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경인
유성이 벽성(壁星) 위에서 나와 남쪽으로 들어갔고 헌원성(軒轅星) 위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고 장성(張星) 위에서 나와 동쪽으로 들어갔다.
10월 2일 신묘
병조 판서 이시백이 상소하기를,
"삼가 간원의 계사를 보건대 신이 죄에 빠진 사람을 구원한다고 하였으니, 신이 변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른바 영구(營救)란 바로 명백히 법을 범하여 사면하지 못할 죄가 있는데도 공론을 돌아보지 않고 간곡히 그를 위하여 사사로이 두호하는 것인데, 지금 신이 조익을 구원한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조익의 평생 훌륭한 행동은 사람들이 우러러 사모하는 바이고, 병자년049) 의 낭패는 비록 불행한 사세로 연유한 것이지만 실로 지극한 충효에서 나온 것인데, 신이 영구한다고 하면 또한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유석(柳碩)은 일찍이 개성 경력(開城經歷)이 되어 장죄(贓罪)를 범한 일이 있어 유수(留守) 정두원(鄭斗源)에게 발각되었으나, 그의 중죄를 들추어내지 않아 사람들의 비방이 자자합니다. 어찌 이 사람이 대간의 반열에 끼어 시기를 틈타 터무니없는 말을 만들어 이토록 남을 모함할 줄 알았겠습니까. 신이 항상 울분을 품어 스스로 성내게 되는 것을 깨닫지 못하겠으니, 삼가 빨리 신을 체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정경(正卿)의 지위가 작은 것이 아니고 60의 나이가 어린 것이 아니니, 사직하려는 뜻이 있으면 체직을 청하면 될 뿐이다. 하필 이처럼 어린 아이와 같은 짓을 하여 국가의 체통을 손상시키는가. 아름답지 않은 일인 듯하니, 이 상소를 도로 내주어라."
하였다.
이조 판서 남이공(南以恭)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거듭 대간의 비평을 받았고 낭관이 멋대로 한다고 탄핵을 당했으니, 신은 실로 그 이유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정시망은 폐조(廢朝) 때의 선비로서 폐모(廢母)의 의논을 앞장서서 공박하여 10년 동안 정삭(停削)되었고 과거에 합격한 초기에 대가(代加)050) 를 쓰지 않아 당상관에 오르지 못하였습니다. 북청 판관(北靑判官)에 임명되어서는 좋아하지 않는 자에게 모함을 당하였으나 끝내 그런 사실이 없었으니, 장리(贓吏)로 지목하는 것은 너무 터무니없는 듯합니다. 더구나 민광훈(閔光勳)을 체직한 것은 그의 친병(親病)이 위급함을 명백히 알았기 때문이고 허한(許僩)을 군수로 삼은 것은 다만 그의 치적(治績)이 현저함을 취한 것이니, 체직시키고 임명한 것이 준례를 따른 것에 불과한데, 이로써 낭관의 죄목을 삼을 줄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장관의 몸이 되어 감히 혼자 죄를 면하지 못하겠으니, 신을 체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삼가 남이공의 상소를 상고해 보니 감싸주고 구원하는 작태가 극심하다고 할 수 있다. 정시망은 출신(出身)할 때 당상으로 승급하기를 도모하여 폐조 때의 가자를 무릅쓰고 제출했다가 끝내 드러났음이 명백하여 숨길 수 없는데, 남이공이 편벽되게 비호하고 말을 뒤집어 성상을 속이니, 그 방자한 행동과 기탄없는 마음을 더욱 볼 수 있다. 탄핵한 일이 전적으로 낭관 때문에 한 것이 아닌데, 이공이 말을 꾸며 상소하고 그대로 인사를 맡은 자리를 점거하고 있으니 전혀 염치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좌의정 신경진과 우의정 심열 등이 상차하여 빨리 왕비를 책봉(冊封)하는 예를 거행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3일 임진
상이 서총대(瑞葱臺)에 나아가 몸소 무사(武士)를 시험하고는, 포를 쏘아 1등한 자는 당상관으로 승급시켰고 그 다음은 변방 장수로 임명하였고, 그 나머지는 말[馬]과 면포(綿布)로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10월 5일 갑오
밤에 번개가 쳤다. 강원도 양양(襄陽)에 광풍(狂風)이 크게 일어 모래가 날리고 돌이 굴렀다. 횡성(橫城)에 많은 우박이 내렸다.
가례 도감(嘉禮都監)을 설치하였다.
김세렴(金世濂)을 대사간으로, 홍명일(洪命一)을 사간으로, 이여익(李汝翊)을 장령으로, 신유(申濡)를 지평으로, 박수문(朴守文)을 정언으로, 이현영(李顯英)을 예조 판서 겸 지경연으로, 신익전(申翊全)을 수찬으로 삼았다.
