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신사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의 채기장(菜芑章)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제사(諸司)의 윤대관(輪對官)을 소견하였다.
11월 3일 계미
공주 목사(公州牧使) 신속(申洬)이 《농가집성(農家集成)》이라는 책을 올렸는데, 호피를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11월 4일 갑신
김응조(金應祖)를 승지로, 채충원(蔡忠元)을 사인으로, 권집(權諿)을 필선으로, 조수익(趙壽益)을 이조 참판으로, 유혁연(柳赫然)을 통제사로, 최혜길(崔惠吉)을 개성 유수로 삼았다.
일본이 《의례(儀禮)》와 성리(性理)에 관한 여러 책들을 얻기를 청하니, 허락하였다.
11월 5일 을유
상이 하교하였다.
"소현 세자의 장녀가 병으로 죽었는데 슬픔을 금할 수 없다. 중사(中使)를 보내 호상하게 하고 해조로 하여금 초상을 치르는 데 필요한 물품을 넉넉히 지급하도록 하라."
처음에 흥양(興陽)의 유생 정석(丁晳)과 김기추(金起秋)가 서울로 잡혀와 구속되자, 상이 하교하기를,
"기추는 제멋대로 집으로 갔고 정석은 사납고 포악하여 관리를 구타하였으니, 아울러 엄한 형벌을 가하되 3일의 기한을 넘기지 말라."
하였다. 정원이 성명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하니, 상이 듣지 않았다.
정언 박세견(朴世堅)이 인피하며 아뢰기를,
"정석이 시골 풍속에 습관이 되어 먼저 패란을 범하였으니 마땅히 중죄를 받아야 합니다만, 그러나 죽음에 이른다면 그것은 원통합니다. 누차에 걸쳐 엄한 형벌을 가한다면 어찌 목숨이 붙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별안간 옥중에서 죽게라도 된다면 구실 거리만 제공하게 될까 두려울 뿐만 아니라 어찌 갑자기 온 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잃지 않겠습니까. 성명께서 위에 계시어 하찮은 생물들도 은택을 입고 있는데, 유독 이 촌구석의 어리석고 용렬한 자가 망령되이 나라의 법규를 저촉하였고, 그리고 또 뭇 신하들이 잘못하여 제대로 진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상의 위엄을 진노케 만들었으니, 이것은 정석이 스스로 그 죽음을 초래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또한 뭇 신하의 죄이기도 합니다. 신이 본래 정석을 죄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처음 엄형을 명한 날에 굳게 간쟁하지 못하여, 결과적으로 정도가 지나친 지금의 조처가 있게 되었으니, 이것은 또 신이 잘못한 바입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고, 사간 유준창(柳俊昌)도 또한 이를 이유로 인피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세견 등이 아울러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11월 6일 병술
김진(金振)을 강원 감사로 삼았다.
헌부가 【대사헌 이일상(李一相), 집의 심유행(沈儒行), 장령 원만석(元萬石).】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지난번 경연 석상에서 정석 등의 일에 대하여 특별히 관대히 처분하라는 하교를 내렸다 하니, 보고 듣는 이 치고 누가 우러르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이어서 듣건대 엄한 형벌을 내리라는 하교가 있으셨습니다. 대저 정석이 손으로 관리를 때린 것은 바로 시골 유생의 사나운 습관이니, 조정의 조처에 있어서는 진실로 깊이 징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몸이 멀리 떠나게 되자 한번 늙은 어미를 만나뵙고 결별을 고하고자 한 것은 또한 자식의 지극한 정리이니, 대개 어리석고 혼미하여 스스로 깨닫지 못한 결과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제 먼 길을 압송해 온 데다가 누차에 걸쳐 엄한 신문을 받아 혹시 죽기라도 한다면 어찌 시종 형벌을 신중히 하는 지극한 뜻이겠습니까. 그리고 김기추는 정석에 비교해서 범한 죄가 가벼우므로 한 차례의 형벌이면 족히 죄를 징계할 수 있으니, 정석과 똑같이 엄하게 다스려서는 더욱 안 됩니다. 신들은 직책이 언관이기에 감히 구구한 소회를 진달하는 것이니,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다소나마 받아들여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 무리들이 어찌 죽기까지야 하겠는가. 경들은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11월 7일 정해
충청도 비인현(庇仁縣)의 마량진(馬梁鎭)을 도도(都島)에 옮겼다. 조정이 수사 김한문(金漢文)의 요청을 따른 것으로, 구진(舊鎭)이 배를 정박하는 데 불편했기 때문이다.
장령 원만석(元萬石)이 인피하며 아뢰기를,
"간원의 여러 신하들이 서로 이어서 인피하였으니 본부가 마땅히 처치하여야 합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왕된 자가 형벌을 적용하는 것은 자연 그 바른 도가 있으니 혹시라도 적절함을 잃게 된다면 그것은 정상을 참작하여 죄를 정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정석이 죽음에 이른다면 원통한 것이고 김기추가 누차에 걸쳐 형벌을 받는 데 이른다면 지나치다고 여겼습니다. 본부의 차자도 또한 이런 뜻이었습니다. 신의 소견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엄형으로써 심문하라는 분부가 내려진 처음에 과감히 간쟁하지 않았던 것인데, 지금 여러 신하들이 인피한 말을 보니 처음 분부하였을 때 굳게 간쟁하지 않은 것으로써 다 말을 하였습니다. 신이 어찌 감히 스스로를 옳다고 여기며 태연히 처치하겠습니까. 신을 체직하소서."
하고, 대사헌 이일상(李一相)이 인피하며 아뢰기를,
"신이 의견을 차자 가운데 이미 다 말씀드리고 참작 처분하는 분부가 내리기를 한창 기다리고 있는데, 지금 여러 관원들이 처음 분부하였을 때 간쟁하지 않은 것으로써 다 혐의를 삼으니, 신이 또한 어찌 감히 편안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을 체직하소서."
