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37권, 인조 16년 1638년 7월

싸라리리 2026. 1. 3.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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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일 계해

집의 심동귀(沈東龜)가 아뢰기를,
"신이 삼가 듣건대, 이조 판서 남이공(南以恭)이 지난번 탑전(榻前)에 등대(登對)하던 날에 성교(聖敎)로 이공에게 면려한 것은 실로 범연한 일이 아닌데, 며칠도 되지 않아 사론(士論)이 허여하지 않은 유영경(柳永慶)의 손자 유심(柳淰)을 극히 잘 선발해야 할 전랑(銓郞)에 주의(注擬)하기까지 하였다 하니, 그것은 사적으로 끌어 쓰는 마음이고 전하께 보답하는 바가 아닙니다.
옛날 권간(權奸)인 심정(沈貞)의 후손 심수경(沈守慶)은 풍류와 문장이 한 세상에 추앙을 받게 된 뒤에야 벼슬을 지낼 수 있었고 사람들도 자연 이의가 없었습니다. 근래 나이 젊은 무리들이 벼슬길에 나아가기 급급하여 부정한 태도가 없지 않으니, 신은 그런 일을 수치스럽게 여깁니다. 신이 이러한 뜻으로 완석(完席)의 동료들에게 발언했더니, 혹은 진정하라 답하기도 하고 사세에 구애되기도 하여 끝내 탄핵하지 못했으니 무능함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그 후 유심은 겸춘추(兼春秋)로 나아가 사은 숙배한 지가 지금 7, 8일이 되었는데도 아직까지 인피하지 않고 있으니, 공론을 무시하고 대각(臺閣)을 멸시하는 방자한 그의 작태가 또한 놀랍습니다.
신이 당초 발론한 것은 오직 붕당을 지어 두둔하는 악습을 없애고 부정하게 벼슬에 나아가는 길을 막으려고 한 것인데, 말이 입에서 나오자마자 비방이 이미 뼈를 녹일 듯합니다. 일개 유심을 논핵하는 것이 보합(保合)하려는 큰 기관에 저촉됨을 헤아리지 못하여 신의 몸은 이미 구덩이에 떨어져 버렸습니다. 체척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또 그대가 심정에게 비교하려고 한 것은 실로 지나치니, 동료가 곤란하게 여기고 따르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하였다.

 

지평 김진(金振)이 아뢰기를,
"집의 심동귀(沈東龜)가, 지난날 원의 석상에서 유심의 일로 인하여 조정 신하들의 성명을 낱낱이 열거하면서 그들의 가부(可否)를 논하고 당파[色目]를 분별하는 등의 잡다한 말을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얼굴을 붉히게 하였습니다. 신은 그의 사람됨을 비열하게 여겨 한 마디도 대꾸하지 않았는데, 그때 대사헌 이경여(李敬輿)가 소요를 염려하여 그의 잡다한 말을 배척하니, 동귀가 머리를 숙이고 중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원의 석상에서 당파를 분별하고 자기 뜻에 따라 취사(取舍)를 정하였으니, 틈을 타고 일을 일으키기 좋아하는 작태는 어찌 몹시 해괴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동귀가 보합(保合)하려 한다는 말을 지어내어 사적인 일을 성공시키려 하며, 혹은 부정하다 비난하기도 하고 혹은 벼슬을 취하려 한다 배척하면서 반드시 진신(搢紳)들로 하여금 갈라지게 하고 조정이 분열되게 하려고 하니, 또한 무슨 심사입니까. 더구나 기관에 관한 말은 대등한 자 이상에게 말하는 것도 싫어하는데, 성명(聖明)의 아래에서 어찌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동귀와 더불어 분변함을 신은 실로 수치스럽게 여기는 바이니, 신을 체직시키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간원이 처치하기를,
"붕당을 몹시 미워하는 것은 군자도 허여한 바로서, 겸손한 말로 서로 다투는 뜻도 모두 여기에 있는 것인데, 너무도 부적절하게 그 용어를 원용한 잘못이 또한 크다고 하겠습니다. 집의 심동귀는 체차시키고 지평 김진은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조 판서 남이공이 상소하여 체직을 청하니, 경은 굳이 사직치 말고 속히 직무를 살피라고 답하였다.

 

청(淸)나라가 도망쳐 돌아온 사람을 오래도록 되돌려 보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크게 힐책하였다. 비국이 즉시 본도(本道)로 하여금 붙잡아 보낼 것을 청하자, 상이 사람을 시켜 데리고 가서 인하여 속은(贖銀)을 주고 즉시 사오게 하였다. 비국이 또 아뢰기를,
"속환(贖還)의 값을 도망쳐 돌아온 사람과 일시에 가지고 가면 간사한 술책으로 값을 올릴 폐단이 있을까 염려되니, 마땅히 박로(朴𥶇)가 갈 때에 부송(付送)하여, 도망쳐 돌아온 사람이 청나라에 들어간 것을 기다렸다가 편의에 따라 속전(贖錢)을 주고 사오는 것이 온당합니다. 대저 도망쳐 돌아온 사람에 관한 한 조목은 장차 화를 받게 될 단서입니다. 독사(毒蛇)가 손을 물면 지체하지 않고 팔뚝을 자르는 것은 그 팔뚝이 아깝지 않아서가 아니라 형편상 두 가지 모두 온전히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후로는 강과 연접한 여러 곳을 엄격히 조사하고 낱낱이 붙잡아 보내 도망쳐 돌아오려는 자들로 하여금 엄두도 내지 못하게 하소서. 그렇게 한 뒤에야 많은 생령이 보존할 희망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또 붙잡아 보내는 이 일은 차마 하지 못하는 바인데, 어찌 팔뚝을 자르는 것에 비교하여 그들이 돌아오는 길을 영영 끊을 수 있겠는가. 백성의 부모가 된 자는 결코 차마 이런 말을 할 수 없으니 이 한 조목은 시행하지 말라."
하였다.

 

비국이 밀계(密啓)하기를,
"홍보(洪靌)의 사행이 이미 강을 건넜으니 10여 일이 지나면 일이 잘 될지 못 될지 판단될 것입니다. 만일 요청한 대로 허락을 받아 돌아온다면 참으로 큰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않아 혹 힐책하는 일이 있으면 손을 쓰기도 전에 큰 화가 즉시 닥칠 것이니, 유림(柳琳)으로 하여금 서로(西路)에 있게 한 뒤에야 그 사세의 완급과 경중을 관찰하여 기미에 따라 책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로 망설이는 성상의 뜻이 특별히 뜻하는 바가 있는 줄은 알지만 본사의 여러 재상들과 외부의 의논이 모두 이와 같으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정언 박수문(朴守文)이 아뢰기를,
"청주 목사 신익량(申翊亮)이 고을 사람의 딸을 거느리고 산다는 말이 자자하므로 신이 동료들에게 간통을 보내어 그의 잘못을 논하려고 하였는데, 동료들의 의논이 일치되지 않으니 경시당한 소치입니다. 신을 체척하소서."
하니, 대사간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수령의 신분으로 읍인의 딸을 공공연히 거느리고 사는 것은 무식한 자가 아니면 기탄하는 바가 없는 자가 하는 짓입니다. 신이 신익량과 비록 친숙하지는 않으나 그 사람을 번갈아 추천하는 중에 대략 아는데, 방자하고 기탄하는 바가 없는 데에 이르지는 않을 듯하고, 또 신이 들은 바로는 그가 거느리고 사는 자는 읍인의 딸이 아니라 연기(燕岐)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다시 상세히 듣고 논하고자 한 것인데, 동료가 갑자기 이로 인하여 인피하였으니, 신을 체직시키소서."
하였다. 사간 홍명일(洪命一)도 또한 이로 인하여 인피하였다.