비국이 아뢰기를,
"양남(兩南)의 토포사(討捕使)는 이미 차출하였지만 호서(湖西)도 또한 도적 발생의 걱정이 없지 않으니, 본도의 감사로 하여금 골라 임명하게 하소서. 경기는 광주 부윤(廣州府尹)이 이 임무를 예겸(例兼)하니, 계책을 써서 모두 잡게 하여, 점차 불어나는 걱정이 없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하교하였다.
"형벌이란 다스림을 보조하는 도구이니, 비록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지만 또한 전혀 그 실정이 없을 수는 없다. 근래 금부가 가벼운 형벌을 사용하여 욕심 많고 완악한 무리들로 하여금 조금도 징계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게 하니, 몹시 놀라운 일이다. 해당 당상관을 파직시키고 담당 낭청을 잡아다 국문하여 법을 멸시하고 사정(私情)을 따른 죄를 다스리라."
10월 8일 정유
우박이 내렸다.
10월 9일 무술
유성이 대각성(大角星) 아래에서 나와 진성(軫星) 위로 들어갔다.
예조가 아뢰기를,
"육례(六禮)051) 를 치를 때 상의 관복(冠服)은 마땅히 예문대로 하지만 백관(百官)은 모두 조복(朝服)을 입고 집사(執事)는 혹 공복(公服)을 사용해야 하는데, 지금 조복과 공복을 갑자기 준비하기는 어려울 것이니 정사(正使)와 부사(副使) 이외에는 모두 흑단령(黑團領)을 입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난리를 겪은 후 크고 작은 거둥에 모두 악부(樂部)를 폐하였으나 지금 이 가례(嘉禮)는 다른 예와 다르니, 예문에 의해 진설하되 연주하지는 마소서."
하니, 답하기를,
"준비하는 데 폐단이 있으니 설치하지 말라."
하였다.
장령 이여익과 지평 이도장이 아뢰기를,
"남한 산성에서 나올 때 적의 실정을 헤아리기 어려워 일의 기미를 예측할 수 없었고 몹시 절박하고 위태로워 어쩔 줄 모르고 허둥지둥하였습니다. 그런데 전 판서 김상헌은 병을 핑계하고 억지로 누워서 끝내 호종하지 않고 북문(北門)을 뛰어 나오면서도 터럭만큼도 임금을 생각하는 마음이 없었으며, 호종한 공로로 상을 주자 본 즉시 봉한 채 그대로 돌려보내 더러운 물건 보듯 하였습니다. 세자께서 이역(異域)으로 행차하는 것이 이미 성(城)에 있을 때 결정되었고 빈객(賓客)의 직책에 있었으니 분수와 의리가 더욱 중한데, 당초부터 따라갈 뜻이 없었고 끝내는 배송(拜送)하는 예의까지 하지 않았으니 따라가기를 청한 송나라 사람 손부(孫傅)와 어쩌면 그리도 상반됩니까. 이러한 것을 다스리지 않으면 장차 후세에 시비를 밝힐 방법이 없으니, 중도 부처(中道付處)하소서. 신하가 임금을 섬기다가 위태로움을 당하면 목숨을 바쳐야지, 떠나가는 의리는 없습니다. 전 참판 정온은 자신을 칼로 찔렀으나 죽지 않았습니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여 비록 성을 나올 때에 호종하지는 못했더라도 병이 나은 뒤에는 의당 찾아와 문안을 해야 하는데, 곧장 귀향하여 이미 임금을 잊지 못하는 뜻이 없었고 그 이름을 깨끗이 하려고 분수와 의리의 중함을 생각하지 않았으니,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대로 두는 것이 옳으니, 굳이 벌을 줄 필요가 없다."
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자,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다.
상고해 보건대 두 신하가 난리를 당하여 대처한 것은 시비(是非)가 똑같은데, 논하는 자가 한 사람에게는 중도 부처(中道付處)를 청하고 한 사람에게는 파직을 청하였다. 대저 정온을 아울러 논한 것은 공론을 핑계하여 김상헌을 모함하는 효시(嚆矢)로 삼으려고 한 것인데 형벌을 적용시킬 때에는 현저하게 다르니, 파당을 동조하고 뜻이 다른 자를 배척하는 작태를 숨길 수 없다.
10월 10일 기해
유성이 묘성(昴星) 위에서 나와 우경성(右梗星) 아래로 들어갔다.
가례 도감(嘉禮都監)이 태평관(太平館)을 미리 수리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수리하는 것은 폐단이 있으니, 별궁(別宮)에서 거행하라."
