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기축
도승지 윤이지(尹履之)가 상소하여 체직을 청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그날 출사하니 아마도 가례(嘉禮)의 거둥이 하루 앞으로 임박하였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비웃는 사람들이 많았다.
12월 2일 경인
상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정사(正使) 신경진과 부사(副使) 윤휘에게 명하여 책비례(冊妃禮)를 거행하였다. 그 옥책문(玉冊文)에,
"《시전》에 관저(關雎)를 수장(首章)에 실었으니 처음을 바로잡는 의의가 크고 《예기》에 휘의(褘衣)와 요적(揄翟)을 중히 여겼으니 배위를 세우는 법이 융성하였다. 대저 그와 함께 종묘를 받들고 또한 왕화(王化)를 천명하기 위해서이다. 이에 옛법을 상고하고 새로운 의식을 완비하였다.
아, 그대는 아름다운 교훈을 전승한 집안이고 하늘에서 부여받은 옥같은 태도를 지녔다. 환패(環佩)의 소리를 따랐으니 일찍이 온화하다는 명성이 현저하였고 사록(沙麓)의 징조를 응하였으니 참으로 법상(法相)에 합한 것이다. 거북에 점쳐보니 이미 좋다 하니 상복(象服)이 합당할 것이다.
왕비 자리를 오래 비울 수 없으므로 대신들이 거듭 요청했다. 많은 역경을 감내하지 못하여 궁실(宮室)을 안정시킬 겨를이 없었다. 감히 대륜(大倫)을 폐하였지만, 이제 정숙한 덕을 취하려 하노라. 이러므로 계동(季冬)의 좋은 날을 가리어 이에 장추궁(長秋宮)065) 의 존엄을 바로잡고자 한다. 이에 좌의정 신경진을 보내어 부절(符節)을 가지고 예의를 갖추어 왕비에 책봉한다.
아, 공경하고 삼가한 후에야 궁궐이 엄숙하고, 공손하고 검소해야 부귀를 지킬 수 있는 것이니, 힘써 음교(陰敎)를 베풀고 능히 양명(陽明)을 도울지어다. 온 나라가 소군(小君)이라고 일컬으니 도산씨(塗山氏)066) 가 하(夏)나라를 돕던 일을 계승하고, 내가 정치 잘하는 신하 10명을 두었으니 사씨(姒氏)067) 가 주(周)나라 일으킨 일을 따라야 한다. 이에 교시(敎示)하니 잘 살피라."
하였는데, 이경석이 지은 것이다.
영의정 최명길이 상차하기를,
"신이 조정에 돌아온 후에 듣건대, 조정에서 새로 제도를 만들어 지방에 있는 인원은 삼사(三司)의 후보자로 추천하지 못하고, 관직에 제수된 자는 하유(下諭)068) 하지 않으며, 휴가를 받아 시골로 내려가는 자는 관직을 지니고 왕래하지 못한다고 하니, 이는 실로 한 때의 폐단을 바로잡으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지만 신은 굳이 이와 같이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근일 조정의 관리 중에 이따금 벼슬하기를 즐겨하지 않는 자가 있습니다. 이른바 필부(匹夫)는 뜻을 빼앗을 수 없다 하였으니 그대로 두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그 중에 또한 사고가 있거나 파산(罷散)을 당하였거나 전쟁을 피해 타향에서 떠돌다가 집안이 가난하여 스스로 돌아오지 못하거나, 먼 곳에 집이 있어 형편상 상경하여 조용(調用)을 기다리기 어려운 자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무리가 실로 적지 않은데, 지금 만약 그 실정을 물어보지도 않고 모두 버리고 등용하지 않는다면 국가에서 사대부를 대우하는 도리에 위배될까 염려됩니다. 신은 벼슬하기를 원치 않는 자는 실로 억지로 시킬 수는 없지만 애당초 벼슬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없는데 사세에 구애된 바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으면 마땅히 수록(收錄)하여 인재 등용하는 길을 넓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해조가 참작하여 취사(取舍)함에 달려 있는데, 어찌 일정한 법으로 정할 수 있겠습니까.
