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37권, 인조 16년 1638년 11월

싸라리리 2026. 1. 3.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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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기미

조창원(趙昌遠)을 영돈녕부사 한원 부원군(漢原府院君)으로 삼고 최씨(崔氏)를 완산 부부인(完山府夫人)으로 삼으니 왕비의 부모이기 때문이다. 이성구(李聖求)를 영중추부사로, 남이웅(南以雄)을 대사헌으로, 김반(金槃)을 대사간으로, 이계(李烓)를 장령으로, 신유(申濡)와 박수문(朴守文)을 지평으로, 정지호(鄭之虎)를 정언으로 삼았다.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시독관 김진(金振)이 아뢰기를,
"어제 간원의 처치는 시비가 명백하지 않고 또한 준례를 어긴 일이 있습니다. 임효달(任孝達)의 피사(避辭) 중에 홍문관의 차자는 전적으로 비호하기를 일삼았다는 등의 말이 있는데, 그때 홍명일도 또한 홍문관에 있었으니, 금일의 처치가 어찌 미안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세렴과 임효달은 체직시킬 만한 일이 없다."
하였다. 조수익(趙壽益)이 아뢰기를,
"요즘 의논이 서로 대립되어 조정이 조용하지 않은데, 대각이 기필코 중한 형벌로 김상헌을 죄주려 하는 것은 또한 잘못이고, 그를 구원하려는 자는 허물이 없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여 이로써 서로 다투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또 홍명일은 피할 만한 혐의가 있는데 홀로 처치하니, 매우 부당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홍명일이 염치가 없고 기탄이 없는 것이 극심하다."
하였다.

 

11월 2일 경신

정언 정지호가 아뢰기를,
"대사헌 이행원과 지평 정태제 등이 당파를 비호하기에 급급하여, 김상헌을 마치 한 점의 흠도 잡을 만한 것이 없는 자처럼 하여 분개하는 말투로 말한 자를 공격하였으니, 아첨하는 태도와 남을 모함하는 습성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사간 홍명일은 시비를 생각하지 않고 시기를 틈타 사사로운 감정을 멋대로 부려 많은 관원을 다 체직시키고 유독 두 사람만을 출사시키기를 청하였으니, 그 염치 없고 기탄 없는 조짐을 키울 수 없습니다. 체차를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3일 신유

유성이 호성(弧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으로 들어갔다.

 

헌부가 김상헌의 일로 연계(連啓)하니, 삭탈 관직하라고 답하였다.

 

11월 4일 임술

상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정사(正使)인 좌의정 신경진(申景禛)과 부사(副使)인 판윤 윤휘(尹暉)에게 명하여 납채례(納采禮)를 거행토록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내전(內殿)의 탄신[誕日]과 삼명일(三名日)에는 정부와 본조의 당상관이 마땅히 선물과 옷감을 검사하여 진상해야 하는데, 지금은 내전께서 책명(冊名)을 받지 않았으니, 7일의 탄신과 17일의 동지에 옷감은 제하고 다만 각 해사(該司)로 하여금 선물을 검사하여 진상토록 하는 것이 온당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5일 계해

김세렴을 대사성으로, 이계를 집의로, 이도장을 부교리로, 엄정구(嚴鼎耉)를 수찬으로 삼고, 특명으로 서상리(徐祥履)를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홍명일을 고창 현감(高敞縣監)으로 삼았다.

 

11월 6일 갑자

천둥이 쳤다.

 

조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영경연 심열(沈悅)이 아뢰기를,
"징병(徵兵)이 끝내 기한 내에 당도하지 못하여 되돌아 오게 되었으니, 비록 은(銀)을 추징하는 조처가 있다 하더라도 매우 다행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군사를 동원하여 강을 건너 갔으니 기한 내에 도착했는가 못했는가의 문제는 말할 것 없다. 그러나 명나라의 국경을 침범하지 않았으니, 지금 비록 은을 추징당하더라도 또한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하였다. 또 이르기를,
"명년에 장차 세폐(歲幣)를 보내야 하는데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를 생각하면 편히 잠을 자지 못하겠다."
하니, 심열이 이르기를,
"내년에는 그래도 백성들에게 징수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그 후에는 참으로 계속하기 어렵습니다."
하였다. 지평 박수문(朴守文)이 나아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이미 김상헌의 죄상(罪狀)을 통촉하였습니다. 삭탈 관직에만 그칠 수 없으니, 빨리 멀리 귀양보내라 명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처음에는 파직만 시키고 말려고 하였는데, 요즘 나이 젊은 무리들이 지나치게 구원하여 거조(擧措)가 아름답지 못하기 때문에 이미 죄를 더하였으니, 정계(停啓)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11월 8일 병인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지경연 이현영(李顯英)이 나아가 아뢰기를,
"친영(親迎)하는 예를 《실록》에서 상고해 냈는데, 의주(儀注)가 또한 미비합니다. 지금 만약 빈주(賓主)의 예로 강구하여 결정하면 군신(君臣)의 예에 어긋나니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임인년058)  에는 어떻게 하였는가?"
하였다. 현영이 아뢰기를,
"또한 상고할 곳이 없어 왕세자가 친영하는 의주로 참작하고 강구하여 결정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임인년에도 배례(拜禮)한 일이 없다고 하니, 그 당시에 있었던 늙은 궁인(宮人)에게 물어보라."
하였다.

