지 않고 그대로 왜국에서 죽었는데, 근래 그 의논이 조금 변하여 혹 구제하려는 의논이 있다 합니다. 또 왜인이 늘 남조는 형세가 강성하고 청국은 쇠잔하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남조가 과장한 말인 듯합니다. 또, 왜경은 인심이 매우 나쁘지는 않으나, 마도(馬島) 사람은 그 나쁜 것이 유난히 심한데 도주(島主)가 어리석으므로 장차 그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 줄 것이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원가(源家)가 풍신수길(豊臣秀吉)을 칠 때에 맨 먼저 임금을 시해한 죄를 묻고 다음에 조선 사람을 함부로 죽인 죄를 물었으니, 그 자손이 어찌 그 조훈(祖訓)을 어기겠습니까. 원가가 그 나라에 오래 살아있는 것이 실로 우리 나라의 이익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에 들으니 그 나라에 평가(平哥)의 양자가 있다 하던데, 그 사람이 아직 살아 있고 또 기세가 있는가?"
하매, 임의백이 아뢰기를,
"그 사람이 아직 살아 있고 마음에 원한을 품고 있으나, 관백(關白)의 친족이 다 국정을 잡았으니, 다른 걱정이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임의백이 또 아뢰기를,
"임진년에 강호(講好)한 뒤에 도주가 강호에서 사자(使者)를 보내는 것은 우리 나라에 폐단이 있다고 관백에서 말하여 도중(島中)에서 임시 직함으로 사자를 보내는데, 이른바 제1선(第一船)이 이것입니다. 그 뒤에 평조신(平朝信)005) 이 화호(和好)를 자기 공이라 하므로 우리 나라에서 벼슬을 주고 배를 주었는데, 혹 세견(歲遣)이라고도 하고 특송(特送)이라고도 하여 이름이 여러 가지이고 주는 것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평조신이 죽은 뒤에는 평조흥(平朝興)006) 이 대신하여 그 배를 받았고, 평조흥이 또 그 아비의 원당(願堂)을 위하여 향화선(香火船)을 얻기를 청하자 조정에서 허락하였습니다. 이 밖에 또 언만(彦滿)·언삼(彦三)·의성(義成)의 배가 있습니다. 따로 명목을 세워 교묘히 그 수를 늘려서 이제 33척의 많은 수에 이르렀는데, 앞으로 또 의진(義眞)의 배를 허락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배 한 척에 주는 것이 얼마나 되는가?"
하매, 임의백이 아뢰기를,
"한 배에 주는 것은 1천여 동(同) 또는 수백 동이고 다른 물건도 이와 비슷한데 해마다 상례(常例)로 삼으며, 접대와 잔치에 드는 비용도 한정이 없습니다. 영남 한 도는 이 때문에 쇠잔합니다."
하였다. 임의백이 또 아뢰기를,
"평조흥이 관백에게 도주를 참소하기를 ‘조선이 일본을 대우하는 데에 본디 성의와 예의가 없는데 도주가 조선을 위하여 중간에서 주선하고 주는 물건을 사사로이 받았다.’ 하였으므로 관백이 도주에게 이것을 힐문하니, 도주가 ‘강호에서 조선에 아무 일을 직접 청하여 허락하는지 허락하지 않는지를 보면 참언의 허실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인(優人)과 마대(馬隊)를 우리 나라에 청하였으나, 그때 최명길(崔鳴吉)이 건의하여 허락하지 않고 다만 수역(首譯) 홍희남(洪喜男)을 강호에 보냈습니다. 관백이 갖가지로 공갈하고 협박하였는데, 홍희남이 끝내 굴복하지 않고 매우 힘써 도주를 변명해 주고 또 평조흥의 아비가 벼슬을 받은 정상을 지척하였습니다. 평조흥은 이 때문에 죄받아 지방에 귀양가고 그 배는 도주에게 옮겨 주었는데, 이번에 또 원가강의 원당을 섬 안에 설치하고 향화선을 얻기를 청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그가 굳이 청하더라도 우리가 고집하여 허락하지 않으면 그도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또 아뢰기를,