하였다. 다시 아뢰기를,
"친영례(親迎禮)는 예로부터 반드시 태평관에서 거행하였으니, 이는 그 일을 중하게 여긴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지금 만약 별궁에서 거행하면 소홀하고 간략한 혐의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태평관은 방치하여 형편이 없으니 수리하는 폐단은 참으로 성상의 하교와 같겠지만 옛 규례로 말하자면 일시 폐단을 끼치는 것은 따질 겨를이 없습니다. 태평관은 잠시 행례(行禮)하는 곳에 불과하니, 편의에 따라 수리하여 옛날대로 시행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폐단을 없애는 것이 중대하니 소홀하고 간략한 혐의는 굳이 구애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충청도 암행 어사 정치화(鄭致和)의 서계(書啓)로 인하여 청주 목사(淸州牧使) 홍입(洪雴)과 연산 현감(連山縣監) 김충엄(金忠淹)과 온양 군수(溫陽郡守) 장우한(張遇漢)을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다.
10월 11일 경자
유성이 익성(翼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으로 들어갔다.
오단(吳端)을 동부승지로, 권도(權濤)를 집의로, 김반(金槃)을 대사헌으로, 최혜길(崔惠吉)을 대사간으로, 서상리(徐祥履)를 장령으로, 구굉(具宏)을 판의금으로 삼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오례의(五禮儀)》를 상고해 보건대 다만 사자(使者)를 명하여 받들어 맞이하는 예만 실려 있고 친영(親迎)하는 절차는 기록되지 않았으니, 생각건대 《오례의》를 찬집(撰集)한 뒤에 비로소 삼대(三代)의 법을 회복해서 그러한 듯합니다. 비록 왕세자(王世子)가 친영하는 절목(節目)을 모방하여 거행하려고 하나 존비(尊卑)의 예절이 반드시 현저하게 다를 것이고, 선왕께서 이미 시행한 예절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또한 몹시 미안한 일입니다. 지난번 가례를 인하여 이미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실록(實錄)》을 상고하여 뽑아내게 하였는데, 또한 등초하여 오지 않았습니다. 역대 《실록》은 상세하고 소략함이 같지 않아 임인년052) 의 《실록》 중에 혹은 원래 기록하지 않았거나 혹은 기록된 것이 있으나 평상적인 예라 하여 등초해 오지 않은 것입니다. 막중한 예를 구차하고 간략하게 할 수 없으니, 다시 춘추관으로 하여금 역대(歷代) 친영하던 의식을 자세히 상고하여 등초해 오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헌부가 아뢰기를,
"부수찬 신익전(申翊全)은 일찍이 병조 좌랑이 되어서 역졸(驛卒)을 마구 때려 죽였는데, 홍문관 부수찬에 제수되자 버젓이 출근하여 아직 허물을 인혐하지 않았으니, 법을 멸시하고 멋대로 하는 짓은 참으로 몹시 놀랍습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추고하라고 답하였다.
10월 12일 신축
유성이 필성(畢星) 위에서 나와 삼성(參星) 아래로 들어갔다.
10월 13일 임인
집의 권도가 원의석[完席]에서, 신익전이 범한 바는 잡아다 국문해야 하는데 다만 파직을 청하였고 또 즉시 정계(停啓)한 것은 잘못이었다고 하니, 지평 이도장(李道長)·신유(申濡)와 장령 이여익(李汝翊)이 이를 이유로 인피하고 권도 또한 인피하였다. 장령 서상리가 인피하기를,
"전하께서 김상헌과 정온을 벌주지 않은 것은 바로 만물을 포용하는 천지의 도량이니, 성세(聖世)의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도장 등이 이미 정지된 의논을 다시 꺼내어 하나의 기화(奇貨)로 만들어 남을 모함하는 도구로 삼았으니, 어쩌면 그리도 심합니까. 전에 발론하였을 때에는 장관이 따르지 않았고 후에 발론하였을 때에는 장관을 체직시켰는데 또 꺼내니, 공정치 않은 마음씀과 두 마음을 가진 인심을 이 또한 볼 수 있습니다. 신은 구차하게 한 자리에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또 신익전이 곤장 수십 대를 친 것은 원래 지나친 형벌이 아니고 수십 일 뒤에 병으로 죽었으니 또한 곤장을 맞아 운명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연히 죽은 것은 법에 있어서 거론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여론이 그르다고 하지 않았으니, 비록 대간이라 하더라도 피할 만한 혐의가 없습니다. 지금 수개월이 지났는데 죄안(罪案)을 구성하여 멋대로 배척하니, 아, 또한 이상합니다. 지난날 신이 신익전과 더불어 권력을 멋대로 부리는 전랑(銓郞)과 부정하게 재물을 탐하는 대간을 【 바로 이도(李禂)와 정시망(鄭時望)이다.】 함께 논계하여 한 무리의 노여움을 크게 거슬렀습니다. 며칠이 되지 않아 놀라운 일이 갑자기 일어나니 세도(世道)가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 일을 같이한 사람이 이미 기구한 죄를 당했으니 신이 그대로 재직할 수 없습니다. 신을 파직시키소서."