또 지방에 있다가 피선된 삼사(三司)의 관원에 대해서 하유(下諭)하고 역마로 부른 것은 특별히 우대한 것입니다. 지난해 이미 역마를 타고 오게 하는 규정을 없앴는데 금년에 또 하유하는 명령마저 없애면 이는 삼사를 일반 관리와 같이 대우하는 것입니다. 국가에서 삼사를 설치한 것은 보도(輔導)하고 간쟁(諫諍)하는 책임을 맡기고자 한 것이니 막중하다고 할 수 있는데, 지금 옛 규정을 모두 폐지하여 일반 관리와 마찬가지로 대하니, 저 삼사의 관원이 된 자가 누가 즐겨 전하를 위하여 간쟁하고 보도하는 책임을 다하겠습니까. 하유는 실로 중지할 수 없고 역마를 타는 것도 또한 점차 전일대로 회복해야 합니다.
백관이 휴가를 받는 것은 조종조(祖宗朝) 때부터 규정이 있는데, 근래 풍습이 아름답지 못하여 일이 있다고 핑계하고 시골로 내려간 자가 많으니, 그 정상이 실로 얄밉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사고가 있어 부득불 잠시 왕래하는 자까지도 아울러 모두 체직시키면 조종조에서 여러 신하를 예우하던 아름다운 뜻이 아닌 듯합니다. 또 일반 관리 중에 벼슬을 아깝게 여겨 마침내 근친(覲親)하고 성묘하는 등의 일을 폐하는 자도 혹 있을 것이니, 또한 윤리와 풍속을 돈독히 하는 방도가 아닙니다.
세 가지의 폐단이 비록 눈앞의 이해에 절실하지 않은 듯하나 왕도 정치에 손상되는 것은 많습니다. 비변사가 요청한 하유에 대한 한 조목은 우선 거행하고 역마를 타고 오게 하는 규정은 차츰 복구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하유에 대한 한 조목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12월 3일 신묘
사시(巳時)에 상이 별궁에서 왕비를 친영(親迎)하고 미시에 궁궐로 돌아왔다. 유시에 동뢰연(同牢宴)069) 을 거행하였다.
12월 4일 임진
가례를 거행한 후 백관들이 하례를 올리고 상이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 그 교서(敎書)는 다음과 같다.
"왕비 자리가 오래 비어서 이미 신하들의 소망을 따랐고 궁중의 내전이 경사를 이어 모의(母儀)의 존엄을 바로잡았으니, 이에 옛법을 상고하여 새로 조서를 반포하노라.
생각건대 나는 덕이 적고 불행한 자로 또 왕비의 상성(相成)마저 잃었었다. 궁실에 들어가도 간하는 말을 듣지 못하니 슬픔은 옛 아내에 얽혀 있었고, 종묘 제기를 부탁한 바가 있으니 광채는 이미 태자[前星]에 빛났다. 더구나 지금은 난리를 겪은 나머지 또 흉년의 참혹함을 당하였다. 생각은 훌륭한 정치에 절실하여 자나 깨나 아내 구하는 것에는 겨를이 없었고, 깊은 못에 다다른 듯 얇은 얼음을 밟듯 하라는 경계가 간절하니 종고(鍾鼓)의 즐거움을 어찌 마음먹었겠는가. 왕비의 방이 한 번 닫히자 회화나무 불[槐火]을 다섯 번 취했으니070) 대저 궁중이 편치 않고 빈어(嬪御)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이 양극(兩極)의 뜻을 진달하니 또한 어찌 어기겠는가. 배필은 만복(萬福)의 근원이니 실로 폐할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덕망 있는 가문을 물어 좋은 짝을 택하였다. 이에 금월 3 일 신묘에 친영례(親迎禮)를 거행하고 조씨(趙氏)를 책봉(冊封)하여 왕비를 삼노라. 구슬 귀걸이와 전의(展衣)071) 는 시절이 좋지 못해 예물을 감하였고 보책(寶冊) 가전(嘉典)은 길한 때에 처음으로 예를 이루었다. 남궁(南宮)의 나물은 깨끗한 제수로 받드는 것을 알겠고 동경(東京)의 비단은 검소한 덕이 소소(昭昭)함을 보겠다. 이에 장추궁(長秋宮)의 아름다운 풍도를 부탁하니 양춘(陽春)의 혜택을 펴는 데 합한다.
아, 처음을 시작하고 처음을 바로잡는 날은 하자를 씻고 잘못을 없애는 때이다. 비록 구국(舊國)이지만 새롭게 하여 길이 국가의 공고를 도모하고 가정에서부터 국가로 미루어 가면 아마도 풍교(風敎)가 행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니, 잘 살피라."