 

11월 9일 정묘

유성이 누성(婁星) 아래에서 나와 묘성(昴星) 위로 들어갔다.

 

윤휘(尹暉)를 형조 판서로, 유심(柳淰)과 이도장(李道長)을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대사헌 남이웅(南以雄)이 김상헌의 일에 대한 논의를 중지하자는 뜻으로 동료들에게 통고하니, 집의 이계와 지평 박수문·신유가 갑자기 중지할 수 없다는 것으로 고집하고 모두 인피하였다. 간원이 아울러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10일 무진

헌부가 아뢰기를,
"정언 황위(黃暐)의 아비 황정열(黃廷悅)은 광해조에 교동 현감(喬桐縣監)으로 있었습니다. 능창 대군(綾昌大君)이 갑자기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것은 실로 그 손에서 나온 것으로 논하는 자들이 그의 죄가 정항(鄭沆)과 다름이 없다고 하는데, 그의 아들을 갑자기 청직(淸職)의 반열에 오르게 하니, 물정(物情)이 모두 놀랍니다. 체차를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11일 기사

유성이 칠공성(七公星) 위에서 나와 북방으로 들어갔다.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상이 이르기를,
"예로부터 국가가 망할 때에는 반드시 당론(黨論)이 있었다. 임금이 능히 덕을 닦으면 이러한 폐단이 없을 수 있는가?"
하자, 남이공이 아뢰기를,
"국가의 피해는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옳은 것을 그르다 하고 그른 것을 옳다고 하므로 자연 당론이 있게 되면 진정한 시비는 없게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병란(兵亂)은 안정될 수 있는 기일이 있지만 붕당(朋黨)은 안정될 수 있는 기일이 없으니, 그 피해는 수재(水災)나 한재(旱災), 전쟁보다도 더 심하다. 선조께서 용만(龍灣)에 행차하여 시 한 수를 지었는데, 그 시에,
용만의 달에 통곡하고
압록강 바람에 마음 상하네
조정 신하가 금일 이후에
어찌 다시 서인 동인 찾을 것인가
하였으니, 이 또한 붕당을 미워하여 지은 것이다. 신하된 자가 그 시를 보면 다소 징계될 만한 듯한데도, 폐습(弊習)이 날로 심해지니, 인심과 세도(世道)가 또한 개탄스럽다."
하였다.

 

11월 12일 경오

상이 문정전(文政殿)에 나아가 죄인을 계복(啓覆)하였다.

 

11월 13일 신미

전식(全湜)을 대사헌으로, 심재(沈𪗆)를 헌납으로, 홍진(洪瑱)을 정언으로, 임담(林墰)을 부교리로 삼았다.

 

