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36권, 인조 16년 1638년 6월

싸라리리 2026. 1. 2.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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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임진

심양의 재신(宰臣)이 치계하였다.
"어느날 용골대(龍骨大)가 한인(漢人) 의원을 데리고 느닷없이 세자의 침소에 들어와 병세를 진찰하고 갔는데 병환의 사실 여부를 알기 위한 것인 듯하였습니다."

 

6월 2일 계사

헌부가 아뢰기를,
"《좌전》에 ‘조세를 가볍게 받는 기초 위에 법령을 제정하더라도 끝에 가서는 탐욕을 부리게 되는데 탐욕을 부리는 기초 위에 법령을 제정한다면 나중에는 장차 어찌될 것인가.’ 하였으니, 이는 기미를 살피지 않으면 안 되고 시초를 삼가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입니다.
지난번 호조가 분대 감찰(分臺監察)이 직무를 잘 수행하여 여분의 쌀을 많이 마련하였다고 입계하기까지 하여 순서를 뛰어넘어 승진시키는 일이 있게 하였으니, 매우 나라의 체모를 손상시키고 뒤폐단을 열어 놓았습니다. 더구나 상세(常稅)를 상납하는 데 있어 쌀을 될 때 소모분을 덧붙여 받는 데는 각기 정식이 있는데, 여분의 쌀이 삼백 석이나 되어 종전의 규례 외에 마구 거두어 들였음을 환히 알 수 있으니, 해도 차사원(差使員)의 일도 매우 놀랍습니다. 호조는 마땅히 곡절을 자세히 물어 실상을 알아내어 피차 법에 맞게 하는 자세를 견지했어야 하는데도 깊이 생각하지 않고 득실을 따지는 잘못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돌고 도는 폐단이 끝내 백성들에게 미칠 것이니 애석하기 한이 없습니다.
이익을 이롭게 여기면 반드시 해가 따르는 법이니, 작은 일이라 하여 무시하고 이미 지난 일이라 하여 내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호조의 당상과 낭관은 추고하고 해도(該道)의 함부로 받아들인 차사원은 조사하여 파직하고 감찰에게 초수(超授)한 벼슬도 개정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전 판서 한여직(韓汝溭)은 감히 궁인(宮人)을 가까이하여 첩을 삼았다가 그 사실을 알고서 곧 내쫓았습니다만, 이미 지은 죄가 있어 물의가 날로 격해지니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처음에 몰랐으니 죄가 없는 듯하다."
하였다. 누차 아뢰니, 따랐다.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상이 이조 판서 남이공에게 묻기를,
"경은 전조(銓曹)의 장관이 되어 쓸 만한 사람을 얻었는가?"
하니, 이공이 대답하기를,
"그렇지 못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세상에 쓸 만한 사람이 없는가?"
하니, 이공이 답하기를,
"혹 적당한 사람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신의 직임이 비록 전조의 장관이라고는 하나 실제 권한이 없기 때문에 감히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엇 때문인가?"
하니, 이공이 아뢰기를,
"낭관(郞官)이 천거하는 법이 행해진 지 오래여서 지금은 비록 혁파했다 해도 여습이 다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서관(庶官)을 주의(注擬)할 때는 반드시 낭관에게 가부를 묻는데, 낭관이 허락하지 않으면 신이 억지로 주의하지 못합니다. 이제 본조의 낭관을 차출하려 하는데 낭관이 저지할까 싶어 주저하며 발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이미 나라의 중임을 맡았으니 마땅히 폐습을 바로잡아야지 어찌 낭관에게 견제된단 말인가. 경이 이미 나라의 정규를 지킬 수도 없고 또 뜬소문에 흔들리지 않을 수도 없다면 위임한 뜻이 어디 있는가?"
하였다. 남이공으로 말하면 청의(淸議)에 버림받은 인물이다. 이조의 장관이 되자 갑자기 자기 당파를 진출시키고자 하였으나 자기와 다른 자들이 저지할까 두려워하다가, 상의 하문을 인하여 한편으로는 상의 뜻을 탐지해보고 한편으로는 상을 노엽게 만들어 사람들의 입을 막으려는 계책을 부렸으니, 교묘하다 할 만하다.

 

6월 3일 갑오

예조가 삼명일(三名日)의 방물(方物)을 회복할 것을 청하니, 답하였다.
"병란을 치른 뒤인데다가 농사도 장차 망치게 되었는데 이러한 때 옛 규례를 회복할 수는 없다."

