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신묘
지평 이해창(李海昌)이 아뢰기를,
"전 판서 김상헌의 청렴과 정직은 사류(士類)가 추앙하는 바이고 성상께서 통촉하신 바입니다. 남한 산성에서 굴복하던 때를 당하여 죽기를 맹세하고 변치 않은 자는 김상헌과 정온입니다. 두 사람의 정상은 실로 똑같은데, 만약 칼로 찔렀느냐 찌르지 않았느냐로 한 사람은 죄주고 한 사람은 죄주지 않는다면 매우 근거 없는 의리입니다. 또 10년간 대우를 받은 것은 정온도 마찬가지고 끝내 임금을 찾아와 뵙지 않은 것은 정온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사수(死守)의 의논을 이룩하지 못하고 또 결사(決死)의 의리를 이루지 못하였으니, 두 사람의 마음은 죄를 지은 것으로 자처하여 감히 얼굴을 들고 서울에 들어오지 못하고 초야에서 죽기를 기약한 것입니다. 유석(柳碩) 등이 비슷한 말로 얽어매어 시기를 틈타 모함하는 계책을 삼았으니, 아, 또한 참혹합니다. 장령 유석과 박계영을 사판에서 삭제하고 영원히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이처럼 전에 없었던 괴상 망측한 변론을 정원은 어찌하여 올렸는가. 여러 승지들의 한 바가 또한 매우 괴이하다. 이 계사를 도로 내주어라."
하였다.
부제학 이목(李楘), 응교 홍명일(洪命一), 수찬 이행우(李行遇)가 상차하기를,
"삼가 듣건대 임금이 치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는 것은 고금의 통의(通誼)입니다. 남한 산성에서 나온 조치는 종사를 위하고 백성을 위한 것이니, 실로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때 김상헌과 정온이 남보다 앞장서서 충성심을 발휘하고 기꺼이 자결하려고 한 것은 차마 임금께서 치욕당하는 것을 보지 못하겠기 때문이었으니,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이 이와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상헌은 당초 관직을 내놓고 지방에 있으면서 벼슬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임금께서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영영 처자와 이별하고 허둥지둥 성으로 들어왔으니, 자신을 잊고 난리에 임하여 국가가 망하면 함께 죽겠다는 그의 뜻을 대개 볼 수 있습니다. 적의 군대가 철수하고 시사(時事)가 다소 안정된 뒤에 이르러 비로소 멀리 달아나 편하게 지낼 계획을 하였겠습니까. 사수(死守)하자는 의논을 이미 행하지 못하고 자결(自決)하려는 뜻도 이루지 못하자 기로(岐路)에서 방황하며 스스로 감히 다시 서울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니, 상헌의 마음은 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상헌이 어찌 존망이 달려 있는 위급한 때에 임금을 버렸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유석 등이 도리어 ‘상헌이 임금의 잘못을 드러냈고, 더러운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였다.’ 헐뜯으니, 이는 신하로서 차마 말하지 못할 바입니다. 상헌을 극형에 처하려고 하면서 실언함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니, 아, 또한 심합니다. 상헌이 심산 궁곡(深山窮谷)에 물러가 살면서 빈객(賓客)을 사절하고 인사(人事)를 폐하며 스스로 천지간 일개의 궁인(窮人)으로 여기니, 그 정상이 또한 애처롭습니다. 비록 이론(異論)을 고취시키려고 한들 누가 호응하고 누가 제창하겠으며, 비록 사람들의 뜻을 혼란시키려고 한들 누가 믿고 누가 따르겠습니까.
상헌은 평일 가지고 있는 의견이 너무 과격하여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유석이 일찍이 상헌에게 배척을 당하여 청반(淸班)에 참여하지 못한 지 지금 10년이 되었으니 이는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아는 바입니다. 유석이 어찌 감히 혐의를 피하지 않고 장관이 참석하지 않은 날에 멋대로 공격함이 이토록 극심합니까. 자기의 사사로운 원한을 성사시키는 기반을 삼으려고 하니 그 꾀가 또한 너무 심합니다. 신들이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 붕당(朋黨)을 타파하여 함께 두려워하고 합심하여 공경하게 하려는 뜻을 지니고 있으니 매우 훌륭한 일인데, 유석 등이 도리어 붕당을 심고 국가를 그르친다는 말로 성상을 현혹시켜 현재의 인사를 일망 타진하려는 계책을 세웠으니 그 뜻이 어찌 유독 상헌에게만 있을 뿐이겠습니까. 신들은 이러한 것을 다스리지 않으면 조정의 시끄러운 단서가 그칠 날이 없을까 염려됩니다. 장령 유석은 파직시키고 박계영은 체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 사람은 다만 죽으려 한다는 명분만을 취하고 끝내 목숨을 버린 사실이 없으니, 내가 보건대 천진(天眞)을 지키는 데 이르지 못한 것이 분명한 듯하다. 위급한 조정을 버리고 편안한 곳에서 유유 자적한 것은 눈물을 흘리며 임금의 수레를 따르고 자신을 잊고 마음을 다한 자와는 또한 같지 않은 듯한데, 경들은 지나치게 칭찬하니, 이는 공정성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헌부의 이른바 악을 드러냈다는 등의 말은 모두 자신의 행동이 자초한 것이니, 어찌 지나치게 분노를 더하겠는가. 유석 등이 설령 죄가 있다 하더라도 대간이 스스로 담당하여 논죄할 터인데, 어찌 이처럼 황급하게 마치 도적을 잡듯 하는가. 지금 이 행동은 실로 극히 놀랄 만하니, 내가 몹시 애석하게 여긴다."
하였다.
예조 판서 이현영(李顯英)이 상소하기를,
"신이 호종하는 반열에 참여하지 못하여 남한 산성에서의 의논과 사정은 하나도 모르지만 남에게 들은 바로 말하면, 김상헌은 고집 센 성품으로서 죽기를 작정하고 의리를 지키는 것으로 옳다 하고, 종사와 백성을 위하는 계획을 세워서 권도(權道)를 써 구제하는 것이 중도를 얻는 것임을 생각하지 않았으니, 그 편협함은 고칠 수 없습니다. 남한 산성에서 굴복할 때의 광경을 실로 차마 눈으로 바라볼 수 없어 통곡하고 물러나오되 마음이 발끈하여 훌쩍 도망나온 것은 반드시 부지 불각 중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나온 뒤에는 한편으로 치우친 소견이 종사의 대계와 서로 어긋나 이에 용납되지 못할 것을 스스로 알았으니, 차라리 시골 집에서 말라 죽을지언정 다시 궁궐에 들어갈 면목이 없었을 것입니다. 민망스러워 하는 단서가 몹시 간절한 충성심과 애국심 중에서 흘러 나오지 않은 것이 없으니 어찌 터럭만큼이라도 다른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그 자취를 말하면 사면할 수 없는 죄이지만 그 심정을 헤아려보면 실로 용서할 만합니다. 더구나 전쟁으로 혼란한 요즈음 이러한 의견이 하나도 없다면 동방예의지국이란 호칭을 어떻게 한 낱의 실오라기만큼이라도 후일에 계승하겠습니까. 만약 그 죄를 들춘다면 아마도 가상한 절의 하나로 덮을 수 있을 것입니다. 상헌은 당초에 이미 죽기를 각오하였으니 비록 극형에 처한다 하더라도 실로 달갑게 여길 터이지만, 국가에서 고집 세고 성급한 신하를 용납하지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어제 삼가 김상헌의 논죄가 너무 늦었다는 하교를 보았습니다. 신으로 말하면 일찍이 법관으로 있었으니, 두렵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비록 하루 동안 재직하였더라도 마땅히 하루의 책임을 져야 하니, 먼저 신을 삭탈 관직시키라 명하여 서로 옹호하여 말하지 않는 자들의 징계를 삼으소서."
하니,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이처럼 근거 없는 상소는 후일 받아 들이지 말아 국가의 체통을 높이라."
하였다.
