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4일 기미
공조 참의 정두경(鄭斗卿)이 상소하기를,
"근년에 변괴가 갖가지로 나타나니, 요얼(妖孼)이 흥망과 관계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만이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지혜롭건 어리석건 모두 천재(天災)를 근심합니다마는, 신이 근심하는 바는 사람에게 있고 하늘에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렇습니다. 예전에 닥나무가 탕(湯)의 궁정(宮庭)에 나서 사흘 만에 한 아름만하게 컸습니다. 탕이 이윤에게 물으니, 이윤이 ‘닥나무는 택야(澤野)에 나는 물건인데 이제 천자의 뜰에 났으니 불길합니다.’ 하므로, 탕이 ‘어찌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듣건대, 요얼은 화의 조짐이고 상서는 복의 조짐이라 합니다. 요얼을 보아도 착한 일을 하면 화가 이르지 않을 것이고, 상서를 보아도 착하지 않은 일을 하면 복이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탕이 이에 재계(齋戒)하고 고요히 거처하며 일찍 일어나고 밤에 자며 죽은 자를 조문하고 앓는 자를 문안하며 허물 있는 자를 용서하고 곤궁한 자를 진구(賑救)하니, 이레 만에 닥나무가 없어졌습니다. 그 뒤 중종(中宗), 고종(高宗) 때에도 상곡(桑穀)008) ·치구(雉雊)009) 의 변이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보면 어질고 거룩한 임금 때에도 요얼이 있었습니다마는, 덕으로 물리쳤습니다. 《서경(書經)》에서 살펴보면, 간언(諫言)을 따르고 거절하지 않으며 옛 어진이를 따르며 성색(聲色)을 가까이하지 않고 화리(貨利)를 늘리지 않으며 너그럽고 어질어 백성에게 성신(誠信)을 나타낸 것은 탕이며, 엄숙하고 공경하고 삼가고 두려워하여 천명을 스스로 헤아리며 백성을 다스림에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게으르고 안일하지 않은 것은 중종이며, 은(殷)나라를 아름답고 편안하게 하며 감히 게으르고 안일하지 않아서 모든 사람이 조금도 원망하지 않은 것은 고종입니다. 이 세 임금은 그 덕이 이러하였으므로 재앙이 감히 움트지 못한 것입니다. 어찌 우연한 것이겠습니까. 이제 전하께서 옛사람처럼 힘써 그 덕을 공경하신다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겠으나, 그렇지 않으면 신은 아마도 난망(亂亡)이 조석에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신이 이른바 사람에게 있고 하늘에 있지 않다고 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경계하시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아, 하늘과 사람이 감응(感應)하는 것이 또한 분명합니다. 예전에 성왕(成王)이 주공(周公)을 의심하매 하늘이 크게 천둥하고 번개치며 바람 불어서 벼가 다 쓰러지고 큰 나무가 뽑혔는데, 임금이 교외에 나가 친히 맞아들이매 하늘이 금새 비를 내리고 바람을 돌이켜서 벼가 즉시 다 일어났으니, 감응은 형체에 그림자가 있고 소리에 울림이 있는 것처럼 빠릅니다. 이러하기 때문에 송 경공(宋景公)이 한번 말하매 형혹(熒惑)이 3도(度) 옮겨갔으니,010) 하늘은 높아서 아래를 살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임금은 하늘이 푸르고 멀다 할 수 없습니다. 덕이 재앙을 물리치지 못한다는 것을 신은 믿지 않습니다. 아아,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
허물은 사람이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탕은 허물을 고치는 일에 인색하지 않았으니, 탕도 허물이 있었습니다. 탕은 성인이었는데도 허물이 있었으니, 더구나 그보다 못한 자이겠습니까. 그러나 고치는 것에 인색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탕인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좌전》에 ‘사람이 누구인들 허물이 없겠는가. 잘못하였어도 고치면 착한 것으로는 이보다 큰 것이 없다.’ 하고 《서경》 열명(說命) 편에 ‘잘못을 부끄러워하여 그른 일을 행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신은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과연 하나도 잘못하신 일이 없겠습니까. 바라건대, 전에 한 일을 지금 생각하고 낮에 한 일을 밤에 생각하여 조금이라도 뉘우치는 것이 있으면 곧 고치십시오. 아침에 뉘우치면 아침에 고치고 저녁에 뉘우치면 저녁에 고치소서. 아침에 뉘우친 것을 저녁에 고치면 늦을 것이고 저녁에 뉘우친 것을 아침에 고치면 늦을 것입니다. 후세에서 각인(刻印)하게 하였다가 소인(銷印)하게 하였다011) 하여 한 고조(漢高祖)를 비웃는 자가 있겠습니까. 아아,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
옛사람이 뜻은 크게 하고 마음은 작게 하였습니다. 뜻이 크다는 것은 스스로의 기약을 뜻하는 것이고 마음이 작다는 것은 겸손하여 낮춤을 뜻하는 것입니다. 남보다 백배 천배 힘쓰면 어리석은 자라도 밝아지고 약한 자라도 강해지는데, 더구나 전하께서는 천성이 영걸한 자질로서 큰 일을 행할 뜻이 있다면 어찌 못하실 것이 있겠습니까. 행사가 황음(荒淫)하지는 않고 정사가 탁란(濁亂)하지는 않아서 백성이 원망하지는 않으나 세운 것이 없어서 겨우 중등의 임금이 되신다면 이는 신이 전하께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라건대, 중등의 임금으로 기약하지 말고 옛 성현을 목표로 삼아 뜻은 성현을 지망하고 마음은 내가 착하지 못하다고 자처하소서. 임금의 허물은 거만한 것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 환공(齊桓公)이 규구(葵丘)에 제후(諸侯)를 모았을 때에 교만한 빛이 있으니 하루에 배반한 것이 아홉 나라이었고, 당 덕종(唐德宗)이 봉천(奉天)에서 포위되었을 때에 자기를 죄책하니 교만한 장수와 사나운 군졸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거만하면 손해를 부르고 겸손하면 이익을 받는다는 것이 틀림없지 않습니까. 아아,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
