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36권, 인조 16년 1638년 4월

싸라리리 2026. 1. 2.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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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갑오

양사가 김류를 안치하는 일로 연달아 아뢰니, 답하였다.
"삭탈 관작하고 문외 출송하라."

 

일본 관백의 숙부인 기이대납언(紀伊大納言)025)  이 뿌리와 열매 36종의 약재(藥材)를 얻어 자기 나라 토산품의 진위(眞僞)를 증험해 보겠다고 하였다. 예조가 경상도로 하여금 채집해서 주게 하기를 청하니, 따랐다.

 

4월 2일 을미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장령(將領)이 될 만한 자를 미리 가리도록 하였다. 비국이 이곽제(李郭齊)와 변이진(邊以震) 등 23인을 선발하고 서울로 불러 올리자고 청하니, 따랐다.

 

함경도에 큰 기근이 들었다. 늙은이와 어린이를 이끌고 양서(兩西)와 영동(嶺東) 지방으로 흘러 들어오는 백성들이 줄을 이었는데, 경성(鏡城)이 더욱 심하였다. 그런데다가 전염병까지 겹쳐 죽은 사람이 3백여 명이나 되었다. 상이 감사와 병사에게 유시를 내려, 각읍의 사망한 자의 숫자와 수령들이 구황(救荒)을 잘하는지의 여부를 널리 조사하여 사실대로 계문해 처치하는 데 근거로 삼게 하라고 하였다.

 

거인(擧人) 이정상(李廷相)의 정시 시권(庭試試券) 안에 목조(穆祖)의 어휘(御諱)를 범한 것이 있었다. 상이 해조에 명하여 구례를 살펴 처치하라고 하였는데, 예조가 대신에게 의논하기를 청하였다. 좌의정 최명길이 의논드리기를,
"과장에서의 문자가 잘못 어휘를 범한 경우는 시권을 살필 때에 파척해 취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바로 시원(試院)의 규례입니다. 시험관이 미처 살피지 못하고 이미 방방(放榜)한 뒤에 비로소 처치를 의논하는 것은 매우 드물게 있는 일로, 신이 일찍이 보고 듣지 못한 바입니다. 다만 당대의 일로 말씀드리자면, 강혹(姜翯)이 제술한 것이 선묘(宣廟)가 잠저에 계실 때의 어휘를 범하였는데, 아무런 의도가 없이 썼다는 이유로 이름을 빼버리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 유생 이창립(李昌立)이 과시(課試)에서 수석을 하였는데 선묘가 잠저에 계실 때의 어휘를 범했다는 이유로 빼버리고 직부(直赴)의 명이 그 다음 사람에게 미친 적이 있습니다. 과시와 이미 방방한 정시와는 혹 차이가 있을 듯싶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강혹의 시권이 비록 잠저 때의 어휘를 범했으나 선왕께서 휘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그대로 둔 것이다."
하였다. 예조가 이정상의 이름을 빼버리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뒤에 대신들이 탑전에서 아뢰자, 복과(復科)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제주의 광해군(光海君)을 위리 안치한 곳에 여름철 옷감을 보내라고 명하였다.

 

4월 3일 병신

유성이 낭위성(郞位星) 아래에서 나와 헌원성(軒轅星) 위로 들어갔다.

 

이경전(李慶全)을 형조 판서로, 조경(趙絅)을 집의로, 남노성(南老星)을 지평으로, 서경우(徐景雨)를 대사성으로 삼았다.

 

어영청(御營廳)이 아뢰기를,
"호종하는 어영군 중에 과거에 오른 자는 그 수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혹 온 집안 식구가 사로잡혀 간 자도 있어 몸을 의탁할 곳이 없고, 또 자력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일도 없어 형세가 굶어 죽게 될 판입니다. 이에 아문의 군관의 예에 따라 요미(料米)를 받고 입번(入番)하고자 한다 하니, 그 정상이 매우 가련합니다. 일이 새로운 규정에 관계되니, 어떻게 처치하면 좋겠습니까?"
하니, 계사대로 시행하라고 답하였다.

 

4월 5일 무술

비국이 아뢰기를,
"성명께서 남쪽 지방에 대한 우환을 한창 진념하시어, 재국(才局)이 있고 인심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을 얻어 삼남의 군정(軍政)을 맡길 생각을 하고 계신데, 가려 뽑을 즈음에 적임자를 얻기가 어렵습니다. 유독 심기원(沈器遠)만은 본래 국량이 있고 삼남의 군무의 임무를 두 번씩이나 맡아 본데다 사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죄적(罪籍)에 있으므로 감히 우러러 청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살펴보건대, 심기원은 병자년 변란 때 팔로의 병사를 거느리고서 산골짜기에서 미적미적거리며 물러나 움추린 채 관망만 하고 있었다. 이에 남한 산성을 지척에 두고서도 끝내 한 발자욱도 나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을 구제하지 않았다. 나라에 기율이 있다면, 기원이 어찌 목숨을 보전할 수 있겠는가. 지금 삼남을 순검하는 것이 이 어떤 임무인데 묘당의 천거가 기원에게 돌아간단 말인가. 아, 또한 이상한 일이다.

