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15권, 효종 6년 1655년 12월

싸라리리 2025. 12. 22. 09:38
반응형

12월 1일 신해

여러 신하들에게 명해서, 빈청에 모여 궁의 담장을 물려 쌓는 것의 편리 여부를 다시 의론하게 하였다. 형조 판서 이시방, 판윤 이완이 아뢰기를,
"신들이 오늘 아침에 가서 지세를 살펴보았더니 과연 매우 협소하였습니다. 별당(別堂)을 만일 축조하지 않을 수 없다면 형세상 조금 궁의 담장을 물려 쌓아 순라하는 길을 소통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하고, 대사헌 채유후가 아뢰기를,
"이번에 수선하는 것은 실로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지만 별전(別殿)은 굳이 지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궁의 담장을 물려 쌓는 것은 일이 청문(聽聞)에 관계된 것으로, 신의 어리석은 소견을 이미 어제의 상소 가운데서 진달하였습니다."
하고, 부제학 김익희가 아뢰기를,
"도감 신하들의 말을 들어보건대 별전을 짓지 않는다면 궁궐의 담장을 물리지 않아도 지세가 용납할 수 있다 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별전은 정전과는 같지 않으니, 검소한 제도를 취할 것 같으면 별전은 짓지 않을 수도 있을 듯합니다."
하고, 대사간 남노성(南老星)이 아뢰기를,
"별전을 적절히 줄일 수 있다면 궁궐 담장을 물려 쌓지 않는 것이 온당합니다."
하였다. 영의정 이시백 등이 아뢰기를,
"뭇 의견이 이와 같은데, 궁궐 담장을 물려 쌓기가 곤란하다고 하는 것은 공역(功役) 때문에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조종이 정한 제도를 수백 년 뒤에 변경하는 것이 실로 매우 온당하지 않아서입니다. 그러므로 어제 칸수를 줄이라는 뜻으로 아뢰었던 것입니다. 이제 성상의 하교를 받고 다시 터를 헤아려보니, 줄일 만한 칸수가 없고 달리 선처할 대책도 없으므로 담장을 물려 쌓는 일을 그만둘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도랑 건너편까지 물려 쌓는다면 더욱 청문(聽聞)을 번거롭게 할 것이니, 대석(臺石)을 냇가에 약간 물려 순라하는 길을 그 안에 소통시키고, 물길로 하여금 서쪽 가장 자리를 구불구불 따라가도록 한다면 오히려 냇가 건너까지 담장을 물려 쌓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하니,
"내일 아침에 다시 와서 모이라."
라고 답하였다.

 

12월 2일 임자

유도삼(柳道三)을 승지로, 이완(李浣)을 공조 판서로, 이연년(李延年)을 이조 좌랑으로, 박세견(朴世堅)을 문학으로, 정언황(丁彦璜)을 강원 감사로 삼았다.

 

신하들이 빈청(賓廳)에 모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칸수를 줄이면 온당할 듯하지만, 전각(殿閣)의 제도는 여염집과는 달라 길흉의 대례(大禮)를 다 수용할 수 있어야만 바야흐로 모양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또 흠경각(欽敬閣)은 바로 혼조(昏朝) 때에 설치한 것인데 김수항은 조종조 때 세운 것으로 잘못 알고 있으니, 이 뜻도 잘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에 앞서 김수항이 상소하여 흠경각을 세종조(世宗朝)에 건축한 것으로 여겨 지금 폐지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내용이 매우 과격했다. 상소를 안에 머물려 두었는데 이때 이르러 이런 하교가 있었다. 이시방과 이완이 아뢰기를,
"어제 이미 진달했으므로 별도로 의논드릴 것이 없습니다."
하고, 도감 도제조 심지원, 제조 원두표·이후원·허적이 아뢰기를,
"신들의 의견은 이미 어제 의논드린 계사에서 다하였습니다."
하고, 삼사의 장관은 아뢰기를,
"바야흐로 이 일 때문에 대면을 청하려 했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 거공장(車攻章)을 강하였다.

 

삼사의 장관들이 대면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고 이르기를,
"따로 접견할 일이 없으니, 생각한 바가 있으면 서면으로 아뢰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대사헌 채유후, 대사간 남노성이 상소하기를,
"신들이 감히 당초의 의견을 변경할 수 없기에 탑전에서 생각한 바를 대면하고 진술하려 하였는데, 마침 경연을 열었기에 감히 뵙기를 청하였습니다. 지척에 계신 위엄스런 얼굴을 끝내 접견을 못하니, 삼가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장차 무슨 얼굴로 다시 대각을 더럽히겠습니까. 체직하여 주소서."
하고, 부제학 김익희가 상소하기를,
"신이 고집스런 소견을 반드시 지키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서면으로 아뢰는 것은 대면하고 진술하는 것만 못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직접 전하의 용안을 뵙고서 어리석은 정성을 다 아뢰려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이해하지 못하시고 끝내 대면을 허락해주지 않으시니, 신은 진실로 다시 나랏일을 의논하는 자리에 낄 면목이 없습니다. 빨리 신을 삭직시키소서."
하고, 드디어 다 물러나 돌아갔는데, 상이 모두에게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이어서 정원에 하교하기를,
"삼사의 장관들에게 생각한 바를 서면으로 아뢰도록 하였으면 시비를 물론하고 즉시 서계하여야 할 터인데, 간단한 상소로 책임만 때우고 문득 나가버리다니, 이 무슨 까닭인가."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삼사의 장관들이 대면을 청하였다가 접견을 못하였으니, 필시 이 일을 서운하게 여기어 물러간 것이기에 감히 다시 소회를 진달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하문을 하였는데 어찌 감히 대답하지 않고 물러갈 수 있는가. 내일 아울러 명하여 불러 서계하게 하라."
하였다.