하였다. 간원이 【 정언 엄정구(嚴鼎耉)·박수문(朴守文).】 처치하기를,
"살인한 죄를 멋대로 결정하여 다만 파직을 청하였으니 체통을 잃은 것입니다. 법을 지키려면 지론(持論)이 엄정해야 하는데 공론이 무성한데도 의견을 고집하고, 곤장을 맞아 죽은 것이 명백한데도 구원하기를 어지럽게 하였으며, 기구한 죄를 당했다는 등의 말은 용의(用意)가 교활하고 참혹합니다. 이도장·신유·이여익·서상리는 체차하고 권도는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특진관 최연(崔葕)과 참찬관 오단(吳端)과 검토관 조수익(趙壽益)이 모두 양남(兩南)의 흉년든 상황을 아뢰니, 상이 일렀다.
"해조로 하여금 백성 진휼하는 대책을 강구하게 하라."
예조가 아뢰기를,
"난리를 겪은 이후로 각릉(各陵)의 제기(祭器)와 잡물(雜物)이 혹은 없어지고 혹은 파손되었으며, 정자각 재실(丁字閣齋室)이 또한 많이 파괴되었으므로 여러 능관(陵官)이 매번 개비(改備)하자고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재력이 탕진된 때를 당하여 각능의 허다한 그릇을 일시에 개비할 수 없으므로 그중 불가불 개비해야 할 것을 해조에 이문(移文)하였는데 또한 거행하지 않으니, 낭청을 보내어 각능의 그릇 및 정자각 수리할 곳을 살피고 오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15일 갑진
유성이 천진성(天津星) 아래에서 나와 천봉성(天棓星) 위로 들어갔다.
10월 16일 을사
유성이 유성(柳星) 위에서 나와 삼성(參星) 아래로 들어갔다.
헌부가 아뢰기를,
"살인한 죄가 있으면 목숨으로 보상하는 이외에 다시 다른 법은 없습니다. 종실(宗室) 해평군(海平君) 이길(李佶)이 대낮에 도회지에서 사람을 죽이고 그 아내를 빼앗았는데, 난타하여 죽인 참상과 핍박하여 공공연히 음난한 짓을 한 상황은 길 가는 자들도 차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실로 백 년 이래 없었던 큰 변고이니, 비록 천자의 아버지라 하여도 형을 집행할 뿐인데, 종척(宗戚)의 근친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부수찬 신익전은 일찍이 병조 좌랑이 되어 역졸(驛卒)을 마구 때려 죽게 하였습니다. 비록 관하(管下)라고 하더라도 그에 해당한 형벌이 있는데 홍문관 부수찬에 임명되자 버젓이 출사하여 한 번도 인책하지 않으니, 법을 멸시하고 멋대로 방자한 작태가 매우 심합니다. 아울러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자 상이 따랐다.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이경석(李景奭)이 나아가 아뢰기를,
"가례에 사용할 사치스러운 물건을 상께서 이미 감손하라고 하교하셨으니, 뜻이 매우 훌륭합니다. 이 또한 신민들이 보고 느껴야 할 것인데, 지금 천재(天災)가 몰려와서 백성들이 장차 굶어죽게 되었는데도 여염에서는 사치가 날로 심합니다. 지금 이 대례(大禮)는 실로 중흥(中興)의 근본이니, 상께서 더욱 절약하고 감손하여 징계하고 삼가는 뜻을 보여준 뒤라야 위로 하늘의 마음에 보답하고 아래로 백성의 위급함을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감손한 뒤에도 오히려 은병(銀甁)·은주발이 있고 기타 은그릇도 한둘이 아니니, 다시 더 감손하여 검소한 덕을 왕비 책봉하는 초기에 밝히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뢴 말이 매우 온당하다. 도감(都監)에 말하여 감손하게 하라."