 

4월 8일 신축

큰 가뭄이 들었다. 영의정 이홍주(李弘胄)와 좌의정 최명길(崔鳴吉)이 대궐에 이르러 대죄하면서 고사에 따라 삼공을 책면(策免)하여 천재에 응답하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하늘이 비를 내리지 않는 것은 실로 과인이 혼매하기 때문이니, 경들은 대죄하지 말라."

 

양사가 윤방을 위리 안치하는 일로 연달아 아뢰자, 삭탈 관직하라고 답하였다.

 

이홍주와 최명길이 면대를 청하니, 상이 불러 보았다. 홍주가 이성구(李聖求)를 도체찰사로 삼기를 청하니,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하게 하였다. 홍주가 아뢰기를,
"강도(江都)는 근본이 되는 곳이므로 수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상(水上)의 세미(稅米) 6, 7천 석을 남한 산성으로 수송할 군사가 없습니다. 만약 배로 강도에다 운송해 들인다면 일이 매우 편리하고 좋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남한 산성을 버리고 지키지 않는단 말인가?"
하자, 홍주가 아뢰기를,
"남한 산성에는 군량을 일찍이 이미 수송해 들였습니다."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중외의 인정이 모두 강도를 지킬 만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곳이 천험의 요새로 자위(自衛)하기에 충분하고, 또 배가 서로 통할 수 있어 외로운 섬이 쉽게 포위되는 것과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변란이 있을 경우 사람들은 반드시 남한 산성으로 들어가기를 원치 않고 강도로 들어가기를 원할 것입니다. 변란이 일어난 뒤로 인심이 착하지 못한 것이 더욱 심합니다. 심지어 중국에서 일본에 유시하는 듯한 거짓 칙서를 만들어 내기까지 하여 이 때문에 중외가 소란하니, 지극히 통탄스럽고 놀랍습니다. 그 말의 근원지를 추문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사해 내기가 용이하지 않을 듯하다."
하자, 명길이 아뢰기를,
"이는 대체로 호서(湖西)의 선비들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신계영(辛啓榮)이 그 말을 전한 세 사람을 알고 있으니, 조사해 내기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영남에 정인홍(鄭仁弘)의 남은 무리들이 아직도 있습니다. 처음에 남한 산성에서 나온 거조를 듣고서 소를 잡아 놓고 술을 마시면서 서로 축하하였다고 합니다. 지금까지도 그 악을 고치고 않고 조정을 원망하고 비방하니, 남방에 변란이 있을 경우 적에게 붙을 걱정이 없지 않습니다. 이들은 악역의 무리들이니 끝까지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역적의 자손으로 나이가 찬 자는 마땅히 죄에 따라 죄주어야 하는데, 금부에서 살피지 않아 혹 성 안에 살고 있는 자도 있으니, 속히 영을 내려 법에 따라 처치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겠다고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전일 상께서 원수로 합당한 사람을 물으실 때, 신의 소견으로는 이시백(李時白)이 장사들의 마음을 자못 얻고 있어 이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조정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시위하는 것이 허술하고 또한 병조 판서도 적임자를 얻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시백이 과연 재략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사람됨이 근실하고 사졸들과 고락을 함께 하니 이것은 취할 만한 점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김시양(金時讓)은 재주가 쓸 만한데 지금 병으로 폐인이 되었고, 장유(張維)는 어진 재상이었는데 끝내 병으로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으니, 내 몹시 애석하게 여긴다."
하니, 명길이 아뢰기를,
"이 사람이 죽은 것은 나라의 불행입니다."
하였다. 상이 홍주에게 이르기를,
"체찰사의 임무를 경이 어찌 감당하지 못하겠는가."
하니, 아뢰기를,
"신은 본래 재주와 지략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나이가 80이 다 되어 근력이 점점 다해가니, 어떻게 이 중임을 감당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체찰의 임무는 장수들이 병마 사이를 치달리는 노고에 비할 바가 아니니, 어찌 감당하기 어렵기까지야 하겠는가."
하니, 홍주가 아뢰기를,
"신이 형식적으로 사양하는 것이 아니라 실로 공사간에 낭패를 당할까 두려운 것입니다."
하였다.

 

이성구(李聖求)를 영돈녕부사로, 강석기(姜碩期)를 지경연으로, 서상리(徐祥履)를 사간으로, 이계(李烓)를 장령으로, 성이성(成以性)을 헌납으로, 김진(金振)을 지평으로, 이시만(李時萬)을 정언으로, 이상형(李尙馨)을 수찬으로 삼았다. 이계는 음험하고 독기를 부리는데다 교활하고 간사하여 남을 해치는 것이 그의 본성이다. 갑자년 변란 때 할아버지 이심(李愖), 아버지 이진영(李晋英)과 함께 모두 도주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삼대(三代)가 나라를 저버렸다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권병을 잡은 신하에게 부탁하여 청현의 반열에 올랐는데, 사림을 모함할 계책이 있자, 사람들이 모두 질시하였다.