12월 5일 계사
흰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였다.
최혜길(崔惠吉)을 도승지로, 이시매(李時楳)와 유철(兪㯙)을 부교리로, 조수익(趙壽益)을 이조 정랑으로, 임전(林)를 수찬으로, 이행원(李行遠)을 경기 감사로, 오단(吳端)을 황해 감사로 삼았다.
12월 10일 무술
유성이 북하성(北河星) 아래에서 나와 북두성 위로 들어갔고 또 정성(井星) 아래에서 나와 동쪽으로 들어갔다.
윤의립(尹毅立)을 예조 판서로, 이경석(李景奭)을 대사간으로, 권도(權濤)를 집의로, 이계(李烓)를 사간으로, 신유(申濡)와 임전(林)을 정언으로 삼았다.
12월 11일 기해
간원이 아뢰기를,
"근래 놀랄 만한 천재지변을 어찌 다 셀 수 있겠습니까마는 겨울 몹시 추운 때에 흰 무지개가 해를 관통한 변고는 또한 어쩌면 그리 참혹합니까. 해란 모든 양(陽)의 근본이고 임금의 형상인데, 무지개는 음특(陰慝)한 기운으로서 감히 관통하여 능멸하니 그 음한 기상이 또한 두렵습니다.
전하께서 이에 대하여 만약 척연히 개정하여 사방의 시청(視聽)을 넓히고 여러 사람들의 지혜를 합하여 한 세상의 훌륭한 자를 오게 하고 수합하여 베풀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어떻게 아래로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위로 하늘의 뜻을 보답하여 끊어져 가는 대명을 잇겠습니까. 평상적인 규정에 구애치 말고 자주 편전(便殿)에 나아가 혹은 삼사(三司)의 신하를 부르고 혹은 육조(六曹)의 관원을 부르며, 혹은 대신과 비변사의 여러 신하를 접견하고 하루 이틀 계속해 게을리 말며, 잘못된 정치 듣기를 구하고 백성 소생시키기를 힘써 강구하며, 양단(兩端)을 잡아 중도(中道)를 사용하고 반드시 살펴 시행하여 기천영명(祈天永命)의 도를 다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12월 12일 경자
상이 하교하였다.
"정사(正使) 신경진과 부사(副使) 윤휘는 각각 안구마(鞍具馬) 1필을, 제조 구굉(具宏)·이현영(李顯英)·이명(李溟)과 교명(敎命)·옥책문(玉冊文)의 제술관(製述官) 이경석과 서사관(書寫官) 오준(吳竣)은 각각 숙마(熟馬) 1필을, 전문 서사관(篆文書寫官)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은 반숙마(半熟馬) 1필을 주며, 승지 이행건(李行健)과 도청(都廳) 권도(權濤)·임담(林墰)은 각각 한 자급을 더해 주고, 낭청(郞廳)은 각각 숙마 1필을 주며, 감조관(監造官)은 모두 6품으로 승진시키고 이미 6품이 된 자는 승진 서용하며, 여러 집사(執事)는 각각 한 자급을 더해주고 자궁(資窮)한 자는 대가(代加)하라. 비록 몇 가지 일을 겸하였다 하더라도 거듭 상을 받지 못하게 하고 산원(算員) 이하는 해조로 하여금 쌀과 베를 분등하여 주게 하라."
빈객(賓客) 신득연(申得淵)과 박로(朴𥶇) 등이 치계하였다.
"마부달(馬夫達)이 남몰래 통역관 장예충(張禮忠)에게 말하기를 ‘세자의 책봉(冊封)을 지금까지 주청(奏請)한 바가 없으니 이 무슨 일인가. 주청사(奏請使)가 만약 오면 허락치 않을 리가 만무하다. 이미 책봉을 허락하면 반드시 먼저 세자를 내보낸 뒤에야 책봉 사신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이 뜻으로 돌아가 보고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합니다."
12월 13일 신축
윤방(尹昉)을 해창군(海昌君)으로, 구굉(具宏)을 공조 판서로, 남이웅(南以雄)을 대사헌으로, 박계영(朴啓榮)을 집의로, 안시현(安時賢)과 이여익(李汝翊)을 장령으로, 이도(李禂)를 부교리로, 박수문(朴守文)을 지평으로, 임전(林)를 수찬으로, 최문식(崔文湜)을 정언으로 삼았다.
