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신미
비국이 아뢰기를,
"지금 박로(朴𥶇)의 말을 듣건대 ‘전에 심양(瀋陽)에 갔을 때 한(汗) 이하가 역서(曆書)를 많이 요구했기에 4, 5건(件)을 가지고 갔으면 한다.’ 하였습니다. 관상감으로 하여금 주어 보내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2일 임신
비국이 아뢰기를,
"박로가 또 본사(本司)에 품문(稟問)한 것이 있는데, 그 뜻이 모두 좋긴 하나 그 사이의 여러 곡절들에 대해서는 미리 헤아리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사신의 행차는 지극히 중요한 관계가 있기에, 그가 품문한 뜻과 지시해 준 말을 여기에 함께 서계(書啓)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지시해 준 내용 중 이른바 선처(善處)하라고 한 것은 말이 분명하지 않다. 국호(國號)에 관한 건(件)은 이성구(李聖求)의 차사(箚辭)에 의거하여 답하라. 저들의 문서 중에 쓴 참람한 칭호는 스스로 삭제할 리가 만무하니 대단하게 따질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저들이 이후의 문서에 제호(帝號)를 쓰지 않을 경우에는 받지 않겠다는 것으로 협박해 온다면, 우리도 비록 병화(兵禍)를 입게 되는 한이 있어도 절대 들어주지 못하겠다는 뜻으로 답하라. 대개 모든 일이란 구차하게 무사하기를 바라다 보면 도리어 술수에 빠지게 되는 수가 없지 않는 법이다. 따라서 들어 줄 만한 일은 굳이 따지지 말고, 들어 주어선 안 될 일은 즉시 분명하게 설파하여 구차하게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말라."
하였다.
12월 4일 갑술
박로가 심양(瀋陽)으로 가는 중인데도 양사의 논이 끊이지 않자, 정원이, 양사에게 유지(諭旨)를 내리도록 계청하였다. 그러나 양사는 분부를 받들지 않고 극력 돌아오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들어주지 않았다.
대사간 김반(金槃)이 아뢰기를,
"대론(臺論)이 정지되기도 전에 신사(信使)를 서둘러 출발시켰으니, 이는 묘당이 방약무인하게 대각을 대한 것인데, 성명(聖明) 역시 괴이하게 여기지 않으시니 이는 예전에 없었던 일이고, 정원이 계청한 일도 일찍이 들어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신이 어찌 공의(公議)를 돌아보지 않고 태연히 명을 받들 수 있겠습니까. 결코 자리에 그대로 있을 수 없으니, 신을 파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12월 6일 병자
교리 이시해(李時楷)와 부수찬 이상형(李尙馨)이 차자를 올리기를,
"오늘의 조정은 눈물을 흘리며 통곡할 정도라 하겠습니다. 정령(政令)이 법도를 잃고 시비가 분명하지 않아 두서도 없고 법도도 없게 된 채 답답하게도 난망(亂亡)으로만 치달리니, 말을 하자면 이야기가 길어질 것입니다.
시험삼아 근래에 시행한 조치를 들어 말하건대, 얼마 전 날카로운 의지로 화친을 끊었던 것은 어째서이며, 지금 급급히 화친을 청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국가를 정처없이 떠다니는 부평초처럼 보아 바람부는 대로 내맡겨 동으로 서로 떠다니게 버려 두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고 우리 임금과 우리 재상에게 백성을 구하려는 뜻과 고난을 극복하려는 마음이 정말 있었다면, 이처럼 전도되어 형편없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전(戰)·수(守)·화(和) 세 글자는 예로부터 있어 왔습니다. 그것의 이해와 화복은 책에 분명히 적혀 있으니 지금 일일이 들어 말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그러나 잘 싸우고 잘 지키는 것이 상책이고 화친을 잘 하는 것은 그 아래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싸움과 지킴을 어떻게 할 수조차 없는 지경에 방치해 두고 화친마저도 잘 하지 못하고 있으니, 계책과 능력이 다하였다 하겠습니다. 예로부터 오랑캐와 우호를 맺었던 것은 백년을 무사히 보전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잠시 임시방편의 계략을 써서 눈앞의 위급함을 완화하여 자강지책(自强之策)을 마련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정묘년에 화친을 맺은 지 10년이 되었는데도, 성지(城池)와 기계는 어느 것 하나 믿을 만한 것이 없고, 군정(軍情)과 민심은 날로 흙더미가 무너지듯 와해되고 있습니다. 지금 다시 화친을 하더라도 이런 상태대로라면 수십 년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자강지책은 마련하지 못한 채 상황이 점점 과거보다 더 못해질 것이니, 이는 지혜로운 자가 아니라도 환히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더구나 교활한 오랑캐가 변사(變詐)하여 대호(大號)를 참칭했으니, 장래에 반드시 따라주기 어려운 치욕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편안히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아니면 다시 거절하여 배척하시겠습니까? 묘당이 어떤 대책을 세워 두었는지 모르겠지만, 요즈음의 시책을 보면 별다른 대책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 지금 화친론자는 모두 대각이 사체를 모르고 대계(大計)에 너무 어둡다고 말들 하지만, 어찌 재상은 다 지혜로운 자이고 대각은 다 나랏일을 망각한 무리이겠습니까. 아니면, 묘당의 고매한 대책은 범인이 알 수 없는 수준의 것인지도 감히 모르겠습니다. 이에 대해 쟁론하는 자들은 말하기를 ‘이렇게 하면 대의를 펼 수 있고 국맥(國脉)을 붙잡을 수 있다. 폐백과 견마(犬馬)는 우리의 성지(城池)와 기계를 보충할 수 있고, 의성(義聲)과 공의(公議)는 우리의 민심과 사기를 진작시킬 수 있다. 무너지고 쇠약해진 채 오로지 고식(姑息)만을 힘쓰면서 우리의 폐백과 견마를 고갈시키고 우리의 민심과 사기를 떨어뜨리고도 훗날 차마 말하기 어려운 모욕을 받게 될 것과 비교할 때 어떤 쪽이 낫겠는가.’ 합니다.
잠시 청(淸)이라고 부르지 말자느니, 별사(別使)니 신사(信使)니 하는 말에 이르면, 더욱 웃음이 나오고 한편으로 탄식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일단 청국으로 부르기로 한다면 이는 그 참람된 칭호를 높여주고 인정하는 것인데, 내년까지 기다렸다가 그렇게 부른다면 조사모삼(朝四暮三)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신들은 생각하건대, 부득이 화친을 하더라도 절대로 청이라고 불러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리고 화친을 하고 나면 사신을 보내는 것은 매일반인데, 신사니 별사니 하는 호칭을 가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별사는 보내도 되지만 신사는 보내면 안 된다는 말은, 싸움터에서 오십 보 도망간 자가 백 보 도망간 자를 비웃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편파적인 말과 책임을 회피하는 말이 대부분 이와 같으니, 주화론(主和論)의 입장을 분명히 하여 궤변을 늘어놓지 않는 자보다도 도리어 못합니다.