 

7월 4일 을축

김영조(金榮祖)를 대사헌으로, 김광혁(金光爀)을 집의로, 박계영(朴啓榮)을 장령으로, 이도장(李道長)을 지평으로, 유철(兪㯙)을 헌납으로, 유림(柳琳)을 평안 병사로 삼았다.

 

상이 하직하는 수령과 변방 장수를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수령을 인견할 때에 성명을 써서 아뢰는 규정이 있는데, 지금 어찌하여 써서 아뢰지 않는가?"
하니, 승지 박명부(朴明榑)가 아뢰기를,
"신이 전례를 알지 못하여 써서 아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신이 사적으로 그 성명을 조그마한 종이에 기록하였습니다."
하고는, 소매 속에서 꺼내어 아뢰자, 인하여 각각 자신의 직무를 말하라고 명하였다.

 

화성(火星)이 천강성(天杠星)의 첫째 별을 침범하였다.

 

7월 5일 병인

부응교 임담(林墰)과 부수찬 김홍욱(金弘郁)이 상차하기를,
"국가가 대간을 설치한 것은 임금의 이목이 되라는 것이니, 시비를 주장하고 어질고 간사한 자를 분별하며 논의할 때에 지극히 공정하게 하기를 힘쓰는 것이 바로 그 직분입니다. 혹시라도 편중됨을 가지고 혼란시키려고만 한다면 간관의 이름을 지니고 어떻게 감히 하루라도 재직할 수 있겠습니까.
유심(柳淰)의 선조의 잘못은 우선 논하지도 않고 그의 재능을 취하여 깨끗한 조정에 발탁하여 삼사(三司)의 반열에 두었으니, 금일 유심을 대우한 것이 또한 두터웠습니다. 전랑의 임명은 조정에서 지극히 잘 선발해야 하는 것인데, 공론의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급급하게 주의(注擬)한 것은 실로 정체(政體)에 있어 마땅한 바가 아니니, 물의가 의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심동귀가 원의 석상에서 발론한 것은 조금은 숭상할 만한 풍채가 있었으나, 김진이 인피한 것에 이르러서는 모두 분한 마음이 발한 것입니다. 논할 것은 다만 유심의 가부(可否)를 논변하는 데 있는데, 그 본뜻은 버리고 도리어 동귀를 공격하는 것을 주로 삼아 장황한 말로 성상의 귀를 현혹시켰으니, 거짓으로 꾸미고 변호하는 작태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원의 석상에 참석한 자가 한 사람 뿐만이 아닌데 하필 앞장서서 담당하여 이토록 떠들썩하게 한단 말입니까. 대저 대간은 다만 시비와 곡직이 어떠한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한 번 입을 열면 문득 트집잡고 배척한다고 하여 모함하는 조목을 삼는다면, 이는 대각이 말할 만한 때가 없게 되는 것이니 온 세상의 입을 틀어막는 것에 가까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금일의 기상이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대각(臺閣)에서 처치하는 것은 오직 마땅히 공명함을 다하고 여론에 부합되게 하여 결정한 사이에 사람들로 하여금 뒷말이 없게 해야 하는데, 한 명은 출사시키고 한 명은 체직시켜서 시비와 경중에 있어 여론이 떠들썩함을 면하기 어려우니 간원이 한 바는 족히 말할 것도 없습니다.
신익량(申翊亮)이 읍인의 딸을 거느리고 산다는 데에 이르러서는, 명백하게 사람들의 말이 있다면 정언 박수문이 법에 의거하여 논하려고 한 것은 언사(言事)의 체제에 잘 맞는 것입니다. 그러나 재삼 발언을 하였어도 동료들의 의논이 일치되지 않으므로 인피하려고 하였다면 감히 다른 일로 인하여 지연하지 못하는 것이 실로 대각의 규례입니다. 그런데 대궐에 나아가 아뢰어 비답(批答)을 받은 뒤에도 그대로 대청(臺廳)에 앉아 있다가 예전 일을 끌어내어 억지로 인피하고 갔습니다. 잠깐 사이에 먼저 아뢰고 뒤에 인피한 것은 마음을 둔 자취가 없지 않으니 대관의 체면에 어긋났습니다. 사간 홍명일(洪命一)은 이미 간통(簡通)에 답하였으나 소견이 밝지 못하고 논한 것이 한결같이 법에 맞지 않으며 지나치게 미루었습니다. 대사간 이경석은, 논사(論事)의 결말이 오로지 장관(長官)에게 있는데, 이미 심동귀의 논변이 남을 모함하는 데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고 또 김진(金振)의 말이 서로 공경하는 예의에 어긋난 것을 보고는 처치가 마땅함을 잃었다고 스스로 이미 다 말하였는데 인피하는 초고를 본관(本館)에 보내고 재차 사직서를 정원에 올렸습니다. 이는 대개 공론에 용납되기 어렵다는 것을 스스로 알면서도 오직 관직을 유지하려고 어쩔 줄 모르며 마치 대기하는 자처럼 불안에 떨고 있는 것이니, 사대부의 마음가짐과 행실이 어찌 차마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논사(論思)의 직책에 있으면서 항상 조정이 혼란함을 가슴 아프게 여기고 있는데 세상의 변고가 날로 심해지고 인심을 예측할 수 없게 되어, 성상의 시대를 당하여 일찍이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일을 목격하니 다만 중외(中外)가 놀랄 뿐만 아니라 전하께서도 통찰하여 몹시 미워할 바입니다. 정언 박수문, 사간 홍명일, 대사간 이경석을 아울러 체차하라 명하고, 지평 김진은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답하지 않았다. 지평 이도장(李道長)이 아뢰기를,
"대저 대간에 대한 처치는 각각 인피한 말을 인하여 시비를 분별하고 즉시 결정짓는 것이니 옛날의 준례도 이와 같았고 사체에도 당연합니다. 만약 공의가 있는 곳에 논할 만한 일이 있다면 별도의 차자로 진달하는 것은 불가하지 않습니다. 전일 옥당이 여러 관원을 처치하는 차자에 인피하지 않은 대관(臺官)을 아울러 논하여 곧바로 파직을 청하였으니, 마음먹은 것이 너무 지나칩니다. 이는 실로 전에 없었던 일이니 그 사사로운 정을 따르고 법을 멸시하며 멋대로 방자하고 기탄이 없는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응교 임담과 부수찬 김홍욱을 아울러 파직시키라 명하소서.
정언 박수문이 신익량을 논하려고 한 것은 대각의 풍도를 잘 안 것이지만 동료들의 의논이 일치되지 않았으면 마땅히 즉시 인피해야 하는데, 전계(傳啓)를 처치한 뒤에 다시 다른 일로 인피하였으니 자취 있는 혐의를 모면하기 어렵습니다. 정언 박수문을 파직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박수문은 새로운 법을 어기고 자기 소견을 성사시키려고 하였고 전계를 처치하자 인하여 다시 피혐하였으니, 모두 몹시 부당하지만 파직까지 시키는 것은 혹 지나칠 듯하다. 임담 등의 일은 마땅히 묘당과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옥당의 차자로 인하여 하교하였다.
"근래 법령을 엄격히 제정하여 낭관(郞官)의 추천과 재피(再避)하는 것을 아울러 모두 금혁하였으니, 이른바 공의는 구애할 필요가 없고 이른바 재피는 할 수가 없다. 유심은 재능이 있고 잘못은 없으니 실로 등용할 만한데, 심동귀가 비교할 만하지 못한 일을 취하여 임의로 공격하였으니, 이경석이 그의 너무 심한 것을 미워한 것이 무엇이 불가한가. 신익량이 범한 바는 긴급한 일이 아니고 소문도 또한 같지 않으니 우선 미루어 상세히 살피려고 한 것은 바로 예사(例事)인데, 무엇이 불가한가. 김진의 피사(避辭)는 실로 지나치니 잘못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재피하지 않은 죄로 어떻게 파직까지 하겠는가. 또 차자에 말한, 다만 관직을 유지하려고 어쩔 줄 모른다는 등의 말은 더욱 조리가 없다. 피사를 쓰지도 않았는데 곧바로 처치하였으니 또한 매우 괴상하다. 남의 불공(不恭)함은 미워하면서 자기의 말은 가리지 않고, 남의 비례(非例)는 질책하면서 스스로 새로운 규정을 만드는 것이 옳겠는가. 새로운 법을 강정할 때에 다수를 따르는 것을 주로 삼았으니 홍명일은 더욱 잘못이 없는데, 아울러 쫓아내려고 하니 이 또한 무슨 뜻인가. 대저 이조 낭관으로서 염치가 없는 자 때문에 머리를 부수는 인물034)  과 붕당의 악(惡)이 모두 이로 말미암아 나오니, 이 직책을 다투는 자는 모두 사람이 아니다. 오늘날 옥당이 이토록 불미스러운 일을 하여 조정에 소란스러운 단서를 일으켰으니, 임금을 경시하고 국가의 법을 멸시한 것이 극심하다. 옛 사람이 이른바 ‘사도(邪道)를 막지 않으면 정도(正道)가 유행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 바로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다. 묘당으로 하여금 참작하고 처리하여 다른 사람들을 일깨우도록 하라."