 

6월 4일 을미

헌부가 아뢰기를,
"채찍과 가죽신을 물리치는 일은 옛날에도 드물었고 꿩이나 부채를 선물하는 것은 지금 예사입니다. 그 중에 안면 있는 수령이 혹 육지에서 나는 것이나 해산물로 인사치레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신들도 역시 면하지 못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주고받는 데 있어 이런 것도 오히려 미안합니다.
장연 부사(長淵府使) 박제(朴霽)는 도탄에 빠진 백성들은 생각하지 않고 잔폐한 작은 고을의 원으로 있으면서 권세가에 아부하여 출세하려는 속셈으로 잡물을 배로 실어 날라 재신(宰臣)과 명사(名士) 및 친척 30여 집에 두루 보냈는데 물건 목록이 낭자하고 명목이 구차해 뭍에서 나는 것과 해산물뿐이 아니었습니다. 각처에 나누어 보낸 것이 뇌물을 수레로 실어 보낸 것에 견줄 수는 없다 해도 한 고을에서 나온 것은 모두 백성들의 고혈을 수탈한 물건입니다. 이러한 때 이와 같은 짓을 했으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습니까.
그 사이에 많고 적고는 다르더라도 어찌 사양하거나 받거나 한 구별이 없겠습니까. 이는 남들은 모르더라도 자기만은 아는 점이니, 신들이 곧바로 논열하지 못하더라도 반드시 성상께서 통촉하시는 아래에서는 감히 숨기지 못할 것입니다. 더구나 본가에 실어 보낸 물건이 무려 10여 곡(斛)이나 되고 봉하여 따로 보낸 것도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사욕을 채우고 남에게 준 것이 모두 매우 놀라우니 나국하여 법대로 죄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부교리 이도(李禂)가 박제에게서 건어물과 약재를 받았다고 상소하고 대죄하니, 답하기를,
"그 수량이 많지 않으니 받았어도 무방하다."
하였다.

 

심동구(沈東龜)를 교리로, 유철(兪㯙)·권임중(權任中)을 정언으로 삼았다.

 

6월 5일 병신

당시 민간에 호랑이가 인경궁(仁慶宮)에 들어갔다는 말이 떠돌아 상이 훈련 도감(訓鍊都監)에 명하여 잡도록 하였는데, 대장 구굉(具宏)이 군사를 풀어 잡으려 했으나 놓쳤다. 상이 하교하기를,
"군사를 출동하는 것은 나라의 대사인데 아뢰지 않고 마음대로 조발하였으니 매우 잘못되었다."
하니, 구굉이 상차하고 대죄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금위(禁衛)의 친병을 조발하는 일은 사체가 매우 중대하니 아랫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지난번 호랑이를 잡기 위한 포수를 이미 수십 인으로 계하받았었는데, 도감이 다시 아뢰지 않고 마음대로 4백 인을 조발하였습니다. 범한 바가 실로 군율에 해당되고 뒤폐단도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장과 중군(中軍)을 모두 나추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모두 추고하라."
하였다. 그뒤 조율할 때 상이 특명으로 자급을 낮추도록 했는데, 비국이 아뢰기를,
"능성 부원군(綾城府院君) 구굉의 자급을 낮추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방백과 수령이 죄가 있을 경우 자급을 낮추는 것은 본래 전례가 있습니다만, 1품의 중신에 있어서는 사체가 다른 것입니다. 구굉의 죄가 용서할 수 없는 것이라면 따로 마땅히 시행해야 할 율이 있으며, 만약 고의가 아니었다면 새로운 예를 만들어내어 중신을 대우하는 도리를 잃을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법대로 하면 재주가 애석하고 속(贖)하기만 하면 벌이 너무 가볍기 때문에 부득이 자급을 낮추도록 한 것이다."
하였다.

 

6월 8일 기해

서경우(徐景雨)를 도승지로, 이경석(李景奭)을 동지경연으로, 김광욱(金光煜)을 동부승지로, 홍명일(洪命一)을 응교로, 조수익(趙壽益)·이시매(李時楳)·이도(李禂)를 이조 좌랑으로, 유영(柳潁)을 헌납으로 삼았다.

