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계해
승지를 보내어 삼각산(三角山)·목멱산(木覓山)·한강(漢江)에서 기우제를 거행하였다.
부제학 이경여(李敬輿), 교리 심동구(沈東龜)·성이성(成以性), 수찬 최유해(崔有海)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전하께서 총명하고 슬기로운 자질과 효우롭고 공검(恭儉)한 덕으로 지치(至治)를 이루고자 전전긍긍하시며 인재들을 불러모아 함께 다스리신 지 이제 16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국사가 끝내 이 지경에 이르러 하늘은 재앙을 거두지 않고 백성들은 원망하는 마음을 풀지 않아 재화가 거듭되어 나라의 존망을 예측할 수 없으니 장차 용렬하고 혼암한 임금처럼 패망하고 말게 되었습니다. 그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신들은 통탄스럽게 여깁니다.
신들은 모르겠습니다만, 전하의 마음씀이 체용(體用)의 현미(顯微) 사이에 과연 모두 하늘에 맞는데도 하늘이 응하지 않는 것입니까? 당연히 해야 할 일에 대하여 당연한 법칙을 다하면 그것이 바로 이치에 합하는 것이고 일이 모두 이치에 합하면 움직이는 일마다 뜻에 맞을 것입니다. 어찌 이적(夷狄)을 두려워하겠으며 화란(禍亂)을 근심하겠으며 재변을 염려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혼조(昏朝) 때 여항에 계시면서 종사(宗社)와 윤기(倫紀)를 근심하시어 난세를 다스려 안정으로 회복시키는 것을 책무로 삼으시고 만 번 죽더라도 불사할 각오로 동지들을 규합하여 대의를 일으켜 세워서 다시 이륜(彛倫)이 밝아지고 종사가 안정되게 하였으니 중흥(中興)의 공덕이 찬란합니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마음이 가는 바를 의(義)로 주를 삼아 두려워하거나 기가 꺾이지 않았고 이해를 다투는 사사로운 마음이 그 사이에 관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기(志氣)가 강건해져서 마침내 큰 공적을 아루게 된 것입니다. 수백 명의 오합지졸로 조정을 맑아지게 하는 업적을 이루었으니, 실로 하늘이 도우신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사람의 모사로 되었겠습니까. 하늘의 도움을 얻은 것은 의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계해년027) 이후로 전하께서 만일 즉위초와 같은 마음으로 마음을 가다듬으시고 천승(千乘)의 존귀함을 낙으로 여기지 않으시면서 오직 마음을 바로잡고 덕을 쌓으며,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데 전념하시어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조금이라도 태만한 일이 없으시며, 충성스럽고 어진 신하들을 신임하여 그들의 직언을 즐겨 듣고 사의(私意)를 버리고 공도(公道)를 넓히며, 궁금(宮禁)을 엄하게 다스려 청탁의 길을 막고 절검을 숭상하여 부역을 줄이시며, 공리(功利)의 설에 현혹되지 않고 세금을 잘 거두는 신하를 좋아하지 않으시며, 기강을 바로잡아 형식적인 것들은 통렬히 개혁하고 군율을 엄히 밝혀 군정(軍政)을 정돈하셨다면, 10년도 안 되어 국사가 다스려지고 나라의 근본이 점차 튼튼해져서 형세가 저절로 공고해졌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궁실과 먹고 입는 것을 차리는 것과, 여마(輿馬)와 완호품(玩好品) 등을 갖추는 것과, 내시와 궁녀들이 받드는 것도 전과 같으며, 곧은 선비들을 물리치고 아첨하는 무리들을 신임하며 간언을 물리치고 자기 의견만 내세워 언로를 막는 것도 전과 같습니다. 심지어 공적인 의리는 전혀 없고 사사로운 이해에만 현혹되어 천지의 법도를 하찮게 여기고 사람과 사물의 떳떳한 법칙을 멸절되게 하여 천하의 큰 법도를 유지하고 온 나라의 인심을 위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마치 거의 죽어가는 사람이 발병한 원인은 경계하지 않고서 본성을 해치고 생명을 손상시키는 짓을 계속 힘써 하여 가물거리는 목숨이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 위로는 하늘이 노하고 아래에서는 백성들의 원성이 쌓이니, 원근의 사람들이 모두 애통하고 답답해하며 흩어질 마음을 갖는 것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신들이 가까이 모신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데, 전하께서 술을 즐기거나 여색에 빠지는 과실이 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그런 얘기가 항간에 떠돌기 시작했습니다. 궁중의 일은 비밀스러운 것이라 신들은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만약 허위가 아니라면 반드시 곡절이 있을 것입니다. 신들은 이에 목이 메어 차마 말을 못하겠습니다.
전하의 한몸은 종사와 신민이 믿고 우러르는 바입니다. 큰 혼란이 진정되지 않았고 막중한 책임이 앞에 있는데 어찌 차마 경거 망동을 하시어 열성(列聖)들에게 슬픔을 끼치시고 백성들에게 근심을 던져 주십니까. 통렬히 반성하시어 결단코 멀리 끊어 버리십시오.
역적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의 자녀가 모두 혼인을 했으니 참으로 성덕(聖德)의 일입니다. 폐동궁(廢東宮)의 한 딸도 이미 장성하여 성상께서 하늘에 계신 선조(宣祖)의 뜻을 받들어 이미 조정 신하들의 청을 허락하셨으니, 유사로 하여금 혼사를 제때에 거행하도록 하는 것도 역시 화기(和氣)를 부르는 데 하나의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전에 중국의 문서를 받을지의 여부는 실로 대의에 관계되는 것이었으며, 국가 안위의 기틀이 달린 것이었습니다. 그 사이에 조처를 잘 할 수 있는 방법이 어찌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조정에서 처치한 것은 사리에 있어 근거가 없고 조처한 것이 마땅하지 못했으므로 인심이 복종하지 않고 여론이 분분하니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전하의 뜻은 필시 진위 여부가 확실하지 않다고 여기시어 그렇게 신중히 하셨을 것입니다만, 성상의 의중을 어떻게 사람마다 일일이 납득시킬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원수(元首)와 고굉(股肱)은 의리상 일체이므로 성패와 이해에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는 법이니, 득실과 편부에 대하여 충분히 따져보고 의논을 일치시키는 것이 사리상 마땅합니다. 그런데 성비(聖批)에, 논의를 주창한 자가 담당하라고까지 분부하셨으니, 신은 삼가 전하를 위하여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옛날의 명철한 임금은 반드시 절의를 중요시하여 오히려 미치지 못할세라 급급하게 부식하고 권장하여 융숭한 상과 높은 벼슬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고 엄중한 형벌을 늦추어 주지도 않았으니, 멀리 생각한 것은 천 년 후에도 본받을 만합니다. 절의를 지키다가 죽은 대소 진신(搢紳)들과 귀하거나 천하거나 변란을 당해서도 정절을 지킨 부인들을 남김없이 찾아내어 정려하고 포장하는 은전을 속히 거행하여 구천에 떠도는 영혼을 달래소서. 혹 살았더라도 제몸을 깨끗하게 지켜 인륜을 부지하고 절의를 우뚝 세운 자는 비록 중도에 맞지 않더라도 퇴폐한 풍속을 진작시킬 만하니, 너무 심하게 냉대하여 중외(中外)의 의혹을 자라게 하지 마소서.