하고, 집의 심유행(沈儒行)도 또한 이런 내용으로 인피하였다. 정언 안후열(安後說)이 인피하며 아뢰기를,
"신은 질병이 요사이 심해져 단자를 올렸다가 저지당하였습니다. 지금 간원의 여러 신하들이 아울러 다 인피하였는데, 진실로 잘못한 바가 있다면 신도 또한 면하기 어렵습니다. 어찌 감히 질병으로 휴가를 청하고 있던 때라고 핑계를 대면서 태연히 처치하겠습니까.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만석 등이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옥당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정언 박세견 등이 아울러 인혐하고 물러났습니다. 일을 논하는 방도는 자연 그 체모가 있으며 잘못을 바로잡는 일은 오직 타당성을 얻는 데 있습니다. 그가 스스로 지은 죄로 인하여 징계하는 처벌을 내린 것이었으니 처음에는 굳이 간쟁할 뜻이 없었던 것이며, 날짜를 한정하여 형벌을 가하라는 분부가 있게 되자 성세의 과도한 조처가 될까 두려웠으니 이에 미쳐서 논쟁한 것은 바로 일의 타당한 것입니다. 처음에 간쟁하지 않은 것이 뒤에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성급하게 먼저 인피하며 스스로 혐의를 삼았으니, 의도하는 바가 비록 나름대로 있어서 그런 것이겠지만 일의 체모를 잃은 것입니다.
일찍이 헌부의 논핵에 참여한 것은 오늘의 일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시종 죄가 있다는 설이 처치하는 즈음에 무슨 방해가 되겠습니까. 질병이 오는 것은 사람이 면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인퇴하여 들어간 뒤 비로소 나와 공무를 보면서 다른 사람들이 혐의로 삼는 것을 보고 나도 또한 그렇다고 한다면, 구차하고 교묘하게 피한다는 기롱을 어찌 피할 수 있겠습니까. 동료들이 이미 인피한 뒤에 감히 편안히 그대로 있지 못하는 것은 모두 형세상 본디 그러한 것의 결과이지만 잘못을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박세견·유준창·안후열은 체차시키고 원만석·이일상·심유행은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11월 8일 무자
옥당이 【교리 민정중(閔鼎重), 부교리 서필원(徐必遠).】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삼가 근일에 양사가 인피한 것과 진술한 차자의 내용을 보건대 대개 성상께서 혹시나 정석 등을 죽게 할까 염려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성상께서 내린 비답에 오직 죄를 징계하고자 할 뿐이라는 분부를 받았으니, 먼 시골의 무식한 사람이 비록 범한 바가 있기는 하지만 전하의 인자한 덕으로 어찌 굳이 죽이려는 마음이 있기야 하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겨울에 형벌을 받으면 간혹 처음 형벌을 받고나서 쓰러져 죽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미물과 같은 하찮은 목숨이야 애석할 것이 없지만 나라의 체모에 있어서 관계된 바가 적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정석 등이 범한 바는 바로 그들 스스로 저지른 것이니 법으로 보아 마땅히 죄를 물어야 한다는 것을 누가 알지 못하겠습니까마는, 그들이 망명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성상께서도 살피셨으니 법률로써 단죄하기만 하면 충분한 것입니다. 만일 다시 추가로 형벌하라는 분부가 있다면 죽게 될 염려가 없지 않을 것이니, 사방에서 듣는 이들은 반드시 조정의 본의를 상세히 알지 못하고 도리어 정석 등이 당초에 범한 바가 임금의 노여움을 저촉했기 때문에 끝내 여기에 이르게 된 것이라고 의심할 것입니다. 모르긴 하지만 전하께서는 장차 어떻게 해명하시겠습니까.
대저 선비란 국가의 원기(元氣)이니, 형세는 비록 낮고 사람은 비록 천하지만 그 중대하기로 말한다면 국가의 안위와 치란이 연계된 바입니다. 한 선비가 굴욕을 당하면 혹 만인의 사기를 손상시킬 수도 있고 한 고을이 원한을 품으면 실로 온 나라의 듣는 이들을 놀라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정석 등이 범한 바는 사방이 아는 바가 아닌데, 사방의 사람들이 다 말하기를 ‘전하께서 이 무리들에 대하여 사소한 과오를 가지고 무거운 법률을 적용하였다.’ 한다면, 집집마다 다니면서 설명하고 이해시킬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호서(湖西)의 상소한 유생들에 대해서도 또한 준엄한 내용의 교지를 내리며 서로 내통한 정상이 있는 것으로 의심하셨으니, 이것은 양호(兩湖)의 선비들을 모조리 패란(悖亂)의 죄로 돌리고 다시는 군신의 의리로써 요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많은 선비의 여망(輿望)을 상실하고 국가의 원기를 무너뜨림이 어떠하겠습니까. 이것으로 말미암아 말한다면 정석 등을 다스리는 것은 사소한 일이고 선비의 여망을 상실하는 것은 중대한 일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사람의 목숨을 함부로 죽이지 않았으니, 이것은 진실로 뭇 아랫사람들이 우러르는 바입니다. 오늘에 이르러 전하로 하여금 정석 등에게 실수를 하시도록 한다면 어찌 신들의 죄가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처음에 정중 등이 차자를 초안할 때에 부제학 김익희(金益熙)와 연명하려 하였는데, 익희가 끝내 따르려 하지 않았다. 여론이 모두 익희를 비난하였다.