 

6월 9일 경자

비국 낭청 성익(成釴)이 소를 무역하는 일로 몽고(蒙古)에 들어갔다. 심양에서 서북쪽으로 16일을 가서 오환 왕국(烏桓王國)에 도달했고, 3일 만에 내만 왕국(乃蠻王國)에 도달했다. 또 동북쪽으로 4일을 가서 도달한 곳이 자삭도 왕국(者朔道王國)이었고, 북쪽으로 가서 3일 만에 몽호달 왕국(蒙胡達王國)에 도달했고, 또 동쪽으로 가서 투사토 왕국(投謝土王國)·소토을 왕국(所土乙王國)·빈토 왕국(賓土王國)에 도달했다. 소 1백 81두를 사가지고 돌아왔는데, 평안도 열읍(列邑)에 나눠주어 농사짓는 데 도움이 되게 하라고 명하였다.

 

6월 10일 신축

함경도 경성(鏡城)에 여역이 크게 번져 사망자가 9백여 인이나 되었다.

 

6월 11일 임인

영의정 이홍주가 병으로 정사한 것이 22번이나 되자, 상이 허락하였다.

 

6월 12일 계묘

의주 부윤(義州府尹) 임경업(林慶業)이 심양에 은밀히 인마(人馬)를 보내어 물화를 무역하기 위해서 내관 한여기(韓汝琦)와 모의했다가 강원(講院)에 의해 발각되었다. 상이 듣고 크게 노하여 모두 나추하라고 명하였는데, 비국이 경업은 잠시 차율(次律)을 시행하여 직책에 그대로 있으면서 스스로 반성하게 하자고 청하였다. 상이 군상(君上)을 기망하고 국가에 욕을 끼쳤으므로 죄를 용서할 수 없다고 끝내 들어주지 않고 드디어 모두 정배하였다.

 