포로로 잡혀갔던 여자들은 본심이 아니었으니, 그들에게 목숨을 버려 죽지 않은 것을 책할 수는 없다 해도 남편의 집안에서 볼 때 이미 대의(大義)가 끊어진 것이니, 어찌 강제로 다시 결합하게 하여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국가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비록 그들이 의지할 데 없음을 가엾게 여겨 제 살 곳을 찾게 하고자 한 것이지만 보고 듣는 이들이 의혹하여 원근이 떠들썩하니 풍속을 해침이 작지 않습니다. 비록 일제히 이혼하게 하는 것은 불가하더라도 재취(再娶)하거나 그대로 데리고 살거나 하는 것은 마음대로 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신들이 삼가 여론을 듣건대, 전하께서 성절(聖節)과 천추(千秋) 및 동지(冬至)와 원단(元旦)에 궁정에 위차(位次)를 설치하여 예를 행하고 서쪽을 향하여 통곡하셨다니, 신들은 성덕에 감동하여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천지 신령과 조종(祖宗)의 영혼이 반드시 지하에서도 감동하였을 것이고 온 나라 신민들도 우러르고 의지하는 마음으로 굳게 뭉쳐 흩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옛사람과 같은 공을 곧 세울 수 있을 것이니, 오늘날의 일이 어찌 흠이 되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봉공(奉供)하는 외물을 염두에 두지 마시고 거처와 의복 및 거마는 어려웠던 시절을 잊지 마소서. 매우 공정하게 삼가 살피시어 상벌을 내리시되 사욕을 따르지 말고 한결같이 공의(公議)를 들어 덕 있는 이를 명하고 죄 있는 이는 벌주는 하늘의 뜻을 받들며, 마음에 안 드는 말이나 뜻에 맞는 말이 있으면 반드시 도(道)에 맞는지 어긋나는지를 헤아려보아 물 흐르듯 따르는 도량을 넓히고, 호오의 편벽된 마음에 얽매이지 말아서 충직한 이들이 권장되게 하소서. 용렬하고 구차하게 비위 맞추는 것을 후중(厚重)하다 하지 말고, 강개(慷慨)하게 나라를 근심하는 것을 지나치게 과격하다 하지 말고, 아첨하고 순종하는 것을 임금을 사랑하는 것이라 하지 말고, 직언으로 과감히 간하는 것을 정직을 파는 것이라 하지 말고, 대열을 뒤쫓아 가는 것을 안정된 것이라 하지 말고, 탁한 것을 배격하고 맑은 것을 앙양하는 것을 부박한 짓이라 하지 말고, 능력을 자랑하고 원망을 전가하는 것을 국사에 마음을 다한다고 하지 말고, 백성을 사랑하고 근본을 굳건히 하는 것을 명예를 구하는 것이라 하지 마소서. 그리하여 한 시대의 사대부(士大夫)로서 직분을 다하는 자들이 뜻을 펼 수 있는 자리를 얻어 제각기 몸과 마음을 다하여 국난을 극복해 나가게 한다면 인심이 결속되고 나라의 기강이 점차 확립되어 장차 반드시 천하에 대의를 펼치게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차자를 살펴보고 잘 알았다. 차자의 내용이 모두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마땅히 유념하고 채택하여 시행하겠다."
하였다.
5월 2일 갑자
상이 5월 초하루에 으레 진공하는 홍소주(紅燒酒)를 감하도록 명하였다. 내국(內局)이 무더위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소주를 써야 한다고 하여 하루 걸러 봉진하게 하도록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서경우(徐景雨)를 대사헌으로, 김여옥(金汝鈺)을 사간으로, 김태기(金泰基)를 정언으로 삼았다.
상이 대신과 비국 당상들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최명길(崔鳴吉)이 아뢰기를,
"군국(軍國)에 관계된 모든 기밀 사항들이 반드시 사전에 누설되고 있는데, 이는 비밀 문서가 정원에 도착하면 여러 승지와 사관들이 모두 보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해방(該房) 승지가 받아서 개봉하여 보고 사관으로 하여금 입계(入啓)에 참여하여 듣지 못하게 하고 그 문서를 도로 내린 뒤에는 본사 당상의 집에 보관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불가불 변통해야겠다. 일찍이 장계(狀啓)도 양사에 간통(簡通)하는 규례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이목(耳目)에 번거로운 점이 있다."
하였다. 호조 판서 심열(沈悅)이 아뢰기를,
"아무리 기밀에 관계된 일이라 해도 어찌 사관이 보지 못하게 한단 말입니까."
하니, 최명길이 아뢰기를,
"옛날 한(漢)나라 때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이 고조(高祖)의 발을 밟고서 귓속말을 했는데, 그때도 어찌 사관이 참여하여 들을 수 있었겠습니까마는 후세에 기롱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처럼 근심스러운 때에는 군국의 중대사를 비밀히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고, 이어 은밀히 사관에게 이르기를,
"이 이야기까지 다 기록할 것은 없다."
하였다. 상이 비밀 문서를 대신들의 집에 보관하도록 명하였다. 심열이 아뢰기를,
"나라가 전에 없는 한재를 만났으니 지금은 곡식을 거두는 일이 급선무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조정의 명령을 대부분 믿지 않기 때문에 곡식이 있는 자들도 응하지 않으니, 묘당에서 의정하게 하소서."
하니, 최명길이 아뢰기를,
"곡식을 많이 내는 사람은 실직(實職)을 제수하는 것도 괜찮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납속(納粟)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용렬한 자들이라 실직을 제수하면 정체(政體)에 해로울 것이고 또 그것을 인연해서 수령이 되는 자도 없지 않을 것이니 백성들에게 폐가 미칠 것이다."