신이 뵙건대, 전하께서는 천성이 인서(仁恕)하시나 혹 급하게 서두르다가 실수할 때가 또한 많습니다. 여느 때에는 신하를 접대하면 화평한 기운이 따뜻한 봄날 같으나 혹 노기를 띠면 말이 화평을 잃고 신하를 꺾는 것이 매우 심하십니다. 이윤(伊尹)은 ‘신하를 접대할 때에는 공손하려고 생각하라.’ 하고, 공자(孔子)는 ‘임금은 신하를 예(禮)로 부려야 한다.’ 하였습니다. 신하를 공손하게 접대하고 신하를 예로 부리는 도리를 크게 손상하시니, 신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희노애락은 절도에 맞게 나타내기가 어려운데, 노여움이 유난히 더한 것은 드러남이 급하기 때문이요, 드러남이 급하므로 억제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선유(先儒)가 ‘분노를 그치게 하는 것은 산을 누르는 것과 같다.’ 하였으니, 대개 그 어려움을 말한 것입니다. 대저 노여움이 절도에 맞지 않으면 반드시 다른 데로 옮겨지고 옮기면 거의 해로움이 있습니다. 필부가 노여움을 옮기면 그 해로움이 적으나 임금이 노여움을 옮기면 그 해로움이 많습니다. 많은 것이 무슨 까닭이냐 하면 아랫사람의 목숨은 위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임금의 노여움은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갑자기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평소에 본심(本心)을 간직하고 선성(善性)을 길러야 이런 걱정이 없습니다. 본심을 간직하고 선성을 기르는 요체는 《중용(中庸)》의 수장(首章)에 있습니다. 아아,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
임금은 어질더라도 반드시 바로잡는 신하에 의지해야 합니다. 예전에 증자(曾子)가 공자에게 묻기를 ‘아버지의 명령에 따르는 것을 효라 하겠습니까?’ 하니, 공자가 ‘이게 무슨 말인가. 천자에게 간쟁하는 신하 일곱 사람이 있으면 무도(無道)하더라도 천하를 잃지 않고, 제후에게 간쟁하는 신하 다섯 사람이 있으면 무도하더라도 그 나라를 잃지 않고, 선비에게 간쟁하는 벗이 있으면 그 몸에서 좋은 명예가 떠나지 않고, 아버지에게 간쟁하는 아들이 있으면 그 몸이 불의(不義)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불의를 당하면 아들이 아버지에게 간쟁하지 않아서는 안 되고 신하가 임금에게 간쟁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아버지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어찌 효가 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보면 임금에게 하루도 없어서는 안 될 것이 간쟁하는 신하입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언로를 크게 열어 꼿꼿한 분위기를 권장하소서. 가을의 찬 서리가 내리면 초목이 말라서 잎이 지고 봄비가 내리면 초목이 눈트는 것은 계절입니다. 임금도 한 조화(造化)012) 이므로 서리와 봄비가 다 그 손에 달려 있으니, 간쟁하는 신하를 봄비같이 접대하고 서리같이 접대하지 않아야만 꼿꼿한 분위기가 북돋우지 않아도 절로 자랄 것입니다. 직신(直臣)이 조정에 가득 차면 나라를 다스리려 하지 않더라도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전에 당 태종(唐太宗)이 수(隋)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진 뒤에 몇 해 안 가서 정관지치(貞觀之治)를 가져온 것은 간언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접때 혼조(昏朝)가 어둡고 사나워서 뭇 소인이 뜻을 얻고 사림(士林)이 기개를 잃었으나 대론(大論)을 당하게 되어서 조신(朝臣)으로서는 이항복(李恒福)·김덕함(金德諴) 등과 초야에서는 정택뢰(鄭澤雷)·김효성(金孝誠)·홍무적(洪茂績) 등이 말을 다하여 꺼리지 않다가 잇달아 귀양갔습니다. 이것이 어찌 광해(光海)가 이룩한 것이겠습니까. 열성(列聖)께서 선비를 기르신 보람입니다. 광해가 그 간언에 따라 고친 것이 있었다면 어찌 그 세대를 끊어 없앴겠습니까. 이것은 참으로 오늘날의 은감(殷鑑)입니다. 아아,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
무릇 일은 오로지 실지를 힘쓰고 겉치레를 숭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일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두 번 세 번 헤아려야 하고, 일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일하는 것이 있을 때에 일이 옳지 않으면 이미 시작했다 하여 밀어부치지 말고, 일이 옳으면 근거 없는 의논에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일하는 것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먼저 인심을 굳게 맺어야 합니다. 인심을 얻고도 위태로운 법은 없고 인심을 잃고도 안정되는 법은 없습니다. 위가 곧고서야 아래가 굽은 것을 막고 위가 공정하고서야 아래가 사사로운 것을 막고 위가 청렴하고서야 아래의 욕심을 막고 위가 검소하고서야 아래의 사치를 막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무자(季武子)가 주(邾)나라 서기(庶其)에게 상을 주매 노(魯)나라에 도둑이 많아졌고,013) 공자가 사구(司寇)가 되매 심유씨(沈猶氏)가 감히 아침마다 양(羊)에게 물먹여 시장 사람을 속이지 못하였으니, 명령하지 않아도 행해지는 것과 명령하더라도 따르지 않는 것이 거의 이와 같이 바르고 바르지 않은 데에 달려 있습니다. 아아, 전하께서 유념하소서.
형벌은 성인이 폐지하지 않은 것입니다. 죄가 있어도 형벌하지 않으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그러므로 《서경》에 오형(五刑)014) 이 실려 있고 《역경(易經)》에 서합(噬嗑)015) 이 있으니, 이를 어찌하고 형벌을 폐지하겠습니까. 그러나 덕화(德化)가 크게 행해져서 풍속이 크게 바뀌면 범하는 자가 드물 것입니다. 순(舜) 때에 사람들이 유사(有司)를 범하지 않은 것은 순이 형벌을 삼가고 살리기를 좋아한 덕이 민심에 두루 미쳤기 때문이며, 성왕(成王)·강왕(康王) 때에 40년 동안 형벌을 쓰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니, 후세의 임금이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접때 하교하기를 ‘죽는 것은 마찬가지이나 교형(絞刑)당할 자를 때려 죽이는 것은 내가 매우 불쌍히 여기니 의논하여 처치하라.’ 하셨으니, 이것은 실로 순이 형벌을 삼가한 뜻입니다. 이 마음을 미루어 유(類)에 따라서 신장한다면 사직(社稷) 만세의 복이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아아,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말이 모두 지극한 말이므로 내가 가상히 여기노라.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2월 5일 경신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詩傳)》 황조장(黃鳥章)을 강독하였다.