11월 10일 경인
영의정 이시백(李時白), 우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근일에 삼가 보건대,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가 서로 이어서 진언하였는데 성상의 뜻은 막연하여 한번 허락하기를 아직도 주저하시니, 이것이 어찌 아랫사람들이 성명께 바라는 것이겠습니까. 아, 신들이 처한 바가 어떤 직책이며 신들이 나라에 보답해야 할 것이 어떤 일이겠습니까. 지금 군부의 잘못된 조처를 보고도 한번 말하여 고하지 않는다면 신들이 전하를 저버림이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신들은 듣건대, 예전의 성왕(聖王)들은 법을 세워 지극한 치세를 이룩하였으니 간언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 같지만 비방(誹謗)의 나무를 설치하고 감간(敢諫)의 북을 설치068) 했던 것은, 진실로 말이 숨겨진 바가 없어 겸하여 듣고 아울러 본다면 임금의 덕이 더욱 높아지고 정치의 효과가 날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쇠해진 이래로 다스려진 시기가 적고 어지러운 시기가 많은 것은 대개 간언(諫言)을 싫어한 데서 연유한 것인데 그 단서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간곡한 간언은 비위를 거슬려 용서하기 어렵고 완곡한 간언은 범범하여 이해하지 못하며, 직선적인 간언은 침범한다 싫어하고 넌지시 하는 간언은 비방인 줄로 의심하며 너그럽게 용납하는 것은 꿀리는 게 아닌가 혐의스러워하고 지나치게 거절함은 존엄해지는 것인 줄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막을 것을 쌓는 데 지나치게 치밀히 하며 아래에 굽히지 않고, 헤아리고 숨기는 데 먼저 마음을 쓰며 남들에게 이기기를 힘씁니다. 눈앞의 일을 쾌하게 여기고 원대한 도모책을 생각지 아니하여, 군자가 의심을 당하고 소인이 요행을 얻는 결과를 초래하여 끝내 깨닫지 못하고 멸망하는 데 이릅니다. 지나간 역사를 상고하면 역력히 알 수 있습니다. 당 태종(唐太宗)이 말하기를 ‘사람이 자기 모습을 보려면 반드시 맑은 거울이 필요하고, 임금이 자신의 과오를 알려면 반드시 충신이 있어야 한다.’ 하였으니, 이것이 전하께서 힘쓰고 경계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정석의 일에 대하여 양사가 말하기를 상세히 하고 옥당이 논하기를 극진히 하였습니다. 신들은 모르긴 하지만 여러 신하들이 입이 닳도록 극력 간쟁하는 것이 정석을 위해서입니까, 전하를 위해서입니까. 외로운 늙은 신하가 죽을 날이 머지 않아 닥칠 터인데 오히려 이런 말을 하는 것 또한 삼사의 신하들을 위한 것입니까, 전하를 위한 것입니까. 아, 거슬리는 말과 뜻에 맞는 말이 서로 올라오면 희노의 기틀이 따라서 움직이는 법입니다. 곧바로 나의 사심을 버리고 반드시 도에 따라 궁구해본다면 시비가 자연히 구별되어 취하고 버림이 마땅함을 얻게 될 것이니, 임금과 신하가 서로 발전되는 즐거움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시험삼아 고요한 밤에 차분한 마음으로 반성하여 조용히 반복하여 이치가 있는 바를 살피신다면 명경 지수와 같은 마음에 털끝만큼도 차질이 없을 것이니, 전하께서 마음이 환하게 풀리는 것도 여기에 있게 될 것입니다. 오직 오늘의 일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상벌에 대해서도 반드시 신중을 기한다면 매우 국가의 다행일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정석이 어찌 죽음에 이르기야 하겠는가. 경들은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관학의 유생 이제(李璾) 등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국가가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는 배양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고 왕된 자가 형벌을 적용하는 방법은 오직 신중함을 귀하게 여깁니다. 대개 형벌이 적절하지 않으면 백성이 손발을 둘 수가 없고 선비들이 떨치지 못하면 나라는 나라 꼴이 안 되니 관련된 바가 어찌 중대하지 않겠습니까.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이 만백성에게 흡족하고 형벌이 아닌 덕으로 편안하게 하는 교화가 많은 선비들에게 미쳐, 무릇 호령을 발하는 바가 타당함을 얻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호남의 유생 정석 등의 일에 대해서만은 잘못된 조치가 있음을 면치 못하셨습니다. 정석이 망령되이 행동한 한 가지 일로 인하여 전하의 잘못된 조치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대저 정석이 몸은 몹시 미천하지만 명색은 선비입니다. 의관을 갖추고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성인을 존숭하는 선비인데, 전하께서 서울의 옥에 잡아들일 것을 특명하여 법률을 적용하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첫 번째 잘못된 조처입니다. 정석이 비록 무지하여 망령되이 행동한 죄가 있지만 본래 망명을 한 것이 아니고 노모를 뵙기 위한 것으로서, 그 자취를 본다면 진실로 해괴하지만 그 정상을 살핀다면 진실로 측은합니다. 조정이 처치하는 도리에 있어서 어찌 용서할 만한 단서가 없겠습니까. 그런데 전하께서는 정상을 참작할 것을 생각지 않으시고 날짜를 한정해서 엄한 형벌을 가할 것을 특명하시니, 이것이 두 번째 잘못된 조처입니다. 이와 같다면 선비들의 기개가 어떻게 떨쳐질 수 있으며 형벌이 어떻게 적절함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전하께서 헌부에 답한 비답을 보건대 ‘이 무리를 어찌 죽게까지야 하겠는가.’ 하셨으니, 신들은 진실로 전하께서 정석 등에 대하여 본디 죽이려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만, 아직도 형벌을 정지하라는 분부가 없으십니다. 