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일 병신
전식(全湜)을 대사헌으로, 정홍명(鄭弘溟)을 대사간으로, 유영(柳穎)을 교리로, 최유해(崔有海)를 수찬으로, 심대부(沈大孚)·이상형(李尙馨)을 지평으로 삼았다.
2월 4일 무술
옥과현(玉果縣)에 간사한 백성이 있었는데 그 고을 수령을 미워하여 파면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밤에 향교에 들어가 도국공(道國公)009) 과 낙국공(洛國公)010) 의 위판(位版)을 쪼개버렸다. 상이 끝까지 체포해 다스리고, 그곳 현감을 파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달이 금성(金星)을 범하였다.
2월 5일 기해
달이 묘성(昴星)을 범하였다.
옥당이 상차하기를,
"삼가 생각건대, 국가가 유지되는 까닭은 기강이 서고 법령이 행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국세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신하들은 모두 죽을 죄가 있는 것인데, 하물며 대신으로서 오늘날과 같은 상황을 불러온 데이겠습니까. 전 영의정 김류(金瑬)는 권한이 장상(將相)을 겸하였으니, 의리상 국가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해야 합니다. 그런데 탐욕스럽고 교만하여 국사를 그르쳐 난의 계제를 만들었습니다. 평상시에는 주밀하게 대비를 하는 데 기회를 잃었으며, 위급할 때에는 처치하는 데 방도를 잃음으로써 망극한 변란을 초래하여 스스로 용서받기 어려운 죄를 졌습니다. 영중추부사 윤방(尹昉)은 원로 대신으로 종묘·사직의 신주를 안전히 모시라는 부탁을 받고서 미리 구획하여 잘 조처하지 못하였고, 또 변을 만나서는 목숨을 걸고 시의(時宜)에 맞게 대처하지 못했으니, 신주를 함몰시킨 참담함과 더럽힌 모욕에 대해서는 차마 말 못할 점이 있습니다.
이 두 신하의 죄는 왕법을 시행한다면 사형에 처하더라도 그들 또한 변명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양사의 청을 오래도록 윤허받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여론이 더욱 분개하고 공의가 날로 격렬해져 해가 지나도록 논집하면서 여기까지 끌어 온 것입니다. 속히 대각의 공론을 따라 나라의 법을 엄숙하게 하소서.
그리고 오늘날 남쪽 지방에 우려할 만한 단서가 많이 있어서, 미리 대비할 계책을 모두 강구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독 군율에 있어서만은 진작시키지 않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다가 하루아침에 경보가 있게 되면 누가 군율을 두려워해 자신을 돌보지 않고서 군부의 위급함에 달려나가려 하겠습니까. 지난해의 변란 때 적을 놓아두고 임금을 버린 원수(元帥)가 아직까지 목숨을 보전하고 이 세상에서 버젓이 숨을 쉬고 있으니, 만약 제로(諸路)의 하급 장관(將官)이 혹 군율을 받았을 경우 죽은 자가 도리어 구천에서 원통해 할 것입니다. 아, 옛날 군율은 대장부터 시행했는데, 오늘날 군율은 한결같이 어찌 그리도 어긋난단 말입니까.
삼군(三軍)의 명(命)을 맡고 서문(西門)을 막는 것이 이 어떤 책임인데 당초 적의 기병 수백 기가 성 아래를 지나갔는데도 그들의 동태를 살펴서 먼저 대응하지 못하였고, 대병이 마구 쳐들어 와 남한 산성에 다가왔을 때에야 비로소 깊은 골짜기를 경유해 달이 바뀐 뒤에야 와서는 외로운 성을 지척에 두고도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지금와서 생각해도 간담이 저절로 찢어지며,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의 살점을 먹고자 합니다.
법령은 조종의 법령으로 전하에게 전해진 것이니 엄하여 범할 수 없는 것인데, 전하께서 어찌 훈구(勳舊)라는 이유로 조종의 법을 굽힐 수 있겠습니까. 신들이 듣건대, 성왕(聖王)이 정사를 하는 데 있어서는 상을 줄 때는 원수도 피하지 않고, 주벌할 적에는 귀척이나 근신도 가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로써 말한다면, 전하께서 벌을 내리는 것이 옛날 성왕들과는 크게 서로 어긋나니, 무엇을 가지고 기강을 진작시키며 인심을 복종시키겠습니까. 군율이 이 사람에게 행해지지 않는다면 뒷날 장수된 자들이 모두 살아날 수 있는 방도가 있다는 것을 알아 끝내 필사의 마음이 없을까 깊이 염려됩니다. 비록 정밀하고 날카로운 병기가 있고 높고 깊은 성과 못이 있더라도,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럴 경우 전하께서 오늘날 부지런히 애쓰시는 것이 도리어 헛수고로 돌아가고 성을 쌓고 군량을 운반하고 배를 만들고 군사들을 검열하는 일이 끝내는 반드시 형식적인 것이 되고 말 것이니, 애석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신들의 생각으로는, 김자점(金自點)의 죄는 가장 먼저 군율을 적용하여 처벌하여야 하고, 그 나머지 군사를 잃고 포로가 되고, 목숨을 아껴 구차히 살아난 무리들은 각각 그에 해당된 군율로 차례차례 논단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면 무너진 기강이 저절로 진작되고 사기가 백배는 충만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굽어 살펴 받아들이셔서 결단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하니, 답하기를,
"발론할 때에 말하지 않은 일을 주워모아 진달하니, 몹시 구차하다. 대장을 죄주자고 청하는 것 또한 전의 규례에 어긋난다. 모두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정언 노준명(盧峻命)이 부원수의 죄를 논핵하려 하다가 미처 아뢰지 못했는데, 옥당에서 먼저 논하였으니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피혐하고, 대사헌 전식(全湜), 지평 이상형(李尙馨), 헌납 성이성(成以性), 정언 김진(金振)도 김자점을 죄주자고 청하는 논을 옥당에서 먼저 하였다는 이유로 서로 이어 피혐하였으며, 사간 임담은 의견이 같지 않다는 이유로 피혐하니, 모두 사피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의주에 호랑이가 떼를 지어 성을 넘어 들어와 사람과 가축을 해쳤다.
2월 6일 경자
부교리 윤명은(尹鳴殷)과 수찬 남노성(南老星)이, 차자에 대한 비답이 온당치 않아 감히 양사(兩司)를 처치하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소를 올리고 대죄(待罪)하니, 상이 이조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다. 이조가 회계하기를,
"옥당이 양사와는 간격이 있습니다. 비록 온당치 않은 전교를 받들었지만 처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전례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이에 처치하기를,
"법에 의거해 율(律)을 청하는 것이 지금 또한 늦지 않았지만, 의견이 서로 어긋나고 말이 너무 구차합니다. 노준명·전식·이상형·성이성·김진은 출사하게 하고, 임담은 체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노준명도 체차하라."
하였다.
달이 묘성을 범하였다.