하니, 심열이 아뢰기를,
"먼저 참하(參下)의 실직을 제수했다가 재능을 보아서 진퇴시키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근래 소차 중에 휘어(諱語)028) 가 많은데 일이 일어날 염려가 없지 않으니, 정원으로 하여금 상세히 살피게 하소서."
하자, 부제학 이경여가 아뢰기를,
"요즈음 국세가 위축되고 무너져 날마다 잔약해지고 있으니, 전하께서는 반드시 눈앞의 위험을 경계하는 마음을 늦추지 말고 자나깨나 근심걱정하시면서 백료들을 거느리고 분발하도록 격려해야 하고, 대신들도 몸과 마음을 다해 미치지 못하는 것을 바로잡고 원대한 계획을 세워 훗날의 공적을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점은 생각하지 않고 소차 중의 말이 조금이라도 저들에게 저촉되면 금방이라도 화가 닥칠 듯이 벌벌 떨면서 도리어 말한 이를 책망하니, 어찌 괴이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군국 기밀이 아무리 비밀스러운 것이라 해도 어찌 사관이 알지 못하게 한단 말입니까. 결코 전에 없는 규칙을 만들어서 말류의 폐단을 열어 놓아서는 안 됩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지 않았다.
사신은 논한다. 나라의 시비를 논하는 칼자루는 사관에게 있는데, 사관에게 숨겨서야 되겠는가. 또한 일찍이 사관이 사전에 기밀을 누설하여 일을 그르친 적이 있었는가. 모든 국가의 기밀에 관한 일은 대신 스스로 때에 따라 잘 처리하여 사전에 누설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이것은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관을 의심하여 참여하지 못하게 하니 도대체 무슨 의도에서인가. 최명길은 아첨으로 영합하여 조정의 권세를 장악하더니 이제는 군국 기무에 관한 일을 비밀히 해야 한다는 구실로 사관에게 숨기고자 하여 장량과 진평이 한 고조에게 귓속말을 한 고사를 끌어다가 자기 뜻을 이룰 소지로 삼고는, 소리를 낮춰 그 말을 기록하지 말도록 사관에게 은밀히 부탁하였으니, 그 속셈을 알 만하다.
【태백산사고본】 36책 36권 37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19면
【분류】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역사-사학(史學) / 역사-편사(編史) / 재정-잡세(雜稅) / 정론-정론(政論)
[註 028] 휘어(諱語) : 청나라에 대하여 삼가야 할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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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나라의 시비를 논하는 칼자루는 사관에게 있는데, 사관에게 숨겨서야 되겠는가. 또한 일찍이 사관이 사전에 기밀을 누설하여 일을 그르친 적이 있었는가. 모든 국가의 기밀에 관한 일은 대신 스스로 때에 따라 잘 처리하여 사전에 누설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이것은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관을 의심하여 참여하지 못하게 하니 도대체 무슨 의도에서인가. 최명길은 아첨으로 영합하여 조정의 권세를 장악하더니 이제는 군국 기무에 관한 일을 비밀히 해야 한다는 구실로 사관에게 숨기고자 하여 장량과 진평이 한 고조에게 귓속말을 한 고사를 끌어다가 자기 뜻을 이룰 소지로 삼고는, 소리를 낮춰 그 말을 기록하지 말도록 사관에게 은밀히 부탁하였으니, 그 속셈을 알 만하다.
도승지 이목(李楘)이 아뢰기를,
"변란 후 인심이 부박해져서 어떤 계획이 세워지면 대부분 누설되고 말기 때문에 지난번 연석(筵席)에서 대신이 아뢴 것이 비록 의구심을 가라앉히기 위한 의도에서였다고 하더라도 국가의 중대한 일을 어찌 붓을 쥐고 있는 신하들이 참여하지 못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대간(臺諫)은 인주(人主)의 이목으로서 일에 따라 바로잡는 것이 그 직분인데 어찌 전혀 모르게 할 수 있겠습니까. 성명(成命)을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박자안(朴自安)의 일을 보면 조종조에서 일을 엄밀하게 처리한 것을 알 수 있으므로 베껴써서 내린다. 경들은 모름지기 주저하지 말고 대신의 계사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 태조(太祖) 6년 경상·전라 등 도의 도안무사(都安撫使) 박자안이 항복한 왜인을 응접할 때 군기(軍機)를 누설하여 참형에 해당되었다. 이미 공문을 보내어 참형하게 하였으나 일이 왜적에게 관계되므로 비밀에 부치고 선포하지 않아 외부 사람들은 알지 못하였다. 그의 아들 박실(朴實)이 태종(太宗)의 잠저(潛邸)에 가니 마침 제종친(諸宗親)들이 와 있었다. 태종이 문 밖에 나와 맞이하니 박실이 땅에 엎어져 통곡하였다. 태종이 불쌍하게 생각하고 제종친들과 함께 자안의 죽음을 용서해주도록 청하고자 하니, 종친이 "이 일은 국가의 기밀에 관계된 것인데, 상이 만약 어디로부터 알게 되었느냐고 물으시면 무어라고 대답하시렵니까?" 하자, 태종이 "내가 그 허물을 책임지겠다."고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6책 36권 38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19면
【분류】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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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일 을축
비국이, 제주 목사에게 방어사를 겸하게 하고 밀부(密符)를 주자고 청하니, 따랐다.
일본이 꾀꼬리를 구하였는데 허락하였다.
5월 5일 정묘
헌부가 차자를 올리기를,
"지난날 척화론(斥和論)에 대해서는 온 나라가 의논이 동일했고 전하께서도 불끈 노하시어 팔방에 고유(告諭)하였습니다. 만약 국세가 강력하여 적이 침범해 와도 대처할 능력이 있었다면 그 주장은 천하에 빛났을 것입니다. 어찌 문득 나라를 망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겠습니까. 국사를 담당한 사람은 나라를 그르친 죄를 받지 않았는데 논의한 사람만 일을 망친 책임을 뒤집어써 귀양은 먼저 가고 석방은 뒤로 밀렸습니다. 심지어 오달제(吳達濟) 같은 경우는 일을 담당한 신하를 지척(指斥)하여 말했을 뿐인데 억울하게 죄를 입고 끝내 이역 만리 타국에서 죽었는데도 증직하거나 치제하지도 않았고 보살피는 은전이 있었다는 말이 들리지 않으니, 이것이 인심이 복종하지 않는 한 가지 일입니다.