2월 6일 신유
송시열을 이조 참의로, 남선(南翧)을 경상 감사로, 이정기(李廷䕫)를 수찬으로 삼았다. 특명으로 대구 부사 이정(李淀)을 통정계(通政階)로 높였다. 본도의 병사(兵使)가 본읍의 군기(軍器)를 검열하고서 이정이 새로 만든 죽궁(竹弓)의 제도를 계문하였으므로, 하교하여 특별히 칭찬하고 이 명이 있었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신풍장(晨風章)을 강독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늘 여러 관청에 신칙하여 자주 개좌하게 하였으나, 사헌부는 자존심이 특히 세어서 한 달 동안에 개좌하는 것이 겨우 두세 날뿐이니, 이러하고도 어찌 모든 관청을 독려할 수 있겠는가. 대사헌 김익희는 제배된 뒤로 그 직무를 힘써서 한 달 동안에 개좌한 것이 전보다 갑절이나 많으니, 참으로 아름답다. 해조를 시켜 특별히 옷 한 벌 감을 내려 봉직을 게을리하지 않는 정성을 장려하라."
대사헌 김익희가 상소하기를,
"신이 은유(恩諭)에 이어 옷감의 하사를 받고 봉독(奉讀)하고 배령(拜領)하니 감격과 부끄러움이 함께 느껴집니다. 신은 재능이 없는 사람으로서 외람되게 기사(器使)016) 를 입었습니다. 천박한 자질을 가지고 쇠퇴한 때를 당하여 풍채를 떨쳐 임금을 돕지 못하였고 또 몸에 고질이 있어 국사에 진력하지 못하였으므로 늘 근심하며 엄명한 견책을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관례에 따라 관아에 앉아 직무를 폐기하기에 이르지 않은 것도 직분 안의 일인데, 어찌 은포(恩褒)가 부당하게 내리고 진폐(珍幣)가 곁들여질 줄 알았겠습니까. 신이 갑자기 받고서 황홀하여 형용하기 어려운데 사양하면 공손하지 못할 것이고 받자니 명목이 없으므로 대궐을 바라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신이 듣건대, 임금 노릇 하기가 어렵고 신하 노릇 하기도 쉽지 않다 합니다. 도(道)가 임금을 높일 만하고 재능이 백성을 감쌀 만한 자는 대신이며, 면전에서 쟁론하며 임금이 요순에 못 미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직신(直臣)이며, 임금이 근심하면 스스로 욕되게 생각하고 임금이 욕되면 스스로 죽으며 나라에 이로우면 제 몸을 가볍게 여기는 자는 충신입니다마는, 분주하며 공직(供職)하여 그 직무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은 맡은 것이 있는 자의 상사(常事)이니 나라의 형벌을 면할 수 있을 뿐입니다. 신의 지위는 대부(大夫) 줄에 있고 벼슬은 풍헌(風憲)에 있는데, 성상께서 정사에 노고하실 때에 한 가지 말씀을 올리거나 한 가지 계책을 내어 시사(時事)를 바로잡고 국난(國難)을 풀지 못하였으니, 신의 죄가 큽니다. 이를 죄주지 않고 도리어 사일(仕日)이 조금 많다는 것을 헤아려 뜻밖에 오은(誤恩)을 내리셨으니, 어찌 현명한 군주는 한 번 찌푸리고 한 번 웃는 것을 아껴야 하는 도리에 손상이 있을 뿐이겠으며 신 또한 어떻게 스스로 마음에 편안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하 노릇 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으로 늘 뭇 신하를 독려하되 유사가 직분으로 해야할 일에 대해서는 반드시 포상하려 하지 마십시오. 또 임금 노릇 하기가 어렵다[爲君難]는 석 자로 스스로 성상 자신을 독려하되 ‘선왕께서 나에게 크고 어려운 기업(基業)을 끼쳐 주셨으니, 감히 자포자기하거나 스스로 안일하여 우리 태조께서 어렵게 얻은 기명(基命)을 무너뜨릴 수 있겠는가. 하늘의 도움은 늘 믿을 수 없고 사람의 일은 끝내 게을리할 수 없으니, 큰일을 할 기틀이 오늘날에 있지 않은가.’ 하소서. 이 뜻을 분발하여 정치와 형벌을 닦고 밝히며, 선유(先儒)의 말을 반드시 행해야 할 것으로 여기고 유속(流俗)의 의논에 저지되지 말며, 말로(末路)의 폐단을 반드시 고쳐야 할 것으로 여기고 고집스런 소견에 의혹되지 말며, 이해(利害)를 환히 알면 아첨하는 말에 움직이지 말며, 시행하기에 합당하면 고식하는 이야기에 흔들리지 말며, 낡고 더러운 규례를 벗어나고 밝고 넓은 의리를 환히 보며, 아울러 들어서 널리 채택하며, 곧은 사람을 등용하여 굽은 사람 위에 두며, 용단하여 마음을 제재하고 정대하게 일을 처결하소서. 그러면 옛 철왕(哲王)과 아름다움을 짝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소 가운데 권계(勸戒)하여 분발하게 한 말은 모두가 절실하고 정대한 논의이므로 진실로 내 마음에 합치된다. 허리띠에 적어 두고 마음에 간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유사의 일상적 분수의 일이라고는 하나, 유사의 일상 분수의 일을 잘 거행하는 자가 지금 몇 사람이나 있겠는가. 예전부터 임금은 홀로 다스릴 수 없는 이치를 어찌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경은 안심하고 받으라."
하였다.
2월 7일 임술
영중추부사 조익(趙翼)이 상차하고 《서경천설(書經淺說)》을 바치니, 상이 칭찬하고 말을 내리라고 명하였다.
2월 8일 계해
목겸선(睦兼善)을 경기, 정인경(鄭麟卿)을 강원도, 이연년(李延年)·김시진(金始振)·이경억(李慶億)·박승휴(朴承休)를 경상좌도·경상우도, 오정원(吳挺垣)·최일(崔逸)을 충청좌도·충청우도, 조사기(趙嗣基)·박증휘(朴增輝)를 전남좌도(全南左道)·전남우도(全南右道)의 추쇄 어사(推刷御史)로 삼았다.