하였다. 경석이 아뢰기를,
"신이 전에 김상헌을 중죄로 다스릴 수 없다는 뜻으로 여러 차례 탑전(榻前)에서 진달하였습니다. 지금 듣건대 교지(敎旨)를 봉한 채로 돌려보냈다고 하니, 이 말이 사실이라면 불경함이 매우 큽니다. 어찌 신하로서 섬겼던 사람이 교지를 봉한 채로 돌려보낼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교지를 봉한 채로 돌려보낸 일은, 내가 알지 못하지만 이미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니, 어찌 교지를 집에 보관해 둘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경석이 아뢰기를,
"지난날 연석(筵席)에서 상께서 유석(柳碩)이 논한 바를 봉명 조양(鳳鳴朝陽)에 비유하니, 듣는 자들이 살피지 아니하고 매우 의심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상헌의 처사는 마땅히 시비(是非)가 있어야 하는데, 오래도록 말하는 자가 없다가 이 사람이 먼저 발언하므로 내가 이 말을 한 것이고, 상헌을 죄주고 기꺼이 배척하는 말을 들으려는 것은 아니었다."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근래 사대부의 풍습이 아름답지 못하여 절반은 시골에 있고 절반은 서울에 있으며, 혹은 한번 간 뒤로 오래 돌아오지 않고 혹은 출근한 지 오래지 않아 곧바로 휴가원을 제출하며, 아침에 겨우 체직되었는데 저녁에 이미 시골에 돌아가므로 재직한 날은 적고 비워둔 날이 많으니, 이는 금일의 고질화된 폐단입니다. 지방에 있는 사람을 굳이 의망(擬望)할 필요가 없다는 전교는 성상께서 폐단을 바로잡으려는 지극한 뜻에서 나왔으나 다만 조정이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서는 서울과 지방의 차이를 두지 말고 주의(注擬)할 때에 오직 재능을 보아야 합니다. 만약 서울과 지방을 분별하여 취사한다면 구차스럽게 충원시키는 걱정이 발생할 것이고 인재를 버린다는 탄식이 일어날 것입니다. 지난 임진 왜란 이후에는 담벽을 의지하여 조정을 세워, 눈에 가득한 잿더미 속에 사대부의 어려움은 금일보다 심하였지만, 백관들이 모두 서울에 모여 분주히 직책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때의 사대부가 어찌 모두 질병이 없었겠으며 또한 어찌 부모가 없었겠습니까. 진실로 폐백을 바치고 신하가 된 뒤에는 사사로운 정은 돌아볼 겨를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사대부는 이와 다르니, 신들은 간절히 세도(世道)를 위해 마음이 상합니다.
만약 사풍(士風)을 격려하고 시폐(時弊)를 개혁하려면 대의(大義)로 책망하여 그 마음을 경동(警動)시키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마땅히 해조로 하여금 이러한 뜻을 갖추어 각도에 행문(行文)하게 하고 그래도 버젓이 누워 오지 않으면 포만 불경(逋慢不敬)의 죄로 논하여, 어지럽게 사직하는 폐단을 고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17일 병오
박계영(朴啓榮)을 사간으로, 박돈복(朴敦復)과 홍진(洪瑱)을 장령으로, 이경상(李慶相)과 이운재(李雲栽)를 지평으로 삼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왕비를 책봉(冊封)한 후에 백관들이 전문(箋文)을 올려 하례하면 지방 특산물과 선물도 봉해 올려야 하는데, 지금 상께서 특별히 국가가 쇠잔함을 생각하여 삼명일(三名日)053) 에 지방 특산물과 선물을 모두 삭감하게 하였으니, 위를 덜어 아래 백성을 구제하는 뜻이 지극합니다. 다만 생각건대 국모(國母)가 새로 책명(冊名)을 받는데 신하가 위에 진상하는 예가 없을 수 없으니, 지방 특산물과 선물은 예전대로 봉해 올리게 하는 것이 온당합니다."
하니, 선물만 올리라고 답하였다.
10월 18일 정미
대사헌 김반(金槃)이 아뢰기를,
"임금에게 고하는 말은 터럭만큼도 거짓이 없어야 하는데, 당초 내려보내지도 않은 교지를 봉한 채 돌려보냈다고 하여 불경(不敬)이라는 죄로 애매하게 남에게 덮어씌웠습니다. 정온이 소신껏 행동한 것은 성상께서도 인정한 바입니다. 누가 정직하고 진실한 사람이 명예를 구하려는 뜻을 낸다고 말하겠습니까. 포위된 성에 호종(扈從)하고 들어갔다가 변고가 안정되자 비로소 돌아갔는데, 임금을 생각한 뜻이 없다고 하여 죄를 주려고 하니, 신은 실로 알지 못하겠습니다. 의견이 같지 않으니, 결코 장관 지위에 그대로 있기 어렵습니다. 신을 파직시키소서."
하였다. 집의 권도는 소견이 김반과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정언 박수문과 대사간 최혜길은 김반과 권도를 처치할 때에 논의가 모순되었다는 이유로 아울러 인피하였다. 홍문관이 차자를 올려 김반과 권도는 출사시키고 박수문과 최혜길은 체차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하교하기를,
"김상헌에게 가자(加資)한 교지를 해조는 어찌하여 내려보내지 않았는가? 병조에 물어보라."