또 생각하건대, 지금의 화의가 국가를 위한 대계로서, 화친이 아니고서는 나라를 보전할 수 없고 화친 외에는 다시 다른 방도가 없다면, 마땅히 말하는 자들을 물리쳐 정사에 참여시키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묘당의 주화(主和)와 대각의 쟁집(爭執)은 흑백이나 감고(甘苦)처럼 상반되는데, 흑백이 혼합되고 감고가 섞인 채 맛을 고르게 하고 색을 균일하게 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대각의 논의가 그치기도 전에 서둘러 사신을 보낸 일은 실로 전고에 없었던 일입니다. 국가에 대간을 설치한 의의는 매우 큽니다. 위로 인주(人主)의 잘못으로부터 아래로 백성의 이해와 조정의 시정(時政)과 군국(軍國)의 중대한 일에 이르기까지 규정(糾正)하고 쟁집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직책이 높다고 그 말을 중시하지 않고 직책이 낮다고 그 논의를 경시하지 않으며, 명이 내려져도 대간이 논하면 행할 수 없고 분부가 있어도 곧장 시행할 수 없으니, 그 존중하는 뜻을 대체로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대의(臺議)가 한창 펴질 때에 사개(使介)를 먼저 출발시켰는데도 성명께서 이상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묘당도 어렵게 여기지 않으니, 이는 대간을 무시한 것입니다. 대간이 없으면 언로(言路)가 없는 것이고, 언로가 없으면 조정이 없는 것입니다. 조정이 없이 나라가 제구실을 한다는 것을 신들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신들은 생각하건대, 대간이 중시되면 언로가 열리고, 언로가 열리면 조정이 존중되고, 조정이 존중되면 기강이 설 것입니다. 지금 조정이 존중되지 않고 기강이 서지 않는 것은 모두 언로가 막혀서 그런 것이 아닙니까. 근년 이래로 대간이 한 마디 말 한 가지 일로라도 제직책을 수행했다는 것을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 대간을 경시하시니 재상이 대간을 경시하게 되고, 재상이 대간을 경시하니 사대부가 대간을 경시하게 되고, 사대부가 대간을 경시하니 이서(吏胥)나 하인들까지도 대간을 경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항 사이에 대간은 한낱 필요치 않은 관원이라는 말까지 생기게끔 되었습니다. 이미 말한 대로 시행시키지 못하고 또 사람에게 중시되지 못하고 보면, 필요치 않은 관원이라 부른다 하더라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이미 필요치 않은 관원이 된 이상에는 대간을 둘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어찌 반드시 명기(名器)의 이름을 빌려서 외관을 보기좋게 꾸미기 위한 도구로 삼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언로가 끊어지려 함을 생각하시고 대간의 체면을 중하게 여기시어, 신사의 행차를 사람을 보내 정지시키시고 서서히 대의(臺議)가 완결되기를 기다리소서. 그러면 더할 수 없는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에 진달한 일은 사기(事機)를 놓칠 수 없는 것이어서 형세상 서서히 기다리기가 어렵다."
하였다.
12월 7일 정축
유성이 헌원성(軒轅星) 위에서 나와 천봉성(天棓星) 아래로 들어갔다.
12월 9일 기묘
새벽에 왕세자가 인열 왕비(仁烈王妃)의 소상제(小祥祭)를 숙녕전(肅寧殿)에서 행하였는데, 백관이 돈화문(敦化門) 내정(內庭)에 동서로 나뉘어 서열대로 섰다. 처음에는 왕세자가 최복(衰服) 차림으로 들어가 자리에 나아가 곡하고 사배(四拜)한 뒤 천담복(淺淡服)으로 갈아 입었으며, 승정원·예문관·홍문관의 입직 관원과 궐내의 입직 관원은 명정전(明政殿) 뜰로 가서 최복 차림으로 사배례를 행하고 또 천담복 차림으로 사배례만 행하고 곡읍하는 절차는 없었는데, 압존(壓尊) 때문이었다.
12월 10일 경진
전 대사헌 김덕함(金德諴)이 죽었다. 덕함은 배천(白川) 사람으로 강직하고 청렴했으며 지조가 있었다. 광해조에 적신(賊臣)이 대비(大妃)를 폐할 음모를 꾸며 백관을 협박하여 헌의(獻議)하게 했을 때에 덕함은 홀로 항언(抗言)하며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 상신(相臣) 이항복(李恒福)과 동시에 귀양을 갔는데, 처음엔 북도(北道)024) 로 유배되었다가 후에 남예(南裔)025) 로 옮겨졌으며, 반정 초에 집의로 소환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조정이 청백리(淸白吏)를 뽑았는데, 덕함이 거기에 들어서 예(例)대로 일자(一資)를 받고 대사헌이 되었다가 죽었다.
12월 11일 신사
상이 세찬(歲饌)과 옷감을 경외(京外)의 연로한 재신에게 나누어 주라고 명하였다.
12월 12일 임오
문신 중시(文臣重試)를 시행하였다. 교검 신희계(辛喜季)가 서얼로서 장원을 차지하였는데, 이는 국조(國朝) 이래 없었던 일이다.
12월 13일 계미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의 치계에 적병이 이미 안주(安州)까지 이르렀다고 하였다. 상이 삼공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적이 이미 깊이 들어왔으니 어찌해야 하겠는가?"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사태가 이미 급박하게 되었으니 속히 징병을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또 송경(松京)의 병사 1천 6백 명을 원수에게 넘겨주어 그로 하여금 조용(調用)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
하자, 상이 이에 동의하였다. 김류가 기보(畿輔)의 군사를 소집하여 어가(御駕)를 호위하게 해서 강도(江都)로 들어갈 것을 청하였는데, 상은 적이 반드시 깊이 들어오지는 않을 것이니 잠시 정확한 보고를 기다려 보자고 하였다. 그러나 김류가 굳이 청하자 마침내 허락하였다. 대신과 대간이 세자의 분조(分朝)를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김류가 유도 대장(留都大將)을 선출할 것을 청하자, 상이 이르기를,
"누가 적당한가?"
하니, 최명길(崔鳴吉)이 아뢰기를,
"심기원(沈器遠)이 현재 상중에 있는데, 기복(起復)시켜 등용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조정의 신하 중 늙고 병든 자를 먼저 강도로 가게 할 것을 명하고, 이어 죄수를 소방(疏放)할 것과 파산된 문무관을 서용할 것을 명하였다.
12월 14일 갑신
개성 유수(開城留守)가 치계하여 적병이 이미 송도(松都)를 지났다고 알려오자, 마침내 파천(播遷)하는 의논을 정하였다. 예방 승지 한흥일(韓興一)에게 명하여 종묘 사직의 신주(神主)와 빈궁을 받들고 먼저 강도(江都)로 향하게 하였다.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로, 이민구(李敏求)를 부검찰사로 삼아 빈궁의 행차를 배행(陪行)하며 호위하게 하였다.
심기원(沈器遠)을 기복시켜 유도 대장(留都大將)으로 삼았다.
저물 무렵에 대가(大駕)가 출발하려 할 때 태복인(太僕人)이 다 흩어졌는데, 내승(內乘) 이성남(李星男)이 어마(御馬)를 끌고 왔다. 대가가 숭례문(崇禮門)에 도착했을 때 적이 이미 양철평(良鐵坪)까지 왔다는 소식을 접했으므로, 상이 남대문 루(樓)에 올라가 신경진(申景禛)에게 문 밖에 진을 치도록 명하였다. 최명길(崔鳴吉)이 노진(虜陣)으로 가서 변동하는 사태를 살피겠다고 청하니, 드디어 명길을 보내어 오랑캐에게 강화를 청하면서 그들의 진격을 늦추게 하도록 하였다.
상이 돌아와 수구문(水溝門)을 통해 남한 산성(南漢山城)으로 향했다. 이때 변란이 창졸 간에 일어났으므로 시신(侍臣) 중에는 간혹 도보로 따르는 자도 있었으며, 성 안 백성은 부자·형제·부부가 서로 흩어져 그들의 통곡소리가 하늘을 뒤흔들었다. 초경이 지나서 대가가 남한 산성에 도착하였다. 김류가 상에게 강도(江都)로 옮겨 피할 것을 권하였는데, 홍서봉(洪瑞鳳)과 이성구(李聖求)도 그 말에 찬동하였으며, 이홍주(李弘胄)는 형세로 보아 반드시 낭패하게 될 것이니 요행을 바라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모두 이런 의논이 있는 것을 모르고 있었는데, 병방 승지 이경증(李景曾)이 집의 채유후(蔡𥙿後)에게 이 일을 은밀히 말하였다. 유후가 드디어 청대(請對)하여 불가하다고 쟁집(爭執)하므로, 경증이 김류를 불러 물어볼 것을 청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고립된 성에 계시면 외부의 구원도 없게 되고 마초와 양식도 부족할 것입니다. 강도는 우리에게 편리하고 저들에게는 침범하기 어려운 곳입니다. 또 저 적은 뜻이 상국(上國)에 있으니, 반드시 우리를 상대로 지구전(持久戰)을 벌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이 강도로 가시는 것이 편리하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어 김류의 귀에 대고 하문하기를,
"어느 길로 가야 하는가?"
하자, 아뢰기를,
"과천(果川)과 금천(衿川)을 경유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도는 이 곳에서 무척 먼데 어떻게 도착할 수 있겠는가?"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경기(輕騎)로 금천과 과천의 들을 가로질러 가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삼사가 모두 간쟁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어가를 옮길 계획을 정하니, 하룻밤 사이에 성 안이 온통 들끓었다.