 

7월 6일 정묘

이목(李楘)을 부제학으로, 유영(柳潁)을 교리로, 윤문거(尹文擧)를 부교리로 삼았다.

 

7월 7일 무진

비국이 아뢰기를,
"근일 유심의 일로 인하여 삼사(三司)에서 의논이 분분하여 효상이 좋지 못하니, 신들은 그윽이 근심스럽습니다. 어제 삼가 성상의 전교를 보니, 일의 시비와 죄의 경중을 통찰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신들의 소견도 또한 어찌 이와 다르겠습니까.
대저 유영경(柳永慶)이 7년 동안 국정에 참여하여 권세를 멋대로 부리고 당파를 심었으니 청의(淸議)에 비난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때에 기강이 대강 섰고 조야(朝野)가 대충 편안하였으며, 또한 사림(士林)들에게 화를 끼친 죄가 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종말이 잘못되어 혹독한 횡액을 당하니 사람들이 모두 가엾게 여겼으므로, 반정(反正) 초기에 특별히 죄명을 씻어주어 관작을 회복시켰습니다. 혹 벼슬을 회복시키는 것은 지나치게 후한 처사라고 하는 자가 있었으나, 오직 그가 화를 가장 혹독하게 받았으므로 보시(報施)의 방도가 부득불 그러하였던 것입니다.
설령 오랫동안 권력을 잡아 끝내 뒷공론을 면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허물이 증손(曾孫)에까지 미치지는 않기 때문에 유심이 사마시(司馬試)에서 장원을 하였고 삼사(三司)의 청직(淸職)에 선발되었을 때에 사람들이 이의가 없었으니, 전랑으로 주의한 것이 무슨 불가함이 있겠습니까. 가령 경력이 많지 않은데 갑자기 극선(極選)에 주의했다고 한다면 신중히 하는 일에 다소 흠이 된다고 하겠으나, 이미 낭관을 다 뽑으라는 전교가 있었으니 그때의 사세는 실로 부득이한 것이었습니다. 전일 낭관을 주의할 때에도 상의 전교가 있으므로 인하여 밖의 의논을 두루 묻지 못하고 다만 석상의 여러 동료들이 서로 상의하여 후보자를 추천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나이 젊은 사람이 지나치게 의심을 내어 장관과 여러 동료들의 말을 따르지 않고 기필코 자기 소견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실륜(失倫)에 비교하였으니 이미 부당하고, 그 중 한 조목의 말은 보합(保合)의 불가함을 극구 진술했으니 이는 더욱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하들이 화목한 것은 국가의 복이니, 다만 능히 보합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해야 합니다. 참으로 보합할 수 있다면 무엇이 이보다 좋은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동료들을 배반하고 홀로 의견을 내어 오직 좋은 뜻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통쾌하게 여겼으니, 극심한 당론(黨論)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하여 전전되어 많은 파란이 야기되었습니다.
김진(金振)의 피혐은 성색(聲色)을 엄히 하였고 박수문(朴守文)의 피혐 또한 근래의 규정을 어겼으니, 옥당이 배척한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새 규정에 관련된 일이고 형평을 잃은 말이 많아, 진정시키려는 사헌부 장관의 의논을 머뭇거렸다고 배척하고, 화평하게 하려는 사간원 장관의 거조를 부당하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김진이 극심한 배척을 당한 것으로 말하면 감히 재피(再避)하지 못한 것이 무슨 대단한 잘못이기에 실정 밖의 비방이 이토록 극심합니까. 다른 사람이 준례 어긴 것을 질책하면서도 함께 한 구덩이로 들어가는 것을 깨닫지 못하니 어찌 탄식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홍문관의 유신(儒臣)이 일시에 죄를 받았으니 잘잘못을 막론하고 실로 듣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발원은 잔을 띄울 만한 작은 것이었는데, 여파(餘波)가 하늘을 뒤덮은 것은 차츰 변해가는 형세가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종(鍾)은 스스로 울고자 하는데 막대기를 가지고 먼저 치면 종이 우는 것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이를 가지고 말하면 금일의 일은 아마도 전적으로 옥당만을 허물할 수 없을 듯합니다. 또 준례를 어기고 지나치게 한 잘못은 피차간 똑같으니 모두 체직시키고 서로 화해시켜야 진정시키는 방도에 맞을 것입니다. 이후로 만약 성상의 뜻을 본받지 아니하고 다시 소란한 단서를 야기시키는 자는 별도로 논죄하여 뒷사람들을 징계하는 것도 또한 늦지 않을 듯합니다. 삼가 상께서 결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임금을 경시하고 법을 멸시한 죄는 체직에만 그칠 수 없을 듯하다. 그러나 의논하게 하고 따르지 않는 것도 또한 타당치 않을 듯하므로 지금은 우선 따른다. 또 이 일은 심동귀에게서 비롯된 것이니, 저 동귀도 또한 벌을 주지 않을 수 없다. 파직시키고 서용치 말라."
하였다.

 

이조 판서 남이공(南以恭)·병조 판서 이시백(李時白)·호조 판서 심열(沈悅)이 상소하여 면직(免職)을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7월 8일 기사

김광욱(金光煜)을 좌부승지로, 이경석(李景奭)을 이조 참판으로, 최혜길(崔惠吉)을 대사간으로, 권도(權濤)를 사간으로, 박길응(朴吉應)과 신유(申濡)를 정언으로, 홍명일(洪命一)을 응교로, 권임중(權任中)을 지평으로 삼았다.

 

전라 감사 윤지(尹墀)가 상소하기를,
"신의 조부 윤방(尹昉)이 양사(兩司)의 중론(重論)을 받아 온 집안이 차례로 죄에 걸렸는데, 신이 지방관의 직책에 태연하게 있는 것은 실로 감히 못할 일입니다. 공론과 사정(私情)에 있어 모두가 낭패이오니 삭탈 관직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묘당에서 추천한 것은 실로 범연한 것이 아니니, 마땅히 사직치 말고 속히 내려가 명령을 잘 수행하라."
하였다.

 

각사(各司)의 여자종[婢子]으로서 여러 도에 있던 자 10명을 가려서 심양(瀋陽)으로 들여보냈는데, 이는 청(淸)나라가 일찍이 시녀(侍女)를 요청했기 때문이다.

