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일 을축
유성이 북하성(北下星) 아래에서 나와 위성(胃星) 위로 들어갔다.
강석기를 예조 판서로, 최혜길(崔惠吉)을 대사간으로, 김홍욱(金弘郁)을 지평으로, 이상형(李尙馨)을 수찬으로 삼았다.
3월 4일 정묘
간원이 아뢰기를,
"숙천 부사(肅川府使) 위정철(魏廷喆)은 전에 영흥 부사(永興府使)로 있다가 봉고 파직당할 때 몰래 감관(監官)에게 부탁해 50석이 들어 있는 쌀뒤주를 잡물로 덮어 빈 뒤주처럼 꾸며서 차사원을 속이고 끝내 집으로 싣고 갔습니다. 그리고 전에 뇌물을 바친 무리들이 마당에 가득히 몰려와 힐책하자 그 물건을 되돌려 주었습니다. 그의 간사하고 외람되고 탐욕스럽고 비루한 일이 매우 통탄스럽고 놀라운데, 곤수(閫帥)의 의망에 참여하기까지 하고, 다시 서로(西路)의 큰 읍에 제수되었으니, 장차 어떻게 다른 사람을 격려하겠습니까. 사판에서 삭제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파직하라고 답하였다.
3월 5일 무진
좌의정 최명길이 출사하였다.
이상형(李尙馨)을 장령으로, 홍명일(洪命一)을 이조 정랑으로, 김진(金振)을 정언으로 삼았다.
동지 이경여(李敬輿)가 상소하기를,
"문경(聞慶) 북쪽 조령(鳥嶺) 남쪽에 산성 하나가 있는데 이름을 어류(御留)라고 합니다. 어느 때의 일인지 모르겠는데, 어떤 사람은 고려 때 어가가 머물렀던 곳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역시 자세한 유래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성 안의 넓이는 남한 산성의 십분의 구나 되며, 형세의 험하고 견고함은 남한 산성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동쪽과 남쪽은 만 길이나 되는 절벽이어서 새나 짐승도 넘기가 어려우며, 북쪽은 동쪽이나 남쪽에 비해 조금 낮으나 또한 사람이 통행할 수 있는 곳은 아니니, 대략 성첩(城堞)을 쌓으면 안심할 수 있습니다. 서쪽은 긴급함을 방어할 곳이라고 하는데 통할 만한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남한 산성의 가장 험한 곳에 비해 몇 배 더 험하고 크고 작은 암석이 흙더미처럼 쌓여 있으니, 공역을 매우 적게 들이고도 또한 범접하기 어려운 형세를 이룰 수 있습니다.
성 안에는 샘물과 시내가 여러 길로 다투어 흐르며, 수목이 꽉 들어차 있어 취해 써도 다하지 않아 천 칸의 큰 집을 만들 수 있고 몇 년의 땔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이 만든 험난한 형세가 실로 동남쪽에서 제일이 됩니다. 그 안에는 4, 5만 명의 군사를 수용할 수 있고, 1, 2만 호를 둘 수 있습니다. 만약 조금만 수축한다면 집을 경영하고 식량과 마초를 저장하여 영원히 함락되지 않는 기지를 만들 수 있으니, 남쪽과 북쪽에서 비록 준동을 하더라도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백만의 군사가 사방에서 진격해 들어와도 성 안의 사람들은 마음놓고 편히 잠잘 수 있을 것이니, 가장 안전한 곳은 이곳 말고는 다른 곳이 없습니다.
이곳은 동쪽으로는 태백산·소백산과 연결되어 있고, 북쪽으로는 월악산(月岳山)과 통하며, 서쪽으로는 백화산(白華山)과 접해 있는데, 그 줄기가 뻗어 속리산(俗離山)을 향하고 또 곧바로 덕유산(德裕山)·지리산(智異山)으로 연결되어 바다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또 북쪽에는 4군이 있는데, 그대로 강원도로 이어집니다. 충주는 오른쪽에 있고, 안동·풍기·영주는 왼쪽에 있으며, 낙동강이 남쪽으로 뻗쳐 있고, 한강 상류가 뒤쪽에서 흘러내립니다. 험준한 언덕과 높은 봉우리에는 구름이 걸려 해를 가리고, 사잇길이 서로 연결되어 어느 곳이든 통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적을 제압하는 형세가 마치 목을 조르고 등을 어루만지는 듯합니다. 산골짜기가 멀리 뻗쳐 있고 깊은 구렁이 이리저리 얽혀 있어 백 리 안에는 발붙일 곳이 없으니, 비록 천하의 대병이라고 해도 포위해 머물 리가 없습니다.
성 북쪽의 월악(月岳), 동쪽의 작성(鵲城), 서쪽의 조령(鳥嶺)·희양성(曦陽城), 남쪽의 고모(姑母)·토천(兎遷)은, 어떤 것은 절험한 산성이고 어떤 것은 사다리 길의 중관(重關)입니다. 이곳에 군사 몇 명을 배치해 주둔시키면 서로 성원할 수 있고 호령을 통할 수 있습니다. 호서·호남·영남의 3도와 관동·관북 및 기전(畿甸)을 또한 제압할 수 있습니다. 산길이 사방으로 나 있어 명맥(命脉)이 막히지 않으니, 산길을 따라 식량을 운송하면 먹을 것이 부족한 데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서북쪽에 일이 있으면 어가(御駕)가 머무는 곳으로 삼고, 남쪽 지방에 경보가 있을 경우 관방(關防)하는 곳으로 삼는다면, 민심은 믿는 바가 있고 국세는 저절로 장해질 것입니다.
다만 군량을 마련하기 어려운 것이 가장 염려스럽습니다. 영외(嶺外)의 11개 고을에서 거둔 세미(稅米)를 고개를 넘고 험한 곳을 건너 멀리 강창(江倉)으로 수송하려면 우마가 넘어지고 민력이 다합니다. 만약 해마다 이곳으로 운반하게 하여 봄에 빌려주었다가 가을에 거두어들이면, 백성들의 폐단을 없애고 군량을 넉넉히 할 수 있으며, 민심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다만 나라에 저축된 것이 넉넉치 않은데 수응하는 것은 날로 번다하니, 만약 크게 변통하고 크게 절약하여 회계(會稽)에서와 조구(曺丘)의 뜻017) 을 분발하지 않으면 이것을 의논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는 성명께서 마땅히 스스로 힘쓸 일입니다."
