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15권, 효종 6년 1655년 8월

싸라리리 2025. 12. 22.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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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임자

의주 부윤 김휘(金徽)가 하직 인사를 하니, 대면하고 유시하여 보냈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벌목장(伐木章)을 강하였다. 영경연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이 시는 술을 마시면서 서로 즐겁게 노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옛사람은 술을 절제하면서 마신 것이 이와 같았는데, 요즈음 사람들은 대부분 진탕 마셔서 위의를 상실하고 일을 폐지하기까지 하니, 매우 가증스러운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한갓 위의를 상실하고 일을 폐지하기만 하겠는가. 몸을 망치고 목숨을 잃는 자도 종종 있다."
하였다. 대사헌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옛사람이 술을 마시는 것은 단지 기쁨을 함께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니, 어찌 요즘 사람처럼 절제할 줄을 알지 못하여 엎어지는 데까지 이르렀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술 한 잔을 올리는 예에 손님과 주인이 백 번이나 절을 하였다. 붕우란 덕을 벗하는 것으로 비록 술을 마시는 순간이라 하더라도 다 권면하고 충고하는 도리가 있었는데, 요즈음 사람들은 오직 지나치게 흉허물이 없고 무례한 것만을 일삼는다."
하였다. 지원이 아뢰기를,
"지금 세상은 붕우의 도리가 없어진 지 오래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번 당색이 나누어진 뒤로는 이른바 붕우란 것이 한 목소리로 서로 호응하면서 각자 친구를 하여, 진실로 뜻을 같이하는 자이면 비록 과실이 있더라도 반드시 서로 덮어주고는 전연 충고하는 도리가 없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지원이 아뢰기를,
"붕당의 폐단은 일마다 피해가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처음에는 꼭 붕당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자기와 같은 자를 편들고 자기와 다른 자를 배척하다보니 끝내는 붕당이 되어버린 자도 또한 있을 것이다."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대저 인정이란 친하면 잘못된 점을 덮어주고 싶고 소원하면 그렇지 않은 법이니, 말류의 폐단은 저절로 붕당에 귀결되는 것입니다. 대개 ‘붕(朋)’이란 것은 착한 도리로 사귀는 공적인 마음에서 나온 것이고, ‘당(黨)이란 것은 착한 도리로 사귀지 않고 사사로이 서로 협조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사로이 돕고 싶은 생각은 근엄하게 공경을 유지할 때에는 나오지 않고 가까이 하는 즈음에 쉽게 발하는 것이다. 이 시는 ‘화락하되 지나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당(黨)’이라는 한 글자는 선묘조계유년065)  으로부터 비로소 있게 되었는데, 선배들은 그래도 사대부로 자처하였으므로 오늘날처럼 극심한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오로지 당쟁만을 주로 하면서 조금도 거리끼는 것이 없고, 붕우간의 충고하는 도리나 국가가 잘되고 잘못되는 원인에 대해서는 전연 아랑곳하지 않으니, 이것은 또한 사대부의 풍도가 모두 사라져 그런 것입니다."
하니, 시독관 이단상(李端相)이 아뢰기를,
"군자와 소인이 각자 붕당을 하면 변별하기가 용이할 듯한데, 오늘날의 붕당은 정사(正邪)가 뒤섞여 있어서 변별할 수가 없으므로 그 폐단이 점차 고질화되어 구제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8월 2일 계축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천보장(天保章)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시독관 이단상이 아뢰기를,
"어영군 병사들이 포 사격을 연습하는 일정한 장소가 없기 때문에 일전에는 종묘 근처에서 사격을 연습하였는데, 포탄이 행랑채 아래에 떨어지기까지 하였으니, 몹시 놀랄 만한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듣고 보니 몹시 놀라운 일이다. 이 뒤로는 모든 포 사격 연습을 절대로 성안에서는 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예조 판서 오준(吳竣)이 아뢰기를,
"지금 가을철이 이미 절반이나 지났고 강우량도 또한 흡족하니, 정전으로 돌아가 평상시의 반찬 가짓수를 회복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전을 피한 지 얼마 안 되는데 문득 다시 돌아가는 것은 마음에 편치 않다."
하였다. 이어서 묻기를,
"옥당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단상이 대답하기를,
"정전을 피하였던 것은 한재 때문이었는데, 지금 비가 이미 흡족하게 왔으니 굳이 시일이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해서 어렵게 여기실 것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이와 같으니 억지로나마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상이 도로 정전에 나아갔다.