 

4월 10일 계묘

헌부가 아뢰기를,
"정흡(鄭潝)·정기(鄭淇)·정대용(鄭大容)·오익환(吳益煥)·박종윤(朴宗胤)·박건갑(朴乾甲) 등은 모두 혼조(昏朝) 때 역신(逆臣)의 잔당으로서 강상에 죄를 지은 자들인데, 가볍게 찬축만 하였습니다. 다행히 은사(恩赦)를 입었으면 인화(仁化)의 안에서 태도를 바꾸어야 마땅한데, 지난번 국사가 위급하던 날 술을 마시며 서로 축하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편한 대로 거주하게 하여 화란을 불러 일으키게 해서는 안 되니, 모두 극변에다 위리 안치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하교하기를,
"병화를 치룬 뒤에 가뭄이 이토록 심하니,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기에 이런 재앙을 만난단 말인가. 그 연유를 따져 보건대, 죄가 실로 나에게 있다. 마음이 아프고 얼굴이 붉어지지만 구제할 바를 알지 못하겠다. 오늘부터 피전(避殿)·감선(減膳)·금주(禁酒)를 하여 더욱 수성(修省)의 도를 힘쓸 것이니, 승지는 나를 대신해 교서를 초안해서 직언을 널리 구해 내가 미치지 못하는 것을 돕게 하라."
하고, 이어 경외의 원옥(冤獄)을 심리(審理)하라고 명하였다. 팔도에 하유하였다.
"재앙을 없애는 방법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억울한 옥사를 심리하는 것이 가장 중하다. 동해에 원통한 부인이 있자 하늘이 3년 동안 비를 내리지 않았으니, 이는 억울한 기운이 꽉 맺혀 위로 하늘까지 뻗침으로써 화기(和氣)를 상해 재앙을 부른 것이다. 진실로 밝혀지지 않은 억울한 정상을 밝게 살펴 원통하고 답답해 하는 기운을 시원하게 풀어준다면 어찌 천심을 돌려 시원하게 비를 내려주는 은택을 부르기에 부족하겠는가. 경들은 도내의 옥에 갇힌 죄수들에 대해 그 죄의 경중을 잘 살펴서 죄가 가벼운 자는 즉시 결단해 석방하고, 죄가 무거운 자는 판결하여 계문하라. 혹시라도 동해의 효부처럼 원통함을 품고서 죽은 자가 있으면 비록 이미 지나간 일이라도 사실대로 아뢰어 조정의 처치를 기다림으로써 성실한 효험이 있도록 하라."

 

4월 11일 갑진

의금부가 아뢰기를,
"역옥에 연좌된 나이가 차지 않은 자들은 이미 법에 따라 정배하였습니다. 그 가운데는 혹 심리하여 석방된 자도 있고, 각사(各司)에 정속되었지만 고인(雇人)을 대신 세우고 한가로이 자기집에 있는 자도 있습니다. 이처럼 어렵고 근심스러운 때를 당해 때를 타고 난을 일으킬 근심이 없지 않습니다. 장례원으로 하여금 일일이 조사하여 먼 읍에 나누어 유배해 난의 계제를 끊으소서."
하니, 따랐다.

 

4월 12일 을사

의금부가 아뢰기를,
"지금 재이로 인하여 원옥을 심리하는데 경외에 똑같이 시행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심리는 곧 일시의 특은(特恩)이니 반사(頒赦)하여 죄를 용서해주는 데 비할 바가 아닙니다. 왕부(王府)의 죄인은 방백이나 유수가 마음대로 결단할 바가 아닙니다. 반드시 본부의 당상이 대신에게 나아가 의논하여 경중을 나누어 서계(書啓)해서 성상의 처분을 기다려야 합니다. 지금도 이에 따라 시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형조 판서 이경전(李慶全)이 병으로 면직되었다. 이때 한재로 인하여 심리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대신이 너그럽고 공평하며 강건하고 밝은 사람을 특별히 골라 형조 판서로 삼아 실효가 있게 하기를 청하자, 상이 따른 것이다.

 

4월 13일 병오

헌부가 아뢰기를,
"해숭위(海嵩尉) 윤신지(尹新之)는 늙은 아비를 따라 강도로 들어갔을 때 비록 공적인 일로 강가에 머물러 있었지만 위급할 때에 끝내 달려가 구원하지 않았으므로 물정이 일제히 분해하고 있습니다. 삭탈 관작을 명하소서. 전 부사 이경(李坰)은 강도에서 병란을 피하였습니다. 비록 의병에 종사하느라 다른 섬에 있기는 하였으나, 늙은 아비가 변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성에 들어갔는데 성이 뒤따라 함락되었으니, 이경이 처신하는 도리는 마땅히 어떠해야 하였겠습니까. 사람들이 모두 그 도리가 미진했다고 말을 하니, 사판에서 삭제하도록 명하소서."
하였다. 간원이 또한 두 사람을 삭탈 관작할 것을 논계하니, 답하기를,
"그 당시의 형세상 절대로 달려와 구원할 길이 없었다. 이른바 미진하다고 하는 것 또한 모두 믿을 수 없다. 아울러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하였다. 그 뒤에 누차 아뢰었으나, 이경의 직만 파하라고 명하였다.