12월 15일 을유
대가가 새벽에 산성을 출발하여 강도로 향하려 하였다. 이때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쳐서 산길이 얼어붙어 미끄러워 말이 발을 디디지 못하였으므로, 상이 말에서 내려 걸었다.026) 그러나 끝내 도착할 수 없을 것을 헤아리고는 마침내 성으로 되돌아 왔다. 양사가 아뢰기를,
"장수를 명하여 군사를 출동시킨 것은 오로지 변방을 굳게 지키고 적을 방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적병이 강을 건넌 뒤로 어느 한 곳도 막아내지 못한 채 적을 깊이 들어오도록 버려둠으로써 종묘 사직이 파월(播越)하고 거가가 창황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국가의 큰 변란이요, 신민의 지극한 고통이니, 어찌해야 한단 말입니까. 도원수 김자점(金自點), 부원수 신경원(申景瑗), 평안 병사(平安兵使) 유림(柳琳), 의주 부윤(義州府尹) 임경업(林慶業)을 모두 율(律)대로 정죄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최명길이 적진에서 돌아와 강화에 대한 일을 계달하면서 적이 왕제(王弟) 및 대신을 인질로 삼기를 요구한다고 하였다. 이에 능봉수(綾峯守) 칭(偁)을 왕의 아우라 칭하고 판서 심집(沈諿)을 대신의 직함으로 가칭(假稱)하여 보낼 것을 의논하였다.
수어사(守禦使) 이시백(李時白)이 나아가 아뢰기를,
"장사(將士)를 뜰에다 불러 모아놓고 한 번 교유(敎諭)하시면 군정(軍情)이 반드시 다 감동할 것입니다."
하고, 사관 김홍욱(金弘郁)·이지항(李之恒)·유철(兪㯙),설서 유계(兪棨), 주서 이도장(李道長) 등이 나아가 아뢰기를,
"적이 성 아래까지 압박해 왔으므로 군정(羣情)이 흉흉하니, 일이 경각에 달려 있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김류 등은 가족이 이미 강도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사세를 헤아리지 않고 굳이 대가를 옮기기를 청하고 있습니다만 혹시라도 망극한 변이 생기면 어떻게 대처하겠습니까. 군병들은 대가가 장차 떠날 것이라고 생각하여 궐 아래에 모여 기다리고만 있으면서 아직도 성을 나눠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상께서 전문(殿門)에 나가시어 체찰사 이하 모든 장수를 불러서 갑주(甲胄)를 갖추고 군령을 듣게 함으로써 수성(守城)하는 뜻을 굳게 정하소서."
하니, 상이 이에 깨닫고서 이르기를,
"그대들의 말이 옳다."
하고, 곧 이경증(李景曾)으로 하여금 체찰사 이하를 불러오게 하고 유시하기를,
"경들은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으니 마음과 힘을 다하라. 만약 명에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군율로 처치하겠다."
하였다.
호차(胡差)가 성 아래에 도착했다. 최명길도 노영(虜營)에서 와서 아뢰기를,
"그들의 말과 기색을 살펴보니 세 가지 조건으로 강화를 정하는 외에는 다른 마음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필시 속은 것이다. 어찌 세 가지 조건 때문에 이렇게까지 했겠는가."
하였다. 대신이 청대(請對)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사세가 점점 급박해지니 장차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고, 이성구(李聖求)가 아뢰기를,
"여러 신하들은 모두 놔두고 대장 십여 명만 거느리고 강도로 달려가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사대부 및 종족(宗族)과 함께 이 성에 들어왔으니, 가령 위험을 벗어나 나 혼자 살아난다 한들 무슨 면목으로 다시 군하(群下)를 보겠는가."
하자, 성구가 아뢰기를,
"그렇다면 세자를 수십 기(騎)로 호위하게 하여 강도로 들어가게 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하였다. 이때 세자가 상의 곁에 있다가 울음을 터뜨리자 상이 달래었는데, 신하들도 모두 눈물을 흘리며 감히 우러러 쳐다보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김류와 성구가 여러 차례 강도로 어가를 옮길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끝내 듣지 않았다.
최명길·윤휘(尹暉)·한여직(韓汝溭)이 다시 노영(虜營)으로 갔다.
눈이 크게 왔다. 유성이 진성(軫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경기 감사 서경우(徐景雨)가 미처 산성에 들어오지 못했기에 드디어 파직하고 이명(李溟)을 후임자로 삼았다.
12월 16일 병술
상이 남한 산성에 있었다.
상이 체부(體府)에 하교하였다.
"각 고을 수령으로서 병사를 거느리고 온 자는 모두 기록해 두어 훗날 상벌의 자료로 삼도록 하라."
헌부가 아뢰기를,
"사태가 전과 매우 다르게 진전되었으니, 도원수·부원수의 죄를 특별히 용서하고 급히 진군하여 공을 세움으로써 죄를 씻으라고 유시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능봉군(綾峯君) 칭(偁)과 심집(沈諿)이 노영(虜營)으로 가서 강화를 의논하였다. 오랑캐가 묻기를,
"그대 나라는 지난 정묘년에도 가짜 왕자로 우리를 속였는데, 이 사람은 진짜 왕제(王弟)인가?"
하니, 심집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또 묻기를,
"그대는 진짜 대신인가?"
하니, 심집이 또 대답하지 못하였다. 오랑캐가 마침내 박난영(朴蘭英)에게 묻자 난영이 칭(偁)은 진짜 왕제이고 심집은 진짜 대신이라고 답하니, 오랑캐가 크게 노하여 난영을 죽였다. 인하여 말하기를,
"세자를 보내온 뒤에야 강화를 의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전후의 죄인으로 안치된 자 및 멀리 귀양간 자는 모두 일등(一等)을 체감(遞減)하여 평산(平山)에 정배하고 유생도 모두 풀어주라."
상이 성첩(城堞)을 순시하고 사졸을 위로하였다.
원두표(元斗杓)를 어영 부사(御營副使)로 삼았는데, 대장 이서(李曙)의 병이 심하기 때문이었다.
납서(蠟書)027) 로 제도(諸道)의 군사를 부르고, 또 도원수와 부원수에게 진군하여 들어와 구원하게 하였다.
유성이 진성(軫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12월 17일 정해
상이 남한 산성에 있었다.
상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상이 울며 이르기를,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내가 비록 재덕(才德)은 변변찮으나 본래의 뜻은 잘 해보려고 하였는데, 오늘의 일이 끝내 이 지경에 이르렀다. 내 한몸 죽는 것이야 애석할 것이 없지만, 부형 백관과 성에 가득한 군민(軍民)이 나 때문에 모두 죽게 되었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처럼 망극한 일이 또 있겠는가."
하니, 김류·이성구 등이 울면서 아뢰기를,
"전하께서 임어(臨御)한 14년 동안 전혀 실덕(失德)한 일이 없으셨으니 결코 망국(亡國)의 군주는 아니십니다. 어제 만약 강도로 향하셨더라면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인데, 옥체가 불편하시어 나가셨다가 돌아오시고 말았으니,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가 어찌 병 때문에 돌아왔겠는가. 다시 생각해 보니, 적병이 이미 육박했는데 요격이라도 받게 되면 예측 못할 모욕을 면하기 어려울 것 같기에 돌아온 것이다."
하였다. 김류 등이 아뢰기를,
"일이 급하게 되었으니, 훈구(勳舊) 십여 명을 데리고 미복 차림으로 동문을 나가 곧장 충원(忠原)으로 향하거나 영남이나 호남으로 가시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게 무슨 말인가. 나를 따라 성에 들어온 자는 모두 종족(宗族)이요 백관인데, 어찌 차마 그들을 사지(死地)에 버려두고 나 혼자만 탈출하여 달아난단 말인가. 설사 요행히 살아난다 한들 어떻게 천지에 얼굴을 들 수 있겠는가."
하였다. 김류와 홍서봉이 아뢰기를,
"일이 급하게 되었으니 강화를 요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 적은 이미 승세를 얻었고 우리의 원병이 올 것도 기필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형세로 보면 반드시 정묘년보다 몇 배나 더 굴복하고 들어가야만 허락을 받을 수 있을 것인데, 앞으로 어떤 계책을 써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한참 뒤에 이르기를,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어찌 다른 일을 계획하겠는가. 이것은 해서는 안 될 말이지만 사태가 매우 급박하게 되었으니, 오직 운명에 맡겨야 할 것이다."