6월 13일 갑진

헌부가 아뢰기를,
"경연을 열어 강학(講學)하는 일은 실로 군덕(君德)을 성취하기 위한 것입니다. 빛나는 공이 없으면 어찌 광명한 효과를 바라겠습니까. 이제 신료들을 인접하는 것과 시조(視朝)하는 등의 일은 모두 폐하고 오직 경연만 있어 그래도 옛뜻을 보존하고 있으나 매양 중지하곤 하니 한갓 형식에 불과할 뿐이며, 추울 때나 더울 때 강학을 정지하기를 품하는 것은 근래의 규례가 되었습니다. 옛날 송나라 때의 강관(講官) 주희(朱熹)는 하루라도 추위나 더위 때문에 강학을 중지하는 것은 잘못이라 하여 차자를 올려 강학을 청하였으니, 옛날의 사대부들이 임금을 사랑하는 데 고식적으로 하지 않았던 뜻은 실로 숭상할 만합니다.
신들이 듣건대 지난해 여름에도 경연을 정지하지 않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월이 얼마나 되었기에 처음의 뜻을 잇지 못하고 뜻이 태만해지고 기가 위축된 모습이 일마다 드러나니 애석하기 그지없습니다. 경연은 다스림이 비롯되는 근본일 뿐만 아니라 성궁(聖躬)을 보양하는 공 역시 이보다 큰 것은 없습니다. 어탑(御榻)을 설치하고 엄숙하게 팔짱을 끼고 앉아서 형식을 지키느라 성궁이 쉽게 지치고 기거가 자유롭지 못하니, 편전(便殿) 하나를 가려 조석으로 한가하게 쉬는 곳으로 삼아 대신과 유신(儒臣)을 번갈아 인접하고 승지와 사관도 무시로 출입하게 하여 각기 맡은 일을 직접 품결하게 하여 조종조의 옛일을 회복하소서. 이것은 전하께서 한번 마음을 돌리기에 달렸으니 묘당으로 하여금 일일이 품지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신하가 임금을 섬기고 여자가 남편을 섬기는 데는 한 사람만을 따르고 다른 이를 섬기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천지의 떳떳한 법이요 인사(人事)의 큰 한계입니다. 더구나 몸을 더럽혀 정절을 잃은 부인은 그 남편의 집에 있어 이미 대의가 끊어진 것이니 어찌 다시 결합하여 부모를 섬기고 제사를 받들며 자손을 낳아 대를 잇게 허락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나라는 예의의 나라로 이백 년 동안 가법을 가장 올바르게 지켜왔으므로 전후의 변란에 목숨을 버려 더럽혀지지 않은 자 중에는 부인들이 더욱 많았으니 풍속의 아름다움이 인기(人紀)를 유지할 만합니다. 지난번 묘당의 건의는 비록 포용하여 아울러 기르자는 뜻에서 나온 것이기는 합니다만, 인륜을 밝히고 풍속을 교화시키며 법을 바로잡고 가르침을 이루는 도에 있어서는 방해가 될 듯합니다. 조정에서 새로이 한 조목을 만들어 모두 이혼하게 한다면 실로 원한을 품는 필부(匹婦)가 없지 않을 것이고, 재취를 허락하지 않는 데에 있어서는 근거할 의리가 없으니, 마땅히 변통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법전에 옛법을 폐하고 새로운 법을 세울 때는 반드시 양사로 하여금 서경(署經)하게 한 뒤에야 시행할 수 있게 했으니, 선왕이 대간을 중히 여기고 법제를 삼간 뜻이 지극합니다. 한때 유사가 감히 폐할 수 있는 바가 아닌데 그 당시 예조가 지연시키며 버려두고 즉시 거행하지 않았으니 매우 잘못입니다. 예관으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여 정해서 양사의 서경을 받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포로로 잡혀갔던 부인들의 일은 묘당의 처치가 실로 권도(權道)에 맞으니 다시 논의할 것이 없다."
하였다. 누차 아뢰니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지난번 묘당의 뜻은 비록 포용하여 아울러 기르자는 데서 나왔으나 절의의 큰 한계가 이로 말미암아 한번 무너지게 되면 장차 나라를 다스릴 수 없을 것입니다. 대간이 아뢴 바 변통하여 중도를 얻자는 것이 실로 합당하니 지금 똑같이 하게 하는 법을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다시 합하기를 원하는 자는 소원대로 하게 하고 재취를 원하는 자는 그대로 들어주면 묘당과 대간의 의논이 모두 시행되어 어긋나지 않고 조종(祖宗)이 수백 년간 배양한 교화도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법제(法制)를 세울 때 반드시 양사의 서경을 받는다는 것은 법전에 실려 있으나 오랫동안 폐하고 시행하지 않았으니 실로 미안한 일입니다. 지금부터는 다시 밝혀 거행하여 선왕의 성헌(成憲)을 따르소서."
하니, 답하기를,
"다시 대신에게 의논하여 결정하라."
하였다. 영돈녕부사 이성구(李聖求)가 상차하여 아뢰기를,
"저 부인들이 의지할 곳을 잃는 것은 참으로 불쌍하지만 남편의 후사가 끊기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더구나 부인은 이미 버림을 받았는데 남편도 또 재취하지 못한다면 피차가 모두 홀로 된 것을 원망하는 신세가 될 것이니 양쪽 다 막는 것보다는 한쪽이라도 허락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또 역적의 딸도 이혼하게 하는 예가 있는데 지금 이 오욕을 입은 부인은 역적 집안의 자손보다 더 심하지 않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사대부 중에 정리가 몹시 절박한 자는 사유를 갖추어 상언하여 품지(稟旨)해서 이혼하게 하면 중도를 얻을 수 있을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에 진달한 내용은 대신들과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좌의정 최명길이 헌의하기를,
"선묘(宣廟)께서 환도(還都)한 후 사대부의 처로서 포로로 잡혀갔다가 살아서 돌아온 자들은 모두 개취(改娶)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유성룡(柳成龍)·이원익(李元翼)·이덕형(李德馨)·이항복(李恒福)·성혼(成渾) 등과 같은 명경 석유(名卿碩儒)들의 식견의 바름은 반드시 지금 사람들과 비할 바가 아닐텐데 이의가 있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으니, 이는 필시 이유가 있어서일 것입니다. 신이 전일 헌의할 때는 성조(聖祖)와 현신(賢臣)들이 이미 했던 자취를 따라 홀아비와 홀어미들로 하여금 각기 제가 살 곳을 얻게 하고자 한 것에 불과했는데, 지금 삼사와 예관들의 논의가 이와 같으니, 신이 어찌 감히 스스로 옳다고 여겨 반드시 시행되기를 바라겠습니까. 다만 해조의 계사를 보건대, 처음에는 절의의 큰 한계를 중요시하여 그 말이 옳은 듯했으나 끝에 가서 반드시 똑같이 하게 하는 법을 만들 필요가 없고 다시 합하든 재취를 하든 모두 원하는 대로 하도록 하자고 했으니, 한 나라의 법을 나누어 둘로 만들었으므로 절의를 부식(扶植)하는 뜻도 장차 반만 이루어지고 반은 유실될 것입니다. 왕자(王者)의 정사가 이처럼 구차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고, 우의정 신경진이 헌의하기를,
"온 나라의 백성들 중 태반이 연루되었으니 결코 담을 넘거나 개구멍으로 들어와 훔쳐간 것처럼 한 잘못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더구나 그 사이에 어찌 몸을 깨끗이 지켜 절의를 보전한 자가 없겠습니까. 조정의 포용하는 도리에 있어 일체 이혼하게 하여 홀로 되는 원통함이 있게 해서는 안 되니, 그들의 뜻에 맡기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또 새로운 법을 시행할 때에는 반드시 양사의 서경을 받는 것은 법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미 그들의 뜻에 맡긴다면 서경할 필요가 없음이 분명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선조(先朝) 때의 사례에 따라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이성구가 차자에 진달한 것은 반드시 의견이 있어서일 것입니다만,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게 적용하는 것이니 한두 거족(巨族)을 위해 저것은 취하고 이것은 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듯합니다. 신들의 어리석은 소견은 이미 수의(收議) 때 자세히 아뢰었으니 상께서 결정하시기에 달렸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16일 정미