 

4월 14일 정미

상이 고 평안 감사 홍명구(洪命耉) 어미의 병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의원을 보내 약을 싸가지고 가서 구완하게 하였는데, 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관곽과 역군(役軍)을 내리라고 명하였다.

 

진휼청에 명하여 경기의 굶주린 백성들에게 조(租) 2천 석을 나누어 지급하고, 수령들로 하여금 몸소 전야(田野)를 돌아다니며 백성들에게 밭갈고 씨뿌리기를 권면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경상 감사 이경여(李敬輿)가 본도의 민결(民結)이 과중하다는 이유로 지나치게 과중한 읍에 1만 결을 헤아려 감해달라고 청하였다. 묘당이 새 감사 이경증(李景曾)으로 하여금 물정을 잘 살펴 익숙히 강구하여 아뢰라고 하였는데, 경증이 치계하기를,
"영남의 백성들이 조정에서 1만 결을 감해 줄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모두 ‘나는 원통하다’고 하니, 참으로 취사하기가 어려우며 또한 신용을 지키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지금 만약 지나치게 과중한 읍만 감해 준다면 감면받지 못하는 읍에서는 공평치 못하다는 탄식이 있을 것입니다. 1만 결을 온 도에 똑같이 나누어 주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한 도 안에도 더욱 심하게 원망하는 읍이 있을 것이고, 한 읍 안에도 복결(卜結)의 수가 과중한 곳이 있을 것이니, 도신(道臣)이 잘 규획하고 수령이 친히 답험하여 조금도 허위로 하는 폐단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1만 결을 제급한 뒤에 세력 있는 자에게 이익이 돌아가고 소민(小民)들은 은택을 입지 못한다면 국가에 아무런 이로움이 없이 사체만 손상하게 될 것입니다. 도신으로 하여금 잘 요리하여 실효가 있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4월 16일 기유

예조가 아뢰기를,
"제주에는 세 읍을 통틀어 검은 소가 단지 세 마리밖에 없고 전생서에도 단지 다섯 마리밖에 없어 앞으로 제향에 이어 쓸 길이 전혀 없습니다. 예(禮)에 ‘흉년에는 하생(下牲)으로 제사한다.’ 하였습니다. 흉년에도 오히려 예를 감하는데, 하물며 이처럼 소가 다 없어진 때이겠습니까. 임시 방편으로 변통하는 거조가 있어야 합니다. 대신에게 의논하여 처치하소서."
하였다. 영의정 이홍주, 좌의정 최명길이 아뢰기를,
"제향에 쓰는 검은 소가 단지 몇 마리만 남았으니, 이러한 때에 밭갈이하는 소를 잡아 제사지내면 혹 조종의 신령께서 내려와 흠향하려 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주역(周易)》에 ‘한 통의 술과 두 그릇의 음식을 질그릇에 쓴다.’ 하였고,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는 ‘진실로 밝은 믿음이 있으면 시냇가나 연못가에서 자라는 풀이라도 귀신에게 올릴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말한다면 선조에게 제향하는 도는 정성에 달린 것이지 물건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소 대신 양을 써 예경(禮經)의 밝은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양으로 소를 대신하는 것은 지극히 미안하다. 다시 의논하여 처치하라."
하였다. 대신이 아뢰기를,
"이와 같이 하교하시니 그만둘 수 없다면 누런 소로 대신하는 것이 양으로 소를 바꾸는 것보다 오히려 낫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원옥(冤獄)을 심리한 단자로 심지원(沈之源)을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영의정 이홍주·좌의정 최명길이 상차하기를,
"강화를 배척한 여러 신하는 모두 일을 그르친 죄가 있습니다. 가벼운 벌을 내려 그들의 부박한 습관을 징계한 것은 나라의 체모에 있어 참으로 그만둘 수 없었던 일입니다. 그러나 시세를 알고 임시 변통에 통달하는 일은 나이 젊은 사람들에게 바랄 바가 아닙니다. 그들의 본심을 따져 보면 혹 용서할 만한 면이 있습니다. 뇌정(雷霆)은 온종일 위엄을 보임이 없고, 성인은 개과 천선하는 길을 넓혀주는 법이니, 심리하는 때를 인하여 아울러 용서해 주는 은택을 베푸는 것이 마땅합니다. 또한 생각건대, 체옥(滯獄)된 사람들에게 의심할 만한 정상이 있더라도 금부에서는 으레 감히 변론하여 밝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다시 조사해 살피게 해서 죄를 받는 자들로 하여금 변명할 말이 없게 한다면, 죄수를 구휼하고 재앙을 늦추는 도리에 있어 반드시 만에 하나라도 보탬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부박한 무리들은 그 죄가 작지 않은데, 오래지 않아 사면하는 것은 옳지 않은 듯하다. 금부의 죄수들은 해부로 하여금 차자대로 조사해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4월 17일 경술