대사헌 김영조(金榮祖)가 상소하기를,
"어제 장령 유석이 와서 백간(白簡)를 보였는데, 이는 바로 김상헌을 논핵한 장계였습니다. 그 계사를 보니, 임금을 업신여기고 도리에 어긋났다는 것으로 죄안을 만들어 위리 안치하는 벌을 주자고까지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상헌이 남한 산성에서 나오던 날 뒤에 떨어진 것은 비록 잘못이 있지만 당초 적의 군대가 왔을 때 그가 60리 밖에 있다가 변고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산성으로 뒤따라 들어왔으니 이 어찌 왕실을 돌아보지 않은 사람이겠는가라고 여겼습니다. 난리를 당하여 배반하여 도망치고 원래 성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도 벌이 이에 이르지 않았으니, 대관이 적용시킨 벌은 적당치 않은 듯하므로 신이 따르지 않았습니다. 지금 지평 이해창(李海昌)의 계사를 보건대 탄핵을 발론한 대간도 한바탕 시끄러운 단서가 있음을 면치 못하겠으니, 신은 국가를 위해 매우 염려합니다. 삼가 전하께서 마음을 평화롭게 하고 이치를 살펴 진정시키는 방도에 힘을 쓰신다면 조정은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또 신의 출발이 멀지 않았으니, 체직시켜 공사(公私)를 편안하게 하소서."
하니, 해조에 계하하였다.
부교리 유심(柳淰)이 상소하기를,
"지난번 해조에서 신을 만부당한 지위에 주의(注擬)하였으니, 신의 마음에도 또한 부끄러움을 알겠습니다. 말한 자의 말에 무슨 괴상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생각건대 신의 선조 유영경(柳永慶)은 선묘(宣廟)를 만나 특별한 예우를 받았는데 혼조(昏朝)에 이르러 흉악한 무리들에게 혹독한 모함을 당하여 끝내 헤아릴 수 없는 화를 당하였으니, 당시의 사류(士類)들이 분노하면서도 말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온 나라가 원통하다고 말하는 것이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았는데, 어찌 지난날의 여론(餘論)이 성상의 조정에서 다시 발생할 줄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신의 불초로 인하여 욕이 선조에게까지 미쳤으니 실로 목우(木偶)가 아니라면 어떻게 수치스러움을 안고 부끄러움을 참으며 태연하게 살겠습니까. 삼가 신의 체직을 허락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보라."
하였다.
검열 신면(申冕)이 상소하기를,
"아, 금일의 일은 이미 미봉책이 없으니, 마땅히 대의로 재량하여 정의만 성취시킨다면 나라가 비록 전복된다 하더라도 오히려 천지에 죄는 짓지 않습니다. 어떻게 차마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재조한 국가로서 신종 황제가 살려준 백성을 몰아 강을 건너가게 하겠습니까. 지금 만약 우리 나라의 사세로 말을 잘 만들고 대신들은 온 나라 신민들의 정상으로써 신포서(申包胥)의 통곡038) 을 본받으면 성의가 이르는 바에 금석(金石)이라도 깨뜨릴 수 있는데, 이러한 것은 도모하지 않고 갑자기 조병(助兵)하는 거사를 행한다면 전하께서 장차 무엇으로 국민을 가르치며 천하 후세에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신도 묘당의 의논이 또한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임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부득이하다 하여 할 수 없는 일을 한다면 끝내는 반드시 차마 말 못할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미관(微官)으로 분수에 넘친 행동을 한다는 혐의 때문에 성상께 모두 진달하지 않는다면 이는 신이 성상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삼가 성상께서는 참람함을 용서하고 뜻을 어여삐 여기소서."
하였다. 상소가 들어갔으나 답하지 않았다.
우의정 신경진이 청대(請對)하니, 상이 불러 보았다. 상이 이르기를,
"주문(奏文) 말단의 의리에 관한 말은 좌의정과 상의하여 잘 처리하라. 남한 산성에 있을 때 성이 함락되면서 따라 죽었으면 참으로 좋았을 터인데 종사(宗社)가 소중하므로 참아서 지금에 이르렀다. 지금 또 망극한 일이 있으니, 산성에서 죽지 못한 것이 매우 한스럽다."
하니, 경진이 아뢰기를,
"금일의 일은 참으로 망극하다고 하겠으나 이미 이에 이르렀으니 어찌 필부(匹夫)의 절개를 따를 수 있겠습니까. 또 세자가 청나라에 있으니, 정세로 참작해 보건대 어쩔 수 없습니다. 비록 중국이라 한들 어찌 헤아리지 못하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혹 기이한 꾀를 내어 능히 조병(助兵)하는 한 가지 일을 면하게 하는 자가 있다면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나 또한 밤낮으로 생각하여도 좋은 계책을 얻지 못하니, 어찌하랴."
하였다.
8월 2일 임진
유성(流星)이 실성(室星) 아래에서 나와 우성(牛星) 위로 들어갔다.
도승지 서경우(徐景雨)가 상소로 김상헌의 무죄를 진술하였는데, 좌부승지 최유연(崔有淵)이 봉입을 승락치 않았다.
상이 하직하는 수령들을 인견하였다. 길주 목사(吉州牧使) 최유해(崔有海)가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강석기(姜碩期)의 말을 들어보건대 사복시(司僕寺)에 목화를 많이 저장했다고 하니, 이를 북도(北道)에 내려보내 추위에 떠는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면 조그마한 은혜나마 거의 입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시(本寺)에 말하라."
하였다. 유해가 또 아뢰기를,
"함경도에 전죽(箭竹)이 없으니, 만약 수로(水路)로 덕원(德源)의 원산창(原山倉)에 수송한다면 변방의 무사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말한 바가 모두 옳다. 해사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8월 3일 계사
상이 정원에 하교하여 지평 이해창을 먼저 체차하라고 하였다.
좌의정 최명길(崔鳴吉)이 상차하기를,
"국가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신은 참으로 사람을 대할 면목이 없습니다. 다만 속히 죽기를 원할 뿐입니다. 이때를 당하여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는 실로 함께 배를 타고 풍랑을 만난 형세이니, 참으로 서로 공경하기를 힘쓰고 마음을 합쳐 함께 국가의 일을 구제하여 성상의 마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근래 대각(臺閣)의 신하가 이런 계책은 마련하지 않고 여러 차례 파란을 일으켜 매양 서로 공격하는 것으로 일을 삼아 조정에 거의 편안한 날이 없으니 참으로 한탄스럽습니다.
윤방(尹昉)은 선대 조정의 구신(舊臣)으로서 본래 덕과 도량이 있다고 칭송을 받았습니다. 강도(江都)의 일이 역경을 당했을 때에 비록 그가 몹시 늙어서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비방을 면치 못했으나 주선한 공은 또한 적지 않았습니다. 2년 내에 두 차례나 파직되고 삭탈 관직까지 당하였으니, 형벌을 시행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80세의 늙은 신하로 조석지간에 죽게 되었으니, 공평한 마음으로 보면 참으로 가여운데, 다투어 잘못을 집어 내어 트집잡은 것이 1년이 돼가니, 어쩌면 그리도 심합니까.
조익(趙翼)은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공부하여 경술(經術)과 행의(行誼)가 옛날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병자년039) 의 잘못은 불행한 사세에서 나온 것이지만 정상은 실로 용서할 만합니다. 당초 잡아다가 곡절을 물어 참작하여 벌을 준 지가 이미 1년이 지났으니 그 실정을 아는 자는 항상 그가 오래 폐색됨을 애석하게 여기는데, 이에 실정 밖의 말을 만들어 멀리 귀양보내자고 청하니, 아, 또한 이상합니다.