 

12월 3일 계축

삼사의 장관들이 부름을 받고 대궐에 나아와 생각한 바를 적어 올렸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의 홍안(鴻雁)·정료(庭燎) 등의 장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수리 도감 도제조 이하 및 삼사의 장관들을 불러 보았다. 상이 삼사의 장관들에게 이르기를,
"경들의 서계(書啓)를 보니 부제학의 말이 자못 좋다. 양사가 서루(西樓)의 칸수를 줄이라고 청하였으므로 이에 도감의 신하들과 상의하고자 한다."
하니, 대사헌 채유후가 아뢰기를,
"형세가 좁다는 것을 신이 어찌 알지 못하겠습니까만, 두 처마가 서로 가까운 것은 나름대로 안 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또 신은 결단코 다른 뜻이 없고, 단지 외간의 청문(聽聞)에 번거로움이 있을까 두려워하는 것일 뿐입니다."
하고, 대사간 남노성이 아뢰기를,
"국조 이래로 나름의 옛 제도가 있었는데, 지금 만일 물려서 쌓는다면 듣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니, 혹시 성상의 덕에 누를 끼치게 될까 두렵습니다. 그래서 방법을 찾아보았지만 얻지 못하여 서루의 칸수를 줄이라고 청하였을 뿐입니다."
하였다. 부제학 김익희가 아뢰기를,
"신은 어제 성상의 하교를 받고서 비로소 형세가 용납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이에 후퇴하여 부득이하다는 논의를 지켰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신이 그저께 퇴근할 때 말을 타고 오르고 내리며 북영(北營)까지 가서 살펴보았는데, 지형이 좁고 깊숙하지 못하여 실로 항상 거처하실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당(唐)나라에서는 서내(西內)069)  를 깊숙하지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궁중에는 반드시 궁에서 떨어진 공한지가 있을 것이니, 만일 목재와 기와를 거두어다 다시 하나의 궁전을 지어 자성(慈聖)을 모신다면 온편할 것으로 신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진술하려 하였는데, 어제 접견을 얻지 못한 데다 서계(書啓)하는 규례는 알지 못했으므로 드디어 대답하지 않고 물러났습니다. 신이 어찌 부질없는 시비에 동요되어 그러하였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제 경의 상소를 보고 이미 경의 뜻을 이해했다. 막 경을 만나보려고 하였는데 경이 문득 물러갔으므로, 나는 경만은 망령되지 않을 터인데 지금은 어찌 저리 망령된가라고 생각했다."
하였다. 유후가 아뢰기를,
"신의 상소에 당초의 견해를 변경하지 않는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다시 서계하지 않고 물러갔던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말하지 않는 것은 외면하는 것이다. 경의 상소에 다만 ‘신은 삼가 불가하다고 여깁니다.’ 하였는데, 이것이 무슨 말버릇인가. 군신 사이에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 상하가 서로 가로막히는 것이 참으로 쉽구나. 윗사람은 항시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뜻을 이해하지 못할까 걱정하고, 아랫사람은 명령을 따르기만 하면 나중에는 그 폐단을 막기 어려울 것이라고 항상 의심하니, 일의 형세상 본래 그렇게 될 소지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일은 부득이한 데서 나왔는데도 논의가 도리어 이와 같다. 대신은 대책을 세울 줄 알지 못한 채 드디어 물길을 옮겨 담장을 물리고자 하니, 구차스러움이 또한 심하지 않은가. 그리고 또 내가 정원을 넓히고자 하는 것이라면 이와 같이 굳게 간쟁하는 것이 옳겠지만, 이 경우는 사리가 자별한 것이다. 내가 굳이 신하에게 물을 필요가 없는데도 물은 까닭은, 우선 경들을 시험해 보고자 한 것이다. 경들이 근일 하는 바를 보건대 어찌 이와 같은 대간이 있겠으며, 또 어찌 이와 같은 조정이 있을 수 있겠는가. 나는 부제학만을 옳게 여긴다. 서루의 칸수를 줄이라는 논의는 더욱 몹시 근거없는 것이다. 오늘은 바로 결단을 내는 날이니, 양사는 모름지기 어느 하나를 지적하여 말하라. 양사가 불가하다고 한다면 내가 통명전(通明殿)으로 거처를 옮기고 왕대비를 대조전(大造殿)에 모실 것이다."
하고, 이어서 노기 띤 음성으로 이르기를,
"비록 죽고 사는 문제가 앞에 당면해 있다 하더라도 어찌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유후가 황공하여 일어나 절하고 아뢰기를,
"담장을 물려서 쌓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쯧쯧, 왜 일찍 말하지 않았는가. 대사간은 왜 말하지 않는가."
하였다. 노성이 일어나 절하고 대답하기를 유후와 같이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이 과연 절개인가. 그래 가지고 간관이 될 수 있겠는가. 대사헌과 대사간은 다 속히 나가라."
하자, 채유후와 남노성이 드디어 물러갔다. 도승지 홍명하가 아뢰기를,
"대간을 이와 같이 대해서는 안 됩니다."
하고, 두표와 허적이 아뢰기를,
"근일 제사(諸司)가 일을 맡으려 하지 않고 매사를 상에게 미루어, 이것이 여러 신하들의 병통이 되니 꾸짖는 것이 진실로 옳습니다. 다만 궁궐의 담장을 물려 쌓는 문제는 근거없는 논의가 구름처럼 났으므로 대신 이하가 감히 한 마디 말도 내지 못하였으니, 어찌 오로지 양사만을 나무랄 수 있겠습니까. 평일에 성상께서 유후와 노성의 사람됨을 알지 못하였단 말입니까. 언제 그들이 흔들리지 않고 무슨 일을 맡고 나서는 역량이 있었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와 같은 사람을 어찌 쓸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지원이 아뢰기를,
"양사의 장관은 다른 신하들과는 다른데 대우하기를 이와 같이 하니, 일의 체모를 손상할까 두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저들 무리로 하여금 먼저 말을 꺼내게 하려 하였는데, 저들이 또한 나의 이러한 의도를 알고 나의 계획에 넘어가지 않고자 하였다. 이래 가지고서도 오히려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 뒤에 어떤 사람이 노성에게 "그대가 어찌하여 그렇게 하였는가." 하고 물으니, "엄한 위엄 아래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굽히게 되었다." 하여, 듣는 사람들이 비웃었다. 익희는 드디어 당초의 논의를 변경하여 홀로 견책을 면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의 의논이 비난하였다.