전하께서 비록 죽이라는 하교는 없으셨지만, 정석 등이 먼 촌구석의 오래 갇힌 죄수로써 이렇게 추운 겨울에 형틀에 묶여 살갗을 드러내고 연이어 엄한 형벌을 받았는데 이제 또 형벌을 더하라는 분부를 받았으니 끝내는 곤장 아래에서 죽게 될 것이 또한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는 애당초 선비를 죽일 마음은 없었지만 끝내는 선비를 죽였다는 이름이 있게 될 것이니, 전하께서도 필시 후회해 보아야 미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김기추에 있어서는 더욱 원통함이 있습니다. 관리를 구타한 사실도 없는데 함께 형신을 받았으니, 이것은 또 신들이 이해가 가지 않는 바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이미 형벌을 정지하였으니, 실로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에서 나온 것으로서 보고 듣는 모든 이가 누가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아, 이 사람들은 애당초 사전(祀典)을 중시하려는 것이었는데 도리어 백홍성(白弘性)의 무함을 입었고, 끝내는 지정(至情)을 펼치려다가 반윤기(潘潤沂)가 착오를 일으킴을 면치 못해서 하늘 같은 위엄을 진동하고 죄의 그물이 부당하게 가해졌는데, 전하의 잘못된 조처가 점차 강도를 더하니 신들의 의혹은 지난번보다 배나 더합니다. 그 불행이 어찌 정석 한 몸에 그칠 뿐이겠습니까. 실로 유림의 불행이고 또한 조정의 불행이기도 합니다. 일찍이 선묘조(宣廟朝)에 호남 유생이 일을 말하다가 비위를 거슬린 일이 있었는데, 엄한 견책을 당할 뻔하다가 곧바로 은택을 입었습니다. 노인들이 이 일을 서로 전하며 미담으로 삼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성스러운 선조께서 형벌을 신중히 하신 지극한 뜻이며 바로 전하께 전해온 선비를 사랑하는 가법(家法)입니다. 어찌 전하께서 마땅히 유념하여 본보기로 삼아야 할 점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우레와 같은 위엄을 조금 거두시고 정석을 추가로 형벌하라는 분부를 환수하시어 온 나라 많은 선비들의 여망을 위로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 무리가 어찌 죽음에 이르기야 하겠는가. 너희들은 지나치게 우려하지 말라."
하였다.
11월 11일 신묘
경상도에 기근이 들었다.
홍처후(洪處厚)를 승지로, 유철(兪㯙)을 대사간으로, 박승휴(朴承休)를 사간으로, 윤성(尹珹)을 장령으로, 민유중(閔維重)·성후설(成後卨)을 정언으로, 채충원(蔡忠元)을 부응교로, 권대운(權大運)을 부교리로, 윤개(尹塏)를 지평으로, 홍처윤(洪處尹)을 보덕으로, 이문위(李文偉)를 충청 병사로, 성익(成釴)을 경상 좌수사로 삼았다.
11월 12일 임진
간원(諫院)이 【헌납 강호(姜鎬).】 아뢰기를,
"정석이 명을 받은 날에 노모를 뵙고 결별을 고하고자 한 것은 진실로 지극한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만, 죄인이 된 몸으로 사사로이 귀가하였으니 어찌 몹시 해괴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조정의 처치에 있어 진실로 통렬히 징계함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정석이 본래 사납고 무식했기 때문에 스스로 죄를 짓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였으니, 만일 그 정상을 참작해 준다면 죄가 죽음에 이를 정도는 아닙니다. 그런데 3일의 기한을 넘기지 않고 엄하게 형신을 가하여 곤장 아래에서 쓰러져 죽게 한다면 살리기를 좋아하는 지극한 덕에 흠이 되지 않겠습니까. 정석에게 형신을 가하라는 분부를 환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정석이 사납다고 여긴다면 재차 형신을 가하는 것이 무슨 불가할 것이 있겠는가. 그런데 감히 사사로운 뜻으로써 임금의 마음을 미리 헤아려 반드시 죽일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군부의 과오를 억지로 조성하여 한 시대의 허명을 낚으려 하다니, 나는 몹시 수치스럽게 여긴다. 너는 이런 짓을 멈추라."
하였다.
헌부(憲府)가 【대사헌 이일상(李一相), 장령 원만석(元萬石).】 아뢰기를,
"신들이 정석의 일로써 막 한 차자를 올려 감히 소회를 진달하자 특별히 온화한 비답을 내려 자상하게 타일러 주셨으니, 신들은 성상의 의도가 실로 우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왕자가 법을 적용하는 것은 자연 경중이 있으니, 참작 처리하여 타당함을 얻은 연후에야 후일 정도에 지나쳤다는 후회가 없을 수 있습니다. 정석이 스스로 지은 죄는 진실로 용서하기 어려운데 성상의 천지와 같은 도량으로 이미 그의 죄가 죽음에 이를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 통촉하셨으면서도 오히려 또한 형벌을 가하라 한 것은, 죄가 김기추보다 심한 게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당초에 엄한 형벌을 가하라는 분부가 정석에게만 내렸으니 조정에서 죄를 다스리는 도리에 있어 경중이 이미 구별된 것이었습니다. 어찌 계속해서 형벌을 가하여 형벌을 신중히 하시는 지극한 뜻을 손상시킬 수 있겠습니까. 형벌을 추가하라는 분부를 빨리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역모를 심문하는 형벌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세 차례에 쓰러져 죽지는 않는다. 너희들이 너무 지나치게 아끼고 너무 심하게 비호하여 날마다 야단을 떨며 스스로 가볍게 구는데, 이것이 진실로 무슨 마음인가. 나는 매우 취하지 않는 바이다. 정석은 죄가 비록 죽음에 이를 정도는 아니지만 결코 두 차례의 형벌로써 징계할 만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헌납 강호(姜鎬)는 본원의 장관과 동료들이 모두 출사하기도 전에 홀로 이 논의를 발하였으니, 그 시기를 이용해 명예를 낚으려는 정상이 진실로 몹시 해괴하다. 체차하도록 하라."