 

8월 3일 갑인

민응협(閔應協)을 함경 감사로, 채유후(蔡𥙿後)를 도승지로, 조한영(曺漢英)을 이조 참의로, 목행선(睦行善)을 승지로, 윤집(尹鏶)을 부응교로, 채충원(蔡忠元)을 사간으로, 이경휘(李慶徽)를 부교리로, 유준창(柳俊昌)을 헌납으로, 박세모(朴世模)를 지평으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채미장(采薇章)을 강하였다.

 

8월 4일 을묘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8월 5일 병진

추쇄 도감(推刷都監)이 함경·평안·황해 세 도에 어사를 보낼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그 뒤에 청나라 사신이 계속해 이르자 또 어사를 보내 서도 백성의 피해를 가중시킬 수 없다는 이유로 감사와 도사로 하여금 추쇄하는 일을 대행하게 하였다.

 

8월 7일 무오

병조(兵曹)가 아뢰기를,
"근래 무신들이 기사(騎射)와 보사(步射) 등의 무예를 익히지 않는 데다가 진법(陣法)에 있어서도 또한 유의하지 아니하여, 비록 품계가 높은 무신이라 하더라도 진치는 법에 대하여 전연 어두우니, 진실로 한심한 일입니다. 지난번 대신의 건의로 인하여 능마아청을 설치하고 이어서 무신 20여 명을 뽑아 매달 날짜를 정하여 병법을 익히고 권장하도록 하였는데, 선발된 사람들이 태만한 채 직무를 수행하지 않는 자가 많습니다. 아울러 도태시키고 지금부터는 별도로 더욱 신칙하여 성취하는 터전으로 삼으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8월 8일 기미

태백(太白)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대사헌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황해 감사 임의백(任義伯)이 도내의 일을 치계하면서 먼저 그 장계를 원두표(元斗杓)에게 보냈는데, 두표가 뜯어본 뒤에 비로소 이를 경연 석상에서 올렸다고 들었습니다. 의백의 처사는 몹시 잘못된 것이지만, 두표도 또한 경솔한 실수가 없지 않습니다. 번거롭겠기에 비록 논계하지는 않았지만, 뒤 폐단이 있을까 두려우므로 이에 감히 탑전에서 우러러 진달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바로 의백이 하직 인사를 할 때에 내가 분부했던 일이다. 직접 장계를 올리는 것은 번거로운 점이 있기 때문에 병조 판서에게 의논하게 하고 등대했을 때 품정하도록 했던 것이다. 일의 체모로는 진실로 경의 말과 같지만 사실은 두표와 의백의 잘못이 아니다."
하였다.

 

