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37권, 인조 16년 1638년 9월

싸라리리 2026. 1. 3.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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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경신

함경도에서 굶주림과 염병으로 사망한 백성이 4천 3백여 명이었다.

 

간원이 양남(兩南)과 호서(湖西)의 재앙을 더욱 혹심하게 당한 곳에 대해 묘당으로 하여금 다시 급진(給陳)하는 것을 의논하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황해도의 안악(安岳)·봉산(鳳山)·연안(延安) 등 고을에 지진이 일고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오리알만하였다.

 

9월 2일 신유

우레가 쳤다.

 

이현영(李顯英)을 지경연으로, 유성증(兪省曾)을 강원 감사로, 이명웅(李命雄)을 동부승지로, 유심(柳淰)을 교리로, 이계(李烓)를 수찬으로, 이도장(李道長)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9월 3일 임술

번개가 쳤다.

 

병조 참판 이경여(李敬輿)가 상소하기를,
"신이 일찍이 남한 산성에 있을 때, 전 판서 김상헌과 전 참판 정온이 거의 죽게 되었다가 다행히 살아나 죽으려 하다가 이루지 못한 정상을 목격하고는 마음으로 항상 애처롭게 여겼는데, 상헌을 배척하여 마치 편협한 소인을 공격하듯 하여 귀양보내자고 청할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아, 상헌의 일은 잘잘못을 논할 것도 없이, 2백 년 예의지방에 살면서 은혜를 입은 사람 중에 천조(天朝)를 위하여 의리를 지킨 자는 오직 이 두 신하 뿐인데, 또 잇따라 혹심하게 다스리면 무엇을 가지고 천하 후세에 변명하겠습니까. 금일 부득이한 조처는 종사를 위하고 백성을 위한 것이니, 다만 마땅히 뒷처리를 잘해야 할 뿐입니다. 두 신하의 일은 또한 각자의 의지일 뿐이고 국가의 영광으로 여겨야 할 만한 것인데, 무슨 임금의 허물을 드러낸 것이 있겠습니까. 근래 듣건대 상헌을 구원하는 자가 잇따라 죄를 받는다고 하니, 만약 구원하는 죄를 논한다면 신이 실로 첫번째입니다. 삼가 먼저 신의 죄를 바로잡아 망언하는 자의 경계를 삼으소서."
하니, 체차하라고 답하였다.
상고하건대, 관직 보존에 교묘한 자는 명예가 온전하지 못하고 명예를 따르는 자는 몸이 편하지 못하니, 능히 두 가지를 겸하여 소유하고도 모두 온전한 것은 대개 또한 어려운 일이다. 이경여는 사람됨이 민첩하고 재주가 있어 작은 일을 당하면 비록 권세와 부귀가 관련되었더라도 탄핵을 꺼리지 않고 큰일을 당하면 조짐을 살펴 일이 발생하기 전에 잘 피했는데, 알지 못하는 자는 강직한 신하라고 말하고 아는 자는 그래도 단정한 선비라고 한다. 상께서도 또한 함부로 하지 않고 업신여기지 않았으며 여러 차례 총애로 발탁하여 지위와 명망이 마침내 높고 혁혁한 데 이르렀다고 한다.

 

9월 4일 계해

번개가 쳤다. 유성이 천봉성(天棓星) 아래에서 나와 북두성(北斗星) 아래로 들어갔다.

 

9월 5일 갑자

유성이 성성(星星) 위에서 나와 옥정성(玉井星) 아래로 들어갔다.

 

9월 7일 병인

구성(龜城)·용천(龍川)·창성(昌城)·삭주(朔州) 등 12 개 고을에 우박이 내렸다.

 

9월 9일 무진

이계(李烓)를 장령으로, 유철(兪㯙)을 부교리로, 서상리(徐祥履)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9월 10일 기사

승문원이 아뢰기를,
"동지 성절사(冬至聖節使) 박미(朴瀰)의 자급(資級)이 숭덕 대부(崇德大夫)이니, 청나라의 연호(年號)를 범했습니다. 혹 방애되는 일이 있을까 염려되니, 문서 중에는 숭록 대부(崇祿大夫)로 고쳐 써서 보내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11일 경오

유성이 실성(室星) 아래에서 나와 좌기성(左旗星) 위로 들어갔고, 또 오거성(五車星) 위에서 나와 왕량성(王良星) 아래로 들어갔다.