2월 7일 신축
비국이 아뢰기를,
"하삼도와 영동(嶺東)의 중들을 조발하여, 거느리는 장수를 뽑아 남한 산성을 축조하는 일을 돕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경상 감사 이경증(李景曾)이 하직 인사를 하니, 상이 불러보고 이르기를,
"경은 왜정(倭情)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경증이 아뢰기를,
"신이 전에 김세렴(金世濂)을 만났는데, 그 또한 깊이 우려하지 않았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 혼자만 의심하고 온 조정이 모두 의심하지 않으니, 반드시 밝은 견해가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그것을 믿는다."
하였다. 경증이 아뢰기를,
"영외(嶺外)에는 산성이 없고, 인동(仁同)의 천생 산성(天生山城)이 가장 험한데, 지세가 너무 비탈져 백성들이 살 수가 없습니다. 어류 산성(御留山城)은 고 정승 유성룡(柳成龍)도 그 지리(地利)를 말한 곳이지만 백성들이 궁핍하고 재물이 다하여 역사(役事)를 일으키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형세를 살펴보고 처리하라."
하였다.
2월 8일 임인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친 뒤에 이현영(李顯英)이 아뢰기를,
"주의(注擬)할 때 항상 인재가 부족한 근심을 하니, 이습관(肄習官)이나 포폄에서 중(中)을 맞은 자들을 파격적으로 청요(淸要)의 좋은 직에 의망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외직에 있으면서 중을 맞은 자들은 의망하는 것이 무방하다."
하였다. 현영이 아뢰기를,
"큰 난이 일어난 뒤로 세월이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비록 죄가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본심에서 저지른 것이 아닌 경우에는 수용하는 것이 마땅한 듯합니다. 어찌 한 때의 일로 인하여 끝까지 버릴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부박하고 일꾸미기를 좋아하는 무리들은 급급히 수용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현영이 아뢰기를,
"정유성(鄭維城)은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후예입니다. 조상의 음덕(蔭德)은 받지 못하고 도리어 처외조부(妻外祖父)의 죄에 연좌되었으니, 또한 원통하지 않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역적을 다스리는 율이 중하여 그런 것이다."
하였다. 현영이 아뢰기를,
"이행진(李行進)은 당초에 고 정승 이원익(李元翼)을 모욕한 죄로 나추(拿推)되었습니다만, 모욕한 말은 전하는 사람이 잘못 전달한 점이 없지 않습니다. 그런데 종신토록 폐기하는 것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바로 정경세(鄭經世)가 한 말이다. 어찌 사실이 아닌 말을 임금 앞에서 함부로 전했겠는가. 이원익은 원로 숙덕(元老宿德)으로 나라의 시귀(蓍龜)가 되는 사람인데, 이행진이 감히 모욕했으니, 그 사람됨을 알 만하다. 요즈음 젊은 부박한 무리들이 논하는 바가 있으면 일의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각각 스스로 자기 마음으로 마음을 삼아 나라의 체통을 손상하는 것이 심하다. 옛날에는 대각이 논계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선생이나 어른에게 가서 의논을 하였으니, 이는 아름다운 일이다."
하였다. 현영이 아뢰기를,
"지금 이 두 정승을 안치하라는 계사조차 옥당에 통보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어른에게 의논하기를 바라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이미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았으면 어찌하여 분별해 쓰거나 버리지 않고 부질없이 빈말만 하는가. 대간이 피혐하는 말 중에 ‘윤방(尹昉)은 적이나 원수보다 심한 점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 말은 이치에 당치 않는 말이다. 이는 이런 높은 의론을 해서 동료들에게 중망을 받으려고 하는 데 불과한 것이다. 무릇 논계를 그치거나 계속하거나는 각자 자기 의견이 있는 것인데,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은 반드시 배척하려고 하니, 이 무슨 의도인가?"
하자, 현영이 아뢰기를,
"대각의 신하들은 직절(直截)함을 숭상해야 하니, 혹 과격하더라도 너그러이 용납하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대사헌 전식(全湜)이 아뢰기를,
"김자점은 원수가 되어 나라의 서문(西門)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적병이 깊숙이 쳐들어와 대가(大駕)가 군색하게 산성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위급함이 아침 저녁에 곧 무너질 것 같았는데도 골짜기에서 머뭇거리면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율에 따라 죄를 정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장의 직임을 받은 사람이 적병으로 하여금 무인지경에 들어오듯이 들어오게 하였으니, 그 죄는 참으로 죽어 마땅하다. 그러나 그 당시 수하에 병사가 적었고, 앞서의 공 또한 크기 때문에 사형을 감하여 죄를 정하였다. 해도에 안치하는 것 또한 가벼운 율이 아니다. 내 의견으로는 국가에서 처치한 것이 마땅함을 잃지는 않은 듯하다. 그런데 해가 지난 뒤에 또다시 발론하니, 온편치 못한 듯하다."
하였다. 전식이 노준명(盧峻命)을 특별히 체직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사람이 부박하고 일꾸미기를 좋아하며, 말 또한 조리가 없으므로 체직한 것이다. 지금 비록 그 명을 도로 거두더라도 이미 체직되었으니 형세상 행공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다시 번독스럽게 하지 말라."
하였다. 헌납 성이성(成以性)이 유백증(兪伯曾)을 먼저 파직하고 뒤에 추고하라고 한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임금에게 고하는 말은 아무리 작더라도 반드시 살펴야 하는데, 하물며 종사에 관계된 일이겠는가. 임금이 이미 그르다고 하였으면 스스로 반성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 장황하게 차자에 진술해 조금도 돌아보거나 꺼리는 바가 없었다. 그러므로 약간 벌을 준 것이다."
하였다. 이성이 아뢰기를,
"대간이 아뢴 일은 결말이 나기 전에는 승전을 받들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래되어 온 규례입니다. 그런데 헌부 성상소와 정원의 해당 승지가 버젓이 받들었으니, 아울러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에는 이와 같은 규례가 없었는가?"
하자, 이성이 아뢰기를,
"대간이 논집한 일은 정원이 으레 승전을 받들 수 없습니다. 양사는 한 몸인데, 어찌 정계하지 않았는데 미리 승전을 받들 리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아울러 추고하라."
하였다. 이성이 아뢰기를,
"노준명을 특별히 체직하라고 한 명을 도로 거두소서. 그리고 옥당 유신(儒臣)들의 흔쾌히 따르라는 의논은 참으로 당연한 것이며, 대장을 율에 비추어 정죄하는 것 또한 공공의 의논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성상의 비답이 지극히 온당치 않고, 또 그 소를 해조에 내리셨으니, 이는 전에 드물게 있었던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소를 해조에 내린 일은, 다시 생각해 보니 과연 온당치 않다. 이는 내가 살피지 못한 소치이다."
하였다.
