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14권, 효종 6년 1655년 4월

싸라리리 2025. 12. 2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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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을묘

경기 장단부(長湍府)의 민가에서 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눈이 셋이고 뿔이 넷이었다.

 

상이 하교하였다.
"일찍이 열무(閱武)할 때에 군사가 금고(金鼓)023)  의 영을 따르지 않아서 거의 변을 일으킬 뻔한 것이 매우 놀라웠는데, 이제 또 영을 어긴 것이 이러하니, 군령을 따르지 않는 군사는 10만이 있더라도 길러서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좌우별장(左右別將)을 시켜 각각 그 군사를 거느리고 조련하는 곳에 와서 모이게 하고 그 초군(哨軍)을 효시하여 군사들이 군법이 있는 것을 알게 하라."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듣건대, 병법에 ‘북을 치면 백만의 군사가 앞을 막고 있더라도 감히 물러갈 수 없고 징을 치면 금옥(金玉)이 산처럼 쌓여 있더라도 감히 나아갈 수 없다.’ 하였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군령이 엄한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의 군졸은 거세고 사납기가 막심하여 금고의 영을 따르지 않는다. 접때 열무할 때에 박민도(朴敏道)가 거느린 군사가 군율(軍律)을 두 번 어겼으나 내가 박민도를 심하게 죄주지 않은 것은 그 죄가 군졸에게 있고 장수에게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군졸이 군령을 따르지 않았으면 그 장수도 책임이 없을 수 없으니, 금군 별장(禁軍別將) 박민도를 파면하라."
하고, 상이 또 승지(承旨) 김좌명(金佐明)에게 이르기를,
"이제 청나라 사신이 이미 돌아갔고 사기(事機)도 늦추어졌는데 두 대신이 오래 황야(荒野)에 피하여 있으니, 모두 빨리 조정에 돌아오지 않아서는 안 된다. 이 뜻으로 특별히 하유하여 역마(驛馬)를 타고 오게 하라."
하였다. 부제학 김익희(金益熙)가 아뢰기를,
"근일의 재이(災異)는 모두 괴이하고 놀랍습니다마는, 동해(東海)가 언 재변으로 말하면 더욱 참혹합니다. 오늘 신하들이 다 입시(入侍)하였으니, 각각 재이를 그치게 할 방책을 아뢰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관동(關東)에 원한이 많은가? 어찌하여 변괴가 관동에서만 참혹한가?"
하였다. 우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혹 원한을 품은 백성이 없지도 않을 것이니, 도신(道臣)을 시켜 상세히 탐문하여 빨리 아뢰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조 참판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신이 근심하는 것은 인심(仁心)과 세도(世道)가 전과 크게 달라진 점입니다. 이 근심은 남북의 적보다 심합니다."
하였다.

 

4월 2일 병진

상이 승지를 보내어 조익(趙翼)의 집에 가서 조문하게 하였다. 왕세자도 궁관(宮官)을 보내어 조문하였다.

 

4월 3일 정사

상이 주강(晝講)에 나아가 《시전(詩傳)》 월출장(月出章)을 강독하였다. 강독이 끝나고서 신하들이 다 나아가 아뢰기를,
"신들이 듣건대, 초군(哨軍) 정시영(鄭時英)을 효시하라는 명이 있었다 합니다. 이 군졸이 군령을 어기기는 하였으나 효시하기까지 하면 성덕에 손상이 있을 듯합니다. 뭇 의논이 다 억울하게 생각합니다."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고 이르기를,
"경들은 서생(書生)이니, 어찌 군법을 알겠는가."
하였다.

 

4월 4일 무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소관장(素冠章)을 강독하였다.

 

4월 5일 기미

남노성(南老星)을 대사간으로, 이형(李逈)을 헌납으로, 오정원(吳挺垣)을 필선으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습유장초장(隰有萇楚章)·부유장(蜉蝣章) 등을 강독하였다. 강독이 끝나고서 지경연(知經筵) 정유성(鄭維城)이 나아가 아뢰기를,
"정시영은 율을 어긴 죄가 있기는 하나 효시까지 하는 것은 지나칩니다."
하고, 특진관(特進官) 이시해(李時楷)가 아뢰기를,
"전(傳)에 ‘가르치지 않고 싸우게 하는 것은 죽이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접때 열무(閱武)하는 일이 갑자기 나와서 일군(一軍)이 다 율을 어기게 만들었는데 이 군졸만이 장차 사율(死律)을 당하게 되었으니, 매우 원통할 듯합니다. 이것은 신의 뜻이 아니라 나라 사람들의 뜻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사론(士論)인가? 어찌하여 말하는 자가 이리 많은가? 이름난 사대부가 말을 내면 사람들이 다 그 논의에 부회하고 감히 따로 이의하지 못한다. 이것은 근일의 폐습이니, 참으로 한탄스럽다. 내가 군중에서 곧 율을 시행하지 못한 것을 한탄한다."
하였다. 정유성이 아뢰기를,
"신들이 감히 이 군졸을 감싸고 아까워하는 것이 아니라 성덕에 손상이 있을세라 염려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소리를 질러 이르기를,
"그 사정에 어두운 말을 내지 말라. 우리 나라는 군율이 엄하지 않아 일찍이 뭇사람을 경계한 일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다 이처럼 놀라고 괴이하게 여기는 것이다."
하였다.

