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14권, 효종 6년 1655년 5월

싸라리리 2025. 12. 22. 09:06
반응형

5월 1일 갑신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칠월장(七月章)을 강독하였다.

 

상이 석강에 나아가 《대학연의》를 강독하였다. 강독이 끝나고서 동지경연 채유후(蔡𥙿後)가 아뢰기를,
"어떤 사람은 먼저 《강목(綱目)》을 강독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강목》은 치란과 흥망의 자취를 볼 수 있을 뿐이다. 시비가 명백하고 논의가 통쾌하여 마음을 확 틔우고 지식을 넓히는 것으로 말하면 이 서적만한 것이 없다."
하였다.

 

5월 2일 을유

이후원(李厚源)을 이조 판서로, 오준(吳竣)을 예조 판서로, 정세규(鄭世規)를 형조 판서로, 홍중보(洪重普)를 강화 유수(江華留守)로, 권우(權堣)·김소(金素)·조한영(曺漢英)을 승지로 삼고, 고 우의정 장유(張維)에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우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세 번이나 정고(呈告)하였으나, 다 불윤 비답하도록 명하였다.

 

공조 좌랑 유창신(柳昌辰)이 지어 바친 세자궁단오첩(世子宮端午帖)의 시(詩) 가운데에 ‘강연에서 차를 자주 내렸으나 비문(伾文)035)  에게는 미치지 않았으리라.[講筵頻賜茗應不及伾文]’라는 말이 있었는데, 정원(政院)에 명하여 시의 뜻을 살펴 아뢰게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칭송하는 뜻인 듯하나 아래 어구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인용한 것이 잘못되었으니, 쓰지 마소서."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순종(順宗)이 어떠한 임금이며 비문은 또한 어떠한 사람인가. 이 글 지은 것이 풍자한 것인 듯하니, 유창신을 무겁게 추고하라."
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치효장(鴟鴞章)을 강독하였다. ‘날씨가 아직 장마들지 않은 때에[迨天之未陰雨]’라는 구절에 이르러 상이 이르기를,
"일찍이 임진년에 교활한 왜(倭)가 말썽을 일으킬 조짐이 있으므로 조헌(趙憲)이 그 사자(使者)를 베어 대의(大義)를 밝히고 빨리 전란을 대비하도록 청하였다. 그때 조정에서 채용하지 못했을 뿐더러 도리어 괴망하다 하여 변방 땅에 귀양보내기까지 하였다. 병란이 일어나게 되어서야 비로소 그 신명함에 감복하여 곧 석방하라고 명하셨으니, 또한 무슨 보탬이 있었겠는가. 내가 일찍이 ‘우리 나라는 땅이 좁고 사람의 기량도 따라서 얕고 좁으므로 높은 식견과 멀리 도모하는 것이 없어서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하고, 이어서 병자년의 변란을 언급하면서 슬피 한탄하기를,
"옛사람이 장신(將臣)과 상신(相臣)이 서로 사이좋게 지내면 천하가 무사하다 하였는데, 접때 수상(首相) 김류(金瑬)와 원수(元帥) 김자점(金自點)이 눈을 흘겨 상대하였으니 무슨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지금 조정의 벼슬아치들이 불화한 것은 도리어 전일보다 심하여 조금만 움직이면 뭇 의논이 견제하여 갈 바를 정할 수 없으니, 사변이 있으면 형세가 장차 와해되어 반드시 병자년에도 훨씬 미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윤집(尹鏶)이 아뢰기를,
"김광혁(金光爀)이 체찰사 종사관으로서 호남(湖南)에 갔다가 돌아오기 전에 병자년의 난을 당하여 패군(敗軍)을 불러모아 겨우 대오를 이루었으나 갑자기 헛소문이 돌아서 마침내 밤에 소요가 일어나 한꺼번에 무너져 흩어지고 다시는 거두어 모으지 못하였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대장 자리에 마땅한 사람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대장이 먼저 말한 자를 베고 장막 안에 곧게 누워 주아부(周亞夫)처럼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 지경이 되었겠는가."
하였다.

 

5월 3일 병술

제주(濟州)에서 크게 눈이 내려 얼어 죽은 국마(國馬)가 모두 9백여 필이었다.

 

5월 4일 정해

황해도(黃海道)에서 우박이 내렸는데 큰 것은 달걀만 하였다.

 

허적(許積)을 호조 판서로 삼았다.

 

평안도의 올해 전조(田租)를 줄이라고 명하였다. 강계(江界) 등 스물 다섯 고을이 재해를 입은 것이 가장 혹독하였는데 도신(道臣)이 계문하였으므로 특별히 이 명이 있었다.

 

5월 6일 기축

전남도(全南道)에 지진이 있었다. 충청도에 서리가 내리고 한재(旱災)·황재(蝗災)가 있었다. 함경도에서 큰 바람이 불어 모래를 날리고 돌을 굴렸으며 전염병이 크게 성하여 죽은 자가 2백여 인이었다.