하니, 병조가 회계하기를,
"모든 교지는 정조(政曹)에서 내려보내는 규정이 없고, 김상헌에게 가자(加資)한 교지가 나온 것은 정축년054) 윤4월이었습니다. 이조의 서리(書吏) 김의신(金義信)이 받았으나 그가 먼 도(道)에 있었기 때문에 아직까지 전달하지 못하고, 문서 두루마리 속에 넣어 두었다 합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가례 도감이 아뢰기를,
"금(金)그릇과 은(銀)그릇을 특별히 감한 숫자가 이미 적지 않은데, 지금 연신(筵臣)이 아뢴 바로 인하여 또 감하게 하였습니다. 동뢰(同牢)에 사용할 그릇은 다 감할 수 없으니, 다만 은병(銀甁) 등 물건을 놋쇠로 대신하는 것이 온당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19일 무신
예조가 아뢰기를,
"왕비 가례를 거행한 후 명부연(命婦宴)에는 임인년의 예에 의하여 동·서반(東西班) 정2품(正二品) 이상과 친공신(親功臣) 및 육승지(六承旨)의 부인이 마땅히 참여해야 하니, 제공할 모든 도구를 해조로 하여금 준례를 상고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권정(權停)하라고 답하였다.
주강에 《시전》의 문왕십(文王什)을 강하였다. 김진(金振)이 아뢰기를,
"이 시는 제일 먼저 하늘과 사람의 이치를 말하고 다음은 왕계(王季)와 태임(太任)의 덕을 말하였으며 끝으로는 문왕과 태사(太姒)의 덕을 말하였으니, 그 당시 배필(配匹)의 현철함과 교화의 아름다움이 이와 같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국가의 내조(內助)는 더욱 중하니, 예로부터 이것을 근심하는 자가 많았다. 비록 공자와 같은 성인의 덕으로도 교화시키기 어렵다는 탄식이 있었다. 그러므로 보통 사람의 가정에도 어머니가 어질지 못하면 형제들도 화목하지 못한 자가 많으니, 그 피해가 어찌 크지 않은가."
하였다.
10월 20일 기유
유성이 천균성(天囷星) 위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다.
10월 21일 경술
유성이 오거성(五車星) 위에서 나와 천원성(天苑星) 아래로 들어갔다.
헌부가 김상헌을 중도 부처(中道付處)하는 일로 잇따라 아뢰니, 파직시키라고 답하였다.
우의정 심열이 상차하기를,
"조강(朝講)의 규정에 반드시 이른 시간을 택하도록 한 것은 대저 맑은 아침 기운이 강독하기에 합당하기 때문인 듯합니다. 날씨가 따뜻하고 옥후(玉候)가 강녕할 때에는 비록 이른 아침이라 해도 괜찮지만, 지금은 10월이라서 추위가 심하고 오한(惡寒) 증세가 아직 쾌차하지 않았는데 추위를 무릅쓰고 일찍 나아가는 것은 자못 성상의 몸을 보양(保養)하는 도리가 아니므로, 조강을 폐한 지가 지금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대신과 대간을 접견하는 날이 없으면 실로 잘못된 일입니다.
어리석은 신의 생각으로는, 전하께서 전좌(殿坐)하는 시간을 진시와 사시 사이로 물려서 햇볕이 좀 든 뒤에 편전(便殿)으로 납시어 대신과 대간들로 하여금 입시(入侍)케 하여 치도(治道)를 묻고 모든 계책을 다 시행하면, 반딧불처럼 희미한 빛이라도 혹은 일월(日月)의 밝음을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경연(經筵)의 규정은 일정한 규칙이 없습니다. 서서 강론하는 것이 옛날의 제도였지만 정자(程子)가 앉아서 강론하기를 청하였고 또 무더운 달에는 시원한 집으로 옮겨 진강하기를 청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선유(先儒)가 시강(侍講)하던 규정도 굳이 옛날 제도에 집착하지 않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주강(晝講)하는 날에 대신과 양사(兩司)를 간혹 참여시키는 것도 또한 도움이 있을 듯하니, 아울러 정원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참작 처리하게 하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로 아뢴 말은 마땅히 참작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남이웅(南以雄)을 지경연으로, 김세렴(金世濂)을 대사간으로, 이도장(李道長)을 정언으로 삼았다.
10월 22일 신해
유성이 유성(柳星) 위에서 나와 대각성(大角星) 아래로 들어갔다.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가례 도감이 아뢰기를,
"육례(六禮)에 응당 거행할 일은 모두 길일(吉日)을 가리니, 마땅히 택일한 대로 거행해야 합니다. 그 중 빙재(聘財)055) 와 정친 예물(定親禮物)은 마땅히 왕비 부모의 집에 보내야 하는데 별도로 정한 날짜가 없으니, 빙재는 마땅히 삼간택(三揀擇)한 이튿날 실어 보내고 정친 예물은 납징(納徵)하기 전날 실어 보내소서. 등록(謄錄)을 상고해 보건대 이전의 규정도 이와 같았으니, 이 뜻으로 각사(各司)에 알리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23일 임자
지평 이경상(李慶相)이, 김상헌에 관한 계사(啓辭)는 죄가 중한데 벌이 가볍고 정온에 관한 계사는 오래 끄는 것이 부당하다고 말했다. 집의 권도(權濤), 장령 홍진(洪瑱)·박돈복(朴敦復), 지평 이운재(李雲栽)가 일을 논함이 공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먼저 인피하니, 이경상도 따라서 인피하였다. 정언 이도장(李道長)이 또 전에 논한 ‘김상헌이 상으로 내린 가자(加資)를 받지 않았다.’는 말이 거짓이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옥당이 처치하여 아울러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답하였다.
