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병술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일본통신사(日本通信使)가 이제 떠날 것인데 청국(淸國)에 통보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어떻게 말을 만들면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만 일본이 새 임금을 다시 세웠으므로 통신사를 차출하여 보낸다고 말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은사(謝恩使) 인평 대군(麟坪大君) 이요(李㴭)·부사(副使) 이일상(李一相)이 치계(馳啓)하였다.
"신들이 저들의 사정을 탐문하였더니, 홍승주(洪承疇)는 경략호광양절양광강남복건등지(經略湖廣兩浙兩廣江南福建等地)가 되어 남방의 싸움을 맡고 오삼계(吳三桂)는 주차한중부 총독동관이서진롱사천감숙등지(駐箚漢中府總督潼關以西秦隴泗川甘肅等地)가 되어 서방의 싸움을 맡았으며, 영력(永曆)022) 의 병세(兵勢)는 다만 호광의 험조(險阻)에 의지하여 청인(淸人)과 싸워 여러 번 싸움에 이겼으나, 청나라 군사가 큰 들로 꾀어 낸 뒤에 철기(鐵騎)로 짓밟았으므로 명나라는 전군을 잃고 패하였고, 청나라는 또 팔기(八旗)의 정갑(精甲) 1만여를 내어 그 처자와 함께 남방으로 내려가 양광을 진수(鎭守)하게 할 계획이라 합니다."
3월 3일 무자
강원도 강릉(江陵)·양양(襄陽)·삼척(三陟)에서 바닷물이 사흘 동안 얼어, 도신(道臣)이 계문하였다.
상이 서교(西郊)에 거둥하여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고 인정전(仁政殿)에서 접견하였다. 【청사가 세자의 책봉 때문에 나왔다.】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8면
【분류】왕실-행행(行幸) / 왕실-종친(宗親) / 외교-야(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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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4일 기축
조수익(趙壽益)을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로 삼았다.
영중추부사 조익(趙翼)이 광주(廣州)에서 병이 위독하였는데, 내의(內醫)를 보내어 구완하라고 명하였다.
3월 5일 경인
눈이 내렸다.
사유(赦宥)하고 이어서 중외에 교문(敎文)을 반포하였다. 교문은 이러하다.
"왕은 이르노라. 국본(國本)을 정하여 신고(申誥)하는 것은 실로 여정(輿情)에서 나왔고 제명(帝命)을 펴서 은혜를 더하는 것은 봉전(封典)을 천명하는 것이니, 크게 고하여 기쁨을 같이하는 뜻을 보인다. 생각하건대, 임금이 큰 계획을 세우려 힘쓰는 데에는 먼저 원사(元嗣)를 세우는 것보다 중대한 것이 없다. 대개 조종(祖宗)이 쌓은 사업은 자손을 위하여 끼친 계책에서 길이 이어지고 국가의 장구한 기본은 통서를 잇는 데에서 더욱 창성하기 때문이다. 저위(儲位)는 본디 일찍 세워야 마땅하나 책례(冊禮)는 감히 마음대로 행할 수 없으므로 호소하는 글을 올리매 문득 윤허하는 은총을 받았다. 명호(名號)를 바룬 뜻을 크게 나타낸 것이 한 글월에 빛나고 상자에 담은 보배까지 내린 것이 열 벌[襲]에 찬란하다. 종묘를 지키는 중임을 더하고 제사를 맡는 의식을 크게 하니, 내가 어쩌다 큰 기업(基業)을 이은 것은 부끄러우나 원량(元良)이 일찍부터 인덕(仁德)을 나타낸 것이 기쁘다. 목을 늘여 추대하기를 바랐으니 또한 너희 신민(臣民)의 마음을 알겠고, 지팡이를 짚고 가서 들으니 이 제명(帝命)을 받았다. 천시(天時) 또한 화합하여 바로 볕이 화창할 때가 되었으니, 은택을 널리 펴서 사면령을 내리기에 마땅하다. 이달 4일 어둑새벽 이전에, 모반(謀叛)·모대역(謀大逆)·모반(謀反) 및 자손이 조부모·부모를 모살(謀殺)·구매(毆罵)한 것과 처첩이 지아비를 모살한 것과 노비가 주인을 모살한 것과 모살인(謀殺人)·고살인(故殺人)과 염매(魘魅)·고독(蠱毒)과 국가·강상(綱常)에 관계된 것과 장오(贓汚)와 강도·절도를 제외하고, 사죄(死罪) 이하의 잡범과 도(徒)·유(流)·부처(付處)·안치(安置)·충군(充軍)은 이미 배소(配所)에 갔거나 아직 배소에 가지 않았거나 이미 발각되었거나 아직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결정(決正)되었거나 아직 결정되지 않았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용서하라. 감히 유지(宥旨) 이전의 일을 서로 고하는 자는 그 죄로 죄주라. 관직에 있는 자는 각각 한 자급을 더하되 자궁(資窮)한 자는 대가(代加)하라. 아아, 거듭 덕을 빛내고 은혜를 입히면 복조(福祚)가 그지없음을 알 것이고, 기르고 아울러 살피면 덮어 기르는 은혜가 두루 미치는 것을 볼 것이다. 그러므로 교시하니 잘 알아야 할 것이다." 【대제학(大提學) 채유후(蔡𥙿後)가 지은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8면
【분류】사법-행형(行刑) / 인사-관리(管理) / 왕실-종친(宗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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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 하교하였다.