"마도는 왜국의 관방(關防)인 요충지이고 동래는 그와 서로 마주하여 산천 초목을 똑똑히 볼 수 있으므로 방비하는 방책을 허술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동래부의 속오(束伍)는 겨우 4백 명을 채울 뿐이고 사변이 있으면 경주 진관(慶州鎭管)에서 징발하여 가도록 당초에 제도를 세운 것을 알 수 없습니다. 또, 해진(海鎭)의 변장(邊將)은 녹봉을 받을 길이 없으므로 군사를 줄여 베를 거두어서 자급하는데, 이것은 변장의 죄가 아닙니다. 해변에 사는 자를 토병(土兵)에 원정(元定)하고 베를 거두어 주면 편리할 듯합니다. 또, 봉수(烽燧)·후망(候望)의 일은 전에 이미 계문하였거니와, 동래는 만해(蠻海) 가에 있는 땅끝이어서 왜선이 나오는 것을 미리 알 길이 없으므로 본부와 수영(水營)에 각각 후망하는 곳을 두고 또 항해하면서 변방의 사변에 대비하는 것이 고사(故事)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폐지하여 행하지 않으므로 왜선이 갑자기 오면 부사(府使)가 미처 치계(馳啓)하지 못하고 수사(水使)가 미처 옷을 입기도 전에 변이 닥칩니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봉수연대(烽燧烟臺)에 따로 후망하는 군사를 두고 배 한 척을 보면 포 한 방을 쏘게 하여 열 방이 넘으면 적선이 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변경(邊警)을 알리는 규례이니, 이것으로 정식을 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또 동래와 양산(梁山) 사이에 험조(險阻)한 곳이 있으니, 산성(山城)을 쌓고 군향(軍餉)을 저축해야 하겠으며 부사가 방어사(防禦使)를 겸하게 하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본이 우리와 수호(修好)하였더라도 실은 믿을 수 없다. 임진란 이후에는 변방의 방비를 수칙(修飭)하는 일이 하나도 없었으니, 우리 나라가 게을리하는 것이 심하다 하겠다. 이제 네 말을 듣고 보니 의견이 없지 않다. 우리 나라에서 배를 주는 수와 배마다 주는 물건을 낱낱이 열거해 적고 또 네 소견을 진술하여 들이라. 쓰고 안 쓰는 것은 국가에 달려 있으니, 너는 물러가서 상세히 써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태학생 김수흥(金壽興) 등이 상소하기를,
"성균관에 제사지내어 공경을 보이는 것은 국가의 큰일입니다. 밝고 바른 임금들은 누구나 다 삼가기를 다하여 변두(邊豆)의 수와 오르내리는 절차일지라도 감히 소홀히 하지 않았으니, 대개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 공경하는 것을 보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혹 예(禮)에 어그러지는 글이 의리를 크게 해친다면 어찌 공경을 보이는 데에만 부족하겠습니까. 신명이 오는 것도 반드시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들이 듣건대, 문묘(文廟)의 축사(祝辭)에도 저 나라의 연호를 쓴다 하니, 신들은 분개하여 못 견디겠습니다. 아아, 국가가 불행한 지 오래 되었거니와, 위기가 날로 일어나고 시끄러운 말이 그치지 않으니, 맹자(孟子)의 하늘을 두려워하라는 가르침은 본디 생각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고 《춘추》의 대의(大義)는 부자(夫子)가 일찍이 근엄하게 한 바인데, 한때의 방편을 어찌 빈조(蘋藻)의 제향(祭享)에서도 아울러 행할 수 있겠습니까. 예전에 거란(契丹)이 묘악(廟樂)을 보겠다고 청하는 것도 손면(孫沔)이 오히려 물리쳤는데, 더구나 축사(祝史)가 경건히 고할 때에 그 연호를 칭한다면 오르내리는 우리 부자의 신명이 어찌 제물의 향기를 흠향하겠습니까. 병자년·정축년 이후로 종묘(宗廟)의 제향에 이 연호를 통용한 적이 없으므로 신들은 근년 이래에도 이 전례에 따라 행한다고 생각하였는데, 이제 석채(釋菜) 날에 비로소 이 일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앞장서 유생들을 거느리고 복합(伏閤)하여 개정하기를 청해야 진실로 마땅하겠습니다마는, 소문을 번거롭힐 듯하므로 약간의 재중(齋中)의 유사(有司)와 함께 첩황(貼黃)007) 의 규례를 외람되게 썼으니, 신들의 뜻이 또한 슬픕니다."
하였으나, 상이 답하지 않았다.
1월 26일 신해
김수항(金壽恒)을 교리로, 이진(李𥘼)을 수찬으로, 김만균(金萬均)을 주서로 삼았다.