 

4월 9일 계해

김휘(金徽)를 겸보덕으로, 윤집(尹鏶)을 사인으로, 홍여하(洪汝河)를 검열로 삼고, 조사기(趙嗣基)를 특제(特除)하여 지평으로 삼았다. 조사기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답하기를,
"네 죄가 무겁기는 하나 홍우원(洪宇遠)에게 견줄 만하지는 않으니, 빨리 나와 직무를 보살피라."
하였다. 조사기는 일찍이 조석윤(趙錫胤)이 귀양갈 때에 때를 타서 힘껏 공박하여 상의 뜻에 맞추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 벼슬에 특제하고 상소에 대한 비답이 이러하였다.

 

홍문관이 아뢰기를,
"열성(列聖)의 행장(行狀)·지문(誌文)은 《실록(實錄)》에서 얻고 《사집(私集)》에서 나오고 《여지승람(輿地勝覽)》에 보이는 것이 모두 40도(道)입니다마는, 《실록》에서 얻은 것 중에는 지은 사람의 성명이 없는데 아직 살펴 내지 못한 것이 또한 13도입니다. 난후에 문서가 흩어져 없어져서 널리 물어 보고 찾아 보더라도 더는 찾아내기 어렵겠습니다. 살펴 낸 것에 대하여 말하면, 덕종 대왕(德宗大王)의 지문과 원종 대왕(元宗大王)의 행장·지문은 다 존숭(尊崇) 이전에 지은 것입니다. 대례(大禮)를 이미 이룬 뒤에 반드시 고쳐 지은 글이 있을 것인데 모두 고거(考據)할 곳이 없으니, 이번에 모은 것에는 실로 미진한 한탄이 많습니다. 이에 감히 정서하여 바칩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4월 11일 을축

상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무재(武才)를 관열(觀閱)하였다. 이어서 정시(庭試)를 설행하여 유경(柳炅) 등 7인을 뽑았다.

 

반송사(伴送使) 허적(許積)이 들어오니, 상이 소견(召見)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아역(衙譯) 김삼달(金三達)이 신에게 말하기를 ‘명나라 영력제(永曆帝)는 남경(南京)에 있다. 청나라 군사가 여러 번 사천(四川)을 범하였다가는 패하였는데 올해에 비로소 이길 수 있었고, 선부(宣府)·대동(大同)에서 떼도둑이 봉기하였으나 일찍이 3천의 군사를 써서 섬멸하였다. 매우 두려운 것은 몽고 군사가 날로 성하고 부락이 매우 많은 것인데 그 가운데서 가장 강한 것은 대원달자(大元㺚子)이다. 우리 나라의 사신이 왕래하는 길은 몽고 땅과 멀지 않으므로 짐꾸러미에 더욱 신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4월 12일 병인

사은사(謝恩使) 유정량(柳廷亮), 부사(副使) 오정일(吳挺一), 서장관(書狀官) 강호(姜鎬)가 청나라로 갔다.

 

상이 춘당대에 나아가 무재를 관열하였다. 정언 안후열(安後說)이 입시하였는데, 아뢰기를,
"익위사(翊衛司)는 춘궁(春宮)을 배종하므로 이는 음관(蔭官)에서 정밀히 선발하는 것인데, 시직(侍直) 신석형(申碩亨)은 서얼의 후예로서 외람되게 제수되었으니,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13일 정묘

상이 춘당대에 나아가 무재를 관열하였다. 문신(文臣)인 사복시 정(司僕寺正) 유창(兪瑒)이 으뜸을 차지하였는데 말을 내리라고 명하고, 그 나머지에게는 차등을 두어 물건을 내리고, 무신(武臣) 조필달(趙必達)·정부현(鄭傅賢)·김시성(金是聲)·김여수(金汝水) 등에게는 다 가자(加資)하였다.

 

4월 14일 무진

정언 오두인(吳斗寅)이 인피하기를,
"사간 이진(李𥘼)이 신석형(申碩亨)의 일을 발론하여 그 조파(祖派)가 미천하다고 말하였는데, 신은 신석형의 세가(世家)를 전혀 모르므로 초계(初啓)에 동참하였습니다. 이제 비로소 상세히 들으니, 신석형은 승지 채낙(蔡洛)의 외증손이고 그 형 신석번(申碩蕃)은 일찍이 선조(先朝)에서 대군 사부(大君師傅)에 제수되었다 합니다. 그 문지(門地)가 낮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는데, 지금 운운하는 것은 신석형의 외원조(外遠祖) 이권(李菤)에게 외처(外妻)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서얼의 후예라고 단정하는 것을 신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은 흐릿하게 논계(論啓)에 동참한 잘못이 있는 데다 윤허받은 뒤에 지금 비로소 와서 인피하니, 신의 벼슬을 갈아 주소서."
하고, 헌납 이형(李逈)도 이 때문에 인피하였다. 사간 이진이 인피하기를,
"동료가 인피한 사연을 보면 장황하게 해명하여 구제하였으니, 그 또한 괴이합니다. 신석형의 어미는 이안눌(李安訥)의 집 서얼(庶孽)인데 대사간(大司諫) 남노성(南老星)이 이가(李家)에 사위로 들어갔으니, 그가 신석형의 근파(根派)를 신보다 더욱 잘 압니다. 상의하여 논계해서 이미 윤허받았는데, 이제 동료들이 물러가서 뒷말이 있고 부당하게 해명하여 구제합니다. 아아, 사의(私意)가 횡행하고 공론이 행해지지 않아서 시비가 어지러우니,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 모두 신의 말이 미덥지 못한 탓이니, 신의 벼슬을 갈아 주소서."
하고, 정언 안후열이 인피하기를,
"이형은 신석형의 외가가 아내를 두고 또 아내를 얻었다 하였는데, 장관(長官)은 아내를 두고 또 아내를 얻은 것은 법전에 서얼로 논하였고 따로 구별한 일이 없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들이 상의하여 연계(連啓)하였습니다. 오두인이 처음에는 그 논계에 동참하고는 곧 그 말을 바꾸어 해명하는 것이 매우 지나치고 군말을 많이 끌어대었으니, 신은 실로 그 뜻을 모르겠습니다. 신이 어찌 감히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여 태연히 재직하겠습니까. 벼슬을 갈아 주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오두인 등은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다. 헌부(憲府)가 아뢰기를,
"오두인 등이 모두 인혐(引嫌)하여 물러갔습니다. 남의 문지를 논의하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그 사실을 잘 알지 못하면서 경솔히 논의에 참여하고는 일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설파(說破)하였습니다. 상밀하고 신중한 것이 매우 부족합니다. 그리고 일찍이 신석번을 논핵한 것은 남중(南中)의 다툼에서 나온 것인데 이제 와서 다시 논하니 일이 매우 심합니다. 모두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간 남노성이 인피하기를,
"신석형의 일은 신이 동참한 바에야 동료가 모두 체차되었는데 신만이 어찌 면하겠습니까. 신의 벼슬을 갈아 주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남노성은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헌부가 처치하여 체차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4월 15일 기사