"장릉(章陵)에 전알하는 예(禮)는 이미 내년 가을로 물렸으나, 봄·가을 철이 될 때마다 국가에 일이 많아서 내 지극한 정을 펼 겨를이 없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수십년을 기약하더라도 여러 능에 두루 배알하는 것은 반드시 기대할 수 없으니, 자손이 조상을 추모하는 비통한 느낌에 어떠하겠는가. 강릉(康陵)으로 말하면 길이 매우 가깝고 배를 모으거나 백성을 부리는 폐단도 없으니, 해조(該曹)를 시켜 날을 가려 거행하게 하라."
3월 6일 신묘
달이 동정성(東井星)에 들어갔다.
상이 인정전(仁政殿)에서 청나라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세자를 시켜 술을 돌리게 하니, 좌우 사람들 중에 눈물을 흘리는 자까지 있었다. 상이 청사에게 말하기를,
"세자가 어리고 두역(痘疫)도 겪지 않았으므로 예(禮)에 간이(簡易)하게 한 것이 많으니, 마음에 매우 미안합니다."
하니, 청사가 답하기를,
"우리들이 보기에 세자는 의표(儀表)가 비상하고 예모가 중도에 맞습니다. 이는 반드시 하늘이 도와 천인(天人)을 독실하게 길러낸 것이니, 국가가 장차 태평을 누릴 것입니다. 국왕께서는 두역을 겪지 않았다 하여 염려하지 마소서."
하였다. 【청사가 책봉하러 왔으므로 세자가 행례(行禮)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8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친(宗親) / 외교-야(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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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7일 임진
상이 병조 판서 원두표(元斗杓), 호조 판서 이시방, 원접사(遠接使) 허적(許積)을 인견(引見)하였다. 상이 허적에게 묻기를,
"양서(兩西)의 병정(兵政)은 어떠한가?"
하매, 허적이 대답하기를,
"군정은 형세에 얽매여서 포기한 지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날로 점점 허술해집니다. 군장(軍裝)·복색(服色)은 군위군(軍威軍)을 핑계하여 수개(修改)할 수 있을지라도, 연습하여 재능을 성취하는 것의 경우 가망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또 해서(海西)의 관향 저곡(管餉儲穀)이 얼마나 되는지 물으니, 대답하기를,
"해서의 관향곡은 태반이 헛된 기록이므로 실지 수량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원두표에게 이르기를,
"관향곡이 이처럼 쓸데없는데, 변란을 당하면 모두 잃게 될 것이니, 이 곡물을 강도(江都)로 옮겨 들여가면 어떠한가?"
하였는데, 원두표가 미처 대답하기 전에 허적이 아뢰기를,
"해서의 곡물은 호조에서 날라다가 쓰고 삼남(三南)의 전세(田稅)를 적당히 강도에 날라다 두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고, 홍명하가 아뢰기를,
"서로(西路)의 곡물을 곧바로 강도로 나르면 소문이 번거로울 듯하니, 허적의 이 말에 뜻이 있습니다."