좌의정 김육(金堉)이 연안(延安)의 쓰지 않는 넓은 땅에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둑을 쌓고 도랑을 파서 개간할 것을 건의하니, 호조에 명하여 관원을 보내어 살펴보고 도형을 만들어 올리게 하였다. 상이 이것으로 강도(江都)의 군량 저축을 보충하려 한 것이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詩傳)》 체두장(杕杜章)을 강독하였다. 강독이 끝나고서 이조 참판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자연(紫燕)의 일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익희(金益熙)가 내노(內奴)·사노(寺奴)를 갈라 주기를 청하였는데, 이 말은 어떠한가?"
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새 진(鎭)에 옮겨 들어갈 군사는 그 수가 적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옮겨 들어가지 않더라도 그 베를 거두어 이것으로 백성을 모으면 좋을 듯하다."
하였다.
1월 27일 임자
상이 대신과 비국(備局)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이시백(李時白)이 아뢰기를,
"강화(江華)에 진을 설치하는 일은 뭇 의논이 여러 가지입니다마는, 신의 생각으로는 근방 각 고을에 대하여 연변(沿邊)에 신지(信地)를 나누어 정하여 변란에 임하여 들어가 지킬 곳을 미리 알게 하고 집과 자량(資糧)을 각각 조치하며, 해마다 바꾸어 개비(改備)하는 것도 스스로 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일이 번거롭지 않고 편리합니다. 백성을 모아 들어가 살게 하는 것도 참으로 쉽지 않으나, 속오(束伍)를 면한다면 반드시 즐거이 따를 자가 있을 것이니, 여느 때에는 신지를 지키고 세상이 어지러우면 곧 주인이 되게 하는 것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언짢아서 이르기를,
"주인이라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뭇 의논이 무엇 때문에 불편하게 여기는가?"
하였다. 우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바깥의 의논들은 다 불편하게 여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각 고을에 신지를 미리 정하게 하면 다들 국가가 강도로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하여 소문을 번거롭게 할 뿐이고 도리어 소요를 더하게 할 것이다. 자급(資給)하는 것이 없이 사람을 모으게 한다면 어찌 쉽게 얻을 수 있겠는가. 이는 심히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진보(鎭堡)에서 베를 거두는 것은 국법이 아닐지라도 그 관례가 이미 오래 되었거니와, 육군의 체번(遞番)은 여러 진 아래에 사는 사람에 비하면 이익과 손해, 생소하고 익숙한 것이 절로 매우 다르니, 육군에게서 베를 거두어 진졸(鎭卒)에게 주면 또한 괜찮지 않겠는가. 이렇게 하면 이로운 것이 네 가지가 있다. 백성을 모아 진 아래에 늘 머무르게 하면 익숙한 군졸을 만들 수 있으니, 이것이 첫째 이로운 것이다. 빈 섬에 백성을 옮겨서 채우니, 이것이 둘째 이로운 것이다. 육지의 군사가 거두는 베만 내고 왕래하는 괴로움이 없으니, 이것이 세째 이로운 것이다. 춥고 굶주리는 백성이 그 주는 베에 힘입어 처자를 거느리고 즐거이 가니, 이것이 네째 이로운 것이다."
하였다. 심지원이 아뢰기를,
"신도 이를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강도의 백성이 새 진에 옮겨 들어 가니, 이 때문에 불가하게 여깁니다. 또 모아 들여보내는 사람에게 거둔 베를 주더라도 두어 필의 베에 지나지 않으니, 누가 처자를 거느리고 가려 하겠습니까. 끝내 해본다면 김익희의 말처럼 사노를 들어가 살게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베를 거두지 않고 사노를 옮겨 들여보내는 것은 또한 쉽겠는가."
하였다. 병조 판서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거둔 베를 두루 주는 것은 형세가 쉽지 않은 것이니, 둔전을 갈라 주어 의지하여 살게 하는 것이 또한 괜찮겠습니다. 지난번 성상의 뜻을 듣건대, 내노비(內奴婢)·각사노비(各司奴婢)를 헤아리지 않고 옮겨 들여보내려고까지 하셨으니, 매우 성대한 뜻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제 장례원(掌隷院)이 경기의 노비를 살펴 아뢴 것을 보니, 어린 것까지 모두 3백 구(口)뿐이었다. 시노비(寺奴婢)는 어찌 낳은 것이 없는가?"