제사(諸司)에 저축된 무명 1백 동(同)을 육진(六鎭)과 삼수(三水)와 갑산(甲山) 등 고을에 나누어 보내어 곡물 4천 9백여 석과 바꾸어 백성을 진구(賑救)하는 데에 쓰게 하라고 명하였다. 본도의 감사 이응시(李應蓍)의 청에 따른 것이다.

 

전 영돈녕부사 이경석(李景奭)이 관동(關東)에서 조정에 돌아와 상차하기를,
"신이 지난해 동으로 나갈 때에 은사(恩賜)가 많았고 두세 번 거듭 하유하여 돌아갈 곳이 있게 하셨습니다. 예전에 드문 것이고 금세에 아주 없던 것을 신 자신에게서 보니, 부자가 마주 보고 눈물을 흘렸으나 보답할 계제가 없으므로 영화가 도리어 두려움이 되어 마음이 늘 떨렸습니다. 심지어 음식의 하사가 또 돌봐주심에서 나오기까지 하였으니, 한 번 먹고 한 번 마실 때마다 감축(感祝)하는 것이 어찌 끝이 있었겠습니까. 잔폐(殘弊)한 고을에서 오래 지내다 보니 또한 온편하지 못함을 깨닫고 지난달 스무 이튿날에 춘천(春川)으로 옮겨가 있었는데, 부르시는 분부를 받고 받들어 읽고 나서 감격하여 못 견디었습니다마는, 마침 비가 자주 이어지는 때가 되어서 곧 길을 떠나지 못하고 오늘에야 비로소 서울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도문(都門)으로 다시 들어와 대궐을 바라보니, 여러 가지로 느낌이 일어나 절로 눈물이 흐르는 것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어서 생각하건대, 성세(盛世)를 만났어도 묘당(廟堂)의 말의(末議)를 돕지 못하고 위태로운 자취와 쇠약한 목숨이 서울에서 지낼 수 없었던 것은 천명이니, 어찌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매우 슬픈 것이 있었습니다. 조정이 변변치 못한 신의 일 때문에 여러 번 책망받았다는 것인데, 신이 이에 아무 얘기도 들리지 않도록 당장 죽고만 싶었습니다. 더구나 신은 세 번이나 정승 자리에 앉아 미천한 분수가 이미 극진하였으니 노여움을 당하지 않았더라도 물러갔어야 했습니다.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이 더욱 쇠약해졌으니 남은 날이 어찌 많겠습니까. 혹 서울에도 있고 시골에도 가서 분수에 따라 한가히 살면서 하찮은 목숨을 다하는 것이 신이 바라는 바입니다. 혹 불행히도 전란의 경보가 있다면 신이 어찌 편안하기를 꾀하여 구차하게 살겠습니까.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굽어 살피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의 소장(疏章)을 보고 비로소 서울로 돌아온 것을 알았으니 기쁨이 어찌 끝이 있으랴. 지난날의 이별을 뒤미처 생각하면 감회가 참으로 많은 것을 다시 어찌 말하겠는가. 경이 내일 들어오면 만나서 염려하던 회포를 풀고자 한다."
하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전유(傳諭)하였다.

 