 

12월 4일 갑인

상이 하교하기를,
"수리의 일이 비록 부득이한 데서 나왔으나 저들 백성을 부역시키는 것을 생각할 때 아픔이 내 몸에 있는 것같다. 이에 경덕궁(慶德宮) 안의 승휘전(承輝殿)·어조당(魚藻堂)·만상루(萬祥樓)를 철거하여 옮겨지으려 하니, 모름지기 배정하는 재목을 견감해주어 일분의 민폐나마 덜게 하라."
하였다. 허적이 옛 건물을 철거해서는 안 된다고 했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상이 하교하기를,
"채유후와 남노성은 마음씨가 모두 몹시 해괴하니, 그대로 중임에 둘 수 없다. 아울러 체차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어제 인견할 때 양사의 장관들을 한꺼번에 물리쳐서 경연 석상의 분위기가 몹시 좋지 못했습니다. 특별히 체직시키라는 분부가 이제 또 이어서 내리니, 어찌 대각을 예우하는 도리에 손상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날짜를 끄는 것은 겉치레에 관련되겠기에 이번 정사(政事)에서 대임자를 뽑으려는 것이었다. 아뢰는 내용이 이와 같으니, 하필 억지로 체직시킬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채유후가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니, 하교하기를,
"조정이 십분 우대하는 사람을 이제 와서 경솔히 체직할 수가 없으니, 직무를 보면서 사람들의 여망에 부응하게 하라."
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의 면수(沔水)·학명(鶴鳴)장 등을 강하였다.

 