의주 부윤 임경업(林慶業)이 치계하기를,
"중국배 2척이 서연대(西烟臺) 아래에 와서 정박하였습니다. 도사(都司)라고 하는 두 사람이 두 통의 편지를 전했는데, 하나는 ‘조선 국왕 개탁(朝鮮國王開拆)’이라고 쓰여 있고 하나는 ‘청북부총 임경업 개탁(淸北副揔林慶業開拆)’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이어서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도독이 보낸 편지이다. 너희 나라가 오랑캐들의 위협에 못 이겨 이미 신하라고 일컬었지만, 궁벽한 마을에 사는 어리석은 백성들까지도 모두 분해하고 있으며, 심지어 천조를 위해 눈물을 떨구기까지 한다고 하니, 그 충성심과 의리를 알 만하다. 너희 나라 사람들이 3월 중에 배를 타고 몰래 석성도(石城島)로 들어와 말하기를 「조선이 모두 오랑캐에게 더럽혀졌기 때문에 가족을 끌고 들어왔다. 차라리 중국의 귀신이 되었으면 되었지 맹세코 오랑캐의 백성이 되지는 않겠다.」 하였는데, 도독이 그들을 위로하고 보살펴 주었다.’ 하였습니다. 도사가 또 말하기를 ‘너희 나라 연안의 복병(伏兵)이 몰래 우리 배를 살피고 있으니, 이는 영원히 중국을 끊으려는 의도이다. 도독이 이 때문에 분을 품어 임 부총이 문서를 받고 조정에 보고하는지의 여부를 본 다음 거취를 결정하려고 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신이 그들이 문답하는 말을 살펴보건대, 한편으로는 협박하고 한편으로는 달래는 뜻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난처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고, 또 절대로 이럴 리가 없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이 문서를 받아야 할지 받지 말아야 할지를 묘당으로 하여금 급속히 지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문서를 받은 뒤에 이치상 난처한 근심이 반드시 닥칠 것입니다. 만약 이 문서가 혹 심지상(沈志祥)의 무리가 우리 나라를 탐지해 보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 근심거리가 반드시 클 것이고, 만약 과연 도독이 보낸 것인데 우리가 끝내 받지 않는다면 유감을 품는 것이 반드시 깊을 것입니다. 또한 문서를 받고 청나라에 숨긴다면 꾸지람을 받는 것이 더욱 많을 것입니다. 대체로 한인(漢人)들이 왜국에 구원을 요청하였다는 말이 관서 지방에 전파되고 있으니, 반드시 청나라 사람들의 귀에 들어갈 것입니다. 청나라 사람들은 의심이 많습니다. 만약 우리가 듣고서도 일부러 숨겼다고 생각한다면 뒷날 그 의심을 풀기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얼음이 풀린 뒤부터 지금 4월까지 한 번도 한인들과 서로 교통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부득이한 형세에서 나온 일이지만 마음속으로는 실로 미안합니다. 더구나 도독의 입장에서 어찌 의아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지금 한인들의 배가 온 것을 인하여 한번 왕복해 우리의 의사를 명백히 개진하고 다시는 오지 말라고 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청나라에 통보해 숨기는 것이 없어야 이치상 매우 순조롭고 일에 있어서도 합당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지금 이 한인들이 온 것은 몰래 장사하고 정탐하려는 계책에 불과하다. 이 뒤에 만약 난처한 일이 있게 되면 그렇게 주장한 사람은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계사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강석기(姜碩期)를 형조 판서로, 최유해(崔有海)를 수찬으로 삼았다.

 

4월 18일 신해

유성이 대각성(大角星) 아래에서 나와 항성(亢星) 아래로 들어갔다.

 

의주 부윤 임경업이 상소하여 본부의 폐단을 진달하였는데, 상이 비국으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그 가운데 쇄마(刷馬)에 대한 폐단은 이미 극한 상황에 이르렀으니, 끝내 변통하는 일이 없을 수 없습니다. 새로 출신(出身)한 사람들을 의주에 입방(入防)하게 하는 것은 아무 이로움이 없을 듯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의논이, 출신자 중에 입방을 면제받고자 하는 자들에게 말 한 필씩 바치도록 허락하여 의주로 보내어 부(府)의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가, 일이 없을 때는 자기가 쓰도록 하고 사신이 왕래할 적에는 가져다 쇄마로 삼으면 일이 매우 편리하고 마땅할 것이라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말을 바치게 하는 일은 혹 실이 없는 폐단이 없지 않다. 부득이하다면 베를 거두어 들여보내라."
하였다. 비국이 35필(匹)로 정식을 삼아 병조로 하여금 거두어 들이게 한 뒤에 입방에 준하는 공문(公文)을 제급하고, 그 가운데 부방(赴防)을 자원하는 자는 또한 들어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 헌부가 방수(防戍)를 면하고 베를 바치는 것은 사체가 구차하니 성명(成命)을 거두라고 청하였다. 상이 대신으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하게 하였는데, 대신이 헌부의 의논에 따라 방수하게 하기를 청하니, 따랐다.

