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14권, 효종 6년 1655년 6월

싸라리리 2025. 12. 22.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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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갑인

윤강(尹絳)을 형조 판서에 탁배(擢拜)하고, 민응협(閔應協)을 대사간으로, 오정원(吳挺垣)을 장령으로 삼았다.

 

영의정 이시백(李時白), 좌의정 구인후(具仁垕), 우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정고(呈告)하여 면직을 청하였으나, 상이 모두 너그럽게 비답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상체장(常棣章)을 강독하였다. 주강을 파하고서 각사(各司)의 윤대관(輪對官)을 소견(召見)하였다.

 

6월 4일 정사

홍명하(洪命夏)를 대사헌으로, 김휘(金徽)를 집의로, 이민서(李敏敍)·박증휘(朴增輝)를 지평으로, 서필원(徐必遠)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간원이 아뢰기를,
"영풍군(靈豊君) 이식(李湜)은 접때 북경에 가는 사신으로서 의주(義州)에 이르렀을 때에 한 가지 작은 일 때문에 하리(下吏)에게 분노를 옮겨 혹독하게 형벌하여 곧 죽게 하였으므로, 온 고을의 백성이 모두 놀라고 슬퍼하며 그 억울한 죽음을 불쌍히 여깁니다. 이처럼 함부로 형벌하는 폐단은 매우 징계하지 않아서는 안되겠으니, 체포 심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6월 5일 무오

상이 하교하기를,
"나라를 판 죄인 심즙(沈諿)은 관작을 추탈하여 그 악을 징계하고, 전 사간 심동귀(沈東龜)는 심즙의 아들로서 벼슬아치의 열에 끼어 둘 수 없으니 사판에서 삭제하여, 나라를 파는 자에 대한 경계로 삼으라."
하였다. 정유성(鄭維城)·김익희(金益熙)가 전에 심즙·심동귀의 억울함을 말하였으므로 상의 노여움이 더욱 격렬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 하교가 있었다.

 

이에 앞서 순천(順天)의 영장(營將) 백홍성(白弘性)이 선묘(宣廟)의 기일(忌日)에 흥양현(興陽縣)에서 풍악을 벌이고 군사에게 호궤하였다. 이 날 유생이 석전(釋奠)에 쓸 제물을 받들고 향교에 가는데 백홍성이 문루(門樓)에 앉아 제물을 굽어보았다. 유생이 정로(正路)를 거쳐 가려 하니 백홍성이 바야흐로 진을 쳤다 하여 허가하지 않았다. 유생이 제물은 우로(迂路)를 거쳐 갈 수 없다고 굳이 다투니, 백홍성이 크게 노하여 제물을 가지고 따라가는 자를 잡아 매를 때렸다. 제물을 가지고 따라가던 자가 이 때문에 흩어지면서 제물을 길가에 버려두었으므로 듣는 자가 모두 통탄하였다. 백홍성이 죄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먼저 스스로 계문하여 유생의 죄를 꾸며서 무고하였다. 이 때에 광주(光州)의 유생 배위(裵緯) 등 1백여 인이 궐하에 와서 상소하여 아뢰고 백홍성을 죄주기를 청하니, 상이 정원을 시켜 그 시비를 의논하게 하였다. 승지 이상진(李尙眞)·정지화(鄭知和) 등이 상의 노여움을 건드릴세라 염려하여, 백홍성과 유생에게 다 잘못한 것이 있는데 다만 가볍고 무거운 구별이 있다고 말하니, 그 소를 물리치고 배위는 해조(該曹)를 시켜 정거(停擧)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정원이 정거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엄하게 비답하고 듣지 않았다.

 

호조 판서 허적(許積)이 상소하기를,
"하늘과 사람 사이는 매우 삼가야 하거니와, 미묘하게 유통하고 감응하는 것이 마음 안에서 나타나고 기민하게 전이하고 회전하는 것이 그림자나 메아리보다 빠릅니다. 접때 하늘이 경계를 보여 가뭄이 매우 심할 때에 성상께서 삼가고 두려워하시는 것을 마음에 크게 경동(警動)하여 덕음(德音)만 겨우 내렸을 뿐 규벽(圭璧)043)  이 미처 두루 쓰이지 않았는데도 한 달 동안 바라고 바라도 이르게 하지 못한 것을 하루 사이에 이르게 할 수 있었으니, 유통하고 전이하는 보람이라는 것이 여기에 이르러 더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의 인정은 기쁨이 극진하면 근심하는 것이니, 기뻐하기를 마지 않다가 도리어 근심하여 ‘접때는 재앙이 있다가 이제는 상서가 있고 접때는 근심하다가 이제는 기뻐하니 또한 지금의 상서가 뒷날의 재앙이 되지 않고 지금의 기쁨이 뒷날의 근심이 되지 않을는지 어찌 알겠는가.’ 합니다.
생각하건대, 예전부터 재앙을 불러오는 까닭은 그 꼬투리가 일정하지 않으나, 흔히 큰 전쟁이나 큰 형살(刑殺) 끝에 나옵니다. 이것은 보편적인 이치[理之常然]인데, 보편적인 이치 가운데에는 간혹 그럴듯한 이유가 있기도 합니다. 이제 평범한 백성들이 억울한 마음을 품고 편안하지 않은 것이 큰 천지와 많은 만물에 대하여 무슨 영향을 미치는 것이 있겠습니까마는, 전기(傳記)에서 살펴 보면 3년 동안 땅이 벌거벗었느니 5월에 서리가 내렸느니 하는 따위의 기록이 많습니다. 전기는 믿을 것이 못된다고 생각한다면 그만이겠으나, 그것이 믿을 만하다면 어찌 크게 두려워할 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서경(書經)》에 ‘필부 필부가 스스로 성심을 다하지 못하면 백성의 임금은 함께 그 공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 없다.’ 하였습니다. 사람들 중에 혹 죄가 실정에 의하지 않고 벌이 죄에 맞지 않아서 살아서는 마음을 드러낼 수 없고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며 그 고아(孤兒)·과처(寡妻)가 매우 억울하여도 풀지 못하는 일이 있다면 화기(和氣)를 손상하는 정도가 어찌 스스로 성심을 다하지 못하는 것보다 적겠습니까.
신이 어리석기는 하나 또한 성조(聖朝)에 이런 일이 없다고 보증합니다. 다만, 김홍욱(金弘郁)의 일에 대해서만은 마음에 풀리지 않는 것이 없을 수 없어서 반복하여 생각하여도 끝내 그 실정을 알아 낼 수 없었습니다. 김홍욱이 풍질(風疾)을 앓아 심성을 잃어 물을 밟고 불에 들어갔다고 한다면 죄가 있건 없건 본디 논할 것도 못되겠으나,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려 흉역(兇逆)을 넌지시 감쌌다고 한다면 신은 결코 그것이 본래 실정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김홍욱은 두 조정의 은총을 입어 근밀(近密)에 출입한 것이 30년이 넘습니다. 역적 강씨(姜氏)044)  의 친족도 아니거니와 역적 강씨의 사은(私恩)도 없었던 것을 나라 사람이 다 아는 바입니다. 김홍욱도 사람인데 어찌 감히 은혜와 의리를 전혀 잊고 차마 사람의 도리에 없는 일을 하였겠습니까. 만약 김홍욱이 평소에 간사한 마음을 품고 일찍이 사사로이 붙은 일이 있어서 감히 나중에 갚을 생각이었다고 한다면, 소인이 이익을 탐함은 오직 자신을 위한 생각인지라 얼마 안 가 해로움이 있을 게 뻔하고 결코 뒷날의 복이 없을 경우에는 그 간사함이 심할수록 이런 일을 더욱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깝게도 전하의 밝으심으로 일찍이 이러한 사정을 굽어살피지 못하셨습니다.
생각건대, 그는 초야의 소원한 자가 아니므로 성명의 신유(申諭)를 들었을 것인데 선조(先朝)에서 이미 정한 논의를 함부로 의심하고 전하께서 마땅히 노하실 위엄을 경솔히 범하여 스스로 죽을 길에 들어서면서도 군소리가 없었던 것은 또한 무슨 마음이었는지, 참으로 괴이한 일입니다. 이는 반드시 어리석은 소견에다가 고집까지 세었던 까닭에 그저 전하께서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는 도량이 천고에 뛰어나신 것만을 보고는 마음에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어찌 아뢰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하여 붓 가는 대로 쓰고 그것이 죽음에 이를 것이라고 스스로 깨닫지 못한 것이겠습니다. 이는 참으로 죽을 때가 가까워서 정신이 먼저 흐려진 것이나 그 죄는 본디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죄를 말한다면 분명 여기에 있지만 그 마음을 논한다면 위에 아뢴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전하께서는 조금도 용서하지 않고 곧바로 대역(大逆)으로 다스리셨습니까. 천둥같은 위엄이 매우 진동하고 옥사(獄事)를 국문하는 것이 매우 급하므로 조정의 신하들이 두려워서 아무도 감히 말하지 못하고 뭇 백성이 놀라서 서로 전해 말하였으니, 성명의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습니까.
그러나 김홍욱의 뼈는 이미 썩었으니 이제 반드시 논열(論列)할 것도 없습니다마는, 이어서 그 자손을 폐고(廢錮)한 것은 녹안(錄案)하여 그 친족을 폐고하고 사판(仕版)에 끼지 못하게 하는 명과 같았으니, 신은 여기에 대하여 더욱 더 서운합니다. 김홍욱이 죽은 것은 스스로 만든 것이기는 하나 상소하여 진언한 것을 어찌 하늘을 헐뜯은 것에 견줄 수 있겠습니까. 자기의 정범(情犯)이 저러할 뿐이니, 그 자손에게 시행한 것이 어찌 이러하여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신이 두려워함에 이보다 심한 것이 있습니다. 임금이 말을 듣는 도리는 마치 공장이가 재목을 모으고 의원이 약을 모으듯이 울퉁불퉁 마디 많은 나무이든 먹으면 금새 죽는 독초이든 내가 고르기에 달려 있는데, 어찌 남 때문에 희노(喜怒)를 바꾸겠습니까. 예로부터, 경망하게 말하였다 하여 성제(聖帝)·명왕(明王)이 사람을 죄주지 않은 것은 참으로 이 때문인데, 더구나 재앙을 당하여 구언(求言)하고서는 그 말 때문에 죄주고 또 따라서 형벌하고 또 따라서 그 자손을 폐고하면, 누가 제 몸과 제 자손을 잊고 앞장서서 한 마디 말이라도 하려 하겠습니까.
이는 진노가 거듭하신 끝에 특별히 나온 것인데 사람들이 누구인들 과중하다고 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조정에 있는 신하들 중에 감히 과중하다고 말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으니, 매우 심하게 꺾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꺾는 폐단 때문에 위축하게 되고 위축되는 폐단 때문에 말이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상께서 재앙을 당하여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성심으로 도움을 구하실 때에 위로 대신으로부터 아래로 서인까지 다들 입을 다무는 것을 상책으로 여겨 고요하기가 마치 빈 나라와 같은 것은 자연히 점점 그처럼 만든 현상입니다. 만약 재이가 거듭 나타나도 국가의 치란에 관계가 없고 국가의 치란이 언로가 열리고 닫히는 데에 관계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또한 걱정할 것도 못되겠으나, 언로가 치란·재상(災祥)에 관계가 있다고 한다면 오늘날의 언로는 막혔다고 하겠습니다. 재앙을 사라지게 하고 상서를 가져올 만한 충직한 말과 좋은 계책, 어지러운 것을 바꾸어 다스려지게 할 만한 깊은 생각과 먼 계책이 있더라도 어디로부터 들어오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크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예전에는 벌이 자손에게 미치지 않았던 뜻을 생각하여 그 친족을 폐고하라는 명을 거두고 지난 잘못은 따지지 않음으로써 장래의 언로를 열도록 힘쓰소서. 그러면 위에는 탕척하는 아름다움이 있고 아래에는 꺼리는 근심이 없어서 지혜로운 자는 재능을 다하기를 즐거워하고 어리석은 자는 죄를 벗는 것을 기뻐할 것입니다. 인정(人情)이 같이하는 바는 천의(天意)가 반드시 기뻐할 것이니, 재앙이 바뀌어 상서가 되고 어지러운 것이 바뀌어 다스려지는 것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답하지 않고 소(疏)를 머물려 두고 내리지 않았다. 김홍욱이 죽고부터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였으나 감히 억울함을 하소하지 못하였다. 조경(趙絅)·정두경(鄭斗卿)·이회보(李回寶) 등이 소 가운데 조금 언급하기는 하였으나 감히 갖추어 아뢰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허적이 죄다 말하여 꺼리지 않으니, 사론(士論)이 칭찬하였다.