장유(張維)와 이경석(李景奭)이 지은 삼전도 비문(三田渡碑文)을 청나라에 들여보내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택하게 하였다. 범문정(范文程) 등이 그 글을 보고, 장유가 지은 것은 인용한 것이 온당함을 잃었고 경석이 지은 글은 쓸 만하나 다만 중간에 첨가해 넣을 말이 있으니 조선에서 고쳐 지어 쓰라고 하였다. 상이 경석에게 명하여 고치게 하였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대청(大淸) 숭덕(崇德)011) 원년012) 겨울 12월에, 황제가 우리 나라에서 화친을 무너뜨렸다고 하여 혁연히 노해서 위무(威武)로 임해 곧바로 정벌에 나서 동쪽으로 향하니, 감히 저항하는 자가 없었다. 그 때 우리 임금은 남한 산성에 피신하여 있으면서 봄날 얼음을 밟듯이, 밤에 밝은 대낮을 기다리듯이 두려워한 지 50일이나 되었다. 동남 여러 도의 군사들이 잇따라 무너지고 서북의 군사들은 산골짜기에서 머뭇거리면서 한 발자국도 나올 수 없었으며, 성 안에는 식량이 다 떨어지려 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대병이 성에 이르니, 서릿바람이 가을 낙엽을 몰아치는 듯, 화로 불이 기러기 털을 사르는 듯하였다. 그러나 황제가 죽이지 않는 것으로 위무를 삼아 덕을 펴는 일을 먼저 하였다. 이에 칙서를 내려 효유하기를 ‘항복하면 짐이 너를 살려주겠지만, 항복하지 않으면 죽이겠다.’ 하였다. 영아아대(英俄兒代)와 마부대(馬夫大) 같은 대장들이 황제의 명을 받들고 연달아 길에 이어졌다.
이에 우리 임금께서는 문무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이르기를 ‘내가 대국에 우호를 보인 지가 벌써 10년이나 되었다. 내가 혼미하여 스스로 천토(天討)를 불러 백성들이 어육이 되었으니, 그 죄는 나 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황제가 차마 도륙하지 못하고 이와 같이 효유하니, 내 어찌 감히 공경히 받들어 위로는 종사를 보전하고 아래로는 우리 백성들을 보전하지 않겠는가.’ 하니, 대신들이 그 뜻을 도와 드디어 수십 기(騎)만 거느리고 군문에 나아가 죄를 청하였다. 황제가 이에 예로써 우대하고 은혜로써 어루만졌다. 한번 보고 마음이 통해 물품을 하사하는 은혜가 따라갔던 신하들에게까지 두루 미쳤다. 예가 끝나자 곧바로 우리 임금을 도성으로 돌아가게 했고, 즉시 남쪽으로 내려간 군사들을 소환하여 군사를 정돈해서 서쪽으로 돌아갔다.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농사를 권면하니, 새처럼 흩어졌던 원근의 백성들이 모두 자기 살던 곳으로 돌아왔다. 이 어찌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우리 나라가 상국에 죄를 얻은 지 이미 오래 되었다. 기미년013) 싸움에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이 명나라를 구원하러 갔다가 패하여 사로잡혔다. 그러나 태조 무황제(太祖武皇帝)께서는 홍립 등 몇 명만 억류하고 나머지는 모두 돌려보냈으니, 은혜가 그보다 큰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우리 나라가 미혹하여 깨달을 줄 몰랐다. 정묘년014) 에 황제가 장수에게 명하여 동쪽으로 정벌하게 하였는데, 우리 나라의 임금과 신하가 강화도로 피해 들어갔다.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자, 황제가 윤허를 하고 형제의 나라가 되어 강토가 다시 완전해졌고, 홍립도 돌아왔다.
그 뒤로 예로써 대우하기를 변치 않아 사신의 왕래가 끊이질 않았다. 그런데 불행히도 부박한 의논이 선동하여 난의 빌미를 만들었다. 우리 나라에서 변방의 신하에게 신칙하는 말에 불손한 내용이 있었는데, 그 글이 사신의 손에 들어갔다. 그런데도 황제는 너그러이 용서하여 즉시 군사를 보내지 않았다. 그러고는 먼저 조지(詔旨)를 내려 언제 군사를 출동시키겠다고 정녕하게 반복하였는데, 귓속말로 말해 주고 면대하여 말해 주는 것보다도 더 정녕스럽게 하였다. 그런데도 끝내 화를 면치 못하였으니, 우리 나라 임금과 신하들의 죄는 더욱 피할 길이 없다.
황제가 대병으로 남한 산성을 포위하고, 또 한쪽 군사에게 명하여 강도(江都)를 먼저 함락하였다. 궁빈·왕자 및 경사(卿士)의 처자식들이 모두 포로로 잡혔다. 황제가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소란을 피우거나 피해를 입히는 일이 없도록 하고, 종관(從官) 및 내시로 하여금 보살피게 하였다. 이윽고 크게 은전을 내려 우리 나라 임금과 신하 및 포로가 되었던 권속들이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눈·서리가 내리던 겨울이 변하여 따뜻한 봄이 되고, 만물이 시들던 가뭄이 바뀌어 때맞추어 비가 내리게 되었으며, 온 국토가 다 망했다가 다시 보존되었고, 종사가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우리 동토 수천 리가 모두 다시 살려주는 은택을 받게 되었으니, 이는 옛날 서책에서도 드물게 보이는 바이니, 아 성대하도다!
한강 상류 삼전도(三田渡) 남쪽은 황제가 잠시 머무시던 곳으로, 단장(壇場)이 있다. 우리 임금이 공조에 명하여 단을 증축하여 높고 크게 하고, 또 돌을 깎아 비를 세워 영구히 남김으로써 황제의 공덕이 참으로 조화(造化)와 더불어 함께 흐름을 나타내었다. 이 어찌 우리 나라만이 대대로 길이 힘입을 것이겠는가. 또한 대국의 어진 명성과 무의(武誼)에 제아무리 먼 곳에 있는 자도 모두 복종하는 것이 여기에서 시작될 것이다.
돌이켜보건대, 천지처럼 큰 것을 그려내고 일월처럼 밝은 것을 그려내는 데 그 만분의 일도 비슷하게 하지 못할 것이기에 삼가 그 대략만을 기록할 뿐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서리와 이슬을 내려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오직 황제가 그것을 본받아
위엄과 은택을 아울러 편다
황제가 동쪽으로 정벌함에
그 군사가 십만이었다
기세는 뇌성처럼 진동하고
용감하기는 호랑이나 곰과 같았다
서쪽 변방의 군사들과
북쪽 변방의 군사들이
창을 잡고 달려 나오니
그 위령 빛나고 빛났다
황제께선 지극히 인자하시어
은혜로운 말을 내리시니
열 줄의 조서가 밝게 드리움에
엄숙하고도 온화하였다
처음에는 미욱하여 알지 못하고
스스로 재앙을 불러왔는데
황제의 밝은 명령 있음에
자다가 깬 것 같았다
우리 임금이 공손히 복종하여
서로 이끌고 귀순하니
위엄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오직 덕에 귀의한 것이다
황제께서 가상히 여겨
은택이 흡족하고 예우가 융숭하였다
황제께서 온화한 낯으로 웃으면서
창과 방패를 거두시었다
무엇을 내려 주시었나
준마와 가벼운 갖옷이다
도성 안의 모든 사람들이
이에 노래하고 칭송하였다
우리 임금이 돌아오게 된 것은
황제께서 은혜를 내려준 덕분이며
황제께서 군사를 돌리신 것은
우리 백성을 살리려 해서이다
우리의 탕잔함을 불쌍히 여겨
우리에게 농사짓기를 권하였다
국토는 예전처럼 다시 보전되고
푸른 단은 우뚝하게 새로 섰다
앙상한 뼈에 새로 살이 오르고
시들었던 뿌리에 봄의 생기가 넘쳤다
우뚝한 돌비석을
큰 강가에 세우니
만년토록 우리 나라에
황제의 덕이 빛나리라
우박이 내렸다.