8월 9일 경신

정유성(鄭維城)을 형조 판서로, 김좌명(金佐明)을 승지로, 이후(李垕)를 필선으로, 이재(李梓)를 겸보덕으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출거장(出車章)을 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주석 가운데 ‘명령을 받는 날 군사들이 눈물을 흘렸다.’ 한 것은, 죽음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바로 임금의 은혜에 감격하여 반드시 목숨을 바치고자 해서 그런 것이다."
하니, 특진관 허적이 아뢰기를,
"사졸들이 이와 같은 연후에야 바야흐로 쓸 수 있는데, 후세에는 장수라 하더라도 죽기를 원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공을 이룰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단(田單)이 즉묵(卽墨)에 있었을 때는 제(齊)나라를 회복하는 공을 이룩하였는데, 황금 띠를 두른 뒤에는 오랑캐를 함락시키지 못하였으니, 이는 죽기를 원하는 마음이 앞뒤가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니, 시독관 이단상이 아뢰기를,
"병가의 승패는 군사의 수가 많고 적은 데 달려 있지 않고 오직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겠다는 그들의 마음을 얻는 데 달려 있을 뿐인데 이것은 또한 장수의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임진년에 조헌(趙憲)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였는데, 군대가 패배하여 죽게 된 상황에 이르러 칠백 명의 의사가 조헌의 시체 곁에서 함께 전사하였습니다. 만일 의기(義氣)로써 감동 결속시킨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목숨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기를 이처럼 장렬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오정일(吳挺一)이 북경으로부터 돌아와서 신에게 말하기를 ‘북경에 있을 때 저들의 말을 들어보면 비국과 정원의 문서를 얻어 보아서 우리 나라의 사정을 상세히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하였습니다. 진실로 몹시 놀라운 일이니 지금부터는 비국의 긴요 사항을 당상이나 문랑청(文郞廳)이 직접 기록하도록 하고, 또 비밀 문서는 자물쇠를 채운 함속에 보관하여 출납하도록 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대사헌 홍명하가 아뢰기를,
"지난번 영부사 이경석의 상소로써 비국이 회계하였다가 당상이, 특별히 추고하라는 분부를 받기까지 했는데 들은 사람들이 다 말하기를 ‘언로(言路)가 장차 이로부터 끊길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은 매우 안타깝게 여깁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성상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버려 두고 채용하지 않으면 될 뿐이니, 어찌 회계한 사람을 추고하는 데 이를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단상이 아뢰기를,
"대신이 교지에 응하여 상소하였는데 채용하지도 않은 데다가, 회계한 사람을 또 벌주도록 하였으니, 정유성(鄭維城)이 추고를 당하는 것은 본디 말할 게 없지만 상소한 대신이 어찌 스스로 편안해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어서 온당하지 않다고 극도로 말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의 말을 채용하지 못하여 내가 진실로 서운하지만, 심집 부자를 신구한 것이나 죄를 입어 폐기된 자들을 수용하라는 것과 같은 몇 가지 사항은 더욱 채용할 수 없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의 논의가 이와 같으니 회계한 당상은 추고하지 말라."
하였다.

 

8월 10일 신유

달이 남두(南斗)의 괴성(魁星)에 들어가, 세 번째 별을 가렸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체두장(杕杜章)을 강하였다.

 

8월 11일 임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8월 12일 계해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김수항(金壽恒)·남용익(南龍翼)·이은상(李殷相)·홍위(洪葳)·이단상(李端相)·안후열(安後說)을 선발하여 호당에서 독서하게 하였다. 대제학 채유후(蔡𥙿後)가 선발한 것이다.

 

8월 13일 갑자

경기 개성부(開城府)에 우박이 내렸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홍처후(洪處厚)가 치계하였다.
"청나라 사신이 강을 건너려 하는데 비바람이 갑자기 일어나고 우레와 번개가 크게 쳤습니다. 본주의 남포루(南砲樓)가 번개를 맞아 화재가 자연적으로 발생하였는데, 큰 비가 내리는 가운데서도 화염이 몹시 극렬하여 상하의 층각이 일시에 다 불타버렸습니다. 불타고 난 뒤에 비바람이 곧 그쳤습니다."

 

8월 15일 병인

관학의 유생들을 인정전에서 시강하였다. 생원 민중로(閔重魯)가 수석했는데 직부 회시(直赴會試)를 명하고,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차등있게 분수(分數)를 주고 물건을 하사하였다.

 

8월 17일 무진

이행진(李行進)을 대사헌으로, 이수인(李壽仁)을 집의로, 이후(李垕)를 사간으로, 강호(姜鎬)·이항(李杭)을 장령으로, 윤개(尹塏)·이민서(李敏叙)를 지평으로 삼았다.