"아뢴 대로 하라. 이경상은 체차하라."
10월 25일 갑인
목성(木星)·금성(金星)·수성(水星) 세 별이 저성(氐星)에 합하였다.
이행원(李行遠)을 대사헌으로, 홍명일(洪命一)을 사간으로, 정태제(鄭泰齊)를 지평으로, 임효달(任孝達)을 정언으로 삼았다.
비국이 아뢰기를,
"조종조의 옛 규정에는 이조 판서와 병조 판서 이외에 대신이 천망(薦望)하는 일이 없었고, 만약 관방(關防)의 중임이라서 부득불 상의할 것이 있으면 해조의 당상관이 적합한 사람을 뽑아 그 가부(可否)를 묻거나 혹 망(望)의 순서를 높이거나 낮추거나 하였으며, 또 자급(資級)에 구애되어 감히 마음대로 의망(擬望)하지 못할 자가 있으면 대신에게 의뢰하는 것이 또한 준례였습니다.
지금은 변방의 중임에 적격자를 얻기 어려우면 으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의망하게 하는데, 전형하고 선발하는 것을 맡은 데서 적격자를 찾지 못했다면 묘당이라고 해서 또한 어떻게 특별한 사람을 만들어 내겠습니까. 지금 이후로 관방의 중요한 지역이라서 대신과 의논하여 차출할 자는, 해조로 하여금 직급의 고하(高下)를 막론하고 적합한 사람을 뽑아 신들에게 찾아와 물어보고 취사(取舍)를 상의하게 하고, 다시는 대신에게 전적으로 위임하지 말아 체통을 보존시키는 것이 온당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상께서 어사를 보내어 열읍(列邑)을 암행하며 수령의 현부(賢否)를 살피게 하였으니, 사체(事體)가 매우 중합니다. 감히 마음대로 낮추고 높이지 못할 바인데, 형조가 회계(回啓)하면서 스스로 경중을 나누고 그 사이에 좌지우지하여 혹은 금부(禁府)로 넘기기를 청하고 혹은 추고하기를 청하니, 사사로움을 따르는 작태가 참으로 지극히 놀랍습니다. 형조 당상을 추고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먼저 파직시키고 뒤에 추고하라."
하였다.
10월 26일 을묘
상이 대신인 좌의정 신경진(申景禛), 우의정 심열(沈悅), 영돈녕 이성구(李聖求) 등을 빈청에 명초(命招)하여 하교하기를,
"대혼(大婚)의 예를 인천 부사(仁川府使) 조창원(趙昌遠) 집으로 결정하려고 한다."
하니, 모두가 아뢰기를,
"삼가 성상의 하교를 받고 보니, 이는 실로 온 나라 신민(臣民)의 복입니다. 신들은 손뼉을 치며 축하를 드리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조창원을 돈령부 도정으로 삼았다.
10월 27일 병진
금성(金星)과 목성(木星)이 서로 침범하였다.
10월 29일 무오
대사헌 이행원(李行遠)이 아뢰기를,
"근래 김상헌과 정온 등의 일로 점점 혼란하여 공격하는 자는 터무니없는 말로 덮어 씌우고 구원하는 자도 또한 실상(實狀)을 얻지 못하니, 신은 매우 애석하게 여깁니다. 이 두 신하는 남한 산성에 있을 때부터 죽으려 하다가 이루지 못하였는데, 서울로 돌아온 뒤에 미쳐서는 척화(斥和)를 배척하는 의논이 날로 더욱 성하였습니다. 그 본심을 헤아려 보건대, 감히 나아가지 않으려고 한 것이 아닐 뿐만이 아니라 또한 세상에 용납되지 못해서였던 것이니, 그 정상이 참으로 애처로워 성낼 수 없습니다.
지금 그를 공격하는 자는 애당초 내려보내지도 않은 교지를 ‘봉한 채 돌려보냈다.[封還]’ 하고 난리 전에 이미 체직한 빈객(賓客)을 ‘아직까지 지니고 있다.[猶帶]’ 하며, 한번 호서(湖西)에 가서 그 형의 상(喪)에 곡(哭)한 것을 ‘떠돌아 다닌다.[浮遊]’고 합니다. 옛 도읍으로 임금이 돌아가는 것은 애산(厓山)과 비교할 수 없고056) 영남에 피하여 숨어 사는 것은 또한 점성(占城)과 같지 않은데057) , 심지어는 의중(宜中)이 도망친 것에 비유하였으니, 말한 바가 분명하지 못하고 시비가 뒤바뀌었습니다. 이같이 하고도 능히 공론을 세울 수 있으며 인심을 복종시킬 수 있겠습니까.