 

전남도 동복현(同福縣)의 전패(殿牌)가 불태워졌다. 도신이 계문하니, 그 고을을 혁파하라고 명하였다.

 

5월 11일 갑오

김광욱(金光煜)을 좌참찬으로, 정유성(鄭維城)을 우참찬으로, 이진(李𥘼)을 사간으로, 김휘(金徽)를 사인으로, 박세모(朴世模)를 지평으로 삼았다.

 

정언 이민서(李敏敍)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나라의 일이 날로 위태해지고 백성이 날로 야위어 갑니다. 위태하여도 구제하지 않으면 망하게 되고, 야위어도 돌보지 않으면 흩어지게 될 것입니다. 납간(納諫)과 보민(保民)에 관한 말씀을 먼저 아뢰어 보겠습니다. 공론은 국가의 원기(元氣)이고 간쟁(諫諍)은 공론의 근본입니다. 대개 천하의 의리는 그지없고 한 사람의 재식(才識)은 한계가 있으니, 남과 나로 가르고 공과 사로 나눈다면 어찌 천하의 착한 사람을 오게 하여 천하의 일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무릇 사람이란 겁내는 자는 많으나 굳센 마음을 가진 자는 적고 무른 자는 편안하나 곧은 말을 하는 자는 위태합니다. 임금이 너그러이 용납하고 틔어 이끌어서 할 말을 다하는 기개를 기르고, 의심 없이 들어서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는 도량을 넓히지 않는다면, 누가 지극히 위험한 것을 범하고 지극히 어려운 것을 행하겠습니까. 이제 전하께서는 오만하게 스스로 거룩하게 여기고 홀로 총명을 행하며 한세상을 하찮게 여기고 뭇 신하를 깔보아 대신을 종처럼 기르고 대간을 개와 말처럼 대하십니다. 분주히 종사하되 뜻에 따를 뿐이고 어기지 못하니 종이 아니고 무엇이겠으며, 속박되어 달리되 울면 쫓겨나니 개와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얼굴에 잘난 체하는 기색이 나타나고 말이 편벽하여 남을 용납하지 않아 한 마디 말이라도 맞지 않으면 물리쳐 쫓는 일이 계속되므로, 대소 신하가 허물을 바로잡기에 겨를이 없고 머리를 감싸쥐고 발을 포개면서 두려워 삼가니,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생각하건대, 임금과 신하 사이가 현격하기는 하나 정의(情義)를 서로 보전하고 예법(禮法)을 서로 유지하는 것인데, 초개처럼 여기기만 한다면 어찌 국사(國士)로서 보답하기를 요구하겠습니까. 더구나 문사(文士)·대부(大夫)는 임금이 심복으로 의지하는 대상입니다. 조종조에서는 매우 가까이하는 예우를 하셨으니, 세종(世宗)·성종(成宗) 때의 옛일에서 징험할 수 있습니다. 선조(宣祖)께서 이어받아 배양에 더욱 힘쓰셨는데 나라를 재건한 공적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것에 힘입었습니다. 신은 오늘날 가까이하여 믿는 자가 과연 어느 사람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랜 나라에 친신하는 신하가 없어 심복으로 의지할 데가 없고 일을 맡겨도 통괄함이 없습니다. 벌떼처럼 일어나는 젊은이만 취하여 모아내는 일을 구차히 쾌하게 여기어 조정의 대체를 무너뜨리고 국가의 원기를 해치니, 전하께서 취사를 그릇되게 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근일에는 신하를 대우하는 예가 더욱 박하여 가두고 매 때리는 것을 가벼운 벌로 여기고 차꼬가 관원에게 두루 미치고 오라가 고관에게까지 미칩니다. 사기가 꺾여 잡류가 횡행하고 염치가 아예 없어져 명절(名節)이 땅을 쓴 듯이 없으니, 국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언로(言路)가 통하지 않는 것은 괴이할 것도 못됩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어질고 충실한 신하에게 심복을 맡기고 정직하고 간쟁하는 신하에게 이목을 붙여서 정성을 미루어 그들에게 맡기고 자기를 굽혀서 말을 들어 임금의 도리가 아래로 통하고 곧은 말이 날마다 들리게 하시지 않습니까.