 

6월 6일 기미

함경도 회령(會寧)·종성(鍾城)에 우박이 내렸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대사헌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상소한 유생을 정거(停擧)하라는 명이 있었다 합니다. 그 말을 채용하지 않을 따름이지 어찌하여 벌을 주기까지 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생들이 이미 사나운 버릇을 이루어 조정의 명을 받은 사람을 반드시 내쫓고야 말려 한다. 바야흐로 농사철인데 동류를 불러모아 서로 이끌고 와서 감히 죄주기를 청하는 소를 올렸으니, 이 버릇을 매우 징계하지 않으면 장차 반드시 앞다투어 장리(長吏)를 죽일 걱정이 있을 것이다. 내가 처음에는 가두어 다스리려 하였으나, 재이가 매우 참혹한 이때에 바깥 사람들이 내막을 모르고서 유생이 상소하였다가 죄받았다고 한다면 일이 매우 아름답지 못할 것이므로 그만두었다."
하였다. 병조 판서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유생이 도내에 통문(通文)한 것은 참으로 매우 그릅니다. 백홍성(白弘性)도 왕인(王人)인데 그들이 어찌 감히 그럴 수 있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백홍성의 죄는 아직 결말이 나지 않았는데 그들이 어찌 감히 지레 죄주기를 청할 수 있는가."
하였다. 원두표가 아뢰기를,
"조정에서 정거할 것 없이 감사(監司)에게 분부하여 벌주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어찌하여 무른 말을 하는가. 예악(禮樂)과 정벌(征伐)은 천자로부터 나오는 것인데, 어찌 조정의 정령을 아래에서 나오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상이 이어서 크게 노하여 이르기를,
"모든 일은 반드시 명백히 처치해야 한다. 백홍성과 흥양 현감(興陽縣監) 허각(許恪)과 앞장서서 통문한 유생을 모두 잡아다 명백히 살펴서 죄를 논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도승지 이행진(李行進)이 또 유생을 정거하는 것이 과중하다고 말하니, 상이 더욱 노하여 이르기를,
"경들은 전부터 꼭 호남(湖南)의 유생을 감쌌다."
하였다. 홍명하와 이조 판서 이후원(李厚源), 부제학 김익희(金益熙) 등이 다들 허각 등을 잡아 추문하는 것이 과중하다고 말하고, 김익희가 또 아뢰기를,
"당초에는 처치가 여기에 이르지는 않았는데 신하들의 말에 격동되어 전전하여 이렇게까지 되었습니다. 더구나 유생에 대한 벌은 본디 당률(當律)이 있는데 잡아오기까지 하는 것은 더욱이 매우 옳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처음에는 유생에 대한 벌을 주려 하였으나, 손발을 쓸 수 없으므로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였다. 원두표가 백홍성 등을 잡아올 것인지를 다시 여쭈니 【원두표는 판의금(判義禁)을 겸대(兼帶)하였다.】  상이 노여움이 조금 풀려서 이르기를,
"신하들의 말이 이러하니 이제 우선 그대로 두라."
하였다.

 

사서(司書) 원만석(元萬石)이 분부에 응하여 상소해서 시폐(時弊)를 조목조목 아뢰었는데, 상이 도타이 비답하였다.

 

6월 7일 경신

남노성(南老星)·유도삼(柳道三)을 승지로, 박승휴(朴承休)를 장령으로, 정지화(鄭知和)를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삼았다.

 

6월 8일 신유

태백성이 낮에 보였다.

 

달이 항수(亢宿)의 넷째 별을 범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전 영풍군(靈豊君) 이식(李湜)이 사람을 혹독하게 형벌하여 죽였으니 일이 매우 놀랍다. 사람의 목숨은 지극히 중하니 어찌 귀근(貴近)이라 하여 소홀히 여길 수 있겠는가. 새로 준 가자(加資)를 도로 거두라."

 

전남도(全南道)의 유생 김규(金珪) 등이 상소하여 배위(裵緯)와 같이 벌받기를 청하였는데, 물리치라고 명하였다.

 

병조가 아뢰기를,
"백홍성(白弘性)은 국기일(國忌日)에 군사에게 음식을 내렸으므로 매우 놀랍고 괴이하기는 하나, 교생(校生)이 말을 타고 진중(陣中)에 돌입하였다면 영장(營將)이 예리(禮吏)와 교노(校奴)에게 곤장을 친 것은 별로 잘못한 것이 없는데 열읍(列邑)에 통문(通文)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흥양 현감(興陽縣監) 허각(許恪)은 수령의 신분이면서 방편으로 처치하지 못하고 토민(土民)이 왕인(王人)을 모욕하는 것을 좌시하며 감히 그 사이에서 문책하지 못하였습니다. 평소에 벼슬살이가 변변치 못하였다는 것을 이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백홍성은 장 80 하되 공죄(公罪)로 논하고, 허각은 장 1백 탈고신(奪告身)하고, 흥양의 유생 정석(丁晳)·김기추(金起秋)는 왕인을 모욕한 율로 시행하되 모두 사죄(私罪)로 논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고 또 본도의 감사에게 명하여 정석 등을 잡아다가 엄히 형신하여 계문하게 하였다.
판서 원두표(元斗杓)가 상의 뜻에 맞추어, 백홍성이 스스로 변명한 말만을 거론하고 그가 제물(祭物)을 더럽혀 욕보인 죄는 전혀 감추고 가벼운 형률을 적용하였고, 도리어 유생이 통문하여 죄를 성토한 것을 왕인을 내쫓는 것으로 여기고, 또 상이 일찍이 허각을 아울러 다스리려 하였으므로 그가 죄가 없는 줄 알면서도 아울러 죄를 논하기를 청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다 분개하여 욕하였다.