4월 16일 경오

상이 전 영돈녕부사 이경석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 겨울 객사(客使)가 오려 할 때에 사기(事機)가 어떠할는지 모르므로 경을 황급히 지방으로 나가게 하고 마음이 매우 서운하였는데 오늘 경을 보니 기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하니, 이경석이 일어나 사례하고 아뢰기를,
"신의 일 때문에 조정이 여러 번 견책받았으니, 먼 지방에 있기는 하였으나 몸둘 곳이 없었습니다. 어제 온화한 비답을 받고 이미 극진히 감격하였는데, 이제 또 성상을 뵈니, 영광과 다행함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접때 나라에서 힐책한 것은 실로 국가의 운수에 관계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적신(賊臣)이 중간에서 꾸민 데에서 나온 것이지, 경 때문이 아니다."
하였다. 이경석이 아뢰기를,
"한 번 마시고 한 번 먹는 것이 다 성은이 아닌 것이 없는데 음식을 내려 국도를 떠난 신하에게까지 이르게 하셨으니, 감격한 말씀 밖에 아뢸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동강(桐江)의 낚시 줄이 한(漢)나라의 구정(九鼎)을 붙들어 세웠다024)  는 것은 옛 말입니다. 가는 한 줄이 어찌 무거운 구정을 붙들겠습니까마는, 이런 말이 있는 것은 대개 물러가 있더라도 일세(一世)의 풍절(風節)을 격려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처럼 변변치 못한 자는 감히 옛사람과 같기를 바라겠습니까. 이제 또 일을 그르쳐 국가에 욕을 끼쳤으니 신에게서 무엇을 취하겠습니까. 그런데 또 특별히 월봉(月俸)을 내리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덕이 없는데 녹을 먹는 것은 재앙을 부르는 것입니다. 어찌 하는 일이 없이 앉아서 먹기만 할 수 있겠습니까. 국가가 안녕한 때이니 한낱 한가한 사람이 되어 시골에 물러가 있기를 바랍니다. 불행히 사변이 있다면 어찌 감히 편안하기를 꾀하여 구차하게 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제 경의 소장을 보니, 혹 서울에 있기도 하고 시골에 있기도 한다는 따위 말이 있었다. 경이 어찌 한낱 한가한 사람으로 자처할 수 있겠는가. 서울에 있으면서 국가의 대정(大政)을 의논해야 한다. 또 경은 지금의 국사를 생각해 보라. 어찌 경이 한가한 곳에 가 있을 때인가. 예전에 어진이를 대우하는 데에도 포인(庖人)이 고기를 대고 늠인(廩人)이 곡물을 대는 일이 있었다. 상례(常例)로 월봉을 주는 것을 경은 어찌 사양하는가."
하였다. 이경석이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를 받자오니 더욱 부끄럽고 송구합니다. 신처럼 변변치 못한 자가 무슨 도움이 있어서 감히 특이한 은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독서당(讀書堂)의 선택은 계품한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아직도 봉행하지 못하였으니, 매우 타당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대제학 채유후(蔡𥙿後)도 입시하였는데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외람되게 합당하지 못한 자리에 무릅쓰고 있는데, 인재를 가리는 것으로 말하면 더욱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하루 동안 벼슬에 있더라도 하루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다만 공심(公心)이 사심(私心)을 이기지 못할 것이 염려될 따름이다."
하였다. 이경석이 아뢰기를,
"신은 선조(先朝)에서 또한 독서당의 당상으로 있었는데, 독서당의 공해(公廨)를 중창하였습니다."
하고, 채유후가 아뢰기를,
"신의 얕은 소견으로 독서당에 뽑을 만한 자가 대여섯 사람 있기는 하나 또한 많을 듯합니다."
하고, 이경석이 아뢰기를,
"대여섯 사람이면 많지는 않습니다. 문재(文才)가 성취되는 것은 한 해로 바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독서당을 빨리 뽑게 하라."
하고, 이어서 술을 내렸다.

 

4월 17일 신미

이일상(李一相)을 대사간으로, 김휘(金徽)를 사간으로, 오정원(吳挺垣)을 헌납으로, 정식(鄭植)·이민서(李敏敍)를 정언으로, 홍중보(洪重普)·유도삼(柳道三)·권우(權堣)·임의백(任義伯)·성초객(成楚客)을 승지로, 윤집(尹鏶)을 부교리로, 이형(李逈)을 필선으로, 원숙(元䎘)을 평안 병사로 삼았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임의백(任義伯)이 면대하여 아뢴 일을 비국은 어찌하여 품처(稟處)하지 않는가?"
하니, 영의정 이시백(李時白)이 아뢰기를,
"동래(東萊)에서 성을 쌓는 것은 급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고, 이조 판서 정유성(鄭維城)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동래 고을 뒤 언덕을 보니, 지금 고을이 있는 곳보다 나은 듯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기유년025)  에 약조한 뒤로 곧 수축했어야 할 것인데, 전란의 상처가 겨우 안정되었으므로 겨를이 없어서 그러한 것인가."
하였다. 우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장성(長城)을 승호(陞號)하는 일은 어떻게 처치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부사(府使)로 높이도록 하라."
하였다. 호조 판서 이시방이 아뢰기를,
"현감 이성징(李星徵)이 고을 일에 마음을 다하므로 장성의 일은 이 사람에게 맡겨야 마땅하겠습니다마는, 이 사람은 음관(蔭官)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재기(才器)가 걸맞다면 어찌 문관·음관을 논하겠는가."
하였다. 대사헌 이시해(李時楷)가 아뢰기를,
"입암 산성(笠巖山城)은 본디 호남(湖南)의 형승(形勝)이라 일컬으나 넓어서 지키기 어렵습니다."
하였다.