2월 9일 갑자
영돈녕부사 김육(金堉)이 상차하기를,
"신이 요즈음 들으니, 추쇄 도감(推刷都監)의 설치가 있었고 이어서 위제(違制)017) 로 죄주라는 분부를 내리셨다 하니 근심스러워 탄식하며 ‘임금의 말은 실처럼 가늘더라도 명이 나오면 끈처럼 굵게 여겨 신하가 봉행하는데, 성상의 분부가 어찌하여 이에 이르렀는가.’ 하였습니다. 지난날의 일을 살펴 보면 태종(太宗) 때에 노비 변정 도감(奴婢辨正都監)을 설치하고 성종(成宗) 10년에 추쇄 도감을 설치하고 중종(中宗) 9년에 또 설치하고 명종(明宗) 11년 병진(丙辰)에 또 설치하였습니다. 이른바 추쇄에 다시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노비의 일이라면 이는 본디 조종(祖宗)께서 이미 행하신 법입니다. 누가 감히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막겠습니까마는, 성교가 극히 엄하여 중율로 견주시니 어찌 청납(聽納)하는 도리에 방해되는 것이 없겠습니까. 공자(孔子)가 ‘착하지 않은 말이라도 말만 하면 나를 어기지 못하는 경우 거의 한 마디 말로 나라를 잃는 것에 가깝지 않겠는가.’ 하였으니, 성인이 임금에게 고한 말이 두렵습니다. 명종 병진년 이후 지금까지 이미 1백 년이 되었습니다. 1백 년 동안 버려두었던 법을 수개월 안에 다시 닦아 거행하는데, 형벌을 엄하게 하여 핍박하면 죄가 있건 없건 억울하게 죽는 자가 얼마나 많을지 모를 것입니다. 임진년 이래로 여러 번 전란을 겪고 게다가 기근이 있고 이어서 전염병이 돌아서 죽은 자가 매우 많고 문부(文簿)가 산란(散亂)한데, 모판에서 풀을 뽑고 머리카락을 낱낱이 빗듯이 번거롭고 잗달게 하는 것은 그 형세가 급하게 할 수 없을 듯합니다. 사목(事目) 가운데에 이미 자수(自首)를 허용하였으니, 죄를 벗겨 주고 공납을 면제하여 정녕히 타이르면 백성이 지극히 어리석더라도 반드시 감격하여 자수하기에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중외의 관원을 시켜 먼저 살펴서 바로잡아서 그 성적(成籍)을 올리게 한 뒤에 암행 어사가 명을 받들고 나가고 이어서 상벌(賞罰)하게 하소서. 그러면 일에 차서가 있고 백성도 소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야흐로 북사(北使)가 올 것이고 밭에서는 일이 시작될 것인데 열 사람의 어사가 다섯 도(道)로 달려가면 백성이 군명(君命)에 분주하느라 지쳐서 그 시기를 잃을 것입니다. 신이 나라를 위하여 지나치게 염려하여 여러 번 어리석은 말씀을 올렸습니다. 고리타분하고 어리석은 의견이어서 채용되기 어려운 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나라에서 두터운 은혜를 받았는데 우러러 보답할 길이 없으니, 차라리 생각하는 바를 다 말하고 죽을지언정 차마 죄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국가의 큰일을 경은 막지 말라."
하고, 이어서 정원(政院)에 하교하기를,
"영돈녕의 차자 가운데에 ‘위제’라느니 ‘엄교’라느니 하는 따위 말이 있다. 이는 연중(筵中)에서 하교한 것이나 아직 보류하게 하였는데, 어찌하여 대신에게 전파되었는가. 연중에서 이야기한 것이 이처럼 은밀하지 않으니, 그날 입시한 승지를 추고하라."
하였다. 이때 김육의 아들 김좌명(金佐明)이 승지이었으므로 이 하교가 있었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위양장(渭陽章)을 강독하였다. 강독이 끝나고서 상이 호조 판서 이시방(李時昉)에게 묻기를,
"경은 여러 번 입시하여도 어찌하여 추쇄(推刷)하는 일을 언급하지 않는가?"
하매, 이시방이 각도의 노비 수와 도망하고 죽고 늙고 어린 것 등의 번잡한 정상을 자세히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경상도 한 도는 10여 만이고 충청·전라 두 도는 수천뿐이니, 이 어찌 영남만 많고 다른 도는 치우치게 적겠는가. 미처 추쇄해 내지 못하였기 때문일 뿐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위앙(衛鞅)은 법을 세우고 나무를 설치하여 믿게 하였는데018) , 지금 일을 막는 자는 대신이다. 이 뒤로 직분을 다하지 않는 자에게는 중율을 써야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조 참판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이 일은 바깥에서 다들 행해야 한다고 하나,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상하의 정의(情意)가 막히는 것이 근심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슨 뜻인가?"
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어사가 갑자기 내려가면 어리석은 백성이 놀라고 두려워서 다들 도피하려고 생각할 것인데, 이리저리 찾아다녀 잡으면 마을이 죄다 비어 그 근심이 농사를 폐기하는 데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먼저 수령을 시켜 추쇄해 내되 조용하고 아주 상세히 하게 한 뒤에 어사는 가을이 되거든 내려가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도 그런 줄 아나, 국가의 호령이 백성에게 믿겨지지 않아서 백성이 스스로 편리한 대로 한 지 오래되었거니와, 이제 명령이 나갔다가 도로 그치면 반드시 해이해지는 폐단이 있고 각각 공교히 면할 생각을 할 것이다. 그 사목(事目)을 엄하게 하고 갑자기 행하여 어쩔 줄 모를 즈음에 어사가 내려가 근만(勤慢)을 검칙(檢飭)하면 감사·수령이 죄책이 있을 것을 알고 마음과 힘을 다할 것이다. 수령이 이미 죄다 추쇄해 낸 뒤에 어사가 내려간들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지금 의논하는 자들은 그 말이 또한 여러 가지로 다른데 그 마음이 반드시 다 공정한 데에서 나왔다 할 수 없다. 무릇 사람의 재품(才品)은 높지 않더라도 일을 맡아서 마음을 졸이고 힘을 다하면 될 수 있다. 우리 나라 사람은 재품이 높지 않은데다 일을 맡으면 또한 실지를 힘쓰지 않는다. 노비추쇄 넉 자를 부끄럽고 욕되게 여겨서 비웃고 ‘이것이 어찌 우리들의 일이기에 우리에게 맡기는가.’ 하여, 이 때문에 김익희(金益熙)가 이 말을 처음 냈을 때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다 웃었다."
하였다.
2월 11일 병인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동문지분장(東門之枌章)을 강독하였다. 강독이 끝나고서 대사헌 김익희(金益熙)가 아뢰기를,
"종성 부사(鍾城府使) 서상리(徐祥履)는 어리석고 거칠고 느리고 둔하여 본디 변방의 수령이 될 재기가 아니며 새로 아들 하나를 잃고는 술을 마셔 실성하였고, 안동 부사(安東府使) 유경창(柳慶昌)은 자신을 청렴하고 근신하게 단속하나 눈병이 오래 낫지 않아서 결코 직임을 감당할 수 없으니, 두 사람은 처치하는 방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경창은 전부터 눈병이 있다고 하였으나, 지금 조신(朝臣)들은 거의 다 병을 핑계한다. 유경창의 눈병은 과연 확실한가?"