2월 9일 계묘
비국이 아뢰기를,
"기전(畿甸)의 탕패는 다른 도에 비해 가장 심한데 또 칙사의 행차가 지나갔습니다. 농사철이 다가왔으니, 휴식시켜 동요되지 말게 하는 정사를 펴서 봄농사에 전념하게 해야 하는데, 남한 산성으로 군량을 수송하는 일이 마침 이 때에 있게 되었습니다. 유비 무환의 계책을 하루라도 늦출 수 없지만, 백성들의 사세가 매우 급박합니다. 경창(京倉)에서 운송한 것이 이미 1만 석이나 되는데, 수상(水上)에서 운송해야 할 것도 이 정도가 됩니다. 산성으로 운송해 들일 적에 인력을 지탱하기 어려울 것 같으니, 정지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닥쳐올 환난에 대비하기에 급하여 이 군량을 운송하는 거조가 있게 되었는데, 민폐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속으로 항상 미안하게 생각하였다. 수상의 군량을 이미 실어왔더라도 이미 운송해 들인 각읍은 그 일을 다시 정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권심(權淰)을 사간으로, 임담(林墰)을 부교리로, 최문식(崔文湜)을 정언으로 삼았다.
상이 하교하였다.
"이행진(李行進)은 원로를 모욕하였으니, 그의 패려하고 경망한 면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전조(銓曹)는 벼슬을 위해 사람을 가려 뽑을 생각을 않고 지금 또 청망(淸望)에 의망하였으니, 일이 매우 부당하다. 판서는 추고하고 낭청은 파직하도록 하라."
2월 10일 갑진
헌부가 전에 아뢴 심즙(沈諿)을 극변에 정배하는 일에 대해 아뢰니, 문외 출송하라고 답하였다.
좌의정 최명길(崔鳴吉)이 심양에서 돌아왔다. 상이 인견하고 이르기를,
"경에게 병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놀라고 근심하였다. 경이 지금 무사히 돌아오니 매우 기쁘다."
하니, 명길이 아뢰기를,
"다시는 용안을 뵙지 못하고 먼저 죽을 뻔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원병을 보내는 한 가지 일로 온 나라가 정신이 없었는데, 경이 지금 허락을 받아 가지고 돌아오니, 얼마나 기쁘고 다행한지 모르겠다."
하니, 명길이 아뢰기를,
"상께서 엄하게 면려하시었으므로 신이 사세의 어려움을 생각지 않고 무릅쓰고 주문(奏文)을 올려 다행히 허락을 받았으니, 모두가 성상께서 결단하신 일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어찌 주문에 감동되어 허락하였겠습니까. 당초 지원병을 보내라는 말은 대개 우리를 시험해 본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보기에 저들의 정세가 어떠하던가?"
하니, 아뢰기를,
"객이 많고 주인이 적어 그 형세가 위태로웠습니다. 그러나 기강이 서 있고 법령이 엄격하니, 이것이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는 까닭입니다. 큰아들이 불초하기 때문에 지난해 나은 자식으로 저사(儲嗣)를 삼을 뜻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예로부터 태자를 정하지 않고서 혼란하지 않은 나라는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아들이 참으로 개 돼지 같고 요토(要土)라고 하는 자가 스스로 호기(豪氣)가 있다고 한다 하니, 그렇다면 혹 내분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한(汗)이 친히 장병을 거느리고 몽고 지방으로 향한다 하는데, 이는 중국을 침범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니, 명길이 아뢰기를,
"군사의 기밀이 매우 엄해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한(汗)을 두 번이나 보았는데, 그 사람됨이 어떻던가?"
하니, 아뢰기를,
"말이 매우 부박하고 잡되지만 이 또한 희롱하고 아무렇게나 말하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의 한만 못한 듯하던가?"
하니, 명길이 아뢰기를,
"전의 한이 정한 법제는 혹 옛것에 맞는 점이 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들은 군사가 강하고 싸움을 잘 하는데 특별히 강무(講武)하는 일이 없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아뢰기를,
"호인들은 10세가 되면서부터 활쏘기와 말타기를 익혀 날마다 말을 타고 치달리며 사냥을 하니, 이것이 바로 강무입니다. 평안도는 재이가 심하니 참으로 두렵습니다. 압록강과 대동강이 모두 역류하고, 평양은 이리가 도성에 들어오고 닭이 저녁에 울었으니, 이는 이미 나타난 이변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해부터 유언 비어가 퍼져나가, 모두들 왜구가 반드시 쳐들어 올 것이라고 하고 있는데, 그 정형이 과연 어떤지 모르겠다."
하니, 명길이 아뢰기를,
"차왜(差倭)가 갑자기 7조목의 일을 가지고 와서 요청하였으니, 그 정형이 이상하다고 할 만합니다. 남한 산성을 물려 수축하는 거조는 늦출 수 없을 듯하나, 청나라에서 듣는다면 힐문할 단서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신의 소견으로는 지금은 단지 무너진 곳만 수축하게 하고 흩어져 달아났던 군사들의 벌포(罰布)를 성 안에다 운송해 두고서 서서히 사세를 보아가면서 하더라도 무방하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영남의 산성은 수축하지 않을 수 없는데, 승군(僧軍)을 모두 남한 산성을 수축하는 역사에 보낼 경우 영남의 산성을 수축할 때에는 누구를 써야 하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남한 산성은 적의 침입을 받는 중요한 곳이기 때문에 증축하는 거조가 있게 된 것인데, 공역이 너무 커서 나 또한 걱정이다. 수어사(守禦使)가 이 일을 전적으로 주관하고 있으니, 경은 그와 함께 서로 의논하여야 할 것이다."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세공(歲貢)에 대해 저들이 줄여줄 뜻이 있는 듯한데, 신이 말을 꺼내지 못하였습니다. 가을에 사신이 갈 적에 감해 주기를 청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초에 이미 연한을 물렸는데, 또 줄여 주기를 청한다면 노하게 할 단서가 없지않다. 내 생각으로는 일년간 조공을 보낸 뒤에 줄여주기를 청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세공미(歲貢米)는 수송하는 것이 마련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장차 어찌했으면 좋겠는가?"