 

4월 18일 임신

헌부가 아뢰기를,
"전부터 관무재(觀武才) 때에는 반드시 기예가 우등한 경우에야 후한 상을 주었는데, 요즈음 춘당대(春塘臺)에서 기예를 겨룰 때에는 혹 한번 맞혀도 자급을 올려주고 혹 합격하지 못하여도 품계를 더하니, 상전(賞典)이 지나친 것이 이보다 더할 수 없습니다. 옛날 밝은 임금들은 한번 찌푸리고 웃는 것을 아꼈거니와, 이처럼 상전을 어지럽히면 어떻게 권장하겠습니까. 김시성(金是聲)·조필달(趙必達)·정부현(鄭傅賢)·김여수(金汝水)의 가자(加資)를 모두 개정하소서."
하였는데, 여러 번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4월 19일 계유

이에 앞서 금군(禁軍)의 수는 모두 6백 29원(員)이었는데, 그 뒤에 3백 71원을 더 뽑았다. 이때에 상이 또 늘려서 1천을 채우려 하였는데, 그 늠료(廩料)가 모자랄까 염려하여 호조(戶曹)에 물었다. 호조가 아뢰기를,
"한 해의 전삼세(田三稅)는 쌀이 11만 2천여 석이고 콩이 3만 9천여 석인데, 녹을 나누어 주는 수는 쌀은 10만 석이고 콩은 4만 석입니다. 금군의 수를 이제 1천으로 채운다면 쌀은 잇대어 쓸지라도 콩은 조금 모자라겠습니다. 각 창고의 쌀과 콩이 남아 있는 것이 조금 넉넉하니, 옮겨서 보태면 그래도 지급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지용(支用)이 모자라더라도 금군은 더 설치하지 않을 수 없다. 한 해에 녹을 나누어 주는 데에 쓰는 것이 어찌하여 10만 석에 이르도록 많은가. 쓸데없고 급하지 않은 것을 태거(汰去)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다."
하였다.

 

4월 20일 갑술

일본 통신사 조형(趙珩), 부사 유창(兪瑒), 종사관 남용익(南龍翼)이 사조(辭朝)하니, 면유(面諭)하여 보내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사신의 부모와 가족에게 유사를 시켜 특별히 늠료(廩料)와 약물(藥物)을 내리게 하여 내가 위로한다는 뜻을 보이라."
하였다.

 

4월 21일 을해

평안도 곽산(郭山)에서 길이가 석 자 남짓한 돌이 바다 가운데로 옮겨 들어갔다.

 

함경도·황해도에서 전염병이 크게 성하였다.

 

호조가 아뢰기를,
"숙명(淑明)·숙경(淑敬) 두 공주의 집이 용강(龍崗)·함종(咸從) 등 고을에서 둑을 쌓는 일이 있으니, 도신(道臣)의 계문에 따라 일꾼을 정하여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지금이 어느 때인데 이 일을 일으키는가. 특지로 멈추게 하라."
하였다.

 

4월 22일 병자

상이 선정전(宣政殿)에서 종실들을 시강(試講)하였다. 회원군(檜原君) 이윤(李倫)·복녕군(福寧君) 이욱(李栯) 등이 입격하였는데 가자하라고 명하고, 그 나머지에게는 말을 내렸다.

 

4월 23일 정축

채유후(蔡𥙿後)를 이조 참판으로, 성초객(成楚客)·이상진(李尙眞)을 승지로, 이재(李梓)를 집의로, 이진(李𥘼)을 부응교로, 윤집(尹鏶)을 사인으로, 임의백(任義伯)을 황해 감사로, 이항(李杭)을 지평으로, 박세모(朴世模)를 문학으로, 심유행(沈儒行)을 부수찬으로, 송규렴(宋奎濂)을 검열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詩傳)》 시구장(鳲鳩章)을 강독하였다. 강독이 끝나고서 윤대 무신(輪對武臣) 변급(邊岌)이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지난해 여름에 명을 받들어 영고탑(寧古塔)에 출정(出征)하였습니다. 회령(會寧)에서 북으로 8일 가서 영고탑에 이르고, 또 1백 리 가서 홀가강(忽可江)에 이르고, 자피선(者皮船) 【배 이름이다.】 을 타고 또 1백 리 가니 홀가강과 영고강(寧古江)이 합류하였습니다. 이 곳에서 동북으로 배로 1백 리 가는데 지세가 점점 낮아지고, 5일 만에 회통강(會通江)에 이르렀는데 물살이 매우 빨라서 노를 젓기가 매우 바빴습니다. 6일 만에 왈합(曰哈) 지경에 이르니 한 강이 서쪽으로 흘러오는데 그 너비가 임진(臨津)보다 더하고 이름을 운라강(雲羅江)이라 하며, 또 회통강과 합류하여 이름을 후통강(後通江)이라고도 합니다. 영고탑에서 14일 가서 비로소 왈합에 이르렀고 육로로 2천 4백여 리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고탑에는 성이 있는가?"
하매, 대답하기를,
"목성(木城)인데 자못 작아서 성 안팎에 겨우 3백 집뿐이고 그 장수인 이합리(尼哈里)라는 자는 조금 일을 알고 또 살고대(煞古大)라는 자가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자피선의 크기는 어떠한가?"
하매, 변급이 아뢰기를,
"작은 것은 겨우 너댓 사람을 들일 만한 것으로 1백 40척이고 큰 것은 17인을 들일 만한 것으로 20척입니다. 신이 왈합에 이르러 비로소 적선(賊船)을 만났는데 큰 배 13척은 3백 석을 실을 만하고 작은 배 26척은 왜선(倭船)과 비슷하였습니다. 청나라 장수가 신을 선봉으로 삼으려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어찌 이 자피선을 타고 저들의 큰 배를 막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청나라 장수가 옳게 여기고 드디어 왈합 3백 명과 청나라 군사 3백 명을 시켜 강변의 지세가 가장 높은 곳을 택해 진을 치게 하고 이어서 유붕(柳棚)을 언덕 위에 벌여 두고, 우리 군사를 시켜 가려진 물건에 의지하여 포를 쏘게 하였습니다. 적선이 점점 물러가는데 그 배는 몸체는 크나 노가 없어서 나아가 싸우지 못하고 흐름에 따라 내려갔습니다. 흑룡강(黑龍江)과 후통강이 합류하는 곳에 이르러 적이 처음에는 싸우려 하였으나 마침 동풍이 이니 드디어 돛을 올리고 갔습니다. 적선에 탄 남녀는 4백 명이 못 되고 가진 것은 화기(火器)뿐이고 그 용모는 다 만적(蠻賊)과 비슷하고 옷은 다 누른 비단이었습니다.
또 어피달자(魚皮獺子)가 있었는데 북경(北京)에 귀순하였습니다. 왈합 땅에서 15일정(日程) 떨어져 있어 그 사이가 아주 멀고 보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흑룡강 상류에 또 퍅합 부락(愎哈部落)이 있는데 이번에 이 적이 육지로 와서 퍅합을 약탈하였습니다. 퍅합이 항복하여 붙은 뒤에야 비로소 배를 만들어서 올 수 있었습니다. 쇠못을 쓰지 않고 나무와 줄로 얽어 묶었으니, 결코 해선(海船)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신의 생각으로 이 적은 반드시 서양 나라에서 왔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땅과 서양은 아주 먼데, 어떻게 그러한 줄 아는가?"
하였다. 변급이 아뢰기를,
"왈합이 말하기를 ‘흑룡강과 운라강 사이는 몽고(蒙古) 땅이다. 흑룡강은 매우 넓고 강 어귀에 열진(列鎭)의 옛터가 있고 여해(如海)는 【부락 이름이다.】  영고탑 서남에 있는데 우리 나라와 멀지 않다. 왈합은 머리를 깎고 이마를 덮어 수건으로 싸며 옷에는 단추를 쓰며 포성(砲聲)을 들으면 남자는 귀를 막고 눕고 여자는 놀라 넘어진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석강에 나아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독하였다.