비국이 아뢰기를,
"가례(嘉禮)를 진달하여 결정한 것은 실로 먼 장래를 염려해서입니다. 가례를 치르고 책봉을 청하지 않으면 반드시 의심을 내어 난처한 걱정이 닥칠 것입니다. 세자가 동방으로 돌아오는 것은 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우리가 해야 할 도리는 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책봉하고도 보내지 않는 것은 혹 있는 일이나, 책봉하지 않고 돌려보내는 것은 아마도 그럴 리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이유입니다. 황제가 서행(西行)한 뒤에 국중(國中)에서 자랑하는 말이 없으니 오래지 않아 돌아올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본국(本國)의 처사가 하나 하나 정성을 다한다는 것을 들으면 그 마음이 반드시 기뻐하여 일마다 모두 순조로울 것입니다. 지금 이 두 건의 책봉을 청하는 것은 실로 황제의 대단한 기쁨과 노여움이 관계된 것이니, 이것이 두 번째 이유입니다. 왕비의 책봉은 전에도 순부(順付)072) 한 준례가 있었으나 반드시 전례를 따르리라는 것은 실로 기필할 수 없습니다. 만약 불행하게도 이미 징속사(徵贖使)를 내보냈는데 계속하여 왕비 책봉사(王妃冊封使)를 내보내고 또 세자 책봉사를 내보낸다면 민력(民力)이 반드시 지탱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만약 두 건의 책봉을 청하겠다는 뜻으로 징속사가 오기 전에 먼저 말하면 세 가지 일을 한번의 사행(使行)에 아울러 부탁하는 희망이 없지 않은 것이니, 이것이 세 번째 이유입니다.
이는 이해(利害)에 관계된 바가 매우 크니, 만약 배종(陪從)하는 재상으로 하여금 조정의 뜻을 용골대(龍骨大)와 만월개(滿月介) 두 장수에게 먼저 말하기를, ‘본국(本國)이 이미 왕비를 책봉하였으니 황제께서 돌아온 뒤에 책봉을 청하는 사신을 보내려 하고, 세자의 책봉도 마땅히 일시에 청하려 한다. 그러나 팔도(八道)가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모두 굶주리고 있으니, 책봉 사신은 반드시 내년 추수를 한 뒤에 내보내야 군색한 걱정을 면할 수 있다. 원컨대 미리 이 뜻을 알아 잘 주선하기 바란다.’ 하면 이미 책봉을 청한 것으로 기뻐하여 반드시 허락지 않을 리가 없고, 이미 흉년 든 실상을 알면 징속(徵贖)할 숫자도 다소 삭감시킬 희망이 없지 않습니다. 또 책봉을 청하는 말은 비록 금년에 했다 하더라도 사신이 가는 것은 내년 3, 4월경에 있게 될 것이며, 직조(織造)와 고명(誥命) 등 물건은 즉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장마철을 당하면 책봉 사신의 행차도 우리의 요청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추수한 뒤에 이를 것입니다. 또 비록 민폐가 있다 하더라도 책봉을 청하는 것이 막중하니, 금일의 도리는 오직 마땅히 성의를 다하여 대국(大國)의 환심을 사야 합니다. 허례(虛禮)를 아껴 실제 걱정을 끼치는 것은 결코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하니, 답하기를,
"부자(父子)의 정(情)으로 말하면 한번 보는 것도 또한 크나큰 다행이다. 금일 경들의 요청은 어찌 내가 즐겨 들을 일이 아니겠는가. 다만 국가를 다스리는 도는 백성을 보호하는 것이 중하고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방책은 부역을 경감하는 것이 제일이다. 만약 백성을 돌아보지 않고 책봉 청하는 일을 거행하면 내 마음이 편치 않을 뿐만 아니라 백성이 반드시 보존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감정을 억누르고 성질을 참아 금년을 지내고자 하는데, 일이 또 불행히도 저들이 먼저 말을 꺼냈다면 지금은 막기 어려운 형편이다. 계사(啓辭) 중에 말한 세 가지 일을 아울러 한번의 사행(使行)에 부송한다는 것은 기필할 수 없으니, 왕비 책봉하는 한 가지 일은 우선 우리가 먼저 꺼내지 말라."
하였다.
12월 16일 갑진
옥당(玉堂)이 ‘재앙을 만났으니 수양하고 반성하라.’는 차자를 올리자, 답하였다.