김상헌은 문장과 조행이 당시에 존중을 받았고 남한 산성이 포위당했을 때에 서둘러 달려왔고 문서를 찢으며 통곡하였으니, 절의는 참으로 숭상할 만합니다. 일이 급하게 된 뒤에 미쳐서는 조그마한 신의를 위해 죽지도 못하고 이에 종묘 사직을 받든 임금에게 책망하려고 하여 발끈 성을 내고 성(城)을 나와 돌아보지 않고 갔으니, 근거 없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번연히 생각을 고쳐 궁궐 아래에 나와 사죄했다면 오히려 허물을 잘 수습한 자라고 할 수 있었는데, 어찌 그리도 혼미하게 깨달을 줄 모르고 갈수록 더욱 폐색되었단 말입니까. 군신간의 의리에 참으로 그래야 했겠습니까. 충신이 나라를 떠날 때에는 자신의 명분을 깨끗이 하려고 않는 법인데, 저 사람은 평소 자신을 어떻게 보았기에 위급한 때를 당하여 처신함이 이에 이르렀습니까. 보는 자들이 살피지도 않고 고상한 풍치라고 지목하니, 세도(世道)가 염려됨이 참으로 또한 적지 않습니다. 비록 그러나 그가 한 바를 추적해 보면 다만 고집과 편벽이 너무 지나친 데서 나왔고 식견이 부족하여 일시의 소견 차이로 마침내 다소간의 낭패를 저질렀습니다. 금일에 있어서는 초야에 도망친 일개 신하에 불과하니, 그대로 두고 문제삼지 말아 더욱 천지의 큰 도량을 보여야 하는데, 어찌 무군 부도(無君不道)하다는 죄목으로 지나치게 법에 적용시켜 인심으로 하여금 불평하게 만들어 더욱 서로 갈라지는 조짐을 조장하겠습니까.
대저 1품의 재상을 귀양보내는 중한 형벌은 실로 조정의 대단한 처리로 여겼습니다. 전부터 이와 같은 의논은 동료들에게 익숙히 강론하고 삼사(三司)에 고루 논의하여 의견이 일치된 뒤에 임금께 아뢰었으므로 공의(公議)가 시행되어 인심이 복종하였는데, 지금은 그렇게 하지 못해 1명이 더 많다는 이유로 막중한 장관의 의사보다 더 중시합니다. 이른바 다수결의 규정이란 본래의 뜻이 이와 같지 않으며, 장관에게 묻지도 아니하고 홀로 탄핵을 낸 데에 이르러서는 다시 근거 없는 일입니다. 무엇으로 사람을 책망하겠습니까. 체차하라는 명령도 또한 너그럽게 용서하는 데서 나온 것이지만 나머지 두 신하도 사리에 있어 혼자 모면하기 어렵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논의의 이동(異同)을 묻지 말고 아울러 체직시켜 다시 소란스러운 단서를 발생하지 못하게 해야 금일 진정시키는 방도에 합당할 것이라 여깁니다.
신은 불초한 자로서 정승 지위에 있으면서 구구하게 바라는 바는 항상 사론(士論)이 화합하는 데 있는데, 근일의 기상을 살펴보건대 다분히 분열되는 단서가 있으니, 속으로 걱정되고 지나치게 염려됨을 실로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신이 상헌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대중 모두가 아는 바이지만 세도(世道)를 염려하여 부득불 이와 같이 아뢰는 것입니다."
하였다. 차자가 들어간 지 2일 만에 답하기를,
"유석 등은 마땅히 차자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김반(金槃)을 대사헌으로, 최계훈(崔繼勳)을 헌납으로, 박수문(朴守文)을 지평으로, 유철(兪㯙)을 이조 좌랑으로, 정지호(鄭之虎)를 정언으로 삼았다.
8월 4일 갑오
우리 나라 사람이 몰래 담배[南靈草]를 심양(瀋陽)에 들여보냈다가 청나라 장수에게 발각되어 크게 힐책을 당하였다. 담배는 일본에서 생산되는 풀인데 그 잎이 큰 것은 7, 8촌(寸)쯤 된다. 가늘게 썰어 대나무 통에 담거나 혹은 은(銀)이나 주석으로 통을 만들어 담아서 불을 붙여 빨아들이는데, 맛은 쓰고 맵다. 가래를 치료하고 소화를 시킨다고 하는데, 오래 피우면 가끔 간(肝)의 기운을 손상시켜 눈을 어둡게 한다. 이 풀은 병진040) ·정사 년간부터 바다를 건너 들어와 피우는 자가 있었으나 많지 않았는데, 신유041) ·임술년 이래로는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어 손님을 대하면 번번이 차[茶]와 술을 담배로 대신하기 때문에 혹은 연다(煙茶)라고 하고 혹은 연주(煙酒)라고도 하였고, 심지어는 종자를 받아서 서로 교역(交易)까지 하였다. 오래 피운 자가 유해 무익한 것을 알고 끊으려고 하여도 끝내 끊지 못하니, 세상에서 요망한 풀이라고 일컬었다. 심양으로 굴러 들어가자 심양 사람들도 또한 매우 좋아하였는데, 오랑캐 한(汗)은 토산물(土産物)이 아니라서 재물을 소모시킨다고 하여 명령을 내려 엄금했다고 한다.
빈객 박로(朴𥶇)가 도로 심양으로 가려고 하는데, 상이 인견하고 묻기를,
"경이 돌아온 것은 부득이해서 나온 것인가?"
하니, 박로가 답하기를,
"신이 배종하는 반열에 있는데, 어찌 하루라도 떠나려고 하였겠습니까. 피차간의 형세가 같지 않으므로 저 곳의 사정을 조정에 알리려고 나온 것입니다. 이는 신의 의견도 아니고 또한 세자께서 마음대로 보낸 것도 아닙니다. 저들이 아직도 우리 나라를 믿지 않아 차관(差官)을 보내어 힐문하려고 하기 때문에 신이 부득이 나왔을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묻기를,
"저 나라의 사정을 들을 수 있겠는가?"
하니, 박로가 답하기를,
"저 나라는 지극히 형세가 커졌습니다. 막북(漠北)의 여러 오랑캐들이 모두 그 나라에 귀속하였고 귀속하지 않은 곳은 다만 황하(黃河) 이북인데, 차하라[車河羅]의 태자가 【 차하라는 즉 서달(西㺚) 부락의 이름이다.】 한(汗)의 사위가 되었고 어피(魚皮)와 달자(㺚子)도 전쟁하지 않고 귀속하였으니, 대저 그들의 위엄이 막북에 미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묻기를,
"명나라도 또한 강화하고 기미하려는 계획이 있다고 하는데 그러한가, 그렇지 않은가?"
하니, 박로가 답하기를,
"명조(明朝)에서 화친하려는 사신이 과연 나왔는데, 이는 바로 산해관(山海關) 군문(軍門)이 보낸 사람입니다. 소위 상사(上使)는 두 눈이 다 멀었으니, 모집에 응한 사람인 듯합니다. 청나라의 민심은 전쟁을 싫어하고 또 중국과 통화(通貨)하려고 하여 날마다 화친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서, 청나라에서 말을 탄 사람 20명이 또한 중국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저들의 여러 왕들이 패를 나누어 다투는 일이 많으니, 한(汗)이 죽으면 국가가 반드시 혼란될 것입니다. 호구(虎口)는 바로 한의 측실(側室) 아들인데 명위(名位)를 정하지 않았고, 또 14세의 아들이 있는데 측실 소생이기 때문에 사자(嗣子)로 삼지 못하니, 후일 반드시 서로 다투어 즉위(卽位)하려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묻기를,
"한(汗)의 사람됨이 어떠하던가?"
하니, 박로가 답하기를,
"온화하고 어질어서 포악한 행동이 없고 또 형제간에도 화목합니다."
하였다. 상이 묻기를,
"여러 장수 중에 용사(用事)하는 자가 누구인가?"
하니, 박로가 답하기를,
"범문정(范文程)·보태평고(普太平古)·기청고(祈淸高) 등이 용사하는데, 동쪽에 관한 일은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달(馬夫達) 두 장수에게 전적으로 위임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묻기를,
"장춘(張春)의 사람됨이 어떠하던가?"