하였는데, 비국이 본도 감사로 하여금 익숙히 강구하여 아뢰게 하라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 그 뒤에 경상 감사 이경증(李景曾)이 치계하기를,
"신이 병사 김응해(金應海) 및 문희성(文希聖) 등과 함께 어류 산성으로 가서 살펴보니, 산성의 터가 조령 큰길의 요충지에 웅장하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바깥쪽은 매우 험난하고 산줄기가 멀리 면면히 뻗어 비록 10만의 적병이라도 포위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명령이 사방에 통할 수 있고 시냇물은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습니다. 다만 성 안이 지극히 험하고 내면(內面)도 높고 가파르기 때문에 동·서·남·북으로 서로 구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수축하여 진(鎭)을 만든다면 서쪽과 남쪽에 경보가 있을 경우 모두 믿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터를 닦고 성을 쌓는 데 드는 공력을 헤아리기 어려우니, 비록 온 도의 민력을 다 쓰더라도 1년 안에 공역을 마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병사가 멀리 진주(晋州)에 있어서 진을 떠나 올 수도 없고, 문경 현감 또한 주관할 수 없으니, 모름지기 먼저 적임자를 얻어 이 임무를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성을 쌓은 뒤에도 지킬 수 없습니다. 함창(咸昌)·용궁(龍宮)·산양(山陽)을 합현(合縣)하자는 의논은 참으로 이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연혁 또한 관계된 바가 중대하니, 묘당으로 하여금 상량하여 처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선조조에 정승 유성룡이 이 성을 수축하자고 의논하였으나 얼마 후에 자리에서 물러나자 일이 정지되어 실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지금까지도 본도의 백성이나 선비로서 유식한 자는 개탄하지 않는 이가 없는데, 이 의논을 듣자 모두 쌓지 않을 수 없다고 합니다. 다만 듣자니, 본성은 주위가 넓고 커서 백성들의 힘을 허다하게 써야 하고, 수목이 빽빽히 들어서 있어 형세를 살피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니 먼저 감사로 하여금 승장(僧將)을 가려 뽑아 중들을 모집해서 사찰을 창건하고 수목을 베어내며 도로를 만들게 한 뒤에, 다시 지세의 평이하고 험난함을 살펴서 투입해야 할 역군과 식량이 얼마나 되는지를 정해 처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크게 성을 쌓는 역사를 일으키고자 하면 작은 문경현으로서는 마련할 수 있는 바가 아니며, 분할해서 거행하는 것 또한 매우 중대한 일입니다. 그러니 성을 쌓을 것인지를 완전히 정한 뒤에 헤아려 조처하더라도 늦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6일 기사
의주 부윤 임경업(林慶業)이 치계하기를,
"본주에 사는 전 판관 최효일(崔孝一) 등이 일찍이 한인(漢人) 장수기(張壽祺)와 서로 알고 지냈습니다. 수기가 배를 타고 와서 효일을 만났는데, 효일이 그쪽 사정을 묻자, 몰래 말하기를 ‘황제가 일본(日本)·유구(琉球)·안남(安南)·서양(西洋) 등의 나라에 청병하여 지금 합세하여 적을 토벌하려고 하고 있다. 여벽(呂碧)은 현재 등주(登州)에 있고, 진 도독(陳都督)은 주사(舟師)를 거느리고 와서 석성도(石城島)에 머물러 있는데 3월에는 장자도(獐子島)로 나아가 머물 것이다. 국왕에게 보내는 자문(咨文)과 괘포(掛袍) 등의 물건을 방어사에게 보냈는데, 만약 받지 않으면 여벽으로 하여금 수도(水道)를 경유해 곧바로 경기의 해읍(海邑)으로 향하게 하여 전달할 계획이다. 그리고 지난해 섬에서 패전한 장관 등은 모두 군율에 복주(伏誅)되었다. 심지상(沈志祥)은 이 때문에 도망쳐 숨었다. 금(金)나라 한(汗)이 선부(宣府)와 대동(大同)을 침범한 것 또한 중국에서 유인한 것이었다.’ 하였습니다.
한인들의 말은 전부터 허풍이 세었으니 믿을 수 없을 듯합니다. 도독이 혹시라도 주사를 많이 거느리고 와서 우리 경내에 정박한다면 어떻게 처치하여야 합니까. 묘당으로 하여금 지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한인의 맹랑한 말 때문에 변방에 있는 신하가 놀라 동요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런 때를 타고 가까운 섬에 와 정박하면서 허장성세를 부리며 문서를 보낸다면 일이 매우 난처할 것입니다. 과연 부득이한 형세가 있을 경우 그로 하여금 문서를 받아 조정에 급히 알리게 한 다음 곡절을 갖추어 심양에 알리면 청나라 사람들의 힐책이 대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청나라에서 반드시 자문의 원본을 요구할 것인데 원본 안에는 반드시 숨겨야 할 말이 없지 않을 것이니, 장차 어떻게 처치하겠습니까. 이로써 말한다면 받지 않아서 폐단이 없게 하는 것만 못합니다. 다만 이른바 문서라는 것이 도독의 자문이라면 받지 않더라도 괜찮지만 혹시라도 해부(該部)에서 성지를 받들어 이자(移咨)한 것이라면 사체가 중대하니 미리 예측해서 정하기가 곤랍합니다. 어떤 사람은 ‘먼저 임경업으로 하여금 서로 통할 수 없는 이유를 들어서 한 건의 문서를 만들어 한인들의 배로 부쳐 우리의 실정을 밝힌다면, 문서를 보내오는 걱정을 미리 막을 수 있다.’고 합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이에 경업으로 하여금 진 도독에게 이서(移書)하게 하였다. 그 내용에,
"조공(朝貢)의 길이 끊어진 지 벌써 해가 지났습니다. 답답한 상황에서 풍화를 향하는 마음 어떻게 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나라는 세상이 어지러워진 뒤로 놀란 혼이 안집하지 못하고 놀라운 기미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매번 배가 들어올 때마다 문득 근심과 두려운 생각이 더합니다. 문서를 보내는데 감히 받지 않고 질문을 하는데 감히 응답하지 않는 것이 어찌 인정이겠습니까. 이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올해의 정세도 지난해와 마찬가지입니다. 잠시라도 늦추어 주기만 바랄 뿐, 다른 것은 감히 말하지 않겠습니다. 원컨대 대인께서는 특별히 가엾게 여기시어 우리 나라 백성들의 목숨을 곡진히 보전해 주소서. 저의 소원은 단지 이것뿐입니다. 오직 대인께서 묵묵히 이해하시고 가엾게 여겨 용서해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는데, 이경석이 지은 것이다.
3월 7일 경오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난 뒤에 특진관 이시백(李時白)이 아뢰기를,
"병사와 수사가 돌려보낸 군사에게서 거두어 들인 베가 아니고서는 먹을 식량이 없습니다. 만약 큰 읍의 수령을 겸하게 하여 그곳에서 나는 읍봉(邑俸)을 먹게 하고 베를 거두는 것을 금지시킨다면 일이 매우 편리하고 좋을 듯합니다."
하고, 검토관 유철(兪㯙)은 아뢰기를,
"충청도는 병영과 수영이 모두 한 곳에 있습니다. 병영을 해미(海美)로 옮겨 설치한 이유를 신은 실로 모르겠습니다. 조령(鳥嶺)의 형세는 실로 남과 북으로 나누어지는 천험의 요새지입니다. 충주는 조령 아래에 있고 한강 상류에 위치하고 있으니, 이곳으로 병영을 옮겨 설치한다면 좋을 듯합니다."
하고, 시백은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제도는 병사나 수사의 임기를 2년으로 하고 있는데, 장수의 직임을 어떻게 이 기한 안에 이루도록 책임지울 수 있겠습니까. 지금부터는 감사와 병사·수사는 오랫동안 직임을 맡겨 성과를 거두도록 책임지우소서. 그리고 치적이 있을 경우 자급은 더해주더라도 자주 체직하는 것은 허락치 않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국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3월 8일 신미
비국이, 소가 아직 번식되지 않았으니, 각 고을의 석전(釋奠)에 잠시 소 대신 돼지나 양을 쓰기를 계청하였는데, 따랐다.
남이공(南以恭)을 이조 판서로, 이목(李楘)을 동지경연으로, 심동구(沈東龜)를 사간으로 삼았다.
남이공은 사람됨이 교활하고 사특하며 남의 마음을 잘 헤아렸다. 선조 때 전랑(銓郞)이 되어 사당(私黨)을 심고 선류(善類)를 내쫓아 조정을 혼탁하고 어지럽히자, 선조께서 그가 방자한 것을 미워해서 내쳤다. 이때 이이첨(李爾瞻)도 죄로 폐출되었었다. 뒤에 대신 유영경(柳永慶)이 이 두 사람을 거두어 쓰기를 청하자, 선조가 억지로 따르면서 ‘뒷날 국가에 반드시 화를 끼칠 것이니 그때는 내말을 생각해야 한다’고 하고, 이첨과 이공의 성명을 벽 위에다 써서 소인을 등용하지 말라는 뜻을 기록하였다.