형조 판서 정유성(鄭維城)과 형조 참의 유경창(柳慶昌)을 금부에 회부하였다. 처음에 유성 등이, 정석 등이 죄가 없다고 여겨 고문을 가볍게 하였는데, 외간에 정석이 장차 곤장 아래에 죽게 될 것이라는 말이 퍼졌지만 상은 자못 그렇지 않을 것이라 의심하였다. 이때 유성 등이 대각의 논계가 있음을 듣고 관례에 따라 형벌을 정지하고 아뢰니, 상이 노하여 유성 등을 불러 꾸짖고는 따로 사관과 내시를 보내 전옥서(典獄署)를 검열해 보게 하였는데, 정석은 약간의 곤장 흔적만 있고 기추는 전연 곤장을 맞은 흔적이 없었다. 이에 상이 하교하였다.
"엄한 형벌을 받은 자가 이미 이와 같으니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겠다만, 기추는 전연 곤장을 맞은 흔적이 없는 것은 또 무슨 까닭인가. 나라의 기강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아래에 있는 자들이 크나 작으나 다 덮고 가리는 것으로써 능사를 삼아, 거의 죽게 되었다느니, 장차 죽게 될 것이라느니 말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이것이 진실로 무슨 마음인가. 비록 엄한 형벌을 내리라는 하교가 한 번 있었다 하더라도 소홀히 하기를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될 것인데, 더구나 두 번에 걸쳐 신칙하는 하교가 있었으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나라가 망하는 것은 외적의 침략에 있지 않고 반드시 이들 무리의 손에 있게 될 것이다. 어찌 감히 한 시골 유생을 위해 기꺼이 군상을 기만함이 이 지경에 이를 수 있는가. 일이 몹시 해괴하다. 판서 정유성과 참의 유경창 및 낭청은 붙잡아다 국문해서 죄를 정하고, 참판 최혜길(崔惠吉)과 유철(兪㯙)은 겨우 한 번 자리에 참여하였으니 아울러 파직시키고, 해당 아전 및 곤장을 쳤던 사람은 아울러 가두고 날마다 엄한 형신을 가하도록 하라."
관학 유생 이제(李璾) 등이 또 상소하여 간쟁하니, 답하였다.
"그대들은 지나친 염려가 어찌 그리 심한가. 귀찮게 말고 물러가 학업이나 닦으라."
11월 14일 갑오
비변사가 아뢰기를,
"진언하는 자들이 다 인재를 천거하는 것으로써 급선무를 삼고 있습니다. 종2품 이상 실직으로, 승지, 삼사의 장관, 육조의 참의 및 감사 등으로 하여금 인재를 천거하도록 하되 만일 종전의 습관을 답습하여 사심을 가지고 잘못 천거하면 무거운 죄로써 논하고, 천거된 자가 과연 현명하고 유능한 경우는 상을 내리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상진(李尙眞)의 말을 채용한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34면
【분류】인사-선발(選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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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6일 병신
홍명하(洪命夏)를 도승지로, 남노성(南老星)을 대사간으로, 이항(李杭)을 헌납으로, 허적(許積)을 동지경연으로 삼았다.
동부승지 송준길(宋浚吉)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답하였다.
"너의 굳은 사양이 이 지경에 이르다니, 이것은 나의 정성이 미진한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므로 진실로 낯이 부끄럽다. 너는 나의 지극한 뜻을 깊이 인식하고 부디 빨리 올라오라."
상이 하교하였다.
"정유성 등이 형옥(刑獄)의 경중을 한결같이 사사로운 자기 개인의 뜻에 따라 자기 멋대로 시행하여 위복(威福)을 제 마음대로 하였으니, 나라의 법에 있어서 형벌을 면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대부(大夫)에게는 형벌을 가하지 않는다는 의리를 고려하고 또 차마 하지 못할 바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울러 삭탈 관직하여 유배시키라."
비변사가 아뢰기를,
"황해 감사 임의백(任義伯)의 보고서 가운데 이른바 ‘군관(軍官)과 친병(親兵) 가운데서 날래고 굳센 자들을 가려 번포(番布)를 면제해 주면서 무예를 익히도록 한다.’는 것은, 마땅히 관례에 따라 거행하는 것을 허락하되 번거롭게 소문이 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조련은 청나라 사신이 올 때마다 들판에 나가 사냥하는 것으로 핑계를 대고 몰래 훈련을 실시하니 비록 귀를 가리고 방울을 훔치는 것에 가깝기는 하지만 진실로 전연 폐지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오직 도신이 편의에 따라 실시하는 데 달려있을 뿐입니다. 수양 산성(首陽山城)은 영문(營門)의 진산(鎭山)에 있어 형세의 험함이 도내에서 제일이니, 혹시 사변이 있을 경우 이 성에 들어가 지킨다면 수륙(水陸)을 제어하고 온 도를 호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종전에 이곳으로써 방백(方伯)의 순행 구역으로 삼았던 것은 실로 범상한 뜻이 아니었으니, 형세를 보아 퇴락한 곳을 수리하는 것이 불가하지 않지만 굳이 조정에 번거롭게 아뢸 것까지는 없습니다.