영돈녕부사 김육(金堉)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예전에 우리 성종 대왕(成宗大王)이 창경궁(昌慶宮)을 수강궁(壽康宮)의 터에 세워 정희(貞熹)·인수(仁粹)·안순(安順) 세 대비(大妃)를 여기에 모시고, 명절이나 또는 나라에 큰 경사가 있는 때에는 문안한 뒤 이어서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뭇 신하들의 조회를 받았다 하니, 대개 창경궁은 대비를 위해서 세운 것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1백 60여 년이 되었습니다. 지난번 자전께서 체후가 편치 못하시므로 총부(摠府)로 옮겨 모셨는데, 실로 오래 거처하실 만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또 자전을 받들어 수정당(壽靜堂)에 옮겨 모셨는데, 신은 삼가 생각하기를 ‘성상의 마음은 가까운 곳에 모셔두고 아침 저녁으로 봉양하는 정성을 다하고자 하시는 것이니, 성상의 마음이 바로 성종 대왕의 마음이구나.’ 하였습니다. 이번에 삼가 듣건대, 경연 석상에서 ‘수정당이 산을 등지고 비좁아 궁색하기 때문에 흠경각(欽敬閣)의 터에다 따로 전을 지으려 한다.’고 하교하셨다 하니, 봉양을 극진히 하시는 전하의 정성은 지극하지 않은 바가 없습니다. 여러 신하들은 거룩한 덕을 받들어 따를 것이며 누가 감히 받들지 않겠습니까. 다만 어리석은 신하의 소견으로는 불편한 것이 한 가지, 불가한 것이 두 가지가 있는 점이 한스럽기에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진달합니다.
대개 제왕의 거처는 깊숙하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아홉 겹으로 안을 장엄하게 하고 빙 둘러 건물을 밖에 나열하는데, 더구나 후비(后妃)가 거처하는 곳이겠습니까. 흠경각 자리는 인정전 밖에 있는데, 산기슭에 노출되어 매우 깊숙하지 못하며, 금호(金虎)·요금(曜金) 두 문이 좌우에 있고 서영(西營)·북영(北營)이 그 밖에 있으므로 달리는 거마 소리가 시끄러워 새벽부터 저녁까지 소란합니다. 그리고 정전이 서쪽을 향하게 되어 바람이 몰아치는 가을과 겨울에는 반드시 배나 더 추울 것으로 누각을 겹으로 짓는다 하더라도 추위를 차단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전께서 편안히 계시기에는 반드시 수정당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불편하다는 한 가지입니다. 예로부터 태후가 거처하는 곳은 반드시 대내(大內)의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동조(東朝)라고 말하였습니다. 창경궁이 동쪽에 있는 것도 또한 이런 까닭입니다. 정전의 서쪽 구석으로 외부 가까운 자리에 옮겨 짓는 것은 굽어져 있는데다 또 멀며, 왼쪽을 숭상하는 예전의 예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 불가하다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흠경각은 바로 세조 대왕(世祖大王)이 세운 것입니다. ‘하늘을 공경히 따라 삼가 백성들에게 생활에 필요한 절기를 나누어 준다.[欽若昊天敬授人時]’는 것은, 요(堯)임금이 하늘을 본받아 도를 행해서 백성을 다스린 것입니다. 이 각을 세운 것은 실로 천고의 제왕들에게 없었던 아름다운 뜻입니다. 성인께서 제작을 지극히 정밀하게 하셨으니 만세에 전해가며 법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비록 다시 설치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어찌 아울러 그 각까지 철거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그 불가하다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이 흠경각은 본래 경복궁에 있었는데 현재 거처하시는 창덕궁에도 또한 있었습니다. 각각 두 곳에 건립하여 그 이름을 존속시켰고, 열성(列聖)들이 서로 계승하며 따라서 말미암는 옛 제도로 삼았는데, 지금 만일 이를 철거해 버린다면 후세에 무엇을 본받겠습니까. 공자는 초하루를 고(告)하는 데 올리는 희생양을 없애지 않고자 하였습니다.070)   예(禮)가 양에게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공자가 그 양을 보존하고자 한 것은 그 예를 아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이 성스럽고 신령스런 분이 처음으로 세운 옛 누각이겠습니까.
신의 미미한 정성은 단지, 자전께서 평소 계시던 곳에 편안히 계시고 성상께서 세종·성종 등 열성의 아름다운 뜻을 상실하지 않기를 원할 뿐입니다. 죽을 날이 가까워 노망이 들었으므로 저촉함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으니,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너그럽게 살피시고 다시 조정에 하문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그 차자를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회계하여 아뢰기를,
"이 차자의 내용을 보건대, 고례를 논거로 인용하여 뜻이 매우 올바릅니다. 대내의 동쪽에 만일 지을 만한 터가 있다면 이에 따라 시행하는 것이 실로 사의에 합당할 것이나, 동편에 공한지가 없다는 것에 대해 신들이 일찍이 탑전에서 친히 성상의 하교를 받았습니다. 흠경각에 대해서는 《여람(輿覽)》을 상고해 보니 경복궁 강녕전(康寧殿) 서쪽에 있었고, 창덕궁에는 나타나는 곳이 없습니다. 비록 조종조의 옛 터는 아니지만, 흠경으로써 이름하였으니 굳이 철거할 필요가 없이 양(羊)을 보존하는 뜻을 붙여야 합니다. 그러나 달리 옮겨 지을 만한 곳이 없으며, 정전을 이곳에 짓는 것은 실로 부득이한 데서 나온 바이니, 백 번 생각해 보아도 달리 변통할 길이 없습니다. 신들의 말은 형세를 논한 것이고, 차자 가운데의 논의는 고제(古制)를 따르려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비국의 말을 따랐다.

 

12월 5일 을묘

윤집(尹鏶)을 교리로, 이경휘(李慶徽)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대사간 남노성이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니, 하교하였다.
"도로 내주어 직무를 살피도록 하라."