하니, 박로가 답하기를,
"나이는 70이 넘었는데도 생기가 넘치는 활발한 기상이 사람을 감동시킵니다. 정월 초하룻날 하례 할 때에 세자가 마침 그의 처소를 지나가다가 들어가 보니, 장춘이 말하기를 ‘내가 동쪽을 향하여 앉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담론(談論)이 낭랑하여 들을 만하고 오랑캐들도 또한 지극히 공경하며 한(漢)나라의 소무(蘇武)에게 비교한다고 합니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박로가 과장된 말로 한(汗)의 위엄이 막북(漠北)에 미쳤으며 온화하고 인(仁)에 가깝다고 하였으니, 옛적 송(宋)나라 사신이 금(金)나라에서 돌아와 금나라 사람을 칭찬하기를, 산에 오르는 호랑이와 같고 물을 건너는 수달과 같다고 한 것과 다름이 없다. 옛날이나 지금 모두가 똑 같은 길을 밟고 있으니, 참으로 통탄할 만하다.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31면
【분류】외교-야(野) / 역사-사학(史學)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박로가 과장된 말로 한(汗)의 위엄이 막북(漠北)에 미쳤으며 온화하고 인(仁)에 가깝다고 하였으니, 옛적 송(宋)나라 사신이 금(金)나라에서 돌아와 금나라 사람을 칭찬하기를, 산에 오르는 호랑이와 같고 물을 건너는 수달과 같다고 한 것과 다름이 없다. 옛날이나 지금 모두가 똑 같은 길을 밟고 있으니, 참으로 통탄할 만하다.
8월 5일 을미
대사헌 김반(金槃)이 김상헌에 관한 의논을 정지시키고, 인하여 아뢰기를,
"국가가 망극한 변을 당했을 때에 종사의 대계를 위하여 부득불 권도를 사용해 화(禍)를 덜어야 하겠지만 참으로 한 낱의 실오라기만큼이라도 정도(正道)를 지키자는 의논이 없다면 동방예의지국이란 호칭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김상헌은 천지가 변역(變易)할 때를 당하여 임금이 치욕당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고 사수해야 한다는 의논을 하였습니다. 그 의논이 시행되지 않자 죽으려다가 이루지 못하고 이미 성상을 영영 이별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성상께서 궁궐로 돌아온 뒤에도 성상을 뵙지 않은 이유입니다. 그의 소견은 비록 꽉 막혔으나 그의 정상은 애처로운데 어떻게 탈을 잡아 죄를 줄 수 있겠습니까.
유석(柳碩)과 박계영(朴啓榮) 등이 공론을 무시하고 홀로 사사로운 소견을 주장하여 극심한 죄로 얽어 반드시 중벌에 처하려고 하니, 기회를 틈타 원한을 보복한다는 꾸짖음은 모면하기 어려운 바가 있습니다. 더구나 더러운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말은 실로 상헌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으니 감히 글에 쓰지 못하는 바인데, 유석 등이 죄로 얽어매기에 급급하여 스스로 이 말을 만들어 억지로 남에게 덮어 씌우면서 조금도 꺼려하지 않으니, 아, 이 무슨 마음입니까. 소행이 좋지 못하여 물정이 몹시 놀라니, 여러 날 그대로 그 직책을 지니게 할 수 없습니다. 아울러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대신의 차자를 인하여 이미 체차하였으니, 다시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전 지평 이해창(李海昌)이 정고(呈告)한 이튿날 무단히 출사하여 동료들에게 묻지도 아니하고 황급히 자기와 뜻이 다른 자를 공격하였으니, 기탄 없고 망령된 짓은 임담(林墰)보다 심하다. 사판에서 삭제하라."
8월 6일 병신
박명부(朴明榑)를 도승지로, 이행건(李行健)을 동부승지로, 이계(李烓)를 장령으로, 김중일(金重鎰)을 지평으로 삼았다. 살펴 보건대 명부는 용렬한 사람이고 도승지는 승정원[銀臺]의 장관이다. 사람 쓰기를 이와 같이 하니 관작이 어찌 소홀해지지 않겠는가. 애석하다.
8월 7일 정유
유성이 왕량성(王良星) 아래에서 나와 천선성(天船星) 위로 들어갔다.
8월 8일 무술
평안도 철산부(鐵山府)에서 7월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비둘기 알만 하였다. 천둥과 번개가 치며 바람이 불어 고목(古木)이 모두 뽑히고 곡식이 손상되었으며 낮이 그믐처럼 어두웠다. 감사가 치계하여 알렸다.
장령 이계가 아뢰기를,
"모든 조정의 시비는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마땅히 마음을 평온히 하고 정도를 지녀 한결같이 공론을 따라야 하고, 사적으로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으로 배척하고 억눌러서 감히 말하지 못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지난날 대관(臺官)이 김상헌의 죄를 논하면서, 이는 여론에서 나온 것이고 한 사람의 사사로운 말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상헌을 구제하려는 자가, 만약 자취는 비록 용서할 수 없으나 정상은 용서할 만하다고 여겼다면 서서히 아뢰어 참작하여 처리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한 가지 방도인데, 지금 급급히 잇따라 일어나 비평과 탄핵이 그치지 않고 죄인을 두둔하며 말하는 자를 공격합니다. 홍문관은 자신이 엄지(嚴旨)를 받고서도 스스로 책임질 것을 생각하지 않았고, 대사헌은 몸소 탄핵을 행하며 규정이 어떠한지 돌아볼 겨를도 없이 했고 혼자 중론(重論)을 정지시키기를 마치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듯 하였으니, 어쩌면 그리도 기탄이 없습니까. 행동거지가 아름답지 못하여 후일의 폐단을 막기 어려우니, 부제학 이목(李楘), 응교 홍명일(洪命一), 수찬 이행우(李行遇), 대사헌 김반(金槃)을 아울러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사신은 논한다. 이계의 사람됨이 간사하고 교활하며 문사(文詞)로 수식하였다. 김상헌이 대사헌으로 있을 때 3대(代)가 임금을 저버렸다는 죄로 탄핵하였으니, 이계가 이를 간 것이 일조일석의 일이 아니었다. 시기를 틈타 보복하고 도리어 사류를 모함하니, 소인이 원한을 멋대로 보복하고 해독을 부려서 국가를 해침이 극심하다.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32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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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이계의 사람됨이 간사하고 교활하며 문사(文詞)로 수식하였다. 김상헌이 대사헌으로 있을 때 3대(代)가 임금을 저버렸다는 죄로 탄핵하였으니, 이계가 이를 간 것이 일조일석의 일이 아니었다. 시기를 틈타 보복하고 도리어 사류를 모함하니, 소인이 원한을 멋대로 보복하고 해독을 부려서 국가를 해침이 극심하다.
김수현(金壽賢)을 부제학으로, 서경우(徐景雨)를 대사헌으로, 정치화(鄭致和)를 부교리로, 성이성(成以性)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8월 9일 기해
간원이 아뢰기를,
"승정원의 장관은 본래 청선(淸選)이라 일컬으니, 결코 사람마다 점거할 지위가 아닙니다. 도승지 박명부는 순후하고 꾸밈이 없어 혹 취할 만하나, 일찍이 경력이 없고 또 명망도 없어 제목(除目)이 한번 내려지자 여론이 떠들썩하니, 체차를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 사람은 순박하여 조금도 속된 태도가 없으니, 장관에 제수하는 것이 부당하지 않다."
하였다.
관학 유생(館學儒生) 김왕(金迬)·서광리(徐匡履)·최후현(崔後賢)·신변(申昪)·신최(申最) 등 42명이 상소하기를,
"신들이 행인(行人)의 말을 들어보건대 조정에서 장차 조병(助兵)하는 조치가 있을 것이라 하여 서울 사람들이 몹시 흉흉하고 혼란스럽다고 하니, 신들은 믿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근일 조정 의논이 이미 결정되었고 장수가 이미 임명되었으니, 신들은 놀라 바라보고 벌떡 일어나 마치 천지간에 용납할 곳이 없는 듯합니다. 아, 2백 년간 신하로서 섬긴 의리는 군신의 명분이 없다고 할 수 있겠으며, 임진 왜란에서 구해준 은혜는 부자의 은혜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이 이를 생각함에 곡성과 눈물이 함께 나오고 심장이 찢어지려고 함을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재조(再造)해준 은혜를 생각하고 조종이 명나라를 섬긴 의리를 생각하여 빨리 조병의 의논을 중지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국가의 일이 이토록 망극한 데 이르렀으니, 하늘을 쳐다보고 땅을 내려다 봄에 부끄러워 다만 빨리 죽고만 싶다. 올린 상소를 묘당(廟堂)에 내릴 것이니, 너희들은 물러가 학업을 닦으라."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김왕 등이 상소한 뜻은 실로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왔습니다. 대저 금일의 일은 참으로 만부득이한 것이니, 후일 결말이 어떠한가를 볼 뿐입니다. 지금 우선 그대로 두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8월 10일 경자
유성이 왕량성(王良星) 아래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고, 묘성(昴星) 위에서 나와 오거성(五車星) 아래로 들어갔고, 필성(畢星) 위에서 나와 삼성(參星) 아래로 들어갔다.