 

9월 12일 신미

총독사(摠督使) 이시영(李時英)이 구련성(九連城)에 도착하였는데, 황해도 군사가 길에서 많이 도망쳤으므로 의주(義州)에서 입방(入防)하는 황해도 군사로 숫자를 채워가지고 갈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춘추관이 아뢰기를,
"태백산(太白山)의 사고(史庫)는 수목이 빽빽한 가운데에 있어서 해마다 산불 걱정이 있기 때문에 일찍이 선조(宣祖) 시대에 별도로 사목(事目)을 정하여 참봉 두 사람에게는 아울러 관료(官料)를 주고 중[僧]에게는 위토전[位田]을 떼어주어 관리하게 하였습니다. 그후 관리들이 사목을 준수하지 않아 참봉은 관료를 받지 못하게 되고 중은 위토전을 잃게 되었으니, 지금 마땅히 전례를 조사하여 관료와 위토전을 주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13일 임신

밤에 번개가 쳤다.

 

최혜길(崔惠吉)을 대사간으로, 홍보(洪靌)를 형조 판서로, 허적(許積)을 봉교로 삼았다.

 

9월 14일 계유

우레와 번개가 쳤고 우박이 내렸다.

 

영해(寧海) 토민(土民)이 수령을 모함하니, 잡아다 국문하고 정배(定配)하였다.

 

전 예조 판서 한여직(韓汝溭)이 졸하니, 상이 복직(復職)시키라고 명하였다. 여직은 사람됨이 솔직 성실하고 질박하였는데, 시세를 따라 벼슬을 취하여 공경(公卿)에 이르니, 비방하는 사람이 많았다.

 

9월 15일 갑술

헌부가 아뢰기를,
"충청 병사 유정익(柳廷益)이 화약[焰硝]을 굽는다고 핑계하고 중들을 소집하여 해미 향교(海美鄕校) 뒷산의 나무를 베어, 도끼와 징 소리가 문묘[聖廟]를 소란스럽게 하자 선비들이 모여서 통곡한다고 합니다. 그 실정을 보고 듣는 사람들 모두가 몹시 놀라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사판에서 삭제하고 영원히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 말은 실정 밖의 말인 듯하니 다시 상세히 살펴 논하라."
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호조 판서 심열(沈悅)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심열은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의 후손이다. 일찍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였고 여러 번 큰 변방 고을을 맡아 많은 공적이 있었다. 혼조(昏朝) 때에 폐모(廢母)하는 일로 정청(庭請)할 때를 당해서는 화(禍)를 두려워하여 따라서 참여하였다. 반정한 뒤에 명민하고 관리로서의 재질이 뛰어남을 인정받아 지난날의 잘못을 깨끗이 씻어주고 발탁하여 마침내 호조 판서가 되어 유능하다는 명성이 있었다. 그러나 이 때에 이르러 갑자기 정승 자리에 오르니, 사람들이 불만스럽게 여겼다.

 

9월 16일 을해

영의정 최명길과 좌의정 신경진이 아뢰기를,
"이때 호조 판서는 심열과 같은 자를 얻기 어려우니, 이처럼 위급한 때를 당하여 사람 쓰는 데 평상시의 준례에 구애받을 수는 없습니다. 옛날에 방현령(房玄齡)이 정승이 되어, 탁지(度支)의 장관으로서 적합한 사람을 얻지 못하자 자신이 관리하였고, 본조(本朝)의 대신도 이조 판서와 병조 판서를 겸직한 자가 있었는데, 호조에 이르러서만 어찌 유독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까. 심열로 하여금 그대로 겸직하게 하는 것이 온당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17일 병자