 

7월 11일 임신

상이 소대(召對)를 명하여 《시전(詩傳)》을 강하였다. 시강관 홍명일이 아뢰기를,
"심동귀의 피혐이 비록 소란스러운 단서를 열어 놓았으나 그 마음은 꼭 남을 모함하려는 데서 나오지는 않았을 것인데, 지나친 벌을 주는 것은 불가하지 않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들의 계사에도 또한 ‘붕당의 극심한 자이다.’고 하였으니, 이로써 말하면 벌을 너무 가볍게 주었는데, 그대는 도리어 너무 중하다고 하는가?"
하였다. 명일이 아뢰기를,
"피혐한 말로 보면 또한 붕당을 타파하려는 뜻이 있습니다."
하자, 시강관 유영(柳穎)이 아뢰기를,
"동귀의 말은 조리가 매우 없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어찌 다만 조리가 없을 뿐이겠는가. 마음속으로는 당론(黨論)을 품고 밖으로는 붕당을 타파한다는 말을 하였으니, 그 마음이 어찌 간교하지 않은가."
하였다. 명일이 아뢰기를,
"옥당의 차자는 처치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차자로 파직시킨 옛 일이 있는데, 대간이 준례가 아니라고 하였으니 살피지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간이 인피한 뒤에 차자로 시비를 진달하는 것이 진실로 처치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심동귀와 임담을 매우 사랑했는데, 지금 이와 같으니 평일의 바람을 크게 저버렸다. 금일 국사가 위급하다고 할 수 있으니,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가 비록 협심하여 바로잡는다 하더라도 오히려 구제하기 어려운데, 더구나 하는 짓들이 이와 같으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은가."
하고, 상이 승지 김휼(金霱)에게 이르기를,
"무더위가 혹심하니 전옥(典獄)을 조사하여 죄가 가벼운 자는 석방하라."
하였다.

 

행 좌승지 박명부(朴明榑)가 상소하기를,
"충청도의 병영(兵營)은 궁벽한 해안에 있어서 군사들이 번들러 가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조정 2백여 년 동안 일찍이 왜적의 배가 서해(西海)를 지나간 적이 없으니 직로(直路)에서 뜻밖에 일어나는 걱정을 대비하는 것이 해안보다 만 배나 절실합니다. 어리석은 신의 생각으로는 청주(淸州) 고을이 한 도(道)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니, 만약 병사(兵使)를 이 고을에 두면 호남과 영남의 두 길을 단속하기가 더욱 편리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였으나, 묘당이 변통하기 곤란하다고 하므로 일이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7월 12일 계유

평안도 병사 유림(柳琳)이 하직 인사를 하였다. 상이 그를 불러 보고는 가도가 함락될 때의 일을 물으니, 유림이 아뢰기를,
"가도의 서쪽은 육지와 20여 리가 연결되고 가운데에 산 하나가 있습니다. 마부달(馬夫達)이 산을 의지해 포진하고 작은 배 70척과 우리 배 4척을 취하여 수레에 싣고 산을 넘었는데도 중국인들은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일시에 돛을 달고 북을 치며 나아가 방비하지 않았을 때 엄습하니, 중국인들이 놀라 흩어져서 대항하지도 못하고 마침내 함락되어 남자 1 만여 명이 거의 피살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심세괴(沈世魁)가 굴복하지 않았던 상황을 물으니, 유림이 아뢰기를,
"심세괴가 잡혀 와서 꿇어앉지도 않고 절도 하지 않으며 마부달과 똑같이 걸터 앉으므로 즉시 해를 당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묻기를,
"청나라군사도 또한 전투에서 죽은 자가 있는가?"
하니, 유림이 아뢰기를,
"패한 중국 군사가 한 산으로 물러가 지키고 있는데, 청나라 군사 4백∼5백 명이 산을 향해 공격하니 중국인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으므로 청나라 군사도 죽은 자가 매우 많았고 대장 한 사람도 탄환에 맞아 죽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청나라장수들은 그 군졸들이 빼앗은 물건을 수취하였느냐?"
하니, 유림이 아뢰기를,
"낱낱이 수합하여 전투에서 죽은 자의 처자들에게 제일 먼저 주고 다음으로는 적의 목을 벤 자에게 준 다음 군졸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난리 전엔 평안도의 군사가 2만 명이었는데, 난리 후에 남아 있는 군사는 몇 명이나 되는가?"
하니, 유림이 아뢰기를,
"다섯 병영에 7천 명이 있고 3천 명을 더 뽑아 총 1만 명에 불과한데 근래 도망친 자가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안주(安州)의 군량은 진휼하는 데 다 써서 남은 군량은 겨우 7백∼8백 석이며, 성지(城池)는 지난해부터 수리하지 않았으므로 포루(砲樓)와 궁가(弓家)가 장차 무너지게 되었으니, 이것이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성지는 청나라 군사를 방어할 뿐만 아니라 또한 장차 다른 도적을 방비할 것이니, 저들이 비록 질책하는 말이 있더라도 우리가 마땅히 이로써 답해야 한다. 옛 성을 수축하는 것이 무슨 불가함이 있겠는가. 모두 무너진 뒤에 개축하려면 더욱 이목(耳目)에 번거로울 것이니 묘당의 여러 신하들과 함께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이 옳겠다."
하자, 유림이 아뢰기를,
"중국 배가 때로 두모연(頭毛淵)에 왕래하므로 반드시 청나라 사람들의 의심을 살 것이니, 지극히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몰래 왕래하는 상인(商人)들을 엄금하면 중국 배가 필시 오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유림이 아뢰기를,
"전쟁 무기는 화포(火砲)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안주(安州)의 포수(砲手)가 2천 명인데, 한번 남군(南軍)이 방비를 파한 뒤로부터 살아나갈 대책이 없어 장차 모두 흩어질 형편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특별히 보살펴 보존하게 하라."
하였다.

 

7월 13일 갑술

상이 하직하는 수령과 변방 장수를 불러 접견하였다.

 

정태화(鄭太和)를 동부승지로, 이해창(李海昌)을 지평으로, 이상형(李尙馨)을 교리로, 조중려(趙重呂)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7월 14일 을해

비국이 아뢰기를,
"감사를 구임시키자는 말이 처음으로 연신(筵臣)의 계사에서 나오자, 위에서 묘당에서 의논하여 처리하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대한 일이라서 신들이 감히 경솔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지연시키며 기다린 지가 이미 반 년이 지났습니다만, 연신들의 말을 시행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대저 우리 나라 감사가 관리하는 고을이 많은 경우는 60∼70 고을이나 됩니다. 1년 안에 두루 순시도 다 하지 못했는데 임기가 이미 다 되니, 비록 주공(周公)과 소공(召公) 같은 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그 어떻게 성과를 촉구하겠습니까. 이러므로 전부터 치도(治道)를 말하는 자는 반드시 이를 우선으로 여겼고, 선조신축년035)  간에도 또한 일찍이 삼남(三南)에 시행하였습니다. 그런데 겨우 두서너 방백(方伯)을 거친 후에 부적격자가 맡은 탓으로 삼도의 감사가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말이 일시에 자자하여 마침내 구임하는 규정까지 파하였으니, 바로 정묘년036)  의 일입니다. 사람을 선택할 것은 생각지 않고 구임시킨 데에만 죄를 돌렸으니, 그 당시 식자들도 또한 매우 탄식하였습니다.
성상께서 즉위한 후 묘당에서 여러 번 이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시행하기를 건의하여 요청한 자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지금 연신들의 진언으로 인하여 다시 선조대의 좋은 법을 시행하는 것이 어찌 치도의 급선무가 아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팔도의 감사 중에 양계는 원래 만들어 놓은 규정이 있으며, 경기와 강원도는 군현이 많지 않고 거리가 매우 가까우니 비록 임기가 길지 않더라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해서(海西)는 비록 작으나 서관(西關)의 직로(直路)이니, 그 임무의 막중함이 평안도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삼남(三南)과 황해도는 함경도와 평안도 감사의 준례에 의하여 구임시키면 군민(軍民)을 다스림에 반드시 착실한 성과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지난해 의논을 수렴할 때에 모두가 ‘재력이 부족하고 가족을 이끌고 가는 폐단이 있으며 지난날 임기가 길 때에도 또한 뚜렷한 효과가 없었다.’고 말하였으니, 서서히 의논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의정부 영의정 이홍주(李弘胄)가 졸하였다. 홍주의 자(字)는 백윤(伯胤)인데, 사람됨이 침착하고 청렴하였다. 선조 때의 명망으로 성상께 인정을 받고 크게 임용되어 도원수(都元帥)·종백(宗伯)·사마(司馬)·총재(冡宰)의 직책을 역임하였다. 영의정이 되어서도 항상 뒤로 물러서고 세력과 이익을 점거하려고 하지 않아 거처하는 집이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였다. 이미 졸하자, 집에 쌀 한 가마니도 남아있는 것이 없어서 부의를 힘입어 장사를 지내니,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7월 16일 정축

호조 판서 심열(沈悅)이 신병으로 사직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상이 승지를 보내어 이홍주의 상사에 조문하였다.