강도(江都)에서 국사에 죽은 신하는 지절(志節)이 훌륭하니, 판탕(板蕩)의 때를 당하여 분의(分義)의 책임을 다한 자는 오직 그들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김상용(金尙容)에게 사제(賜祭)의 은전을 내리는 일에 대하여 유독 주저하시며 여러 차례 미안한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윤방(尹昉) 등에 있어서는 죄가 무거운데도 곡진히 비호하시며 오랫동안 공의를 어겨왔습니다. 상벌(賞罰)의 시행이 이와 같으니 어떻게 권장이 되고 징계가 되겠습니까. 이것이 인심이 복종하지 않는 한 가지 일입니다.
지난해 여러 장수들의 죄에 대하여 나라 사람들이 모두 죽여야 된다고 했는데도 위아래가 모두 사정(私情)을 따르느라 해가 지나도록 질질 끌어 마침내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무리들로 하여금 목숨을 보전하여 내지(內地)에 옮겨 살게도 하고 다시 서용하기도 하였습니다. 강도의 죄인들 중에 죽은 이가 네 사람인데 원수(元帥)와 제신들 중에서는 한 사람도 벌을 받은 자가 없으니, 여론이 격분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김경징(金慶徵)·장신(張紳) 등의 귀신이 또한 지하에서 원통해 할 것입니다. 형벌은 하늘에서 내리는 것이니 사사로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새로이 대란을 겪으면서 주벌을 백성들의 뜻과 같이 하지 않으시니, 이것이 인심이 복종하지 않는 한 가지 일입니다.
예로부터 병가(兵家)의 승부는 오직 장수에게 달려 있는 것이므로 패전한 죄는 군사들에게까지 미치지 않았는데, 지금 국가에서는 그렇게 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번에 패전한 군사에 대해서 이미 포(布)를 거두고 벌방(罰防)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또 듣자니 제도(諸道)의 곤수(閫帥)들이 군기(軍器)를 추징하여 재산이 거덜났으므로 원성이 치솟는다니, 이것이 또 인심이 복종하지 않는 한 가지 일입니다.
제궁가(諸宮家)에서 산천(山川)과 해택(海澤)을 사사로이 사용하고 전토를 많이 점유하여 백성들에게 해를 끼친 지 오래되었습니다. 전란 후에 대신과 대간 및 해부(該部)에서 모두 그것을 시정하자는 것으로 청하였으나, 전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뒤이어 꾸짖기까지 하셨습니다. 선조(先朝) 때에는 제궁이 오늘날처럼 많지도 않았고 시사(時事)의 어려움도 지금에 비할 바가 아니었는데 오히려 면세(免稅)하고 사급(賜給)해 주는 물건에 한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제궁가에서 마음대로 점유하는 일이 한이 없는데도 전하께서는 매번 선조 때 하사한 것이라 하여 개혁하기를 어렵게 여기시니, 이것이 또 인심이 복종하지 않는 한 가지 일입니다.
나라에서 믿는 바는 오직 백성이기 때문에 백성을 나라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그 취지가 둘로 나뉘어져서 자상하게 백성의 폐단을 제거하는 자는 도(道)를 어기어 명예를 구한다고 하고, 백성을 각박하게 몰아부쳐 국사를 성사시키는 자는 진심으로 봉공(奉公)한다고 합니다. 게다가 장법(贓法)이 엄격하지 않고 사정(私情)을 쓰는 것이 날로 심해져서 탐오죄를 범해도 법에 따라 처벌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또 대간이 탄핵하면 아무리 뇌물을 주고받은 것이 낭자해도 항상 그것이 사실이 아닐까 의심하면서도 지방관의 한마디 말로 죽음에 이른 자도 있습니다. 더구나 전하께서는 이목을 환관들에게 의지하고 대각의 신하들을 의심하시니, 이는 후세에 본받게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이것이 또 인심이 복종하지 않는 한 가지 일입니다.
전하께서는 어려운 시기를 만나자마자 갖가지 근심과 치욕을 겪으셨으니, 와신상담하며 스스로 고통을 견디고, 몸소 솔선하시어 편안하려는 마음이 가슴속에 싹트지 않을 것이라 여기었습니다. 그런데 상방(尙方)의 은주기(銀酒器)는 비록 독을 제거하기 위해 쓰는 것이지만 실로 오늘 같은 때 급한 것이 아닙니다. 또 근래에 듣건대 상방에서 베를 짜는 작업이 점점 많아지고 품질의 정밀 여부에까지도 성상께서 관심을 쏟으신다고 하니, 만일 구천(句踐)과 위 문공(衛文公)을 전하의 오늘에 태어나게 한다면 반드시 이런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또 인심이 복종하지 않는 한 가지 일입니다.
위의 몇 가지는 모두 인심의 향배와 관계되는 것이니 실로 하찮은 문제가 아닙니다. 또 보다 커다란 문제가 있으니, 중국과의 길이 하루아침에 단절되어 일찍이 한 통의 주독(奏牘)을 올려 실정을 갖추어 아뢴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서쪽에서 오는 배가 누차 자칙(咨勅)을 가져오자, 조정에서는 끝내 받지 않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다가 다시 의논을 주장한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분부하셨습니다. 애매하게 양단(兩端)을 견지하면서 일을 담당하려 하지 않는 것이 바로 오늘날 묘당의 병폐인데, 전하께서는 다시 후일의 화로 겁을 주시니 만약 사람마다 구차히 모면하기만을 바라고 각기 제 한몸 보전할 것만 생각하여 국가의 대사는 되는 대로 맡겨둔다면 이것이 어찌 조정에 이로운 일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마땅히 애타게 정성을 다하는 실정으로 인정을 감동시켜야지 직접적으로 통제를 가하시어 거듭 사람들의 마음을 어기시면 안 됩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경들의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을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차자에 진술한 일들은 마땅히 유념하여 시행하겠다."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약방(藥房)의 주기(酒器)는 비록 아름다움을 즐기기 위한 것은 아니라 해도 사람들의 말이 이와 같으니 특별히 부수어버리게 하여 나의 과실 한 가지를 없애도록 하라."