벽란(碧瀾)과 강서(江西)에 진을 설치하는 한 사항은 신들도 또한 그 형세를 직접 눈으로 많이 보았는데 진을 설치하는 데 있어 모두 전혀 근사하지도 않은 곳입니다. 굳이 보탬은 없고 번거롭기만 한 일을 할 필요가 없으니, 결단코 시행할 수가 없습니다. 순위도(巡威島)에 있어서는 나루의 넓이가 갑곶(甲串)의 배나 되고 백령(白翎)·용매(龍媒)·허사(許沙)의 여러 진(鎭)이 전후에 나열해 있어 앞뒤로 호응하는 형세가 있으며, 남쪽으로 강도(江都)까지 한 번의 조수(潮水)로 이를 수 있는 거리이니 응원하기에 가장 편리합니다.
다만 우리 나라의 모든 일은 비록 몹시 엄격한 비밀 사항이라 하더라도 저들은 사소한 것까지 알지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더구나 이러한 진을 옮기는 큰 일이 만일 누설되기라도 한다면 보탬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강도(江都)에 피해가 있게 될 것이니, 서서히 기회를 살펴 처리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해안에 출몰하는 배가 간혹 있으니 수색하는 일을 엄중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구실삼아 말을 하여 노를 수리하는 것이 바로 기회입니다. 그러나 일을 마땅히 신중하고 치밀하게 하여 각 고을로 하여금 그 의도를 알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해서(海西) 전함의 제도는 남선(南船)에 비해 절반밖에 되지 않고 격군(格軍)이 백 명도 못되지만 대포를 운용할 수 있습니다. 해산시킨 사람을 군기시로 하여금 별파진(別破陣)에서 골라 공무라고 핑계하여 보내게 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11월 17일 정유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자전이 일찍이 통명전(通明殿)에 거처하셨는데, 재차 몸이 편찮으셨다. 지난해 비록 더러운 물건들을 깨끗이 제거하였지만 그대로 이 전에 계신다는 것이 마음에 몹시 불안하였기 때문에 여름에 수정당(壽靜堂)으로 받들어 모신 것이다. 그런데 이곳도 산을 등지고 땅이 비좁아 오래 거처하시기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에 또 옛 총부(摠府)에 옮겨 모시려고 하는데, 총부도 또한 협소하여 불편하다. 나는 넓다란 궁전에 살면서 자전을 모실 만한 적합한 자리가 없으니, 내 마음이 편안하겠는가. 이런 시기에 건축 공사를 한다는 것이 곤란하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사세가 이와 같으니, 흠경각(欽敬閣) 터에 하나의 전을 세우고 싶다. 경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영의정 이시백(李時白)이 아뢰기를,
"사세가 이와 같으니 무슨 불가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고, 우의정 심지원(沈之原)이 아뢰기를,
"누가 감히 이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흠경각의 옛 터는 바로 홍문관의 북쪽으로 본래 깊숙한 곳이 아니니, 마땅히 앞에 한 층의 누각을 세워서 건너편 여염집이 바라다 보이는 것을 차단해야 한다. 이 역사는 비교적 큰 일이고, 또 인경궁(仁慶宮)의 목재와 기와를 이미 다 써버렸으므로 모름지기 별도로 목재와 석재를 준비해야만 바야흐로 공사를 시작할 수 있다. 경들이 물러가서 방도를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시백이 아뢰기를,
"임의백(任義伯)이 보고서로 올린 사항들을 이미 회계 가운데서 상세히 아뢰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소문이 퍼지지 않겠는가. 단속하여 연습하는 일은 김적(金逿)이 관서(關西)에 있을 때에도 잘 시행하지 못하였으니, 지금이라도 꼭 잘 완수하지는 못할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마치 자기 집안일 하듯이 한다면 어찌 다시 사람들의 말이 있겠는가."
하였다. 시백이 아뢰기를,
"정유성(鄭維城)이 어찌 정석에게 사사로운 정이 있었겠습니까.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다시 너그럽게 살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사로운 정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사로운 의도를 말함이다. 내가 근일의 일을 묵묵히 관찰하건대 두렵고 불안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매양 일종의 근거없는 의논이 갑자기 일어나면 상하가 번번이 거기에 동요되니, 나는 국권이 아래로 옮겨갈까 두렵다. 유성이 무슨 큰 죄가 있겠는가마는, 근거없는 의논에 동요된 것이며 대신의 논의도 또한 근거없는 의논에 동요된 것이다. 일전에 옥당이 차자를 올릴 때도, 그 이튿날 바로 주강이 있었으니 어찌하여 경연을 열기를 잠시 기다려 입시하여 의논하지 아니하고 바로 어두운 밤에 급급히 차자를 적어와서 올린단 말인가. 이것에 어찌 다른 의도가 있겠는가. 또한 근거없는 의논에 동요되어, 글로써 책임이나 때우며 소문이 전파되도록 하여 스스로를 해명하는 터전을 삼고자 한 것이다."
하였다.
11월 19일 기해
유준창(柳俊昌)을 집의로, 곽성귀(郭聖龜)를 장령으로, 심유행(沈儒行)을 부수찬으로, 신선(申䆄)을 전남 좌수사로 삼았다.
홍문관이 아뢰기를,
"삼가 보건대 정원(政院)이 날씨가 몹시 차갑다는 이유로 경연(經筵)을 탈품(頉稟)하였습니다. 그러나 경연을 여는 고사에 소한(小寒) 이전에는 탈품한 전례가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강하고 계신 책의 남은 분량이 많지 않고 앞으로 소한까지는 날짜가 멀었으니, 조금 따뜻한 날을 가려 이 책의 강을 끝마쳐서 책 끝의 나머지 강할 부분이 신년까지 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11월 20일 경자
달이 헌원 대성(軒轅大星)을 가렸다.
11월 22일 임인
남원 영장(南原營將) 조박(趙搏)이 하직 인사를 하니 대면하고 유시하여 보냈다.