하니, 명길이 아뢰기를,
"지금 남쪽 변경의 우려가 매우 심하니, 혹시라도 급한 경보가 있게 된다면 어떻게 방어하겠습니까. 구원을 청하는 뜻을 저들에게 일찍 말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섬 오랑캐가 우리 나라로 쳐들어온다면 청나라도 위태로울 것이니, 반드시 와서 구원할 것이다. 다만 승부가 어떨지 모르겠다."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신이 외국으로 사신을 갔다가 오랜 뒤에 돌아왔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대각의 의논이 이미 정해졌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까지 분분하다고 하니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김류가 당국(當局)하던 때 사람들이 혹 그를 부족하다고 여겼지만, 장상(將相)의 권한을 겸하고 있어 자못 위풍이 당당하였기 때문에 나라가 그에게 의지했으며, 사람들도 꺼려했습니다. 신의 소견으로는, 그의 죄가 무겁지만 이미 오래되었으니 이제 와서 논집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생각합니다. 심기원(沈器遠)을 남한 산성으로 이배(移配)하는 일은, 상께서 그 죄의 경중을 잘 알고 계시니 폐기하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이 사람은 실로 쉽게 얻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기원은 어떤 재주가 있는가?"
하자, 명길이 아뢰기를,
"기량이 자못 관대하고 일에 임해서는 동요하지 않습니다. 전에 형조 판서가 되었을 적에도 그 직책을 잘 수행하였으니 재주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 소견으로는 기원이 형조 판서가 되었을 적에도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다.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사람을 얻는 데 달렸다. 무사할 때에도 반드시 이를 우선해야 하는데, 하물며 이처럼 어렵고 걱정스러울 때이겠는가. 조정 안에 탁월하게 뛰어난 재주가 있는 사람을 보지 못하겠으니, 초야에 그런 사람이 있는가?"
하니, 명길이 아뢰기를,
"옛사람 중에는 한 마디 말로써 그가 재주가 있는지를 알아 본 사람이 있지만 이런 것은 신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반드시 두루 시험해 본 뒤에야 알 수 있습니다. 이경증(李景曾)이 사신 접대의 책임을 받았을 때, 일을 처치하는 것이 주밀하여 청나라 사람들이 어진 재상이라 일컬었으니, 그의 재주를 크게 쓸 만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어려운 일을 만나지 않으면 이기(利器)를 분별할 수 없다. 남쪽 변방이 걱정스럽기에 방백으로 제수하여 시험하고자 한 것이다."
하였다.
2월 11일 을사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친 뒤에 동지경연 전식(全湜)이 아뢰기를,
"신이 지금 헌부에 있는데 헌부의 관원이 갖춰지지 않아 개좌(開坐)하여 날인할 수도 없고, 추감(推勘)하여 조율할 일도 적체됨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비록 관원을 다 채우지는 못하더라도 요즈음 서경(署經)하는 예에 따라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검토관 남노성(南老星)이 아뢰기를,
"지난해 알성(謁聖)하는 거조를 행하려 하다가 옥후가 미령하시어 끝내 거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봄날씨가 화창하니, 전알(展謁)하는 예를 그만둘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 또한 그렇게 하려고 하였다. 해조로 하여금 날을 가려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노성이 또 아뢰기를,
"난이 일어난 뒤로 도성 안에 사는 사서인(士庶人)이 적어 여염집이 텅 비었는데, 사람들이 대부분 헐어버리니 한성부로 하여금 검칙하여 금단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옳다.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2월 12일 병오
김영조(金榮祖)를 대사성으로, 한형길(韓亨吉)을 행 좌승지로, 김광혁(金光爀)을 집의로, 최유해(崔有海)·유경집(柳景緝)을 장령으로 삼았다. 형길은 사람됨이 포악하고 패려하였다. 수령이 되었을 적에 사람을 많이 죽여 여러 차례 대각의 비평을 받았는데, 후설의 직임에 제수되니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유해는 사람됨이 기(氣)가 많고 일꾸미기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송호부(宋戶部)015) 의 말을 올려 추숭(追崇)의 의논을 조성하다가 사류에 버림을 받았는데, 이때 비로소 이 직에 제수되었다.
선천(宣川)의 백성들이 아내와 자식을 거느리고 심양으로 도망해 갔는데, 청나라에서 잡아 우리 나라로 돌려보냈다. 상이 비국으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였는데, 비국이 《대명률(大明律)》의 ‘본국을 등지고 다른 나라로 몰래 들어가기를 꾀한 법’에 따라 금부로 하여금 의율(擬律)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이에 금부가 수모인(首謀人)은 참형(斬刑)에 처하고, 그의 처첩과 자녀들은 노비로 삼아 속공(屬公)하고, 그의 부모와 조부모·손자·형제들은 모두 유 이천리(流二千里)로 안치하기를 청하였는데, 따랐다.
2월 13일 정미
상이 후원에 나아가 7국(局)의 출신을 시재(試才)하였는데, 입격한 자가 모두 5명이었다. 장원한 사람에게는 은병 1부(部)와 목면 10필을 지급하고, 그 다음은 차등있게 시상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여러 장수들 중에 활쏘기를 원하는 자가 있거든 쏘아라."
하니, 병조 판서 이시백과 능천군(綾川君) 구인후(具仁垕)가 들어가 쏘았다. 승지 신득연(申得淵)이 아뢰기를,
"도감 출신들이 포 쏘는 것을 천한 기술로 여기고 있으니, 오늘 시위하는 장사들도 시험삼아 쏘게 하여 그것이 천한 기술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온당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총부(摠府)의 낭청과 선전관을 아울러 시험하게 하라."
하였다. 시백이 땅에 엎드려 아뢰기를,
"친림하신 날 격려하는 거조가 없을 수 없으니, 신 또한 시험하기를 원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병판이 포를 쏘겠다고 자청하니, 이는 매우 좋은 일이다."
하였다. 인하여 하교하기를,
"포를 쏘는 기술은 지위가 낮은 자도 모두 싫어 피하는데, 이시백이 몸소 먼저 시험하기를 원하여 사졸들을 격려하는 계기로 삼으니, 매우 가상하다. 내구마 1필을 하사하라."
하였다.
2월 14일 무신
비국이 아뢰기를,
"전라 감사 원두표(元斗杓)는 임기가 만료되어 체차해야 하는데, 이 직임을 잘 수행할 만한 적임자를 얻기가 어려우니, 1년을 더 유임시키소서."
하니, 따랐다.
함경도가 병화를 당한 뒤에 또 흉년을 만나 사망자가 많았다. 감사 목장흠(睦長欽)이 장계를 올려 공물을 헤아려 줄여달라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
2월 15일 기유
관학 유생들을 전강(殿講)하였다. 장원한 자는 회시에 직부하게 하고, 그 나머지는 차등있게 논상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조정에서 개성 유수 이경헌(李景憲)으로 하여금 본부 사람으로 사절(死節)이 현저한 자를 채록하여 아뢰게 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경헌이 남녀 26명의 성명을 기록하여 아뢰었다. 예조가 전례에 따라 정표하여 포상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2월 16일 경술
햇무리가 지고 날이 어두웠다.
