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일 계미
이에 앞서 경원 부사(慶源府使) 권대덕(權大德)이 장관의 청사를 개조하려 하여 장관 채윤립(蔡允立)으로 하여금 토병(土兵) 김충일(金忠一)을 포함한 90인을 데리고 우리 땅에서 재목을 벌채하도록 하였는데, 윤립 등이 대덕에게 말하지 않고 몰래 국경을 넘어가 재목을 벌채하고 삼(參)을 캐오게 하였다. 그리고 소를 사가지고 가는 후춘(厚春) 부락의 두 사람을 만나자 소를 빼앗고 살해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이 그 시체를 찾아가지고 와서 부사 대덕에게 힐문하니, 대덕이 돼지 두 마리와 베 20필을 주어 장사지내는 비용으로 쓰게 하였다. 청나라 사람이 이것을 가지고 아문(衙門)에 소송을 제기하자 청나라가 본국에 사신을 보내 그 경위를 조사하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청나라 사신 오배(吳拜) 등이 서울에 들어와 같이 조사할 것을 상에게 요청하니, 상이 남별궁(南別宮)에 거둥하였고 삼공·육경·금부의 형관 및 양사의 장관이 다 들어가 참여하였다. 청나라 사신이 대덕·윤립 등 90인을 조사하면서 고문을 매우 혹독하게 하자, 김충일(金忠一)·신은산(申銀山)·이기남(李起男) 등 세 사람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살인한 것으로써 거짓 자백하였는데, 나머지 사람들은 다 원통하다고 하면서 충일 등에게 죄를 돌렸다. 조정은 그의 억울함을 알았지만 90인이 모두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미처 분별하지 못하였다.
청나라 사신이 여러 사람들의 죄를 확정했는데, 충일·은산·기남 등은 사형으로써 논죄하고, 채윤립은 지휘한 죄가 있다 하여 또한 사죄로 단정하고, 권대덕은 삭직하여 정배시키고, 전 병사 김응해(金應海)는 삭탈 관작시키고, 전 감사 이응시(李應蓍)는 파직시키고, 나머지는 차등있게 정죄하였다.
상이, 충일 등과 채윤립이 죄가 없는데 죽게 된 것에 대하여 매우 불쌍히 여겨 누누이 청나라 사신에게 말하였으나,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대덕은 사람들이 다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거원(巨源)에게 후한 뇌물을 주고 죽음을 면하였다. 그 뒤 양사가 권대덕에게 법률을 적용하도록 청하며 극력 간쟁해 마지않으니, 비로소 그대로 따랐다.
9월 3일 갑신
예조가 아뢰기를,
"각 도의 방물(方物)을 특별히 정지하라는 하교가 있었으나, 물선(物膳)은 관례대로 봉진하게 하소서."
하니, 임시로 감하라고 하교하였다.
경상도에 크게 가뭄이 들었다고 감사가 보고했는데, 비국에 명하여 부역을 덜어주는 문제를 의논하게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본도의 곡식이 익지 않은 곳 가운데 가장 극심한 열네 고을에 대해서는 월과미(月課米)와 군기(軍器) 등의 물건을 금년 겨울부터 내년 가을까지 완전히 감면해 주고, 그 다음으로 심한 열한 고을에 대해서는 월과미만 감해 주며, 상평청(常平廳)이 관장하고 있는 곡식은 해당청으로 하여금 참작해서 아뢰고 처리하도록 하되 본도의 공무목(公貿木) 대신 거두어들인 조(租) 2천 석(石)을 덜어내어 진휼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9월 4일 을유
심노(沈𢋡)·이상진(李尙眞)을 승지로, 서필원(徐必遠)을 수찬으로 삼았다.
9월 5일 병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9월 6일 정해
평안도에 지진이 발생하였다.
9월 7일 무자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9월 8일 기축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9월 9일 경인
해가 뜰 때 붉은 기운 한 가닥이 곧게 해의 위를 향했는데, 길이가 몇 장(丈)쯤 되었다.