하였다. 모두 아뢰기를,
"이런 지경까지 와서 어느 겨를에 명분을 다투겠습니까. 신들이 가서 만나볼 때에도 재배례(再拜禮)를 행하여 중국을 대접하는 예로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울며 이르기를,
"삼백 년 동안 온갖 정성을 다해 중국을 섬겼고 받은 은혜도 매우 많은데, 하루 아침에 원수인 오랑캐의 신첩(臣妾)이 되려 하니 어찌 애통하지 않겠는가. 윤기(倫紀)가 사라진 때를 당하여, 다행히 당시 절개를 지키던 제현(諸賢)과 함께 반정(反正)의 거사를 일으켜 임금의 자리에 있으면서 임금의 일을 행한 지 벌써 14년인데, 끝내 견양(犬羊)과 금수와 같은 결과가 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러나 경들에게야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내가 변변찮고 형편없어 오늘과 같은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이다. 경들이여 경들이여, 어찌할 것인가, 어찌할 것인가."
하자, 신하들이 모두 울며 아뢰기를,
"이것은 모두 신들이 형편없어 빚어진 결과입니다. 전하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울면서 이르기를,
"연소한 자가 사려가 얕고 논의가 너무 과격하여 끝내 이같은 화란을 부른 것이다. 당시에 만약 저들의 사자를 박절하게 배척하지 않았더라면 설사 화란이 생겼다고 하더라도 그 형세가 이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니, 모두 아뢰기를,
"연소하고 생각이 얕은 자가 일을 그르쳐서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울면서 이르기를,
"그 논의가 실로 정론(正論)이었기에 나 역시 거절하지 못하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실로 시운(時運)에 관계된 것인데 어찌 남을 탓할 수 있겠는가."
하고, 인하여 서봉에게 이르기를,
"영상은 지금 병사(兵事)를 주관하고 있으니, 경이 이경직(李景稷)과 함께 나가서 그들을 만나보도록 하라."
하니, 대답하기를,
"만약 저 적이 반드시 친왕자를 보고자 하면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먼저 전날의 과실을 사과함이 마땅하다. 또 대군(大君)이 강도에 가 있는데, 앞으로 뒤따라 보내겠다는 뜻으로 잘 말하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동궁을 청한다 한들 어찌 감히 거절을 하겠는가. 다만 나의 생각으로는 강화를 성사시키는 것도 기필할 수 없을 듯하다."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저들이 이미 고군(孤軍)으로 깊이 들어왔으니, 바라는 것은 단지 이 점뿐일텐데 어찌 허락하지 않을 까닭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때 세자가 상의 곁에 있다가 오열을 참지 못하여 문밖으로 나가 사관의 곁에 앉았다. 이에 드디어 홍서봉과 김신국(金藎國)을 노영에 보냈는데, 서봉이 노장(虜將)을 만나 재배를 하였다.
상이 대신을 인견하였다. 김류가 나아가 아뢰기를,
"상께서 이토록 걱정하고 수고하시니 옥체가 손상될까 매우 걱정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결은 못할망정 어찌 먹고 마시면서 살기를 구할 마음이 있겠는가. 설혹 살아 있다 한들 훗날 무슨 면목으로 중국 조정의 사람을 볼 것이며, 무슨 면목으로 선왕의 묘정(廟庭)에 절을 하겠는가."
하자, 신하들이 모두 울먹이며 대답하지 못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 적이 대부분 판교(板橋)로 향하고 있다 하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필시 삼남(三南)의 길을 끊으려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단 말인가. 다른 부마(駙馬)는 모두 오지 않았는데 경이 홀로 이곳에 와서 어려움을 함께 하고 있으니, 내가 늘 잊지 않고 있다."
하였다.
예조 판서 김상헌(金尙憲)이 청대(請對)하여 화의(和議)의 부당함을 극언하니, 상이 용모를 바르게 하였다.
김류(金瑬)·홍서봉(洪瑞鳳)·김신국·장유(張維)·최명길(崔鳴吉)·이성구(李聖求)·이경직(李景稷)·홍방(洪霶)·윤휘(尹暉)가 청대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적이 또 군대를 증강시켰는데, 그 수가 매우 많습니다. 한 조각 고립된 성의 형세가 이미 위급하게 되었으니 어떤 계책을 써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에게도 반드시 의견이 있을 것이니 전부 말하도록 하라."
하였다. 장유가 아뢰기를,
"신들이 계달하고 싶어도 차마 입을 열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눈물을 흘리니, 상이 이르기를,
"세자를 인질로 삼고자 하는데 감히 말을 못하는 것인가?"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인질을 교환하는 일은 예로부터 있어 왔습니다. 세자를 노영(虜營)에 가게 하더라도 핍박하여 심양(瀋陽)으로 데려가기까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날에도 인질을 교환한 일이 있었으나 이번의 경우는 인질이 아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뜻이 이와 같으니 내가 보내겠다. 세 대신이 수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양사와 강원(講院)의 신하들이 나아가 아뢰기를,
"비국의 신하들이 세자를 기화(奇貨)로 삼아 노영(虜營)에 들여 보내려 하니, 이는 실로 나라를 망치는 말입니다. 그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종묘 사직과 백성을 위한 계책이다."
하였다. 동양위 신익성도 청대하여 아뢰기를,
"전하를 위해 이 계책을 세운 자가 누구입니까? 전하께서는 유독 송조(宋朝)의 일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흠종(欽宗)이 잡혀가자 휘종(徽宗)이 뒤이어 포로가 되었습니다.028)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사리를 살피지 않으십니까. 지금 군부(君父)를 잡아 적로(賊虜)에게 보내려는 대신과 함께 국사를 도모하고 있으니, 망하는 것 외에 무엇을 기다리겠습니까. 신은 15세에 선조(先朝)의 부마가 된 뒤로 큰 은혜를 받았는데, 세자를 잡아 적로에게 보내는 일을 차마 가만히 보고 있겠습니까. 신은 마땅히 차고 있는 칼을 뽑아 이러한 의논을 꺼낸 자의 머리를 베고 세자의 말 머리를 붙잡고 그 앞에서 머리를 부수고 죽겠으니, 삼가 원하건대 괴이하게 여기지 마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묘당의 말이 그런 정도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경이 필시 잘못 들은 것이다."
하였다.
12월 18일 무자
상이 남한 산성에 있었다.
김상헌(金尙憲)·장유(張維)·윤휘(尹暉)를 비국 당상으로 삼았다.
상이 하교하였다.
"선전관 민진익(閔震益)은 포위를 뚫고 나가 명을 전하였으니 6품의 실직(實職)을 제수하라. 선전관 이찬조(李纘祖)는 적에게 해를 당했으니 추증(追贈)하고 그 아들에게 관직을 제수하라."
상이 행궁의 남문에 거둥하여 백관을 교유(敎諭)하였다. 전 참봉 심광수(沈光洙)가 땅에 엎드려, 한 사람을 목베어 화의를 끊고 백성들에게 사과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하문하기를,
"그 한 사람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최명길입니다."
하자, 상이 유시하기를,
"너의 뜻은 내가 이미 알고 있다."
하였다. 이때 최명길이 반열(班列)에 있다가 그 말을 듣고는 바로 자리를 피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내가 덕이 없어 이 같은 비운(否運)을 만나 노로(奴虜)가 침략하였다. 정묘년에 변란이 생겼을 때에 임시방편으로 강화를 허락하여 치욕을 달게 받아들였으나 이는 부득이한 계책으로서 마음은 역시 편치 않았다. 이번에 오랑캐가 대호(大號)를 참칭하고 우리 나라를 업신여기므로 내가 천하의 대의를 위해 그들의 사자(使者)를 단호히 배척하였으니, 이것이 화란이 발생하게 된 원인이다.
지금 군신 상하가 함께 한 성을 지키고 있는데, 화의는 이미 끊어졌으니 싸움만이 있을 뿐이다. 싸워서 이기면 상하가 함께 살고 지면 함께 죽을 것이니, 오직 죽음 가운데에서 삶을 구하고 위험에 처함으로써 안녕을 구하여야 할 것이다. 마음과 힘을 합하여 떨치고 일어나 적을 상대한다면 깊이 들어온 오랑캐의 고군(孤軍)은 아무리 강해도 쉽게 약화될 것이고, 사방의 원병이 계속하여 올 것이니 하늘이 우리를 도와준다면 전승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아, 같은 근심이 있는 사람이 서로 도와주고 같은 병을 잃는 사람이 서로 돌보아 주는 것은 이웃끼리도 그런 법인데, 더구나 부자와 같은 군신이며 한 성을 함께 지키며 생사를 같이 하는 사람이겠는가. 나는 그대들이 이 혹한 속에서 어려움을 함께 하며 허술한 옷과 보잘것 없는 음식으로 추위에 몸을 드러낸 채 성을 지키고 있음을 생각하고, 눈길이 닿을 때마다 마음이 아파 온 몸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낀다. 오직 바라건대 그대들은 각자 충의심을 분발하고 함께 맹세하여 기어코 이 오랑캐를 물리쳐 함께 큰 복을 도모하라. 그러면 훗날 작상(爵賞)을 어찌 조금이라도 아끼겠는가."