 

4월 24일 무인

충청도에서 지진이 있었는데 감사가 계문하였다. 예조가 향축(香祝)·폐백(幣帛)을 내려보내어 본도의 중앙인 곳에서 해괴제(解怪祭)를 지내게 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때 안흥(安興)에 【진(鎭)의 이름이다. 태안군(泰安郡)에 있다.】  성을 쌓는데 군사를 징발하여 일을 독촉하므로 도내가 소요하고 고통을 원망하는 백성이 많았다. 사람들이 다 지진을 그 응험이라 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詩傳)》 하천장(下泉章)을 강독하였다. 참찬관(參贊官) 김익희(金益熙)가 아뢰기를,
"오늘날에 이 시를 보니, 참으로 느낌이 슬픕니다. 춘추(春秋) 때에는 오패(五霸)가 왕을 높였으므로 오히려 종주(宗周)를 생각하는 뜻이 있었으나, 오늘날은 이와 크게 다르니, 어찌 매우 슬픈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동지경연 이일상(李一相)이 글 뜻을 강론하다가 이량(李樑)의 일을 언급하니, 상이 이량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대답하기를,
"명종(明宗) 때의 권세있는 간신입니다."
하고, 김익희가 아뢰기를,
"이량은 권세를 탐하고 멋대로 방자하게 군 것에 지나지 않고 종사를 위태롭게 하거나 사림을 살해한 일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량의 악은 윤원형(尹元衡)에 비하여 누가 심한가?"
하였다. 김익희가 아뢰기를,
"윤원형은 사류(士類)를 베어 없앴으니 죄가 종사에 관계되나, 이량은 간사하고 외람한 더러운 사람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전부터 소인이 뜻을 얻으면 권세를 마음대로 하고 스스로 방자한 데에 지나지 않았으나, 우리 나라의 간흉은 반드시 사림을 베고야 마니, 참으로 통탄할 만하다."
하였다. 김익희가 아뢰기를,
"기묘년026)  의 제현(諸賢)은 밝은 시절을 만나 지극한 정치를 바랐으나 일을 할 때에 차분하지 않아서 마침내 권세있는 간신이 미워하고 큰 화를 빚게 만들었으니, 통탄스러워 견딜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동경(東京)027)  의 당고(黨錮)는 화가 또한 비참하였다. 그러나 간웅(奸雄)인 조조(曹操)가 끝내 그 자신 때에 즉위하지 않고 미루어 그 아들에게 주어 찬역(簒逆)의 이름이 자신에게 돌아가지 않고 그 아들에게 돌아가게 하였다. 대개 동경 제현의 절의(節義)와 언론이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있으므로 끝내 감히 스스로 방자하지 못한 것이다."
하였다.

 