지평 김중일(金重鎰)이 아뢰기를,
"근일 조정의 기상이 좋지 못하여 모함하는 악습이 기탄없이 자행되고 보복하려는 계책이 훤히 들여다 보입니다. 지난날 장령 이계가 김상헌의 일에 혐의를 피하지 않고 다시 소란을 야기시켰으며, 시기를 틈타 공격하여 그 사사로운 꾀를 성취시키니, 여론이 모두 함께 분개하고 식자들도 한심스럽게 여깁니다. 장령 이계를 체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한 사람의 말은 실로 공론이 아니고 준례를 어긴 일은 가타부타할 것도 없으니, 이 계사를 도로 내주어라. 이와 같은 탄핵문은 다음부터는 받아 올리지 말라."
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이해창(李海昌)이 멋대로 전에 없었던 일을 창시하여 경박한 무리들로 하여금 잇따라 들고 일어나게 하였으니, 몹시 가증스러운 일이다. 멀리 귀양보내라."
하니, 마침내 영덕(盈德)으로 귀양보냈다. 정원이 아뢰기를,
"대간은 말하는 것으로 임무를 삼으니, 비록 혹 부당한 말이 있더라도 잘못을 감싸주는 대성인의 도량으로 너그럽게 용서하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이해창이 이미 준례를 어기고 말한 것으로 사판에서 삭제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니 이것도 너무 지나친데, 지금 김중일의 일로 인하여 또 멀리 귀양보내라는 전교를 내리시니 아마도 진정시키는 방도가 아닐 듯합니다. 삼가 성상께서는 노여움을 풀고 멀리 귀양보내라는 명령을 도로 거두소서. 또 탄핵문을 받아 올리지 말라는 하교는 더욱 타당치 않습니다. 대간이 와서 아뢰는데 정원이 받아 올리지 않는다면 조정에서 대관을 예우하는 체제가 크게 손상되어 후일 무궁한 폐단을 열어놓을 것입니다. 구구한 소견을 감히 진달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알았다. 이해창의 일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군사 기일[師期]과 군량 등의 일로 청나라에 진주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배신(陪臣) 홍보(洪靌)가 칙유를 가지고 왔는데, 황상께서 다정한 말씀으로 일깨워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비유컨대 마치 부모가 자식을 가르치는 것처럼 위엄과 사랑이 지극하니, 신은 떨리고 감격하여 흐르는 눈물을 견디지 못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소방(小邦)이 천지와 같은 은혜로 감싸주는 귀국에 운명을 맡겨 오늘이 있게 된 것은 추호도 모두가 성상의 은혜이니 감사한 뜻을 어찌 능히 다 말하겠습니까. 토지는 왕토(王土)가 아님이 없고 신민도 왕신(王臣)이 아님이 없으므로 삼가 황제의 칙서를 따라 분주하게 종사합니다. 신이 은혜를 갚는 일에 또 어떻게 사양하겠습니까. 더구나 소방이 쇠퇴하였으므로 곡진한 보살핌을 받아 징병 숫자가 5천 명에 불과하니, 황제께서 은혜를 내린 것이 이에 더욱 큰데 또 어떻게 사양하겠습니까. 그런데도 감히 구구한 사정으로 머리를 들고 애처롭게 호소하여 궁벽한 마을의 미천한 백성들의 말까지도 다 진달하였으니, 이는 또한 마치 자식이 부모에게 뜻을 숨김이 없어 아프면 반드시 호소하면서도 스스로 그 말이 외람된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칙유를 받고 두려운 마음으로 죄를 알았습니다.
분수와 의리의 중함을 생각건대 감히 힘이 미약하다고 사양하지 못하겠기에 이미 서쪽 병영에 명하여 나머지 군사를 선발하라고 하였습니다. 미리 단속하여 원래의 숫자에 준해 모집하고 기회를 기다리라고 한 것은 폐하의 명령이지만, 다만 생각건대 소방의 병정(兵政)은 군사에게 농사를 짓게 하고 있으니, 이미 오래 집합시켜 놓을 수 없고 또한 시기를 늦출 수 없습니다. 오래 집합시켜 놓으면 원망이 생기고 흩어 놓으면 시기가 늦으니, 지휘와 분부를 시기와 형편에 맞게 하여 두 가지 근심이 없도록 하는 것이 바로 신의 소망입니다.
또 군사가 출행할 때에 군량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바이지만 소방의 군사는 굶주림을 가장 견디지 못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5천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수천 리를 행역(行役)하려면 의복과 무기를 전사(戰士)들로 하여금 지고 가지 않게 해야 하는데, 물건 수송하는 장비가 매우 부족하고 군량으로 말하면 더욱 마련할 방책이 없으니, 신은 몹시 민망스럽습니다. 소방은 불행히도 금년에 재앙이 더욱 혹심하여 함경도는 기근과 염병으로 거의 죽고 삼남(三南)은 전에 없었던 한재로 추수할 것이 없어 대명(大命)이 중지되기에 임박하였습니다. 유독 황해도와 평안도 양도는 지역이 상국에 가깝고 아름다운 혜택을 입어 풍년들 가망이 있으니, 군사를 선발하고 행장을 꾸리는 것은 부득불 양도에 전담시켜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전쟁을 치른 나머지 재앙과 염병이 거듭되어 소가 이미 다 죽고 말도 살아 남은 것이 드물어 사신 왕래와 특산물을 진상할 때에도 항상 수송하기 어려운 걱정이 있는데, 더구나 군량을 천 리나 수송하길 바라겠습니까. 온갖 계책이 막연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와 같은 형편은 조정에서도 잘 아는 바이니 형세를 헤아려 구제해 주소서. 삼가 황제의 명령을 기다리겠습니다.
또 신이 성상의 칙유를 읽다가 은혜를 잊었다고 말씀한 곳에 이르러서는 놀랍고 두려워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하로서 임금을 잊으면 용서 못할 죄입니다. 가령 신이 이러한 죄가 있다면 천지가 용납치 않을 것이고, 신이 이러한 죄가 없는데도 군부의 살핌을 받지 못했다면 이는 천하에 지극히 원통한 것입니다. 군신 부자간에 어찌 마음을 털어 놓아 스스로 이해되기를 구하지 않겠습니까. 신은 용렬하고 불초하여 스스로 죄를 불러 성(城)에 고립되고 마치 한 올의 실처럼 절박한 목숨을 부지하였는데, 다행히도 성상께서 포용하시는 도량으로 곡진하게 불쌍히 여겨 용서해 주시니, 엄한 칙서와 은혜로운 말은 마치 세찬 비와도 같고 추상(秋霜)과도 같았습니다. 이 때를 당하여 신의 마음은 기쁘기도 두렵기도 하며, 또 믿기기도 의심나기도 하였는데, 성상께 목숨을 맡긴 뒤에 이르러 가까이 용안을 뵙자 대우가 극진하고 은혜가 두터웠습니다. 이는 참으로 미신(微臣)의 지극한 다행이었고 천재일시(千載一時)의 기우(奇遇)였으니, 자나깨나 어찌 감히 잊겠습니까. 더구나 삼한(三韓) 수천 리의 땅을 신에게 돌려주어 신으로 하여금 다시 2백 년 종사를 받들게 하고 팔도의 백성들이 각각 자기 위치에 안정하게 하였으니, 천지가 생육의 은혜를 준 것은 유독 신의 사사로운 행운일 뿐만 아니라 장차 동방 사람의 자자손손이 영세토록 감사할 일인데, 어찌 2년도 못 되어 갑자기 망극한 은혜를 잊어버리고 용서하기 어려운 죄에 스스로 빠지는 자가 있겠습니까. 신의 말이 거짓이 아닌 것은 하늘이 실로 내려다 보고 있습니다. 원컨대 황제께서는 특별히 살피시어 향우(向隅)의 원망042) 을 풀어주시기 간절히 바랍니다."