"경들의 간절한 정성을 매우 아름답게 여긴다. 차자로 진술한 말은 격언이 아님이 없으니 내가 항상 이로 충고를 삼을 것이다."
상이 하교하였다.
"날씨가 몹시 추우니 옷이 얇은 군사는 해조로 하여금 겨울 옷을 나누어 주도록 하라."
12월 17일 을사
달이 헌원성(軒轅星) 오른쪽 각성(角星)을 범하였다.
김류(金瑬)·조익(趙翼)·심즙(沈諿)·김수익(金壽翼)·신상(申恦)·조빈(趙贇)·홍처후(洪處厚) 등을 석방하라고 명하였으니, 대사령(大赦令)으로 인해서이다.
12월 18일 병오
성주(星州) 사람 이명진(李名鎭)은 전 승지 이언영(李彦英) 첩의 아들이고 참판 김장생(金長生) 첩의 사위이다. 명진이, 그 처형(妻兄) 김고(金杲)가 고의 형 김영(金榮)과 고의 처 형제인 변탄(卞䋎)·변소(卞紹) 및 조성(曺成)·유여성(兪汝成)·유성하(柳成廈)·김자건(金自鍵)·정덕승(鄭德升)과 반역을 도모했다고 본도(本道)의 감사에게 밀고하였다. 감사가 치계하자, 도사(都事)를 보내어 잡아다가 추국청을 설치했다.
명진이 공초하기를 "김고가 스스로 말하기를 ‘나의 형 영 및 4∼5명과 함께 의거할 것을 도모하였으니, 창고를 열어 군사를 모집하고 먼저 삼남(三南)을 점거하여 중국 조정에 알리고 북쪽의 적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자.’고 했다." 하고, 또 김고가 공초하기를 "성품이 본래 우직하여 일찍이 명진에게 그 아버지의 잘못을 배척하여 말하였고, 또 이언영의 외손 박희집(朴禧集)이 역모로 벌을 받은 뒤에 명진에게 말하기를 ‘희집의 역모를 너희 부자(父子)는 반드시 알았을 것이다.’고 했다. 이로써 혐의를 맺어 불측한 말을 만들어냈다."고 하였으며, 변탄(卞䋎)·변소(卞紹)·조성(曺成)·유여성·유성하·김자건·정덕승 등의 공초가 명진의 공초와 서로 맞지 않았다.
상이 특명으로 형벌을 중지시키고 면대하여 질문케 하였으나 단서가 없었다. 상이 추국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고 옥사의 진위를 묻자, 모두 아뢰기를,
"이 옥사는 혐의에서 나온 듯한데, 김고가 부도(不道)한 말을 많이 하므로, 명진이 이를 책잡아 말한 것이니, 심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역모로 다스리는 것은 실정 밖의 처사인 듯하니, 다만 부도(不道)한 말을 한 것으로 죄목을 고쳐 엄히 국문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김고는 세 차례 형신(刑訊)한 뒤에 상이 형벌을 감손하라 명하여 사형을 삭감하고 정배(定配)하였고, 명진도 반좌율(反坐律)로 처단할 수 없다 하여 특명으로 정배하였으며,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였다.
12월 21일 기유
숙의 장씨(淑儀張氏)를 소의(昭儀)로, 숙원 조씨(淑媛趙氏)를 소원(昭媛)으로 삼았다.
상이 김류를 서용하라고 하교하였다.
윤방을 영중추부사로, 김류를 승평 부원군(昇平府院君)으로, 이성구(李聖求)를 판중추부사로, 이덕형(李德泂)을 예조 판서로, 민형남(閔馨男)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12월 22일 경술
간원이 아뢰기를,
"사관(四館)073) 의 참하(參下)를 반드시 벼슬한 순서를 따라 승진시키는 것은 옛 준례가 그러하였습니다. 근래 폐단을 바로잡는 조처로 인하여 성균관의 실직은 벼슬한 햇수를 계산하여 승진시키는 규정이 있게 되었고, 실직에 들지 못한 자는 실로 벼슬한 숫자를 계산할 만한 것이 없으므로 반드시 차례로 천거하였습니다. 학유(學諭) 이정상(李廷相)은 까닭없이 자기 윗사람을 뛰어넘어 실직에 임명되었으니 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이러한 길이 한번 열리면 서로 사양하는 풍속이 무너지고 다투어 승진하려는 습관이 열릴 것이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정상과 해당 장무관(掌務官)을 아울러 파직시키라 명하소서."