혼조(昏朝)에 이르러 이공이 친상(親喪) 중에 있으면서, 한밤중에 분주히 돌아다니며 훈적(勳籍)에 기록되기를 도모하니, 사람들이 모두 비루하게 여겼다. 뒤에 이원익(李元翼)과 함께 이첨에게 무함을 받았으므로 반정(反正)한 뒤에 폐기됨을 면할 수 있었고, 풍헌(風憲)의 장에 제수되기까지 하였다. 병자 호란 뒤에 최명길이 청의(淸議)에 용납되지 못하자 전조(銓曹)에 복심을 심어두고서 권병(權柄)을 마음대로 하려 했는데, 이공이 드디어 기회를 타고 명길에게 아첨해 붙었으므로 호조 참판으로 계청하여 주의하였다. 판서가 되자 남은 당류를 불러들이고 사류를 모함하니, 조정이 혼탁해지고 옳고 그름이 전도된 것이 이로부터 더욱 심하였다.
3월 9일 임신
간원이 아뢰기를,
"호종한 공로에 대한 상자(賞資)를 지난해 이미 모두 하비(下批)하였는데, 계속해서 추가로 주니 외람되고 거짓됨이 매우 많습니다. 지금부터는 일체 허락하지 마소서. 그리고 종묘·사직의 신주를 모시고 올 때 본서(本署)의 관원들이 삼가지 않은 일이 많았습니다. 제조에게 책임을 미루고 그들만 죄를 면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분주히 애쓴 공로는 있지만 이를 이유로 죄를 덮어둘 수는 없습니다. 종묘·사직의 신주를 모시고 온 관원들을 모두 나추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상가(賞加)하는 한 가지 일은 해조로 하여금 살펴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3월 10일 계유
비국이, 충주(忠州)와 청풍(淸風)의 경내에 석유황(石硫黃)이 생산된다고 하므로 본도로 하여금 널리 수소문하게 하였는데, 청풍의 암석 속에 과연 검은색 흙이 들어 있었다. 색깔과 냄새가 모두 화약과 같았고 불을 붙이면 곧 푸른 연기가 일어났으며, 충주의 황색 흙에 비해 더욱 맹렬하게 타올랐다. 감사 정태화(鄭太和)가 치계하여 아뢰니, 이에 드디어 훈련 도감에 명하여 그것을 취해다 제련하게 하였다.
양양 부사 유항(柳恒)이 해유(解由)에 구애되는 근심을 면하고자 하여 포흠(逋欠)으로 장부에 기재된 것을 이미 납입한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감사가 적발하여 아뢰니, 상이 기한을 정해 정배하라고 명하고 이어 뒷날의 법으로 삼게 하였다.
3월 11일 갑술
헌부가 아뢰기를,
"백첩(白帖)으로 사람을 가두는 것에 대해 비록 금령이 있지만, 본부의 사체는 다른 관사와는 달라 반드시 장관과 아관(亞官)을 기다려 개인(開印)하기에, 상께서도 백첩으로 가두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난번 본부에서 대낮에 칼을 뽑아 휘두른 사람을 체포하여 전옥(典獄)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옥관이 백첩이라는 핑계로 곧바로 수금하지 않아 도망치고 말았으며, 격쟁(擊錚)하기까지 하였으니, 일이 매우 놀랍습니다. 전옥의 해당 관원을 파직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파직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지금부터 그로 하여금 자세히 살펴서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신풍 부원군(新豐府院君) 장유(張維)가 예조에 단자를 올리기를 "외아들 장선징(張善澂)이 있는데 강도(江都)의 변에 그의 처가 잡혀 갔다가 속환(贖還)되어 와 지금은 친정 부모집에 가 있다. 그대로 배필로 삼아 함께 선조의 제사를 받들 수 없으니, 이혼하고 새로 장가들도록 허락해 달라."고 하였다. 전 승지 한이겸(韓履謙)은, 자기 딸이 사로잡혀 갔다가 속환되었는데 사위가 다시 장가를 들려고 한다는 이유로 그의 노복으로 하여금 격쟁하여 원통함을 호소하게 하였다. 형조에서 예관으로 하여금 처치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사로잡혀 갔다가 돌아온 사족의 부녀자가 한둘이 아니니, 조정에서 반드시 십분 참작하여 명백하게 결정한 뒤에야 피차 난처한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 부부가 된다는 것은 중대한 데 관계되는 일이니,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였다. 좌의정 최명길이 헌의하기를,
"사로잡혀 갔던 부녀자에 관한 일에 대해서 지난해 비국의 계사 중에는 옛일을 인용하여 증명하면서 끊어버리기 어렵다는 뜻을 갖추어 진달하였으며, 상께서도 별도의 전교가 계셨습니다. 신풍 부원군 장유는 이를 모르지 않을 것인데, 장계를 올려 진달한 것이 이와 같으니, 반드시 소견이 있어서 말한 것입니다. 신이 고로(故老)들에게 들으니, 선조조에 임진년 왜변이 있은 뒤에 전교가 있었는데, 지난해 성상의 전교와 서로 부합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자세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여항에서 전하는 바로 말한다면, 그때 어떤 종실이 상소하여 이혼을 청하자 선조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으며, 어떤 문관이 이미 다시 장가를 들었다가 아내가 쇄환되자 선조께서 후취 부인을 첩으로 삼으라고 명하였으며, 그 처가 죽은 뒤에야 비로소 정실 부인으로 올렸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재상이나 조관(朝官)으로 사로잡혀 갔다가 돌아온 처를 그대로 데리고 살면서 자식을 낳고 손자를 낳아 명문 거족이 된 사람도 왕왕 있습니다. 이 어찌 예는 정(情)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때에 따라 마땅함을 달리 하는 것으로서 한 가지 예에 구애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전에 심양에 갔을 때 출신(出身) 사족으로서 속환하기 위해 따라간 사람들이 매우 많았는데, 남편과 아내가 서로 만나자 부둥켜 안고 통곡하기를 마치 저승에 있는 사람을 만난듯이 하여, 길 가다 보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부모나 남편으로 돈이 부족해 속환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장차 차례로 가서 속환할 것입니다. 만약 이혼해도 된다는 명이 있게 되면 반드시 속환을 원하는 사람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허다한 부녀자들을 영원히 이역의 귀신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소원을 이루고 백 집에서 원망을 품는다면 어찌 화기를 상하게 하기에 충분치 않겠습니까. 신이 반복해서 생각해 보고 물정으로 참작해 보아도 끝내 이혼하는 것이 옳은 줄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한이겸의 딸에 관한 일은 별도로 의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이 심양으로 갈 때에 들은 이야기인데, 청나라 병사들이 돌아갈 때 자색이 자못 아름다운 한 처녀가 있어 청나라 사람들이 온갖 방법으로 달래고 협박하였지만 끝내 들어주지 않다가 사하보(沙河堡)에 이르러 굶어 죽었는데, 청나라 사람들도 감탄하여 묻어주고 떠났다고 하였습니다. 또 신이 심양의 관사에 있을 때, 한 처녀를 값을 정하고 속(贖)하려고 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이 뒤에 약속을 위배하고 값을 더 요구하자 그 처녀가 돌아갈 수 없음을 알고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죽고 말았습니다. 이에 끝내는 그녀의 시체를 사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가령 이 두 처녀가 다행히 기한 전에 속환되었더라면 반드시 자결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비록 정결한 지조가 있더라도 누가 다시 알아주겠습니까. 이로써 미루어 본다면 전쟁의 급박한 상황 속에서 몸을 더렵혔다는 누명을 뒤집어 쓰고서도 밝히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사로잡혀 간 부녀들을 모두 몸을 더럽혔다고 논할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한이겸이 상언하여 진달한 것도 또한 어찌 특별히 원통한 정상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그러나 이 뒤로는 사대부집 자제는 모두 다시 장가를 들고, 다시 합하는 자가 없었다.