8월 11일 신축
대사헌 서경우(徐景雨)가 상차하기를,
"삼가 듣건대 김중일(金重鎰)의 계사를 도로 내어주라는 전교가 있었고 또 이해창(李海昌)을 멀리 귀양보내라는 명령이 있었다고 하니, 성상께서 부당하게 조처한 것이 어찌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까. 이계(李烓)는 홍문관의 여러 신하와 헌부의 장관을 붓 하나로 모두 타도하여 그의 사사로운 감정을 보복하였습니다. 김중일이 국가의 일을 심히 염려하여 감히 스스로 진달한 것은 또한 그의 직책을 수행한 것일 뿐입니다. 만약 한 사람의 말이 공론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계의 장계는 유독 공론이라고 하겠습니까. 이해창을 한 마디 말이 부당한 것으로 멀리 귀양보낸다면 성상의 탕탕평평(蕩蕩平平)한 덕에 어찌 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신은 대각에서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는 풍습이 조성되어 다시는 전하를 위해 주저하지 않고 나아가 말하는 자가 없을까 염려됩니다. 혹 마음을 평온히 하고 이치를 살펴 즉시 환수(還收)하라 명하신다면 일월과 같이 밝으신 성상을 사람들 모두가 우러러 볼 것이고 언로도 또한 넓어질 것입니다. 신은 은혜를 입었으므로 물러가지 않았는데, 천질(賤疾)이 또 심하니, 체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은 사직치 말고 몸을 조섭하여 직무를 살펴라."
하였다.
대사간 최혜길이 아뢰기를,
"피차간 논한 것이 모두 지극히 공정한 마음에서 나왔는지 모르겠고 상께서 처리함도 또한 편중됨을 면치 못했습니다. 김상헌은 위급한 때에 죽으려고 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항복한 뒤에는 끝내 성상을 찾아와 뵙지 않았으니, 그 정상은 비록 용서할 만하지만 남들의 비난이 있는 것은 모면하기 어려운 바가 있습니다. 심사가 똑같은 사람을 억지로 취사(取舍)하여 중죄로 단정한 데 이르러서는 이 또한 공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일의 시비를 막론하고 유석과 이해창이 장관을 무시하고 각각 자기 소견대로 한 것은 실로 몹시 부당하며, 홍문관이 급급히 차자를 올린 것도 또한 온당치 않으나, 김반·이계·김중일 등이 홀로 탄핵을 내어 논사(論事)의 체제를 손상시켰으니, 그 거조가 뒤바뀌고 어긋난 잘못은 전후가 동일합니다.
금일 진정시키는 방도에 있어서는 마땅히 마음을 비우고 이치를 살피며 양단(兩端)을 잡고 참작 처리하여 그 사이에 치우친 바가 없은 뒤에야 인심을 복종시키고 분쟁을 잠재울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좋아하고 싫어함이 혹 치우치고 말씀이 너무 드러나시니, 탄핵문을 도로 돌려주라는 전교는 전에 들어보지 못했던 바이고, 대간의 백간(白簡)을 정원에서 취사(取舍)하면 사체에 부당할 뿐만 아니라 실로 후일의 폐단이 무궁할까 두렵습니다. 대개 이해창이 유석 등과는 잘못한 바가 큰 차이가 없는데, 하나는 체직시키고 하나는 멀리 귀양보내니, 경중이 현격하게 다릅니다. 김중일이 이계와는 잘못한 바가 본래 다름이 없는데 혹은 유음(兪音)을 내리고 혹은 엄지(嚴旨)를 내리니, 이는 신이 말한 상께서 처리함도 또한 편중됨을 면치 못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해창의 죄는 이미 참작하여 처리했는데 지금 김중일의 장계로서 또 중형을 더한다면 이는 성인(聖人)의 노여움이 사물을 인하여 옮기는 것이니, 더욱 평온한 마음으로 아랫사람을 대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만약 이계와 김중일을 아울러 체직시키지 않는다면 준례를 어기고 서로 모함하는 습성을 징계할 수 없을 것이고, 만약 이해창을 멀리 귀양보내라는 명령을 도로 거두지 않는다면 죄는 같은데 벌이 다름을 면치 못할 것이라 여깁니다. 그러므로 이 뜻으로 논계하여 피차간의 의논을 진정시키려고 하였는데, 동료들의 의견도 또한 그렇게 여기면서도 아울러 체직시키자는 의논은 끝내 일치되지 않으니, 이는 신처럼 불초한 자가 장관 지위에 있어 말을 해도 신용을 받지 못하는 소치입니다. 그대로 재직할 수 없으니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사직치 말라고 답하였다.
정언 정지호(鄭之虎)가 아뢰기를,
"아침에 장관이 신에게 백간(白簡)을 보냈는데, 이는 바로 이계와 김중일을 아울러 체직시키고 또 이해창을 멀리 귀양보내라는 명령을 도로 거두게 하자는 일이었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이계가 혼자 탄핵을 낸 것은 오히려 체통을 잃었다고 할 수 있지만, 김중일이 즉시 잇따라 일어나 보복한다는 등의 말로 남에게 덮어 씌워 전적으로 공박한 것은 준례를 어기고 모함한 작태가 매우 심하다. 더구나 혐의를 피하지 않고 다시 소란스러운 단서를 야기시켰다는 것으로 이계의 잘못을 삼았으니, 이는 김중일이 실로 자기 스스로를 말한 것이다. 이계는 결코 김중일과 같은 벌을 줄 수 없으나 다만 이계가 논한 것이 비록 공정하더라도 이미 탄핵을 받았으면 그대로 그 직책에 있을 수 없으니, 이로써 체직을 청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였는데, 장관이 끝내 허락하지 아니하고 갑자기 먼저 와서 피혐하였습니다. 신은 감히 태연하게 있을 수 없으니 신을 체직시키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헌납 최계훈(崔繼勳)이 아뢰기를,
"천하의 일은 본래 둘 다 옳거나 둘 다 그른 이치가 없습니다. 대저 일을 논하는 체계는 다만 그 옳고 그름을 관찰할 뿐이니, 어찌 혼자 아뢴 것으로 구애할 수 있습니까. 이계가 홍문관 및 사헌부 장관을 체직시키자고 청한 것은 실로 공론에서 나온 것인데, 동료들이 미처 올라오지 못하였으니 혼자 아뢰어 탄핵한 것은 부당하지 않습니다. 김중일이 청환(淸宦)을 지내게 된 것이 누가 그렇게 해준 것이기에 사사로운 은혜를 보답하려고 급급히 탄핵하였으니, 그가 말한 혐의를 피하지 않았다는 것은 실로 자기 스스로를 말한 것입니다. 시비의 판별이 이처럼 명백하고 보면 대사간이 아울러 논죄한 뜻을 신은 실로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신을 체직시키소서."
하니, 사직치 말라고 답하였다.
8월 12일 임인
옥당이 상차하여, 대사간 최혜길은 체직시키고 헌납 최계훈과 정언 정지호는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 부제학 김수현이 처리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33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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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 심한 바람이 불어 나무가 부러지고 집이 무너졌다.
암행 어사 이행우(李行遇)·김진(金振)·정치화(鄭致和) 등을 함경도·평안도·충청도 등 3도에 보냈다.
8월 13일 계묘
상이 특별히 지평 김중일을 체직시키라고 명하였다.