좌의정 최명길이 아뢰기를,
"국가의 불행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군신 상하가 오직 심력을 다하고 괴로움을 참아내어 한결같이 종사를 온전히 하고 동궁(東宮)을 돌아오게 하고 징병(徵兵)을 면하는 일에 전념해야지 다른 것은 돌아볼 겨를도 없습니다. 옛사람이 이른 바 가난한 선비의 아내와 약한 나라의 신하는 각기 정도를 지켜야 한다고 한 것이 바로 이를 두고 말한 것입니다.
혼인하는 한 가지 일은 청나라에서는 매우 바라는 바이며 우리 나라의 신자들은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니, 딸이 있는 사람은 차마 정을 끊지 못하고 딸이 없는 사람은 더욱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오랑캐의 풍속은 데려다 키우는 일이 많아 자기가 낳은 것이나 다름이 없이 여기니 비록 양녀(養女)임을 알더라도 혹 크게 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난번 면대를 청했을 때 이렇게 청하였고 성상께서도 종실(宗室)의 여아를 데려다가 궁중에서 양육하려고 한다는 분부가 계셨으니 신하된 자로서 마음을 어떻게 가져야 하겠습니까.
어제 회좌(會坐)할 때 신이 먼저 스스로 신의 이름을 쓰고 또 구굉(具宏)과 구인후(具仁垕) 두 사람의 이름을 썼습니다. 인후는 처음에는 상당히 언짢아했으나 뒤에는 따랐고 구굉은 시종 굳게 거절하였으므로 부득이 이시백(李時白)의 이름을 썼습니다. 시백은 당시 좌중에 없었는데 그의 마음도 신과 다름이 없으리라고 생각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시백의 차자를 보니 물어보지도 않고 어거지로 쓴 데 대하여 유감이 있는 듯했습니다. 시백조차도 신의 마음을 모르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겠습니까.
이어 양녀가 난처해질 우려를 생각하면 실로 이시백의 염려와 같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여러해 동안 자기가 낳은 것처럼 대하여 기르고 지성으로 타일러 그 마음을 감동시키면 혹 일이 생기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변화가 무상하고 시사를 알기 어려우니 지금의 근심은 조석이 위급한 처지인데 어찌 멀리 몇년 후의 계책을 세울 수 있겠습니까만, 신의 어리석은 뜻은 이와 같습니다.
신이 본사의 여러 재신들을 살펴보니 윤휘(尹暉)가 가장 계려가 있고 성품이 강인하여 이 일을 맡길 만합니다. 이시백 대신 윤휘를 적어 보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또 신하로서 그 누가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지 않는 이가 있겠습니까마는, 본사의 당상은 더욱 군부께서 믿는 바가 여러 신하들에 비하여 각별합니다. 앞으로 혼인하자는 청이 이에서 그치지 않을 듯싶으니, 본사 당상은 각기 양녀를 두어 뒷날의 요구에 응하는 계책으로 삼는 것이 무방할 듯합니다.
구굉과 이시백은 훈척 중신으로서 이와 같이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해 대신의 말을 듣지 않고 어려워하는 기색이 현저했으니 매우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모두 엄중히 추고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양녀는 이미 적어보냈으니 고칠 필요 없다."
하였다.

 

6월 18일 기유

청나라가 징병(徵兵)·시녀(侍女) 및 향화인(向化人)·주회인(走回人) 등의 일에 대하여 아직도 거행한다는 보고가 없다 하여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달(馬夫達)이 관소(館所)에 가서 세자를 보고 질책하는 말을 많이 하였으므로 세자가 빈객(賓客) 박로(朴𥶇)를 보내 조정에 품의하였다.