9월 10일 신묘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김익희(金益熙)를 대사간으로, 채충원(蔡忠元)을 사간으로, 안후열(安後說)을 지평으로, 이항(李杭)을 헌납으로, 이은상(李殷相)을 정언으로 삼았다.
9월 12일 계사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9월 14일 을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이시매(李時楳)를 경기 감사로, 심유행(沈儒行)을 부교리로 삼았다.
9월 15일 병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9월 16일 정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9월 17일 무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청나라 사신이 돌아가자 상이 서교(西郊)에 거둥하여 전송하였다.
9월 18일 기해
구인기(具仁墍)를 총융사로 삼았다.
9월 19일 경자
신경호(申景琥)를 경기 수사로 삼았다.
9월 20일 신축
상이 중사(中使)와 사관을 전옥서에 보내어 경원(慶源)의 죄인 채윤립(蔡允立) 등에게 특별히 하유하기를,
"너희들이 비록 범한 바가 있으나 조정에서 어찌 죽는 지경에 빠뜨리고 싶겠는가. 그러나 마음대로 할 수 없어서 끝내 사죄로써 논단한 것이다. 어찌 내가 차마 할 바이겠는가."
하고, 이어서 유의(襦衣) 백여 벌을 죄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9월 21일 임인
안후직(安後稷)을 정언으로 삼았다.
9월 22일 계묘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달이 동정성(東井星)에 들어갔다.
9월 23일 갑진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9월 24일 을사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종부시가 아뢰기를,
"제 종실 강학(講學) 분수(分數)에 대하여 그 많고 적음을 계산해서 각기 차등있게 지필묵을 상으로 주며, 분수가 가장 적은 자는 그의 종을 매질하여 벌을 내리소서. 수차에 걸쳐서 강에 응하지 않아 전연 분수가 없는 자에 대해서는 사목대로 추고하여 징계하고 면려하는 터전으로 삼으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9월 25일 병오
김익희(金益熙)를 부제학으로 삼았다. 비국 신하들을 인견하는 날 익희가 대사간으로서 입시하니, 상이 익희에게 이르기를,
"경이 부제학으로 있을 때는 자주 강연에 들어왔으므로 자문에 많은 도움이 있었는데, 이제 다른 직책으로 옮기어 서로 매우 드물게 보니 한스럽다."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내일 인사 행정에서 김익희에게 다시 부제학을 제수하라."
하였다. 이조가 익희를 맨앞에 의망하고 또 두 사람으로써 삼망(三望)을 갖추어 올리니, 하교하기를,
"대사간 김익희를 이미 부제학으로 바꾸어 제수하라고 명하였으니 마땅히 단망으로 아뢰어야 할 것인데 지금 어찌하여 삼망을 갖추었는가."
하였는데, 이는 대개 총애하고자 한 것이었다. 권집(權諿)을 장령으로, 성하명(成夏明)을 보덕으로, 김수항(金壽恒)을 부교리로, 김적(金逿)을 북병사로, 오정일(吳挺一)을 대사간으로, 채충원(蔡忠元)을 부응교로, 홍위(洪葳)를 겸사서로, 서필원(徐必遠)을 겸문학으로 삼았다.