《서경(書經)》에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굳어야 나라가 편안하다.’ 하였고 전(傳)에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서 왕이 되는 것은 아무도 막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예전부터 이제까지 백성이 편안하지 않고도 나라를 보전할 수 있는 자가 없었습니다. 신이 오늘날의 조정을 보면 이렇습니다. 정령(政令)과 베푸는 일에 조금이라도 백성을 편안하게 할 마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교명(敎命)이 내려질 때에 조금이라도 홀아비나 홀어미를 가엾이 여기는 뜻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전하의 뭇 신하 중에 남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에 관한 말을 어전에서 아뢰는 자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경외(京外)의 신하 중에 전하의 백성이 유랑하여 시달리는 정상을 대궐에 아뢰는 자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슬픈 우리 백성이 한 해동안 내내 고생하며 근력을 다하여 조세를 바쳐도 힘이 모자라므로 몹시 근심하면서 오히려 전하께서 조금이라도 덕의(德意)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이를 돌보지 않고 바야흐로 무익한 일에 뜻을 기울이시니, 독책(督責)하는 자는 잔혹한 짓을 자행하고 재능을 뽐내는 자는 남보다 더하여 귀염을 사려고 힘씁니다.
추쇄(推刷)는 작은 일인데 거조(擧措)가 너무 엄중하고 과조(科條)가 너무 엄밀하며, 염초(焰硝)를 굽는 것은 말단의 일인데 나라의 반이 소요하고 갇힌 사람이 옥에 가득합니다. 서울 군사가 먹는 것은 날로 늘어 가고 경창(京倉)의 곡식이 축나는 것은 날로 많아집니다. 나라의 큰일이라면 오히려 핑계할 수 있겠으나, 한 궁가에서 쓰는 것이 수 백만금이나 되고 사사로운 자봉(自奉) 또한 한 두 가지가 아니므로 고혈은 이미 다 짜냈고 잗단 이익까지 죄다 다툽니다. 법을 세워 넌지시 빼앗고 판매에 세를 매겨 교묘히 거두어 들이니, 전하께서 재능과 심산(心算)이 있는 신하를 얻으시더라도 눈앞의 일만 처리한다면 또한 임금이 재물을 다스려 풍족하게 하는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신은 원하건대 전하께서 근본을 맑히고 악의 근원을 막되 백성을 아끼는 것은 절용(節用)에서 시작하고 절용은 생약(省約)에서 시작하여 궁중의 용도(用度)와 군국(軍國)의 모든 수용(需用)을 다 조종 때의 옛 규례와 같이 하소서. 재물이 한없이 들어가는 것을 조금 멈추고 국가의 정항(正項)인 공납(供納)만으로 쓰시기 바랍니다. 더구나 사치의 해독은 천재(天災)보다 심한데, 말속(末俗)이 이미 투박해져서 참람하여도 금하지 않으니, 몸소 거친 옷을 입는 교화를 숭상하여 사치한 풍속을 고쳐야 하겠습니다. 대저 오래 쇠퇴한 데에서 약세를 만회하여 중흥의 큰 공적을 세우는 것이 어떠한 사업인데 터덜터덜 느릿이 걸어서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전하께서는 사의(私意)를 구차히 쾌하게 하고 대계(大計)에 소홀히 하여, 본심을 간직하는 데 있어서는 자기 허물을 듣기 싫어하고 일을 하는 데에는 먼저 백성의 재물을 다 씁니다. 잗단 오락에 빠져 금원(禁苑)이 놀이를 구경하는 마당이 되고 사화(私貨)를 불려 내사(內司)가 도피하는 자를 모이게 하는 수풀이 됩니다. 인척을 높여서 관방(官方)이 어지럽고 희노(喜怒)를 경솔히 써서 상벌이 어지러우며, 아첨이 풍속이 되어 사신(私臣)이 등용되고 이익을 일으키는 것이 날로 성하여 덕을 숭상하는 것이 쇠퇴합니다. 깊은 궁중에서 한가히 계시는 동안을 신이 아는 바가 아니나 가무와 여색, 술이 또한 어찌 반드시 없으리라고 보증하겠습니까. 뵙건대, 전하께서는 불세출의 자질로 큰일을 할 때가 되었고 만승(萬乘)의 자질을 가지고 여러 대를 이어온 기업(基業)을 이어받으셨으므로 비상한 공적을 머지않아 기대할 수 있는데, 지(志)가 기(氣)에 빼앗기고 의(義)가 이(利)에 가리워서 지사(志士)가 해체되고 백성이 실망하게 하십니다. 전국 때 말세의 임금이 단단히 마음먹고 오래 생각하여 세운 것이 있었던 것만 못하시니,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전하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였는데, 상이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였다.