 

7월 18일 기묘

간원이 아뢰기를,
"함경도에 여역이 크게 성하니 의관(醫官)을 뽑아 보내고 약품을 많이 준비하며 치료하는 법을 널리 공포하고 관리를 보내어 별도로 여제(厲祭)를 지내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길주 목사 최유해(崔有海)가 자기 소견을 아뢴 것은 아름다운 뜻이지만 변방의 목사로서 감히 사직한다는 말을 외람되게 상소 끝에 넣었으니 추고하라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19일 경진

조강에서 《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상이 영사 신경진(申景禛)에게 이르기를,
"감사(監司)를 구임시키자는 의논을 경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경진이 답하기를,
"중론은 모두 타당하다고 하나 신의 뜻으로는 우리 나라의 일이 본래 오랫동안 유지하지 못하니, 차라리 별안간 설치했다가 즉시 없애는 것보다는 애당초 설치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임기를 길게 하고 나서 적격자를 얻는다면 실로 매우 좋은 일이지만 만약 적격자를 얻지 못한다면 임기가 길수록 폐단이 더욱 많을 것이다. 전일 임기를 길게 하자는 의논이 이미 시행되었는데 다시 그만둔 것은 무엇 때문이었는가?"
하니, 경진이 아뢰기를,
"권협(權悏)이 감사가 되었을 때 많은 폐단이 있어 심지어 관아에 뇌물을 바친다는 말까지 있었으니, 이로 인하여 파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감사의 책임이 막중하여 잘 다스리지 못하는 자는 체직시키고 잘 다스리는 자는 그대로 재직하게 한 일이 전에는 혹 있었는데, 근래의 감사는 모두 잘 다스리지 못하는 자들인가? 어찌 한 사람도 그대로 재직하는 자가 없는가?"
하니, 경진이 아뢰기를,
"감사는 모두 명망 높은 자인데, 임기가 끝나기를 손꼽아 기다리므로 해조에서 감히 그의 뜻을 거스르며 더 머물기를 청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임기가 거의 임박하면 혹은 부모의 병환이 있다 하고 혹은 신병이 있다 하여 여러 말로 체직을 도모하고 있다. 이경여(李敬輿)로 말하면 부모의 병환이 위급하다고 체직을 청하였으나 이미 체직된 후에 병이 있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으니, 이는 실로 국가에 기강이 없기 때문에 그러하다. 어찌 한심스럽지 아니한가."
하였다. 또 특진관 이시백(李時白)에게 이르기를,
"선경(先卿)이 항상 임기를 길게 하자고 요청하였는데, 경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시백이 답하기를,
"선정신(先正臣) 조광조(趙光祖)·이이(李珥)가 모두 구임시키자고 말하였으니, 신의 아비의 뜻도 또한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고, 인하여 구임시키는 것이 좋다는 것을 힘써 진달하였다. 또 아뢰기를,
"감사는 사체가 막중하니 신이 감히 강력히 청하지는 못하지만, 병사와 수사로 말하면 구임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중국은 임기가 몇 해인가?"
하니, 승지 박명부가 아뢰기를,
"중국의 관직은 임기를 9년으로 한다고 하니, 필시 9년일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은 기강이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나라는 임기를 1년으로 하는 법도 지키기 어려운데 더구나 9년이겠는가."
하니, 이시백이 답하기를,
"이는 전하께서 진작시키는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이미 부모의 병환이 있다고 말하여 체직을 청하니, 나는 그 진위를 알지 못하므로 묘당과 해조에 계하하면 묘당과 해조에서는 사사로운 정분을 따라 체직을 청하니, 이는 책임이 묘당과 해조에 있다."
하였다.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수령 중에 외람된 자가 많이 있다고 하니, 어사를 보내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에 비록 어사를 보냈으나 세력 없는 무신(武臣)은 반드시 장죄(贓罪)에 들고 문관(文官)은 한 사람도 파직을 당한 자가 없으니, 문관은 어찌 모두가 선치(善治)를 하고 무관은 어찌 모두가 탐욕만 많겠는가. 어사의 실효성 없는 것이 이와 같다. 경이 이조 판서가 되었으니 수령을 잘 선택하여 임명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7월 21일 임오

각사(各司)의 관원을 윤대(輪對)하였다. 참찬관 허계(許啓)가 나아가 아뢰기를,
"비록 도목 대정(都目大政)이 아니더라도 평상시에도 또한 자주 친정(親政)을 수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평상시의 정사도 친정한 옛 규정이 있는가?"
하니, 답하기를,
"모든 정사는 임금께서 마땅히 몸소 수행해야 합니다. 지금의 정사는 바로 섭행(攝行)하는 것일 뿐이니, 조종조(祖宗朝)에서 몸소 정사를 수행한 규정을 《실록(實錄)》 중에서 상고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자, 상이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허계가 또 아뢰기를,
"친정시에 주서(注書)를 6품으로 천전시킨다는 것은 바로 도목 대정을 두고 말한 것이니, 평상시 친정에서 어찌 매번 이 준례를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7월 22일 계미