11월 15일 계유

예조가 아뢰기를,
"중종(中宗)께서 오래 폐지되었던 삼대(三代)의 예를 복구하였으니, 매우 훌륭한 일입니다. 당시 이름난 선비가 조정에 가득하여 경전(經傳)을 토론하여 일대(一代)의 의주(儀註)를 만들었으니, 반드시 잘 갖추어져 후세에 법이 될 만하였을 것인데, 전해오지 않아 애석합니다. 지금은 마침 어려운 시기를 당하여 별관(別館)에서 맞이하는 한 조목조차 미처 겨를이 없어 이미 흡족하지 못한 한스러움이 있는데, 더구나 친영(親迎)하는 대례(大禮)가 고례(古禮)에 맞지 않는 데이겠습니까. 만약 그대로 따라 소홀히 하여 더욱 부족한 바가 있으면 어떻게 후일의 비방을 면하겠습니까. 신들이 예설(禮說)을 하나도 모르면서 예관(禮官)에 있는데, 경솔하게 새로운 예를 만들어 내면 어떻게 능히 예문에는 없지만 예에 합하는 의식이 되겠습니까.
삼가 《오례의(五禮儀)》 중 왕세자 친영의(王世子親迎儀)를 의거하고 《통전(通典)》 중 제후왕의 예를 섞어 채택하였는데, 중국의 제후는 모두 자기와 대등한 집에 혼인을 하므로 모두 빈주(賓主)의 예를 행하는 것이 타당하지만 우리 나라는 이와 달라 구절마다 맞지 않습니다. 다만 《대명회전(大明會典)》의 황태자 친영 의식은 큰 차이가 없으므로 그 대의(大義)를 취하였으나, 그 사이의 절문(節文)은 의기(義起)를 면치 못하여 어긋나는 것이 많습니다. 황태자가 전안(奠雁)한 뒤에 주혼자(主婚者)가 여덟 번 절한다고 하였는데, 우리 나라에는 여덟 번 절하는 예가 없으니, 네 번 절하는 것으로 정하였습니다. 황태자비(皇太子妃)와 왕세자빈(王世子嬪)이 가마에 나아갈 때에 모두 발을 걷고[揭簾] 발을 든다[擧簾]는 구절이 있는데, 생각건대 발을 걷는 것은 겸손하고 낮춘다는 뜻인 듯하니, 대강 동뇌연(同牢宴)의 읍하여 자리에 나아가게 한다.[揖就席]’는 구절을 모방하여, ‘읍하여 수레에 나아가게 한다.[揖就輦]’는 것으로 고치는 것이 어떠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또 임인년의 일을 그 당시 내인(內人)에게 물어보니, 전안할 때에 연흥(延興)이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연흥 집안 사람에게 물어보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임인년 가례(嘉禮)를 거행할 때에 달성위(達城尉) 서경주(徐景霌)가 운검 총관(雲劍摠管)으로 호위하고 태평관(太平館)에 이르러 문틈으로 바라보니, 연흥 부원군 김제남(金悌男)이 분명히 성상 앞에 있었고 문안에는 푸른 장막으로 가려져 있어 행례하는 절차는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연흥 집안 사람들이 거의 다 죽고 다만 김내(金琜)의 아내만 생존하였으니 마땅히 연혼(連婚)한 집안 사람으로 하여금 사사로운 편지로 물어보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16일 갑술

상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정사(正使)인 좌의정 신경진과 부사(副使)인 형조 판서 윤휘를 보내어 납징례(納徵禮)를 거행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임인년 가례를 거행할 때에 부부인(府夫人)이 응당 봉안례(奉鴈禮)를 행해야 하는데 그때 병이 있었기 때문에 심정세(沈挺世)의 아내가 대행(代行)했다고 하니, 그 의주(儀註)를 마땅히 다시 물어 강정(講定)하라."
하였다. 예조가 회계하기를,
"봉안례는 혹자가 김래의 아내가 대행했다고 하니, 부부인이 응당 행해야 할 일이었던 것은 명백합니다. 의주(儀註) 중에는 주모(主母)로 고쳐 써서 들이겠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김래 아내의 사서 별지(私書別紙)가 도착하였습니다. 의주 중의 상께서 전안한 뒤에 주혼자가 네 번 절한다는 것은 황태자 친영의를 의거하여 강정(講定)한 것입니다. 지금 별지를 보니 부원군은 배례(拜禮)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막중한 대례(大禮)라서 이미 명조[皇朝]의 예문을 의거하였으니, 지금 사적인 편지로 인하여 고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처리합니까. 이른바 부인(婦人)이라고 한 것은 반드시 봉안(奉雁)한 사람을 가리킨 것이니, 봉안하고 들어가는 것을 이미 주모(主母)가 행하는 것으로 정하였다면 꿇어앉아서 봉안하는 것은 주모가 할 바가 아닌 듯합니다. 마땅히 전에 결정한 의식대로 예를 거행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별지에 기록된 바가 예에 합하는 듯하다. 봉안하는 한 조목 이외 나머지는 모두 이에 의하여 결정하라."
하였다.

 

11월 18일 병자

유성이 성성(星星) 아래에서 나와 진성(軫星) 아래로 들어갔다.