하고, 원두표가 아뢰기를,
"그렇다면 삼남의 삼수량(三手粮)을 해서의 곡물로 갈음하여 강도로 날라 들이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관서(關西)의 관향곡도 쓸데없으니, 신의 생각으로는 흉년에 은(銀)과 베로 바꾸어 강도에 들여다 두는 것이 또한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고, 이시방에게 이르기를,
"관서의 관향곡을 은과 베로 바꾸라는 뜻을 해조에서 본도에 분부하여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3월 8일 계사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섣달에 천둥치고 3월에 눈이 내리는 것도 다 망국의 조짐이다마는, 영동(嶺東)에서 바닷물이 언 재변으로 말하면 매우 괴이하다."
하니, 우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예전에는 재변을 당하면 대신(大臣)을 임금의 명으로 파면하였습니다. 신은 지금 하는 일이 없이 중임에 있으니, 먼저 파면하여 하늘의 꾸중에 답하소서."
하였다. 부제학 김익희(金益熙)가 아뢰기를,
"재변이 매우 참혹한 이때에 대신은 격려하여 미치지 못한 점을 함께 닦아야 본디 마땅합니다. 어찌하여 반드시 파면한 뒤에야 덕을 닦고 허물을 살피는 도리에 유익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하였다. 김익희가 아뢰기를,
"《의례경전(儀禮經傳)》은 새로 인쇄하여 반사(頒賜)하였거니와, 이제 속집(續集)을 더 인쇄하면 전서(全書)가 될 수 있습니다. 재주가 있는 젊은 문관(文官)을 뽑아서 강습(講習)시키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기는 하나, 젊은 문신들은 술을 마시고 한가히 놀며 무리를 좇아 다니기를 일삼을 뿐이고 전경(專經) 시험에도 통하지 못하는 자가 많으니, 무슨 예경(禮經)을 학습할 희망이 있겠는가."
하였다. 심지원이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허목(許穆)·윤휴(尹鑴)가 힘써 배워 재주가 많으며 행실이 남보다 낫다 하니, 이러한 사람은 발탁하여 써서 권장되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윤휴는 어떠한 사람인가?"
하였다. 병조 판서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윤휴는 윤효전(尹孝全)의 아들인데 고서(古書)를 많이 읽었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에 말하여 거두어 쓰게 하라."
하였다. 예조 판서 이후원(李厚源)이 아뢰기를,
"장악원(掌樂院)에 있는 《악학궤범(樂學軌範)》 세 권은 성종(成宗) 때 성현(成俔)이 지은 것입니다. 묘정(廟庭)의 음악은 다 이 제도를 쓰는데, 이것은 여염집에 있는 서적이 아니므로 임진란 뒤에 장악원이 개간(開刊)하였고 판본(板本)이 본원에 있으니, 교서관(校書館)을 시켜 여러 건(件)을 박아 내게 하여 사고(史庫)에 나누어 보관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3월 9일 갑오
전라도·경상도에서 전염병이 크게 성하여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도신(道臣)이 아뢰니, 근시(近侍)를 보내어 두 도의 중앙인 곳에 제단을 설치하고 제사하게 하였다.