 

임담(林墰)을 교리로, 이규(李烓)를 장령으로, 박수문(朴守文)을 정언으로 삼았다.

 

6월 19일 경술

비국이 아뢰기를,
"홍보(洪靌)의 행차가 만약 박로가 강을 건너기 전에 갔더라면 비록 반드시 성공하기를 바라지는 못하더라도 크게 노하는 데는 이르지 않을 것인데, 주저하고 기다리며 누차 번거롭게 품의하는 사이에 앉아서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앞으로 더한층 난처해질 것이니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현재 사세가 비록 변화했다고는 해도 홍보의 행차를 중지할 수는 없으니 속히 강을 건너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사기(事機)가 매우 급박하니 진주사에게 그렇게 하유하여 그로 하여금 빨리 가도록 하라."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신들은 오래 전부터 오늘 같은 일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들의 말대로 따르면 천하 후세에 죄를 얻게 될 것이고 따르지 않는다면 동궁의 고생이 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뒤따라 나라가 망하게 될 것입니다. 국가의 존망과 이륜(彛倫)의 상패가 아주 위급하게 되었는데도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으니, 격문(檄文)을 대하자 정신이 나간 것같다는 것은 바로 신들을 두고 한 말입니다. 박로가 들어오기를 기다려 상의하여 처리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서관(西關)을 방어하는 장수의 임무가 전에 비하여 더욱 중요해졌으니 결코 이시영(李時英)이 처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즉시 체차하고 대신 유림(柳琳)을 급히 보내소서. 임경업(林慶業)의 죄는 실로 중하나 현재의 사세가 전과는 크게 다르니 새 사람으로 대신하게 한다면 반드시 낭패할 염려가 있습니다. 임경업은 차율(次律)을 적용하여 자급을 낮추거나 결장(決杖)한 뒤 잉임하여 뒷날 공을 세우도록 하는 것이 실로 사의에 합당하겠습니다. 이는 매우 커다란 문제이므로 부득불 다시 이렇게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면대하여 의논해서 처리하겠다. 그리고 박로가 나오는 것은 매우 무모한 일이다."
하였다.

 

6월 20일 신해

대사간 이경석(李景奭)이 상차하여 친정(親政)을 행해서 공로를 등급별로 나누고 지방의 명망 있는 자를 거용하고 치적이 드러난 수령을 발탁하여 공도를 열도록 청하니, 답하였다.
"차자의 말이 옳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었다."

 

대신과 비국 당상이 면대를 청하니, 상이 불러 보았다. 우의정 신경진이 아뢰기를,
"박로가 오는 것은 필시 세자가 오랑캐들의 모욕을 감당하지 못해서 이런 뜻밖의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신의 얕은 생각으로는 사기(事機)의 경중이 박로가 오고 안 오는 데에 달린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박로가 오기 전에 홍보가 갔다면 그래도 조금은 희망이 있었을 것이다. 저들이 이미 재신(宰臣)으로 하여금 나가서 정탈하게 하였는데 사신(使臣)이 그래도 들어간다면 이는 말을 들어주지 않고 뜻을 거스르는 일이니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
하였다. 경진이 아뢰기를,
"홍보의 행차가 박로가 나오기 전에 이미 출발했으니 이 때문에 더 노여워하지는 않을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재삼 크게 한숨을 쉬고 불쾌한 빛으로 한참 있었다. 경진이 아뢰기를,
"임경업은 변방에 오래 있어서 중국인과 청나라 사람을 응접하는 데 익숙하니 체직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은 이미 경업이 죄가 있음을 알면서도 체직해서는 안 된다고 하니, 설령 나라에 경업 한 사람이 없다면 의주에 부윤 자리가 비어도 다시 차임할 수 없단 말인가?"
하자, 모두가 아뢰기를,
"신들이 잘못했습니다."
하였다.

 

6월 21일 임자

옥당이 상차하여 친정(親政)할 때 양사(兩司)의 장관이 입시하도록 청하니, 답하기를,
"그대들이 새로운 규칙을 세워 격려하는 바탕을 삼고자 하니, 참으로 훌륭한 생각이다. 다만 양사의 장관이 입참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은 듯한데, 대신에게 물어 처리하겠다."
하였다. 좌의정 최명길과 우의정 신경진이, 친정하는 날 양사의 장관이 입참하면 좌차(坐次)가 불편할 듯하고 두 전조(銓曹)에 위임하는 뜻이 아니라고 아뢰니, 상이 따랐다.