조정에서 바야흐로 강도를 경리하자는 의논이 있었는데, 이홍주(李弘胄)가 김신국(金藎國)이 재주와 지혜가 남음이 있어 강도의 일을 맡길 만하다고 힘껏 진달하여 이미 그를 유수에 제수하였다. 그런데 비국이 또 전 유수 신계영(辛啓榮)이 재주있는 젊은 사람이니 유임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신국이 상차하기를,
"상처를 어루만지고 불탄 나머지를 수습하여 전날의 토대를 회복하는 것도 한가로운 사무가 아니니, 신의 직명을 체차하고 전임자에게 도로 제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비국이 아뢴 것은 닭을 잡는 데 어찌 소잡는 칼을 쓰겠느냐는 뜻이지, 경을 불가하다고 한 것은 아니다. 사양하지 말고 속히 가도록 하라."
하였다.
2월 17일 신해
해가 붉어지고 빛이 없었다.
애초 조정에서 서산과 태안의 소금과 철의 이로움으로 심양의 세폐(歲幣)를 마련하는 데 돕고자 하여, 호조 판서 심열(沈悅)로 염철사(塩鐵使)를 겸하여 맡게 하였다. 심열이 그 일을 중하게 하고자 하여 대시(臺侍)의 신하로 막관(幕官)을 삼기를 청하였다. 물의가, 소금과 철의 이익을 독점하는 것은 원래 성세의 일이 아니며, 단지 두 읍의 소금과 철을 위해 별도로 필요 없는 국(局)을 설치하고 또 막료를 뽑는 것은 마땅한 처사가 아니라고 하였다. 심열이 이에 상차하기를,
"예로부터 재물을 다스리는 자치고 백성들을 소요롭게 하지 않고서도 성공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전에 각 아문에서 장사를 시작하자 백성들의 원망이 매우 많았으니, 오늘날의 경계로 삼기에 충분합니다. 더구나 지금은 큰 난을 겪은 뒤로 부역이 번거롭고 무거워 백성들이 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에 또 염철사의 호칭을 듣게 되면 백성들이 반드시 더욱 근심하고 원망하게 될 것이니, 작은 일이 아닙니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이 호칭을 정파하고 호조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되, 두 읍의 수령을 특별히 재국이 있고 풍력(風力)이 있는 사람을 가려 맡겨 성과를 책임지우는 것이 더 좋습니다."
하였는데, 비국도 그렇게 여기니, 상이 따랐다.
청나라가, 유림(柳琳)이 사죄(死罪)가 있는데 황제가 특별히 사면하였으니 들어와 사례해야 한다고 하였다. 상이 유림에게 명하여 심양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장령 김응조(金應祖)가 상소하여 8조목을 진달하였다. 그 중 하나에,
"대의(大義)를 밝히는 일입니다. 사대와 교린을 아울러 시행해 어긋나지 않게 하는 것이 고금에 통하는 의리입니다. 지난날 조정에서 절의를 굳게 지키고 이웃 나라와의 우호를 가벼이 끊으니 신은 오늘날과 같은 일이 있을 줄을 안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사세가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으로 종사와 생령을 위하여 화호하는 데 뜻을 굽히시었으니, 천지의 귀신이 반드시 전하의 마음을 양찰할 것입니다. 한스러운 것은, 당초 조약 중에 중국을 공격하는 데 지원병을 보내라는 것과 그들과 왕래를 끊으라고 한 두 조항에 대해서 호가(扈駕)하는 여러 신하들이 마땅히 의리에 근거해 힘껏 간쟁해야 하는데, 끝내 감히 입을 열지 않았으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습니까.
들리는 소문에 징병을 그쳐달라고 요청한 일은 이미 저들의 허락을 받았다고 하니, 실로 국가의 복입니다. 그러나 사신을 왕래시키는 데 대한 한 조항은 그대로 있으니, 전년에 보내지 않고 금년에도 보내지 않는다면 부로(父老)들이 탄식하고 유식자들이 눈물을 닦을 것입니다. 대체로 그것은 천리(天理)와 인정으로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들에게 ‘우리 나라는 중국과 군신과 부자의 관계이다. 대국에서 바야흐로 세상에 충성과 효도를 요구하고 있는데 자식으로 하여금 아비를 배반하고 신하로 하여금 임금을 배반하게 하는 것이 옳은가?’라고 청한다면 지성으로 하는데도 감동하지 않는 경우는 아직까지 없었습니다. 삼가 전하께서 묘당에 자문하여 선처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소를 주달하였으나 답하지 않았다.
2월 18일 임자
달이 심성(心星)의 제1성을 범하였다.
강석기(姜碩期)를 이조 판서로, 이경석(李景奭)을 지경연으로, 심동구(沈東龜)를 부교리로, 박종부(朴宗阜)를 부수찬으로, 김대건(金大乾)을 전라 병사로 삼았다.
대신과 비국의 당상이 면대를 청하니 상이 불러 보았다. 좌의정 최명길이 나아가 아뢰기를,
"헌부에서 공물을 혁파하여 세폐(歲幣)를 보충하자는 의논이 있었다니, 이는 중대한 일입니다. 성상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종조에서 토지를 맡기고 공물을 정한 것은 그 뜻이 있는 것인데, 법이 오래되어 폐단이 생겨 이런 방납(防納)의 폐단이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모두 혁파하는 것 또한 근거가 없는 것으로, 묘당도 반드시 그 뜻을 알 것이다."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큰 난리를 겪은 뒤에 크게 변혁하여야 하기에 이런 위를 덜어 아래를 이롭게 하는 거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잘 처리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낭패하고 말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혁파하지 않더라도 혁파하지 않는 이유를 명백히 밝힌 뒤에 혁파하지 않는 것이 옳다. 그만둘 수 없다면 혹 대동법(大同法)을 통행하거나, 토산물을 납입하도록 허락을 해서 편리한 대로 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 모두 다 혁파하는 것은 옳지 못한 듯하다."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세공(歲貢)에 관한 일은 한번 사리에 합당하게 하여 거행하는 바탕을 삼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소견으로는, 저들이 이미 연한을 물려 정하였는데 우리가 한번도 갖춰 보내지 않고, 또 갑자기 줄여 달라고 청하면, 혹시라도 그들의 화를 돋우게 될까 염려된다."