 

5월 12일 을미

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경여(李敬輿)가 조정에 돌아왔다. 상이 소견(召見)하여 이르기를,
"황급히 국도를 떠났을 때에 내 마음이 매우 언짢았으나 이제 이미 입조(入朝)하였으니 못 견디게 기쁘다."
하니, 이경여가 일어나 사례하고 이어서 치사(致仕)하고 돌아갈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위유(慰諭)하고 윤허하지 않으며 술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5월 13일 병신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이때 이조 판서 이후원(李厚源)이 양호(兩湖)에서 막 돌아왔다. 상이 안흥(安興)·격포(格浦)의 형세와, 설축(設築)하여 방수(防守)하기가 편리한지의 여부를 물었다. 이후원이 조목조목 대답하고 이어서 안흥·격포·성계(聖界)·원산(圓山) 등의 그림을 상 앞에 바쳤다. 상이 이후원을 시켜 그림을 펴게 하고 가리키며 그 지리의 원근과 산천의 형세를 물었다. 한참 동안 펴 보고 이르기를,
"늘 말로 전하는 것을 들었으므로 상세한 것을 알지 못하였는데, 이제 이 그림을 보고 대개는 알았다."
하였다. 병조 판서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강도(江都)를 지키려면 격포에 진(鎭)을 두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원두표·이후원과 함께 진을 설치할 방책을 강정(講定)하고 또 앞으로 격포에 성을 쌓아 감사가 병란에 임하여 들어가 지킬 곳으로 삼으려 하였다. 좌의정 김육(金堉)이 아뢰기를,
"신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변이 있으면 감사는 어디로 갈 것인가?"
하였다. 김육이 아뢰기를,
"감사의 직임은 본디 성을 지키는 장수가 아닙니다. 양서(兩西)에는 혹 관방(關防)을 둘 수 있겠으나, 호남(湖南)으로 말하면 무사한 곳인데 백성이 곤궁하고 재물이 다 없어진 이때에 어찌 가벼이 움직여 일을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신은 예전대로 두는 것이 온편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상이 언짢아 이르기를,
"구차히 동의할 수 없으므로 각각 소견을 지키는 것도 괜찮겠으나, 지금 천재(天災)와 시변(時變)이 매우 심하여 앞날의 근심이 말할 수 없는데, 어찌 손을 묶고 앉아서 사전의 대비를 전혀 잊을 수 있겠는가. 감사는 영문(營門)에 머물러 계책으로 호응하고 병사(兵使)는 군사를 거느리고 임금에게 충성을 다해야 옳을 것이다."
하였다. 원두표가 아뢰기를,
"신이 늘 김육을 보면 민심을 잃지 않는 것을 상책으로 삼고 백성을 움직여 일을 일으키는 것을 그르게 여깁니다."
하고, 김육은 아뢰기를,
"인심을 잃으면 금성탕지(金城湯池)가 있더라도 지킬 수 없을 것입니다."
하고, 원두표가 아뢰기를,
"민심을 얻더라도 군사를 쓸 바탕이 없으면 또한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5월 14일 정유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동산장(東山章)을 강독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주공(周公)이 유언(流言)을 받았는데 소공(召公)·태공(太公)이 어찌하여 한 마디 말도 변명하지 않고 성왕(成王)이 금등(金縢)을 열고 나서 비로소 깨닫게 하였는가?"
하니, 참찬관 김익희(金益熙)가 대답하기를,
"두 공이 주공을 변명하지 않은 것에 대해 선유(先儒)도 논한 것이 있습니다. 대개 성왕이 어린 나이에 의혹이 매우 깊었으므로 충고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으로 말하면 성왕이 타고난 자질은 한 소제(漢昭帝)에 미치지 못합니다."
하였다. 상이 명나라 건문(建文)036)  의 일을 언급한 것을 인하여 이르기를,
"건문이 40년 동안 유랑하고도 끝내 죽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고금에 없던 일이다. 만승의 천자가 지위를 잃게 되면 필부가 되기를 바라도 될 수 없는데, 어찌 이러하여도 보전할 수 있는 자가 있겠는가. 이것은 대개 건문 자신이 덕을 잃지 않았으므로 하늘의 보호가 이러하였을 것이다."
하니, 김익희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부지런히 정신을 돋우어 잘 다스리려 꾀하시나, 온갖 일이 퇴폐하여 공적을 이루지 못하시니, 이는 반드시 그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무슨 까닭이냐고 하였다. 대답하기를,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생각하는 바가 있더라도 반드시 쓰이지 않을 것이라고 다들 생각하여 스스로 막고 의심하여 말을 다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깊은 병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위에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만든 것이지만, 경은 논사(論思)하는 자리에 있고 이 위급한 때를 당하였으니, 생각하는 바가 있으면 죄다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김익희가 아뢰기를,
"신이 어찌 감히 숨기는 것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말하여 보라."
하였다. 김익희가 아뢰기를,
"근일 국가에서 시행하는 것은 추쇄(推刷)와 영장(營將) 두 가지 일뿐인데, 의논이 서로 어그러져서 사람들이 다 쾌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안흥(安興)·격포(格浦)·강화(江華)·남한(南漢)의 일로 말하면 조정 신하들의 뜻이 다 상의 뜻과 같지 않습니다. 입대(入對)하였을 때에는 옳다고 하였더라도 나와서는 곧 다르게 의논합니다.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도리로는 무릇 국가의 이해와 득실에 대하여 그 소견에 따라 곧이 아뢰고 숨기지 말아야 합니다. 백성에게 편리하고 나라에 이로운 것이면 힘껏 청하여 시행하고, 백성에게 해롭고 나라에 병되는 것이면 또한 명백히 말하고 시원하게 밝혀서 반드시 빨리 폐지해야 옳을 것입니다. 어찌 이미 옳지 않은 줄 알면서 구차하게 면전에서는 따르고 물러가서 뒷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버릇이 이미 깊어져서 어찌할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조정에서 한 가지 일이 있을 때마다 뭇사람의 의논이 갈라져 안정하고 화합할 기약이 없으니, 이러하고도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추쇄로 말하면 신이 건청(建請)한 것인데, 신을 나무라는 자는 전하를 공리(功利)로 인도한다고 모두 말합니다. 신이 변변치 못하기는 하나 유가(儒家)에서 나서 자랐는데, 어찌 감히 공리로 임금을 인도하겠습니까."
하였다.