 

6월 22일 계축

상이 문정전(文政殿)에 나아가 남한 수성 대장(南漢守城大將) 신경진·구굉·이시백 등을 인견하였다. 원두표(元斗杓)는 외방에 있었으므로 중군(中軍) 황집(黃緝)이 입참하였고 유림(柳琳)도 금화(金化)의 전공(戰功)을 사문(査問)하는 일로 입시하였다. 상이 경진 등에게 이르기를,
"이제 도목 대정(都目大政)을 하는 자리에 경들은 각기 휘하 장사들의 공로의 다소에 대하여 말하라."
하니, 경진이 아뢰기를,
"공로가 뚜렷이 드러난 자들은 거의 다 제수되었고, 공로가 작은 자들은 매우 많은데 관작은 한도가 있으니 어찌 두루 미칠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됨을 가리지 않고 한때의 공만으로 수령이나 변장에 제수한다면 군사와 백성들이 피해를 많이 입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람을 알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경들에게 묻는 것이니, 생김새나 말재주로 취하지 말라."
하였다. 여러 대장들이 각기 10인씩 추천하여 주서(注書)가 그 이름을 자세히 적고 또 수령에 적합한 자와 변장에 적합한 자를 나누어 이름 아래에 기록하여 아뢰었다. 대장들이 파하고 나가니 도승지 서경우(徐景雨)가 먼저 들어오고 이조 판서 남이공(南以恭), 참판 김수현(金壽賢), 참의 김반(金槃), 좌랑 이도(李禂), 병조 판서 이시백(李時白), 참판 김시국(金蓍國), 참의 한형길(韓亨吉), 참지 이성신(李省身), 정랑 유심(柳淰), 좌랑 정호인(鄭好仁)이 따라 들어왔다. 이조 판서와 참판은 북쪽을 상석으로 하여 서쪽으로 향하고, 참의는 동쪽을 상석으로 하여 북쪽으로 향하고, 낭관은 동쪽으로 향하여 판서와 참판의 앞에 부복하였다. 병조 판서와 참판은 북쪽을 상석으로 하여 동쪽으로 향하고, 참의와 참지는 서쪽을 상석으로 하여 북쪽으로 향하고, 낭관은 서쪽으로 향하여 판서와 참판의 앞에 부복하였다. 이방 승지 서경우는 북쪽으로 향하여 이조 참의의 왼쪽에 앉고, 병방 승지 허계(許啓)는 북쪽으로 향하여 참지의 오른쪽에 앉았다. 상이 양전 당상에게 이르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는 인재를 얻는 데 있으니 오늘의 정사는 더욱 조심스럽게 하라. 토산(兎山)·광교(光敎)·검단(檢丹)에서 힘껏 싸운 사람들도 경들이 아는 대로 택하여 주의(注擬)하라."
하고, 또 이르기를,
"처음 벼슬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학행(學行)이 있는 자를 의망(擬望)하고 전일 세가(世家)의 자제들만 치우치게 썼던 것처럼 하지 말라. 서북 지방은 인재가 비록 적더라도 어찌 뛰어난 사람이 한둘도 없겠는가. 먼 곳이라 하여 비루하게 여기지 말고 택하여 쓰라. 전의 공로도 잊어서는 안 되니 거의(擧義)한 사람은 일체 택용하라."
하였다. 승지가 이조의 망단자(望單子)를 올리니, 상이 남이공에게 이르기를,
"수령은 모두 치적이 있는 자들인가?"
하니, 이공이 아뢰기를,
"어찌 다 치적이 있는 자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자들을 버렸을 뿐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미 치적이 있는 자가 아니면 차라리 공로가 있는 자를 쓰라. 육진(六鎭)의 수령은 더욱 가리지 않으면 안 된다."
하고, 또 이르기를,
"김자점(金自點)은 비록 중죄를 지었으나 그 공은 잊을 수 없다. 그의 아들 김련(金鍊)이 전에 인천(仁川)을 다스렸는데 자못 치적이 있었으니, 호남의 한 군에 제수하여 아비를 봉양하게 하고 싶다."
하니, 이공이 금산 군수(錦山郡守)에 제수하도록 청하니, 상이 그렇게 하도록 하였다. 상이 숭문당(崇文堂)에 들어갔다가 잠시 후 문정전(文政殿)으로 나와 이르기를,
"전에 친정할 때는 이조와 병조의 판서가 망단자를 갖고 탑전(榻前)에 나오면 승지가 내관에게 전하여 내관이 올렸는데, 지금은 판서가 자리를 뜨지 않고 승지가 곧바로 가져다 올렸다. 차후로는 전례대로 하라."
하고, 또 이르기를,
"친정하는 날 입시하는 주서는 육품(六品)에 천전시키는 것이 옛 규례인데 전조(銓曹)는 모르고 있었는가?"
하니, 이공이 아뢰기를,
"신은 일찍이 모르고 있었는데, 지금 좌중에서 과연 그런 말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계해년에 친정했을 때도 옛 규례를 몰라 천전시키지 못했는데, 그후에 들으니 천전시키는 것이 관례라고 했다."
하였다. 오단(吳端)을 충청 감사로, 홍주 목사(洪州牧使) 이경의(李景義)를 호조 참의로, 조석윤(趙錫胤)을 응교로, 유철(兪㯙)을 교리로, 윤강(尹絳)을 부교리로, 이행우(李行遇)·심재(沈𪗆)를 수찬으로, 신익전(申翊全)을 정언으로, 한흥일(韓興一)을 전주 부윤으로, 최유해(崔有海)를 길주 목사로 삼았다.
친정은 매우 성대한 일이다. 대장을 인견하여 공로의 등급을 나누고 정관(政官)을 계칙하여 재기(才器)를 가렸으니, 공로에 보답하는 은전과 인재를 선발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지극했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대장이 천거한 것은 공(功)으로 하지 않고 친분으로 하였고 정관이 의망한 것은 재주는 뒤로 하고 사정을 앞세워, 성상께서 인심을 고무시키고 분발시키기 위해 한 일이 끝내 실효를 거두지 못하게 만들었으니 통탄스럽기 짝이 없다.