하니, 추고하라고 답하였다.
지제교(知製敎)를 초선(抄選)하니, 최계훈(崔繼勳)·유철(兪㯙)·유심(柳淰)·이도장(李道長)·이지항(李之恒)·김진(金振)·유석(柳碩)·신유(申濡)·이응시(李應蓍)·양만용(梁曼容)·이회(李禬)·신익전(申翊全)·이원진(李元鎭) 등 13명이었다.
허적(許積)과 엄정구(嚴鼎耉)를 수찬으로, 조수익(趙壽益)을 응교로 삼았다.
12월 25일 계축
간원이 아뢰기를,
"사치하면 재물을 손상하고 재물을 손상하면 반드시 피해가 백성에게 이르는 것입니다. 이는 평일에도 마땅히 경계할 바인데, 더구나 지금은 국가가 혼란한 시기이고 흉년의 걱정은 중외(中外) 모두가 똑같은 때이니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절약하는 모든 방법을 참으로 평일보다 갑절로 하지 않으면 국가를 지탱할 수 없고 백성들이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현재 비록 필요 없는 관리를 없앴다고 하지만 필요 없는 관리가 아직도 많고 비록 낭비를 줄였다고 하지만 낭비가 한이 없어, 혹은 몸이 지방에 있으면서 멀리 국록을 받는 경우도 있고 혹은 변장(邊將)에 이름을 붙여놓아 봉급이 아전들의 수중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있으니, 이는 다만 그 중에서 한두 가지를 열거한 것일 뿐입니다. 그 밖에 허비하는 일을 어찌 다 말하겠습니까. 해조로 하여금 특별히 시행하고 명백히 조사하여, 긴요치 않은 무리와 낭비하는 모든 일은 낱낱이 절약하고 삭감하여 형식으로 돌아가게 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간원이 상차하기를,
"본원(本院)이 지난번에 아뢴 것은 전하께서 자주 신하들을 접견하여 의견을 수합하고 덕 베풀기를 깊이 바란 것인데, 한번 아뢴 대로 하라는 전교만 내리고 오래도록 채용한 사실이 없으니, 이는 몸을 뒤척이며 경계하는 성의가 지극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까. 아니면 추위가 혹심하여 옥체가 미령해서 그런 것입니까. 신들은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또 삼가 듣건대 화공[畵手] 이징(李澄)은 상의 명령으로 그림 그리는 일을 많이 한다고 하니, 신들은 참으로 이런 일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말이 헛소문이라면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지금이 어느 때인데 이런 일이 있습니까. 사소한 오락을 즐기는 것은 평일에도 경계해야 하는데, 더구나 존망(存亡)이 달려 있는 위급한 때이겠습니까. ‘무익한 일을 하여 유익한 일을 해롭히지 말라.[不作無益害有益]’는 훈계가 《서전》에도 있지 않습니까. 지금 이 그림 그리는 일보다 무엇이 더 무익한 것이 있겠습니까. 하늘에 꾸짖음을 당한 것이 저와 같이 참혹하고 백성들이 아래에서 원망함이 이와 같이 심각한데, 두려워하고 구제하는 일은 하지 않고 지금 화조(花鳥)와 산수(山水)의 그림에 마음을 쓰니, 아, 작년 남한 산성의 일을 전하께서 이미 잊으셨습니까. 사방에서 소문을 듣는 자들이 무어라 하겠습니까. 신들은 이 말을 듣고 놀란 마음에 반신반의하여 단정치 못하였습니다.
상소에 나타내는 것은 옳지 않은 바가 있어 짧은 차자를 올려 생각한 바를 진달하오니, 삼가 전하께서는 남한 산성의 일을 잊지 말아 하늘의 경계를 삼가하고 연못에 다다른 듯 얇은 얼음을 밟는 듯 날마다 조심하며, 완물(玩物)을 끊어버려 각고(刻苦)의 뜻을 더욱 더하고 신하를 접견하여 위급한 때의 업무를 문의하면 이보다 다행함이 없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다 살펴보니 매우 가상하다. 차자로 진달한 일은 마땅히 깊이 생각하겠다."
하였다.