하였다. 김익희가 아뢰기를,
"조정에 같이 있는 자들이 모두 아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변방의 수령은 꺼리는 자리이므로 쉽사리 체직할 수 없으나 경의 말이 그러하니, 모두 체차하라."
하였다. 주강을 파하고서 제사(諸司)의 윤대관(輪對官)을 불러 보았다.
상이 하교하기를,
"서상리·유경창 등은 마지못하여 체차하였다마는, 생각건대 변방 수령을 꺼리는 자에 대해서는 국법이 매우 엄하다. 안동은 큰 고을이므로 추쇄(推刷)하는 이 때에 사람들이 모두 꺼리는데 체직시키기만 한다면 사람들이 반드시 본떠 국법을 엄명(嚴明)하게 할 수 없으니, 모두 파직하라."
하였다. 유경창은 연신(筵臣)이 아뢴 바에 따라 파직하지 말라고 뒤이어 명하였다.
2월 13일 무진
김수항(金壽恒)을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상이 비국의 신하들을 소견(召見)하였다. 상이 물었다.
"경원(慶源)의 범금인(犯禁人)의 공사(供辭)에 ‘경계를 넘어가 나무를 벤 것은 군청(軍廳)을 짓기 위한 것이고 권대덕(權大德)이 조련(操鍊)할 때에 그 군사를 시켜 날랐다.’ 하였다. 군청과 조련은 다 비밀리에 해야 할 일인데, 저들이 와서 물을 때에 이처럼 솔직히 말하면 참으로 매우 염려스러우니, 반드시 미리 생각하여 처치해야 한다."
2월 14일 기사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형문장(衡門章)·방유작소장(防有鵲巢章)을 강독하였다.
2월 15일 경오
인정전(仁政殿)에서 유생에게 시강(試講)하였다. 이국상(李國祥)이 으뜸을 차지하였는데 직부 회시(直赴會試)를 명하고, 그 나머지에게는 차등을 두어 급분(給分)하였다.
2월 16일 신미
말이 달아나 진선문(進善門)으로 달려 들어갔다.
2월 18일 계유
남노성(南老星)을 대사간으로, 조복양(趙復陽)을 집의로, 채충원(蔡忠元)을 응교로, 이제형(李齊衡)을 헌납으로, 윤개(尹塏)·오두인(吳斗寅)을 정언으로 삼았다.
헌부가 아뢰기를,
"국가에서 이미 수령의 재목을 얻기 어려워서 특별히 천거하는 법을 두었으면, 중외의 천거해야 할 자는 조정에서 어렵게 여기고 삼가는 뜻을 몸받아 마음을 지극히 공정하게 갖고 사람을 가려서 천거해야 할 것인데, 혹 서로 손을 바꾸어 천거하기도 하여 마치 교역하는 것과 같으므로 식자가 한심스러워 한 지 오래 되었습니다. 이번 새해의 천거 가운데에도 변변치 않은 무리를 외람되게 뒤섞은 경우가 많습니다. 만약 태거(汰去)하지 않고 전조(銓曹)에서 문서에만 의거하여 이름을 부르고 관례에 따라 의망(擬望)에 갖춘다면 천거하는 법을 두어 사람을 가리는 뜻이 마침내 겉치레가 될 것입니다. 가장 심하게 맞지 않는 자는 해조(該曹)를 시켜 명백히 살펴서 태거하게 하소서.
연안(延安)에 둔전(屯田)을 설치하는 일은 실로 군국(軍國)의 중대한 일인데, 별장(別將) 박증(朴增)은 범람한 짓을 많이 하여 오로지 입기(入己)019) 를 일삼고, 번번이 인근의 강성하고 교활한 무리와 함께 소를 잡고 술을 가지고 사찰을 횡행하였으며, 그 밖에 폐단을 지은 정상은 낱낱이 거론하지 않아도 족합니다. 4백 석의 종자를 받아 내고서 가을에 거두어 들인 것은 1백 5석뿐이라고 도감(都監)에 속여 신보하였는데, 어찌 수확한 것이 도리어 씨뿌린 수량에도 미치지 못할 수 있겠습니까. 별로 특기할 만한 성적이 없는데 상주는 은전을 먼저 입었으니, 사체로 헤아리면 또한 매우 이를 데 없습니다. 박증을 가자(加資)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고 유사를 시켜 나문하여 죄를 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하교하였다.
"이 추쇄 도감(推刷都監)을 설치한 것은 1백여 년 동안 거행하지 못하던 일을 다시 닦아 거행하려는 것이다. 그 사이에 반드시 숨기고 빠뜨려서 양인(良人)에 들어간 자가 많을 것인데, 이 율(律)은 법에서 매우 무거우므로 법을 따르지 않은 자에 대한 큰 벌을 본디 면할 수 없다마는, 생각건대 여러 세대 동안 빠진 자들 가운데에는 혹 과거에 급제하고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한 자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본조(本朝)에서는 예전부터 문(文)·무(武) 두 과를 중하게 대우하고 급제한 사람도 모두 이것을 스스로 자랑하는데, 갑자기 하루 아침에 천적(賤籍)에 붙인다면 또한 불쌍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한 번 긴장시키고 한 번 이완시키는 것은 군자(君子)의 도리이다. 차라리 국가의 공천(公賤)을 잃더라도 차마 우리 백성에게 유리(流離)하여 시름하고 탄식하는 괴로움이 있게 할 수 없다. 도감을 시켜 그 할아버지부터 혹 급제하였다거나 생원(生員)이나 진사(進士)가 되어 그 아들과 자손이 그대로 법을 어겨 양인이 된 자는 특별히 탕척하는 법을 써서 그대로 양인이 되는 것을 허가하라. 그 아버지부터 비로소 급제하였거나 생원·진사가 되어 그 아들이 그대로 법을 어겨 양인으로 있는 자와, 혹 그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숨기고 빠뜨려서 법을 어겨 양인이 되었더라도 미처 급제하지 못하고 그 손자가 비로소 출신(出身)하였거나 생원·진사가 된 자는 모두 대속(代贖)하도록 허가하라. 여자도 다 남자와 같이 하라. 그 외는 논하지 말고 법대로 하되, 3대(代) 이전에 급제한 자일지라도 반드시 자수(自首)한 뒤에야 위와 같이 시행하고, 자수하지 않고 혹 진고(陳告)나 추핵(推覈)으로 말미암아 드러났으면 모두 논하지 말고 도로 천적에 붙여서 나라의 기강을 바르게 하라."