사신은 논한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으니, 이는 절의가 국가에 관계되고 우주의 동량(棟樑)이 되기 때문이다. 사로잡혀 갔던 부녀들은, 비록 그녀들의 본심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변을 만나 죽지 않았으니, 절의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미 절개를 잃었으면 남편의 집과는 의리가 이미 끊어진 것이니, 억지로 다시 합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최명길은 비뚤어진 견해를 가지고 망령되게 선조(先朝) 때의 일을 인용하여 헌의하는 말에 끊어버리기 어렵다는 의견을 갖추어 진달하였으니, 잘못됨이 심하다. 당시의 전교가 사책(史冊)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 이미 증거할 만한 것이 없다. 설령 이런 전교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또한 본받을 만한 규례는 아니니, 선조 때 행한 것이라고 핑계하여 오늘에 다시 행할 수 있겠는가. 선정(先正)이 말하기를 "절의를 잃은 사람과 짝이 되면 이는 자신도 절의를 잃는 것이다." 하였다. 절의를 잃은 부인을 다시 취해 부모를 섬기고 종사(宗祀)를 받들며 자손을 낳고 가세(家世)를 잇는다면,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아, 백년 동안 내려온 나라의 풍속을 무너뜨리고, 삼한(三韓)을 들어 오랑캐로 만든 자는 명길이다. 통분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36책 36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12면
【분류】외교-야(野) / 호구-이동(移動) / 풍속-예속(禮俗) / 역사-사학(史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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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으니, 이는 절의가 국가에 관계되고 우주의 동량(棟樑)이 되기 때문이다. 사로잡혀 갔던 부녀들은, 비록 그녀들의 본심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변을 만나 죽지 않았으니, 절의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미 절개를 잃었으면 남편의 집과는 의리가 이미 끊어진 것이니, 억지로 다시 합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최명길은 비뚤어진 견해를 가지고 망령되게 선조(先朝) 때의 일을 인용하여 헌의하는 말에 끊어버리기 어렵다는 의견을 갖추어 진달하였으니, 잘못됨이 심하다. 당시의 전교가 사책(史冊)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 이미 증거할 만한 것이 없다. 설령 이런 전교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또한 본받을 만한 규례는 아니니, 선조 때 행한 것이라고 핑계하여 오늘에 다시 행할 수 있겠는가. 선정(先正)이 말하기를 "절의를 잃은 사람과 짝이 되면 이는 자신도 절의를 잃는 것이다." 하였다. 절의를 잃은 부인을 다시 취해 부모를 섬기고 종사(宗祀)를 받들며 자손을 낳고 가세(家世)를 잇는다면,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아, 백년 동안 내려온 나라의 풍속을 무너뜨리고, 삼한(三韓)을 들어 오랑캐로 만든 자는 명길이다. 통분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3월 12일 을해
강화의 백성이 성 안에서 밭을 갈다가 금인(金印)을 얻어 바쳤는데, 바로 문정 왕후(文定王后)018) 의 보(寶)였다. 중종(中宗)의 재실(齋室)에 간직해 두고, 이어 미포(米布)로 상을 주라고 명하였다.
강화의 승천부(昇天府) 경내에 예전에는 저수지가 있어 물을 가두었다가 논에 물을 대 백성들이 많은 이익을 보아왔다. 그런데 광해(光海) 때에 제방을 헐고 논을 만들어 이현궁(梨峴宮)에 소속시켰다. 반정 초에 다시 그전처럼 둑을 쌓았는데, 오래지 않아 다시 명례궁(明禮宮)에 속하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제방 아래에 사는 백성들이 사전(私田)으로 그것을 대신하고 예전처럼 제방을 수축하기를 원하였다. 호조에서 변통하여 백성들을 이롭게 해줄 것을 청하니, 상이 감사에게 명해 허실을 조사하여 백성들에게 이로우면 허락해 주고, 간사한 꾀를 내어 함부로 점유하려는 폐단이 있으면 허락해 주지 말라고 하였다.
강릉 지역에 큰 바람이 불었는데, 모래가 날리고 자갈이 굴렀으며, 불이 나 향교와 민가 60여 호가 불탔다. 삼척 지방에도 큰 바람이 불었는데, 나무가 부러지고 지붕이 날아갔으며, 불이 나 민가 1백 70여 호가 불탔다.
3월 13일 병자
동래 부사 정양필(鄭良弼)이 치계하였다.
"가강(家康)이 일본의 관백이었을 때, 길리시단(吉利施端)019) 이라고 하는 남만인(南蠻人)들이 일본에 와 살면서 단지 하느님에게 기도하는 것만 일삼고 인사(人事)는 폐하였으며, 사는 것을 싫어하고 죽는 것을 기뻐하며 혹세 무민하였는데, 가강이 잡아다 남김없이 죽여버렸습니다. 이 때에 이르러 도원(島原) 지방의 조그만 동네에 두서너 사람이 다시 그 술수를 전파하느라 마을을 출입하면서 촌사람들을 속이고 유혹하더니, 드디어 난을 일으켜 비후수(肥後守)를 죽였습니다. 이에 강호(江戶)의 집정(執政) 등이 모두 죽였다고 합니다."
3월 14일 정축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친 뒤에 참찬관 이경석이 아뢰기를,
"가례(嘉禮) 때에는 검약하게 하도록 힘써야 마땅한데, 듣건대, 상의원에서 지금 비단을 짜고 있다고 하니, 자못 온당치 못한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상의원에서 비단을 짜고 있는 것은 장복(章服)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 검토관 박종부(朴宗阜)가 아뢰기를,
"큰 난이 있은 뒤에는 상과 벌을 분명히 한 뒤에야 보고 징계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공이 없는 자가 외람되게도 상을 받고 죄가 있는 자가 벌을 받지 않고 있으니, 신은 통탄스럽습니다. 군졸들이 임금을 협박하고 강화를 배척하는 신하들을 묶어 보내었으니, 천하 고금에 어찌 이와 같은 일이 있겠습니까. 일찍이 유백증(兪伯曾)의 소를 보니, ‘몇몇 흉악한 자들이 오가며 계책을 행해 성첩을 지키는 군졸들을 속이고 꾀인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사주한 사람이 있는 것이 의심이 없습니다. 애석하게도 백증의 말이 명백하지 않고, 대간도 발론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만약 그 죄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뒤에 반드시 묘부(苗傅)·유정언(劉正彦)020) 의 변란과 같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참으로 그런 일이 있다면 매우 경악할 만하지만, 아마도 사실이 아닌 듯하다."
하였다.
영의정 이홍주가 상소하여 치사(致仕)를 청하니, 허락치 않았다.
대제학 이식(李植)이 모상(母喪)를 당했다. 정원이 일찍이 문형을 지낸 대신으로 하여금 천망하게 하라고 청하니, 따랐다.
3월 15일 무인
간원이 아뢰기를,
"대동 찰방(大同察訪) 윤선도(尹善道)는 일찍이 병란 때에 해로를 따라 강도 근처까지 이르렀었는데, 경성을 지척에 두고서도 끝내 달려와 문안하지 않았으며, 피난 중이던 처녀를 잡아 배에 싣고 돌아갔습니다. 그리고는 그 일이 남들에게 알려질까 두려워 섬으로 깊이 들어가 종적을 숨기려고 하였으니, 잡아다 국문하여 정죄하소서."