 

승지 이상진(李尙眞)이 아뢰기를,
"먼 지방의 유생은 사리를 알지 못하므로 경망한 짓을 한 잘못이 있더라도 그 본정(本情)을 살펴 보면 성묘(聖廟)를 존중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른 뜻이 있어서 분란을 일으켜 왕인을 내쫓으려 한 것으로 죄안(罪案)을 삼아 고신(栲訊)까지 한다면 법률 사용이 과중할 뿐더러 성세(聖世)에서 사기를 배양하는 도리로서도 손상되는 것이 있을 듯합니다. 먼 지방에서 들으면 누구인들 실망하지 않겠습니까. 이 뒤로는 성묘에 관계되는 이보다 큰 일이 있더라도 사람들이 다 이 때문에 경계되어 감히 발언하지 못한다면 장래의 폐단을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천위(天威)를 조금 풀고 특별히 너그러운 법을 쓰소서."
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았다.

 

6월 9일 임술

정언 정식(鄭植)이 인피하기를,
"호남의 유생들이 통문한 일은 실로 과격합니다마는, 사기는 차라리 과격할지언정 물러서는 안 되니 그 뜻은 용서해야 마땅하고 죄주어서는 안 됩니다. 천리 밖에서 항론(抗論)하여 대궐에 와서 호소하였는데, 도리어 뜻밖의 분부를 내리고 정거(停擧)하라는 명까지 있었으니, 많은 선비의 실망이 어떠하겠습니까. 백홍성은 벼슬이 영장(營將)이니 융사(戎事)가 아닌 바에야 어찌 감히 스스로 변명하는 말을 태연히 치계할 수 있겠습니까. 상소한 유생을 정거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고 도리에 어긋나며 경망했던 백홍성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는 일로 신이 간통(簡通)을 내어 왕복하였으나 동료의 의논이 들쭉날쭉합니다. 모두가 신이 깔보인 탓이니 어찌 감히 태연히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의 벼슬을 갈아 주소서."
하고, 대사간 민응협(閔應協)이 인피하기를,
"정언 정식이, 백홍성을 죄주고 호남 유생의 정거를 도로 거두는 일로 간통을 냈으나, 영장(營將)의 장본(狀本)과 유생의 소어(疏語)를 신은 미처 보지 못하였으므로 그 상세한 것을 알고 나서 등대(登對)할 때에 아뢰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답하여 보냈는데 동료가 깔보였다고 핑계하여 인피하니, 실로 신이 알 수 없는 바입니다. 백홍성이 한 짓은 무식한 데에서 나온 것인데 곧바로 성묘를 모욕하였다고 하니 분노에서 비롯되었음을 면치 못합니다. 통문하는 일은 폐습이라고 하더라도 상소하고 정거당한다면 매우 꺾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신이 이 일에 대하여 굳이 이의하려 한 것은 아닌데 노쇠하고 물러 일을 당해 신속하지 못하여 동료가 그 소견을 펴지 못하게 만들었으니, 신이 어찌 태연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벼슬을 갈아 주소서."
하고, 헌납 심유행(沈儒行)도 이로써 인피하였다. 사간 이진(李𥘼)이 인피하기를,
"신이 처음에 정식의 간통을 보고, 이 일은 본디 논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으나 백홍성의 장본과 유생의 소어를 반드시 얻어 보고 나서야 상의하여 논계할 수 있다고 답하였습니다. 이튿날 동료가 또 간통을 냈으므로 신이 삼가고 상세히 살펴야 한다고 답하였고, 장관(長官)이 등대할 때에 아뢰려 하는 것은 다른 뜻이 없는 듯하므로 이미 하나로 돌아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동료가 마침내 의논이 들쭉날쭉하다 하여 인피한 것은 신이 의아하지 않을 수 없으나, 어찌 감히 스스로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여 태연히 동료를 처치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벼슬을 갈아 주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정식 등은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옥당이 상차하기를,
"간원의 많은 관원이 모두 인혐하여 물러갔습니다. 상소한 유생을 정거하는 것은 실로 과중하므로 곧 논집하려 한 것은 풍채가 가상합니다. 추후에 상의하려는 것은 뜻이 신중히 하려는 데에 있으나 등대할 때를 기다리려 한 것은 격례(格例)에 어그러집니다. 그 논의를 옳게 여긴 바에야 우선 늦추어 기다리는 것은 구차한 결과를 면하지 못합니다. 처음에 상의하려 하고 뒤에 삼가고 상세히 해야 한다고 답서한 것은 별로 들쭉날쭉한 잘못이 없습니다. 정언 정식, 사간 이진은 출사시키고, 대사간 민응협, 헌납 심유행은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10일 계해

채충원(蔡忠元)을 응교로, 이정기(李廷夔)를 이조 좌랑으로, 이경휘(李慶徽)를 수찬으로, 홍주삼(洪柱三)을 정언으로 삼았다.

 

상이 하교하였다.
"내가 듣건대, 한여름에 무덥고 비가 내려 습한 고통은 산골짜기 안이 더욱 심하다 한다. 본터에 평소부터 사는 사람도 오히려 반드시 늘 연기를 가까이하여 모기와 등에의 고통을 피할 것인데, 더구나 김세룡(金世龍)의 아내이겠는가. 금중(禁中)에서 나고 자랐는데, 하루아침에 위리(圍籬) 안에서 거처하니, 어떻게 견디고 지내겠는가. 이것을 생각할 때마다 절로 마음이 상한다. 또, 잔폐한 고을의 백성으로서 별장(別將)·내관(內官)과 입대(立待)하는 군정(軍丁)을 공궤하는 폐단이 더욱 심할 것인데, 어찌 잔폐한 고을이 여러 해 동안 맡게 하고서 돌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해부(該府)를 시켜 김세룡의 아내를 좋은 곳으로 이배(移配)하게 하라. 또 그 위리를 늦추어 살기 편하게 하고 더운 철에는 얼음과 제철 과일을 때때로 들여보내 주어 병나는 것을 면하게 하라."

 

헌부가 【대사헌 홍명하(洪命夏), 집의 김휘(金徽).】  아뢰기를,
"흥양(興陽)의 유생들을 해조(該曹)의 조율(照律)에 따라 엄히 형신하라는 하교까지 있었으니, 원근에서 보고 들으면 누구인들 놀라지 않겠습니까. 유생이 백홍성(白弘性)과 똑같이 잘못한 것이 있는 바에야 국가에서 벌주는 것도 다른 것이 없어야 할 듯한데, 백홍성은 공죄(公罪)로 논하고 유생에게는 형신을 시행하였습니다. 유생을 형신하는 것은 일찍이 없던 일입니다. 조종조 이래로 유생을 배양하는 데에 극진히 하지 않은 것이 없고 과격한 일이나 경망한 짓을 한 잘못이 있더라도 너그러이 용납하지 않은 적이 없는 것은 사기(士氣)를 붙들어 세우기 위하여 법을 굽히는 것도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유생이 통문(通文)하는 것은 폐습이라 할지라도 오늘날에 시작된 것이 아닌데다 또 성묘(聖廟)를 존중한다는 것을 내용으로 했고 보면 상소한 유생을 정거하는 것도 과중하다 하겠는데, 더구나 뒤이어 형신하는 것이겠습니까. 국가에서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가 결코 이러하여서는 안 되겠으니, 정석(丁晳) 등을 엄히 형신하고 배위(裵緯) 등을 정거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양사가 힘껏 다투어 마지않으니, 상이 하교하기를,
"너희들은 일찍이 사사로운 분노 때문에 영남(嶺南) 온 도내의 많은 선비를 거론하여 거의 반을 정거하여 한때를 위압할 생각을 하였는데, 대악(大惡)의 죄처럼 취급하여 무릇 우리 대경(大慶)의 대사(大赦)에 일찍이 함께 하지 못하였다. 매우 심하고 바르지 않은 것이 이보다 더할 수 없으나 이것은 너희들이 옳지 않다고 하지 않더니, 이제 와서 나만을 국중(國中)에서 법을 시행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사림(士林)은 마찬가지인데, 너희들은 어찌하여 영남에 대하여 미워하고 호남(湖南)에 대하여 사랑하는가. 너희들이 미워하는 것이면 꺾는 것이 미치지 못할세라 염려하고 조정에서 미워하는 것이면 반드시 배식(培植)하기에 겨를이 없으니, 이것이 무슨 시비이고 이것이 무슨 마음이며 이것이 무슨 신하의 도리인가."
하였다. 대사헌 홍명하(洪命夏)가 이 때문에 인피하였는데, 옥당이 처치하여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하교하기를,
"신하가 임금을 사당(私黨)만도 못하게 여긴다."
하였다. 수찬 이경휘(李慶徽)·윤집(尹鏶)·이재(李梓) 등이 상소하여 벼슬을 삭탈하여 주기를 청하니,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이행진(李行進)이 대사헌이 되어서는 그 논계를 멈추었으므로 사간 이후(李垕)가 상소하여 이행진을 아첨한다고 배척하였다. 이행진이 미처 인피하기 전에 아전(亞銓)045)  으로 옮겨 제수되었는데, 비로소 상소하여 사직하기를,
"호남 유생의 일은 본디 대단한 것이 아닌데 경박한 의논이 날로 격렬해져서 양사가 모두 자유롭지 못하니 이 논의가 끝날 기약이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이후가 곧바로 결단한다는 아름다움을 스스로 취하고 신에게는 아첨한다는 이름을 주었습니다. 이후는 새로운 칼날을 막 숫돌에서 갈아냈으니, 어찌 당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그 상소를 본 자는 모두 놀랐다.