주강에서 《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특진관 임광(任絖)이 아뢰기를,
"영남의 전선(戰船)과 무기는 미비한 것이 많고 호남의 수군은 훈련 절차가 지극히 허술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새로 남쪽에서 돌아왔으므로 수군에 대한 여러 가지 일을 물어보려고 하는데, 대신들이 지금 면대를 청하니, 뒤에 다시 경에게 묻겠다."
하였다. 좌의정 최명길과 우의정 신경진이 입대하여 아뢰기를,
"지금 실로 인재가 결핍된 탄식이 있습니다. 아경(亞卿) 중에 또한 쓸 만한 자가 있으니, 상세히 살펴 뽑아 쓰는 것이 마땅합니다. 신이 일찍이 이이(李珥)의 일기를 보았는데, 일기에 ‘자급(資級)으로 제수하기 때문에 관직에 있는 자로서 용렬하고 어리석은 자가 많다.’고 하였습니다. 비록 나이가 젊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만약 쓸 만한 인재가 있으면 뽑아 쓰는 것이 무슨 해로울 것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경(正卿)은 소임이 막중한데 어찌 쉽게 승진시켜 제수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선조(宣祖) 시대에도 또한 높은 관직의 임명을 엄중하게 하였으나, 이이·이원익·이덕형·이항복은 또한 모두 나이 40이 되지 않아 승진하여 경상(卿相)이 되었는데, 더구나 이처럼 위급한 때에 어찌 준례만 따라 사람을 쓸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으나 다만 그런 사람을 얻기가 어렵다. 내가 식견이 밝지 못하니, 어진 사람을 진출시키는 것은 바로 대신의 책임이다. 경들이 쓸 만하다고 생각하는 자가 누구인가?"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인재란 각각 장단점이 있으니, 실로 마땅히 단점을 버리고 장점만을 취해야 합니다. 선조(宣祖) 시대에 당하관(堂下官)에서 승지로 승진한 자가 많았는데, 지금은 16년 동안 조익(趙翼)·조희일(趙希逸)·윤황(尹煌) 세 사람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장(亞長)이 결원될까 염려되므로 승진 발탁을 거행하지 않았다."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전식(全湜)은 충성스럽고 순후한 자입니다. 성상께서 항복[下城]하였을 초기에 사대부들은 모두 달아나고 흩어졌는데, 전식은 끝까지 남아 있었으므로 영남 사람들이 이의가 없이 모두 와서 공직(供職)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에는 전식을 평범한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이제서야 훌륭한 사람인 줄을 알았다."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김세렴(金世濂)은 외직(外職)이나 내직(內職) 어느 곳에 임용하더라도 괜찮은데, 일찍이 간관 시절의 일로 인하여 황해 감사로 보냈고 곧바로 또 탄핵을 하였으니, 너무 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세렴은 문장이 풍부하고 또 재국(才局)이 있다고 하니 서용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심지원(沈之源)이 호종(扈從)하지 못한 것은 실로 곡절이 있고 또 그 사람됨은 실로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직책에 합당합니다. 신익량(申翊亮)은 상께서 특별히 발탁하여 여러 번 감사에 제수하였는데, 근래 첩을 얻은 일로 남들의 말이 많아 탄핵까지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도량이 있고 직무를 잘 수행하고 있으니, 또한 쓸 만한 사람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방백(方伯)의 자리는 매번 적격자가 없는 것이 걱정이니, 대신이 그 재행(才行)을 관찰하여 임용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상이 묻기를,
"당하관 중에는 누가 쓸 만한가?"
하니, 명길이 답하기를,
"목성선(睦性善)은 장수에 추천까지 되었고, 임담(林墰)의 재능도 또한 방백으로 제수하기에 적합합니다."
하였다. 상이 묻기를,
"재상 중에 이경석이 쓸 만한데, 경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명길이 답하기를,
"좋은 사람입니다만 명철하지는 못합니다. 이경여는 비록 병통이 있으나 재능과 학식이 취할 만하며, 박황(朴潢)은 비록 소탈한 듯하나 기국(器局)이 있으니, 모두 쓸 만한 사람들입니다."
하였다. 신경진이 아뢰기를,
"심기원(沈器遠)은 호걸이니 오래 버려둘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기원이 큰 공로가 있으니 나 또한 어찌 생각하지 않겠는가. 다만 대장이 되어서 죽을 힘을 다해 적과 싸우지 않아 임금으로 하여금 치욕을 당하게 하였으니 그 죄가 매우 중하므로 경솔히 사면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해남(海南) 객사(客舍)의 연못에 물거품이 일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향한 것은 황색인데 해가 서쪽으로 기울면 도로 북쪽으로 향하고, 또 남쪽에서 북쪽으로 향한 것은 적색인데 백색으로 변했다가 끝내는 흑색으로 변했고, 물고기가 모두 죽었다.

 

헌부가 아뢰기를,
"전 판서 조익(趙翼)은 어가(御駕)가 허둥지둥 당황할 때를 당하여 고삐를 잡고 따르는 의리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바다로 도망쳤습니다. 위급한 시기에 전하를 버리고 대책이 없게 되자, 분의 대장(奮義大將)이라 자호(自號)하고는 배를 빼앗아 타고 다니며 식량을 거두어 먹고 살았으며 그 이름을 빌려 사사로움을 구제하였습니다. 종사(宗社)와 빈궁(嬪宮)이 그 당시 강도(江都)에 있었는데 조익은 무관심하였고 섬에서 출몰한 지 30여 일만에 겨우 발자취가 성에 이르렀으며 일이 위급하게 되자 먼저 달아났으니, 임금을 잊고 국가를 저버린 죄는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멀리 귀양을 보내소서."
하니, 【 대사헌 김영조(金榮祖), 장령 유석(柳碩), 지평 이해창(李海昌).】  답하기를,
"조익은 그 실정이 용서할 만할 뿐만 아니라 논죄하기도 너무 늦었으니, 다시는 번독스럽게 하지 말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조익은 본래 경술(經術)로써 자임(自任)하여 지극한 효도로 어버이를 섬겨서 사람들이 따라가지 못할 바가 있는데, 성품이 느긋하고 식견이 둔탁하여 일을 처리할 때에 비웃음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나 병자 호란에 호종하지 못한 것은 80세의 어버이가 집에 있었기 때문인데, 유석(柳碩)이 시기를 틈타 모함한 것이 이에 이르렀으니, 다른 당파를 공격하는 해가 매우 극심하다.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7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28면
【분류】사법-탄핵(彈劾) / 역사-사학(史學)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조익은 본래 경술(經術)로써 자임(自任)하여 지극한 효도로 어버이를 섬겨서 사람들이 따라가지 못할 바가 있는데, 성품이 느긋하고 식견이 둔탁하여 일을 처리할 때에 비웃음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나 병자 호란에 호종하지 못한 것은 80세의 어버이가 집에 있었기 때문인데, 유석(柳碩)이 시기를 틈타 모함한 것이 이에 이르렀으니, 다른 당파를 공격하는 해가 매우 극심하다.

 

7월 23일 갑신

헌부가 아뢰기를,
"시종(侍從)하는 관료가 어버이를 위하여 수령으로 나아가기를 청하는 것은, 반드시 홀로된 어버이가 있어 군읍(郡邑)에서 봉양할 만한 뒤에야 이에 진소하는 것이 바로 전래하는 옛 규정입니다. 당진 현감(唐津縣監) 김홍욱(金弘郁)은 부모가 모두 생존하였는데, 감히 버젓이 수령으로 나아가기를 청하였고 정원은 사리를 구별하지 못하고 들어와 아뢰었으며 해조는 따라서 들어주었습니다. 근래 법의 문란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러한 길이 한번 열리면 후일의 폐단이 무궁할 것입니다. 김홍욱을 파직시키라 명하고 그 당시의 색승지와 해조의 당상과 낭청을 아울러 추고하라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말이 옳다. 다만 김홍욱의 양친(兩親)이 함께 높은 수를 누렸으니 세상에 드문 일이다. 수령으로 나아가기를 청한 것은 비록 법의 규정이 아니지만 그 뜻은 용서할 만하다. 해조의 당상과 낭청도 모두 잘못한 바가 없으니 우선 추고하지 말고, 승지를 추고하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7월 24일 을유