12월 26일 갑인
헌부가 아뢰기를,
"새로 제수된 회덕 현감(懷德縣監) 지봉수(池鳳邃)와 금화 현감(金化縣監) 이진행(李震行)은 일찍이 병자 호란에 묘사(廟社)의 관원으로서 잘 모셔 받들지 못한 죄가 있고 기록할 만한 공로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견책을 모면하고 도리어 차례를 건너 뛰어 높은 직급을 받아서 여론이 자자하여 지금까지 그치지 않고 있는데, 뜻밖에 지금 특별히 제수하는 명령이 있으니 여론은 더욱 타당치 않게 여깁니다. 아울러 체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때 모시고 온 자는 다만 이 두 사람 뿐이었기 때문에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특별히 수령을 제수한 것이 부당하지 않다."
하였다.
12월 30일 무오
유성이 필성(畢星) 아래에서 나와 유성(柳星) 위로 들어갔고 또 진성(軫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다.
이에 앞서 전 예조 판서 조익(趙翼)이 탄핵을 당했을 때에, 병조 판서 이시백(李時白)이 상소하여 변론하였는데, 그 대략에,
"임금을 잊고 국가를 저버리는 것은 막심한 죄악이니, 보통사람에게 억지로 덮어씌우는 것도 못하는 바인데 더구나 조익에게 씌우겠습니까. 신이 그의 일을 목격한 여러 사람들에게 들은 바로 밝히겠습니다.
당초 서울을 떠날 때 강도(江都)로 계획을 정하고 노인은 먼저 들어가라는 전교가 있었는데, 조익의 아비 조영중(趙瑩中)은 나이 80이었으나 또한 호종(扈從)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익이 그의 아들 조진양(趙進陽)으로 하여금 그 아비를 모시고 먼저 들어가게 하였고, 조익은 비변사의 여러 신하들과 종묘 사직의 신주를 호종하려고 하였습니다. 숙녕전(肅寧殿)을 모시고 가는 것은 예조 참판 여이징(呂爾徵)으로 정하였는데, 예조 관리가 고하기를 ‘참판은 숙녕전을 모시고 먼저 갔으나, 종묘의 신주는 아직까지 모시고 나오지 못했다.’고 하자, 대신들이 놀라서 ‘판서는 빨리 가라.’고 하므로 도착해 보니, 막 모시고 나왔습니다. 조익이 ‘종묘 신주를 모시고 가는데 예관(禮官)이 없을 수 없으니, 마땅히 참판을 쫓아 따라가서 물러와 호종(扈從)케 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중로(中路)에 이르러 그의 아들을 만났는데 발이 아파 걷지 못하여 그의 늙은 아비와 서로 헤어져 있었습니다. 조익이 달려서 양천(陽川)에 이르러 종묘의 신주가 이미 숙녕전과 한 곳에 모셔진 것을 보고는 즉시 그 아비를 찾았지만 찾지 못하였습니다. 또 임금의 소식을 듣지 못한 상황이었으니, 대저 그가 나갈 때에 선발대는 이미 출동했는데 별안간 남문(南門)으로 회가(回駕)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며 다만 적의 침입이 다소 누그러져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다음날 비로소 임금께서 남한 산성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80세인 늙은 아비를 잃어, 허둥지둥하는 때에 자식의 지극한 심정은 다른 것을 생각치 못하고 다만 그 아비를 찾은 다음 행재소(行在所)에 가려고 하였습니다. 밤낮으로 울부짖으며 양천(陽川)·김포(金浦)·통진(通津) 등 세 고을 사이에서 분주히 찾아 며칠 후에 비로소 그 아비가 있는 곳을 알았는데, 행재소는 이미 멀리 떨어져 들어가 모실 길이 없었으니, 그 낭패가 어떠하였겠습니까.
강도(江都)는 하늘이 만든 요새지로서 사람들이 모두 피난지(避亂地)로 여기고 있으니, 조익이 그때에 만약 자신만 살기를 도모했다면 어찌 그대로 강도에 들어가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다만 임금이 위급하므로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죽기를 각오하고 슬피 눈물을 흘리며 군사를 모집하여 적과 싸우려는 계획을 하였습니다. 경기 중군(中軍) 진영의 1천여 군사가 그 진영의 장수를 잃고 중로에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 군사를 사용하려고 달려가 남양 부사(南陽府使) 윤계(尹棨)를 보고 그와 함께 계획을 정하였습니다. 심지원(沈之源)·김상(金尙)·이시직(李時禝)·윤명은(尹鳴殷) 등도 또한 모두 모였는데, 분부하고 배치할 때에 도순찰사(都巡察使)가 명령을 전달하여 그 군사를 부르자, 이에 다시 군사를 모집하여 수백 명을 얻어 즉시 곧장 나아가려고 하였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반드시 위태로운 것을 알았지만 그의 지성을 보고 감히 만류하지 못하였습니다. 적의 군대가 갑자기 이르러 윤계는 죽고 모집한 군사는 모두 흩어져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되자 비로소 일을 같이한 사람들과 강화도로 들어갈 것을 정하였습니다.