9월 26일 정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9월 27일 무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어영 도제조 이시백(李時白), 훈련 대장 이완(李浣), 어영 대장 신준(申埈), 총융사 구인기(具仁墍), 병조 판서 원두표(元斗杓)를 인견하였다. 상이 무사(武事)에 마음을 두어, 능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노량(露梁)의 모래밭에서 관병(觀兵)하고자 하여, 이시백 등으로 하여금 양주(楊州)의 군사 및 어영군의 신병으로 서울에 머무르는 자 도합 3천여 명을 인솔하고 노량에 와서 대기하게 하니, 신하들이 명을 받고 물러갔다. 정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듣건대, 능에서 환궁할 때 강가에서 열무(閱武)하는 일이 있다는데, 삼가 온당하지 못하다고 생각되며 또 크게 불편한 바가 있을까 염려됩니다. 능을 참배하여 제사지내고 나서 감회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니, 관병하는 일을 같은 날 아울러 행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종묘의 겨울 제향으로 이미 서계(誓戒)를 받았으니, 또한 깨끗하게 재계한다는 의미에 혐의스러운 점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길이 꽤 먼데 해는 매우 짧으니, 많은 군병들이 빨리 말을 몰아 다투어 강을 건너자면 바쁘고 궁색하기가 말할 수 없을 것이며, 배고프고 피곤함이 극에 달한 나머지 아무래도 필시 진퇴의 절차를 이루기 어려울 듯합니다. 신들이 성상의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생각이 이와 같기 때문에 감히 번거롭게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깊이 생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진실로 대제(大祭)의 재계를 이유로 온당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능에 거둥하는 것도 해서는 안 될 것이며, 친히 제사지낸 뒤에 열무한다는 이유로 온당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조종조에서도 또한 이러한 일이 있었는데 불가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겠다. 그리고 말을 달려야 되고 해가 짧다는 말은 진실로 옳다. 여러 근시들이 힘들게 될 폐단을 내가 몹시 안타깝게 여긴다."
하였다.
청주 영장(淸州營將) 박명한(朴鳴漢)이 하직 인사를 하니, 대면하고 유시하여 보냈다.
9월 28일 기유
상이 세자와 함께 장릉(章陵)에 참배하러 가기 위하여 노량진(露梁津)에 이르렀다. 상이 배 위에 올라가 군사들의 위엄이 성대한 것을 돌아보고는,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이런 군사와 말이 있는데 통솔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한갓 쓸모없는 군졸이 되었으니, 참으로 개탄스럽다."
하였다.
경기 감사 이시매(李時楳)에게 호피를 하사하고, 김포 군수 심관(沈慣)과 능참봉 두 사람에게 활과 화살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9월 29일 경술
상이 장릉(章陵)으로부터 환궁(還宮)하면서 노량의 나루 어귀에 어가를 멈추고는 내려서 언덕 위에 앉아,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이 위아래의 강산을 보라. 우리 나라의 수도로는 한양(漢陽)만한 곳이 없다. 중외의 조운(漕運)이 이곳으로 폭주한다. 어찌 다시 이와 같은 형세를 지닌 곳이 있겠는가."
하고, 또 세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일찍이 이와 같은 강산을 보았느냐?"
하였다. 상이 강을 건널 때, 어영 도제조 이시백, 총융사 구인기가 양주의 군병과 어영군을 인솔하여 이미 도성으로부터 와서 모래사장에 진을 쳐놓고 있다가 어가를 따르는 군병이 먼저 건너자 합하여 한 진으로 만드니, 모두 1만 3천여 명이었다. 먼저 장단(將壇)을 진 안의 동쪽에 설치하고 또 동서로 군문(軍門)을 설치하였다. 상이 서문을 따라 말을 타고 달려 들어가면서 시종하던 신하들에게는 곧바로 남문을 따라 들어갈 것을 명하였는데, 동부승지 이상진(李尙眞)이 ‘홀로 편한 길을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하며 극력 사양하고, 이에 서문으로부터 걸어서 수행했다. 상이 들어가 단상에 앉을 때 여러 신하들은 다 미처 이르지 못했는데 이상진만은 먼저 당도하여 단 아래에 엎드려 있으니, 상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그대의 다리 힘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걸어서 따르겠다고 극력 주장한 것이구나."
하였다. 이시백 및 훈련 대장 이완 등을 명소하여, 군병을 지휘하면서 한참이 지날 때까지 훈련을 하니, 서울의 남녀들이 와서 구경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효종실록15권, 효종 6년 1655년 11월 (0) | 2025.12.22 |
|---|---|
| 효종실록15권, 효종 6년 1655년 10월 (0) | 2025.12.22 |
| 효종실록15권, 효종 6년 1655년 8월 (0) | 2025.12.22 |
| 효종실록15권, 효종 6년 1655년 7월 (0) | 2025.12.22 |
| 효종실록14권, 효종 6년 1655년 6월 (0) | 2025.1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