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어서야 따라, 드디어 영덕현(盈德縣)으로 정배하였다.
도성 안에 어떤 자가 왜보(倭報)를 거짓으로 써서 경외(京外)에 전파해 사람들을 놀라고 의혹하게 하였는데, 포도청이 잡아 죽였다.
3월 16일 기묘
이때 중전의 자리가 빈 지 이미 오래되어 상이 여자를 간택하라고 명하였는데, 사대부집에서 선발에 응하는 자가 없었다. 상이 노하여 하교하기를,
"대궐에 나온 처녀들은 모두 혼인을 허락한다."
하였다. 좌의정 최명길이 아뢰기를,
"간택하는 거조는 사체가 지극히 중하니, 해당 관원은 착실히 보고 듣고 경사(卿士)들은 감히 숨기지 않는 것이 신하된 도리상 당연한 것입니다. 팔도의 수령과 떠돌며 붙어 사는 사족으로 처녀가 있는 집이 어찌 한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한 사람도 나오는 자가 없으니, 참으로 매우 괴이합니다. 각도의 감사를 우선 추고하소서. 서울에 있는 사대부들에게는 각각 족속과 친구가 있을 것이니, 만약 해당 관원으로 하여금 성심껏 찾게 했더라면 절대로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한성부는 오부(五部) 관원에게만 맡겨 한 나라의 막중한 예를 이처럼 거북한 일이 되게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한성부의 죄입니다. 그렇지만 예조의 관원도 어찌 그 책임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예조와 한성부의 당상은 아울러 먼저 파직하고 뒤에 추고해야 합니다. 그리고 대궐에 나온 처녀들은 잠시 모두 혼인을 금하여 다시 간택하기를 기다리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혼인을 금하는 일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홍보(洪靌)를 형조 판서로, 조수익(趙壽益)을 헌납으로, 최유연(崔有淵)을 우부승지로 삼았다.
명나라의 배반한 장수 심지상(沈志祥)이 병사 천여 명을 거느리고 가도(椵島)에서 심양으로 투항해 들어가니, 임경업이 치계하여 아뢰었다.
3월 17일 경진
신풍 부원군(新豐府院君) 장유(張維)가 졸하였다. 장유의 자는 지국(持國)이고, 호는 계곡(谿谷)으로, 판서 장운익(張雲翼)의 아들이다. 사람됨이 순후하고 깨끗하였으며, 문장을 지으면 기운이 완전하고 이치가 통창하여 세상에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정사(靖社)의 공훈에 참여하여 신풍군에 봉해졌다. 두 번이나 문형을 맡았는데, 공사(公私)의 제작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오래도록 이조 판서에 있었는데도 문정(門庭)이 쓸쓸하기가 마치 한사(寒士)의 집과 같았다. 중망(衆望)이 흡족히 여겨 흠잡거나 거론하는 자가 없었다. 산성에 있을 때는 힘껏 화친하자는 의논을 주장하였으며, 또한 거상(居喪) 중에 삼전도 비문(三田渡碑文)을 지었는데, 사론이 그 점을 단점으로 여겼다. 그 뒤에 기복(起復)되어 정승에 제수되었으나, 소를 열여덟 번이나 올리면서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이에 마침내 체직되었는데, 오래지 않아 병으로 죽었다. 저술한 문집이 세상에 전한다.
3월 18일 신사
충청 수사 이영달(李英達)이, 호남에 첨가해 방어할 주사를 발송해 보내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군사를 발할 때는 표신(標信)으로 합해 증명하는 일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으로 치계하여 아뢰었다. 비국이, 표신을 내려보내는 것은 단지 유언 비어만 야기시키기에 충분하니 허락하지 말라고 청하였는데, 상이 일렀다.
"수사가 계품한 뜻이 매우 타당하니 표신을 내려보내라."
3월 20일 계미
북로(北路)에 큰 기근이 들었다. 평사(評事)와 종성(鍾城)·온성(穩城)·경원(慶源)의 판관을 줄이라고 명하였다.
이경석을 대제학으로, 한여직(韓汝溭)을 예조 판서로, 윤강(尹絳)을 집의로, 조중려(趙重呂)를 장령으로, 심동구(沈東龜)·성이성(成以性)을 교리로, 남노성(南老星)을 부수찬으로, 신유(申濡)를 정언으로 삼고, 특별히 윤휘(尹暉)를 제수해 판윤으로 삼았다. 경석이 문학만은 우수하였는데 마침 인재가 부족한 기회를 타고 갑자기 문형의 직임에 제수되니, 여론이 미흡하게 여겼다. 윤휘는 사람됨이 추솔하고 비루하여 세상에 비웃음과 손가락질을 받았는데, 상이 초탁(超擢)하자 사람들이 모두 괴이하게 여겼다.
비국이 아뢰기를,
"남쪽 변방의 일이 날로 더욱 우려할 만한데, 제주도는 형세가 매우 위태롭습니다. 목사 성하종(成夏宗)은 청간(淸簡)하다는 칭송은 있지만 본디 적을 막는 재주는 부족하니, 개차하소서. 전 감사 심연(沈演)은 재주와 국량이 평소 드러났으니 실로 이 직임에 적합합니다. 그러나 아직 서용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감히 가벼이 청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이에 심연을 서용하여 제주 목사로 삼았다.
비국이 아뢰기를,
"경상 좌수영의 설치는 본디 뱃머리에서 적을 막자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지만 실로 고립되고 위태로운 형세가 있습니다. 바람이 온화한 몇 달 동안은 다대포(多大浦)로 배를 옮겨 정박해 두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순검사·통제사와 해도(該道)의 수사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순검사 임광(任絖)이 치계하기를,
"다대포로 배를 옮겨 두는 일을 통제사와 서로 의논해 보았습니다. 본영과 왜관(倭館)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데, 수로(水路)로 10리도 채 못 되어 우리의 일동 일정에 대해 저들이 모르는 것이 없으니 난처한 상황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또한 동래(東萊)와 애길(艾吉)의 봉수(烽燧)는 본영과의 거리가 5리쯤 되는데 수지(水旨)021) 가 【 지(旨)는 곧 척(脊)이다.】 서로 그리 멀지 않으므로, 적이 만약 바람을 타고 몰래 출동할 경우 수지를 넘어 들어온 뒤 봉군(熢軍)이 분주히 보고하는 사이에 적선이 이미 감만이(戡蠻夷)에 【 지금의 수영(水營)이다.】 도착할 것이니, 결코 주장(主將)이 머물며 변을 대비할 곳이 아닙니다. 이른바 다대포는 부산에서 서쪽으로 수로로 30리쯤 되는 곳입니다. 동쪽으로는 초량항(草梁項)을 제압하고 있고 서쪽으로는 옛 가덕진(加德鎭)과 접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대양(大洋)과 통하고 북쪽으로는 평평한 육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항구에 배를 숨겨두기가 매우 좋으며, 급할 때 변란을 제압하는 데 실로 기의(機宜)에 합당합니다. 좌수사 이의립(李義立)과 함께 서로 의논하여 아뢰어 처리하게 하소서."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배를 옮기는 거조는 단지 한때 변을 살피려고 한 것일 뿐인데, 지금 장계를 보니 전적으로 영원히 본진을 옮기는 것을 주로 하였는 바, 신들의 당초 견해와는 서로 어긋납니다. 감만이의 형세가 이미 이와 같다면 이번 배를 옮기는 일을 인해 영원히 진을 옮기는 것도 불가하지 않은 듯합니다. 다만 사람들의 견해가 매번 상반됩니다. 당초 감만이로 진을 옮길 때에 일찍이 모든 점이 편리하다고 하였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도리어 후회가 있습니다. 만약 깊이 강구하여 잘 처리하지 않는다면 오늘날 다대포로 옮기는 것이 전날 감만이로 옮긴 일과 같게 되지 않으리라고 어찌 알겠습니까. 지금 만약 사세의 완급과 경중을 헤아리지 않고 오직 급급히 배를 옮기는 것만 일삼아, 적으로 하여금 우리의 정형을 엿볼 수 있게 한다면, 의심을 야기하고 위엄을 손상할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본도 감사로 하여금 형세를 잘 살펴보고 아뢰어 처리하게 하는 것이 온당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배를 옮기는 일은 전에 결정한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정(倭情)을 참으로 예측할 수 없다.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니, 좌의정 최명길이 아뢰기를,
"신의 소견으로는 저들이 군사를 몰래 보내어서 기습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40년 동안 우호를 맺은 나라로서 어찌 무단히 와서 침범하겠습니까."