 

당시 정혜 옹주(貞惠翁主)의 상사(喪事)가 있었는데, 상이 예장(禮葬)하라고 명하였다. 호조가 아뢰기를,
"난리를 겪은 뒤로 예장 등의 일을 아직까지 옛날처럼 거행하지 못하여 광산 부부인(光山府夫人)과 정빈(貞嬪)의 상사도 또한 예장으로 치르지 못하고 다만 관곽(棺槨)·역군(役軍)·제수(祭需)를 지급하였을 뿐이니, 옹주의 상사도 이에 의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상이 하교한 대로 시행하라고 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정혜 옹주를 예장(禮葬)하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큰 난리를 겪은 후로 흉년이 겹쳐 앞으로의 대책이 몹시 염려됩니다. 이미 중지되었던 법을 다시 거행하여 궁핍한 재정을 손상시키는 것이 부당합니다. 더구나 정빈의 상사에 이미 예장을 하지 못했으니 융쇄(隆殺)의 예절을 다르게 할 수 없습니다. 예장하라는 명령을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 상사는 정빈의 상사와 같지 않으니 다시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하였다. 여러 번 아뢰자 감축하라고 명하였다. 대신들이 정혜 옹주를 예장하라는 명령을 중지하기를 청하니, 답하였다.
"다만 왕자(王子)·옹주(翁主)·대신(大臣)·원훈(元勳)에게는 예장을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상이 하교하기를,
"가례(嘉禮)를 전일에 정한 날짜에 거행하는 것이 정례(情禮)에 모두 몹시 미안하니, 예관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라."
하니, 예조가 아뢰기를,
"동성(同姓) 삼촌 숙모(三寸叔母)의 상사는 사상례(士喪禮)로 말하면 기년복인데 출가(出嫁)하면 대공(大功)으로 강등되고 천자와 제후는 기년복 이하는 입지 않았습니다. 전에 정한 날짜가 달로 말하면 이미 한 달이 넘었고 날로 말하면 공제(公除)059)  가 이미 지났으니, 미안한 뜻이 없을 듯합니다. 세전(歲前)에 다른 길일(吉日)이 없고 내년에는 길한 해가 아니니, 속히 전에 정한 날짜에 대례를 거행하라는 것은 실로 여러 아랫사람들이 똑같이 갈망하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마음에 몹시 미안하니, 꺼리지 말고 내년에 거행하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가례의 길일을 다시 일관(日官)에게 물어보니 내년의 불길(不吉)함은 보통 길흉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합니다. 비록 민간의 혼사(婚事)라 하더라도 이러한 기일(忌日)을 범하면서 거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는데, 어찌 감히 경솔히 대례를 거행하겠습니까. 기년복 이하를 제후가 입지 않는 것은 바로 성현이 중도(中道)에 맞게 마련한 제도니, 정혜 옹주가 비록 왕실의 지친(至親)이라고 하지만 복(服)이 없는 상사일 뿐입니다. 어찌 복이 없는 사적인 상사로 인하여 이미 결정한 대례를 물려서 행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 정묘년060) 정숙 옹주(貞淑翁主)의 장일(葬日)이 마침 왕세자 가례일(嘉禮日)과 상치되었으나 그때에도 물려 시행하지 않았는데, 더구나 상의 혼례는 세자의 가례에 비하면 어찌 현격히 다르지 않겠습니까. 옛적에 노 소공(魯昭公)이 자모(慈母)의 복을 입으려고 하자, 유사(有司)가 아뢰기를 ‘옛날의 예에 자모는 복이 없는데 지금 임금께서 복을 입으려고 하니 이는 옛날의 예를 거스리고 국가의 법을 혼란시키는 것입니다.’ 하였으니, 지금 복이 없는 상사로 복이 있는 상사에 비교하여 대례를 물리려고 하면 노나라 유사의 경계에 가깝지 않습니까.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였다. 영의정 최명길, 좌의정 신경진, 우의정 심열이 아뢰기를,
"해조(該曹)의 계사(啓辭)는 실로 온 조정의 공론에서 나온 것이니, 지난번 결정한 대로 시행하는 것이 온당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20일 무인