 

12월 6일 병진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하교하기를,
"양사의 장관들을 아울러 패초하여 직무를 보게 하라."
하였는데, 대사간 남노성이 인피하기를,
"신의 괴로운 정세가 갈수록 점점 더한데, 이번에 소패가 또 내릴 줄은 뜻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고 있는 죄가 이미 커서 스스로 용납할 여지가 없으니, 신을 파직하소서."
하고, 대사헌 채유후가 인피하기를,
"신이 인피하자니 번거롭게 될까 두렵고 관례상으로는 태연히 있는 것이 마땅치 않습니다. 신은 이 두 가지 사이에서 계책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만, 지고 있는 죄가 이미 깊으니 도리상 그대로 있기가 곤란합니다. 신을 파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노성 등이 아울러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간원이 아뢰기를,
"남노성이 체직되었다가 다시 잉임되었으니, 형세상 직무를 보기가 어렵습니다. 체차하소서."
하고, 헌부가 아뢰기를,
"채유후는 의사를 충분히 말로 표현하지 못하여 누차에 걸쳐 엄한 교지를 받았고, 체직되었다가 도로 제수되었으니 낭패가 더욱 심합니다.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상이 하교하였다.
"채유후·남노성 등은 아울러 관안(官案)에 황첨(黃籤)을 붙여 군직(軍職)을 제수하지 말도록 하라."

 

12월 7일 정사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이일상(李一相)을 대사헌으로, 오정일(吳挺一)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12월 8일 무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12월 9일 기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12월 10일 경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목행선(睦行善)을 승지로, 김수항(金壽恒)을 이조 정랑으로, 이상경(李尙敬)을 남병사(南兵使)로 삼았다.

 

12월 11일 신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수리 도감 도제조 심지원, 제조 원두표·이완·허적이 대면을 청하니, 상이 불러 보았다. 지원 등이 나아와 아뢰기를,
"성상께서 민폐를 염려하시어 여러 전각(殿閣)의 목재와 기와를 뜯어다 이 공사에 옮겨 사용할 것을 특별히 명하셨으니, 신들은 성상의 뜻을 우러러 체득하여 백성을 지나치게 사역시키는 데까지 이르지 않게 하겠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승휘전(承輝殿)은 바로 세자의 정침(正寢)이니 지금 성급하게 뜯는다면 또한 매우 온당치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혼조(昏朝) 때 궁궐의 노역 때문에 백성들이 고생하고 원망하였다. 지금 이런 공사가 있는데, 지방의 백성들이 어떻게 대내(大內)의 형세를 알 수 있겠는가. 선박으로 크고 작은 나무들을 운반하고 인부들을 긁어모으는 것만을 보고서 갈수록 서로 떠들어 댈 것이며, 그들의 노고도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한밤중에 그것을 생각해 볼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두려워 옹송그려지게 된다. 그래서 이러한 졸렬한 계책을 낸 것인데, 지금 중지할 수는 없다."
하였다. 지원 등이 재삼 강력히 청하였으나, 상이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영돈녕부사 김육이 상소하기를,
"어제 신의 부중(府中)에 녹사(錄事)가 와서, 조정에서 천거하라는 분부가 있는데 기한이 오늘 아침까지라고 말하였습니다. 신은 늙고 병들어 은거해 있으니 무슨 문견이 있겠으며, 마음이 꽉 막혀 있으니 무슨 올바른 식견이 있겠습니까. 갑자기 와서 물으니 답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비록 그러나 묘당의 그릇과 간성의 재목은 진실로 쉽게 알 수 없는 것이지만, 낭료(郞寮)의 직임을 감당할 만한 자에 있어서는 신도 또한 사람들에게 들은 바가 없지 않습니다. 어찌 감히 입을 다물어, 위로는 숨은 인재를 발굴하시려는 성상의 뜻을 저버리고 아래로는 허울만 좋다는 기롱을 초래하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시험해 보고 싶었던 자로써 진달하게 하소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박수진(朴守眞)이라는 자가 있는데, 계책이 많고 능력이 있지만 과거에 급제하지 못해서 직위가 없으므로 재능을 가지고서도 펼치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신이 현재 전(錢)이 크게 통행되지 않기 때문에 우려하고 있는데, 이 사람을 군직(軍職)에 붙이고 복무를 허락하여 상평관전낭청(常平管錢郞廳)이라 칭하고 평시관(平市官)의 일을 겸직시켜 시민을 지휘하여 계책을 세워 전(錢)을 통행시키게 하소서. 그리하여 잘하면 상을 주고 못하면 벌주소서. 그러면 거의 돈을 통행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갓 나온 말단 관원으로 하여금 5년 동안 시행되지 못했던 일을 맡아서 이루게 한다는 것도 또한 곤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이 일찍이 호조 판서 허적과 예전에 정한 사목(事目)을 윤색하여 입계하자 우선 서서히 하라는 하교가 있어 드디어 중지되었는데, 신들은 지금까지 이를 의혹스럽게 생각합니다. 신이 노쇠하고 질병이 많아 생사가 조석 사이에 닥쳐 있는데 국가의 일에는 털끝만큼도 보탬이 없으니, 10년을 기한으로 삼으라는 하교를 눈을 감기 전에는 감히 잊을 수 없습니다. 다시 사목을 계하하시어 신과 호조 판서, 병조 판서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지우시고 박수진으로 하여금 시행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만일 현저한 효과가 있으면 달수를 계산해 특별 승진시키기를 비랑(備郞)의 예와 같이 하고, 효과가 없으면 신이 잘못 천거한 죄를 다스리시고 아울러 박수진까지 물리치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의 차자 내용이 여기에까지 이르니, 그 때의 사목 중에 편리하지 아니한 곳을 다시 개정하여 올리라. 박수진은 재주가 이와 같다면, 이에 따라 시험삼아 써보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였다. 그 차자를 상평청에 내리니, 상평청이 회계(回啓)하기를,
"도로 내리신 사목은 실로 불편한 곳이 많으므로 개정하여 올립니다. 박수진은, 사람들이 그의 재주를 많이 칭찬하기 때문에 신 김육이 진달하여 성상께서 윤허하는 비답을 내리셨으니, 군직에 붙여 능력을 시험해 보는 것이 불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평시관(平市官)의 일을 겸해서 보도록 하는 것은 명령권과 감독권을 부여하려는 의도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가설 참봉(加設參奉)을 제수하여 사은(謝恩)과 행공(行公)을 한결같이 실관(實官)과 같게 하고, 좋은 방책을 강구하여 전(錢)을 기필코 통행하도록 그 효과를 책임지우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12월 12일 임술