하고, 호조 판서 심열(沈悅)은 아뢰기를,
"지금 관백은 지난날의 평수길(平秀吉)과 비할 바가 아닙니다. 자기 나라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감히 다른 나라를 침입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보건대, 의심할 만한 단서가 많이 있다. 저들이 만약 침범해 온다면 결코 막을 만한 형세가 없다. 어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릴 수 있겠는가. 경들은 아무쪼록 그 계책을 생각하라."
하니, 심열이 아뢰기를,
"좌도의 주사가 모두 부산에 있는데, 적병이 수지(水旨)를 넘어온 뒤에는 쳐들어 오기가 아주 쉬워 우리 배가 닻도 올리기 전에 왜선이 도착할 것입니다. 지난번 다대포에 진을 설치하자는 설이 옳은 듯합니다."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모든 일에 대비함이 있으면 근심이 없습니다. 먼저 파발마를 세워 변방의 급보를 시급히 전하게 하고, 제도(諸道)의 주사들에게 별도로 신칙을 가하는 것이 온당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3월 21일 갑신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검토관 박종부(朴宗阜)가 나아가 아뢰기를,
"옛사람의 말에 ‘나라 사람들이 모두 어질다고 한 뒤에야 쓴다.’고 하였으니, 특별히 제수하는 일은 선인(善人)에게 있어서도 참으로 불가한 것입니다. 판윤 윤휘(尹暉)는 나라 사람들이 모두 어질지 못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이미 도승지에 제수하였고, 지금은 또 특별히 올려주는 명이 있었습니다. 보고 듣기에 놀랍기에 감히 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칙사가 왔을 때 도승지의 품계를 올려주는 것은 전례가 있다.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만약 재능이 있다면 영원히 폐해서 스스로 새롭게 되는 길을 막지 않는 것이 옳다."
하였다.
비국이, 유림(柳琳)의 행차에 청나라에 이자(移咨)하여 왜정을 전해주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별도로 재자관(齎咨官)을 정해 보내라."
하였다. 그 자문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본국이 왜와 우호 관계를 가진 지 40여 년이나 됩니다. 그런데 평조흥(平調興)이 무함한 뒤로는 문득 의심하는 단서가 있었습니다. 병자년022) 4월 통신사 임광(任絖)이 돌아온 뒤에 경외의 인심이 날로 더욱 의심하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지난해 12월 왜차(倭差) 평성련(平成連)이 또 무단히 나왔는데, 기색이 전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중국의 물화를 보내지 않는 것에 대해 은근히 허물하고, 심지어는 유래되어 온 뜰에서 절하는 예를 고쳐달라고 청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본국이 이에 의심이 없을 수 없어 순검사를 차견하여 바닷가를 순찰하면서 방비하게 하고, 또 한강 이남의 성을 수축하여 변을 대비하는 계책을 세웠습니다.
정월 이후로 규정 밖의 왜선이 매와 말을 구한다는 핑계로 연속 왕래하여 현저히 탐지하는 정상이 있었습니다. 지금 또 갑자기 그들 나라 안에서 일이 발생했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그들 말이 앞뒤가 다르고 두왜(頭倭)와 졸왜(卒倭)의 말이 어긋납니다. 왜인들은 교활하고 사특하며, 말을 자주 바꾸는 것은 그들의 평소 짓거리입니다. 그러나 나라 안의 변에 대해서는 그들이 마땅히 꺼려야 할 것인데, 지금 이웃 나라에 드러내놓고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저들이 본국에서 방비를 신칙하는 것을 보고 이런 말을 하여 우리의 계책을 늦추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변방의 정상에 관계된 것이기에 갖추어 상국에 보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자가 심양에 있었다. 평안 감사가 매월 초하룻날에 음식을 올렸는데, 세자가 농사일이 한창 급할 것이라 생각해 4월 초하룻날 올리는 음식을 줄이게 하니, 서로(西路)의 백성들이 감격하고 기뻐하였다.
3월 22일 을유
지평 심대부(沈大孚)가 아뢰기를,
"신하가 되어 병권을 쥐고 장수가 된 자로서 적이 쳐들어오는데도 알지 못해 적을 임금에게까지 이르게 하거나, 군율을 잃어 패배하거나, 포로로 잡혀 구차히 목숨을 부지하는 세 가지 중에 하나라도 있으면, 왕법이 용서하지 않고 군율이 반드시 시행되는 법입니다. 이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고친 자가 없었습니다. 신경원(申景瑗)은 한 번 거동에 이 세 가지 죄를 다 지게 되었으니, 그가 저버린 것이 어찌 김자점보다 못하겠습니까. 사로잡힌 치욕은 자점에게는 없는 죄입니다. 조정에 조금이라도 기강이 있다면 경원은 마땅히 어느 죄에 복죄되겠습니까?
언관의 책임을 맡은 신하들이 일을 논하는 것이 일관성이 없으며 일으키고 그치는 것이 일정함이 없어 그쳤다가 다시 발론하곤 합니다. 이에 경원을 놓아두고 논핵하지 않아 전하로 하여금 드디어 대죄(大罪)가 있는 자를 풀어주고 도리어 탁용해 중군(中軍)의 지휘권을 주게 하였습니다. 그런 뒤에야 다시 논의를 일으켜 떠들면서도 단지 도로 명을 거두기만을 청하고 있으니, 성상께 윤허받지 못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신이 처음 대사헌 서경우(徐景雨)와 서로 만나 신의 뜻과 합치되지 않는 합계(合啓) 한두 가지 일을 제일 먼저 말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경원에 대한 일이었습니다.
그때 신이 말한 대의는 ‘대신이 나라를 그르친 죄가 어찌 적에게 항복하고 나라를 판 죄와 같겠는가. 일을 그르친 검찰사(檢察使)에 대해서 어찌 장관이냐 차관이냐를 따지겠으며, 군율을 잃은 원수에 대해서 무슨 도원수냐 부원수냐의 차이가 있겠는가. 본체는 하나인데 죄과를 둘로 하는 것은 잘못된 논의이며, 죄는 같은데 벌을 달리 하는 것은 잘못된 형벌이다. 이렇게 논핵하여 윤허를 받고자 하니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그만두려고 하면 오히려 그만둘 수 있지만, 만약 그만두려 않는다면 어찌 그 죄를 일컬어 형벌을 한결같이 하지 않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경우가 비록 승복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신의 말을 그르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에 신에게 ‘지금 궐하에 나아가니 간원과 서로 의논하는 것이 좋겠다.’ 하기에, 신이 알았다고 하고 물러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하기도 전에 갑자기 최유해(崔有海)의 혐의를 입어 다음날 다시 피혐을 하였는데, 정원의 저지를 받았으며, 곧바로 시소(試所)로 가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어제 와서 복명을 하고서야 경우가 성상의 전교로 인하여 탑전에서 인혐하였다는 것을 알고 신도 뒤따라 인혐하였는데, 성명께서 신을 내치지 않으셨습니다. 이에 신은 은혜를 받고 감격하여 나와 물론을 기다리지 않고 오늘 또 그와 만나 전의 논의를 마치려고 하였습니다.