충청 감사 김육(金堉)이 치계하기를,
"신이 옛사람이 만들어 놓은 법으로 인하여 망령되게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고자 하는 뜻을 진술하니, 비변사와 해조가 회계(回啓)하여 시행토록 청하였는데, 지금 수 개월이 지났어도 아직까지 결정하지 않다가 지난번 연신(筵臣)들의 아룀으로 인하여 특별히 다시 물어보라는 전교를 내리셨습니다. 다만 신이 말한 바는 백성을 먼저 구제하자는 뜻이고 근시(近侍)가 아뢴 바는 국가를 풍족하게 하자는 계책이니 참작하여 사용하면 잘못이 없을 것입니다.
신이 정한 무명 한 필, 쌀 두 말은 쌀로 합산하면 일곱 말이고, 근시(近侍)가 말한 무명 두 필은 쌀로 계산하면 열 말이니 신이 정한 것보다 서 말이 많을 뿐입니다. 흉년에는 무명 한 필, 쌀 두 말로 무명 두 필을 받는 규정으로 삼아 쌀과 무명을 반반씩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흉년에는 무명으로 쌀 값을 따르고 풍년에는 쌀로 무명 값을 따르되 다섯 말로 기준을 삼고 그 숫자를 넘지 못하게 하면 풍흉(豐凶)에 따라 증감(增減)하는 편의가 있고 상하가 손해와 이익을 보는 잘못이 없을 것입니다. 대신과 해조는 모두 봉납하는 바가 약소하므로 용도에 부족할까 염려하고 성상의 생각도 또한 이에 이르렀으나, 반드시 부족한 걱정이 없을 것이고 서울과 지방 백성들도 또한 반드시 불편하게 여기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신은 생각건대 부족한 바가 없을 것이고 균등하게 혜택을 받는 효과가 있을 것이니 금년에는 우선 신이 정한 대로 시험하여 시행하고 서서히 풍년을 기다려 연신의 말을 사용하여 평상적인 규정을 만드는 것이 온당하다고 여깁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재량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였다.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본도(本道)에서 보낸 값으로 해조의 용도에 비교하면 대동미(大同米)의 값과 대략 비슷합니다. 다만 생각건대 1결(結)에서 징수한 무명 1필과 쌀 2말로는 공물(貢物)을 준응(准應)하는 이외에 허다한 잡역(雜役)은 반드시 손을 쓰지 못할 형편이며, 금년에는 그대로 이 법을 사용하고 내년에 또 연신들의 말을 사용한다면 국가의 법을 이처럼 자주 고치는 것이 부당합니다. 금년의 공물은 전일대로 상납케 하고 서울과 지방의 공론을 널리 채집하여 후일 처리해도 늦지 않을 듯합니다. 또 공안(貢案)을 개정하면 공물의 부역이 자연 균등해질 것이니 이와 같이 된 뒤에야 대동법을 의논할 수 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대동법을 시행하려면 공안(貢案)을 굳이 개정할 필요가 없다. 금년의 공물은 우선 회계(回啓)한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11월 21일 기묘

김반(金槃)을 이조 참판으로, 김세렴(金世濂)을 대사간으로, 최계훈(崔繼勳)을 장령으로, 이운재(李雲栽)와 권임중(權任中)을 지평으로, 정치화(鄭致和)를 부응교로, 정지화(鄭知和)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간원이 아뢰기를,
"도승지 윤이지(尹履之)는 본래 용렬하고 어리석은 사람으로 공론에 버림을 받은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본직(本職)에 제수되자 다른 사람의 의견대로 따라 하는 바가 모두 영합(迎合)하고 구차스러운 일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승정원의 장관으로 있을 수 없으니,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잘못이 없고 재능이 있으니 번거롭게 논하지 않는 것이 옳다."
하였다.

 

11월 22일 경진

영의정 최명길이 비로소 심양(瀋陽)에서 돌아오니, 상이 불러 접견하고 청나라의 사정을 물어보았다. 헤어질 무렵 명길이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가례(嘉禮)의 절목(節目)이 매우 간소하다고 하니, 이를 등록하여 후세에 전해 보여주는 것이 옳습니다. 인열 왕후(仁烈王后)께서 왕비로 있은 지 13년 동안 공손하고 검소한 덕이 시종 한결같았습니다. 지금 새로 책봉하는 왕비는 춘추가 매우 적으니 인도하는 방도는 모두 초기에 달려 있습니다. 궁중에서 사용하는 물건은 마땅히 검소함을 숭상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경의 말이 옳다고 했다.