3월 10일 을미
함경도 북청(北靑) 등에서 갑작스러운 병으로 죽은 백성이 많았다. 도신이 아뢰니, 특별히 근시를 보내어 여제(癘祭)를 지내게 하였다.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 조익(趙翼)이 졸서(卒逝)하였다. 조익의 자는 비경(飛卿)이다. 성리학(性理學)에 잠심하였고 젊어서 급제하였다. 일찍이 과제(課製) 때에 동해무조석론(東海無潮汐論)을 지었는데, 문충공(文忠公) 이항복(李恒福)이 보고 ‘세상에 어찌 이만한 식견이 있는가.’ 하였다. 광해(光海) 초기에 이이첨(李爾瞻)이 권력을 잡았을 때 서로 친하게 지내기를 바라고 전랑(銓郞)에 천거하려 하였으나, 조익이 끝내 응답하지 않았다.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 제현(諸賢)을 공박하여 배척할 때에 조익이 옥당에 있었는데 동료와 함께 상차하여 그 죄를 논하였다. 이 때문에 고산 찰방(高山察訪)으로 폄출(貶黜)되었는데, 모후(母后)가 유폐되어 윤기(倫紀)가 아주 무너진 것을 보고 곧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한번도 성시(城市)에 들어오지 않았다. 계해년에 반정(反正)하고서는 맨 먼저 옥당에 들어갔는데 걸핏하면 성인의 학문과 선왕의 정치를 인용하니, 인조(仁祖)가 번번이 허심탄회하게 들었다. 지금의 성상께서 즉위하고서 드디어 정승이 되었는데 조익이 상이 큰일을 할 뜻이 있는 것을 보고 알면 말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어버이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고 자제로서의 일을 늙어도 게을리하지 않고 지켰다. 상중에 있을 때에는 3년 동안 죽을 먹고 밤낮으로 호곡하여 피가 침석(枕席)을 적셨다. 늘 공경을 지키고 본심을 간직하는 것을 일생의 공부로 삼았고 종일 바르게 앉고 병이 있지 않으면 비스듬히 기댄 적이 없었다. 이이(李珥)·성혼(成渾)을 종사(從祀)하는 논의를 힘껏 주장하다가 상의 뜻을 거슬러 향리에 물러가 경적(經籍)에 침잠하였다. 이때에 졸서하니, 나이는 일흔 일곱이었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그가 지은 《서경천설(書經淺說)》·《용학곤득(庸學困得)》 등의 책 가운데에서는 주자장구(朱子章句)를 제법 고쳤는데, 사람들이 이 때문에 흠잡는다.
3월 11일 병신
호조가 아뢰기를,
"영중추부사 조익이 광주에서 졸서하였습니다. 대신의 상에는 호상(護喪)하는 절목이 있어야 할 것이니, 영돈녕부사 김상헌(金尙憲)의 상 때의 전례에 따라 호조·예조의 낭청(郞廳)을 보내어 성복(成服) 때까지 치상(治喪)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시강원(侍講院)이 아뢰기를,
"일찍이 사부(師傅)를 지냈던 대신의 상에는 다 왕세자의 거애(擧哀)와 궁관(宮官)을 보내어 조문하고 제사하는 예가 있었습니다. 이제 조익의 상에도 이에 따라 거행해야 하겠습니다. 다만, 거애에 관한 일은 일찍이 고 상신 김상헌의 상 때에 왕세자가 어린 나이라 하여 예를 행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예문(禮文)대로 거애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 영돈녕의 초상 때의 전례를 준용하라."
하였다.
3월 12일 정유
사은사(謝恩使) 인평대군(麟坪大君) 이요(李㴭), 부사(副使) 이일상(李一相), 서장관(書狀官) 심세정(沈世鼎)이 청나라에서 돌아왔다.
3월 14일 기해
목겸선(睦兼善)을 교리로, 오정원(吳挺垣)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3월 15일 경자
청나라 사신이 돌아갔다. 상이 서교(西郊)에 거둥하여 배웅하였다.
3월 17일 임인
영의정 이시백(李時白), 좌의정 구인후(具仁垕), 우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재이(災異) 때문에 차자를 올려 면직을 청하니, 답하였다.
"재이가 일어난 것은 허물이 나에게 있기 때문이니, 두려운 마음을 어찌 이루 다 말하겠는가. 경들은 안심하여 사직하지 말고 내 부족한 것을 보좌해 국정을 더욱 닦으라. 상하가 모두 면려하여 서로 삼가고 공경하는 아름다움이 있게 되면 재이를 그치게 하고 환난을 사라지게 하는 도리는 참으로 이 밖에 없을 것이니, 경들은 더욱 공경해야 한다."
3월 18일 계묘
동래 부사(東萊府使) 한진기(韓震琦)가 사조(辭朝)하니, 면유(面諭)하여 보냈다.