하였다. 내의원 도제조(內醫院都提調)가 아뢰기를,
"주방(酒房)에서 사용하는 은솥은 조종조로부터 내려오는 오래된 것입니다. 병자 호란 때 파괴되어 쓸 수가 없었으므로 환도(還都)한 후에 상방으로 하여금 다시 만들게 한 것이니, 이는 옛것을 다시 만든 데 불과합니다. 헌부의 차자 중에 지적한 것은 필시 범범히 듣고서 한 말일텐데, 성상께서 특명으로 부수어 버리도록 한 것은 실로 간언을 따르는 아름다운 뜻이기는 합니다. 다만 홍소주(紅燒酒)는 은솥을 쓰지 않으면 색깔과 맛이 제대로 나지 않습니다. 시험삼아 구리솥으로 끓여 보게 했더니 과연 진어할 수 없었습니다. 소주는 습기를 몰아내는 것이고 은솥은 독을 제거하는 것이므로 완호(玩好)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옛것을 다시 만든 것이니 새로 만든 것과는 다릅니다. 이미 만든 그릇을 부수어버리고 뒤에 다시 새솥을 만든다면 타당한 일이 아닙니다. 이에 감히 아룁니다."
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5월 6일 무진
이행원(李行遠)을 대사성으로, 권도(權濤)를 사간으로, 박계영(朴啓榮)을 정언으로 삼았다.
권도는 위인이 간사하고 아첨을 잘하여 일찍이 이귀(李貴)에게 붙어 같이 정원군(定遠君)을 추숭(追崇)하자는 논의를 주장하였었는데, 당시 삼사(三司)에 있던 명류(名流)들이 대부분 예가 아니라고 간쟁하자 권도가 드디어 자기의 주장을 바꾸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의 변덕스러움을 비난하였다. 그후 또 김상헌(金尙憲)과 정온(鄭蘊)을 꺼려 임금을 잊고 나라를 배반한 사람이라고 지척하며 그의 당류들과 함께 은밀히 죄를 날조할 계책을 세워 한쪽의 사류들을 공격하려고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권도를 지목하여 여우와 쥐새끼 같다고 하였다.
5월 7일 기사
이에 앞서 양사가 제향(祭享)에 말린 꿩으로 중포(中脯)를 대신하자고 계청하여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었는데, 최명길이 아뢰기를,
"꿩으로 소를 대신하는 것은 미안한 일이 될 듯하니 노루·사슴·돼지 세 가지를 그때그때 있는 대로 취하여 중포를 만들어 쓰자고 청하자, 상께서 돼지포를 쓰기는 미안하다 하여 노루와 사슴만을 쓰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듣자니 노루와 사슴은 비록 토산(土産)이라 해도 실로 얻기가 쉽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얻기가 쉽지 않으면 형세상 불결한 것과 섞어 쓰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이 삼가 《주례(周禮)》를 살펴보니 ‘금수(禽獸)를 사용하는 데 있어 봄에는 새끼 양과 돼지 고기에 소기름[膏香]을 쓰고, 여름에는 말린 꿩[腒]과 말린 생선[鱐]에 개기름[膏臊]을 쓰고, 가을에는 송아지와 어린 사슴에 닭기름[膏腥]을 쓰고, 겨울에는 생선과 기러기[羽]에 양기름[膏羶]을 쓴다.’ 하였고, 그 주석에 ‘거(腒)는 말린 꿩이고, 숙(鱐)은 말린 생선이고, 조(臊)는 개기름이고, 우(羽)는 기러기이다. 이는 사시(四時)의 물종이 각각 왕성하고 쇠약한 기운이 있으므로 같이 사용하여 서로 섞어서 왕의 반찬에 쓰고 인하여 제수에 쓰는 것인데, 각각 그 뜻이 있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이 글을 보고 비로소 제사에 말린 꿩을 쓰는 것이 본디부터 고례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신의 학술이 형편없어 전에 수의(收議)할 때 망령되게 소신의 의견을 주장하여 양사의 많은 관원들의 청을 반대하였으니 매우 후회스럽습니다. 그러나 이미 건의한 일이라 감히 다시 청하지 못하였으니 신의 죄가 큽니다.
대개 《주례》에는 춘추에 공진하는 바가 각각 다르니 사시에 모두 말린 꿩과 말린 생선을 쓴 것은 아니나 말린 꿩을 제수(祭需)에 쓴 것은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나라가 천고에 없는 변란을 당하여 우포(牛脯)를 사용하고자 하여도 소를 이미 얻을 수 없고 노루와 사슴을 사용하고자 하여도 잡물을 섞어 쓰게 되는 폐단을 끝내 막을 수 없습니다. 위로 주공(周公)이 예(禮)를 제정한 본뜻을 근거하고 아래로 양사가 탑전(榻前)에서 청한 바를 채택하여 우선 소가 번식할 때까지 말린 꿩으로 대신하되, 지금 해시(該寺)에 저축된 중포(中脯)는 이미 불결하다는 말이 있으니 그대로 제향에 쓸 수 없고 내년의 공물을 금년에 미리 받을 수도 없으니, 우선 해조로 하여금 노루와 사슴을 무역하게 하여 포(脯)를 만들어 요즈음 소용되는 데 쓰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여염의 제사에는 모두 포를 사용하는데 종묘 사직에만 사용하지 않는 것은 매우 미안한 일이다. 부득이하다면 노루와 사슴으로 조포(條脯)를 만들어 대용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끝에 계품한 것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5월 8일 경오
상이 소대(召對)를 명하여 《시전(詩傳)》을 강하였다. 강이 끝난 후 검토관 최유해(崔有海)가 아뢰기를,
"주사(舟師)를 첨방(添防)하는 것은 실로 위태로울 때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니 조금이라도 느슨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군민(軍民)이 농사를 전폐하여 장차 살아 나갈 방도가 없게 되었으니, 만약 감사에게 행회(行會)하여 본읍으로 하여금 동리 사람들에게 분부하여 각기 힘을 내어 밭갈이를 돕게 한다면 생업을 잃을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의 말이 옳다. 그대로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유해가 또 아뢰기를,
"악한 마음을 징계하고 착한 마음을 감발하기로는 시(詩)만한 것이 없습니다만, 고금의 치란과 득실이 모두 사책(史冊)에 실려 있으니 《강목(綱目)》이나 《송감(宋鑑)》을 같이 강독하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두 책 중 강독할 만한 것을 대신에게 하문하라."
하였다. 뒤에 영의정 이홍주(李弘胄)는 《송감》을 먼저 진강해야 한다고 하고 좌의정 최명길은 《강목》이 낫다고 하였는데, 상이 영상의 말대로 하도록 명하였다.