 

5월 15일 무술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파부장(破斧章)·벌가장(伐柯章)·구역장(九罭章) 등을 강독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재이(災異)의 참혹함이 근일보다 심한 때가 없었다. 덕이 없는 나로서 구제할 바를 모르겠으니, 신하들에게 도움을 구하여 당면한 어려움을 구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승지는 나를 대신하여 교서를 기초하고 널리 곧은 말을 구하여 내가 미치지 못하는 것을 보충하게 하라."

 

이수창(李壽昌)·박안제(朴安悌)·유천추(柳天樞)·김진표(金震標)·이도기(李道基)·이성항(李性恒)·정수(鄭脩)·민도(閔燾)·이온(李溫)·이하(李遐)를 중도(中道)에 정배(定配)하라고 명하였다.
당초에 조정에서 호서(湖西)의 각 고을을 시켜 염초(焰硝)를 다려 만들게 하여 다리는 방법을 전수받아 익히게 하였는데, 각 고을이 마음대로 사사로이 사고 도신(道臣)에게 속여 신보하였다. 일이 발각되매 각도의 수령을 잡아 들여 사목(事目)을 따라 지키지 않은 죄로 결단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므로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영돈녕부사 김육(金堉)이 상차하여 이수창 등을 정배한 것이 지나치게 무거움을 말하고 해당율을 시행하기를 청하니, 답하였다.
"나라의 형세가 위급하여 거의 보전하기 어려우니, 법을 범한 자가 있으면 내 자손이라도 감히 가벼이 용서할 수 없는데, 더구나 그 밖이겠는가."

 

5월 16일 기해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낭발장(狼跋章)을 강독하였다.

 

5월 20일 계묘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보였다.

 

함경도에서 우박이 내렸는데 큰 것은 탄환만하였다.

 

상평청(常平廳)의 쌀 2천 8백 83석과 콩 6백 18석을 강화(江華)와 자연도(紫燕島)에 나누어 보내라고 명하였다.

 

5월 21일 갑진

남노성(南老星)·권우(權堣)·김소(金素)·조한영(曺漢英)을 승지로, 심유행(沈儒行)을 헌납으로, 이단상(李端相)을 교리로, 이은상(李殷相)을 문학으로, 오정원(吳挺垣)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5월 22일 을사

상이 하교하였다.
"이징(李澂)037)  과 이숙(李潚)038)  이 병이 있으니 내의(內醫)를 보내어 약물을 가져가서 구완하게 하라."

 

5월 23일 병오

태백성이 낮에 보였다.

 

강원도 이천(伊川) 사람 잉덕(芿德)이 지아비를 죽였는데 도신이 계문하니, 경옥(京獄)에 잡아들이고 삼성(三省)에 명하여 국문하게 하였다. 잉덕이 승복하니, 드디어 처형하고 그 태어난 고을을 혁파하라고 명하였다.

 

5월 24일 정미

태백성이 낮에 보였다.

 

이때 오래 가물어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려 하였는데, 하교하였다.
"제문(祭文)에 자기를 죄책하는 말이 적으니 어찌 신명을 감동시킬 수 있겠는가. 사신(詞臣)으로 하여금 보태어 고쳐서 바치게 하라."

 

5월 25일 무신

경기에서 전염병이 크게 성하고, 황해도와 함경도에서 우박이 내렸다.

 

이일상(李一相)을 이조 참판으로, 정지화(鄭知和)를 승지로 삼았다.

 