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장사(將士)가 이 엄동 설한에 밤낮으로 성을 지키고 있으니 가상하기 그지없다. 참획(斬獲)한 공이 없더라도 내가 매우 기쁘니, 적을 이긴 후에는 논공 행상 하겠다. 중군(中軍) 이하로 아직 6품이 안 된 자는 우선 6품 실직에 올려 제수하고, 5품 이상은 순서대로 실직에 승진시키고, 당상과 가선(嘉善)은 실직을 제수하고, 군졸은 10년을 기한으로 1결(結)을 복호(復戶)하라."
내주방(內酒房)의 은그릇을 해조에 보내 상격(賞格)에 쓰게 하라고 명하였다.
12월 19일 기축
상이 남한 산성에 있었다.
상이 성을 순시하였는데, 북문에서 북쪽 곡성(曲城)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상이 하교하였다.
"성내의 거주민은 5년을 기한으로 1결을 면세하고 복호하라. 두드러지게 수고한 자는, 천인은 면천하고 양인은 별도로 논상하라."
납서(蠟書)로 강도 유수(江都留守) 장신(張紳), 검찰사 김경징(金慶徵), 부검찰사 이민구(李敏求)에게 유시하였다.
"적병이 남한 산성을 포위한 지 벌써 엿새째 되었다. 군신 상하가 고립된 성에 의지하며 위태롭기가 한 가닥 머리카락과 같은데, 외부의 원병은 이르지 않고 통유(通諭)할 길도 끊어졌다. 경들은 이런 뜻으로 도원수·부원수 및 제도(諸道)의 감사와 병사에게 전유(傳諭)하여 빨리 달려와 구원하여 군부(君父)의 위급함을 구하게 하라. 그리고 본부(本府)의 방비도 마땅히 검칙해야 할 것이니, 나루를 건너는 자를 엄히 조사하여 조금이라도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 그리고 결사대를 모집하여 기어코 회보(回報)하게 하라."
적병이 진격하여 남성(南城)에 육박했는데, 아군이 화포로 공격하여 물리쳤다. 상이 성을 순시하며 장사를 위로하고, 이어 전사한 장졸에게 휼전(恤典)을 베풀 것과 그 자손을 녹용(錄用)할 것을 명하였다.
12월 20일 경인
상이 남한 산성에 있었다.
호차(胡差) 3명이 성밖에 도착했다. 김류가 최명길을 보내어 물어보게 하기를 청했으나, 상은 명길이 갈 때마다 속는다고 하여 김신국과 이경직을 보내라고 명하였다. 김류가 비로소 군사를 뽑아 나가 공격할 계책을 아뢰었다. 김신국과 이경직이 들어와서 아뢰기를,
"호차가 말하기를 ‘지난번 대신이 돌아간 뒤로 전혀 소식이 없는데, 이제 한(汗)이 송경(松京)에 도착하였으니 이제부터는 우리가 양국 백성을 위해 계책을 베풀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그 차인(差人)을 물리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다시 납서(蠟書)를 도원수·부원수에게 보내어 진격해 들어와 구원하라고 유시하고, 이어 각 도의 감사와 병사 및 경기 열읍(列邑)에 통유(通諭)하여 군대를 선발해서 적을 치게 하라고 명하였다. 또 김경징 등에게 하삼도(下三道)의 주사(舟師)를 전부 징집하라고 명하였다.
12월 21일 신묘
상이 남한 산성에 있었다.
초관(哨官) 이신민(李信民)이 유도 대장 심기원의 장계를 가지고 왔는데, 장계의 내용이 대부분 전공(戰功)을 과장하여 조정을 속이려는 것이어서 보는 사람이 다 놀라고 분개하였다.
충청도 원병이 헌릉(獻陵) 안에 도착하여 화전(火箭)으로 서로 응하였다.
개원사(開元寺) 승려 삼인(三印)이 말과 소를 한 마리씩 바쳤는데, 상이 호군(犒軍)하라고 명하였다.
마부달(馬夫達) 등이 또 성밖에 도착하니, 김류가 다시 김신국과 이경직을 보내어 물어보게 할 것을 청하였다. 김반(金槃)·조수익(趙壽益) 등은 보내지 말기를 굳이 청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고 마침내 신국 등을 보내었다. 지중추부사 심열(沈悅)이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듣건대 호차(胡差)가 성밖에 도착하여 다시 강화하는 일을 말하고 있다 합니다. 적의 진위는 알 수 없습니다만 예로부터 전쟁 중에도 사신을 서로 보내었습니다. 따라서 지금 적당한 인원을 차견하여 명백히 개유(開諭)하기를 ‘당초에 너희가 왕자와 대신을 청하기에 우리가 양국 백성을 위하여 뜻을 굽혀 허락했다. 그런데 너희가 다시 불신하고 재차 동궁을 인질로 삼고자 하는데, 이는 절대 따를 수 없는 일로서 삼군(三軍)이 팔을 걷어붙이고 목숨을 바쳐 싸우기로 결의하며 다시는 강화하는 일을 생각하지도 않고 있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또 좋은 의도로 와서 말을 하니, 과연 성심으로 강화를 청하는 것이라면 군사를 기외(畿外)로 퇴각시켜라. 그렇게 한다면 왕자와 대신을 보내라는 청을 힘써 따르겠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뜻으로 말을 잘 만들어 좋게 타이르면서 그들의 답을 관찰하는 한편 적의 형세를 탐지한다면, 이 또한 병가의 한 가지 방법이 되겠습니다.
근일에 아군이 자원해서 출전하여 무리에서 떨어진 적을 소탕하자, 조정이 온통 기쁨에 휩싸여 서로 축하하면서 장차 이렇게 해서 적을 다 섬멸시킬 수 있을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병가의 일은 일률적으로 논할 수는 없습니다. 삼가 듣건대 적병이 많지 않다고 하니 저들이 필경 원하는 것도 강화를 맺고 돌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포위된 지 여러 날이 되도록 개미새끼 한 마리도 구원하러 오지 않는데, 적이 증강되고 성안의 양식이 떨어지게 되면, 한 조각 고립된 성에 군부를 모시고 있는 위태로움이 한 가닥 머리카락보다 더 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화를 완화시킬 계책을 강구하지 않고 한 가지 방법에만 집착하여 존망을 결정지을 수 있겠습니까."
하자, 대사간 김반이 입대하여 아뢰기를,
"듣건대 심열이 또 강화하는 일로 차자를 올렸다고 하는데 군정(軍情)이 다 놀라고 있습니다. 원차(元箚)가 아직 내려지지 않아서 그 내용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용동(聳動)시켜 분발할 것을 생각해야 할 이때에 감히 이런 말을 재창한단 말입니까. 그 차자를 내려 대중이 모인 가운데 불태우게 하고 속히 그를 귀양보내어 여정(輿情)을 쾌하게 하소서. 봉입(捧入)한 승지에게도 잘못이 있으니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김반이 아뢰기를,
"만약 허락을 얻지 못하면 신은 감히 물러가지 않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승지는 추고하라. 심열을 멀리 귀양보낸다면 언로를 방해하는 일이 될 것이니, 타당하지 않을 듯하다."
하고, 인하여 그 차자를 정원에 내려 불태우라고 명하였다.
김신국·이경직 등이 노진(虜陣)에서 돌아와 아뢰었다.
"마호(馬胡)의 기색을 보니 화호(和好)에만 뜻이 있지는 않는 것 같았습니다."
12월 22일 임진
상이 남한 산성에 있었다.
상이 김류를 불러 이르기를,
"오늘 한번 결전하라."