 

8월 19일 경오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 정부현(鄭傅賢)과 순천 부사(順天府使) 이동현(李東顯)이 하직 인사를 하니, 대면하고 유시하여 보냈다.

 

8월 20일 신미

이제형(李齊衡)을 헌납으로, 채충원(蔡忠元)을 사인으로, 홍위(洪葳)를 이조 좌랑으로, 이지무(李枝茂)를 필선으로, 이시해(李時楷)를 판결사로, 이단상(李端相)을 겸사서로, 이행진(李行進)을 이조 참판으로, 이일상(李一相)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행진이 대사헌이었을 때 호남 유생 정석(丁晳) 등의 유배를 도로 거두라는 논의를 혼자서 정계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가망(加望)하도록 명하여 이 직임을 제수한 것이다.

 

8월 21일 임신

황해·평안·강원 세 도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주먹만하였다.

 

8월 23일 갑술

판결사 이시해(李時楷)가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그 상소에 아뢰기를,
"신이 여름에 대각의 직임에 있으면서 재이가 잇따라 발생하여 나랏일이 어려워질 때 매양 연석에서 우러러 성상의 말씀을 들으면 분발하시는 정성이 비록 위에서 간절하지만 아래에서 보좌하는 계책을 아뢰지 아니하는 것을 목격하고서는, 한갓 강개한 마음이 격한 나머지 시비가 도래할 것도 돌아보지 않은 채 감히 동료들과 대강 어리석은 소견을 진달하였습니다.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진달하느라고 그 말이 시대적 금기 사항에 무겁게 저촉되리라고는 스스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근거없는 낭설이 일어나고 참소와 비방이 백방으로 출현하여 인정에서 벗어나는 지나친 배척으로 구속을 너무나 긴박하게 하였으므로 위태롭고 두려운 나머지 진실을 안고서 펴지 못하고 혀를 깨문 채 처벌을 기다리며 조정에서 자취를 감출 것을 스스로 기약하였는데, 사람이 부족해 저를 주의해서 다시 직명을 띠게 되어 맑은 조정 반열을 더럽힐 줄을 어찌 생각했겠습니까.
이어서 삼가 생각건대, 송나라의 선배들이 말하기를 ‘시종과 대간이 재상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 할 수 있어야 나라의 형세가 그로 인해서 무거워지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어찌 도리어 이로 인해서 나라의 형세가 가벼워질 수 있겠습니까. 신하가 인주의 허물을 말할 수 있으면서 재상의 일은 말할 수 없다고 하면, 이것이 어찌 국가의 복이겠습니까. 예전에 왕수(王隨)·진요좌(陳堯佐)·오육(吳育)·한억(韓億) 등은 다 송나라의 명신들로서 지금 세상의 신하들이 접근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한기(韓琦)가 좌사간이 되어 진언하기를 ‘재이가 발생하는 것은 집정자가 적임자가 아닌 데서 연유한 것이니, 아울러 다 파면시키소서.’ 하였는데, 당시 이를 가지고 한기의 죄로 삼았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으며 역사에 기록하여 지금까지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조의 신하들을 보건대 상신(相臣)을 논급한 일이 한둘에 그치지 않으니, 고사와 소장에서 상고하여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말세가 되면서 시속이 아부하는 것을 좋아하고 순종하고 침묵하는 것을 숭상해서, 듣고 보지도 못한 해괴한 일로 삼으니 신은 삼가 개탄하는 바입니다. 설사 신이 말한 바가 다 망령된 것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망령된 대간을 포용한다면, 어찌 재상의 거룩한 덕이자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인정과 세도가 고금이 스스로 달라 아교와 칠이 가운데서 풀어지고 금석이 밖에서 녹여져 머리를 들려 해도 되지 않고 몸을 움직일래야 움직이지 않으니, 신은 이 점에 대해 더욱 개탄하는 바입니다."
하니, 허락하지 않았다.