헌부 【대사헌 이시해(李時楷), 집의 이재(李梓), 장령 유준창(柳俊昌), 지평 민희(閔熙)·박세모(朴世模).】 가 분부에 응하여 상차하기를,
"재이(災異)가 일어남이 어느 세대인들 없겠습니까마는, 오늘날의 참혹함보다 심한 때가 없었습니다. 천문(天文)이 도수(度數)를 어기고 지축(地軸)이 안녕을 잃어 눈과 서리가 여름에 내리고 추위와 더위가 어지러우며 그 밖의 괴이하고 놀라운 변을 이루 기록할 수 없으니, 아아! 또한 무섭고 두렵습니다. 하늘이 위에서 노하고 백성이 아래에서 원망하여 온갖 폐단이 다 일어나니 나라의 형세가 위태하여 조석을 보전하지 못할 지경입니다. 접때 연석(筵席)에서 논의할 때에 성상께서 매우 재이를 근심하여 대신에게 하문하셨으나, 아깝게도 대신은 한 마디 말도 성상의 질문에 우러러 답하지 않고 번잡한 말로 몇 마디 아뢰었을 뿐입니다. 재이를 당하여 덕을 닦고 허물을 살피는 것은 임금의 일이기는 하나 보상(輔相)의 지위에 있어 경륜(經綸)의 책임을 맡았으면 어찌 두렵고 근심하는 뜻이 없겠습니까마는, 한 방책도 생각해 내지 않고 성상의 지극한 뜻을 저버리며 인심이 바라는 것을 서운하게 하였습니다. 하늘은 거짓을 용납하지 않으므로 재이가 헛되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방만하기가 줄곧 이러하니, 신은 답답합니다. 아아, 황각(黃閣)039)  은 자리를 채웠으나 치도(治道)를 위해 녹을 먹는 보람을 바랄 수 없으며, 사기(士氣)가 떨치지 않아서 인재가 성하게 일어나는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서경(書經)》에 ‘팔다리가 있어야 사람이고 어진 신하가 있어야 성인이 된다.’ 하였습니다. 사람은 팔다리가 있어야 몸을 움직일 수 있고 임금은 어진 신하가 있어야 치화(治化)를 도와 이룰 수 있습니다. 예전에 어진이를 구하기에 애쓰고 사람을 얻고서 편안하게 되었던 것이 다 이 때문입니다. 바퀴살이 약하면 먼 길을 달릴 수 없고, 깃털이 약하면 넓은 하늘을 날 수 없는 것은 필연적인 이치입니다. 전하께서 천위(天位)를 함께 하는 자가 누구이며 천직(天職)을 함께 닦는 자는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 사마휘(司馬徽)는 시무(時務)를 아는 것은 준걸(俊傑)에게 달려 있다 하고, 제한(齊澣)은 요숭(姚崇)을 시간(時艱)을 구제하는 정승이라 하였습니다. 준걸한 사람도 세상에 드물게 나오는데 시간을 구제하는 정승을 어찌 쉽게 얻겠습니까. 노회신(盧懷愼)을 요숭(姚崇)의 덤으로 녹을 먹는다고 하기는 했으나 또한 앉아서 풍속을 진정시킬 수 있었습니다. 덤으로 녹을 먹는다라는 비평만 있고 앉아서 진정시킬 희망이 없다면 치세(治世)에서도 믿고 맡길 수 없는데, 더구나 매우 위태하고 매우 어지러운 때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믿고 의지할 수족 같은 신하가 없거니와 의지할 심복(心腹)도 없어 마치 풍랑 가운데에서 빈 배에 서 계신 듯하니, 널리 구제하기를 바라는 것은, 아아! 또한 어렵습니다.
《시경(詩經)》에 ‘화락한 문왕(文王)040)  이 어찌 사람을 진작(振作)하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문왕은 화락한 덕이 있고 사람을 진작하는 교화를 행하여 많은 선비가 위의(威儀)있는 아름다움을 얻어 자신이 이 때문에 편안하고 나라가 이 때문에 편안하였으니, 어찌 후세에서 본받아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제는 현관(賢關)에 음향이 끊어지고 정로(正路)가 황폐하여 풍속이 날로 투박해지고 사기(士氣)가 떨쳐지지 않습니다. 덕을 발전시키고 학업을 닦는 것은 이미 그런 사람이 없거니와 책상자를 지고 글을 읽으러 다니는 것도 그런 무리가 없으니, 어찌 감히 인재가 성하게 일어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어려서 배우는 것은 장년(壯年)이 되어 행하려는 것인데, 어려서 이미 배운 것이 없으면 장년이 되어 무엇을 행하겠습니까. 수십 년 전에는 과장(科場)에서 재예(才藝)를 다투는 자가 오히려 풍류스런 문장의 재주가 있었으나, 이제는 문장의 재주까지도 없습니다. 이것에 말미암아 과제(科第)에 뽑혀 오르고 이것에 말미암아 사(士)가 되고 대부(大夫)가 되며 이것에 말미암아 경(卿)이 되고 상(相)이 되는데, 그 직임에 임하여 그 직무를 닦고 임무에 나아가 일하는 것을 어찌 이 사람에게 바랄 수 있겠습니까. 어진 사람이 나지 않아서 나라가 장차 비게 될 것이니, 말하면 슬프고 생각하면 기가 막힙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염려해야 할 것은 병식(兵食)이 넉넉하지 못한 데에 있지 않고 사기가 떨치지 못하는 데에 있으며, 훈련이 정밀하지 못한 데에 있지 않고 선비의 취향이 바르지 못한 데에 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어진 재상을 임용하고 재상이 많은 선비의 본보기가 된다면, 사기가 떨쳐서 풍속이 바로잡히고 풍속이 바로잡히면 인재가 일어나고 인재가 일어나면 문채와 바탕이 있는 사람이 적절히 배출되고 위의 있는 선비가 많아서 편안해집니다. 