부제학 김익희가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니, 답하였다.
"경의 말로 인하여 민폐를 제거하게 되었으니, 상을 내릴지언정 죄줄 수는 없다. 사직하지 말라."

 

12월 13일 계해

전(錢)을 시행하는 법을 다시 정하였다. 처음에 전법(錢法)을 시행하려 했는데, 전이 적어 쓰기에 부족하여 양서(兩西) 연로의 제읍에만 겨우 시행했으나 거기도 또한 통행되지 않았으므로 상이 듣고 우선 서서히 할 것을 명하였다. 이때 영돈녕부사 김육이 청하기를,
"다시 법을 정하여 경기(京畿)의 작미(作米) 매 1결(一結) 8두에서 1두는 전으로 대신하되 곡물이 귀하면 2두를 전으로 대신하며, 점포를 기전(畿甸)과 양서(兩西)에 설치해서 가까운 데로부터 먼 곳에 미쳐 서울과 지방에 통행될 수 있도록 하소서. 그리고 호조·형조·한성부·장례원의 속포(贖布)는 전(錢)과 포(布)를 절반씩 하는 것을 허락하고 각사(各司) 공물가(貢物價)의 5분의 1과 각사의 고역(雇役), 호조·병조의 요포(料布)의 3분의 1은 다 전으로써 대신하도록 하소서. 또한 돈은 일정한 값이 없이 때에 따라 조절하는데 은(銀)을 기준으로 그 값을 정하되 은 한 냥(兩)을 전 6백 문(文)에 해당시키며, 미(米)와 포(布)는 은 값의 높고 낮음을 기준으로 하는데 쌀 1승(升)의 값은 전 4문에, 은 1냥의 값은 쌀 1섬에 해당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또 전을 훼손하는 것을 신칙하여 엄금하소서."
하고, 이어서 차자를 올려 박수진(朴守眞)을 천거하여 돈을 통행시키는 일을 위임할 것을 청하니, 상이 그대로 허락하였다.
이때 전을 훼손하는 것을 금하는 법이 비록 엄하였으나, 주장(鑄匠)의 무리가 전은 결코 시행되지 않는다고 하며 민간을 선동하여 염가로 전을 사들여 몰래 산속에 들어가 그릇들을 주조했다. 이로 말미암아 돈은 나날이 더욱 줄어들었으므로 상평청에 저축된 돈과 흩어져 밖에 있는 것을 통계해 보아야 수십만 관(貫)도 채 되지 않았다. 겨우 중인(中人) 열 가구의 자산쯤 되는 양을 가지고서 온 나라에 두루 시행하려 했기 때문에 시행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김육은 돈이 적어서 시행되기 어려운 것을 알지 못한 채 법이 정립되지 않아서라고 탓하여, 법을 다시 정하며 가혹하고 심하게 하니, 한 번씩 변경할 때마다 백성들은 번번이 손해를 보았다. 의논하는 자들이 다 그르다 하고 상께서도 또한 싫어하였으나, 김육은 견지하기를 오히려 굳건히 하였다.
박수진은 서울 사람이다. 본래 용렬하고 비루했으며, 가정이 몹시 가난하였다. 일찍이 한 가옥을 짓는데 계략으로써 초부(樵夫)·목동(牧童)을 모집하여 부역을 시켰다. 사람이 더러 그가 재능이 있다고 말하고, 수진이 또
"나를 등용하면 돈을 유통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김육이 그것을 듣고 조정에 천거하였던 것이다. 수진은 얼마 안 가서 질병이 발생하여 죽었다.

 

12월 15일 을축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월식(月食)이 있었다.