2월 19일 갑술
추쇄 도감이 아뢰기를,
"속안(續案) 가운데에서 각 고을의 노비(奴婢)의 도수(都數)를 해원(該院)이 이제 이미 수정하였으므로 장차 정서(正書)하여 입계(入啓)할 것이라 합니다. 각도의 어사는 어느 날에 보내야 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지금 봄 농사가 바야흐로 급하니, 농사를 해칠 걱정이 있을 뿐 아니라, 기한이 이처럼 촉박하면 중외의 노비로서 숨기고 빠뜨렸음을 자수할 자와 3대 이전에 급제하거나 사마시에 입격한 것을 자수할 자가 기한이 촉박하여 미처 알지 못하였다고 필시 말하여 일이 끝난 뒤에 어지러운 폐단이 있을 것이 염려된다. 각도의 어사는 이제 우선 정지하고 초가을이 되거든 보내어 그 기한을 넉넉하게 하라. 이어서 각 도의 방백·수령 등을 시켜 마음을 다하여 찾아 내고 성책(成冊)하여 올려보내게 하여 비교해 볼 바탕으로 삼되, 방백·수령으로서 마음을 다하지 않는 자는 사목(事目)에 따라 죄를 논하여 결코 용서하지 말라. 도감은 이 뜻을 살펴서 각 도에 분부하고, 도감도 게을리하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2월 22일 정축
윤강(尹絳)을 대사간으로, 이형(李逈)을 필선으로 삼았다.
상이 이조에 하교하기를,
"붕당을 맺고 임금을 업신여기는 무리를 어찌 아까워할 것이기에 대신이 홍처윤(洪處尹)을 사인(舍人)에 첫째로 의망하여 반드시 굳이 수용하여 미명(美名)을 차지하려 하는가. 이 망단자(望單子)를 도로 내어 주라."
하니, 영의정 이시백(李時白)·좌의정 구인후(具仁垕)·우의정 심지원(沈之源) 등이 상차하고 대죄하였다.
2월 23일 무인
전라도 함평(咸平)의 사인(士人) 조경회(趙慶會)가 상소하여 추쇄하는 것이 옳지 않음을 극진히 말하였는데,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추쇄하는 일은 조종조에서 이미 행한 것인데, 조경회가 상소하여 훼방하고 임금을 기롱하며 욕심이라고 배척하기까지 하였으니, 매우 놀랍다. 이것은 반드시 공천(公賤)으로서 숨기어 빠진 자가 한 짓일 것이니, 예사로 처치하여 그 계략에 빠질 수 없다. 해조(該曹)를 시켜 가두어 다스리고 또 족파(族派)가 어떠한지를 캐내어 일의 체모를 엄중히 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이제 조경회가 사목이 이미 정해진 뒤에 감히 상소하였고 또 그 말의 뜻이 망령되고 난잡하기 짝이 없으므로 신들이 처음에는 물리치려 하였으나, 스스로 먼 지방의 유생이라 하며 날마다 와서 바치므로 상의하여 입계하였습니다. 이제 하교를 받으니, 살피지 못한 잘못을 면할 수 없어 황공하여 못 견디겠습니다. 이어서 생각하건대, 지금 인심이 좋지 않으므로 성교(聖敎)의 이른바 그 계략에 빠진다고 하신 것이 반드시 없으리라고 보증할 수는 없습니다마는, 먼저 캐내어 실정을 살펴 안 뒤에 법에 따라 과단(科斷)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지금 상소의 말이 망령되다 하여 그때마다 그 사람을 죄주면 혹 원근에서 보고 듣기에 해되는 것이 있을 듯하니, 해조를 시켜 우선 죄를 다스리지 말고 먼저 족파를 살피게 하는 것이 실로 사의(事宜)에 맞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형조가 아뢰기를,
"지금 조경회를 추문하였더니, 그 인물 됨됨이가 사대부 집 후손인 듯하고 또한 남을 대신하여 상소한 따위가 아닙니다마는, 그 말을 만든 것이 이처럼 괴이하니, 예사로 처치할 수 없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조경회가 공초한 것은 매우 간사하니, 엄히 형신(刑訊)하여 실정을 알아 내라."
하였다.
2월 25일 경진
대제학 채유후(蔡𥙿後), 대사성 김익희(金益熙)를 명소(命召)하여 승지와 함께 거재(居齋)하는 사학(四學)의 유생에게 시제(試製)하게 하였다. 맹만시(孟萬始)가 으뜸을 차지하였는데 직부 회시(直赴會試)를 명하고, 그 나머지에게는 차등을 두어 물건을 내렸다.
2월 26일 신사
성초객(成楚客)을 승지로, 이상진(李尙眞)을 집의로 삼았다.