하고, 또 하교하기를,
"경기 화량(花梁)을 옮겨 들여보내어 한 진을 만들고, 또 해서의 변보(邊堡)를 옮겨서 한 진을 만들고, 본부의 속오(束伍)로 한 진을 만들고, 시노(寺奴)로 한 진을 만들어, 모두 네 진을 만든다. 들어가기를 바라는 자는 들여보내고 바라지 않는 자는 베를 거두어서 모집하여 들여보내는 군졸에게 주면, 폐단이 없이 일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호조 판서 이시방이 아뢰기를,
"각사노비안(各司奴婢案)에 등록된 자는 19만인데 신공(身貢)을 거두는 수는 2만 7천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접때 영돈녕 김육(金堉)이 한가히 노는 사람들에게서 베를 거두려 하였다. 이 일은 참으로 어려운데도 또한 하려 하였다. 19만의 노비에게서는 어찌 그 신공을 죄다 거두어 군수(軍需)를 보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정이 으레 행해야 할 일을 행하지 못하여 나라의 형세가 날로 줄어드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따로 도감(都監)을 세워서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원두표가 아뢰기를,
"추쇄관(推刷官)을 정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추쇄관을 차정(差定)한 뒤에 꼴찌에 해당한 자는 사율(死律)로 논하라. 명나라 태조(太祖)는 뭇 신하 중에서 죄를 범한 자는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국가가 어찌 한낱 추쇄관을 죽이지 못하겠는가."
하고, 또 이르기를,
"이제 어느 관원으로 추쇄를 맡게 할 것인가?"
하였다. 원두표가 아뢰기를,
"음관(蔭官) 또는 문관(文官)으로 하되 삼조(三曹)의 낭관(郞官)인 자로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고, 심지원이 아뢰기를,
"장례원·형조가 맡되 이조를 시켜 극진히 가리게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고, 대사헌 김익희(金益熙)가 아뢰기를,
"신의 생각으로는 형조·장례원은 맡을 수 없겠습니다. 따로 도감을 설치하고 어사(御史)를 보내야 하겠습니다. 빨리 결단해야 하고 머뭇거려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람들이 경의 이 말을 비웃고 욕하겠으나, 이제 경의 말을 들으니, 내 마음이 후련하다. 추쇄는 모두 대사헌의 말대로 시행하되 대신 한 사람이 통괄하여 살피는 것이 옳겠으니, 우상이 맡게 하고 어사는 명관(名官)을 차출하여 보내라. 국가에 이익이 있다면 내가 모발이나 피부같은 것을 아끼지 않겠다. 분의(分義)가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대사헌의 말은 자기를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명예를 바라는 것도 아니며 국가를 위한 것이다."
하고, 이어서 이조 참판 홍명하(洪命夏)에게 이르기를,
"추쇄관은 명관을 차출하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조가 중벌을 받을 것이다. 사노비는 달아났거나 죽었거나 잡탈이거나를 막론하고 해원(該院)을 시켜 사실대로 초록(抄錄)하여 들이도록 하라. 또, 연미(燕尾)와 갑곶에는 첨사(僉使)를 두고 그 나머지 두 곳에는 만호(萬戶)를 두도록 하라."
하고, 또 이시방에게 이르기를,
"국가에 일이 있으면 경이 수어사(守禦使)로서 남한(南漢)에 들어가야 할 것이니, 무장(武將) 한 사람을 경이 자벽(自辟)하여 중군(中軍)으로 삼아야 한다."
하였다. 심지원이 아뢰기를,
"들어가 지킬 군사도 미리 정해야 하겠습니다. 영동(嶺東)의 군사는 남한에서 매우 멀리 떨어져 있으니, 급할 때에 어찌 올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동 군사도 남한에 속하였는가?"
하였다. 이시백이 아뢰기를,
"강릉(江陵) 군사를 소속시켰는데, 대개 경기는 호종(扈從)하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1월 28일 계축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거린장(車隣章)·사철장(駟驖章)을 강독하였다.
1월 29일 갑인
장례원이 노비의 원수(元數)를 서계(書啓)하니, 상이 하교하였다.
"노비의 대속(代贖)은 일이 매우 허술하니, 이제부터는 속신(贖身)을 허가하지 말고 분부가 있어야 허가하라."