청나라가 우리 나라의 군사가 기한내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세자에게 종군(從軍)하기를 재촉하고, 또 세자로 하여금 즉시 평안 병사에게 공문을 보내어 군사를 뽑아 들여보내도록 하라고 시켰다.
강석기(姜碩期)를 예조 판서로, 전식(全湜)을 대사간으로, 엄정구(嚴鼎耉)를 지평으로, 정치화(鄭致和)를 응교로, 목성선(睦性善)을 부교리로, 심재(沈𪗆)를 수찬으로 삼았다.
8월 14일 갑진
비국이, 임경업(林慶業)의 죄를 용서하고 기복(起復)시켜 조방장(助防將)이라 호칭하여 심양에 달려 들어가 군사 동원의 상황을 설명하게 하고, 진주사(陳奏使)의 사행은 도로 중지시키자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
좌의정 최명길이 차자를 올려 이해창의 죄를 용서해주기를 청하니, 답하였다.
"당파를 옹호하고 법을 멸시하는 것은 모두 중죄이지만 일을 처음 일으킨 자가 더욱 중죄이니, 고식적인 말은 하지 말라."
비국이 사대부로 하여금 각각 말 1필씩 헌납케 하여 군수(軍需)에 대비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8월 15일 을사
옥당이 상차하여 이해창을 멀리 귀양보내라는 명령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니, 답하였다.
"이해창은 범한 죄가 매우 중하니, 멀리 귀양보내는 것이 불가하지 않다."
상이 하교하였다.
"심양(瀋陽)에 갈 군사에게는 금년의 부역을 면제해 주고 농사짓고 수확하는 일은 이웃 마을에서 도와주어 그들의 처자가 잘 지내게 하라."
간원이 이해창을 멀리 귀양보내라는 명령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니, 답하였다.
"그 죄가 적지 않으니, 멀리 귀양보내는 것이 지나치지 않다."
김영조(金榮祖)를 대사헌으로, 이여익(李汝翊)을 장령으로 삼았다.
8월 17일 정미
평양 두로도(豆老島)의 민전(民田) 수수 마디에 금산(金山)이란 두 글자가 붉게 쓰여 있었는데 자획(字畵)이 분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정주(定州) 지방에 동왕춘(董王春)이란 세 글자가 수수 마디에 붉게 쓰여 있었는데 해석하는 자가 없었다.
8월 18일 무신
간원이 아뢰기를,
"국가의 일이 이미 궁지에 몰렸으니 신하된 자는 비록 끓는 물과 뜨거운 불에 나아가라 하더라도 실로 거절할 수 없는데, 어찌 신명(身名)을 돌아보고 사생(死生)을 따질 수 있겠습니까. 우윤 임광은 재상 반열에 있는 자로서 사세의 위급함을 생각하지 않고 당치도 않은 피혐을 억지로 끌어대며 거만스레 상소하여 그 책임을 모면하려고 하였으니, 임광이 이와 같다면 어떻게 군졸에게 책망을 하겠습니까. 임광을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우선 추고하라고 답하였다. 재차 아뢰자 따랐다.
8월 19일 기유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병(助兵)하는 일은 비록 약조(約條) 중에 있으나 전부터 이러한 일이 없었으므로 반드시 징발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끝내 면치 못하게 되었다. 남한 산성에 있을 때 군신이 만약 모두 앉아서 죽었다면 어찌 오늘과 같은 일이 있겠는가."
하고, 인하여 눈물을 흘리니, 좌우가 눈물을 감추며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 이경석이 아뢰기를,
"이 일은 지난번에 이미 강정(講定)하지 못하였으니 지금에 와서 뉘우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못 됩니다. 이 외에 하늘의 노여움을 중지시키고 사람들의 마음을 위안시킬 것을 생각하면 조만간 호오(好惡)와 진퇴(進退)가 드러날 것입니다. 사위 정령(事爲政令)과 희로 상벌(喜怒賞罰)하는 사이에 반드시 각각 정당하게 해야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충분히 복종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감히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만 나의 식견이 그에 이르지 못하니, 경들은 작은 일이라 하여 말하지 않음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이시백(李時白)이 아뢰기를,
"예로부터 창업(創業)하기는 쉽고 중흥(中興)하기가 어려운 것은 다름이 아니라 창업하는 자는 군신 상하가 필사(必死)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일이 쉽게 이루어지고, 중흥하는 자는 잘못된 규정에 구애되고 안일(安逸)에 젖어서 시들하고 게으른 데에 이르기 때문에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옛사람 중에 사방 10리의 땅으로 중흥한 자가 있으니, 성상의 뜻을 굳게 결정하고 중흥에 열중하면 어찌 할 만한 방법이 없겠습니까."
하고, 경석이 아뢰기를,
"지금 백성들이 이미 궁지에 이르렀습니다. 내수사(內需司)로 말하면 비록 영원히 파할 수는 없으나 백성들의 힘이 소생할 때까지 한정하여 변통하는 것이 마땅하며, 대군(大君)의 집을 짓는 역사와 상의원에 들여가는 물건과 여러 궁가(宮家)의 생선과 소금도 또한 삭감하여 소민들로 하여금 모두 전하께서 백성을 보호하는 마음이 있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온당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근래 조정의 기상이 좋지 못해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걱정을 하지 않으니, 내가 밤낮으로 염려하는 것이 여기에 있다."
하였다. 경석이 아뢰기를,
"금일의 일은 시비를 막론하고 상께서 공평하게 듣고 아울러 살펴 처리하면 저절로 이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김상헌이 당초 이미 변고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성에 들어왔고, 그의 말이 시행되지 않자 가버렸으니 진퇴(進退)하는 절의에 부합됩니다. 실로 마땅히 선양하고 너그럽게 용서해야 하는데, 어찌 벌을 줄 수 있습니까. 이계(李烓)와 유석(柳碩)은 일찍이 상헌에게 배척을 당하였으므로 원한을 품고 보복하였으니 그 마음의 소재를 확실히 알 수 있고, 상헌을 옹호한 자도 또한 공평하지 않은 조처를 면치 못하였습니다. 김중일(金重鎰)의 일은 비록 타당치 않은 듯하나 은혜를 갚으려는 것이라고 한 간원의 말은 지극히 온당치 않으니, 몹시 가증스럽습니다. 이해창을 멀리 귀양보내는 것은 바로 성상께서 노여움을 타인에게 옮긴 일이니, 성인(聖人)이 어찌 이러한 일을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이 어찌 노여움을 타인에게 옮긴 일인가. 이는 바로 폐단을 막으려는 뜻이다."
하였다. 목성선이 아뢰기를,
"조정의 의논에는 시비가 있으니, 시비를 결정하는 것은 다만 성상의 판단에 달려 있습니다. 한결같이 조정(調停)하는 것은 아마도 국가를 위하는 방도가 아닌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유석에게도 또 공정하지 않은 일이 있지만 혐의하고 원망한다는 말은 부당한 말이다. 다만 정온(鄭蘊)과 김상헌(金尙憲)은 출처(出處)가 대강 같은데 다만 상헌만 논죄한 것이 잘못이다. 대저 상헌은 임금이 위급함을 겪은 뒤에도 달려와 문안하지 않고 그 형의 상사(喪事)에도 와서 곡하지 않았으니, 인륜에 죄를 지은 사람이다. 그러나 조정에서 벌을 주는 것은 불가하니, 다만 그 시비만 밝히는 것이 옳다. 국가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대대로 벼슬하던 신하로서 갑자기 먼저 저버리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는가. 유석의 말은 비록 봉황이 산 동쪽에서 우는 것043) [鳳鳴朝陽]과 같다고 말한다 할지라도 괜찮다."
하자, 경석이 아뢰기를,
"어떻게 봉황이 우는 것에 비할 수 있습니까."
하니, 상이 속으로 기뻐하지 아니하고 파하였다.
8월 20일 경술
임담(林墰)을 문학(文學)으로 삼아 장차 심양에 보내려고 하였는데, 훈련 도감이 임담은 현재 포보(砲保)를 승호(陞戶)044) 시키는 일을 관장하고 있다는 이유로 문학을 체직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헌부가 아뢰기를,
"전 문학 임담이 훈련 도감에 부탁하여 끝내 체직되었으니, 그 정상이 얄밉습니다.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답하기를,
"특별히 회피를 도모한 일이 없으니 다시 소란스럽게 아뢰지 말라."