5월 10일 임신
이에 앞서 연신(筵臣)이 아뢰기를,
"근래 제향에 쓰는 사슴 육장과 토끼 육장 등이 모두 정결하지 못하여 악취가 많이 나서 사람들이 가까이 가지 못할 정도라고 하니 매우 미안한 일입니다. 《주례》를 상고해 보니, 제사에 쓰는 육장에는 방합[蠯]·고둥[蠃]·개미알[蚳] 등이 있다고 했는데, 주석에 씹조개[蚌蛤]·소라고둥[螺蚧]이라 했으니 바로 오늘날의 생합(生蛤)·소라(小螺)·백하(白蝦) 등입니다. 《예기(禮記)》에 ‘곤충의 기이한 것과 초목의 열매는 음양(陰陽)의 뜻을 갖추는 것이다.’ 했으니, 지금 고례에 따라 생합·소라·백하 등의 육장을 대신 써서 악취가 나는 사슴 육장과 토끼 육장을 없애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상제(喪制)는 선조(先祖)의 것을 따라야지 고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불결한 것을 써서도 안 되니 예조에 말하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토끼 육장은 여름에는 악취가 나서 가까이 갈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가까이 하지 못하는 것으로 신명(神明)께 올리는 것은 실로 미안하기 그지없으나 이미 《오례의(五禮儀)》 제식(祭式)에 분명히 실려 있으니 다른 것으로 대신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은 듯합니다. 젓을 담글 때 소금을 적당히 넣으면 반드시 악취가 나거나 맛이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연신이 진달한 것도 일리가 있는 듯하니 대신에게 의논하여 결정하소서."
하였다. 좌의정 최명길이, 제향에 관한 것을 변통하는 것은 막중한 일이니 영상이 출사하고 우상이 돌아온 뒤에 회의하여 결정하자고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11일 계유
사은사 신경진(申景禛)·이행원(李行遠) 등이 심양(瀋陽)에서 돌아왔다. 상이 불러 보고 묻기를,
"저들은 우리 군사를 어디에 쓰려고 하던가?"
하니, 경진이 아뢰기를,
"반드시 전투에 쓰려는 것은 아니고 성세(聲勢)를 돕는 데 써서 중국에 과시하려고 한 것일 것입니다."
하였다. 최명길이 면대를 청하여 신경진을 뒤따라 들어와 아뢰기를,
"지금 사신을 보내어 허락을 얻지 못하면 또 사신을 보내야 합니다. 왕복하는 사이에 군기(軍期)가 닥치면 만에 하나 모면할 수 있는 가망이 없지 않습니다. 유림(柳琳)을 평안도 병사로 삼아 사세를 보아 들여보내 대국이 원정에 나섰는데 감히 편안히 앉아 있을 수 없다고 말하게 하고 병사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가 뽑아 쓰는 대로 따르게 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웃으며 이르기를,
"유림으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가게 한다면 군대를 돕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하자, 명길이 아뢰기를,
"수백 명의 군사로 책임을 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듣자니 심양의 관중(館中)에 상하 사람들이 겪는 괴로움이 말이 아니라고 한다. 해조로 하여금 반찬값을 헤아려 보내주도록 하라."
하였다.
5월 12일 갑술
우상 신경진이, 포로로 잡혔다가 공속(公贖)029) 된 자들은 공천(公賤)으로 정속(定屬)하도록 청하니, 비국이 아뢰기를,
"사속(私贖)된 사람은 이미 사천(私賤)으로 귀속되었으니 공속된 사람은 마땅히 공천으로 정속되어야지 실로 다르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쇄출(刷出)하여 공천으로 정속할 때 사람들의 말이 없지 않을 것이니 그냥 두는 것만 못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13일 을해
집의 조경(趙絅)이 부름을 받고 와서 면대를 청하니, 상이 불러 보았다. 조경이 나아가 아뢰기를,
"나라가 이렇게 큰 변란을 만나 사직이 거듭 무사한 것이 역시 다행입니다만, 앞으로의 사세는 반드시 지탱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오늘날의 일을 석진(石晋)이 야율덕광(耶律德光)을 섬긴 것030) 처럼 하고자 하십니까, 아니면 구천(句踐)이 오(吳)나라를 섬긴 것처럼 하고자 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종사와 생령을 위하다 보니 이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어찌 그와 같은 일을 좋아서 하였겠는가."
하였다. 조경이 아뢰기를,
"옛날의 제왕은 십 리의 땅과 오백 명의 군사로도 나라를 회복한 이가 있습니다. 지금 아무리 어려운 형편이지만 어찌 고식적으로 눈 앞의 안일만을 좇아 오랑캐에게 기꺼이 굴복할 수 있겠습니까. 저들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야율보다도 심한데 우리의 물력은 석진에 미치지 못합니다. 또 신하 중에 상유한(桑維翰)031) 같은 이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나라의 땅이 비록 작지만 월(越)나라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월나라가 오나라를 함락시킬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니라 대부 종(大夫種)과 범려(范蠡)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인재를 내어 다른 시대에서 빌어오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 성심으로 구한다면 어찌 적당한 사람이 없겠습니까.
예로부터 원수를 갚고 치욕을 푸는 데는 반드시 우방의 도움을 힘입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이웃은 일본뿐인데 서로 성신(誠信)으로 사귀지 않았습니다. 근래 듣자니 중국과 일본이 서로 교통한다는데 사실 여부는 모르겠으나 그럴 리가 없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도움을 얻지 못하면 도리어 중원(中原)에 쓰이게 될 것입니다. 이때 만약 재변(才辯)이 있는 자를 가려 행장을 꾸려 가지고 가서 정세를 탐지하는 한편 우리의 실상을 알리게 하면 삼십 년간 사귀어온 나라인데 어찌 와서 돕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묘당에 의논하라."
하였다. 조경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가 명나라를 섬긴 지 이백여 년이 되었는데 하루 아침에 변을 만났으므로 이렇게 부득이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은밀히 사신을 보내어 그와 같은 우리 나라의 형세를 진주(陳奏)한다면 천하 후세에 변명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난해 이미 병란을 당한 곡절을 진 도독(陳都督)에게 이자(移咨)하여 황상(皇上)께 전달하였다."
하였다.
5월 14일 병자
헌부가 아뢰기를,
"나인으로서 궁에서 나가 여염에 사는 자는 아무리 미천하다 해도 사대부는 도리상 감히 서로 가까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 부사(府使) 신준(申埈)은 공공연히 첩을 삼았으니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국하여 정죄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계사는 옳다. 다만 이 사람은 궁에서 나간 지 오래되었으니 첩을 삼아서 안 될 것이 뭐가 있겠는가."
하였다. 그후 누차 아뢰니 삭탈 관작하도록 명하였다.