우의정 심열이 상소하기를,
"신은 큰 잘못이 있어 결코 큰 직임을 감당할 수 없으니, 바로 정청(庭請)에 따라 참여한 죄가 그것입니다. 비록 성은을 내려 지난날의 잘못을 깨끗이 씻어주셨지만 마치 기름이 옷에 묻은 것과 같아서 빨수록 더욱 더러워지니, 신의 마음이 항상 스스로 부끄러울 뿐만 아니라 공론이 몹시 준엄하여 오랠수록 더욱 격렬합니다. 신이 7, 8년 동안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추며 감히 얼굴을 들고 큰 길에 나아가지 못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삼공(三公)의 직책은 백관들의 우두머리이니 죄를 진 사람이 있기에는 마땅치 않습니다.
또 우리 나라에 정승을 삼는 규정은 스스로 단계가 있어 이조와 병조를 경유하지 않고 직접 정승이 된 자는 절대로 없었고 있어도 겨우 한둘에 불과한데, 신처럼 불초한 자는 청선(淸選)에 들지도 못했으니 공론이 좋아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공론에 용납되지 않고 갑자기 정승에 오르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빨리 체직의 명을 내리소서."
하니, 상이 온화한 말로 효유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9월 18일 정축

우레와 번개가 쳤다.

 

이시영(李時英)·유림(柳琳)·임경업(林慶業) 등이 송산참(松山站)에 있으면서 치계하였다.
"신들이 봉황성(鳳凰城)에 도착하니 마부달(馬夫達) 등이 나와서 힐책하고, 또 진주(陳奏)하도록 주장한 자가 누구냐고 물었으며 ‘너희 나라 군사는 이제 쓸 데가 없으니, 도로 거느리고 가라. 근일에 사관(査官)을 보낼 것이다.’ 하였습니다."

 

비국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평안 감사 민성휘(閔聖徽)의 장계를 보니, 앞 진영의 군사가 빨리 전진하지 못한 것은 실로 도로가 진흙탕이고 강물이 넘쳤기 때문입니다. 이시영 등이 만약 재촉하여 만상(灣上)으로 나아가 도착하는 대로 즉시 보냈으면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인데, 강 사이에서 머물러 모두 다 건너기를 앉아서 기다렸습니다. 거절을 당한 뒤에 이르러서도 또한 강가에 주둔해 있으면서 조정에 품의하여 명령을 받은 뒤에 진퇴(進退)해야 하는데도, 마부달의 말을 한번 듣고 즉시 군사를 해산시켰으니, 군율(軍律)로 헤아려 보건대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이시영·유림을 잡아다 국문하여 처치하소서. 임경업은 현재 도내(道內)에 있고 또 군사의 실정을 잘 알고 있으니 병사(兵使)로 삼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곧바로 유림을 대신하게 할 수 없으니, 해조로 하여금 준례에 의해 차출하게 하라."
하였다.

 

최명길 등을 보내어 심양에 들어가게 하였다.

 

9월 19일 무인

경기 강화(江華)·광주(廣州)·남양(南陽) 등 7개 고을에 우레와 번개가 쳤고 우박이 내렸다.

 

전라 감사 구봉서(具鳳瑞)가 치계하였다.
"본도(本道)가 한번 재앙을 입은 뒤로 곤궁한 백성들이 궁벽한 요해처(要害處)에 흩어져 살며 재물을 겁탈하고 사람을 죽이는 변고가 있으니, 불러 모아 떼를 이룰까 참으로 염려됩니다. 그런데 병사(兵使)는 남쪽 해변에 있어 두루 살피기 어려운 형편이니, 전주 부윤(全州府尹) 한흥일(韓興一)과 광주 목사(光州牧使) 이후원(李厚源)으로 토포사(討捕使)를 삼아 계책을 써서 잡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임전(林)를 수찬으로, 임경업을 평안 병사로 삼았다.

 

9월 20일 기묘

정태화(鄭太和)를 사관 접반사(査官接伴使)로 삼았다. 태화가 하직하니 상이 불러 접견하고 이르기를,
"마땅히 묻는 것에 따라 말을 잘 만들어 대답하라. 그리고 말하는 바의 일이 이미 전일의 규정에 있는 것이면 따르지 않을 수 없겠으나, 전일에 없었던 일이라면 새로 만들지 말라."
하였다. 이어서 하직하는 수령과 변장(邊將)을 불러 접견하였다.

 

9월 21일 경진

유성이 오거성(五車星) 위에서 나와 북쪽으로 들어갔다.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윤이지(尹履之)를 도승지로, 정시망(鄭時望)을 장령으로, 윤강(尹絳)·김진(金振)을 교리로, 유영(柳潁)을 이조 좌랑으로, 홍명일(洪命一)을 집의로 삼았다.