하니, 김류가 어렵게 여기는 뜻으로 대답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각 영에 전령하여 식후에 출전하게 하라. 그리고 우리 나라 사람은 모두 잘못되었다. 심열이 어찌 오늘날 강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몰라서 차자의 말을 그렇게 했겠는가. 이는 다름이 아니라 매우 겁을 먹어서 그런 것이다."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신이 여러 대장들과 한 곳에 약속을 정하겠습니다."
하고, 신경진(申景禛)과 구굉(具宏)이 아뢰기를,
"근래에 접전하는 상황을 보니, 사냥개가 짐승을 쫓는 것과 같은 점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삼사가 한 자리에 모여 주화(主和)한 사람을 참할 것을 청하려 하였는데, 교리 윤집(尹集)이 논의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대사간 김반(金槃)과 집의 채유후(蔡𥙿後)가 너무 지나치다고 하며 힘써 만류하여 그만두었다.
상이 대청(大廳)에 나아가 자모군(自募軍)을 호궤하였다.
12월 23일 계사
상이 남한 산성에 있었다.
이날 상이 내전으로 이어(移御)하고, 승정원을 명하여 중대청(中大廳)에 들어와 있게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내일은 바로 성절(聖節)이니, 비록 급박한 상황에 처해 있으나 예는 폐할 수 없습니다. 호종한 백관과 함께 망궐례를 행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자모군(自募軍) 등이 출전하여 50명 가까운 적을 죽였다. 상이 소여(小輿)를 타고 북성(北城)으로부터 순시하여 서성(西城)까지 이르렀다. 그 길로 정청(正廳)에 나아가 군사를 호궤하고, 승지에게 명하여 유시하였다.
"너희들이 힘을 합해 적을 죽였으니 참으로 가상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산성에 물자가 부족하여 호궤 역시 넉넉하게 하지 못하니, 내가 한스럽게 여긴다. 너희들은 더욱 마음을 다하여 적을 초멸하도록 하라."
상이 하교하였다.
"전사가 포획한 물건은 작은 것일지라도 그 사람에게 도로 주는 것이 마땅하니, 이 뜻을 여러 대장(大將)에게 전유(傳諭)하라."
12월 24일 갑오
상이 남한 산성에 있었다.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성절(聖節)을 기념하는 망궐례를 행하였다.
승려 경운(景雲)이 강도(江都)에서 돌아왔다.
이때 성안이 오래도록 포위되어 공어(供御)하는 물자가 모두 부족하였는데, 한흥사(漢興寺) 승려 희안(希安)이 백지(白紙) 40권, 산채와 나복채 한 가마니씩을 바쳤다. 종이는 비국에 하사하여 일용에 쓰게 하고 나물은 왕자·대신·부마에게 나누어 주라고 명하였다.
군사 4백여 명을 보내어 출전하게 하였는데, 출발에 앞서 상이 몸소 나아가 호궤하였다. 어떤 병졸이 대열을 벗어나 땅에 엎드려 아뢰기를,
"비단옷 입은 사람을 장수로 정하면 자기는 성밑에 앉아 있으면서 고군(孤軍)만 나가 싸우게 하니, 대오 중의 사람을 장수로 정하여 출전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너희 대장에게 말해라."
하였다. 싸움이 끝난 뒤에 어영청이 아뢰기를,
"오늘 출전하여 적을 죽인 수가 그들의 말대로 계산하면 1백 명이 넘습니다. 과장된 말을 다 믿을 수 없으나, 방패(防牌) 아래에 둔친 적이 얼마 남지 않았고 흐른 피가 땅에 가득합니다. 전장에서 얻은 것은 호전(胡箭) 1백 4개, 호궁(胡弓) 4개, 검 1자루, 궁대(弓帒) 1부, 갑주(甲胄) 1부, 양구(羊裘) 1벌입니다."
하였다.
이때 진눈깨비가 그치지 않으니, 상이 세자와 승지와 사관을 거느리고 후원에서 날씨가 개이기를 빌었다. 향을 사르고 사배(四拜)하고 기원하기를,
"이 고립된 성에 들어와서 믿는 것은 하늘뿐인데, 찬 비가 갑자기 내려 모두 흠뻑 젖었으니 끝내는 반드시 얼어 죽고 말 것입니다. 내 한몸이야 죽어도 애석하지 않지만 백관과 만백성이 하늘에 무슨 죄가 있습니까. 조금이라도 날을 개게 하여 우리 신민을 살려 주소서."
하고, 그대로 땅에 엎드려 통곡하였다. 울면서 기도하는 사이에 어의(御衣)가 다 젖었는데도 그만두지 않았다. 승지가 나아가서 안으로 들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자, 검열 유철(兪㯙)이 밖으로 나와 대신을 청하였다. 대신과 여러 재상이 안으로 들어가 반열대로 서서 모시고서 잠시 물러가기를 간절히 청하였으나 상이 여전히 따르지 않았다. 좌우가 모두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시지 않는 자가 없었다. 김류가 어의를 잡아당기며 일어나기를 청하니, 상이 잠시 뒤에 일어나 사배하고 물러 나왔다. 인하여 성황당에 중신(重臣)을 보내어 날씨가 개이기를 빌게 하니, 예조 판서 김상헌(金尙憲)이 헌관(獻官)으로서 명에 응하여 갔다. 상이 영(楹) 밖에 짚자리를 깔고 앉아 있다가 어두워지자 침전으로 돌아왔다.
김류가 입대하여 아뢰기를,
"충청 병사가 군사를 거느리고 죽산(竹山)에 머물고 있다고 하는데, 그들은 필시 적의 형세를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밤 결사대를 모집하여 내보내 적의 형세를 알려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라. 만에 하나 차질이 생긴다면 큰일이 날 것이다. 원수(元帥)의 진영에도 사람을 보내 통지하여 진격해 오도록 해야 할 것이니, 반드시 신중하게 하라."
하였다. 대사간 김반이 아뢰기를,
"이렇게 포위된 성에 앉아서 시간만 끌고 있는데, 저들이 지구전(持久戰)을 벌이는 것은 필시 원병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원병은 오지 않고 저들의 원병이 갑자기 이르게 되면 더욱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니, 한 쪽 문으로 군사를 내보내 물러서는 자를 목베어 싸움을 독려하는 한편 강도로 들어 간다면, 그런대로 한번 해 볼 만합니다. 그런데 체부(體府)의 장수들은 술에 취한 듯 어리석은 듯하기만 하여 이확(李廓)이 또한 출격하려고 하는데도 대장이 어려워한다고 합니다. 신은 답답하고 안타까운 심정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병가의 일은 일률적으로 논할 수 없다. 그리고 이확은 큰 소리나 칠 뿐 담력은 없으니 용감한 자가 아니다."
하였다. 김신국이 아뢰기를,
"성을 지키는 자가 1만 4천 명이니, 1만 명으로 성을 지키고 4천 명으로 대영(大營)을 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평지에 내려가 대진(大陣)을 치는 것은 만전의 계책이 아닌 듯하다."
하였다.
승려 호열(浩悅)이 청밀(淸蜜)을 바쳤다.
체부(體府)의 군관 임몽득(任夢得)이 성에 들어 왔는데, 상이 하교하였다.
"임몽득이 적진을 뚫고 성안으로 들어 왔으니 참으로 가상하기 그지없다. 상당한 직책을 제수하라."
12월 25일 을미
상이 남한 산성에 있었다.
예조가 아뢰기를,
"온조(溫祚)가 이곳에 도읍을 정하여 그 역사가 가장 오래 되었는데, 반드시 그 신(神)이 있을 것입니다. 옛사람은 군사작전을 벌이며 주둔할 때에 반드시 그 지방 신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지금 대가가 머물러 계시면서 성황(城隍)에도 이미 사전(祀典)을 거행했는데, 온조에게 제사를 지내는 일을 그만둘 수는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성안의 야윈 말을 잡아서 장사(將士)를 호궤하였는데, 체부(體府)의 청에 따른 것이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고립된 성이 포위된 지 십여 일이 넘었으니 제도(諸道)의 근왕병(勤王兵)은 일각도 지체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공청 병사(公淸兵使) 이의배(李義培)는 죽산(竹山)에 와서 주둔하면서 곧바로 전진하지 않고 있으니, 머뭇거리며 나오지 않는 그 정상이 참으로 놀랍고 통분하기 그지없습니다. 군율대로 처단해야 마땅하겠지만, 우선 먼저 하유하시어 속히 진군하여 공을 세움으로써 죄를 갚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몸소 나아가 호군하였다. 윤지원(尹之元)이라는 자가 크게 출병하여 한 곳을 공격하기를 청하니, 상이 계단을 올라오라고 명하여 그의 생각을 아뢰게 하고 특별히 우장(優奬)을 가하였다.