하였다.
전 부사 조희일(趙希逸)이 졸하였다. 희일은 승지 조원(趙瑗)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주가 있어 시(詩)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썼다. 일찍 과거에 합격하고 또 중시(重試)에 장원하였으며 호당(湖堂)의 선발에 들었다. 혼조(昏朝) 때에 이위경(李偉卿)에게 모함을 당하여 여러 해 동안 귀양을 살다가 인조 반정 후에 옥당(玉堂)을 거쳐 승지에 올랐다. 얼마되지 않아 시골에 살면서 삼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박정(朴炡)에게 탄핵을 당했는데 이로 인하여 세력을 잃어 청환(淸宦)의 길이 막혔다. 희일의 사람됨은 욕심이 많고 인색하며 또 재주를 믿고 거만스러운 습성이 있었기 때문에 끝내 이로써 낭패하였다. 최후에 참판을 지냈고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나갔다가 파직되고 귀향하여 졸하였다.
8월 21일 신해
귀화(歸化)한 사람의 자손 36명을 심양에 압송(押送)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이시영(李時英)을 인견할 때에, 종사관 전벽(田闢)과 허관(許灌) 중에서 한 사람을 데리고 가는 일을 참작하여 처리하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신들의 뜻으로는 종사관은 굳이 데리고 갈 필요가 없으며, 두 사람 중에서 시영이 마음대로 택하여 데리고 갔다가 의주(義州)에 도착해서 형세를 보아서 머물게 하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심양에 도착한 후에 돌려보내게 하라."
하였다.
홍문록(弘文錄)에 신유(申濡)·신익전(申翊全)·신면(申冕)·이도장(李道長)·이계(李烓)·이진(李𥘼)·양만용(梁曼容)·엄정구(嚴鼎耉)·유경창(柳慶昌)·박안제(朴安悌)·김시번(金始蕃)·임전(林)·김진(金振)·정지화(鄭知和)·허적(許積) 등 15인을 기록하였다.
8월 22일 임자
유성이 천진성(天津星) 위에서 나와 좌기성(左旗星) 아래로 들어갔다.
8월 23일 계축
조방장(助防將) 임경업(林慶業)이 군사 3백 명을 거느리고 구련성(九連城)에 도착해서 의주(義州)·선천(宣川)·곽산(郭山)·정주(定州)·가산(嘉山)에 명령을 전달하여 중군(中軍)으로 하여금 다섯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봉황성(鳳凰城)에 나아가게 했는데, 이는 청나라 사람의 질책을 풀려는 것이었다고 하였다.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참소하는 말은 예로부터 미워하는 바이지만 임금이 만약 명석하지 못하면 참소를 충언(忠言)으로 여길 것이니 이는 국가를 망치는 길이다."
하니, 목성선이 아뢰기를,
"비록 혹 참소인 줄 알았더라도 능히 제거하지 못하면 참소하는 말이 횡행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옛날 참소로써 국가를 망친 임금이 누구인가?"
하니, 성선이 아뢰기를,
"당 덕종(唐德宗)은 끝내 노기(盧杞)의 간사함을 알지 못하였고, 송 진종(宋眞宗)은 왕흠약(王欽若)의 말 한 마디로 구준(寇準)을 쫓아냈으니, 이것이 거울삼을 만합니다."
하였다. 남이공(南以恭)이 아뢰기를,
"진짜 소인은 늘 군자의 이름을 빌리므로 임금이 쉽게 살피지 못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른바 소인이란 용렬한 사람으로서는 능히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하자, 성선이 아뢰기를,
"임금이 마땅히 힘써 살필 바입니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남이공은 소인의 우두머리이다. 사론(士論)이 만약 행해진다면 마땅히 내쫓는 형벌로 처벌해야 하는데, 지금 최명길에게 아첨하여 이조 판서에 이르고 감히 군자 소인의 시비를 논하니, 어찌 이상하지 않은가.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믿을 만한 사람을 몰래 보내어 우리 나라가 부득이하여 군사 원조하는 상황을 진 도독(陳都督)에게 통고하게 하였다.
8월 25일 을묘
이덕형(李德泂)을 예조 판서로, 김집(金集)을 집의로 삼았다.
8월 26일 병진
유성이 누성(婁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다.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동지경연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주례(周禮)》에 흉년에 백성을 구제하는 12가지 일이 있는데, 하나는 세금을 탕감하는 것이고 하나는 길례(吉禮)를 간소화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일로 말하면 사재감(司宰監)의 말린 돼지 고기는 또한 큰 폐단이 되니, 해조로 하여금 임시로 삭감토록 하는 것이 온당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이에 의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8월 27일 정사
황해도 해주에 날벌레가 서쪽에서 나와 하늘에 꽉 차 있다가 동쪽을 향하여 날아갔다.
8월 29일 기미
전라도에 서리가 일찍 내려 곡식이 손상되니, 백성들 중에 떠돌아 흩어지는 자가 많았다.
상이 영남 좌도의 흉년이 가장 극심하다는 이유로 분수재(分數災)045) 를 주라고 명하니, 호조가 아뢰기를,
"이미 전재(全災)046) 를 주고 또 양전한 뒤의 묵밭도 면세해 주었으니, 국가에서 백성을 구제한 뜻이 두텁습니다. 분수재를 다시 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원주(原州) 사람 원호(元祜)가 살인범으로 구속되어, 곤장을 직접 때린 그의 종 태복(太福)을 정범(正犯)이라 하므로 여러 해를 판결하지 못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형조가 대신에게 의논하기를 청하였다. 좌의정 최명길과 우의정 신경진이 의논드리기를,
"신들이 전후 추안(推案)을 가져다 상고해 보니, 서울과 지방에서 옥사(獄事)를 의논한 것이 종종 놀랄 만합니다. 형조 참판 김대덕(金大德)의 말에는 ‘그 주인이 비록 지시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정범은 태복이다.’ 하였고, 강원 감사 심액(沈詻)의 장계에는 ‘원호가 비록 정범은 아니지만 이미 지시한 괴수이다. 그러나 그 형량이 얼마나 되는지 알지도 못하고 한결같이 형벌을 가하는 것은 옥사의 정상에 타당치 않다.’고 하였으니, 신들은 두 신하의 뜻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대저 이미 지시한 괴수라고 한다면 정범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미 타살하도록 하였는데 곤장을 집행한 종에게 죄를 돌린다면, 사족(士族)으로서 살인한 자는 모두 살인한 대가로 죽음을 당하지 않아 왕법(王法)이 다시는 시행되지 않을 것입니다. 일개 원호를 비호하여 후일 무궁한 폐단을 열어 놓았으니, 사정(私情)을 따라 법을 파괴함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또 장관이 출근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혼자 처치하였으니, 또한 전에 없었던 준례입니다. 모두 가증스럽습니다. 유독 판서 이명(李溟)이 회계(回啓)한 중에 말한 ‘괴수와 정범은 둘로 나눌 수 없다.’고 한 것이 옥사(獄事)의 정상에 맞는 것 같은데, 말단에 ‘살인한 중대한 옥사를 형조에서 마음대로 결정하지 못하겠다.’ 하고, 대신에게 의논하여 아뢸 것을 청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이상합니다.
국가의 기강이 한번 무너지자 유사가 멋대로 법을 악용하니, 이와 같은 것이 중지되지 않으면 아마도 국가를 다스릴 수 없을 것입니다. 형조 참판 김대덕과 강원 감사 심액을 아울러 파직시키고 판서 이명을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참찬관 홍득일(洪得一)이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막 영남에서 왔는데 좌도(左道)가 재앙을 입은 것이 더욱 심하여 처참한 상황을 차마 볼 수 없습니다. 경관(京官)을 보내어 구제에 전념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내가 일찍이 듣건대 경관을 보내는 것이 도리어 민폐가 있다고 한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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