 

6월 11일 갑자

태백성이 낮에 보였다.

 

영돈녕부사 김육(金堉)이 아뢰기를,
"김세룡(金世龍)의 아내가 역적인 어미의 말을 듣고 궁궐에 출입하며 흉역(兇逆)을 자행한 정상은 이징(李澂)046)  ·이숙(李潚)047)  에 견줄 것이 아닌데, 어찌 그만을 좋은 곳으로 보내어 그 몸을 편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성상께서 염려하시는 뜻은 지극하나, 징·숙이 있는 곳도 어찌 좋은 곳이겠습니까. 차라리 섬 안에 같이 두고 천극(栫棘)048)  을 달리하여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신이 옥사를 다스릴 때에 이 사람의 흉역이 심한 것을 목견하였는데 그만을 좋은 곳으로 옮기니, 분개함을 못 견디어 감히 어리석은 소견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았다. 김육이 또 상차하여 그 옳지 않음을 극진히 말하니,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다들 김육의 말이 옳다고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12일 을축

영의정 이시백(李時白)이 상차하기를,
"호남의 유생들이 당초에 한 일은 성묘를 존중하는 뜻에서 나왔으니, 혹 과격하더라도 본디 너그러이 용납해야 할 것입니다. 어찌 허물을 꾸짖고 꺾어서 많은 선비의 희망을 서운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옛 임금은 도(道)로 배양하고 예로 대우하였습니다. 말로 가르칠 수 있으나 힘으로 이길 수는 없다는 데 그뜻이 있는데, 이제 주장하는 것이 어떠한지를 막론하고 정거하고 형신하는 율을 가하니, 이 명령이 내려지고 나서는 인심이 실망하고 기상이 슬픕니다. 신이 외로운 구신(舊臣)으로서 전에 없던 일을 목견하였는데, 정고(呈告)하였다는 핑계로 끝내 한 마디 말도 우리 성명(聖明)께 고하는 것이 없다면, 어찌 성명께서 신에게 바라는 것이겠으며 신 또한 성명을 저버리는 것이 클 것입니다. 후세에서 금세를 보고 그때에 사람이 있었다고 하겠습니까."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우의정 심지원(沈之源)도 상차하여 유생들에게 벌주라는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경이 출사하면 면대하여 의논해서 처치하겠다."
하였다.

 

백홍성(白弘性)을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백홍성이 국기일(國忌日)에 풍악을 벌인 것만을 무식해서 그랬다고 여기므로 이 명이 있었다.

 

6월 13일 병인

태백성이 낮에 보였다.

 

채유후(蔡𥙿後)를 대사간으로, 박세모(朴世模)를 지평으로, 서필원(徐必遠)을 헌납으로, 심유행(沈儒行)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6월 14일 정묘

강원도 간성군(杆城郡)에 홍수가 졌다.

 

승지를 전옥서(典獄署)에 보내어 수인(囚人)을 살펴 죄가 가벼운 자를 석방하게 하였다.

 

6월 15일 무진

함경도에서 전염병이 크게 성하였다.

 