 

11월 23일 신사

헌부가 아뢰기를,
"경기 감사 김남중(金南重)은 난리가 처음 안정되자 전주(全州)에 가서 일가 사람들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겼으니, 실로 듣고 보는 자들이 놀랐습니다. 경기 감사가 되어서는 그의 생일을 맞이하여 도사(都事)로 하여금 도내의 모든 고을에 알려서 잔치 비용을 거두어 술 마시고 노는 데 제공하게 하였습니다. 전쟁과 흉년을 겪은 뒤로 어려운 걱정이 눈에 가득하여 삼명일 방물도 폐지하였는데, 어찌 자기를 받들기 위해 태평 성대의 준례를 새로 회복할 수 있습니까. 무식하고 멋대로 방자함이 극심하니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추고하라고 답하였다.

 

11월 25일 계미

세자가 심양(瀋陽)에 있으면서 필선(弼善) 민응협(閔應協)을 보내어 정조 문안례(正朝問安禮)를 거행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공조 정랑 이행진(李行進)은 오늘 신들이 모인 곳에 사적인 편지로 김남중(金南重)에 관한 논죄를 중지하기를 권하였는데, 사용한 말이 몹시 놀랍습니다. 멋대로 방자하고 기탄이 없어 대각을 지휘한 습성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진휼청이 곡식을 상납하고 벼슬을 받은 자는 군역(軍役)을 배정하지 말아 백성의 원망을 풀어주기를 청하니, 답하였다.
"실직(實職) 6품 이하와 영직(影職) 3품 이하는 준례로 군역을 배정하였는데, 백성들의 뜻이 이와 같으면 배정하지 말라."

 

11월 27일 을유

박계영(朴啓榮)을 장령으로 삼았다.

 

11월 28일 병술

유성이 호성(弧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으로 들어갔고, 상태성(上台星) 아래에서 나와 북두성으로 들어갔는데, 붉은 빛이 땅을 비추었다.

 

평안도 숙천(肅川)·삼화(三和)·평양(平壤)·성천(成川)에 지진이 있었다.

 

11월 29일 정해

목성(木星)이 방성(房星) 첫째 별을 침범하였다.

 

11월 30일 무자

상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정사(正使) 신경진과 부사(副使) 윤휘를 보내어 고기례(告期禮)를 거행하였다. 그 교명문(敎命文)에,
"하늘이 사성(四星)을 드리우니 후비의 형상이 나타나고 땅이 만물을 싣고 있으니 남 모르는 화육(化育)의 공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처음을 바로잡는 것[正始]은 의리의 최우선이고, 처음을 시작하는 것[造端]은 예절에 가장 중하다. 치세(治世)를 두루 살펴보건대 모두가 풍교(風敎)의 기반을 힘썼고 잘 다스리는 신하가 있으니 또한 부인의 도움을 힘입었다.
생각건대 덕이 부족한 내가 이처럼 어려운 시기를 당하여 간하는 말을 듣지 못하니 항상 궁중에 들어가 길이 탄식하였는데 사직(社稷)이 복을 받아 다행스레 종묘 위패 지키기를 잘하였다. 아내 구하는 것에는 겨를이 없었고 다만 소간(宵旰)061)  의 생각에 간절했었다. 돌아보건대 대신이 거듭 청하는 것을 어찌 감히 어기겠는가. 소군(小君)을 얻어 서로 성취하니 장차 도움을 바라노라.
점괘는 길하다 하고 거북등 무늬로 그 상서로움을 정한다. 아, 그대 조씨(趙氏)는 덕을 쌓은 훌륭한 집안이고 시례(詩禮)로 아름다운 교훈을 받았으니, 우빈(虞嬪)062)  의 아름다운 덕은 규예(嬀汭)의 법을 관찰하기에 합당하고 주사(周姒)063)  와 같은 좋은 짝은 하주(河洲)의 읊음에 부끄러움이 없다. 이미 혁혁한 문벌을 선택하고 아름다운 법도를 만들어 이에 책봉(冊封)하여 왕비를 삼으니 만복(萬福)의 근원이고 육례(六禮)가 갖추어졌다.
현재 지극히 좋은 달을 당하여 모의(母儀)의 존엄을 다시 세우니 마땅히 땅의 유순함을 본받고 온순함으로 하늘을 받들어야 한다. 공경스레 종묘를 받들어 제사에 성의를 극진히 하고 집안과 국가를 다스릴 때에 규목(樛木)064)  의 은혜를 미루어 베풀면 궁궐은 더욱 엄숙하고 동관(彤管)은 더욱 빛이 날 것이다. 아, 능히 검소하고 부지런하며 반드시 공경하고 경계하며 세자 이하를 자기 소생처럼 소중히 여기고 궁궐 안에서 이의하는 자가 없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니, 잘 살피라."
하였는데, 대제학 이경석(李景奭)이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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