 

승지를 보내어 우의정 심열에게 돈유(敦諭)하였다.

 

9월 22일 신사

함경도와 평안도의 여러 고을에 천둥이 치고 우박이 내렸다.

 

예조가 아뢰기를,
"근래 관상감(觀象監) 관원이 기상 관측을 함부로 하여 밤이 깊은 후에는 비록 천변(天變)이 있어도 전혀 보고하지 아니하니, 혼미(昏迷)한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고신(告身)을 빼앗고 장형(杖刑)을 집행하라고 명하였다.

 

9월 24일 계미

어사 정치화·목성선·이계를 보내어 충청도·경상도·전라도 등을 암행하게 하였다.

 

신익전(申翊全)·이도장(李道長)을 지평으로, 김응조(金應祖)를 헌납으로, 엄정구(嚴鼎耉)를 정언으로, 조수익(趙壽益)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또 승지를 보내어 우의정 심열에게 돈유(敦諭)하였다.

 

함경남도 병마 절도사 이완(李浣)이 치계하기를,
"혜산 첨사(惠山僉使) 지건기(池建沂)와 운룡 만호(雲龍萬戶) 남두일(南斗一)이 국가의 법을 어기고 세금을 삼(蔘)으로 징수하는 것을 이롭게 여겨 삼 캐는 군사를 몰래 강을 건너가게 하였다가 혹은 빙설(氷雪)에 얼어죽고 혹은 청나라 사람에게 납치되었는데, 숨기고 보고하지 않았으니, 조정에서 처치하소서."
하였다. 비국이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주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9월 25일 갑신

햇무리가 지고 양이(兩珥)가 있었다. 햇무리 위에 배(背)가 있었고 한 길쯤 되는 흰 기운이 북쪽을 가리켰다. 밤에 번개가 쳤다.

 