 

4월 19일 임자

의주 부윤 임경업이 치계하기를,
"신이 권칙(權侙)과 역관으로 하여금 가서 도사(都司)를 만나게 하였는데, 도사가 말하기를 ‘진 도독(陳都督)이 지금 석성도에 있다. 이 문서를 받느냐 받지 않느냐에 따라 귀국의 향배(向背)가 결정된다.’ 하였습니다. 이에 답하기를 ‘조정의 명령이 있기 전에는 결코 받아 가기 어렵다.’ 하였습니다. 도사가 말하기를 ‘황상께서 특별히 파견한 칙사 도소기(道邵起)가 이미 석성도에 이르렀는데, 먼저 나로 하여금 와서 통지하게 한 것이다.’ 하자, 권칙이 말하기를 ‘우리 임금께서 지성으로 사대하시는 마음이 해와 별처럼 빛나지만, 세자가 오랑캐에게 포로가 되어 있어 오랑캐의 공갈이 매우 심하니, 대인께서도 또한 이 정세를 양찰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도사가 말하기를 ‘천조와 귀국은 부자의 의리가 있다. 어찌 자식으로서 아비를 등지는 도리가 있겠는가. 귀국의 임금과 신하가 바닷길로 들어오면 선척과 식량을 대줄 수 있을 것이다.’ 하자, 권칙이 답하기를 ‘천조와 서로 교통하면 오랑캐가 반드시 다시 와서 충돌할 것인데, 부모의 나라는 멀리 바다 건너 있으니, 어떻게 세력을 믿고 쳐들어 오는 것을 제지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도사가 말하기를 ‘천조에서 이미 왜국에 군사를 요청하였으니, 오래지 않아 틀림없이 올 것이다. 이 오랑캐들을 소탕해 평정한 뒤에 귀국의 임금과 신하들로 하여금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겠다.’ 하고, 또 말하기를 ‘문서를 받느냐 받지 않느냐에 칙사가 오느냐 오지 않느냐 하는 것이 달렸다. 반드시 명확한 회보를 얻은 뒤에라야 들어가겠다. 잠시 오랑캐가 보지 않는 곳에 배를 물려 두고 머물러 기다릴 계책이다.’ 하였습니다. 이어 노주(潞州)의 명주 2단(端)를 내놓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도독이 부총(副摠)의 충성을 바친 편지에 감사하는 것이다.’ 하고, 친히 꿇어앉아 언덕 위에 올려놓고서 떠나갔습니다.
한인들의 말은 예로부터 허탄하여 믿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청나라 사람들이 강 건너 변경에 있으면서 한인들의 배가 왕래하는 것을 살피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기도 저렇게 하기도 사세상 난처하니, 묘당으로 하여금 답장하는 말을 어떻게 쓸 것인지 지시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지금 권칙 등이 문답한 장계를 보건대, 말한 것이 전과 다를 바 없습니다. 다만 임경업이 이미 그 문서를 받았으니, 전혀 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경업으로 하여금 은밀히 가서 만나보고 이어 예단을 주면서 감사하다는 뜻을 전하고 우리의 답답한 사정을 진술하는 한편, 애초에 구원병 보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연유를 말하여 본국의 사정을 밝히게 한다면 혹 조금은 도독의 마음을 위안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청나라사람들이 지금 한창 중국을 침범하기 때문에 도독이 이런 옹졸한 꾀를 내어 뒤를 나꿔채는 계책을 낸 것이다. 내가 헤아려 보건대, 이는 특별히 다른 정상이 없다. 그러나 임경업이 가서 만나보는 것은 혹 무방할 듯하다. 계사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교서 박사(校書博士) 이휴(李休)가 상소하기를,
"나라의 큰일은 제사에 있고, 신을 섬기는 도리는 정성껏 하는 데 있을 뿐입니다. 축호(祝號)와 제식(祭式)이 실제와 어긋나면 귀신이 흠향하려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상란(喪亂)이 일어난 뒤로 중외의 크고 작은 문서에 중국의 연호를 쓰지 않고 있는데, 유독 축사(祝辭)에는 그것을 쓰고 있으니, 전하의 한결같은 생각이 중국에 대해 해이해지지 않아서 거짓 연호를 신명에게 더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에서 쓰지 않는 것을 신명에게 쓰니, 속이는 것에 거의 가깝습니다. 아, 실이 없는 헛된 형식을 쓰는 것은 변례(變禮)를 써서 실답게 하는 것만 못합니다. 부득이하다면 갑자(甲子)만 쓰는 것이 더욱 낫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그 소를 예조에 내렸다. 예조가 회계하기를,
"축사의 연호에 대해 그가 이른바 ‘신명에게 더하려 하지 않는다.’고 한 말은, 성상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잘 안 것입니다. 옛사람이 이른바 ‘왕망(王莾)이 납제(臘祭)를 지냈는지 어찌 알겠는가?’ 한 것이 어찌 속이는 데 가깝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옛 연호를 버리고 단지 갑자만 쓰는 것도 예를 아끼는 뜻이 아닙니다. 고치기가 용이하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20일 계축

이명(李溟)을 형조 판서로, 이경여(李敬輿)를 예문관 제학으로, 박수문(朴守文)을 지평으로 삼았다.