11월 23일 계묘
관학 유생 송규정(宋奎禎) 등이 상소하기를,
"신들이 일전에 정석의 일로 재차 전하께 하소연하자 성상의 하교가 친절하여 부드럽게 깨우치시는 뜻이 갖추어져 있었으니, 신들은 서로 축하하여 물러나와 덕음(德音)을 단정히 기다렸습니다. 어찌 점점 이 지경에 이르러 성명의 덕을 더럽히고 맑은 조정의 과오가 될 줄을 짐작이나 하였겠습니까.
당초 형조 판서의 실수는 비록 전하께서 죽이지 않겠다고 하신 하교를 믿는 데 있었으나 분부를 위반하고 형을 느슨하게 시행하였으니, 죄가 진실로 있습니다. 정석에 있어서는 이미 형벌을 받은 사람이 되었으니 어찌 그 사이에서 간여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전하께서 노여움을 옮기기를 너무 지나치게 하여 엄한 신문이 혹독하였으니, 아, 정석의 죽음이 이에 이르러 결정이 난 것입니다. 옛말에 ‘성내야 할 곳에 성내어 각각 그 곳에서 그친다.’ 하였습니다. 대저 정석 등의 죄는 애당초 그다지 컸던 것도 아니고 지금 무슨 증가함이 있습니까. 그런데 단지 유사가 형을 느슨하게 시행한 데 격분하기도 하고 유생들이 귀찮게 한 데에 연유하기도 하여 끝내 반드시 죽인다면, 죄는 전후에 다름이 없는데 형벌은 시종이 차이가 있게 되니, 이것이 이른바 ‘성내되 그 곳에서 그치지 못한다.’는 것으로 어찌 매우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정석의 죽음은 비록 불쌍할 것이 없지만 선비를 죽였다는 이름이 끝내 전하에게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후세에 양심적인 사관이 기록하기를 ‘전하께서 하찮은 죄로써 선비를 살해했는데, 조정의 신하가 논의하고 많은 선비가 간쟁하였지만 되지 못했다.’ 한다면 전하께서 후세에 어떻게 스스로 해명하겠습니까.
한 번 엄한 분부가 내린 뒤로부터 대각의 논계가 발하였다가 곧바로 멈추고는 우물쭈물 머뭇거리며 결정을 못내리고 머리를 오그리고 혀를 묶어 놓은 채로 있습니다. 상하가 기력이 꺾이고 분위기가 참담하여 전하의 지나친 조처를 목격하고도 감히 한 마디 말도 간쟁하지 못하니, 이런 식으로 나간다면 전하의 실수가 비록 이것보다 더 큰 것이 있다 하더라도 누가 기꺼이 전하를 위하여 바로잡아 주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위에서 고립되고 나랏일이 어느 지경에 이를는지 알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신들이 하늘의 위엄을 범하기 어려움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또한 말하지 아니하여 전하를 저버리는 것은 차마 못하는 바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 무리들이 몹시 실없고 경솔하니 이 상소를 도로 돌려주라."
하였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수리하는 일에 대해 모든 사람들의 의견이 이미 결정되었는데, 요금문(耀金門) 안의 지형이 몹시 비좁다. 궁장(宮墻)의 안에는 모름지기 내장(內墻)이 있어야 하고 내장의 안에는 모름지기 층루(層樓)를 세워야 하는데, 누각이 내장에 들어서고 나면 전연 남는 땅이 없을 것이니 이것도 또한 변통하지 않을 수가 없다. 두 담장의 사이가 1장(丈) 남짓도 안 되니 순라가 왕래하자면 어떻게 통행할 수 있겠는가. 모름지기 도랑을 안으로 들이어 따로 궁장을 그 밖에 쌓아야만 순라가 왕래하는 길이 들어설 수 있고 체모나 형세가 마땅함을 얻을 것이다.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부제학 김익희(金益熙)가 아뢰기를,
"궁성(宮城)의 옛 제도를 넓히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하고, 호조 판서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순라의 길이 단지 담장 하나를 사이로 두고 있다는 것도 또한 몹시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의 뜻이 반드시 이와 같이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 경들과 가부를 상의하려는 것이다."
하니, 우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외부 사람의 말소리가 필시 궁안에 들릴 테니 일이 몹시 난처합니다. 그러나 익희의 말도 또한 유념해야 합니다."
하고, 병조 판서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지금 비록 넓히려 한다 하더라도 요금문으로부터 홍문관에 이르기까지 곡장(曲墻)의 제도를 사용한다면 민가를 철거하는 것이 많은 양에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설계도를 가져다가 보았는데, 심지원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2백 60, 70십 칸의 재력(財力)을 헤아려 보았는데, 도합 재목이 1만여 조(條)가 들어 3천 석의 쌀과 4백 동의 포(布)를 써야 하니, 공역이 너무 방대해서 일이 몹시 우려할 만합니다. 칸수를 줄여서 비용을 절약하고 민폐를 더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고, 익희가 아뢰기를,
"대신의 말을 부디 유념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공역이 어찌 여기에 이르겠는가."
하였다. 심지원이 아뢰기를,
"흠경각(欽敬閣)도 철거할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철거하여 그 목재와 기와를 쓰고, 총부(摠府)의 목재와 기와는 도로 총부에 주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지원이 아뢰기를,
"총부와 옥당을 옮길 장소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상의원은 창경궁 안으로 옮기고, 옥당과 총부를 상의원 근처에다가 옮겨 짓는 것이 타당할 것같다."
하였다.
11월 24일 갑진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거공장(車攻章)을 강하였다. 시독관 채충원(蔡忠元)이 아뢰기를,
"선왕(宣王)이 안으로 정사를 닦은 실상은 운한편(雲漢篇)에 보이고 밖으로 외적을 물리친 실상은 이 편에 보입니다. 주나라 왕실의 중흥을 이 두 편에서 증험할 수 있는데, 그 근본은 조심하여 수행한 데 있습니다."