5월 16일 무인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고 나서 참찬관 이경여(李敬輿)가 아뢰기를,
"오늘날의 급무는 오로지 요역(徭役)과 부세(賦稅)를 가볍게 하여 백성들을 쉬게 하는 데 있습니다. 반드시 성지(聖志)를 굳게 정하시어 밖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아야 만사의 근본이 세워질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뜻을 세우는 것이 물론 제일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범연히 뜻을 세우는 것으로 말해서는 안 될 듯하다."
하자, 경여가 아뢰기를,
"아무리 평범한 일이라도 만약 뜻이 세워지지 않으면 끝내 이룰 수가 없습니다. 뜻을 세우는 요체는 학문을 부지런히 하는 데 있습니다. 전하께서 경연을 열고 강학(講學)하신 지 오래되었는데,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의 근본을 실지로 깨닫지 못하신 듯합니다. 삼가 성상의 말씀과 하는 일을 보면 치우친 마음이 없지 않아 군신 사이에 성의가 서로 미덥지 못하니 모든 일이 번다해져 날로 망해가는 것은 괴이할 것이 없는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식견이 밝지 못해 그러한 것을 면치 못하니, 경의 말이 옳다.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동지경연사 서경우(徐景雨)가 아뢰기를,
"지난날 은기(銀器)에 관한 말은 신들이 상방(尙方)에서 새로 만들었는 줄 알고 차자에 약간 언급했는데, 지금 듣자니 이는 약방의 기구로 옛것을 개조한 것이라 합니다. 사실에 어긋난 죄를 실로 면할 수 없습니다. 다만 허물이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욱 힘쓰는 것이 임금의 덕이니 모름지기 유념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박동선(朴東善)을 지경연으로, 신익전(申翊全)을 정언으로 삼았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본부(本府)는 왕옥(王獄)을 다스리는 중요한 곳입니다. 반역과 강상(綱常)에 관계되거나 조관(朝官)으로 장오죄나 군율을 범한 자를 제외한 잡범 사죄(雜犯死罪) 이하는 모두 형조 소관으로서 중범은 계품하여 결정하고 경범은 해조가 자체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법례입니다. 선묘조(宣廟朝)에는 본부의 계사로 인하여 정과 출신(正科出身)과 동·서반의 정직(正職)에 낙점된 사람들 외에 납속(納粟)이나 군공(軍功)으로 벼슬하는 이들은 본부가 추국하지 말도록 하였습니다.
수십 년 이래 병란이 끊임없이 일어나 과목(科目)이 많아져 만인과(萬人科)와 오천인과(五千人科)가 있기까지 하여 수많은 출신이 계속해서 나왔고 경외(京外)의 포수(砲手)는 공사 노비가 대신 시사(試射)하고 함부로 부거(赴擧)하여 출신 아닌 자가 없을 정도이니, 이 때문에 풍속이 크게 무너지고 명분이 날로 문란해집니다. 흉악한 무뢰배들이 함부로 사람을 죽이고 우마(牛馬)를 도둑질하는가 하면 그밖에 법을 이루 말할 수 없이 어기고 있습니다. 이런 무리들을 모두 출신이라고 하여 아울러 본부에 이송해서 하찮은 좀도둑까지 전부 성상께서 처결하시게 하니 외람되기 그지없습니다. 사체상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부터는 무과 출신으로 정직에 낙점된 자가 아닌 잡범 죄인들은 경중을 가릴것 없이 조종께서 입법하신 본의대로 모두 형조가 수금하여 품지(稟旨)하여 처리하게 하고, 특명으로 잡아다가 수금한 자는 예외로 하소서. 이는 제도의 연혁에 관계되니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였다. 좌의정 최명길과 우의정 신경진이 아뢰기를,
"왕부(王府)는 체면이 엄중하므로 해사(該司)와 비교하여 동일시할 수 없으니, 계사의 뜻은 실로 요체를 얻었다 하겠습니다. 다만 국가에서 문무과를 설치하여 인재를 등용하고 그 대우를 잘하고 있는데, 한때 과거가 혼잡하다 해서 근원을 바로잡을 생각은 하지 않고 마침내 조종조에서 출신을 대우하던 상규를 폐한다면, 저들은 조정이 제대로 대우하지 않는 것을 보고 염치가 있는 자들은 도리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허물로 여길 것이고 염치 없는 자들은 하류배가 되는 것을 달게 여겨 더욱 가벼이 법을 범할 것이니, 그 폐단도 작지 않을 것입니다. 대체로 연혁에 관한 일은 큰 이해가 관계되거나 매우 부득이한 일이 아니면 옛것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낫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18일 경진
상이 하교하기를,
"공물(貢物)을 작미(作米)한 것 중에서 너무 과중한 것은 우선 변통하여 민심을 위로하라."
하니, 호조가 아뢰기를,
"공물을 작미한 것 중에 너무 과중한 것도 없고 너무 가벼운 것도 없습니다. 다만 목면 1필을 10두로 작미하니 너무 과중한 듯합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이 원망하고 괴로워하니, 감하여 8두씩 받아들이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세자 빈객 남이웅(南以雄)이 심양으로부터 돌아왔다. 상이 불러 보고 하문하기를,
"세자가 돌아올 시기를 알아내지 못하였는가?"
하니, 이웅이 아뢰기를,
"저들은 법령이 엄하여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바깥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하므로 실로 알아낼 방도가 없었습니다."
하였다.
5월 19일 신사
헌부가 아뢰기를,
"사예(司藝) 김여옥(金汝鈺)은 일찍이 사간으로 있을 때 합계한 논의를 무시하고 감히 범법자를 구제할 심산으로 장황하게 떠벌이며 인피(引避)하여 시비를 전도시켰으니,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신 급제(及第) 이진(李進)은 본래 과거 시험 글을 차술(借述)해 주는 것으로 업을 삼아 혼조 때 이재영(李再榮)과 함께 이름이 났습니다. 글을 팔아 합격시킨 자가 한둘이 아닌데 이재영과 함께 형벌을 받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분해합니다. 감히 유관(儒冠)을 더럽힌 그가 과거에 오르기까지 하여 듣는 자들이 모두 놀랍니다. 이진을 삭과(削科)하고 또 차술한 죄를 다스려 혼탁한 풍속을 경계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김여옥은 벌을 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으니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 이진의 일은 대신에게 물어 처리하라."