 

좌의정 최명길이 상차하기를,
"일찍이 도성으로 돌아온 초기에 묘당이 제향에 음악을 쓰지 않고 단지 악공들로 하여금 봄·가을로 음악을 익히도록 하기를 의논해 정했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듣자 하니, 서울 악공들의 상언으로 인하여 외방의 악공과 악생들로서 재주가 이루어진 자는 전례에 따라 상번(上番)하고, 재주가 이루어지지 않은 자와 봉족(奉足)은 아울러 반으로 줄여 베를 거둔다고 합니다. 신이 생각건대, 이는 서울 악공들만 이로운 것으로 조정에서 백성들을 구휼하고 폐단을 제거하는 뜻이 아닙니다. 전부터 외방의 악공들은 본래 재주를 이룬 자가 없는데, 서울 악공들이 반드시 상번하도록 하여 침탈하려는 욕심을 채우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외방의 악공들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이웃이나 족속에게 징수하는 폐단이 야기되었습니다.
제향에 음악을 쓰지 않도록 한 것은 민폐 때문이었습니다. 음악을 쓰지 않는데도 민폐가 전과 같으면 도로 음악을 쓰는 것이 더 낫습니다. 신의 소견으로는, 서울에 있는 악공들은 모두 옛날처럼 음악을 익히게 하고, 외방에 있는 자와 봉족은 소략하게 베를 거두어 서울에 있는 악공들에게 지급해서 음악을 익히는 데 전심하게 해야 할 것같습니다. 그리고 뒷날 나랏일이 안정되기를 기다려 음악을 쓸 때에는 기한 전 몇 년 안에 외방의 악공들을 불러 모아 가르치고 익히게 하여 쓰더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예조로 하여금 참작하고 상량하여 다시 사목(事目)을 세워 양쪽 다 편리하도록 도모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예조가 회계하기를,
"서울에 있는 악공 70인과 악생 30인을 두 번(番)으로 나누어 50인은 봄·여름에 음악을 익히게 하고 50인은 가을·겨울에 음악을 익히게 하며, 외방에 거주하는 3백여 인에게는 각각 베 2필씩 거두어 서울에서 음악을 연습하는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본 고을로 하여금 일체 침탈하지 못하게 한다면 안으로는 악공이 모자란다는 탄식이 없게 되고 밖으로는 임시로 줄여주는 은택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22일 을묘

유성이 북두성 아래에서 나와 건방(乾方)으로 들어갔다.

 

전라도 진안(鎭安) 지방에 서리가 내렸다.

 

함경도의 굶주리던 백성 중 전염병에 죽은 자가 3백 40여 인이었다.

 

대사간 전식(全湜), 사간 서상리(徐祥履), 헌납 성이성(成以性), 정언 이시만(李時萬)·신유(申濡) 등이 상차하기를,
"성상의 옥체를 잘 조리하고 보양하며 힘써 실덕(實德)을 닦아서 하늘에 기도하여 천명을 영원히 하는 근본으로 삼으소서. 사치 풍속을 통렬히 개혁하고, 언로를 널리 열며, 기강을 떨쳐 정숙케 하고, 절의를 높이고 권장하며, 백성들의 아픔을 부지런히 구휼하고, 내수사(內需司)를 혁파하여 하늘의 견책에 답하고 재앙을 늦추는 방도로 삼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진달한 8조목은 지극한 의논이 아닌 것이 없으니, 내 어찌 감히 스스로 힘써 채용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4월 24일 정사

영의정 이홍주가 병으로 정사(呈辭)하니, 상이 내의(內醫)를 보내 병을 보살피게 하였다.

 

4월 25일 무오

왕세자가 보덕(輔德) 이시해(李時楷)를 보내 문안하였는데, 단오절일이기 때문이었다.

 

비국이 아뢰기를,
"삼가 사은사의 장계를 보건대, 황제가 밤을 이용해 돌아갔다고 하니, 반드시 이유가 있어서일 것입니다. 유림(柳琳)이 떠날 때 이미 황제가 돌아온 뒤에 별도로 문안하겠다는 뜻을 알렸으니 중사(中使)의 행차를 속히 떠나 보내야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26일 기미

유성이 구진성(鉤陳星) 아래에서 나와 동방으로 들어갔다.

 

이경석(李景奭)을 대사헌으로, 민응형(閔應亨)을 좌부승지로, 성이성(成以性)을 교리로, 김중일(金重鎰)을 정언으로, 김홍욱(金弘郁)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어떤 사람이 밤에 인경궁(仁慶宮) 담장을 넘어 후원으로 들어와서 소나무를 자른 것이 매우 많았다. 병조가 잡아 다스리기를 청하자, 상이 따랐다.