사영 대장(四營大將) 신경진(申景禛)·구굉(具宏)·원두표(元斗杓)·이시백(李時白) 등이 청대(請對)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체부가 사영에 전령하여 서로 의논해서 적을 섬멸하라고 하였습니다. 동문이나 남문으로 출병하고 싶은데, 어느 곳을 먼저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자, 대답하기를,
"망월봉(望月峯)과 동문 밖은 모두 형세가 불리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니, 두표가 아뢰기를,
"밤에 결사대를 보내어 적장이 있는 곳을 엄습하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경진이 아뢰기를,
"적장이 반드시 진영 안에서 잔다고 볼 수도 없는데, 밤에 놀라게 하는 것도 난처합니다."
하고, 시백이 아뢰기를,
"적은 용병(用兵)에 뛰어나 신출 귀몰하니, 평야에서 접전하면 우리에게 불리할 것입니다. 다만 사졸을 쉬게 하면서 적이 올려다 보고 공격해 오기를 기다렸다가 초격(勦擊)하든가, 아니면 외부의 원병을 기다려 협공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토록 지구전을 벌이다가 장차 어찌할 것인가. 형세가 편리한 곳을 택하여 한 번 싸우도록 하라."
하였다.
이서(李曙)가 입시하였다. 이경증(李景曾)이 아뢰기를,
"지금 호왕(胡王)에게 사람을 보내 그가 있는 곳을 정탐하게 하는 한편 그들의 군정(軍情)을 해이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고, 이서가 아뢰기를,
"세시(歲時)가 임박하였으니 사람을 보내 궤유(饋遺)하는 것도 한 가지 방안일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런 때 사람을 보내는 것은 괜한 일인 듯하다. 그리고 무장은 오직 싸우고 지키는 것만 생각해야 한다."
하자, 대답하기를,
"신이 어찌 싸우는 것을 잊었겠습니까. 계략을 써서 이기려고 하는 것일 뿐입니다. 또 성세(聲勢)를 과장한 거짓 문서를 만들어 성밖에 떨어뜨려 놓아 적이 알게 하는 것도 조금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좋은 방법이다. 그리고 경은 항상 장신(張紳)을 칭찬했는데 그의 재주가 어떠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큰 그릇은 못 되지만 그런대로 쓸 만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이수림(李秀林)은 그저께 전투에서 적의 방패 아래까지 진격해 갔는데, 담력과 용기가 있는 자가 아니고서는 그렇게 못할 것이니, 장수로 삼았으면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아직 논상하지 않았는가? 즉시 별도로 논상하게 하라."
하였다. 이서가 아뢰기를,
"파총(把摠) 오영발(吳永發)도 쓸 만한 자입니다. 수십 군데를 화살에 맞고서도 뜻이 조금도 꺾이지 않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참 장사이구나. 이들은 우선 수령에 제수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 이수림과 오영발을 불러오라고 명하고, 유시하기를,
"그대들이 앞장 서서 용기를 떨쳤으니 나의 마음이 매우 기쁘다. 장상(將相)에 어찌 씨가 따로 있겠는가. 각자 더욱 힘쓰도록 하라."
하면서 중관(中官)에게 명하여 술을 주도록 하였다.
12월 26일 병신
상이 남한 산성에 있었다.
삼공과 비국 당상이 입대(入對)하여 아뢰기를,
"오늘 군사를 조발(調發)하여 출전하려고 했는데, 바람이 너무 강하니 날씨가 조금 풀릴 때까지 기다렸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김류에게 이르기를,
"경이 대장이니, 사태를 보아 가며 대처하라."
하였다. 홍서봉이 아뢰기를,
"오늘의 위급한 상황을 어찌 다 아뢸 수 있겠습니까. 지금 믿을 것은 외부의 구원뿐인데, 호서의 군사가 사식정(四息程)의 거리에 와 있으면서도 관망만 할 뿐 진군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 양남(兩南)의 군사가 아무리 많다해도 아직까지 한 번도 싸우지 않았으며, 서북의 군사도 소식이 없습니다. 믿을 것은 단지 성안 군사의 사기가 꺾이지 않는 것뿐인데, 날씨가 이토록 차므로 너무도 사기가 저하되고 있습니다. 적이 만약 명분없이 물러가기를 어렵게 여긴다면 우리가 사람을 보낸다 해도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온 성의 인정이 다 이와 같은데도 영상은 융사(戎事)를 맡고 있어 감히 논의에 참여할 수 없기에 신이 감히 아룁니다."
하고, 김류도 아뢰기를,
"신이 융사를 맡고 있어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으나 군정은 과연 좌상의 말과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적의 실정만 말하라. 군정은 어린아이라도 알 것인데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하였다. 김신국이 아뢰기를,
"사람을 보내어 강화를 성사시킬 수 있다면 실로 국가의 다행한 일입니다. 다만 우리 쪽에서 먼저 사람을 보내면 저들이 돌아가려는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중지할 것입니다."
하고, 장유가 아뢰기를,
"저들도 처음 올 때와는 같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이 고립된 성이 그들의 손바닥 안에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산성의 형세가 올려다 보고 공격하기 어려우므로, 우리가 지치기를 기다려 협박해서 강화를 맺고 돌아가려 하고 있습니다. 돌아보건대 이 성안의 형세가 매우 위급하니, 우선 일이 이루어질 수 있느냐 없느냐는 논하지 말고 먼저 사람을 보내어 시험해 봐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신국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호판의 말이 옳다. 다만 백관 부형이 모두 여기에 들어와 있는데 형세가 이 지경이 되었으니, 어제 이서가 아뢴 대로 소와 술을 보내는 것도 좋겠다."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옛날에도 황감(黃柑)을 적에게 보낸 경우가 있었으니, 이 역시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재신 중에 계략에 뛰어나고 언변이 있는 자를 엄선하여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박황(朴潢)이 아뢰기를,
"상의 명으로 보냈다가 받지 않으면 괜히 모욕만 당하게 될 것이니, 대신이 보낸다고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설령 받지 않더라도 해로울 것이 없다. 국가에서 보내는 것으로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이경직(李景稷)이 입대하여 아뢰기를,
"신이 적의 진영에 가도록 되어 있기에 대신에게 의논했더니 ‘방금 적병이 이부치(利阜峙)로 향하고 있으니, 이는 필시 우리측 원병을 맞아 공격하려는 것이다. 만약 불행한 일이 있게 되면 저들은 필시 우리가 강화하기 위해 왔다고 할 것이다. 오늘 복병에게 말을 전하여 사자를 보내겠다는 뜻을 먼저 통지해 놓고 내일 출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감히 이를 앙품(仰稟)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적의 진영에 가서 어떻게 말할 것인가?"
하였다. 대답하기를,
"‘십 년 동안 우호를 맺어온 나라가 지금 무단히 군사를 일으켰다. 너희는 맹약을 저버렸지만 우리는 옛날의 우호를 잊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선물을 가져왔다.’고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강화하는 뜻은 언급하지 말고 세시의 선물이라고만 말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강원도 영장(營將) 권정길(權井吉)이 병사를 거느리고 검단산(儉丹山)에 도착하여 횃불로 상응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적의 습격을 받고 패하였다.
12월 27일 정유
상이 남한 산성에 있었다.
이날 소와 술을 노영(虜營)에 보내려 하는데 대신이 들어와 청하기를,
"재신(宰臣)을 보내었다가 구류되면 도리어 나라의 체면이 손상될 것이니, 이기남(李箕男)을 시켜 보내 주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간 김반(金槃)과 승지 최연(崔葕)은 사람을 보내지 말기를 청하였고, 교리 윤집(尹集)은 상소하여 논의를 주도한 자를 목베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모두 따르지 않고, 이기남으로 하여금 소 두 마리, 돼지 세 마리, 술 열 병을 가지고 가게 하였다. 노장(虜將)이 받지 않으며 말하기를,
"황천(皇天)이 우리에게 동방을 주셨으니, 팔도의 주육(酒肉) 등 모든 물건은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국왕이 현재 석혈(石穴)에 처해 있고 내외가 통하지 않아서, 종신(從臣) 이하가 모두 굶주릴 것인데, 이것을 어디에서 얻었는지 모르겠다. 너는 가지고 가서 굶주린 신민에게 나누어 주라."