우의정 심지원이 출사하여 청대하니, 상이 불러 보았다. 심지원이 아뢰기를,
"접때 차자 가운데에 감히 유생의 일을 언급하였는데 외람되게 부드러운 비답을 받고 못 견디게 감격하였습니다. 유생의 일은 과격한 듯하더라도 조종조 이래로 배양하는 도리를 극진히 하지 않은 것이 없고 경망한 짓을 한 잘못이 있더라도 반드시 너그러이 용납하였습니다. 이제 형신하고 정거하는 율을 쉽사리 가한다면, 뭇사람의 뜻이 서운할 뿐더러 조종께서 배양하신 도리에 크게 어그러질 것입니다. 또, 양남(兩南)의 사기(士氣)는 다른 도보다 훨씬 낫습니다. 임진란 때에 영남에서는 곽재우(郭再祐)가, 호남에서는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이 무리를 모아 의병을 일으켜 충절이 뛰어났으니, 배양한 보람이 과연 어떠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범연히 말하면 경의 말이 그럴 듯하나, 그 정상을 깊이 살펴 보면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그들은 성묘를 빙자하여 분을 풀려고 생각하였으니, 참으로 매우 놀랍다. 어떤 생각이 있다면 감사(監司)에게 글을 바치는 데에 지나지 않을 일이다. 감사가 들어주지 않은 뒤에야 혹 위에 아뢸 수 있을 것이다. 농사철인 이때에 앞장서 이끌고 와서 곧바로 백홍성(白弘性)의 죄를 청하였으니, 그 아름답지 못한 버릇이 과연 어떠한가. 사람들이 말하기를, ‘백홍성이 먼저 발언하여 남을 제압하였는데 내가 먼저 들어간 말에 형혹되어 청납(聽納)하려 하지 않는다.’ 한다. 이 때문에 특별히 백홍성을 파직하였다. 어찌 백홍성을 감싸려 하겠는가."
하였다. 심지원이 아뢰기를,
"유생을 형신하는 것은 예전에 없던 일이니 신은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뒤에 상의하여 처치해야 하겠다."
하였다. 심지원이 아뢰기를,
"성심(聖心)에 헤아리신 것이 있다면 빨리 성명(成命)을 거두어 중외의 희망에 따르시는 것이 낫습니다. 어찌하여 반드시 뒷날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성명께서 빨리 명백한 분부를 내리시기 바랍니다."
하였으나, 상은 말이 없었다. 심지원이 또 아뢰기를,
"영남과 호남은 자못 사기가 있으므로 시골 마을의 낮은 백성이 악한 짓을 하려 하더라도 꺼리는 것이 있어서 감히 자행하지 못합니다. 이것을 보면 사기는 배양해야 하고 꺾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였으나, 상이 또 답하지 않았다. 심지원이 아뢰기를,
"사람들이 대신 중에 인물이 없다고 말하거니와, 신이 이 일을 반복하여 아뢰어도 끝내 채용하지 않으시면 장차 무슨 낯으로 다시 대신의 위치에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어찌 경의 말을 채용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심지원이 일어나 절하고 아뢰기를,
"명백한 하교를 받고 물러가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릇 일이란 익히 강구하기를 꺼리지 않아야 한다. 경도 어찌 다시 입대할 날이 없겠으며, 어찌 한 시각 사이에 당장 결정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관학 유생(館學儒生) 이혜(李嵆) 등이 상소하기를,
"사전(祀典)을 엄하게 하는 것은 선성(先聖)을 높이기 위한 것이고, 사기(士氣)를 부추기는 것은 국맥(國脈)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사전이 엄하지 않으면 제사를 올리더라도 미치지 못한 법도에는 오히려 흠향이 없을 것이고, 사기를 부추기지 못하면 학교를 설치하더라도 퇴폐한 풍속에는 외려 교화가 없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조금이라도 실례(失禮)가 있으면 반드시 불경(不敬)하다 하여 죄주고, 조금 과격하더라도 반드시 꾀어 도와서 인도하였습니다. 예전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어찌 신명을 업신여긴 자가 요행히 죄를 면하고 선비인데도 형벌을 받은 일이 있었겠습니까.
생각하건대, 우리 국조(國朝)는 제사를 돌보는 법을 전대(前代)보다 더욱 삼가서 종묘와 사직에 이어 석채(釋采)를 가장 중히 여기므로 생뢰(牲牢)049)  ·자성(粢盛)050)  이 풍성한 것이 태묘와 같고 준이(尊彝)051)  ·종거(鍾虡)052)  의 수효는 임금의 제도를 갖추어 쓰며 축문·폐백에 휘(諱)를 쓰고 정승이 일을 맡으니, 먼 지방에서 의물(儀物)이 같지 않을지라도 엄숙하고 공경하는 뜻에는 어찌 차이가 있겠습니까. 희생·폐백이 지나는 곳에서 모든 사람이 말과 수레에서 내리는 것으로 말하면 공경을 넓히는 까닭이므로 어기는 것이 있으면 관형(官刑)을 베푸니, 그 공경하고 엄숙한 것이 지극합니다. 인재를 기르는 즐거움이 성대한 것은 삼대(三代)에다 뒤미처 짝하였고 돕고 진작하는 방도와 사기를 일으키고 현재(賢才)를 기르는 규례를 극진히 쓰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궁벽한 시골이나 먼 지방에서는 가르치는 방법이 혹 부족할지라도 백성을 새롭게 하는 교화는 어느 먼 지방인들 입지 않겠습니까. 포의(布衣)의 항론(抗論)에 대해서는 번번이 포용을 보이고 망령된 것이 있더라도 죄주지 않았으니, 너그러이 용납하는 것이 지극합니다.
생각건대, 주상전하께서는 즉위하신 이래로 모두 구법(舊法)을 따르고 전헌(前憲)을 폐기한 것이 없으시며 공경히 신명을 섬기고 예로 선비를 대우하는 것은 본디 본조(本朝)의 가법(家法)이므로, 원근이 바라기를 ‘반드시 지극한 덕이 향기를 멀리 미치고 성대한 예에는 부족한 것이 없어서, 사기가 크게 떨치고 이상만 높고 행동이 뒤따르지 못하는 이들이 문채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어찌 한낱 무부(武夫)가 군사를 내세워 교만하게 굴어서 모욕이 선성(先聖)에게 미쳐도 사구(司寇)가 죄를 묻지 않고 도리어 엄하고 급한 형벌을 선성을 높이는 선비에게 시행할 줄 알았겠습니까. 백홍성(白弘性)의 죄는 이미 호남 선비의 상소 가운데에 상세하니, 허각(許恪)의 함사(緘辭)는 다시 번거롭게 할 것이 없습니다. 모화관(慕華館)에서 무시(武試)의 개장(開場)이 있거나 도감(都監)이 군졸을 조련할 때에도 향축(香祝) 또는 제릉(諸陵)의 제물이 혹 지나가면 명관(命官) 이하가 다 계하(階下)로 내려가 공경히 배웅합니다. 영장(營將)은 조정에서 명한 것이기는 하나 그 존귀하기가 어찌 명관·대장과 같겠으며, 문묘의 제물은 서울과 지방이 어찌 다르겠습니까.
대저 명을 받들어 시험을 관장하고 진영을 벌여 싸움을 익히는 것도 국가의 큰일인데 오히려 고관이 깎듯하게 굽히고 장수가 내려와 절하거늘 더구나 수백 명의 재주를 시험할 뿐인 한 고을의 속오(束伍)이겠습니까. 백홍성이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거만스레 스스로 방자하여 성묘(聖廟)의 제물을 보고도 공경하는 마음이 없습니까. 문루에 기대어, 배종하여 제물을 가져가는 전복(典僕)과 뒤따르는 예리(禮吏)를 잡아 놓고 흰 곤봉이 어지러이 날고 군례(軍隷)가 혼잡하게 달려들어 자성(粢盛)·주례(酒醴)를 길거리에 버려두게까지 하였으니, 한(漢)나라의 법으로 논하면 어찌 불경한 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주금(酎金)053)  은 작은 일인데 귀척(貴戚)이 제후(諸侯)의 작(爵)을 잃으며 죄를 받고, 묘연(廟壖)054)  은 빈 땅인데 임강(臨江)055)  이 하옥되어 자살하였습니다. 이제 거칠고 사나운 한낱 무변(武弁)이 완악하고 미련한 짓을 멋대로 하고 희생을 함부로 버렸어도 법리(法吏)의 평의가 가해지지 않으니, 또한 무슨 까닭입니까.
또, 정석(丁晳) 등은 모두 재궁(齋宮)에 모였다가 그 일을 목견하였고 선성을 높이는 것은 본디 도리를 지키는 떳떳한 마음이므로 뭇사람의 분노가 격렬하였으니, 어찌 한때 조금 과격한 것을 돌보겠습니까. 조정에서 매우 죄책하는 까닭은 통문(通文)한 한 가지 일 때문에 지나지 않습니다. 통문하는 규례는 어느 세대부터 시작하였는지 모르겠으나 무릇 유림(儒林)의 성대한 일 또는 학궁(學宮)의 큰 일이 있으면 다 통문을 쓰니, 실로 오늘에 선례를 만든 것이 아닙니다. 부자(夫子)의 사당은 흥양(興陽)만이 사사로이 하는 것이 아니고 보면 사림에 통고하는 것이 본디 예사로운 일인데, 또한 무슨 죄가 있습니까. 통문이라는 것은 또 그 사람을 몰아 쫓아내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일이 중대한 데에 관계되어 감히 혼자 마음대로 할 수 없으므로 많은 선비를 불러 모아 논의가 왕래하는 것입니다. 그런 뒤에 혹 도주(道主)에게 정문(呈文)하거나 대궐에 하소하여 죄를 청해야 차례가 맞는 일입니다. 이것은 학궁의 통규(通規)로서 예전부터 그러하였고 아직 조금도 폐기하지 않았습니다. 마음대로 통문한 것을 죄안(罪案)으로 삼는다면 안으로는 관학(館學)부터 밖으로는 교원(校院)까지 무릇 유적(儒籍)을 가진 자는 누가 이것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성상의 분부에 이른바 조정의 명신(命臣)을 몰아 쫓아낸다고 하신 것은 어찌 매우 억울하게 여길 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전 신해년056)  에 적신(賊臣) 정인홍(鄭仁弘)이 선정신(先正臣) 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을 모욕하고 배척하였으므로 태학생(太學生)이 함께 분노하여 유적에서 이름을 삭제한 것을 당세에서 쾌하게 여겼습니다. 대저 정인홍은 산림(山林)에 몸을 가탁하고 재상 자리에 몸을 붙였으니, 그 무겁고 높기가 어찌 백홍성에 견주겠습니까마는, 사기가 격분한 것을 공론이 받아들였습니다. 오늘날 정석 등이 다투는 것은 그 때에 견주어 의논할 것이 아니기는 하나, 그 뜻은 성묘를 높일 줄 아는 것이고 그 일은 학궁의 통규입니다. 지위를 헤아리면 정인홍의 형세가 높고 일을 견주면 성묘의 체례(體例)가 크며 벌을 논한다면 빈말이 삭적(削籍)에 비할 것이겠습니까? 그런데 전하께서는 찬찬히 밝히지 않고 문득 진노하시어 한 사람이 스스로 변명한 치우친 말을 먼저 듣고는 많은 선비가 선성을 높이는 지극한 뜻을 살피지 않으시어 뜻밖의 하교로 사납게 꺾고 엄히 형신하라는 명까지 더하셨습니다. 아아, 한더위에 고문하면 사람의 목숨을 기약할 수 없으니, 혹 불행히 갑자기 죽는다면 어찌 뒷날에 후회가 없겠습니까. 성상의 분부가 한 번 내려지자, 뭇사람의 심정이 놀라고 벼슬아치가 풀이 죽어 조야가 실색하였으니, 누가 성명이 위에 계신데 이런 기상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였겠습니까.
예전부터 선비가 형벌을 받는 경우는 시안(詩案)057)   때문이거나 말씨 때문이지, 선성을 높였기 때문에 죄받거나 통문한 것 때문에 화를 받았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것도 이미 그렇거니와, 배위(裵緯) 등이 다시 상소하자 이어서 정시(停試)하라는 명을 내리셨으니, 전전하여 죄를 연좌시키는 것이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저 호남의 선비들이 어찌 사사로운 원한이 있어서 백홍성에 대해 매우 분노하겠습니까. 다만 문묘의 일이 중대하고 또 정석 등이 뜻밖에 법망에 걸렸으므로 먼 길에 발이 부르터가며 대궐에 와서 호소한 것입니다. 실로 조정에서 선성을 높이고 제사를 중히 여기는 성덕(盛德)만을 믿고 소원하고 미천한 자신의 참람한 짓이 혐의가 된다는 것을 헤아리지 않고서 분을 품고도 고할 데가 없으므로 부모에게 하소한 것이니, 그 뜻이 가상하고 그 심정도 슬픕니다. 한두 사람이 죄받은 것은 본디 말할 것도 못되나, 성조(聖朝)에서 어진 인재를 많이 기르는 뜻에서는 어떨는지 모르겠습니다. 호남의 많은 유생들의 마음에 어떻게 여겨지겠습니까. 어진 사관(史官)이 있어서 ‘어느 고을의 석전(釋奠)의 제물이 영장 백홍성의 손에 더럽혀졌는데도 백홍성은 죄받지 않고 상소한 유생이 벌받고 교생(校生)이 형신을 받았다.’고 쓴다면 후세에서 금세를 보고 또한 어떻게 여기겠습니까.
또 신들이 듣자니 이런 일이 있었다 합니다. 성종(成宗)께서 일찍이 편찮으시므로 안에서 주관하여 무당을 두고 벽송정(碧松亭) 뒤에서 빌었는데, 대개 자전의 뜻이었습니다. 당시 많은 선비가 무당들을 몰아내고 공구(供具)를 때려부수었으므로 자전께서 진노하여 죄주려 하셨는데, 성종께서 듣고서 사기(士氣)가 이러하니 내 병이 절로 낫겠다는 하교까지 하고 매우 칭찬하여 마지않으셨습니다. 이제까지 미담으로 전하여 장로(長老)들이 압니다. 성조(聖祖)의 뜻이 어찌, 나라의 사기는 사람의 원기와 같으므로 반드시 심어 가꾸고 키우고 격려하여 흥기하고서야 이 기운이 부족하지 않아서 도의(道義)를 갖출 수 있으리라 여긴 것이 아니겠습니까. 호남의 많은 선비가 성묘를 높이려 한 것이 어찌 큰 죄이겠습니까마는, 전하께서는 따뜻하고 부드럽게 선기(善氣)를 이끌어 들이지 못하실 뿐더러 또 이어 사납게 꺾으셨으므로 눈과 서리를 맞은 듯이 생기를 잃었습니다. 우리 조종께서 깊이 배식하고 도탑게 양육하여 사기를 성취시키려 하신 것이 이에 이르러 다시는 끼친 뜻이 없어졌으니, 이것이 어찌 억만년 국맥(國脈)을 길게 하고 조상이 자손을 위하여 좋은 계책을 끼치고 도와서 평안하게 하는 도리이겠습니까.
아아, 사전(祀典)은 큰일인데 이토록 모욕하여도 버려두고 문책하지 않으며, 통문은 예사인데 전전하여 잇달아서 형신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먼 지방에서 들리는 말이 혹 진실하지 못한 것이 있더라도, 이미 문묘의 제물을 모욕하였다면 본디 금오(金吾)에 잡아다 실상을 캐내고 시행해야 할 율(律)을 시행해야 옳을 것인데 죄상이 이처럼 명백하여도 조정에서는 도리어 덮어 감쌌습니다. 또 호남의 선비들에게 과격한 말이 있었더라도, 사문(斯文)에 관계된 바에야 또한 그 광망(狂妄)한 것을 용서하고 그 정기(正氣)를 성취시켜서 성묘를 높이는 마음을 위로해야 옳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 본정(本情)은 결코 다른 뜻이 없는데도 조정에서는 또 꺾어 욕보였습니다. 이 뒤로는 중외의 여러 제사에 불경하기가 이보다 큰 것이 있더라도 조정에서 들을 수 없고, 뒷날 사문에 불행하기가 이보다 큰 것이 있더라도 사론(士論)이 나올 수 없을까 신들은 걱정입니다.
또, 백홍성을 죄주어야 한다는 논의가 어찌 흥양(興陽)의 선비만 이 마음을 가진 것이겠습니까. 실로 호남의 많은 선비가 함께 분노하는 것입니다. 호남의 선비들이 그러할 뿐이 아니라 수천리의 장보(章甫)058)  를 쓴 자들이 모두 이 마음을 같이합니다. 그렇다면 정석이 형신을 받는 것은 온 호남의 선비가 다 그 고통을 받는 것이고, 배위가 정거(停擧)당하는 것은 온 나라 안의 선비가 다 불행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미 성묘에 관계되었으면 중외를 구별할 수 없는 것이니, 어찌 흥양에서 있었던 일이라 하여 월(越)나라 사람이 진(秦)나라 사람을 보듯이 무관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만 번 죽을 죄를 무릅쓰고 어리석은 마음을 대략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국가의 처치는 우연한 것이 아닌 듯하고, 성묘를 모욕하여 그런 것도 아니다. 너희들은 분란을 일삼지 말고 물러가 학업을 닦으라."
하였다.