하였다. 이시백이 아뢰기를,
"힘이 자라는 것은 하는 것이 옳습니다. 억지로 다투다 혹시라도 그들의 화를 돋우게 되면 전에 들인 공을 다 버리게 될 것이니,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스스로 우리 나라를 보전해 주었다고 여기고 있다. 월(越)나라가 오(吳)나라를 섬길 때, 말이 매우 겸손하였고 폐백이 매우 후했었다. 월나라에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훈련시키며 기르고 재물을 모으기를 20년 동안 한 뒤에야 오나라 수도를 못으로 만드는 공을 이룰 수 있었으니016) , 나라가 망할 지경에 어찌 스스로 잘난 체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외방이 군사를 첨가해 방비하는 일로 인해 매우 소란합니다. 전라도의 주사(舟師)를 통영(統營)으로 보내는 것은 옳을지 모르나, 충청도의 주사를 전라 수영(全羅水營)으로 보내는 것은 더욱 옳지 않습니다. 지금 변란이 어느 곳에서 발생할지 어찌 미리 알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 두 곳으로 다 보낸다면 근본이 되는 강화를 어떻게 바로 버릴 수 있겠습니까. 내지의 방수도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서해에도 우려할 만한 일이 있는가?"
하니, 명길이 아뢰기를,
"어떻게 다른 일이 없을 것이라고 보장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계책이 매우 많은 것은 옛날 사람이 기롱한 바이다. 경이 남의 말에 흔들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국가에서 일을 할 적에 어찌 사람마다 계책을 내게 하고 사람마다 기쁘게 할 수 있겠는가. 오직 그것의 이해와 시비를 헤아려 마땅함을 잃지 않는 데 달려 있을 뿐이다."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남쪽 지방이 걱정되기는 하지만 현재 흔단이 없습니다. 변란이 있을 경우 주사가 제대로 역할을 해 낼지는 의문이지만, 근본이 먼저 흔들리면 어찌 우려할 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일은 매우 중대하니, 십분 상량하여 후회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근래 민정(民情)이 마치 교만한 자식이 아비를 업신여기듯 하며, 힘없고 나태함도 다시 전과 같다. 국가에 한 가지 일도 할 만한 것이 없으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대신은 모름지기 발언을 삼가서 뭇 의논을 진정시켜야지 그들의 의견에 흔들려 주관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아침 저녁으로 변을 대비하고 있는 이 때, 서울에 있는 장사(將士) 중에 한 사람도 부릴 만한 자가 없습니다. 생각건대 주(周)나라 때도 어짊을 의논하고 재능을 의논하고 공을 의논하는 법이 있었습니다. 신경원(申景瑗)·이시방(李時昉)·심기원(沈器遠) 등은 모두 석방하여 호위하는 직임으로 삼으소서. 김자점을 율에 비추어 죄를 주자는 아룀과 같은 것은 또한 공의이니 혹 한 층을 더해 제주에다 안치하더라도 해로울 바가 없을 듯합니다. 심연(沈演)은 전에 경상 감사가 되었을 때 현저하게 치적이 있었으니, 또한 용서하여 방백의 직임에 제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지 않았다.
2월 19일 계축
간원이 아뢰기를,
"요즈음 도성 안의 인적이 없는 외진 곳에서 기병과 보병이 떼를 지어 매를 놓아 사냥을 하고 있습니다. 모양이 아름답지 못하니, 유사로 하여금 적발하여 중하게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때 능천군(綾川君) 구인후(具仁垕)가 창의동(彰義洞)에서 매를 놓아 사냥을 했기 때문에 논핵한 것이다.
좌의정 최명길이 첫번째 정사(呈辭)하니, 상이 불윤 비답을 내리라고 명하였다.
이조 판서 강석기(姜碩期)가 상차하기를,
"신이 지난해 변란 때 곧바로 죽지 못해 거듭 헌관의 준열한 논핵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구차히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염치마저 잃었다는 등의 말로 죄안(罪案)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아도 마음이 실로 부끄럽고 두렵습니다. 그런데 어찌 감히 버젓이 이조의 장관 자리에 있으면서 피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빨리 고쳐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대관(臺官)의 말이 실로 지나친 것이니 따지지 말고 속히 출사하라."
하였다.
2월 20일 갑인
유성이 관색성(貫索星) 아래에서 나와 하고성(河鼓星) 위로 들어갔다.
상이 하교하기를,
"좌상이 또 사직하는 단자를 올렸다. 그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으나, 국사로 논한다면 한심하다고 할 만하다. 이처럼 어렵고 근심스러운 때에 절대로 하루라도 정승이 없어서는 안 되니, 승지를 보내 돈유하라."
하였다. 이때 영상 이홍주는 병으로 정고(呈告)하였으며, 최명길은 인대할 때 아뢴 말이 하나도 윤허를 받지 못하였고 또 견책하는 비답이 많았으므로 다음날 인혐하여 사직하였기 때문에 이 하교가 있게 된 것이다.
2월 21일 을묘
영의정 이홍주가 또 상차하여 면직을 청하자, 상이 우대하는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신경원과 심연을 석방하라고 명하고, 이어 경원을 총융사 중군으로 삼았다. 살펴보건대, 경원은 부원수(副元帥)가 된 몸으로 적의 기세를 막지 못하여 임금이 치욕을 당하게 하였고 패배하여서는 포로가 되어 구차히 목숨을 부지하였다. 심연은 영남의 방백으로서 남한 산성이 위급할 때 즉시 난에 달려오지 않고 여주(驪州)에 이르렀다가 병사의 군대가 패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다시 군병을 조발한다고 핑계하고서 되돌아 조령(鳥嶺)을 넘어갔다. 둘 다 군율을 면하였으니 이미 모두 실형(失刑)한 것인데, 유배되자마자 다시 옮기고 또 완전히 풀려나게 되었다. 나라의 군율이 한결같이 아이들의 장난이 되었으니, 참으로 통탄할 만하다.
2월 22일 병진
유성이 헌원성(軒轅星) 아래에서 나와 진성(軫星) 위로 들어갔다. 유성이 직녀성(織女星) 아래에서 나와 미성(尾星) 위로 들어갔다.
헌부가 아뢰기를,
"신경원은 부원수가 된 몸이니 요충지에서 적병을 맞아 힘껏 싸워 막는 것이 바로 그의 직임입니다. 마부대(馬夫大)가 거느린 군사가 수백 명에 불과했는데, 그가 지키고 있던 성 밑으로 지나가는데도 한 발의 화살도 쏘아 저항하지 못하고 임금에게 적병이 이르게 하였습니다. 끝내는 패배하고 혼자 살아나 포로가 되어 구차히 목숨을 부지하였으니, 경원은 적병에게 이미 죽고 난 혼입니다. 군율을 잃은 죄는 김자점과 다름이 없으며 나라를 욕되게 한 죄는 그보다 심한 점이 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그의 죄를 용서하고 또 이어 녹용(錄用)하기까지 하시니, 물정이 해괴해 하고 장사(將士)들이 침을 뱉고 욕을 합니다. 석방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논한 바가 실상이 아닌 듯하다. 실상이 아닌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옳다."
하였다. 간원이 또한 이를 가지고 논계하니, 답하기를,
"정상에 용서할 만한 점이 있다. 중군의 직임에 녹용한 것이 불가한 것은 아니다."
하였다.
2월 23일 정사
양사가, 윤방과 김류를 안치하고 김자점은 율에 비추어 죄를 정하자는 일을 연달아 아뢰니, 답하였다.