아, 그 늙은 아비를 잃었을 때에 어느 곳에서나 죽을 뜻이 있었으니, 정상을 헤아려 보면 장차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성상의 전교에 정상이 용서할 만하다고 한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말하는 자들이 ‘위급한 시기에 전하를 버리고 바다로 도망쳤다.’고 하니 그 너무나 가혹합니다.
조익은 집안이 몹시 가난했습니다. 비록 젊은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여 상경(上卿)에 올랐으나 서울에 두서너 칸의 집도 없어 임시 집을 빌어서 살았고 봉급으로 먹고 살았으며, 피난할 때 집에는 말 한 마리도 없어서 부녀(婦女)들이 걸어갔습니다. 멀리 피난하기 어려운 형편이라서 신에게 부탁하여 남한 산성으로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겨우 성 밑에 도착하자 적을 만나 도망쳐 바다 섬으로 들어갔고, 조익은 여러 사람들과 분주히 군사를 모집하느라 그 가족과 각각 다른 지역에 있었으니 어느 겨를에 돌보았겠습니까. 그런데 말하는 자들이 ‘식량을 모으고 배를 빼앗아 오직 자신만 편하게 지내려는 대책을 장만하였다.’ 하고, 또 그 말을 바꾸어 말하기를 ‘화량 첨사(花梁僉使)의 배를 빼앗고 남양(南陽)에 옮겨 쌓아둔 곡식을 방출했다.’고 하니, 어쩌면 그리 모함이 심합니까. 의병을 일으켰던 일이 실패한 후에 화량의 배로 피난하는 남녀 수만 명을 건네주었고, 강화도로 들어갈 때 타고 간 것은 공무로 인하여 들어가는 배였습니다. 윤계(尹棨)를 장사지낼 때 의논해서 향소(鄕所)로 하여금 약간의 관청 곡식을 사용하게 하였는데, 이런 따위의 일로 모함하는 자료를 삼는단 말입니까.
강도(江都)가 함락되던 날에 이르러서는 갑곶(甲串)의 파수(把手) 보는 곳에 나아가 강 언덕에 홀로 서 있었는데, 대포(大砲)가 쏟아지는 곳인데다가 적의 군대는 이미 강을 건넜고 우리의 여러 군사는 모두 흩어졌습니다. 곁에 두 아들이 있다가 울면서 적의 칼날을 피하자고 청하니 그 아들을 꾸짖고 앉아서 움직이지 않자, 두 아들이 급히 껴안고 이행진(李行進)과 함께 떠밀며 절벽을 굴러내려와 물속에 빠졌습니다. 마침 어떤 역사(力士)가 물가에 매어 놓았던 조그마한 배 1척을 끌고 내려와 껴안아 싣고 탈출하였으니, 조익은 실로 죽는 것을 자신의 분수로 여겼는데 다만 죽지 않았을 뿐입니다. 지금 ‘자취를 겨우 성에 비쳤다가 일이 급해지자 먼저 달아났다.’고 말하니, 망극한 말이 이와 같습니다.
전후 사적의 증거가 명백하고 여러 증인이 모두 있으니, 거짓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 전하께서 조익을 어찌 임금을 잊고 국가를 저버리며 교묘하게 살기를 도모하는 사람으로 보셨겠습니까. 천품이 순수하고 정직하며 학문이 심오하여 중후한 덕과 지극한 행실은 충분히 한 세상의 사표(師表)가 될 만한데, 미워하는 자에게 모함을 당한 것이 이토록 극심하니, 신은 몹시 마음이 아픕니다. 신이 평생 지기지우(知己之友)로서 만약 혼가(婚家)라는 조그마한 혐의에 구애되어 끝내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면, 이는 위로 전하를 저버리고 아래로 훌륭한 벗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원컨대 신의 상소를 내려 공경들에게 물어보소서. 신의 말이 만약 거짓이라면 빨리 신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였다. 상소가 들어갔으나, 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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