 

6월 23일 갑인

헌부가 아뢰기를,
"충청 감사 오단은 큰 부(府)에 시험해본 결과 이렇다 할 치적이 없고, 변란을 당해서는 겁을 먹고 먼저 달아나버려 풍패(豐沛)033)  의 큰 고을이 완전히 무너지게 만들었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전조의 계청이 과연 관직을 위하여 사람을 택한 것이며, 전하께서 순서를 뛰어넘어 발탁한 것도 그보다 나은 자가 없다고 여겨서입니까. 잘못만 있고 취할 점은 없어서 내쳐야 마땅한데 도리어 승진시켰으므로 공의가 만족해 하지 않고 물정이 의아해 합니다. 체차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지중추부사 김시양(金時讓)은 두 눈이 모두 멀어 충청도 충주 땅에 물러가 살았는데, 이때 최명길이 나라가 위급하여 난처한 일이 많은데 시양이 비록 앞을 보지는 못하지만 지려가 뛰어나니 불러서 함께 일을 꾀하자고 청하였다. 상이 세 번 하유하여 부르자, 시양이 드디어 올라왔으나 병으로 사은 숙배하지 못하고 상차하여 대죄하니, 답하였다.
"경이 올라온 것을 알고 내가 매우 기뻤다. 경은 사은하지 못하는 것을 염려하지 말고 안심하고 조리하라."

 

6월 25일 병진

윤지(尹墀)를 전라 감사로, 김육(金堉)을 충청 감사로, 이여익(李汝翊)을 장령으로, 박계영(朴啓榮)을 지평으로, 임담(林墰)을 부응교로, 성이성(成以性)을 수찬으로 삼았다.

 

6월 26일 정사

변란 후로 제향(祭享) 때 융복(戎服)으로 예를 행해왔는데, 예조가 흑단령(黑團領)을 쓰도록 청하니, 상이 따랐다.

 

6월 27일 무오

유성(流星)이 실성(室星)에서 나와 두성(斗星) 위로 들어갔고 또 규성(奎星) 아래에서 나와 위성(危星) 위로 들어갔다.

 

6월 28일 기미

유성이 벽성(壁星)에서 나오고 또 위성(胃星) 아래에서 나와 오거성(五車星) 위로 들어갔다.

 

6월 29일 경신

이목(李楘)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유성이 실성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6월 30일 신유

비국이 아뢰기를,
"지금 듣건대, 도주(島主)가 이미 강호(江戶)로 들어갔다고 하며 이미 장맛비가 내리고 가을이 다가오니 남쪽 변방의 근심이 조금 느슨해졌습니다. 또 듣자니 남방의 한재가 혹심한데 이달의 큰 비가 노령(蘆嶺) 이하에는 미치지 못했답니다. 폐단을 없애는 일을 조금이라도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호남(湖南)의 첨방시킨 수군은 파하여 돌려보내소서."
하니,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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