진주사(陳奏使) 홍보(洪靌)가 심양(瀋陽)에서 의주(義州)로 돌아와 한(汗)의 서찰을 등초하여 보냈는데, 그 서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청국(大淸國) 관온 인성 황제(寬溫仁聖皇帝)는 조선 국왕에게 칙서로 유시한다. 처음 왕이 피하여 남한 산성에 있을 때 짐이 칙서로 이르기를 ‘만약 명(明)나라를 정벌하게 되면 사신을 보내어 당신의 보병·기병·수군 등 수만 명을 동원시킬 터이니 혹 시간과 장소를 실수해서는 아니 된다.’고 하였는데, 그때 왕이 일찍이 군사를 모집할 수 없다는 말을 했었는가? 지금에 이르러 징병하라는 유서가 있어도 왕은 끝내 군사를 동원시켜 은혜를 갚겠다는 말은 없고, 이에 형편상 군사를 모집할 수 없으며 끝내는 점차 와해되고 말 것이라는 내용으로 주문(奏聞)하여, 마치 거절하는 듯하니, 어찌 참으로 전일의 조서를 저버린 것이 아닌가.
지난해 짐이 사은 배신(謝恩陪臣) 최명길이 가지고 온 표문(表文)을 보고, 짐 또한 조선의 힘이 미약한 것을 생각하여 징병하는 것은 마땅히 시세를 살펴 칙서를 내리겠다고 하였다. 최명길에게 준 칙서 중에 일찍이 징병하지 않겠다는 말이 있었는가? 짐이, 백성들의 고통이 전과 다름없으므로 조서로 징병 숫자를 삭감하라 하였고 용골대[英俄兒代]와 마부달(馬夫達)을 명하여 사은 배신 신경진에게 5천 명만 징발하여 안주(安州)와 의주(義州) 사이에 주둔하였다가 동원하라는 명령을 들으면 즉시 오라고 일렀는데, 지금 도리어 짐이 신의를 어기고 실천하지 못한다고 강변하니, 짐이 과연 말을 실천하지 못한 것이 있는가. 왕이 비록 강변을 하지만 어찌 그 술책에 떨어지겠는가. 왕은 짐이 신용을 어겨 말을 실천하지 못한다 여기니, 이는 나를 저버리는 것뿐만이 아니라 바로 하늘을 저버린 것이다. 하늘이 준 군사를 짐이 하늘을 어기고 통솔하지 않는 것이 옳겠는가. 왕이 천명(天命)을 순종하여 군사를 동원하지 않으니 홀로 하늘이 두렵지 않은가.
만약 짐이 동원시킨 5천 명이 너무 많다고 여긴다면 왕과 짐이 서로 원한을 맺었을 때 남한 산성을 구원한 신·구(新舊) 군사도 또한 적지 않았었고, 만약 군사를 일으키는 것을 고통스러운 일로 여긴다면 옛날 군사를 일으킨 단서는 그대가 즐거운 일로 여겼었는가? 행병(行兵)의 고통은 사람마다 똑같은 바이고 내가 군사를 일으키는 것도 또한 즐겁게 하는 일이 아니다. 명나라에 죄가 있으므로 무기[干戈]를 동원한 것이다. 비록 그러나 짐은 항상 화친을 원한다. 이를 어찌 왕이 알지 못하는가. 왕이 지금 신의를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신하의 말을 들어 강변하고 있으니 매우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옛날 그들의 말을 들어 무슨 편익(便益)이 있었기에 지금 또 이와 같이 하는가. 왕의 신용 없음이 도리어 짐에게 노출되었다. 옛날 왕이 배알(拜謁)하던 광경을 짐이 의연하게 잊지 않았는데 왕은 어찌하여 갑자기 짐을 잊었는가. 또 왕의 두 아들을 망각하였는가. 짐이 왕을 살려준 것은 예전에도 없었던 일이니, 왕도 또한 비상한 은혜로써 갚으리라 생각했는데, 뜻밖에 2년 사이에 왕을 살려준 은혜를 잊고 도리어 짐이 식언(食言)했다고 하니, 왕 이외에 다시 말을 잊어버린 자는 없다."

 

7월 25일 병술

진주사 홍보가 주청을 허락 받지 못하고 돌아왔다. 대신들이 다시 사신을 보내어 개진(開陳)할 것을 청하고 해조로 하여금 상사(上使)와 부사(副使)를 뽑아 임명하기를 청하니, 상이 일렀다.
"이 일은 실로 존망(存亡)에 관계되니, 상사는 좌의정이 아니면 불가하다."

 

비국이 능원 대군(綾原大君)으로 탄일(誕日)의 상사(上使)에 충원하여 보낼 것을 청하니, 답하였다.
"대군은 병이 있어 멀리 가기가 어려운 형편이다."

 

구봉서(具鳳瑞)를 전라 감사로 삼았다.

 

7월 26일 정해

헌부가 아뢰기를,
"근래 국가의 기강이 해이해져 공정함이 사사로움을 이기지 못합니다. 대소 신료들은 다만 자기 몸 아낄 줄만 알고 국가의 일이 위급함을 생각하지 않으니, 험하나 순탄하나 두 마음을 먹지 않는 의리가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 재상들이 청나라에 가는 것을 사지(死地)라 여겨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고 회피합니다. 부빈객(副賓客) 신계영(辛啓榮)은 비록 무릎병이 있으나 새로 임명됨을 사은 숙배한 뒤에 곧바로 병을 핑계 삼았고, 비국도 따라서 허락하였으니, 비국의 유사 당상(有司堂上)을 추고하고 신계영은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신계영은 추고하라."
하였다.

 

길주 목사 최유해(崔有海)가 서명 천견(西銘淺見)037)  을 올리니, 상이 명하여 호랑이 가죽을 하사하였다.

 

좌의정 최명길이 서경법(署經法)을 없애기를 청하니, 상이 그 말에 따라서, 이후로는 경외관(京外官)으로서 처음 수령에 임명된 사람에게 단 한 번만 서경하는 것을 영구한 규칙으로 삼게 하였다.

 

7월 27일 무자

비국이 아뢰기를,
"징병하는 일은 끝내 모면하지 못할 듯하니, 미리 양서(兩西)의 군사를 뽑아 군색하고 절박한 걱정을 없게 하소서. 평안도는 4천 명을 황해도는 1천 명을 뽑으라는 뜻으로 양서의 감사에게 하유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평안도에 배정한 수가 너무 많으니 새로 부방(赴防)한 출신으로 수를 채우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전 장연 부사(長淵府使) 박제(朴霽)는 친구에게 선사한 물건이 모두 물고기와 철물이었고, 면포(綿布)로 말하면 또한 송사에 진 사람이 속바친 것이고 백성에게 독촉하여 받아낸 것이 아닌 듯하니, 탐장(貪贓)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았지만 한결같이 발명하고 있으니, 아래에서 감히 경솔하게 의논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삭탈 관직시키고 정배(定配)하라고 명하였다.

 

7월 28일 기축

평안 감사 민성휘(閔聖徽)가 치계하였다.
"가달(假㺚) 한 사람이 종전립(鬃戰笠)을 쓰고 용천부(龍川府) 상류를 경유하여 갔는데, 지금 다행히 붙잡아 가두고 조정의 처치를 기다립니다."

 

임광(任絖)을 상장(上將)으로 삼아 유림(柳琳) 등을 독려하고 날을 가려 출발하게 하였다. 임광이 부장(副將) 유림과 서로 좋지 못한 감정이 있어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니, 비국이 임광을 체직시키고 무장(武將) 이시영(李時英)으로 대체하고 호칭을 총독사(摠督使)로 고치자고 청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본조(本朝)가 명나라와는 임금과 신하의 사이로 부자(父子)간과 같다. 2백여 년을 복종하여 섬기고 삼가기를 게을리하지 않아, 본래 예의지방이라고 일컬어졌다. 임진 왜란을 당하여 임금은 서쪽으로 몽진하고 팔도(八道)가 폐허가 되니,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천하의 병마를 동원하고 내고(內庫)의 재물을 내어 왜인들을 깨끗이 몰아내어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게 하였으니, 국운이 지금까지 지탱된 것은 모두 황제의 힘이었다. 형세가 궁핍하고 힘이 약하여 비록 능히 절의를 지키지는 못하였으나 어찌 감히 군사를 일으켜 중국을 침범하겠는가. 이는 정리상 차마하지 못하는 바이다.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9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29면
【분류】외교-명(明) / 외교-야(野) / 역사-사학(史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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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본조(本朝)가 명나라와는 임금과 신하의 사이로 부자(父子)간과 같다. 2백여 년을 복종하여 섬기고 삼가기를 게을리하지 않아, 본래 예의지방이라고 일컬어졌다. 임진 왜란을 당하여 임금은 서쪽으로 몽진하고 팔도(八道)가 폐허가 되니,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천하의 병마를 동원하고 내고(內庫)의 재물을 내어 왜인들을 깨끗이 몰아내어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게 하였으니, 국운이 지금까지 지탱된 것은 모두 황제의 힘이었다. 형세가 궁핍하고 힘이 약하여 비록 능히 절의를 지키지는 못하였으나 어찌 감히 군사를 일으켜 중국을 침범하겠는가. 이는 정리상 차마하지 못하는 바이다.

 

7월 29일 경인

청나라가 우리 나라에 공문을 보냈는데, 귀화한 사람의 성명을 차례로 기록해 놓고 그들을 되돌려 보낼 것을 독촉하였다.