먼저 경원의 일을 논의하게 되었는데 경우의 뜻은, 친히 성상의 전교를 받들었는데 말씀이 정녕하다는 이유로 도리어 논의를 정파하려고 하는 기색이 있었고 절대로 죄를 더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신의 고집스런 성품이 끝내 남의 의견에 따라 변화하기 어려웠으니, 신이 경우와 의견을 같이할 수 없는 것이 마치 경우가 신과 의견을 같이할 수 없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니 신이 어찌 속에 품은 생각을 말하지 못한 채 얼굴빛을 붉히며 의견이 같지 않은데 함께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이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으니 이것이 그 첫째 이유입니다.
또한 신이 분수에 걸맞지 않은 자리에 있으면서 20일이나 되도록 모호하게 용납한 채 할 말이 있는데도 말하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한번 물러난 뒤에는 죽더라도 여한이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지나치고 망령된 신의 생각을 성상께 한말씀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이른바 윤방(尹昉)과 김류(金瑬)는 죄과가 같지 않다고 하는 것은, 김류를 논한 것이 무겁다는 것이 아니라 윤방을 논한 것이 가볍다는 것입니다. 친구의 부탁을 받고서 그의 아내와 자식들을 얼고 굶주리게 한 경우, 제 선왕(齊宣王)도 오히려 그런 친구는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전하께서 윤방에게 부탁하신 것이 어찌 필부의 아내나 자식과 같겠습니까. 그런데 윤방이 보답한 것이 단지 얼고 굶주리게 할 뿐이 아니었고 보면 윤방은 오래 전에 버렸어야 합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그를 버리지 않으십니까. 어찌 혼자 그를 버리겠습니까. 의당 대중과 함께 그를 버려야 할 것입니다.
지금 거북과 옥이 궤 안에서 훼손되고 있으니023) , 맡아 지키는 자는 그 죄를 면할 수 없습니다. 아, 종묘의 일을 어찌 차마 말하겠습니까. 전하께서 윤방을 주벌하시지 않으시면 조종(祖宗)에게 변명할 말이 없게 됩니다. 윤방의 죄는 하늘에까지 닿아 실로 김류보다도 더 죄가 큽니다. 그런데 오늘날 의논하는 자들이 왕왕 도리어 윤방의 죄를 가볍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김류보다도 윤방의 종족이 성하고 당여가 많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상께서 죄준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걸핏하면 김류의 죄를 윤방의 죄보다 먼저 생각하시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나라 사람들이 모두 죽일 만하다고 하고, 전하께서 그것을 살피셔도 그가 죽일 만한 점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죄를 주지 않고 계십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소인의 뱃속으로 성상의 마음을 헤아리게 하니, 통탄할 만한 일입니다.
이민구(李敏求)의 명성과 재주 및 조정에서 의지하고 중히 여기는 점이 어찌 김경징(金慶徵)이 비할 바이겠습니까. 그런데도 단지 ‘유모(乳母)’라고 일컬었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 경징이 하는 짓을 바로잡았으나 경징이 들어주지 않았다는 말은 한 마디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춘추(春秋)》의 법으로 논죄한다면 민구는 마땅히 수악(首惡)이 될 것이며, 민구가 살아 있는 것은 경징의 원한이 될 것입니다.
아, 명나라 천자에게로 향하는 정성이 오랫동안 끊어졌고 바닷길은 가시덤불처럼 막혔습니다. 회오리바람이 부는 것도 아닌데 이처럼 마음이 상하니024) , 성상의 심정은 어떠하시겠습니까.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더라도 할 수 있는 것은 또한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천자에게 제후가 있는 것은 제후에게 대부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제후가 위로 천자를 섬기고 아래로 신하와 백성들에게 임하는 것이 정교(政敎)를 펴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신하로서 2백 년 동안 섬겼고 나라를 다시 일으켜 준 큰 은혜가 있는데 부득이해서 하루아침에 등지게 되었으나, 오늘날과 같이 털끝만큼의 원통한 마음도 없이 눈치를 살피며 떨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서쪽에서 오는 사신을 영접하는 데 한결같이 화려한 의식을 쓰면서도 분수에 지나친 경우도 있습니다. 백성은 돌아볼 것이 못 된다 하더라도 진기한 가발은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그만둘 수 없는 것은 그만둘 수 없더라도 그만둘 수 있는 것은 또한 그만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쌓인 시체를 묻지 못하고, 흘린 피가 아직 마르지 않았으며, 잡혀간 사람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런 때에 겨우 살아남은 외로운 사람들을 독촉하여 머리털을 잘라내게 하여 겉모양을 남보다 아름답게 꾸미려고 하니, 아, 그 또한 어질지 못한 일입니다. 이런 풍속이 관서 지방에서 일어나 해서(海西)와 기내(畿內)에 만연되었으며, 도성 안에서 높게 꾸미자 사방에서 본받고 있습니다. 이루어진 일은 말하지 않고 지나간 것은 허물하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나 일을 할 때 처음에 잘 생각하지 않아 무궁한 근심을 끼치는 자는, 나라의 법은 피할 수 있더라도 반드시 하늘의 형벌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상의 몇 가지 일은 모두 신이 마음 아파하며 골머리를 앓는 것으로 성상께 한번 말씀드리려고 한 것인데, 지금 모두 다 진달할 수가 없습니다. 윤신지(尹新之)는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곧바로 달아날 때 처자식과 가산은 하나도 버린 것이 없으면서도 유독 제 아비만은 버리고 갔습니다. 이경(李坰)은 옆 섬에 있다가 강도(江都)가 어육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서도 7일 동안이나 희희낙락하며 떠들고 배불리 먹으면서 제 아비를 근심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마땅히 먼 변경에 귀양보내 나라 안에서 함께 살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데, 모두 미처 논열(論列)하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하늘을 저버리고 성상을 등져 처음부터 끝까지 무상한 것이 이에 대략 갖추어졌습니다. 빨리 파척하시고, 곧바로 사패(司敗)에게 내려 생각이 있으면서도 입다물고 있어 명기(名器)를 더럽힌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 피혐은 근래의 규정에 어긋남이 있다. 도로 내주고 조보(朝報)에 내지 말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심대부가 피혐하면서 한 말이 매우 직절(直切)하니 실로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돌려주라고 특별히 명하시니, 아마도 대관을 우대하는 뜻이 아닌 듯하며, 또한 언로에도 혹 방해가 있을 듯합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3월 24일 정해
지평 심대부가 소를 올려 면직을 구하였는데, 허락하였다.
대사헌 서경우(徐景雨), 집의 윤강(尹絳), 정언 김진(金振), 장령 이상형(李尙馨)이 모두 심대부가 피혐을 하였는데 감히 태연히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서로 이어 인피하였다. 옥당이 처치하여 아울러 체차를 명하도록 청하니, 따랐다.
대제학 이경석(李景奭)이 소를 올려 사직하였는데, 허락하지 않았다.
3월 25일 무자
상이 병이 있어 알성(謁聖)하는 예를 정지하였다. 대신이 무과 초시(初試)를 이미 시행했으니 정시(庭試)를 열어 인재를 뽑자고 청하니, 따랐다.