하였다. 좌의정 최명길과 우의정 신경진이 아뢰기를,
"이진이 차술한 일은 사람들이 모두 말하니 대간이 그 죄를 바로잡고자 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그러나 유생들이 하자가 있으면 사관(四館)이 공론에 따라 정거(停擧)시켜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고, 등제되었을 때 법에 어긋나는 일이 있으면 창방(唱榜)하기 전에 계청하여 삭과하는 일도 간혹 있기는 합니다만, 이진은 이미 정거되는 벌도 면했고 법에 어긋나는 일도 없었는데, 창방한 지 수개월 뒤에 와서 삭과한다면 전례에도 어긋나고 뒤폐단을 여는 일이 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20일 임오
세자가 병이 들었으므로 선전관(宣傳官)을 심양에 보내어 문병하였다.
호조가 아뢰기를,
"근래 은값이 폭등하니 목면 5천여 필을 함경도에 보내어 시가대로 무역하게 한다면 경성에서 바꾸는 것보다 몇 배를 얻을 것입니다. 목면을 북로(北路)에 유포하면 구황(救荒)에도 보탬이 될 것입니다."
하니, 따랐다.
유석(柳碩)을 장령으로 삼았다. 유석은 청의(淸議)에 용납되지 못하였으므로 원한을 품어왔는데, 이제 남이공(南以恭)에게 붙어 드디어 대각에 들어갔으므로 식자들이 근심하였다.
5월 21일 계미
조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특진관 조문수(曺文秀)가 아뢰기를,
"부부는 인간의 대륜입니다. 포로로 잡혀갔던 여자들은 남편의 집안과 대의가 이미 끊어진 것이니, 어찌 억지로 다시 합하게 하여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우리 동방은 예의의 나라인데 한 번 변란을 겪은 뒤 이런 거조가 있으니 신은 삼가 성조(聖朝)를 위하여 부끄럽게 여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포로로 잡혀갔던 여자들은 이미 본심에서가 아니었고 죽을 수도 없었다. 대신들의 뜻은 실로 그들이 의지할 데 없음을 가엾게 여긴 것이다."
하였다. 경연의 신하들이 물러가자 윤대관(輪對官) 및 하직하는 수령을 인견하였다.
5월 22일 갑신
이현영(李顯英)을 예조 판서로, 이경석(李景奭)을 대사헌으로, 이현(李俔)을 동부승지로, 권심(權淰)을 집의로, 조경(趙絅)을 부응교로, 윤양(尹瀁)·신유(申濡)를 지평으로, 허적(許積)을 검열로 삼았다. 이현은 용렬하여 취할 만한 점이 없었는데 후설(喉舌)의 직임에까지 제수되었으므로 식자들이 비웃었다.
5월 23일 을유
함경도가 크게 가물고 황충(蟲虫)이 발생하였으며, 경원(慶源)·온성(穩城)·삼수(三水)에는 서리가 내렸다.
진주사(陳奏使) 홍보(洪靌)를 청국(淸國)에 들여보냈는데 징병(徵兵)을 면제해주도록 청하는 일이었다.
가례 의궤(嘉禮儀軌)가 병란에 산실되었으므로 정원이, 사관을 태백산(太白山)에 보내어 《실록(實錄)》을 상고하여 뽑아내자고 청하니, 따랐다.
5월 24일 병술
강원도 통천(通川)에 우박이 내렸고, 간성(杆城)과 양양(襄陽)에 황충이 발생했다.
5월 25일 정해
상이 사직에 비를 기도하였다.
5월 26일 무자
간원이 가뭄으로 인해 상차하여 네 가지 일에 대하여 진달하기를,
"첫째, 첨방(添防)하는 것은 부득이한 데서 나왔는데, 근래 듣자니 도주(島主)가 강호(江戶)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현재 남쪽의 근심은 아직 긴급하지 않은 듯하니 첨방시킨 군사들은 돌아가 농사짓게 하는 것이 진실로 사의(事宜)에 합당합니다.
둘째, 금오(金吾)와 형부(刑部)의 죄수들 중 죄가 의심스럽거나 경박하여 죄를 입은 자들은 곧 다시 의논하여 속히 석방하소서.
셋째, 병자 호란은 정묘 호란에 비하여 병화(兵禍)가 심했는데도 해서 지방의 면포를 감면해준 수는 도리어 정묘년에 미치지 못하니 매우 한심스럽습니다. 팔도의 폐단은 이를 미루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팔도 감사에게 하유하여 각기 폐단을 진달하도록 하여 열심히 강구해서 변통시킴으로써 민생이 조금이라도 혜택을 받도록 하소서.
넷째, 재변을 만나 공구하는 날에 있어서는 모름지기 지난날의 허물을 고치는 것이 급무입니다. 지난날의 허물을 고치고자 한다면 목릉(穆陵)이 무너졌을 때의 일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벼락 때문이었거나 비 때문이었거나를 가릴 것 없이 큰 변이었는데 당시의 참봉(參奉)이 사실에 어긋나게 보고한 죄로 나국되어 유배되기까지 하였으니, 어찌 이처럼 놀라운 일이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당시의 참봉을 살펴 녹용하여 뉘우치는 단서를 보이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차자에 진달한 일은 유념하여 시행하겠다."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첨방한 일은 본래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만, 오랜 가뭄 끝에 겨우 단비가 왔으니 해산시켜 돌려보내어 농사일에 힘쓰게 한다면 크게 민심을 위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금오가 정배한 자들 가운데 실정이 의심스러운 자들은 전에 이미 명을 받들어 진달하였고, 형부의 죄수도 역시 해부가 심리하였습니다. 경박해서 일을 그르친 무리들은 비록 죄가 있더라도 정상이 용서할 만하기 때문에 신들이 전에 이미 차자로 소견을 진달하였습니다.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이 모두 같은 말을 하는데 전하께서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허락하는 명을 오래도록 내리지 않으십니까.
해서 보병의 가포(價布)를 감봉하는 일은 이미 본사에서 회계하였으므로 감히 다시 되풀이하지 않겠습니다. 목릉의 재랑(齋郞)032) 은 이미 석방되었으니 해조가 관례에 따라 서용해도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어찌 반드시 특명으로 녹용하여 은전을 가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차자 중에 이른바 죄를 입은 자는 누구인가? 난이 일어났을 때 도망했거나 중신을 모함한 몇 사람 외에는 이미 모두 석방되었는데, 회계 중에 그러한 말이 있으니 그 뜻을 모르겠다. 첨방을 파하는 일 또한 가벼이 의논할 수 없다."
하였다.
5월 29일 신묘
임천군(林川郡)에 황충이 발생하여 감사가 계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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