3월 20일 을사
김좌명(金佐明)을 승지로, 목행선(睦行善)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3월 22일 정미
해서(海西)의 세선(稅船)이 장산곶(長山串)에 이르러 여러번 엎어졌다. 호조 판서 이시방이 청하기를, 강음(江陰) 땅에 금곡창(金谷倉)을 다시 설치하여 장산 이북 여러 고을의 세미(稅米)를 거두어들였다가 경창(京倉)에 날라 들이기도 하고 강도(江都)로 가져다 쓰자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
3월 27일 임자
상이 장차 강릉(康陵)에 전알(展謁)하려 할 때 석현(石峴)의 막차(幕次)에 거가(車駕)를 멈추고 금군마대(禁軍馬隊)의 좌우별장(左右別將)과 선전관(宣傳官) 등에게 명하여 말을 달리게 하여 시재(試才)하고, 상도 활시위를 튕기고 검(劍)을 매만졌다. 도승지 이행진(李行進)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장차 능침(陵寢)에 전알하실 것이므로 바야흐로 재계(齋戒) 중에 계신데 문득 시위(侍衛)하는 장관(將官)을 시켜 말을 달리게 하여 기예를 견주고 심지어 활시위를 튕기고 검을 만지시기까지 하시어 마치 용맹을 뽐내는 듯이 하시니, 신은 온당치 못하게 여깁니다."
하였다. 상이 강릉에 나아가 제사지내고 돌아오다가 석현에 이르러 길가에 말을 멈추고 병조 판서 원두표(元斗杓)를 명소(命召)하여 하교하기를,
"지세(地勢)가 넓으니, 내가 금군의 마병(馬兵)을 시열(試閱)하고자 한다."
하고, 또 양영(兩營)의 별장(別將) 김여수(金汝水)·조필달(趙必達)·변급(邊岌)·박민도(朴敏道) 등을 불러 하교하기를,
"들 가운데에 소기(小旗) 하나를 세우고 금군이 일제히 말을 출발시키게 하여 그 기를 먼저 뽑는 자에게 상을 주겠으니, 너희들은 각각 거느린 군사와 약속하라."
하고, 상이 드디어 산 언덕으로 달려 올라갔으나 배종하는 근시(近侍)들은 다 따라 가지 못하였다. 별장 등이 미처 군사들과 약속하기 전에 지레 말을 출발시키니, 상이 영을 어긴 것에 노하여 네 별장을 잡아다가 어전에서 결곤(決棍)하고, 하교하기를,
"너희들이 내 분부를 명백히 듣고도 율(律)을 어긴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번에는 좌우로 나누어 각각 진을 쳤다가 어전에서 기를 휘두르고 나팔을 분 뒤에 한꺼번에 말을 출발시키되, 혹 다시 잘못하면 군율(軍律)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그래서 별장 등이 군사를 나누어 진을 쳤는데 그 가운데에서 변급의 군사가 진세(陣勢)가 자못 정돈되니, 상이 아름답게 여겨 감탄하였다. 대사헌 이시해(李時楷)가 청대(請對)하여 나아가 아뢰기를,
"재계를 파하고 궁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열무(閱武)하여 군대의 위력을 드날리는 것은 특별한 일인데 대신과 삼사가 다 알지 못하니, 이는 매우 온당하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갑자기 나온 일이므로 미처 말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이시해가 아뢰기를,
"갑자기 나왔더라도 대신이 몰라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곧 사관(史官)을 보내어 대신에게 전유(傳諭)하라."
하였다. 대신들이 다 물러가 앉아 구경하다가 상의 하교를 듣고서 대답하기를,
"신들도 바야흐로 여기에 앉아서 관병(觀兵)합니다."
하였다. 미처 기를 휘두르고 나팔을 불기 전에 박민도가 거느린 군사가 또 먼저 말을 출발시키니, 상이 크게 노하여 잡아다가 결곤하며 이르기를,
"내가 약속을 분부한 것이 명백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 너의 군사가 군령을 다시 어겼으니, 너는 율을 어긴 죄를 받을 것이다."
하였다. 이윽고 좌별장의 초군(哨軍) 정시영(鄭時英)이 먼저 말을 출발시켜 뽑지 않아야 할 기를 뽑으니, 상이 노하여 이르기를,
"이 군졸이 군령을 따르지 않은 것이 이러하니 죽여도 아까울 것이 없다."
하였다. 군령을 다시 밝힌 뒤에 마병 최의순(崔義淳), 금군 김응천(金應天)이 말을 출발시켜 나란히 달려가 세운 기치를 먼저 뽑으니, 상이 아름답게 여겨 각각 말을 하사하고, 또 변급·김여수·조필달 등을 불러 하교하기를,
"너희들이 처음에는 율을 어겼더라도 뒤에는 영을 따랐다. 벌은 이미 시행하였거니와 또한 상이 없을 수 없다."
하고, 각각 활과 화살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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