 

12월 17일 정묘

오정일(吳挺一)을 도승지로, 김좌명(金佐明)을 대사간으로, 채충원(蔡忠元)을 집의로, 안후열(安後說)을 정언으로, 민유중(閔維重)을 사서로 삼았다.

 

처음에 광주 부윤(廣州府尹) 심총(沈棇)이 관미(官米) 1천 8백 석을 남용했는데, 감사 조계원(趙啓遠)이 조사하여 보고하였다. 심총이 체포되어, 청나라 사신을 역참에서 대접하는 비용으로 썼다고 대답하는 한편 또 계원을 무함하였다. 상이 심총의 말을 곧이듣지 않고 금부에 조사할 것을 명하니, 금부가 그의 법을 지키지 아니한 상황을 조사해내어 아뢰자, 하교하였다.
"간교한 관원의 교활한 수단이 이와 같이 낭자하니, 엄하게 국문하여 밝히라."

 

12월 19일 기사

윤강(尹絳)을 형조 판서로, 심유행(沈儒行)을 교리로, 목겸선(睦兼善)을 수찬으로, 박증휘(朴增輝)를 사서로 삼았다.

 

형조 판서 이시방(李時昉)의 자급(資級) 3급을 박탈할 것과 참의 이익한(李翊漢)을 파직시킬 것을 명하였다.
이에 앞서 금성현(錦城縣)에 있는 경현 서원(景賢書院)에서 서원 유생들의 논의가 대립하여 서로 배격하였다. 전후 수령들이 각기 색목(色目)을 따라 시비를 논하여 풍습이 점차 나빠졌기 때문에 다스리기 어려운 곳으로 일컬어졌다. 마침 서원의 석전제(釋奠祭)를 지내게 되어 본주에서 진사 김종량(金宗亮)을 헌관(獻官)으로 차임하니, 유생 김유도(金有道) 등이 말하기를,
"김종량은 바로 혼조(昏朝) 때 여얼(餘孼)인 김우성(金佑成)의 조카이다. 우성이 일찍이 상소하여 모후(母后)를 폐위(廢位)시키기를 청하였으니, 그 조카로써 헌관을 삼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축출하였다. 목사 정기풍(鄭基豊)이 향교의 유생들로 하여금 유도 등에게 벌을 내리게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어떤 사람이 과거 시험장에서 익명으로 투서하여 목사를 모욕하기를 낭자하게 하였다. 기풍이 "이것은 필시 김유도(金有道)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하여 즉시 심문하여 다스리고 다시 감사에게 보고하였다. 감사가 보고하니, 상이 분당(分黨)의 풍조를 몹시 미워하여 김유도(金有道)·염진거(廉晋擧)·김종량(金宗亮) 및 김종량의 무리인 박홍훈(朴弘勳)을 서울의 옥에 잡아들여 수령을 함부로 모멸하고 헌관을 멋대로 내쫓은 죄를 신문하도록 명하였다. 박홍훈이 먼저 곤장을 맞고 쓰러져 죽었는데, 상이 박홍훈만 형을 편파적으로 혹독하게 받았는가 의심하여 형조의 세 당상을 불러 정원에 나오게 해서 꾸짖기를,
"박홍훈 등에게 엄형을 가하라는 하교가 있지도 않았는데, 두 차례의 형벌로 쓰러져 죽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였다. 형조가 아뢰기를,
"본조의 죄인 가운데는 누차에 걸쳐서 형을 받아도 죽지 않은 자가 있기도 합니다. 지금 홍훈은 또한 준례에 따라 형을 가한 것에 지나지 않는데, 재차의 신문으로 갑자기 쓰러져 죽었으니, 신들도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홍훈이 나이가 50이 넘은데다 오랫동안 차가운 감옥에 갇혀 있었으니, 이로 인해서 죽음을 초래했다면 형세상 혹 그럴 수 있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국가의 정치 중에 형옥(刑獄)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예로부터 반드시 공경히 하고 신중히 하였던 것이니, 진실로 인명에 관계된 때문이었다. 근래에 형관이 된 자들이 이런 뜻에 전연 어두워, 무겁게 해야 할 경우에는 가볍게 하고 가볍게 해야 할 경우에는 무겁게 하여 임의로 조절하면서 멋대로 위복(威福)을 지으니, 나는 백성들이 수족을 놀릴 수 없을까 두렵게 여긴다. 지난번에 해관(該官)을 무거운 형벌에 처하여 앞으로를 징계하였는데, 얼마 되지도 않아서 또 이런 형벌을 남용하는 일이 발생하였으니 어찌 매우 해괴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대로 방치하여 불문에 부침으로써 그 폐단을 자라나게 할 수 없다. 해조의 당상을 마땅히 무거운 법률로 논해야 할 것이나, 판서 이시방은 책임을 맡은 바가 자못 크니 우선 가벼운 조항을 적용하여 3급을 박탈하고, 참의 이익한(李翊漢)은 파직시키라."
하였다. 이때 상의 노여움이 오히려 가시지 않았는데, 그 다음날 김유도(金有道)가 또 쓰러져 죽으니, 상이 비로소 노기가 풀렸다. 혹자들은, 형조의 장형을 집행하는 자가 일찍이 정석(丁晳)이 형을 받았을 적에 형벌을 가벼이하였다는 이유로 죄를 얻어 죽었는데, 이로부터 형장이 배나 무거워지고, 홍훈 등이 쓰러져 죽게 된 것도 또한 이런 까닭이라 하였다.