 

6월 16일 기사

민응협(閔應協)을 도승지로, 이시술(李時術)을 정언으로 삼았다.

 

6월 17일 경오

상이 하교하였다.
"우상(右相)이 이미 출사하였으므로 말한 것을 실천하지 않을 수 없으니, 정석(丁晳) 등을 형추(刑推)하지 말고 해조(該曹)의 조율(照律)에 따라 시행하라."

 

간원 【대사간 채유후(蔡𥙿後), 사간 이진(李𥘼), 헌납 서필원(徐必遠).】 이 아뢰기를,
"대신의 말에 따라 호남의 유생에게 형신을 시행하라는 명을 특별히 거두시니, 과연 대성인(大聖人)이 하시는 일은 보통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그러나 신들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또 이보다 더한 것이 있습니다. 배위(裵緯) 등이 천리 밖에서 대궐에 와서 합사(合辭)하여 상소해서 선성(先聖)을 높이고 사전(祀典)을 중히 여기는 것을 말하였으니, 그 사이에 과격한 일이 있었더라도 그대로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이 때문에 정거(停擧)의 벌을 가한다면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가 또한 너무 박하지 않겠습니까. 선비를 대우하는 것이 너무 박하면 유도(儒道)가 병들어 사기(士氣)가 떨쳐치지 못할 것이니, 어찌 작은 일이겠습니까. 또, 전하께서 평소에 선비를 대우하시는 것이 후하셨는데 이제는 매우 꺾어 많은 선비의 마음을 앉아서 잃으시니, 전하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깁니다. 특별히 용서를 내리고 더욱 밝혀서 가르쳐 이끄셔야 하고 미리 뒤 폐단을 근심하여 지레 책벌을 가하셔서는 안되겠으니, 배위 등을 정거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백홍성(白弘性)은 감히 선조 대왕(宣祖大王)의 기신(忌辰)에 술자리를 베풀고 풍악을 벌인 것도 이미 매우 변변치 못하거니와, 또 향교의 유생이 범마(犯馬)하였다고 성내어 쫓아가 잡아 제물이 길에서 더럽혀지게 하고도 좌시하고 금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죄를 어찌 공죄(公罪)로 논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리석은 소견으로도 반드시 공사를 구별할 줄 아는데 해조(該曹)가 흐릿하게 말을 만들어 감히 공죄로 견주어 결단하였으니, 매우 놀랍습니다. 병조(兵曹)의 당상(堂上)을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나 때문에 여파를 해조에 미치므로써 호남의 유생들을 위해 사사로운 분노를 풀 생각을 하니, 참으로 매우 놀랍다. 해조의 조율(照律)은 나라를 위한 것 밖에는 결코 다른 뜻이 없는데 너희들의 지론이 심각하다. 일을 논하는 체례(體例)를 잃은 데다가 또 이기기를 좋아하고 사의를 품은 뜻이 있으니, 내가 심히 취하지 않는다."
하였다. 【병조의 당상이란 판서 원두표(元斗杓)이다.】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37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19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인사-선발(選拔) / 사법-탄핵(彈劾) / 군사-군정(軍政)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한국고전번역원

 

재자관(賫咨官) 황연(黃埏)이 연경(燕京)에서 돌아와 의주(義州)에 이르러 치계하였다.
"고교보(高橋堡)에 이르러 우리 나라에서 잡혀간 사람을 만났는데, 교하(交河)의 사노(私奴) 응상(應祥)이었습니다. 저들의 사정을 자세히 물었더니, 그가 갑군(甲軍)으로서 지난해에 남방의 싸움터에 따라갔는데 남군이 패한 체하고 북군을 유인하여 협격해서 북군이 전멸하고 왕자(王子) 한 사람이 죽었으며, 남군은 태반이 보졸(步卒)인데 철갑으로 머리와 몸을 싸고 손에는 큰 칼을 들고 몸을 굽히고 곧바로 달려가 말의 다리만을 찍으며 선봉에는 코끼리를 탄 자가 많이 있었다 합니다. 광녕(廣寧)부터 산해관(山海關)까지 유민이 잇달았는데 가는 곳을 물었더니, 다들 심양(瀋陽)에 이주한다 합니다. 한인(漢人) 정고동(鄭高同)이라는 자가 관소(館所)에 들어왔기에 명나라의 형세를 물었더니, 청나라가 이미 남경(南京)을 차지하였다고 소문났으나 소주(蘇州)·항주(杭州)일 뿐이며 명나라에서 통용시키는 돈에는 융리(隆理) 연호를 새겼다 합니다."