어질고 재능 있는 사람이 등용되지 않을세라 걱정하지 않고 일의 공적이 이루어지지 않을세라 걱정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근래 관방(官方)이 날로 혼탁해지고 조정(朝政)이 날로 문란해져서 덕 있는 자를 임명하는 자리에 흠이 많고 일을 맡기는 도리도 어그러지니, 순서를 따라서 나아가면 용렬한 자도 높은 벼슬에 오르고 규례를 지켜서 지체되면 재능이 있는 자도 아랫 자리에 막혀 있습니다. 사람을 위하여 벼슬을 가리고 사람은 재기를 묻지 않으므로 여러 벼슬을 두루 돌아 조석으로 벼슬을 옮기니, 밖으로 그 이름이 들리면 동자(童子)도 분육(賁育)041)  을 당할 만하고 한갓 그 헛된 명예를 사모하므로 어목(魚目)도 연성(連城)에 팔릴 수 있습니다042)  . 아아, 관(官)을 두고 직(職)을 나누는 뜻이 어찌 다만 그렇게 하려는 것이겠습니까. 일을 하는 데에 실속이 없는 것으로 말하면 오늘날 병이 든 근원입니다. 하늘에 응답하기는 하나 그 실속이 없고 정사를 하기는 하나 그 실속이 없고 사람을 등용하기는 하나 그 실속이 없고 군사를 닦기는 하나 그 실속이 없고 간언(諫言)을 듣기는 하나 그 실속이 없고 학문을 연구하기는 하나 그 실속이 없고 신하를 만나기는 하나 그 실속이 없어 헛된 것을 숭상하고 거짓을 조장하므로 나라의 일이 날로 글러 가니, 전하께서 정사에 부지런하신 근심은 끝내 풀릴 날이 없습니다. 마치 굶주린 사람이 옆에 있는데 여덟 가지 진미를 입으로만 이야기하는 것과 같으니, 어찌 한창 주린 배에 유익하겠습니까. 적은 음식이라도 곧 주어서 배고픈 것을 푸는 것만 못합니다. 아아, 대신 중에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 선비에게 본보기가 없고 선비에게 본보기가 없으므로 사기가 떨치지 않고 사기가 떨치지 않으므로 풍속이 바르지 않고 풍속이 바르지 않으므로 인재가 일어나지 않고 인재가 일어나지 않으므로 현능(賢能)이 등용되지 않고 현능이 등용되지 않으므로 사람을 위하여 벼슬을 가리고 사람을 위하여 벼슬을 가리므로 일을 하는 데에 실속이 없고 일하는 데에 실속이 없으므로 다스리는 데에 보람이 적습니다. 인연하여 돌고 돌며 반복하여 병이 깊어지니, 이렇게 한다면 날마다 신하를 불러 묻는 것을 일삼고 날마다 정치하는 도리를 강구하더라도 어떻게 하늘의 노여움을 되돌리고 몰려오는 재앙을 사라지게 할 수 있겠습니까.
옛말에 ‘다스려지고 편안한 때에는 용렬한 자가 베게를 높이 베고 누워 있어도 정치에 여유가 있으나 위태하고 어지러울 때에는 성철(聖哲)이 분주하여도 부족하다.’ 하였으니, 비상한 일은 본디 비상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하의 일은 천만 가지로 변화하는 것이 다 임금의 한 마음에 말미암으니, 국가의 치란과 백성의 고락과 요(堯) 순(舜)처럼 되고자 하고 탕(湯) 무(武)처럼 되고자 하는 것이 어찌 모두 전하의 마음이 어떤가에 달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총명하고 영예(英睿)하며 성학(聖學)이 날로 진취하시므로 본디 신들이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마는, 아마도 의리에 대하여 연구를 극진히 하지 못하고 마음을 닦는 데에 정세(精細)를 극진히 하지 못하셨으므로 사령(辭令)에 나타나는 것이 혹 중화(中和)를 잃고 사업에서 베푸는 것이 혹 순일(純一)하지 못하며 희노(喜怒)와 형상(刑賞)에 혹 뜻대로 하는 것이 있어서 법도를 폐기하고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을 혹 명백히 가리지 않아서 흑백을 혼동하시는 듯합니다.
이 때문에 군자는 거경(居敬)을 중히 여기고 궁리(窮理)를 귀하게 여기며 덕성(德性)을 높이고 학문을 말미암습니다. 학문을 말미암는 것은 궁리하여 치지 격물(致知格物)하기 위한 것이고 덕성을 높이는 것은 거경하여 정심 수신(正心修身)하기 위한 것입니다. 진실로 경연 석상에서 구두에 구애받지 않고 겉치레를 일삼지 아니하며, 정신을 오로지하여 강구하고 의리를 탐색하며 묻기를 좋아하고 받아들이기를 좋아하며, 성인인 양 하는 병통을 없애고 자기를 굽혀 착한 것을 따르며 이기기를 좋아하는 사심을 남기지 말아서 기질이 청명하고 의리가 소저(昭著)하게 하면, 천하의 이치가 다 내 마음 속에 갖추어지고 천하의 일이 내 마음의 감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마침내 안팎이 환히 비쳐지고 두루 융통하여 천지가 자기 자리에 안정되고 만물이 생육을 다하도록 완성시키는 공적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위란(危亂) 때문에 한갓 근심하지 말고 재이(災異) 때문에 스스로 꺾이지 마십시오. 떨쳐일어나 날로 새로워지고 어진이를 가려서 실속을 힘쓰시어 인애(仁愛)하는 하늘이 점점 그 노여움을 더하게 하지 마소서. 그러면 다행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였다.
원두표(元斗杓)가 이시백(李時白)과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이시해는 원두표의 인척이므로, 사람들이 이시해가 원두표를 위하여 이 차자를 올렸다 하였다.