상이 석강에 나아가 《대학연의》를 강독하였다. 참찬관 김익희(金益熙)가 아뢰기를,
"선유(先儒)가 전천추(田千秋)를 흐릿하다고 한 말028)  은 반드시 참으로 그렇게 여긴 것이 아니고 대개 이것을 빙자하여 임금의 마음을 감동하여 깨닫게 하려 하였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가 작기는 하나 제도는 갖추어졌다. 우리 나라의 제도로 말하자면 태자가령(太子家令)이 어찌 감히 거마(車馬)를 타고 임금이 다니는 길을 다닐 수 있겠는가."
하였다. 김익희가 아뢰기를,
"성교가 지당합니다. 진씨(眞氏)가 본(本)을 바루고 원(源)을 맑힌 말은 참으로 매우 통쾌합니다. 당시의 신하들이 이와 같이 아뢰었다면 영달한 무제(武帝)가 어찌 끝내 미혹하였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욕심이 많다고 한 급암(汲黯)의 말도 오히려 용납하였으니, 잘 간쟁하는 신하가 있었다면 어찌 깨닫지 못하였겠는가."
하였다. 또 이르기를,
"곽광(霍光)은 소제(昭帝)를 돕고 선제(宣帝)를 세웠으며 충직한 마음과 멀리 생각하는 것이 남들이 미칠 바가 아니었는데 마침내 그 아내의 간사한 꾀를 막지 못하여 일족이 멸망하게 되었으니,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하니, 김익희가 아뢰기를,
"배우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어서 충신이 임금을 섬기는 도리를 논하여 이르기를,
"전조(前朝) 말엽의 정몽주(鄭夢周)는 참으로 충신이라 하겠다."
하니, 김익희가 아뢰기를,
"정몽주는 백이(伯夷)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옛사람이 ‘충신은 반드시 효자의 집안에서 찾아야 한다.’고 한 것은 그 어버이에게 불효하면서 그 임금에게 충성한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김익희가 또 아뢰기를,
"송 태종(宋太宗)은 영명한 임금입니다. 늘 태자로 하여금 출입하며 옆에 있게 하고 뒷일을 맡겼는데 오히려 참언이 끼어드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을 보면 부자 사이는 잠시라도 떨어져서 참언하는 사람이 틈을 타게 하여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군신 사이라도 반드시 자주 접견하여 정의(情義)가 서로 미덥게 해야 막힐 걱정이 없을 것인데, 더구나 부자가 서로 가깝게 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또 이르기를,
"무제가 사자궁(思子宮)을 짓고 나서 또 귀래대(歸來臺)·망사대(望思臺)를 지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김익희가 아뢰기를,
"사자궁은 뒤미처 뉘우치고 생각하는 마음에서 지었고 망사대는 호수가에 축조하였는데 대개 태자가 목을 맨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추신(追伸)하여 봉증(封贈)한 일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괴이합니다."
하였다.

 

4월 25일 기묘

함경도 부령(富寧)·회령(會寧) 등 고을에서 세찬 바람이 불어 나무를 꺾고 돌을 굴렸다.

 

경기 가평군(加平郡)에서 고양이가 새끼를 낳았는데,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이고 꼬리가 둘이며 앞다리가 둘이고 뒷다리가 넷이며 또 다리 하나가 두 등 사이에 거꾸로 나와 있었다.

 

추쇄 도감 당상(推刷都監堂上) 이시방(李時昉)을 금부에 내렸다. 이에 앞서 도감이, 고양군(高陽郡)은 본안(本案)에 한 구(口)의 노비도 없으나 군수 윤면지(尹勉之)가 상을 바라는 생각이 있어서 매우 급하게 다그쳐서 온 경내가 이 때문에 소요하다 하여 윤면지를 추고하기를 청하였는데, 윤면지의 함사(緘辭)에 "본안에 실린 노비가 많아서 수십 구나 된다." 하였다. 상이 보고서 도감이 사사로움을 행하고 살피지 않았다 하여 특별히 주관 당상(主管堂上) 이시방을 추문(推問)하도록 금부에 전지를 내렸다. 이시방이 체포되고 나서 도제조 심지원(沈之源)과 제조 원두표(元斗杓)·김여옥(金汝鈺)·민응협(閔應協) 등이 상소하여 견벌을 같이 받기를 청하니, 상이 이시방이 혼자 당할 일이 아니라 하여 곧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당초에 남만인(南蠻人) 30여 인이 표류하여 제주(濟州)에 이르렀으므로 목사 이원진(李元鎭)이 잡아서 서울로 보내었다. 조정에서 늠료를 주고 도감(都監)의 군오(軍伍)에 나누어 예속시켰다. 청나라 사신이 왔을 때에 남북산(南北山)이라는 자가 길에서 곧바로 하소하여 고국으로 돌려보내 주기를 청하니, 청사가 크게 놀라 본국을 시켜 잡아 두고 기다리게 하였다. 남북산이 애가 타서 먹지 않고 죽었으므로 조정이 매우 근심하였으나, 청나라 사람들이 끝내 묻지 않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칠월장(七月章)을 강독하였다.

 

4월 26일 경진

전 판서 조경(趙絅)이 상소하여 음식을 하사한 것을 사례하고 이어서 경계할 것을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하늘은 사사로이 덮는 것이 없고 땅은 사사로이 싣는 것이 없고 해와 달은 사사로이 비추는 것이 없으며 임금은 이 세 가지 사가 없는 것을 받들어 천하의 백성을 부린다고 하며, 제갈량(諸葛亮)의 표문(表文)에 ‘어진 신하를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한 것이 전한(前漢)이 흥한 까닭입니다.’ 하였는데, 앞의 한 어구는 공(公)이고 뒤의 한 어구는 명(明)입니다.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는 공명 밖에 다른 방책이 없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여기에 유의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도타이 비답하였다.

 

4월 27일 신사

평안도에서 전염병이 크게 성하였다.