간원(諫院)이 아뢰기를,
"나라의 기강이 해이하여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으므로 각사(各司)의 노비가 달아나 피하고 속여 숨는 폐단이 갈수록 심합니다. 지금 추쇄(推刷)하는 일은 실로 거행해야 할 일인데, 조경회(趙慶會)가 국가의 사체가 중한 것을 알지 못하고 열읍(列邑)이 소요하는 폐단만을 보고서 함부로 소장(疏章)을 올렸으니, 참으로 밉습니다. 그러나 시골 사람의 말에 두서가 없는 것을 어찌 심하게 꾸짖을 일이겠습니까. 또 그 공사(供辭)는 간사한 정상이 없는 듯한데 엄히 형신하여 실정을 알아 내라고 하교하시니, 무릇 보고 듣는 사람이 모두 의혹합니다. 그 사람이 미천하기는 하나 상소하였다가 형벌을 받으면 성세(聖世)의 일이 아닐 듯하고 또한 언로에 방해될 것이니, 깊이 생각하여 성명(成命)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가 충의위(忠義衛)라고 자칭하면서 그 아비는 교생(校生)이라고 말하니, 참으로 충의위라면 으레 세습했어야 할 것인데, 어찌 그 아비 홀로 교생일 리가 있겠는가. 이것은 어그러진 단서이니, 궁문(窮問)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조경회는 개국 공신(開國功臣) 조인옥(趙仁沃)의 후예인데 음습(蔭襲)하여 충의위가 되었다.】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6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사법-재판(裁判) / 신분-천인(賤人) / 정론-정론(政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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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7일 임오
지평 목내선(睦來善)이 인피하기를,
"신이 접때 들으니, 고 참의 홍진(洪瑱)의 발인 날에 상구(喪柩)가 수구문(水口門)에 이르렀을 때에 한 상여의 담군(擔軍)이 홍가의 담군을 때리며 돌을 던지고 상구를 때려부수기까지 하였으나 말리는 사람이 하나 없었다 하였습니다. 신이 접때 모인 자리에서 동료에게 의논하여 백체(白帖)020) 로 두 집의 하인을 가두었으나, 형벌을 금하는 날이 잇달아 계속되어 미처 죄를 결단하지 못하였는데, 지금 장관이 백체로 사람을 가둘 수 없다 하고 모두 석방하였다 하니, 신은 참으로 그 뜻을 모르겠습니다. 무릇 풍문에 따라 가둔 사람은 반드시 체문(帖文)을 낸 동료에게 의논한 뒤에야 처치할 수 있는 것이 규례인데, 다시 서로 의논하지도 않고 지레 석방하였으니, 아아! 또한 괴이합니다. 이 일은 풍속에 관계되므로 가벼이 시원하게 다스리려 하였던 것이나 도리어 동료의 업신여김을 당하였으니, 한 시각도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하고, 장령 강호(姜鎬)·홍종운(洪鍾韻)과, 지평 남천택(南天澤)도 이 때문에 인피하였다. 대사헌 김익희(金益熙)가 인피하기를,
"백체로 사람을 가두는 것은 폐조(廢朝)의 대관들이 사사로움을 행하여 스스로 방자하던 폐습입니다. 계해년021) 에 반정(反正)하고 일체 통렬히 고쳐 없앴고 요즈음 다시 밝힌 것이 이만저만 정녕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몇 해 이래로 성령(成令)이 점점 무너져서 다시 폐습을 따르니,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무뢰한 하인들이 사대부의 상여 행차에서 다투었으니 한 번 죄를 다스리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것이므로 신이 지난달에 두 집의 하인을 가두고 엄중히 형벌하였는데, 뜻밖에 한달이 지난 뒤에 지평 목내선이 백체로 또 두 집 사람을 가두고 이미 형신한 뒤에 또 다시 궁포(窮捕)하여 두 달 동안 풀어 주지 않아서 방리(坊里)에 소요를 끼쳤습니다. 더구나 임금에게 고하는 일은 경중을 막론하고 일체 사실대로 해야 할 것인데, 이제 목내선이 혼자 스스로 체문을 내고는 동료에게 의논하였다 하고, 남천택·강호·홍종운은 하리(下吏)를 통해 들은 일을 ‘동참했으나 간과했다.’고 하여 그릇된 일을 짜맞추려고 애쓰니, 어찌 임금을 섬기는 도리를 아는 자이겠습니까. 목내선이 이렇게 가로막고 미봉하는 말을 하는데 남천택 등이 어긋나지 않으려고 임금에게 사실을 어겨 고한 처지로 절로 돌아갔으니, 매우 아깝습니다. 목내선은 이따금 집에서 제 하인을 시켜 사람을 잡아 옥에 붙였다가 곧 놓아 주므로 형리(刑吏)도 참여하여 알지 못하니, 국가의 금령(禁令)이 어찌 한낱 대관의 희노(喜怒) 거리가 되겠습니까. 다른 동료도 많이 본떠서 가두는 것이 날로 많아지니, 신은 이 폐단을 없애지 않으면 백성이 장차 손발을 쓸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무릇 함부로 가둔 것을 죄다 석방하게 하여 한때의 폐단을 바로잡으려 하였으니, 이것이 무리들이 들고 일어나는 분노를 건드린 까닭입니다. 신은 변변치 못한 사람으로서 외람되게 수석(首席)을 차지하여 일이 있을 때마다 흠이 생기므로 참으로 낯을 들 수 없으니, 신의 벼슬을 파면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목내선 등은 모두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다. 간원이 아뢰기를,
"헌부의 많은 관원이 인혐(引嫌)하여 물러갔습니다. 서로 잇달아 인퇴한 것은 구차한 잘못을 면할 수 없습니다. 대각(臺閣)의 사체는 본디 상하관의 차별이 없으므로 많은 관원이 상의하여 가두었으면 백체가 그릇된 관례라 하더라도 가부를 기다리지 않고 지레 석방한 것은 또한 서로 공경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모두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대사헌을 체차하면 헌부의 많은 관원이 뜻대로 함부로 가두는 폐단을 막을 수 없으니, 특별히 출사시켜 국법을 밝히라."
하였다.
2월 29일 갑신
대사헌 김익희가 인피하기를,
"갈린 대관이 다시 나와 공무를 수행하는 것은 염치로 헤아려도 결코 이럴 수 없습니다. 가만히 보건대, 많은 관원이 인피한 사연은 백체(白帖)로 사람을 가둔 것을 단안(斷案)으로 삼았는데, 처치 가운데에서는 그 잘잘못은 조금도 거론하지 않고 인퇴한 한 가지만을 불성실하게 거론하여 결어(結語)로 삼았으니, 뜻이 좌우된 것을 본디 알 수 있습니다. 백체를 이미 그릇된 관례라 하였으면 동료와 상의하여 가두었더라도 결코 굽혀 따를 수 없을 것인데, 더구나 혼자 스스로 체문(帖文)을 낸 것을 어떻게 상의한 것이라 하겠습니까. 남을 대신하여 해명하는 습관이 들었다고 하겠습니다. 간원이 신을 그르게 여기는데 신이 또 다시 운운하는 것은 다시 죄를 더하는 것인 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일이 국가의 법령에 관계되므로 감히 한때의 혐의를 피하지 않고 말을 다하다 보니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신의 벼슬을 갈아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내가 말하려 하였으나 아직 말하지 못한 것을 경이 죄다 말하였으니, 무릇 사람의 의견이 그리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대개 알 수 있다. 아아, 오늘날 간원의 처치한 관원은 옛날 헌부의 장관 아래에 있던 사람이 아닌가. 자기가 전에 버릇처럼 법에 어그러지게 하던 일을 어찌 스스로 덮어 두고 남을 헐어 말할 수 있겠는가. 이에 따라 말하자면 백체에 관한 일을 끝내 거론하지 않은 것도 괴이한 일이 아니다마는, 조정에서 이목(耳目)의 직임을 맡겨 법헌(法憲)에 붙였으면 간장(諫長) 이하가 마음을 씻고 두렵게 생각하여 전에 그르게 하던 것을 깨달아 뉘우치고 앞으로 법을 지켜서 국가가 믿는 바가 있게 하고 백성이 손발을 쓸 수 있게 해야 옳을 것이다. 어찌 이토록 흐릿하게 일을 논할 수 있겠는가. 경이 인피한 사연 가운데에 이른바 이 폐단을 없애지 않으면 백성이 손발을 쓸 수 없게 될 것이라 한 것을 내가 참으로 여러 번 반복하고 아름답게 여겨 감탄한다.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한갓 아부하는 꼴을 하고 도리어 법을 지키는 관원을 체차하는 것을 어찌 충성이라 하겠으며, 어찌 공정하다 하겠는가. 나라의 일을 생각하면 스스로 통탄할 뿐이다.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사간 성하명(成夏明), 정언 윤개(尹塏)가 인피(引避)하기를.