하고, 또 말하기를,
"원병이 어느 곳에 도착했기에 우리가 3천 군사로 모조리 죽였고, 또 다른 곳에서 2천 병사를 보내 모두 죽였다. 황제가 이미 나온 것을 너희 나라는 듣지 못하였는가?"
하니, 기남이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하고 돌아왔다.
상이 하교하였다.
"이렇게 파월(播越)한 때를 당하여 어공(御供)만을 특별히 후하게 하는 것은 마땅치 않으니, 산 꿩 등 물품은 바치지 말라."
공청 감사(公淸監司) 정세규(鄭世規)가 병사를 거느리고 험천(險川)에 도착한 뒤 산의 형세를 이용해서 진을 쳤다가 적의 습격을 받아 전군이 패몰했는데, 세규는 간신히 빠져 나왔다.
12월 28일 무술
상이 남한 산성에 있었다.
완천군(完川君) 최래길(崔來吉)이 입대하여 기신(紀信)이 초(楚)를 속였던 일029) 을 행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조 판서 최명길이 입대하여 아뢰기를,
"나라의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다시 사람을 보내어 강화에 대한 일을 시험해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을 이룰 수 있겠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일의 성사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사람을 보내는 것은 무방합니다. 익위(翊衛) 허한(許僩)은 나이가 많아도 제법 구변이 있는데, 전에 강화를 반드시 성사시킬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뭐라고 말하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허한이 말하기를 ‘한(汗)이 왔다고 하는데 한은 우리와 형제의 의가 있으니, 서로 존문(存問)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언제 올 것이며,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는 것으로 말하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에 허한을 불러서 하문하기를,
"듣건대 너에게 소견이 있다고 하니 한번 말해 보라."
하자, 허한이 대답하기를,
"금한(金汗)이 왔다고 하지만 고군(孤軍)으로 깊이 들어오는 것은 바로 병가에서 꺼리는 일입니다. 저들이 강화를 바라는 마음은 반드시 우리의 배는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의 말도 일리는 있다. 다만 강화를 성사시킬 수 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오랑캐 진영에 사람을 보내어 한이 언제 오느냐고 물은 뒤에 바야흐로 강화를 의논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왔다고 대답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사자를 보내어 존문하면 그 허실을 또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재신(宰臣)들에게 이르기를,
"나의 생각에는 강화를 성사시킬 수 없다고 여겨지는데, 허한은 반드시 성사시킬 수 있다고 하니,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니, 김류가 대답하기를,
"신의 생각도 허한과 같습니다. 성사시키지 못할 까닭이 없을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가서 의논하라."
하였다.
남병사(南兵使) 서우신(徐佑申)의 군관(軍官) 이이립(李以立)이 성으로 들어왔다가 돌아가서 보고하겠다고 청하니, 상이 특별히 6품직을 제수하여 보내었다.
이때 내외가 통하지 않자 선전관 민진익(閔震益)이 성밖으로 탈출하여 제도의 군중(軍中)에 명을 전하겠다고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진익이 바로 밤에 송책(松柵)을 뛰어넘어 나가 제도에 명을 전한 뒤 그 장계를 받아가지고 돌아왔다. 상이 입은 옷을 벗어서 하사하고 실직(實職)에 초배(超拜)할 것을 명하였다.
12월 29일 기해
상이 남한 산성에 있었다.
유도 대장(留都大將) 심기원(沈器遠)이 사람을 모집하고 납서(蠟書)로 아뢰기를,
"경성에 주둔한 적은 대략 5백∼6백 명이고 아군은 겨우 2백 70명이었는데, 다행히도 화공(火攻)으로 승리하였습니다. 이어 낙후된 포수를 불러 모아 이정길(李井吉)을 영장(領將)으로 삼았습니다."
하였는데, 공을 과장하여 자랑하는 말이 많았다. 그러나 성안에서는 그 때문에 꽤나 사기가 배가되었다.
이날 북문 밖으로 출병하여 평지에 진을 쳤는데 적이 상대하여 싸우려 하지 않았다. 날이 저물 무렵 체찰사 김류가 성 위에서 군사를 거두어 성으로 올라 오라고 전령하였다. 그 때 갑자기 적이 뒤에서 엄습하여 별장 신성립(申誠立) 등 8명이 모두 죽고 사졸도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김류가 군사를 전복시키고 일을 그르친 것으로 대죄(待罪)하니, 상이 위유(慰諭)하였다.
12월 30일 경자
상이 남한 산성에 있었다.
삼공과 이조 판서 최명길을 인견하고 하문하기를,
"사자를 보내는 일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신이 지휘를 잘못하여 참패하였으니, 황공하여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보병과 기병의 형세는 현격하게 다른데, 경솔하게 평지에 내려갔으니 어떻게 패하지 않겠는가. 중원(中原)에는 평지에 내려갔을 경우 처벌하는 군율이 있는데, 이는 패몰하게 될까 염려해서이다."
하니, 홍서봉이 아뢰기를,
"일승 일패는 병가에 항상 있는 일입니다. 어제 설령 조금 꺾였더라도 오늘 사람을 보내어 그들의 실정과 형세를 탐지하는 것이 무방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떤 사람을 보내야 하겠는가?"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김신국과 이경직 등을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호판이 명민하니 그를 보내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김류가 또 아뢰기를,
"허한(許僩)을 위산보(魏山寶)의 예에 따라 함께 보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또 성 안의 호령이 밖으로 통하지 않으니, 심기원(沈器遠)을 제도의 원수로 임명하여 사방의 근왕병을 거느리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모두 윤허하였다.
예조 판서 김상헌(金尙憲)이 입대하여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내일 재신을 오랑캐 진영에 보내려 한다고 하는데, 가령 오랑캐가 우리의 뜻을 거절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지금은 적절한 시기가 아닌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슨 말인가?"
하자, 대답하기를,
"며칠 전 소와 술을 저들이 이미 받지 않았는데다가 어제의 일을 바야흐로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을 것이니, 지금 사람을 보내더라도 반드시 그 실상을 제대로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성안의 사람들과 근왕병이 많이들 풀이 죽어 있는데, 며칠이 지나고 나면 사태가 반드시 변할 것입니다. 저들이 사람을 보내 오기를 기다려 대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은 좋지만, 세시(歲時)에 존문하는 것이 안 될 것은 없다."
하였다. 아뢰기를,
"세시의 예는 우리가 이미 행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세시라는 말은 지난번에 전혀 언급하지 않았으니, 내일 사람을 보내도 명분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상헌이 아뢰기를,
"강도 유수(江都留守) 장신(張紳)이 그의 형에게 글을 보내기를 ‘본부의 방비를 배가해서 엄히 단속하고 있는데, 제지를 받는 일이 많다.’고 했답니다. 장신은 일처리가 빈틈없고 이미 오래도록 직책을 수행하고 있는데, 신임 검찰사가 절제하려 한다면, 과연 제지당하는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게 무슨 말인가. 방수(防守)하는 일은 장신에게 전담시켰으니, 다른 사람은 절제하지 못하도록 전령하라."
하였다.
간원이 청대하여 오랑캐 진영에 사람을 보내지 말기를 청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또 충청 병사 이의배(李義培)와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을 함께 군율로 처벌하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강도(江都)의 서리(書吏) 한여종(韓汝宗)이 장계를 가지고 들어와서 말을 전하였다.
"도원수와 부원수는 아직 해서 산성(海西山城)에 있습니다. 적병이 잇따라 오므로 도원수가 황해 감사와 함께 병사를 보내어 요격하여서 동선(洞仙)에서 깨트렸습니다. 경상 병사 민영(閔栐)은 어영군(御營軍) 8천과 본도의 병마(兵馬)를 거느리고 23일에 충주(忠州) 수교(水橋)에 도착하였습니다."
강도(江都)의 서리(書吏) 한여종(韓汝宗)이 장계를 가지고 들어와서 말을 전하였다.
"도원수와 부원수는 아직 해서 산성(海西山城)에 있습니다. 적병이 잇따라 오므로 도원수가 황해 감사와 함께 병사를 보내어 요격하여서 동선(洞仙)에서 깨트렸습니다. 경상 병사 민영(閔栐)은 어영군(御營軍) 8천과 본도의 병마(兵馬)를 거느리고 23일에 충주(忠州) 수교(水橋)에 도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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