 

권우(權堣)·김소(金素)를 승지로, 채충원(蔡忠元)을 사인으로, 윤집(尹鏶)을 부교리로, 이경억(李慶億)을 수찬으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칠월장을 강독하였다. 상이 묻기를,
"사마천(司馬遷)이 ‘한 무제(漢武帝)가 육경(六經)을 드러내어 밝히기는 하였으나 문제(文帝)가 황로(黃老)를 숭상한 때에 미치지 못한다.’ 하였는데, 이 말이 어떠한가?"
하니, 동지경연 채유후(蔡𥙿後)가 대답하기를,
"이는 사마천이 해야 할 말이 아닙니다. 신하의 의리를 매우 잃었으니, 신은 사마천을 그르게 여깁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 고조(漢高祖)가 태공(太公)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을 때에 ‘중(仲)과 비교하여 공업이 누가 많으냐.’는 말을 하였고029)  , 당 태종(唐太宗)이 상황(上皇)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을 때에도 호월일가(胡越一家)030)  를 자랑하였으니, 두 임금이 뽐낸 뜻은 서로 같다."
하니, 특진관 이시해(李時楷)가 아뢰기를,
"한 고조·당 태종·명 태조 세 임금의 창업은 후세에서 아무도 미치지 못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당 태종이 조조(曹操)를 제사한 글에 ‘한 장수로서의 지혜는 넉넉하나 천자로서의 재능은 모자란다.’ 하였는데, 후세 사람이 평하여 바로 자기를 형용한 것이라 한 것은 명언이라 하겠다. 손책(孫策)도 영웅이다. 그가 죽어갈 때에 그 아우에게 말한 것031)  은 명석하다 하겠다."
하매, 이시해가 아뢰기를,
"요양(姚襄)도 손책에 견줄 만한데 학문은 더 넉넉합니다. 그때 이적(夷狄)에는 영웅이 많았거니와, 모용씨(慕容氏)로 말하면 낱낱이 다 호걸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석늑(石勒) 같은 자도 어찌 호걸이 아니겠는가. 그가 말하기를 ‘중원(中原)에서 함께 달리면 누구의 손에 사슴이 죽을는지 모른다032)  .’ 하였는데, 영웅의 말은 대개 이와 같다."
하였다. 채유후가 아뢰기를,
"유요(劉曜)는 눈에 적광(赤光)이 있고 뛰어난 지략이 짝이 없었는데 마침내 석늑에게 잡혔으니, 알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하는 것이 어리석으니, 어찌 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4월 28일 임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칠월장을 강독하였다. 강독이 끝나고서 상이 명나라에서 도교(道敎)가 성행한 것을 언급하였다. 참찬관 김익희(金益熙)가 아뢰기를,
"우리 나라는 3백년 이래로 좌도(左道)를 쓰지 않았으니, 참으로 흠탄할 만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한 힘이다. 내가 일찍이 송사(宋史)를 보건대, 이항(李沆)이 정승이었을 때에 번번이 입대(入對)하면 재이의 근심스러움을 극진히 말하되 임금이 듣기 싫어하여도 돌보지 않으므로 이유를 묻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항이 말하기를 ‘임금의 춘추가 바야흐로 한창이므로 지기(志氣)가 방자하기 쉬운데 근심하고 두려워할 말이 날마다 귀에 들려 그 마음을 움직이게 하지 않으면 방탕해질 염려가 있을 것이므로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으니, 그 말이 착하다. 예전부터 임금은 국가가 편안하고 가멸지며 해내(海內)에 근심이 없으면 반드시 교만하고 방탕하여 혹 좌도에 빠지거나 변방을 넓히는 데 힘쓰고 안락에 흐른다. 몸을 망치고 나라를 잃는 것이 전후가 다 그러하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매, 김익희가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지당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창업의 규모가 크고 원대하며 이를 이은 임금이 반드시 다 어질지 못하더라도 역년(歷年)이 오랜 것은 어느 대가 그러한가?"
하매, 김익희가 아뢰기를,
"삼대(三代) 뒤에는 한(漢)나라만이 그러합니다. 당(唐)·송(宋)도 3백년 동안 나라를 누렸으나, 당은 천보(天寶) 뒤로는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워 끊어지지 않은 것이 실날 같았고 송도 건강(建康)033)   이후로 남도(南渡)하여 한 지방을 차지하여 안주하였으니, 역년이 오랜 것은 다 한나라만 못합니다. 명나라가 나라를 얻은 것은 가장 정대(正大)하나 이제 이 지경이 된 것은 대개 고 황제(高皇帝)가 영웅적이고 용감하였으나 나라를 세운 규모가 오직 법제와 형벌을 숭상하고 인자하고 불쌍하게 여기는 뜻이 적었기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천순(天順)034)  이 북쪽을 순수할 때에 천화(天火)가 갑자기 내려 황극전(皇極殿)을 죄다 불태우고 가시덤불이 전정(殿庭)과 전재(殿齋)에 났으니, 참으로 막대한 변이다."
하였다.

 

4월 29일 계미

유혁연(柳赫然)을 충청 병사로, 성하명(成夏明)을 보덕으로 삼았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신하들에게 묻기를,
"일본 관백(關白)이 원당(願堂)을 새로 짓고 어필(御筆)을 얻기를 청하였다. 내가 잘 쓰지는 못하나 방편(方便)의 도리가 없지도 않으니, 특별히 허가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다들 아뢰기를
"선왕조 때에도 이 일이 있었으니 이제 그 청에 따르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또 써 줄 문자를 물었는데, 영의정 이시백(李時白)이 선왕 때에 써 준 것으로 【일광정계 창효도량(日光淨界彰孝道場)이라는 여덟 자이다.】  대답하였다. 상이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써 줄 문자를 고쳐 정하게 하였는데, 대제학 채유후(蔡𥙿後)가 ‘영산법계 숭효정원(靈山法界崇孝淨院)’이라는 여덟 자를 써서 바치니, 상이 손수 써서 내렸다.

 

이조 판서 정유성(鄭維城)이 면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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