 

호조 판서 심열(沈悅)이 상차하기를,
"진주(陳奏)하는 한 가지 일로 회계할 때에, 권사(權辭)를 써서 간곡하게 따르는 정상을 보이고 명백하게 실상을 진술하여 감오되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주된 뜻이므로, 상·부사(上副使)를 차출하여 그 일을 신중히 하자고 청하였는데, 상께서 특명으로 좌의정을 들여보내라고 하였으니, 대저 주선하는 힘을 얻고자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삼가 주문(奏文)의 초고를 보니, 이미 서쪽의 병사와 수사에게 명하여 군사를 선발한다고 하였으니, 저들이 말한 바를 이미 따른 것입니다. 말단에 비록 이러저러한 말이 있었으나 이는 심정을 조금 드러낸 데 불과하고 또한 징병을 면제해 달라고 요청한 말이 아닙니다. 그러니 다만 한 명의 사신[單使]만 차출하여 힘써 따르는 뜻을 알리고 겸하여 칙사(勅事)를 사례하면 될 뿐인데, 어찌 대신을 기용하며 또한 어찌 상·부사(上副使)를 기용하여 일로(一路)에 폐단을 끼치겠습니까. 군량에 관한 한 가지 일은 여러모로 생각해도 대책이 없습니다. 주문(奏文) 중에 말한바, 흉년이 들어 주선하기 어렵다는 상황과 말과 소가 모두 죽어 결코 운반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설득한다는 것은 소략한 듯하니, 이 조목은 더욱 상세히 살피소서.
출신(出身) 중에 무식하고 망령된 자가 많은데 삼남(三南) 사람의 횡포가 더욱 심합니다. 또 남쪽의 의논이 군사를 보조하는 것을 심히 배척하니, 이 무리들이 그 여론(餘論)을 듣고 대중을 현혹시키는 말로 선동하여 군사의 마음으로 하여금 흩어지게 하는 지경에 이르르면 난처한 걱정이 있을 것입니다. 부방(赴防)한 출신은 마땅히 군사 숫자에 채우지 말고 다만 군량을 운반하게 하는 것이 시기와 형편에 합당할 듯합니다. 당초의 약조는 이미 1만 명으로 정하였으나 지금 5천 명으로 삭감시키고 스스로 덕을 베푼 것으로 여기는데, 5천 명 중에서 또 마음대로 삭감하면 반드시 성을 낼 것입니다.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러 부득불 따르는 것이라면 숫자에 준해 징발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 양서(兩西) 사람에게 책임지운다면 반드시 남보다 괴로움을 더 받는다는 원망이 있을 것이니, 만약 인심을 위안시켜 그들로 하여금 즐거이 일에 참여하게 하려면 과거(科擧)를 실시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지난해 서쪽 지방에서 과거를 실시하자 원수(元數)가 너무 많아 허위(虛僞)가 서로 섞였으므로 내리신 명을 도로 거두어 끝내 신용을 잃게 되니, 더러 사람들이 낙심하여 지금까지 원망하고 있습니다. 지금 다시 중신(重臣)을 보내어 본도의 감사와 더불어 두 곳으로 나누어 복시(覆試)를 실시하되 관속(官屬)과 역졸(驛卒)을 절대로 응시하지 못하게 하면, 군사를 선발하는 어려움과 관속을 잃어버리는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고도 또 부족하면 양서(兩西)의 속오군(束伍軍)으로 보충하는 것이 실로 편리할 것입니다.
신에게 또한 어리석은 소견이 있는데, 지금 징병하는 것은 비록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지만 천지지간 우리의 심정이 어떻게 편하겠습니까. 서서히 사세를 살펴 군사가 국경을 넘으면 도독(都督)에게 알리는 것은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상께서 혹 곧바로 게첩(揭帖)을 하거나 혹 변방 신하로 하여금 왕래하는 중국인을 통하여 편지를 보내 사세가 부득이하였다는 것을 명백히 진술하면, 천하 사람들이 우리 나라의 딱한 사정을 환히 알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청나라에 곧바로 고하기를 ‘2백 년 동안 신하로서 섬기던 나라를 하루아침에 공격하면서 한 마디도 고하지 않는다면 인정과 천리에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실상에 의거하여 직언하고 숨김이 없으면 저들도 또한 반드시 심하게 성내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마땅히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토록 하겠다."
하였다.

 

장령 박계영(朴啓榮)과 유석(柳碩)이 아뢰기를,
"군신(君臣)의 의리는 천지간에 도망할 곳이 없으니, 사생(死生)과 영욕(榮辱)에 유독 다를 리가 없습니다. 어찌 운수의 성쇠(盛衰)와 자신의 이해(利害)로서 그 마음을 달리하겠습니까. 전 판서 김상헌은 한때의 이름난 신하로서 성상께 인정을 받아 정치에 참여한 지 10년 동안 가장 많은 성은(聖恩)을 입었으니 사랑이 깊고 의리가 막중한데, 어찌 차마 전하를 존망(存亡)이 달려 있는 위급한 때에 버린단 말입니까. 남한 산성에서 굴복하던 날 임금은 헤아리지 못할 위험에 빠졌고 신민은 망극한 심정이 모두 같았으니, 자신을 우선하고 임금을 뒤로 하는 것은 의리상 하지 못하는 바입니다. 상헌이 이미 정온(鄭蘊)처럼 칼로 할복하지 못하였다면 화복(禍福)을 시종 전하와 함께 해야 하는데, 빠져나와 멀리 달아나 애당초 염려하지 않았고, 당시의 일이 대충 안정되었는데도 끝내 성상을 찾아와 뵙지 않았습니다. 편안한 곳에서 쉬며 왕실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자위하기를, 몸을 깨끗이 하고 절의를 지키며 더러운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면서 이론(異論)을 고취시켜 국가의 잘못을 드러내고 사람들의 뜻을 혼란시켰으니, 아, 신하의 의리가 이에 이르러 하나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명예를 구하느라 임금을 팔아먹고 붕당을 세워 국가를 그르친 것이 다만 상헌의 여사(餘事)일 뿐입니다. 임금을 업신여기고 부도덕한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극변으로 위리 안치하라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김상헌의 논죄가 너무 늦었으니 그대로 두는 것이 무방하다."
하였다. 그 후 이도장(李道長)이 이어서 상헌과 정온을 아울러 논죄하니, 많은 사람들이 모두 놀라 탄식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두 신하는 평생 정도(正道)로 행하였는데, 조정이 뜻을 굽힌 조치는 이미 두 신하의 마음을 어긴 것이니, 두 신하가 어떻게 떠나가지 않겠는가. 천지의 위치가 뒤바뀌는 날을 당하여 두 신하는 죽음으로써 맹세하고 절의를 고치지 않았으니, 그 의리는 충분히 인륜을 선양했다 하겠다. 유(柳)·목(睦)처럼 사사로운 분노에서 나온 것으로 말하면 실로 논할 것이 못 된다. 그런데 혹 두 신하의 출처(出處)를 의심하는 자가 또 있으니, 인심의 흉악함이 이와 같도다.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9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29면
【분류】사법-탄핵(彈劾) / 역사-사학(史學)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두 신하는 평생 정도(正道)로 행하였는데, 조정이 뜻을 굽힌 조치는 이미 두 신하의 마음을 어긴 것이니, 두 신하가 어떻게 떠나가지 않겠는가. 천지의 위치가 뒤바뀌는 날을 당하여 두 신하는 죽음으로써 맹세하고 절의를 고치지 않았으니, 그 의리는 충분히 인륜을 선양했다 하겠다. 유(柳)·목(睦)처럼 사사로운 분노에서 나온 것으로 말하면 실로 논할 것이 못 된다. 그런데 혹 두 신하의 출처(出處)를 의심하는 자가 또 있으니, 인심의 흉악함이 이와 같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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