"어제 처치한 말 가운데에 ‘백체를 그릇된 관례라 하더라도 가부를 기다리지 않고 지레 석방한 것도 서로 공경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였으니, 백체를 법에 어그러지는 것으로 여긴 뜻이 그 가운데에 있고, 헌장(憲長)의 체직을 청한 것은 다만 서로 공경하는 점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신들이 변변치 못하기 때문에 성교(聖敎)를 부지런히 하시게 하였으니, 신들의 죄는 만 번 죽을 만합니다. 신들의 벼슬을 갈아 주소서."
하고, 대사간 윤강(尹絳)이 인피하기를,
"김익희(金益熙)의 피사(避辭)에 대한 비답을 보고 신은 못 견디게 두려워서 스스로 용납할 곳이 없습니다. 김익희가 종이에 가득히 장황하게 말한 것이 모두 공박하여 배척하는 말인데, 그 가운데에서도 뜻이 좌우되었다느니 남을 대신하여 해명한다느니 하는 따위 말은 실로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신과 목내선(睦來善)은 평소에 한번 만나본 친분도 없거니와 서로 안 일이 있더라도 예사로 처치하는데 어찌 애증 때문에 좌우되겠습니까. 전일 비답 가운데에 있는 해명한다는 말씀을 집어내어 신의 죄안(罪案)으로 삼은 것으로 말하면, 신과 조경회(趙慶會)는 서로 알지 못하는 것이 초(楚)나라 사람과 월(越)나라 사람 정도가 아니니, 신은 많은 말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두어 가지 말은 뜻이 참혹하여 자기를 속이는 것이라고 남을 억측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으니, 어진이나 군자의 말이 아닐 듯합니다. 무릇 처치할 즈음에는 피사 가운데에 있는 한두 마디 긴요한 말로 그 입락(立落)을 결정하는 것이 상례(常例)입니다. 헌부(憲府)의 많은 관원이 다 병을 이유로 인퇴한 것은 구차함을 면할 수 없으므로 이 때문에 체직을 청하였고 백체가 그릇된 관례라는 말도 그 가운데에 있으니, 조어가 미진하다고 한다면 오히려 혹 괜찮겠으나, 그 그른 것을 극진히 말하지 않았다 하여 뜻이 좌우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미처 헤아리지 못한 것입니다. 김익희의 뜻이 폐단을 바로잡으려는 데에 있었다면 법에 따라 인피하여도 할 말이 없을 것을 걱정하지 않을 것이고 탄핵하여 바로잡아도 안 될 것이 아닌데 그저 마음대로 석방하였으니, 실로 온당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동료와 상의하여 체직을 청하였습니다. 이미 처치가 마땅하지 않은 잘못이 있거니와 엄한 비답을 받았으므로 한 시각도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으니, 신의 벼슬을 갈아 주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김익희 등은 모두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다. 간원이 아뢰기를,
"양사(兩司)가 모두 인혐(引嫌)하여 물러갔습니다. 백체로 사람을 가두는 것은 실로 그릇된 관례이므로 헌장이 이 폐단을 바로잡으려 한 것은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마는, 석방할 때에 가부를 기다리지 않은 것은 서로 공경하는 도리가 매우 부족하므로 본원이 처치할 때에 이 때문에 갈기를 청하였고, 특별히 출사(出仕)시키라는 명은 또한 함부로 가두는 폐단을 막으시려는 데에서 나왔습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이미 갈린 뒤에 출사하라는 하교가 있더라도 감히 공무를 수행할 수 없는 것이 본디 대각(臺閣)의 체례이니, 형세상 굳이 출사시킬 수 없습니다. 성상의 비답이 지극히 엄하니 간원의 많은 관원이 인혐하는 것은 본디 당연한 것입니다마는, 처치의 조어에 이미 백체를 그릇된 관례라 하였으면 갈기를 청한 뜻은 오로지 서로 공경하는 도리가 부족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관원을 쉽사리 갈 수는 없겠습니다. 김익희는 체차(遞差)하고 성하명·윤개·윤강은 모두 출사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아, 사람은 각각 시비를 가리는 천성을 가졌는데 너희들만은 시비를 가리는 마음이 없으니, 무슨 까닭인가. 그 의리의 양심을 완전히 잃은 자라 하겠다. 윤강 등은 선왕의 성헌(成憲)을 폐기하려 할 뿐이 아니라 또한 앞으로 올 폐단을 막으려 하지도 않으니, 그 뜻은 장차 끝없이 수단을 부리려는 것이다. 그 죄가 어찌 체차에 그칠 뿐이겠는가. 백체가 그릇된 관례[謬例]라는 두 자가 시비 입락에 무슨 관계되는 것이 중하기에 사람들이 다 이것을 가지고 스스로 해명하는가. 한 번 웃을 만한 것도 못된다. 대사간 이하를 모두 체차하여 욕심을 따르고 법을 업신여긴 그 죄를 징계하라."
하였다. 헌납 이제형(李齊衡)이 처치가 마땅하지 못하였다 하여 인피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고, 이어서 정원에 하교하기를,
"이제형을 오늘 안에 처치하라."
하였다. 옥당이 상차하기를,
"간원의 처치는 이미 본지(本旨)를 잃었는데 이어서 출사시키기를 청한 것은 매우 흐릿하니, 이제형을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30일 을유
이시해(李時楷)를 대사헌으로, 조형(趙珩)을 대사간으로, 김익희(金益熙)를 부제학으로, 이진(李𥘼)을 사간으로, 조복양(趙復陽)을 겸보덕으로, 유준창(柳俊昌)·곽성귀(郭聖龜)를 장령으로, 민희(閔熙)·윤선거(尹宣擧)를 지평으로, 이정기(李廷夔)를 헌납으로, 안후열(安後說)을 정언으로, 박증휘(朴增輝)를 사서로, 김익렴(金益廉)을 설서로, 김만균(金萬均)을 겸설서로, 한진기(韓震琦)를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목내선(睦來善)을 어천 찰방(魚川察訪)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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