 

이에 앞서 대관이, 전 현감 윤선도(尹善道)가 애초 임금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데도 곧바로 나오지 않고 강도에서 내려갈 적에 처자(處子)를 잡아가지고 바다 가운데 있는 섬으로 몰래 들어갔다는 이유로,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할 것을 청하였었다. 이에 선도가 공초하기를,
"지난해 병란이 창졸간에 일어났기 때문에 가다가 중도에서 막혀 단절되기보다는 바닷길을 통해 강도로 가는 것만 못하였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험난한 파도를 헤치며 간신히 안흥진(安興鎭)에 도착하였는데, 강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에 배를 돌려 남쪽으로 내려갔는데, 해남(海南)에 도착하였을 때 비로소 남한 산성에서 도성으로 다시 들어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대관이 논계하면서 말한 것은, 강도에 있을 때 도성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달려와 문안하지 않은 것처럼 말하였으니, 어찌 억울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미 천 리나 먼 바닷길에서 수없이 죽을 고비 넘기는 것을 꺼리지 않고 먼저 강도로 달려갔는데, 어찌 경성을 지척에 두고서 달려가 문안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강도로부터 돌아가다 배가 영흥도(靈興島)에 도착하였을 적에 마침 동서인 이희안(李希顔)을 만났습니다. 그의 늙은 여종이 한 여자를 데리고 와 오랫동안 같은 배 안에서 지내다 보니 그럭저럭 서로 가까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처첩에게 기롱을 받고 친구들에게 비웃음을 사게 될 줄은 알았지만, 어찌 끝내 조정에서 잡아다 국문하는 죄가 될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늙은 종에게 자세히 물어보니, 여종의 남편은 기패 초관(旗牌哨官) 김계생(金季生)으로 일찍이 서로(西路)에 갔다가 한 상민(常民)의 딸을 얻어 이 아이를 낳았는데, 그대로 길러 자기의 딸로 삼았다고 하였습니다. 김계생은 사족(士族)이 아니고 딸의 어미도 천한 사람이니, 처자(處子)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종적을 감추고자 하여 바다 가운데 섬으로 깊이 들어갔다고 하는 것은 더욱 이치에 가깝지 않습니다. 저의 집 식구들이 매우 많으니 비록 바다 가운데 섬으로 들어가더라도 어찌 이 여자를 데리고 가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이 섬 안에는 본래 가노(家奴) 몇 호(戶)와 다른 사람 10여 호가 있는데, 봄·여름에는 물고기를 잡고 가을·겨울에는 매를 잡으니 남의 이목이 서로 접하지 않는 곳이 아닙니다. 비록 이 여자가 한 성(城)을 기울일 만한 절색(絶色)의 미인이라고 하더라도, 남아가 세상에 나아가고 물러나 숨는 것을 어찌 한 여자 때문에 그렇게 하겠습니까. 바다 가운데 섬으로 들어간 것은 어째서였겠습니까. 강도의 배가 내려오지 않아 곧바로 이곳으로 들어간 것이니, 그 또한 병란을 겪은 뒤에 마음의 병이 발광(發狂)한 소치입니다. 그리고 발광한 것은 실로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한 데서 나온 것이니, 또한 어찌 성명께서 마땅히 긍휼히 여기시어 용서해 주실 바가 아니겠습니까.
평생 산수(山水)를 좋아하는 병이 깊었는데, 거처하는 섬은 천석(泉石)이 빼어난 절경인지라 이 때문에 몹시 좋아하여 흥을 붙여 근심을 잊었습니다. 그렇지만 임금에 대한 일념은 밥 한술을 드는 데도 어찌 감히 잊었겠습니까. 매번 산이 텅 비고 밤은 고요한데 흰 달이 허공에 걸린 때를 당하면, 간절히도 ‘아름다운 사람을 그림이여, 하늘 한쪽 방면에 있도다.[望美人兮天一方]026)  ’ 하는 뜻이 있었으며, 이어 왕세자의 옥같은 얼굴과 봉림 대군(鳳林大君)의 수려한 모습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강산에서 피리불고 북치며 정취를 붙이는 지경에 이른 것에 생각이 미치면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을 삼키게 하고 간장이 끊어지게 하였습니다. 언덕과 골짜기를 찾아가 쉬며 두루 구경을 하였던 것은, 모두가 가슴 속에 있는 답답한 회포를 풀어보려는 것이었습니다. 심사가 이와 같은 데 불과한데, 사람들의 말이 이처럼 변화되어 이러쿵저러쿵 의논하고 있습니다. 귀신도 실로 잠잠해져 와언(訛言)이 없기를 바랄 것입니다."
하였다.

 

4월 27일 경신

이 당시 상이 편치 못하여 오랫동안 경연을 폐지했었는데, 이때 이르러 비로소 문정전(文政殿) 무하(廡下)에서 유신(儒臣)들을 소대하였다. 성이성(成以性)이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묘당이 중국의 문서를 받는 일에 대해 의논해 처치할 때, 성비(聖批)에 ‘주장한 사람은 마땅히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고 전교하기까지 하셨다고 합니다. 임금과 신하 사이에 귀한 바는 서로 믿는 것이고 일이 안위(安危)에 관계될 경우 익숙히 강구하는 데 달려 있으니, 이처럼 곧바로 굴레를 씌우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지난해 강화를 배척한 신하들을 잡아 보낸 거조도 이미 성명한 시대의 아름다운 일이 아닌데, 이런 태도를 고집하여 위엄으로 제압하는 듯한 점이 있으니, 매우 미안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명분을 좋아하는 자들이 빌미를 만든 것이다. 다시 잘못될까 염려되어 나도 모르게 성난 말을 한 것이다."
하였다.

 

평안도 박천(博川) 지방에 우박이 내려 벼와 기장이 손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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