우의정 심열(沈悅)이 상차하기를,
"지난날 대신이 신에게 호조 판서를 겸직시키자고 청하였는데, 이는 행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 나라의 일로 말하면 대신이 육경(六卿)을 겸하는 것은 이조와 병조 및 예조에 불과하고, 모두 실판서(實判書)가 있으면서, 대신이 겸하여 통솔하고 총괄하여 살필 뿐입니다. 신숙주(申叔舟)가 예조를, 박순(朴淳)이 병조를, 유성룡(柳成龍)이 이조를 겸임하였던 것도 모두 실판서가 있으면서 이 세 사람이 겸직하였습니다. 이 삼조(三曹)의 업무는 인물을 진퇴(進退)시키고 예의와 군정(軍政)을 맡아보는 데 불과하지만, 호조는 그렇지 않아 쌓인 안건이 책상에 가득하고, 전곡(錢穀) 출납 문서는 미세한 몇 되 몇 홉 몇 자 몇 촌까지 모두 판서에게 결재를 받아야 합니다. 신이 비록 불초하지만 이미 대신의 반열에 끼었으니 어찌 자질구레한 업무를 관장하여 체통을 손상시킬 수 있겠습니까. 삼가 간섭하여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하는 걱정을 깊이 생각하시고 불편한 상황을 통찰하시어 신의 겸직을 체직시키고, 특별히 실판서를 차출하여 그로 하여금 전념하여 임무를 살피게 하여 국가의 체통을 보존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지금 겸직하게 한 조처는 인재를 구하기 어려운 데서 나온 것이니 일이 비록 구차하지만 편리에 따라 지휘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재차 차자를 올려 실판서를 차출하기를 청하니, 상이 대신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전곡(錢穀) 출납의 번거로운 업무를 전적으로 정승에게 맡기는 것은 체통에 해로움이 있으니 실판서를 차출하고, 정승에게 겸하여 영솔하게 하면 옛 준례에 어긋나지 않고 사체에 구애됨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26일 을유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래 국가의 기강이 해이해져 정원(政院)에서 정사(呈辭)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즉시 또 상소를 올리는데, 그 습관을 고칠 수 없다. 대대로 벼슬하는 신하가 이처럼 위급한 때를 당하여 각자 마음을 다하면 그 폐단을 고칠 수 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도리어 앞장서서 물러가는 것을 고상하게 여겨 백이(伯夷)·숙제(叔齊)처럼 하려 하니, 국가의 일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참찬관 윤이지(尹履之)가 아뢰기를,
"직책이 있으면서 사직하고 외방에 있는 자는 그 직책을 해임하고 직책이 없으면서 지방에 있는 자는 의망(擬望)하지 않으면 아마도 오늘날의 폐단을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동지경연 이경석이 아뢰기를,
"한번 위급해진 뒤로 신하는 떠나갈 의리가 없으나 혹 부모의 병이 있으면 사정상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현재 가장 명망이 있는 사람을 등용하고 어질고 간사한 자를 분별하여 취사(取舍)를 분명히 하면 조정에 어질고 유능한 자가 스스로 나올 것입니다. 또 외방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또한 어찌 쓸 만하고 어진 자가 없겠습니까. 획일적인 법으로 그들을 구속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그러나 또 그렇지 않은 자가 있다. 벼슬하기를 즐겨하지 않는 자는 반드시 후환을 생각하여 그런 것이니, 의망(擬望)하지 말아 그들로 하여금 각각 그 뜻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 마땅한데, 하필 그들을 청현(淸顯)에 의망하여 명예를 구하려 한다는 비방을 받게 하겠는가."
하였다. 경석이 아뢰기를,
"김상헌과 정온 같은 자로 말하면 예로부터 이와 같은 사람이 있었으나, 지금 물러가는 자는 능히 두 사람의 지개(志槪)를 배우지 못하고 다만 물러간다는 이름만을 본받아 이처럼 어려운 시기를 당하여 금방 왔다가 갔다가 하니, 어찌 오늘날 통척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국가에서 장차 원통한 옥사(獄事)를 심리하려고 하니, 만약 혹 한 사람이라도 억울함을 품고 있다면 자못 심리하는 뜻에 어긋납니다. 조익(趙翼)의 사람됨은 평생 옛날 훌륭한 분을 배우고 조심(操心)하였는데, 지금 논하는 자가 그 사람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그 당시의 형세를 논하지 않으며, 임금을 잊고 국가를 저버렸다는 것으로 억지로 죄명을 씌워 중한 형벌로 논하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도 또한 그 사람됨을 알아 항상 우대하였다. 그러나 지난번의 처사는 실로 근거가 없으니, 벌을 주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경석이 아뢰기를,
"심지원(沈之源)으로 말하면 이미 직책이 없는데 그 노모(老母)를 버렸다면 사람들이 무어라 했겠습니까. 그 사람됨은 만에 하나도 구차스럽게 살려고 했을 리가 없었을 것이니, 또한 마땅히 심리하는 속에 넣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9월 27일 병술

이명(李溟)을 호조 판서로, 김광혁(金光爀)을 집의로 삼았다.

 

충청 감사 김육(金堉)이 치계하기를,
"선혜청(宣惠廳)의 대동법(大同法)은 실로 백성을 구제하는 데 절실합니다. 경기와 강원도에 이미 시행하였으니 본도(本道)에 무슨 행하기 어려울 리가 있겠습니까. 신이 도내(道內) 결부(結負)의 수를 모두 계산해 보건대, 매결(每結)마다 각각 면포(綿布) 1필과 쌀 2말씩 내면 진상하는 공물(貢物)의 값과 본도의 잡역(雜役)인 전선(戰船), 쇄마(刷馬) 및 관청에 바치는 물건이 모두 그 속에 포함되어도 오히려 남는 것이 수만입니다. 지난날 권반(權盼)이 감사가 되었을 때에 도내의 수령들과 더불어 이 법을 시행하려고 하다가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만약 시행하면 백성 한 사람도 괴롭히지 않고 번거롭게 호령도 하지 않으며 면포 1필과 쌀 2말 이외에 다시 징수하는 명목도 없을 것이니, 지금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방법은 이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이 상정(詳定)047)  은 바로 고(故) 신 권반이 일찍이 상세하게 만든 것인데 미처 시행하지 못하였으니, 식자들이 지금까지 한스럽게 여깁니다. 만약 지금 시행한다면 공사(公私) 양편 모두가 이로울 것이고 서울과 지방이 모두 편리할 것이니, 해조로 하여금 낱낱이 상고하여 결정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윤허한다고 답하였다.