 

6월 18일 신미

영의정 이시백(李時白)이 면직되었다.

 

인정전(仁政殿)에서 유생을 시강(試講)하였다. 유학(幼學) 민횡(閔鐄)이 으뜸을 차지하여 직부 회시(直赴會試)를 명하고 그 나머지에게는 차등을 두어 급분(給分)하였다.

 

대사간 채유후(蔡𥙿後), 사간 이진(李𥘼), 헌납 서필원(徐必遠)이 인피하기를,
"신하로서 임금에게 원망을 품고 조금이라도 파급(波及)하려는 뜻을 일으킨다면 그 죄는 죽어 마땅할 것이고, 이기기를 좋아하고 사의를 품어 분을 풀려는 생각을 하였다면 죄가 또한 죽어 마땅할 것입니다. 호남의 유생을 책벌한 일은 밖으로는 교숙(校塾)과 안으로는 관학(館學)이 모두 실망하고 위로는 대신부터 아래로는 대각(臺閣)까지 다들 천의(天意)를 돌리려 하는데, 어찌 죄다 이기기를 좋아하여 그렇겠으며 사의를 품어서 그렇겠습니까. 공사의 구별은 오직 여론을 볼 뿐입니다. 해조(該曹)의 주당(奏當)059)  이 한결같이 공론을 따랐다면 오늘날 선비의 마음이 어찌 불안하게 되었겠으며 조정의 논의가 어찌 어지럽게 되었겠습니까. 신들의 어리석고 경망한 소견으로는 백홍성(白弘性)을 이미 파직하였지만 다시 해조의 조율(照律)이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나라 사람이 다 성상의 치우침이 없는 도리를 보게 하면 선비의 마음을 위로하고 조정의 논의를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정성이 위에 사무치지 못하여 스스로 불측한 죄에 빠졌을 뿐더러 임금의 지나친 하교가 있게 만들었으니, 신들의 벼슬을 갈아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원두표(元斗杓)를 파직하려는 것은 유생들이 이기기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다. 근래 나라의 일에 마음을 다하는 것은 원두표만한 자가 없는데 경들이 배척하여 떠나게 하려 하니, 경들은 국가에 무엇을 보탰기에 감히 이러는가. 국가에 대하여 너희들 두어 사람은 아홉 마리 소의 한 털만하고 국가에 대하여 중신(重臣)은 태산(泰山) 이상인데, 어찌 감히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과 사사로운 분노로 배격하고 물리쳐서 바라는 대로만 하려 하고 조금도 돌보지 않는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채유후 등이 함께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간원이 【정언 이시술(李時術).】  아뢰기를,
"채유후 등이 인혐하여 물러갔습니다. 해조의 의율(擬律)이 경중이 맞지 않는다면 파직을 청한 논계에는 결코 다른 뜻이 없을 것인데, 전후의 엄한 비답이 뜻밖에 나왔으니, 또한 간언(諫言)을 듣는 도리에 방해되는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 때문에 언관을 가벼이 갈 수 없으니, 출사시키소서."
하였으나, 모두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지평 박증휘(朴增輝)가 인피하기를,
"백홍성의 죄는 성묘(聖廟)에 관계되는 일인데 해조의 의율은 마디마디 맞지 않습니다. 공론이 비등하여 오래 갈수록 더욱 격렬해지는데, 대각에 있는 신분으로 바로잡지 못하고 일을 논하는 것이 구차하므로 늘 스스로 두려워하였습니다. 어제 간원의 계사(啓辭)를 보고 더욱 못 견디게 두려우니, 어찌 감히 그대로 무릅쓰고 있겠습니까. 신의 벼슬을 갈아 주소서."
하고, 대사헌 홍명하(洪命夏)가 인피하기를,
"간원이 해조를 죄주기를 청한 것은 공론이 격렬히 일어난 데에서 나왔는데, 천노(天怒)가 진동하여 꺾는 것이 매우 심하시므로 보고 듣는 자가 모두 기운을 잃으니, 어찌 대각만이 쓸쓸할 뿐이겠습니까. 해조의 율이 경중에 맞지 않더라도 한때의 바로잡는 일을 양사(兩司)가 반드시 함께 발론할 것은 없으나, 동료가 이미 일을 논하는 것이 구차하였다 하여 인피하였으니, 외람되게 수석(首席)에 있는 신은 연약한 잘못을 면할 수 없습니다. 신의 벼슬을 갈아 주소서."
하고, 장령 박승휴(朴承休)도 이 때문에 인피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한낱 시골 교생(校生)의 일 때문에 국가를 돌보지 않고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만을 힘쓰므로 전전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다. 거의 우리 조정을 어지럽히게 되었으니 이제 그칠만도 한데 갈수록 더욱 격렬해진다. 이것이 무슨 사리인가. 반드시 대단한 처치가 있고서야 그칠 수 있을 것인가. 오늘날의 일은 내가 알 바가 아니다."
하였다. 집의 김휘(金徽)가 인피하기를,
"해조의 의율이 맞지 않으므로 간원이 이미 먼저 논하였으면 이것은 한때 서로 규계(規戒)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또한 양사가 함께 발론할 일은 아닙니다. 다만 동료가 이미 인피하였으니 신이 어찌 감히 태연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피혐해야 할 까닭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간원에 답하신 비지(批旨)에 ‘경들은 국가에 무엇을 보탰는가. 국가에 대하여 너희들 두어 사람은 아홉 마리 소의 한 털만하다.’ 하여 뭇 신하를 멸시하시는 뜻이 글속에 아주 잘 드러났으니, 이는 간원에 대한 비지이기는 하나 간원에만 해당할 것이 아닙니다. 성명께서 이미 간원을 멸시하셨으면 헌부가 어찌 홀로 멸시를 면하겠습니까. 간원과 헌부가 다 멸시를 면하지 못하면 온 조정의 신하로서 누구인들 멸시받지 않을 자가 있겠습니까. 이는 한때의 천노(天怒)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전하의 평소의 병통이 준엄하고 급박한 데에 있고 준엄하고 급박하므로 남에게 오만하고 남에게 오만하므로 뭇 신하를 멸시하여 꺾고 억눌러서 말을 다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장래의 폐단이 반드시 위후(衛侯)가 계책을 말할 때 신하들이 화응(和應)하는 것이 마치 한 입에서 나왔던 것 같은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부자(夫子)가 이른바, 말하면 나를 어기지 못한다는 것과 불행히도 근사하니, 전하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깁니다. 근일 대관은 참으로 국가에 보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대관이 스스로 말한다면 괜찮겠으나, 전하의 입장에서 대관에게 이르신다면 이처럼 너무 박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임금은 신하가 쓸 만하지 못하면 물리치고 죄가 있으면 벌주며 살리고 죽이고 주고 빼앗는 일을 베풀 수 없는 것이 없으나, 오직 그 함께하는 의리로서는 예(禮)로 부리고 공경으로 접대하는 것이 참으로 천고 백왕(百王)의 정해진 법도입니다. 전하처럼 경시하고 모욕하기를 헌 신짝이나 개 돼지만도 못하게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예전에 한 광무(漢光武)가 제준(祭遵)이 죽은 뒤에 ‘제 정로(祭征虜)060)  처럼 나라를 근심하고 공무에 힘쓰는 사람을 어떻게 얻겠느냐.’는 말을 번번이 하므로, 요기(姚期)가 ‘폐하께서 제준을 생각하시는 것이 지극합니다마는 뭇 신하가 다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을 품습니다.’ 하니, 광무는 다시 말하지 않았습니다. 광무의 뜻은 단지 제준의 죽음을 아까워하였을 뿐인데 요기가 오히려 이것을 말하였습니다. 신은 전하의 말씀이 광무에 비하여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오늘날의 뭇 신하가 조금이라도 염치가 있다면 어찌 부끄럽고 두려워할 뿐이겠습니까. 그러나 이는 다 신과 같은 무리가 대각의 자리만 채워서 큰 소리와 엄한 낯빛을 보이실 때마다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마음을 품을 뿐이고 감히 한 번 말하여 그른 것을 바로잡지 못한 죄입니다. 옛사람처럼 엄하여 꺼림직하게 여기는 자가 언책(言責)을 맡았다면, 전하께서도 어찌 이런 말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신은 외람되게 대석(臺席)에 있었던 것이 한두 번에 그치지 않는데 늘 절실하게 슬퍼하였으나 경계를 아뢴 적이 없습니다. 신처럼 용렬하고 비루한 자는 실로 물리쳐야 마땅하니, 신의 벼슬을 갈아 주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박증휘 등은 모두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다. 헌부가 아뢰기를,
"박증휘 등이 모두 인혐하여 물러갔습니다. 대각이 논하는 데는 반드시 뇌동(雷同)할 것이 없으니 미처 바로잡지 못한 것이 어찌 구차한 것에 관계되겠습니까. 일 때문에 서로 경계하는 것은 한 관사로 족합니다. 요는 진정하여 나름대로 의견을 지니는 것입니다. 동료가 인피하면 태연할 수 없는 것은 그 형세가 본디 그러하나, 어찌하여 반드시 혐의로 삼아야 하겠습니까. 엄한 분부가 내려지매 바로잡으려는 뜻이 간절하였으니, 대각의 풍채가 또한 가상합니다. 모두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박증휘는 부름에 나아가지 않아서 파직되었다. 박승휴가 또 인피하니, 답하기를,
"우리 조정을 어지럽힌다는 것은 너를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박증휘가 맨 먼저 인피하였으므로 이 하교가 있었다.