 

12월 22일 임신

상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중외의 사형수들을 초복(初覆)하였다.

 

추쇄 도감(推刷都監)이 서필원(徐必遠)·민정중(閔鼎重)을 황해도 어사로, 권대운(權大運)·박세성을 평안도 어사로, 홍주삼(洪柱三)·이후(李垕)를 함경남·북도 어사로 삼을 것을 청하니, 하교하였다.
"평안도와 황해도의 어사를 서로 바꾸라."

 

12월 25일 을해

간원이 아뢰기를,
"조정에 인재가 부족한 것이 오늘날보다 심한 때가 있지 않았습니다. 특별 천거하는 일은 실로 묻혀 있는 숨은 인재를 발굴하려는 아름다운 의도이니,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는 마땅히 사사로운 뜻을 제거하고 힘써 공정함을 따라서 성상의 정성으로 어진이를 구하는 뜻에 부응해야 합니다. 그런데 천거된 사람들이 용렬함을 면치 못하여, 벼슬길이 막힌 유학(幼學) 아니면 으레 다 복직하기 어려운 전함(前銜)들입니다. 추천 단자(單子)가 올려지자마자 물의가 비등하니, 천주(薦主)를 가려 착실하게 천거하도록 한 뜻이 전혀 없습니다. 그 가운데 더욱 현저한 자를 가지고 말해보겠습니다.
예조 참의 심노(沈𢋡)가 추천한 사람은 여섯 명인데, 최계훈(崔繼勳)은 탐오로써 낭패를 당한 자이고, 박수현(朴守玄)은 본래 다스리지 못한다고 일컬어진 자이며, 이후로(李後老)·이여순(李汝淳)은 모두 용렬하여 명성이 없는 자입니다. 전 참의 이익한(李翊漢)이 추천한 서광리(徐匡履)·성창수(成昌秀) 등은 다 평범한 무리들인데, 이들을 재기(才器)라고 지목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무리들은 비록 전부(銓部)로부터 주의했다 하더라도 합당하지 못할 터인데, 더구나 특별히 추천하는 날에 있어 어찌 감히 공의를 두려워하지 않고 사심을 따라 함부로 천거할 수 있겠습니까.
듣는 대로 논죄하지 않을 수 없으니, 심로와 이익한을 파직시키고, 그들이 추천한 최계훈 등 여섯 사람은 아울러 빼내버리도록 하며, 그 나머지 합당하지 않은 자들은 해조로 하여금 살펴서 깨끗이 도태시키도록 하여 섞여 들어가는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12월 26일 병자

처음에 군자감(軍資監) 곡식이 축난 것이 절반도 넘었는데, 호조에 비록 문서가 있었지만 축난 것과 현재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를 실제로는 알지 못하였다.
허적(許積)이 판서가 되어, 한 창고의 곡식을 다 사용한 뒤에야 비로소 다른 창고의 곡식을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도록 하여, 축난 수량이 저절로 드러나게 하였다. 이에 봉사(奉事) 조한수(趙漢叟)와 판관(判官) 안응창(安應昌)이 관장한 두 창고의 축난 곡식이 2천 6백여 석이나 되었는데, 여러 해 동안 전해오던 나머지여서 누구의 짓인지 지적할 수 없었다. 색리(色吏)와 고자(庫子)들이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여 다 도망할 계획을 품자 허적이 경연 석상에서 아뢰어 색리와 고자의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니, 놓아주고 내년 봄에 가서 거두어들일 것을 특명하였다. 헌부가 관리를 조사해내어 그 죄를 바로잡을 것을 청하니, 허적이 정축년071)   이후의 관원 1백 16인과 창리(倉吏) 50인을 조사해내어 아뢰었는데,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하도록 명하였다.

 

12월 27일 정축

상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중외의 사형수를 삼복(三覆)하였다.

 

12월 28일 무인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전 대사헌 채유후(蔡𥙿後)는 군직(軍職)을 부여하지도 않았는데 여러 겸직이 종전과 같으니, 무슨 근거로 그런 것인가. 해조에 물어서 아뢰라."
하니, 이조가 회계하기를,
"모든 관직을 파직시키거나 체직시키면 으레 전지(傳旨)를 받은 연후에야 해조가 비로소 그 대임자를 차출하는데, 지금 채유후가 겸직한 것은 체직이나 파직된 종류가 아닙니다. 이 때문에 승전(承傳)을 받지 못하여 겸직의 대임자를 차출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것은 이른바 ‘가죽이 있어야 털도 난다.’는 것이다. 실직이 없는데 겸직은 있으니,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 알았다면 속히 그만두어야 한다."
하였다.

 

12월 29일 기묘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