이경여(李敬輿)를 부제학으로, 전식(全湜)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영의정 이홍주와 좌의정 최명길이 아뢰기를,
"삼가 해조에서 초계(抄啓)한 것을 살펴보건대, 강도에서 사절(死節)한 사람이 1백 50여 인이나 됩니다. 사절한 것이 명백한 사람은 참으로 마땅히 정표해야겠지만, 혹시라도 난병(亂兵)에 죽었는데 자결한 가운데 끼어든 경우가 있다면 실상이 아닌 데 관계되는 듯합니다. 국가에서 정표해 주는 막중한 법전을 자세히 살펴서 처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시 해조로 하여금 정밀히 살피고 확인해서 등급을 나누어 계문하게 한 뒤에 의논해 처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26일 기축
유성이 천시동원성(天市東垣星) 위에서 나와 대각성(大角星) 아래로 들어갔다.
황해도에 비는 오지 않고 서리가 내렸다. 예조가 향(香)·축문·폐백을 보내 도내의 산천에 기우제를 지내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현영(李顯英)을 대사헌으로, 전식(全湜)을 대사간으로, 서상리(徐祥履)를 장령으로, 최문식(崔文湜)을 정언으로 삼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관시(館試)의 원점(圓點)을 애초 1백 50점으로 결정하였는데, 큰 난리가 일어난 뒤로 유생들이 먹고 살기에 바쁘다 보니 과거에 응시할 계책을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시험 날짜가 멀지 않았는데도 재실에서 공부하는 생원·진사가 전혀 없습니다. 이에 단지 성묘(聖廟)가 황량할 뿐만이 아니고, 관시도 장차 궐방(闕榜)할 판국입니다. 지금 먼 지방에 사는 선비들이 알성하는 거조 때문에 상경한 자가 많습니다. 지금 만약 원점의 수를 줄여 정한다면 그대로 성균관에 머물며 공부할 자가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관시는 60점으로, 향시(鄕試)와 한성시(漢城試)는 30점으로 정하여 한편으로는 성묘를 호위하고, 한편으로는 많은 선비들을 권장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일이 타당치 않다. 시험 날짜를 물려 정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호조 판서 심열(沈悅)과 병조 판서 이시백(李時白)을 인견하였다. 상이 묻기를,
"경들은 모두 군대와 군량을 주관하고 있다. 혹시라도 위급한 일이 있을 경우 싸우고 지키는 도구들을 잘 마련해 낼 수가 있겠는가?"
하니, 심열이 아뢰기를,
"군량 2백여 석을 이미 남한 산성으로 운송해 들였습니다. 그 나머지 이송할 서량(西粮)은 지금 수로로 운송하려고 합니다. 강도는 뱃길이 통하는 곳이므로 비록 위급하고 어려운 상황이 있더라도 그때 가서 운송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외부의 의논은 모두 강도를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는데, 지금 강도를 요리하는 것을 가장 급한 일로 삼고 있지 않으니, 아마도 국가의 장구한 계책이 아닌 듯합니다."
하였다. 시백이 아뢰기를,
"만약 갈 만한 절대로 안전한 곳이 있다면 반드시 강도로 들어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강도를 버린다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산성은 한때 방어할 곳이지, 절대로 오랫동안 머물며 방비할 곳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지 않다. 오랑캐를 방어하는 경우라면 오히려 괜찮지만, 왜적을 방어하는 경우라면 옳지 않다."
하자, 심열이 아뢰기를,
"강도가 남한 산성보다 오히려 낫습니다."
하였다. 상이 시백에게 이르기를,
"무사 중에 쓸 만한 자를 경이 알고 있는가?"
하니, 시백이 아뢰기를,
"무신들이 대부분 수령이나 변장이 되었으니, 그 중에서 쓸 만한 사람을 가려 불러 올려서 경관직(京官職)에 제수하였다가 급할 때 쓰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참작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3월 28일 신묘
정시(庭試)를 보여 황위(黃暐) 등 15인을 취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허완(許完)이 쌍령(雙嶺)의 싸움에서 군사가 패하자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습니다. 당초에 경상 감사의 장계에 행방불명이라고 했기 때문에, 포상하는 은전을 민영(閔栐)에게만 내렸습니다. 지금 본도에서 조사해 아뢴 말에 명백한 증거가 있으니, 해조로 하여금 민영의 예에 따라 포상하고 추증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29일 임진
해의 빛깔이 핏빛과 같았으며, 뿌연 안개가 사방에 자욱히 끼었다. 밤에는 유성이 책성(策星) 위에서 나와 왕량성(王良星) 아래로 들어갔다.
3월 30일 계사
예조가 아뢰기를,
"요즈음 가뭄이 더욱 심하여 온갖 곡식의 종자를 땅에 뿌리지 못하고 양맥(兩麥)도 모두 시드니, 농사가 염려됩니다. 다음달 2일에 첫번째 기우제를 지내려고 합니다. 종전에는 제관(祭官)을 대부분 가려 보내지 않아 예의의 법도를 잃어서 신령이 흠향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2품 이상의 중신을 차송하고, 규식을 정해 재소(齋所)에서 재계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우제를 지낸 뒤에는 헌관(獻官)을 도성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가까운 곳에 머물러 기다리게 하였다가 3일이 지나도 비가 오지 않으면 다시 단소(壇所)에 올라가 분향하게 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세 차례 하고 돌아오면 두 번 세 번 제사를 번독하게 지낼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눈먼 무당과 어린 아이가 비는 것과 집집마다 병류(甁柳)를 설치하는 것은 단지 폐단만 있을 뿐이니 일체 거행하지 못하게 하소서. 또한 제관으로 하여금 소찬(素饌)을 먹게 하고 저자에서 도살을 금하게 하기를 한결같이 중국의 법제와 같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다만 이는 새로운 규정이니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였다. 대신들이 아뢰기를,
"《오례의(五禮儀)》에 가뭄이 들면 비를 비는 의식으로 풍운뇌우단소기우의(風雲雷雨壇所祈雨儀)와 북교망기악해독급제산천의(北郊望祈嶽海瀆及諸山川儀)가 있는데, 각각 차서가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제관의 품질(品秩)에도 모두 서례(序例)가 있습니다. 이런 내용이 기록에 명백히 실려 있으니, 지금 그에 의거하여 시행하여야지 별도로 새로운 규정을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신명(神明)과 교제하는 도는 모두 극진한 정성과 깨끗한 재계로 주를 삼아야 합니다. 하물며 만민을 위해 신명에게 명을 청하는 것이 이 얼마나 큰 일인데 형식적인 겉치레로 할 수 있겠습니까. 근래 나라의 풍습이 오직 스스로 편한 것만 생각해 제관의 임무를 더욱 꺼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으레 무관이나 음관(蔭官) 및 세력이 없는 사람한테 돌아가고 마니, 이미 정성을 바치는 뜻을 잃은 것입니다. 제관이 된 자도 경건히 재계하는 마음과 정성껏 기도하는 실상이 없습니다. 이런 태도로 보응을 얻고자 하니, 어려운 일입니다. 지금 제관에 대해서는 이미 정부에서 해조에 분부하여 구례를 무시하고 극진히 선택하도록 하였습니다. 재계하고 소찬을 드는 한 조항은 계사(啓辭)에 따라 거듭 밝히고 검칙할 것이며, 여항에서 병류(甁柳)를 설치하는 등의 일은 원래 예전(禮典)에 실려 있는 것이 아니니 모두 파척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의논한 대로 하라. 다만 모든 재계에 관계된 것 가운데 별도로 소찬을 드는 예가 없는데, 지금 새로운 규정을 만드는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병류를 설치하는 등의 일은, 비록 번거로운 형식에 관계된 것이기는 하지만 이는 전해 내려오는 옛규식이니, 정파(停罷)하지 않는 것이 옳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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