정온의 죄를 논함에 이르러서는 적합한 말을 찾지 못하여 처음에는 ‘명예를 구한다.[要名]’ 하였고, 끝내는 ‘발끈 성을 냈다.[悻悻]’는 것으로 구실을 삼았으니, 아, 또한 괴이합니다. 죄를 주려고 하다가 구실을 찾지 못했으면 그만두는 것이 옳은데, 어찌 반드시 억지로 꾸며서 말을 만듭니까. 두 신하를 구원하는 자도 또한 말은 번잡하나 뜻을 다 밝히지 못하고 혹은 분노를 참지 못하여 마치 피차 서로 다투는 자와 같으니, 아마도 성상의 마음을 일깨우고 시비를 밝히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신처럼 쇠약하고 용렬한 자가 외람되게 장관 지위에 있으니, 이처럼 의논이 마구 분열되는 때를 당하여 결코 근거 없는 의논을 진정시키고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키기는 어렵습니다. 신을 파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지평 정태제(鄭泰齊)가 아뢰기를,
"요즈음 본부(本府)에는 김상헌과 정온 등의 일로 논의가 무성한데, 그 사이에 의견이 조금 같지 않은 자가 있으면 문득 배척하니, 신은 실로 몹시 가슴이 아픕니다. 아, 천지가 번복하는 때를 당하여 마음에 맹서하고 뜻을 바꾸지 않은 자는 다만 김상헌과 정온뿐입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뜻을 끝내 이루지 못했고 척화(斥和)의 의논이 국가를 그르쳤다고 한다면, 두 신하가 감히 스스로 죄가 없다고 여겨 다시 도성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것은, 그 정상이 참으로 애처롭습니다. 이러한 것은 헤아리지 않고 시기를 틈타 모함하는 것이 이에 이르니, 아, 또한 심합니다.
칼로 찌르고 목을 맨 것이 죽기를 도모한 것은 마찬가지이고, 살아서 자정(自靖)한 것도 그 뜻이 서로 다르지 않은데, 억지로 분별하니 또한 무슨 마음입니까. 교지를 봉한 채 돌려보냈다는 것이 이미 근거가 없자 즉시 상으로 가자(加資)한 것을 받지 않았다 말하고, 지니고 있다는 빈객(賓客)의 직위는 난리 전에 이미 체직된 것인데 갑자기 억지로 죄목(罪目)으로 더하였습니다.
정온에 이르러서는 취사(取舍)의 자취를 엄폐시키려고 추후하여 발론하고, 그 죄를 찾았으나 죄목이 없자 말을 이랬다저랬다 하였으니, 그들이 말한 ‘당론(黨論)이 사람의 심술(心術)을 무너뜨렸다.’는 것은 참으로 스스로를 말한 것입니다. 신의 소견이 이미 여러 동료들과 서로 다르니, 억지로 굽히고 구차스레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신을 체직시키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장령 홍진(洪瑱)·박돈복(朴敦復), 지평 이운재(李雲栽), 정언 이도장(李道長)·임효달(任孝達)이 배척을 당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대사간 김세렴이 아뢰기를,
"김상헌의 일은 당초 국가의 존망에 관계된 것이 아닌데, 의논이 한번 분열되자 갑(甲)과 을(乙)이 모순되어 진정과 화합은 다시 바라지 못하겠습니다. 신처럼 쇠약하고 용렬한 자가 장관 지위에 있으니, 어찌 감히 시비를 타개하고 근거 없는 의논을 진정시키겠습니까. 신을 체직시키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사간 홍명일(洪命一)이 이행원(李行遠)과 정태제(鄭泰齊)는 출사시키고 홍진·박돈복·이운재·이도장·임효달·김세렴은 체차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이행원과 정태제는 별도로 의견을 내어 저들의 허물을 엄폐하려고 하였으니, 또한 몹시 오활하고 괴이하다. 아울러 체차하라."
하였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인조실록37권, 인조 16년 1638년 12월 (2) | 2026.01.03 |
|---|---|
| 인조실록37권, 인조 16년 1638년 11월 (0) | 2026.01.03 |
| 인조실록37권, 인조 16년 1638년 9월 (0) | 2026.01.03 |
| 인조실록37권, 인조 16년 1638년 8월 (1) | 2026.01.03 |
| 인조실록37권, 인조 16년 1638년 7월 (0) | 2026.0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