 

영의정 이시백(李時白)이, 헌부가 차자 가운데에서 오로지 대신을 공박하였다 하여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좌의정 구인후(具仁垕), 우의정 심지원(沈之源)도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5월 26일 기유

재신(宰臣)을 보내어 비를 빌게 하였다.

 

5월 27일 경술

영의정 이시백, 좌의정 구인후, 우의정 심지원이 모두 세 번이나 정고(呈告)하였으나, 다 불윤 비답(不允批答)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녹명장(鹿鳴章)을 강독하였다. 강독이 끝나고서 상이 이르기를,
"삼공(三公)이 한꺼번에 인퇴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꼴인가."
하니, 예조 판서 이후원(李厚源)이 아뢰기를,
"다들 불안하게 생각해서 그런 것입니다. 일찍이 듣건대, 중종(中宗) 때에 옥당의 관원이 경연에 입시하여 대신을 힘껏 공박하였으므로 우상 신용개(申用漑)가 물러가 면직을 청하려 하였는데 수상 정광필(鄭光弼)이 웃으며 ‘저들이 과연 우리들을 나쁜 사람으로 여겼다면 면대하여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니 신용개가 웃고 그만두었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너그럽다. 대신은 본디 이러해야 마땅하다."
하였다. 이 날 큰비가 내렸는데, 상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오늘 이렇게 비가 내리는 것은 경들이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빌어서 천심(天心)을 감동시켜 돌렸기 때문일 것이니, 내가 매우 기쁘다."
하였다. 【입시한 연신(筵臣) 가운데에 제관(祭官)이 있으므로 이 하교가 있었다.】  이때 오래 가물었으므로 상이 궁정(宮庭)에서 노천에 서서 분향하고 묵도(默禱)하였는데, 한밤이 되니 큰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5월 28일 신해

홍위(洪葳)를 교리로, 이항(李杭)을 정언으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사모장(四牡章)을 강독하였다.

 

황해 감사 임의백(任義伯)이 사조(辭朝)하니, 면유(面諭)하여 보냈다.

 

가산 현감(嘉山縣監) 이정영(李正英)을 강서현(江西縣)에 정배하였다. 당초에 이정영이 응교로서 가산으로 쫓겨 보임되었었다. 그 고을 백성 김익견(金益堅)이 영문(營門)에 아부하여 둔전 별장(屯田別將)이 되어 불법을 자행하여 폐해가 마을에 미치므로, 이정영이 현감이 되자 김익견의 죄상을 감사 심택(沈澤)에게 보고하여 잡아 가두고 형신(刑訊)하기를 청하였으나, 심택이 허가하려 하지 않았다. 이정영이 그 죄를 낱낱이 물어 장살(杖殺)하였는데, 도내가 다 쾌하게 여겼으나 심택이 그 마음대로 형신한 것을 노여워하여 조정에 알리니, 특별히 명하여 체포 심문하고 죄를 정하게 하였다. 처음에는 춘천(春川)에 정배하였는데, 상이 가까운 곳에 정배해서는 안 된다 하여 강서로 고쳐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충청 수사(忠淸水使) 김한문(金漢文)이 치계하였다.
"소근 첨사(所斤僉使) 김우인(金友仁)이 섬들을 돌며 경계하다가 굴업도(堀業島)에 이르렀을 때에 당선(唐船) 세 척이 김우인이 거느린 방패선(防牌船)을 습격하여 빼앗아 달아났습니다. 김우인이 급히 쫓아가니, 당선이 돛을 달고 앞으로 나오므로 한참 서로 싸워 김우인이 거의 다 목을 베고 나머지는 다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5월 29일 임자

태백성이 낮에 보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황황자화장(皇皇者華章)을 강독하였다. 강독이 끝나고서 상이 이르기를,
"삼공이 한꺼번에 인퇴하여 군국(軍國)의 일이 적체되어도 결정하지 못한다. 헌부(憲府)의 관원을 꾸짖으면서 대신에게 나오도록 권하려 해도 이는 또한 옳지 않은 점이 있으니, 내일 내가 스스로 의결하려 한다. 대신이 없더라도 비국(備局)의 신하들은 각각 제 일을 가지고 빈청(賓廳)에 나오도록 하라."
하고, 상이 이어서 웃으며 이르기를,
"온갖 정무가 번다하여 오히려 어렵게 여기는데, 더구나 또 비국의 일을 친히 살피는구나."
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요즈음 대신에게 내리는 불윤 비답(不允批答)과 각 도의 감사에게 내리는 교서(敎書)를 보면 그 사람을 찬양할 뿐이고 면려하는 뜻이 전혀 없으니, 제고(制誥)의 체례를 매우 결여하였다. 사신(詞臣)에게 이렇게 하지 못하게 하라."

 

5월 30일 계축

강원도·전남도(全南道)·평안도에서 우박이 내렸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