"윤허하지 않는다. 김류는 문외 출송하라."
좌의정 최명길이 상차하기를,
"지난번 신이 사명을 받들고 갔다 돌아올 때, 조정에서 몇 가지 처치한 일이 있다는 말을 중도에서 듣고 마음속으로 의심을 가졌었습니다. 도성에 들어오니 많은 사람들이 수군거리는데 모두 대단한 잘못이라고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병든 몸을 이끌고 면대를 청하여 망령되이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의가 부족하여 누차 엄한 꾸지람을 내리시게 하였습니다. 물러나와 집으로 돌아오니, 부끄럽고 두려워 죽고만 싶었습니다.
사리는 단서가 많고 잘잘못은 살피기 어려우니, 상하의 견해가 어찌 다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토론하여 지극히 당연한 데로 귀결되기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순임금의 조정에서 옳으니 그르니 따지던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만약 목소리와 얼굴빛을 사납게 하고 뇌성벽력처럼 노여움을 진동하여 아랫사람들로 하여금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감히 다하지 못하게 하면, 건도(乾道)가 지나치게 높아 아랫사람들의 실정이 위로 통하지 않을 것이니, 아마도 국가의 복이 아닐 듯합니다. 사람들이 ‘임금은 대신을 예로써 우대하여 뭇 신하들과는 다르게 대해야 한다.’ 하지만, 신과 같이 무상한 사람이 어찌 감히 대신으로 자처하겠습니까.
아, 오늘날이 어떤 때입니까. 이변이 거듭 나타나고 유언 비어가 들끓고 있으며,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고 나라의 형세는 계란을 쌓아놓은 것보다 위태롭습니다. 봄 농사철이 다가왔는데 가뭄의 징조는 심하고, 소 대신 사람이 논밭을 갈아야 하니 공력이 배가 듭니다. 열 사람이 농사를 폐하면 열 집이 굶주리고, 백 사람이 농사를 폐하면 백 집이 굶주리게 됩니다. 오늘날 농사를 폐한 사람이 열 사람 백 사람뿐만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제위치를 잃어도 치화(治化)를 손상하기에 충분한데, 만 집이 유리하고 있으니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수군을 증원하여 방어하는 것은 큰 이로움을 발견하지 못하겠고, 포루(砲樓)를 설치하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 움직이다 후회하기 보다는 차라리 가만히 있으면서 기다리는 것이 낫습니다. 신이 바야흐로 물러나기를 구하면서도 이점에 대해 고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으니, 심정 또한 슬프기만 합니다. 지나간 역사를 살펴보니, 대신으로서 그 지위에 합당치 않을 경우에는 사장을 올리지 않아도 책면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오늘날처럼 일이 많을 때이겠습니까. 체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은 굳이 사양하지 말고 안심하고 행공하라."
하였다.
2월 24일 무오
대낮에 어둠침침하였다.
전 대사간 조성립(趙誠立)이 죽었다. 성립은, 집안에서는 효도와 우애가 있었고, 자기 자신을 단속함에는 청고(淸苦)하였다. 그가 죽자 사람들이 대부분 애석하게 여겼다.
어영군(御營軍)의 사수(射手)를 시재(試才)하였다. 장원한 자는 곧바로 회시에 나아가게 하고, 그 다음은 각각 궁전과 면포를 차등있게 내려주었다. 포수(砲手)로 장원한 사노(寺奴)는 역을 면제시켜 주고, 그 다음은 각각 면포를 차등있게 내려주었다.
2월 25일 기미
이목(李楘)을 대사간으로, 이경석(李景奭)을 부제학으로, 임담(林墰)을 사간으로, 윤강(尹絳)·권우(權堣)를 교리로 삼았다.
2월 28일 임술
이조 판서 강석기가 네 번째 상차하여 면직되기를 구하니, 허락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태안 군수 정호서(丁好恕)는 지난번에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변방 수령에서 체직되었는데, 또 단망으로 갑자기 내지에 제수되었습니다. 호서가 아직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도 다행이라 할 수 있는데, 지금 어찌 평이하고 험난한 곳을 가려서 처할 수 있겠습니까. 체차를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논한 것이 실정이 아닌 듯하다.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한흥일(韓興一)을 좌부승지로, 남이공(南以恭)을 동지경연으로 삼았다.
우의정 신경진이 치계하였다.
"신의 일행이 심양에 도착하여 다음날 호부(戶部)로 가니, 용장(龍將)이 묻기를 ‘무슨 일로 왔는가?’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책봉해 준 것과 징병에 대한 청을 준허해 준 두 건에 대해 사은하러 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양장(兩將)이 말하기를 ‘책봉해 준 데 대해 사은하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이른바 징병에 대한 청을 준허해 준 것에 대해서는 어떤 결정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하기에, 신들이 답하기를 ‘사은사가 돌아올 때 성지(聖旨)를 밝게 내리시고 참작하겠다고 유시하였다. 황은이 이와 같은데 어찌 사은하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양장이 말하기를 ‘그대들의 뜻에 연한을 정해 징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영원히 징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칙서 안에는 연한을 정한다는 말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또 향화인(向化人)과 시녀(侍女) 등의 일을 제기하기를 ‘각양의 쇄환인 수는 얼마나 되는가?’ 하기에, 신들이 답하기를 ‘향화인 1명, 한인(漢人) 9명, 도망쳐 돌아온 우리 나라 사람 1명을 압송해 왔다.’ 하였습니다. 양장이 말하기를 ‘어찌 그리 적은가? 그리고 시녀는 어찌하여 데려 오지 않았는가? 혼인하는 일에 있어서 단지 다섯 사람만 써서 보였기 때문에 접견할 때 다시 몇 명을 더 써서 보내라는 뜻을 전달하였는데, 이번 행차에 써가지고 오지 않았는가?’ 하기에 신들이 답하기를 ‘향화인은 체포한 자가 단지 이 사람뿐이며, 시녀는 행동거지를 가르치고 연습시켜 뒤에 들여 보낼 것이다. 혼인할 가문을 몇 집 더 추가하는 일은 칙사가 떠날 때 어떤 결정이 있었다고 듣지 못했는데, 지금 어찌하여 제기하는가?’ 하였습니다. 그러나 양장이 신들로 하여금 연유를 갖추어 치계하라고 하였습니다."
2월 29일 계해
유성이 진성(軫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상이 후원으로 나아가 입직하는 장사(將士)들을 시사(試射)하였다. 한량(閑良) 김인백(金仁伯) 등 우등한 3인은 곧바로 전시에 나아가게 하고, 장원한 자에게는 반숙마(半熟馬) 1필을 더 하사하였으며, 내금위 정승립(鄭承立) 등 3인은 변장에 제수하고, 가선 대부 정덕승(鄭德昇) 등 23인에게는 활과 화살을 하사하고, 한량 이상연(李尙淵)·김경남(金敬男)·이유일(李有一) 등 3인에게는 곧바로 회시에 나아가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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