 

9월 28일 정해

유성이 왕량성(王良星) 위에서 나와 헌원성(軒轅星) 아래로 들어갔다.

 

헌부가 아뢰기를,
"장령 정시망(鄭時望)은 일찍이 출신(出身)할 때 폐조 때의 가자(加資)를 제출하려고 꾀하였고, 북청 판관(北靑判官)이 되어서는 장죄(贓罪)를 범하여 형벌까지 받았습니다. 겨우 수년이 지나 갑자기 풍헌(風憲)의 직책을 제수하니, 하인과 천한 무리들도 더럽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체차를 명하소서.
낭관(郞官)이 멋대로 하는 폐단이 이미 고질이 되었으므로 성상께서 기필코 고치려고 하는데, 사(私)를 따르고 공(公)을 멸하는 것이 갈수록 더욱 심합니다. 정시망은 일개 탐관오리인데 갑자기 장령의 직책을 제수하였고, 금교 찰방(金郊察訪) 민광훈(閔光勳)은 바로 그의 매부인데 상피(相避)를 따지지 않고 규정 외로 체직을 청하였으며, 허한(許僩)은 바로 그의 외삼촌인데 예천(醴泉)의 임기가 다된 것을 미리 알고 상피에 구애될까 염려하여 정순(呈旬)048)  으로 체직을 꾀하여 그 사욕을 이루었습니다. 잠시 들어왔다가 금방 나간 정상을 숨기기 어려운데, 당상관은 태만스레 가부를 논하지 않고 낭관이 하는 대로 놓아두었으니, 이조 좌랑 이도(李禂)를 파직시키고 당상관을 아울러 추고하라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간원이 아뢰기를,
"혼인한 집안과 상피(相避)하는 것은 법전에 실려 있습니다. 병조 판서 이시백(李時白)이 조익(趙翼)을 위하여 신원(伸冤)한 상소는, 말을 구사하는 중에 성을 낸 잘못 뿐만 아니라 인척의 혐의를 피하지 않고 구원하려는 글을 무턱대고 진술하였으니 외람된 잘못을 면치 못합니다. 추고하라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29일 무자

유성이 유성(柳星) 위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고, 또 구진성(鉤陳星) 위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다.

 

금부가 아뢰기를,
"김자점(金自點)이 위리(圍籬) 중에 있다가 병이 나자 내의(內醫)를 보내어 병을 간호하게 하였으니, 이는 일시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그러나 범한 죄가 가볍지 않으므로 위리를 아래에서 감히 마음대로 열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가시 울타리를 철거하여 죽음을 면하게 하라."
하였다.

 

9월 30일 기축

천둥과 번개가 쳤다.

 

유성이 유성(柳星) 아래에서 나와 필성(畢星) 위로 들어갔다.

 

대신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예조의 계사(啓辭)를 보건대 문묘 알성(文廟謁聖)이 다음달 13일로 택일되었습니다. 서울로 돌아오신 후에 국가가 일이 많고 또 성후(聖候)가 미령하여 아직 성묘(聖廟) 참배하는 예를 거행하지 못하였으니, 궐례(闕禮)인 듯하나 까닭없이 폐한 것은 아닙니다. 상께서 연신(筵臣)들의 요청을 따랐으니, 뜻이 매우 훌륭합니다. 다만 금년에는 일찍 추워져서 다음달 열흘 후에는 일기가 반드시 몹시 추울 것입니다. 근래 옥후(玉候)를 살펴보건대 오래 정상으로 회복되지 않았고 지난번 또 감기 증세가 심하였는데 만약 이때에 밤 기운을 무릅쓰고 예를 거행하면 반드시 더 심해질 것입니다.
또 임금이 성균관에 거둥하여 시취(試取)를 돌아보는 것은 바로 사문(斯文)의 대례(大禮)인데, 미처 지방에 알리지 않고 다만 성균관에 있는 유생들만 강독하게 한다면 사방의 많은 선비들이 교문(橋門)을 둘러싸고 바라보는 성대한 의식이 아닌 듯합니다. 내년 봄 일기가 화창하고 따뜻해지는 것을 기다려 서울과 지방 유생을 모두 소집하여 예를 거행하고 시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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