 

6월 19일 임신

김좌명(金佐明)을 대사간으로, 이재(李梓)를 사간으로, 심유행(沈儒行)을 헌납으로, 안후열(安後說)을 정언으로, 이시백(李時白)을 연양 부원군(延陽府院君)으로 삼고, 좌의정 구인후(具仁垕)를 갈아서 능천 부원군(綾川府院君)으로 삼았다.

 

6월 21일 갑술

윤집(尹鏶)을 부수찬으로, 이민서(李敏敍)를 지평으로, 안후직(安後稷)을 정언으로 삼았다.

 

간원이 다시 전계(前啓)를 아뢰어 유생들에게 과죄(科罪)하고 정거(停擧)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는데, 여러 번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옥당도 상차하여 힘껏 다투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호남의 유생들은 형신을 멈추라는 명을 입기는 하였으나 오히려 그 벌을 죄다 벗어나지 못하였으니, 모두 석방하여 팔방 선비의 마음을 위로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춘추(春秋)》의 법은 마음을 벌주는 데에 있으니, 이번 유생의 일이 무심(無心)한 데에서 나오고 다만 성묘(聖廟)를 높이는 데에 있었다면 버려두고 죄주지 않아도 괜찮겠으나, 성묘를 빙자하여 왕인(王人)을 물리쳐 쫓아서 사사로운 분노를 풀 계책으로 삼으려 하였으니, 그 마음가짐이 참으로 매우 밉다. 어찌 허명(虛名)을 위하여 실죄(實罪)를 버려둘 수 있겠는가."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근일 나라의 일에 마음을 다하기로는 원두표(元斗杓)만한 사람이 없으므로 마침내 실패보게 되었다. 내가 위에서 고립하여 손발을 쓰지 못하게 하려 하니 더욱이 통탄스럽다."
하니, 심지원이 아뢰기를,
"원두표의 재지(才智)가 남보다 낫고 나라를 위하여 정성이 있다는 것은 조정에 같이 있는 신하들이 함께 아는 바입니다마는, 대관(臺官)이 한 번 서로 경계하는 것은 마지못할 처지입니다. 전하께서 추고(推考)하라고 단지 명하신다면 대관이 어찌하여 반드시 고집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두표에게 무슨 추고할 잘못이 있는가."
하였다. 심지원이 아뢰기를,
"호남의 유생이 앞다투어 장리(長吏)를 죽인다는 하교가 전에 있었습니다. 지방에서 들으면 누구인들 기가 꺾이지 않겠습니까. 이어서 ‘경들은 국가에 무엇을 보탰는가. 아홉 마리 소의 한 털이다.’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옛사람이 ‘한 마디 말이 나라를 일으키고 한 마디 말로 나라를 잃는다.’ 하였거니와, 여염의 천한 종일지라도 성상의 분부가 합당하면 모두 기뻐 따를 것이고 합당하지 못하면 모두 실망할 것이니, 임금의 한 마디 말이 어찌 중하지 않겠습니까. 임금이 신하를 부리는데 쓸 만하지 못하면 물리치는 것은 괜찮으나, 이미 쓰고 있으면서 이런 하교를 하신다면 그들이 무슨 면목으로 조정에 서겠습니까."
하니, 상이 한참 말이 없다가 이르기를,
"근래 조정의 신하들은 나라를 위하여 정성을 다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 이러한 무리는 지위가 삼공(三公)에 이르더라도 용부(庸夫)일 것이다. 병판(兵判)만이 나라의 일에 마음을 다하였기 때문에 이런 낭패를 당하였다. 대간도 별다른 사람이 아니라 문벌에 힘을 의지하여 점점 청반에 이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발신(發身)한 처음에 먼저 이록의 마음을 품고 국가를 이익되게 하는 일은 전혀 유의하지 않았다. 명예를 낚고 진출을 꾀할 수 있는 것이면 반드시 참새처럼 뛰어 일어나 근거없는 논의를 떠들어대는 것으로 능사를 삼는다. 평소에 마음으로 늘 천하게 여겼기 때문에 마음에 있는 것이 기회를 타고 나와서 그것이 지나친 줄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다. 지난번에 하교한 것은 과연 타당하지 못한 듯하다."
하였다. 심지원이 또 호남의 유생을 전석하기를 청하니, 상이 노하여 이르기를,
"일이 유생에게 관계되면 반드시 변명하여 구제하려 하니, 이것이 참으로 무슨 마음인가."
하매, 부제학 김익희(金益熙)가 아뢰기를,
"대개 유생이 어찌 다 경술(經術)이 밝고 행실이 닦였겠습니까마는, 예전부터 임금이 반드시 너그러이 용납한 것은 참으로 사기(士氣)는 배양해야 하고 꺾어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열성(列聖)께서 더욱이 이것에 성대하시어 과격한 일이나 경망한 잘못이 있더라도 굽어 너그러이 용서하고 죄주지 않으신 것으로 말하면 그 뜻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습니까. 이번에 호남의 유생들이 통문(通文)한 일은 폐습이기는 하나, 실로 오늘 시작한 것이 아니라 본디 학궁(學宮)에서 통행하는 규례이므로, 뭇 신하의 뜻은 다 유생에게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해조의 당상을 파직하기를 청한 논의는 과연 과중한 듯하나, 추고하는 것으로 말하면 옳지 않을 것도 없는데, 전하께서는 꺾는 것이 너무 심하여 우리 조정을 어지럽힌다는 하교까지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신하들 중에 조정을 어지럽히는 사람이 있다면 명백히 죄주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어찌 물리치는 데 그치겠습니까."
하였다.

 

6월 22일 을해

상이 하교하기를,
"통신사(通信使)가 일본(日本)에 가서는 모든 문서로 수작할 때에 순치(順治) 연호를 그대로 써서는 안 될 것이니, 묘당을 시켜 의논하게 하라."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허적(許積)이 경상 감사이었을 때에 이미 왜차(倭差) 평성행(平成幸)에게 언급하였으니, 이제 와서 다시 꺼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였다.

 

6월 23일 병자

상이 하교하였다.
"충청 감사 이후산(李後山)은 염초(焰硝)를 다려 만들지 않은 도내의 각 고을 중에서 자수한 고을만을 거론하여 조정에 알리고, 살피라고 명한 뒤에도 곧 계문하지 않았다. 전후의 죄를 버려둘 수 없으니, 나문하여 죄를 정하라."

 

6월 24일 정축

성초객(成楚客)을 승지로, 권우(權堣)를 충청 감사로 삼았다.

 

6월 25일 무인

평안도        평양부(平壤府)의 백성이 한 태(胎)에 두 사내아이와 한 여자아이를 낳았는데, 본도에 명하여 먹을 것을 내려 주게 하였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이에 앞서 전남도(全南道) 금구현(金溝縣)의 객사(客舍)에 어떤 사람이 익명서(匿名書)를 걸었는데 부도(不道)한 말이 많아서 마치 상변(上變)하는 것 같았다. 인근의 사대부가 다 그 가운데에 들어있었는데 그 벼슬만을 쓰고 그 이름을 쓰지 않았다. 그 도의 감사를 전에 지내고 지금 육경(六卿)이 된 자 한 사람도 끼어 있었다. 현령 유온(柳蘊)이 감사 이만(李曼)에게 보내니, 이만이 유온을 시켜 상경하여 훈척 대신에게 고하게 하였는데, 유온이 그 글을 비국의 좌중에 두루 보였다. 이때에 우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상에게 아뢰기를,
"유온이 그 글을 신에게 보였습니다. 익명서는 부자 사이일지라도 서로 전하지 못하는 것이 국법인데, 전남 온 도내에 모두 전파되고 서울의 사대부도 많이 압니다. 당초에 유온이 선처하지 못하여 이렇게 되었으니, 지금 처치하는 방도가 명백하지 않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유온은 율문(律文)에 따라 처치하고 이만은 추고하고 그 글은 비국에서 불사르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29일 임오

전남도 전주(全州) 등 일곱 고을에서 지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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