 

8월 25일 병자

정원이 아뢰기를,
"신이 삼가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살피건대, 태조조의 형조 판서 유관(柳觀)이 아뢰기를 ‘사람의 기품은 굳세고 강하기도 하며 유약하고 겁이 많기도 해서 같지 않기 때문에, 진범이면서도 곤장을 인내하고 끝까지 자백하지 않는 자도 있고 무함을 받았지만 그 고통을 참지 못하여 끝내는 죄명을 벗어나지 못하는 자도 있습니다. 형을 관장한 자는 오직 사람을 승복시키는 것만을 좋아해서 귀중한 인명은 돌아보지 않은 채 법 밖의 형벌을 가하면서 다방면으로 매질하고 신문하므로 그 죄가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이미 곤장 아래서 쓰러져 죽으니, 성상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에 위배됨이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중외의 형벌을 적용하는 자로 하여금 법대로만 고문을 행하게 하고, 법 밖의 형벌은 유관이 진달한 말로써 중외에 널리 고하여, 유념해서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추쇄 도감 도제조 심지원(沈之源)이 입시하여 아뢰기를,
"조종조에서 4왕(四王)의 후예는 12대까지 면역하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이번에 추쇄하는 노비들 가운데 이와 같은 무리들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종조에서 비록 이런 하교가 있었다 하더라도 천한 무리들이 연줄을 타거나 법을 무릅쓰고 투속했다면 그 폐단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여러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하라."
하였다. 영의정 이시백과 좌의정 구인후가 아뢰기를,
"조종조에서 이미 면역하라는 하교가 있었으니 지금 경솔히 변경할 수 없으나, 그 가운데 법을 무릅쓰고 투속한 자들은 분명히 조사하여 죄를 다스린 뒤 도로 정역(定役)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조사해 다스리고 도로 정역하는 것은 일시적인 폐단만 막는 것으로 후일의 환란을 방지하기 어렵다. 이왕의 무릅쓰고 투속한 자들을 분명히 조사하고, 지금 부터는 일체 시행하지 말아서 이 길을 영원히 막아, 선원(璿源)을 더럽히는 폐단이 없게 하라."
하였다.

 

8월 26일 정축

오정일(吳挺一)을 대사간으로, 유준창(柳俊昌)을 사간으로, 홍주삼(洪柱三)·김징(金澄)을 정언으로, 채충원(蔡忠元)을 부응교로 삼았다.

 

8월 28일 기묘

상이 서교(西郊)에 거둥하여 청나라 사신을 맞이한 뒤 인정전에서 접견하였다.

 

8월 30일 신사

곽성귀(郭聖龜)를 장령으로, 원만석(元萬石)을 지평으로 삼았다.

 

가의 대부 이조 참판 겸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 조석윤(趙錫胤)이 졸하였다.
석윤의 자(字)는 윤지(胤之)로 사람됨이 차분하고 깨끗했으며 몸가짐은 단정하고 가정에서의 조행은 더욱 독실하였다. 일찍부터 문형(文衡)을 담당하고 항상 국자(國子)의 직임을 겸하였는데 매양 겸손히 사양하고 물러갈 뜻을 가졌다. 그리고 또 세사에 신경을 써서 상소하는 내용이 간절했으므로 사람들에게 존중을 받았다. 선배들이 한 시대의 인물을 논할 때는 반드시 석윤을 제일로 삼았다. 전후에 걸쳐 대각에 있으면서 일을 만나면 말을 끝까지 다하여 금기사항을 피하지 않았으므로 걸핏하면 상의 뜻을 거슬렸고 이 때문에 남북으로 유배다니느라 조정에 편안히 있지 못하였다. 종성(鍾城)으로부터 소환된 뒤 얼마 안 되어 졸하였는데, 나이 겨우 50세였으므로 조야가 모두 슬퍼하며 애석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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