우의정 심지원(沈之源)을 추쇄 도감 도제조(推刷都監都提調)로, 예조 판서 이후원(李厚源), 호조 판서 이시방(李時昉), 형조 판서 신준(申埈), 한성 판윤 이완(李浣), 형조 참판 김여옥(金汝鈺)을 제조(提調)로 삼았다. 상이 하교하기를,
"추쇄는 남행(南行)·무관(武官)이 맡을 바가 아니니, 이완·신준을 모두 체직하라."
하였다. 상이 문관인 재신(宰臣)들이 훼방하고 싫어하는 것을 꺼리므로 이 명이 있었다.
상이 추쇄 도감의 사목(事目)을 보고 하교하였다.
"이제 사목을 보니 매우 허술하다. 색리(色吏)·감관(監官)으로서 죄가 더욱 심한 자는 어사(御史)가 계문하여 곧바로 처참하고, 수령으로서 죄가 있는 자는 붙잡아다 국문해서 일죄(一罪)로 논하고, 감사(監司)·어사로서 게을리하고 사정을 따르는 자도 나래하여 죄를 정하고, 수령은 도(道)마다 그 수의 다소에 따라 상벌을 논하고, 각도 어사가 추쇄하여 낸 수도 다소를 견주어 모두 상벌을 논하라."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소융장(小戎章)을 강독하였다.
우의정 심지원이 청대하여 입시해서 아뢰기를,
"모든 일은 반드시 찬찬히 해야 이룰 수 있을 것인데, 추쇄 어사(推刷御史)가 갑자기 내려가면 허술한 일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각 고을을 시켜 먼저 조사해 내어 그 문서를 도감에 보내게 하고 그 근만(勤慢)을 살펴 비로소 어사를 보내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목이 엄중하더라도 사람들이 두렵게 생각하지 않으니, 어사를 보내어 감사·수령으로서 부지런하지 않은 자를 모두 곧 계문하여 무겁게 다스려야 성취되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 죄목을 무겁게 하면 사람들이 반드시 놀라워하겠으나, 호패(號牌)를 처음 시행할 때에는 법을 범한 자가 많이 죽었다. 이제 이 일이 어찌 호패보다 못한 일이겠는가. 이러한 노비들은 사대부·품관(品官)의 첩과 자식인 자가 많으니 그 사목을 무겁게 하지 않으면 추쇄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19만이 되는 원수(元數)에는 다 차지 않을 지라도 반드시 10여 만을 얻어야만 어사와 수령이 벌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도감도 마음을 다하여 봉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또한 벌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승지 임의백(任義伯)이 아뢰기를,
"신은 여러 번 외임(外任)을 겪었는데, 노비 문안(奴婢文案) 가운데에는 1백여 년 전에 이미 죽은 자의 이름이 아직도 실려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문서를 먼저 바로잡지 않고 수령을 지레 죄준다면 옳지 않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노비 중에는 본디 죽은 자가 있겠으나 또한 어찌 낳은 자는 없겠는가. 어사를 보내지 않으면 추쇄해 낼 방법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임의백이 아뢰기를,
"지금은 농사철이니, 우선 가을걷이를 기다려 어사를 보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저들도 백성이니, 농사철을 빼앗아서는 안되겠습니다."
하였으나, 상이 답하지 않았다. 심지원이 또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은 농사철이 아직 안 되었다. 이 뒤로 감히 추쇄하는 일을 조정에서 훼방하는 자가 있으면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로 논하라. 노비를 추쇄해 낸 뒤에는 병농(兵農)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니, 어찌 국가의 큰일이 아니겠는가. 저 나라에 관계되는 일이면 약한 나라의 도리로서 뜻대로 할 수 없는 것인데도 강개(慷慨)한 사람은 오히려 일을 해보려 한다. 더구나 이 일은 저 나라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니, 어찌하여 하지 않겠는가. 바깥의 뭇 의논은 반드시 어수선하고 앞다투어 김익희(金益熙)에게 성낼 것이다."
하였다. 심지원이 아뢰기를,
"어찌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의 사론(士論)은 망설이고 구차한 것을 어질게 여기고, 조금이라도 하는 일이 있으면 공리(功利)라 하니, 지금의 사론은 선학(禪學)과 같다 하겠다. 한 시대의 일을 적멸(寂滅)로 돌리려 힘쓰고 강개하여 일을 맡는 자가 없으니, 참으로 한심스럽다. 경은 나라에서 후한 은혜를 받고 대신의 신분이 되었으니, 어찌 나라의 일에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혹 그렇지 않다면 대신도 중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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