하였다. 지경연 오준(吳竣)이 아뢰기를.
"고 신 장현광(張顯光)이 졸하였을 적에는 막 병란을 겪고 났을 때였으므로 포증(褒贈)의 은전이 지금까지도 미처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른 사람에게 내린 전례에 따라 시행하라."
하였다.
관학 유생 송규정(宋奎禎) 등이 상소하기를,
"신들은 단지 성덕에 누가 있을까를 두려워하고 무고한 사람이 죽게 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기 때문에 속마음이 격해졌던 것이며 결단코 다른 뜻은 없었는데, 미미한 정성이 도달되지 못하여 도로 돌려주라는 분부가 있기까지 하였습니다. 미천한 신들의 몸은 진실로 걱정할 것이 없지만 전하께서 유생을 대우하는 그 도리를 얻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신들은 상소를 부여안고 머뭇거리며 서로 돌아본 채 슬퍼하옵니다. 어찌 성명의 세상에 이러한 기상이 있을 줄 예상하였겠습니까. 아, 하늘의 들음은 막연함이 이와 같아서 신들이 자처하기가 더욱 곤란합니다. 이것이 옛사람의 이른바 ’서글피 떠날 듯한 기색이 있을 뿐이다.’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다시 살피시어 결정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귀찮게 하지 말고 물러가 학업이나 닦으라."
하였다.
수리 도감 도제조 심지원, 제조 원두표·이해(李澥)·허적 등이 접견을 청하니, 상이 불러 보았다. 지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친히 가서 터를 측량해 보니, 지세가 비좁아 필경 용납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비록 남북을 동서로 하고 종을 횡으로 한다 하더라도 겨우 몇 자의 땅이 남으니, 내장(內墻)과 순라 길을 설치할 만한 곳이 없습니다. 도랑을 메꾸고 담장을 뒤로 물리지 않는다면 다시 다른 대책이 없는데, 어찌 옛 제도를 넓혀 여러 듣는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일이 비록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지만 어찌 집집마다 다니면서 이해시키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원근의 말을 전하는 자들이 반드시 ‘궁성을 크게 넓히다니 사소한 걱정거리가 아니다.’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남향의 제도를 변경한다 하더라도 마치 말 가운데 되를 들이는 것과 같으니,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 궁장(宮墻)을 물리지 않고 순라하는 길을 설치할 수 있다면 아주 좋을 것이다. 만일 궁장을 내장(內墻)으로 삼는다면 그 밖에 순라하는 길을 설치할 수 있을 것이니, 왕래하는 데 널찍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11월 25일 을사
충청도 회인(懷仁)·문의(文義)·보은(報恩)에 지진이 있었다.
전남 감사 정지화(鄭知和)가 계문하기를,
"부안현(扶安縣)에 예전에는 어전(漁箭)이 20군데가 있었는데, 그중 열한 개는 궁가에 점유당하고 여덟 개는 성균관에 소속되었으며 단지 한 곳만 본현이 힘입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숙경 공주(淑敬公主) 집에 탈취당하였습니다. 부안은 격포(格浦)의 출입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사신 행차가 연이어, 유독 그 폐단을 받고 있습니다. 옛 어전 한 군데를 그대로 본현에 소속시켜 주소서."
하니, 허락하였다. 이어서 여러 궁가와 각 아문이 서로 점유한 것들을 신칙하여 금지하게 하였다.
11월 26일 병오
지평 윤선거(尹宣擧)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허락하였다.
대제학 채유후(蔡𥙿後)가 면직되었다.
진도(珍島)의 감목관(監牧官) 김흥조(金興祖)가 탐장죄를 범하여 법에 따라 사형되었다.
11월 27일 정미
채유후(蔡𥙿後)를 대사헌으로, 이진(李𥘼)을 사인으로, 윤성(尹珹)을 장령으로, 안후직(安後稷)을 지평으로, 원만석(元萬石)을 헌납으로, 홍주삼(洪柱三)을 정언으로, 이상진(李尙眞)을 경상 감사로 삼았다.
11월 28일 무신
상이 하교하였다.
"이번 수리하는 일은 만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니, 공역에 관계된 모든 것을 한결같이 간편하게 하고, 목재를 채취할 때에는 배를 만드는 데 합당한 것은 함부로 자르지 않도록 하라. 인부를 나누어 정할 적에는 소요되는 숫자만을 취하고 민간의 잡다한 부역은 알아서 적절히 견감해서 민심을 위로하는 것이 좋겠다. 모름지기 이런 뜻으로 해도에 엄하게 신칙하고, 특별히 굳세고 명민한 관원을 선발하여 그로 하여금 마음을 다해 봉행토록 하라. 후일 어사를 파견하여 살펴서 처리하겠다."
11월 30일 경술
수리 도감의 제조에게 명하여,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과 삼사의 장관과 더불어 빈청에 모여 궁장(宮墻)을 물려 쌓는 것의 편의 여부를 의논하여 확정하게 하였다. 서로 책임을 전가하여 하루종일 결정이 나지 않았는데, 대사헌 채유후(蔡𥙿後)가 상소하기를,
"궁장을 물려 쌓는 것을 신은 삼가 옳지 않다고 여깁니다."
하고, 이어서 먼저 일어나 나가자, 영의정 이하가 다 말하기를,
"물려 쌓는 것은 불편하니 칸수를 적절히 줄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도감이 드디어 이것으로써 보고하고, 후일 등대하여 대면하고 의논드릴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어찌 매번 대면하고 의논함으로써 일의 체모를 손상시킬 수 있겠는가. 내일 아침에 다시 회의하여 아뢰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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