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38권, 인조 17년 1639년 1월

싸라리리 2026. 1. 3.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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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기미

상이 명나라를 위하여 명정전(明政殿)에서 망궐례(望闕禮)를 행하였다.

 

1월 3일 신유

유성이 삼기성(參旗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가고, 또 각성(角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다.

 

이경석(李景奭)을 이조 판서로, 남이공(南以恭)을 대사헌으로, 김수현(金壽賢)을 대사간으로, 이도(李禂)를 헌납으로 삼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평안도 숙천(肅川)에 지진이 일어났다는 장계가 들어온 지 오래 되었으나, 신들이 이미 시일이 지난 일이어서 회계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 아뢰지 않았는데, 지금 하문을 받으니 황공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 본도에 해괴제(解怪祭)를 설행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4일 임술

이조 판서 이경석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따뜻하게 하유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1월 5일 계해

유성이 천균성(天囷星) 아래에서 나와 천원성(天苑星)으로 들어가고, 또 낭장성(郞將星) 아래에서 나와 대각성(大角星) 위로 들어갔다.

 

1월 6일 갑자

호조가 아뢰기를,
"영중추부사 윤방(尹昉), 승평 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金瑬)가 모두 정월의 요미(料米)를 받지 않으니, 근래의 전례에 의하여 창관(倉官)으로 하여금 받아들이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비국이 아뢰기를,
"볼모로 보낸 영의정001)  의 아들 최후량(崔後亮)을 과거에 응시한다는 이유로 환국을 허락하였는데, 아우 최의길(崔誼吉)을 대신 볼모로 청나라에 들여보내고자 한다 하니, 잠시 서로 교체하게 하는 것도 무방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7일 을축

주강에 《시전(詩傳)》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특진관 이명(李溟)이 나아가서 아뢰기를,
"세폐(歲幣)는 해조에서 마련해야 하나, 부득이 외방에 배정할 것은 피물(皮物)과 지물(紙物)입니다. 분부가 급하므로 감히 이에 우러러 여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상이 출사하기를 기다려 충분히 강구하여 처리하겠다. 다만 내 생각으로는 금년에는 백성에게 거두지 않더라도 오히려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염려가 없지 않은 것은 청인이 해조에서 단독으로 숱한 물품을 마련했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해조가 풍족해서 그렇게 한 것으로 여길까 하는 점이다."
하자, 이명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염려하시는 바가 과연 아주 합당합니다. 더구나 세폐를 마련해 보낸 뒤에 다시 은을 징발하는 객사(客使)의 행차가 있으면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외방에 배정할 수 있는 것은 배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북도의 백성은 입고 먹는 것이 모두 부족하니, 무명을 내려보내면 반드시 몸이 따스한 은혜를 느낄 것이고, 또 댓가를 주어 곡식을 무역하여 진휼하면 실질적인 은혜가 될 것 같다. 깊이 생각하여 힘써 행하여야 할 것이다."
하니, 이명이 아뢰기를,
"그렇다면 몇 동(同)의 무명을 보내야 하겠습니까?"
하자,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하였다. 승지 이경여(李敬輿)가 아뢰기를,
"지금 이 하교는 모두 민생을 진념하시는 성대한 뜻입니다. 그러나 근래 재이(災異)가 거듭 생기는데, 변고는 헛되이 생기는 것이 아니므로 장차 무슨 일이 있을지 몰라 한밤중에도 이를 생각하면 근심스러움을 견딜 수 없습니다. 기근(飢饉)은 백성에게 있어서 실로 절박한 재변이니,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장차 어떻게 보전되겠습니까. 위에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근심하는 성의가 지극하기는 하나, 아마도 조금은 미진함이 있는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승지의 말이 옳다. 이는 반드시 나의 공경함과 근신함이 지극하지 못한 바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것이다."
하자, 경여가 아뢰기를,
"정치에 힘쓰는 실상을 반정(反正)한 초기처럼 하기를 생각하시고, 무휼하는 정치를 남한 산성(南漢山城)에 계시던 날처럼 하기를 생각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참으로 좋다. 이것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의 일을 잊지 말라는 뜻이다."
하였다. 이경여가 아뢰기를,
"전라도 승군(僧軍)이 깃발을 세워 장수라 칭한 것은 무지하여 망녕되이 한 짓인 듯한데 율에 의하여 처치하라고 판하(判下)하셨습니다. 인명은 지극히 중하니 다시 대신에게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인명이 지극히 중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나, 나라의 기강에 관계되는 바이니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된다. 비록 한두 사람일지라도 어찌 감히 군병의 모임이라고 일컬을 수 있겠는가. 이는 실로 큰 변고이니 통렬히 징치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임기가 찬 수령의 잉임을 계청하는 것은 근래의 폐습입니다. 평안 감사 민성휘(閔聖徽)가, 부사(府使)를 유임시켜 달라는 강계(江界) 백성들의 청원으로 인하여 원납미(願納米)를 먼저 받고서 비로소 계문하였습니다. 번신(藩臣)의 사체에 있어서 이와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9일 정묘

달이 묘성(昴星)을 범하였다. 유성이 방성(房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간원이 아뢰기를,
"예조 좌랑 김지남(金地南)은 사람됨이 외람되고 몸가짐이 비루합니다. 일찍이 호조의 낭관이 되어 물화를 출납할 즈음에 근신히 하지 못한다는 비난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파면된 지 오래지 아니하여 곧바로 남궁(南宮)002)  의 청선(淸選)에 제수되니 물정이 모두 놀랍니다. 체차를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지경연(知經筵) 남이웅(南以雄)이 아뢰기를,
"신이 평소부터 여염에서 후생을 가르치는 자를 익히 보았는데, 모두 의리상의 말로써 권계(勸戒)하였습니다. 이 풍속이 한번 무너지면 인재가 점차 쇠퇴해집니다. 신의 의견으로는, 어린아이의 강습에 있어서 먼저 《소학(小學)》을 힘쓰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승지 최연(崔葕)이 아뢰기를,
"대사성은 소임이 극히 중하니, 적합한 사람을 가려서 구임(久任)시켜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옳은 말이다. 가려 차임하라는 뜻으로 해조에 말하라."
하였다. 남이웅이 아뢰기를,
"교서(敎書)를 보건대 ‘잡범의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탕척한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고신(告身)을 빼앗기고 파직당한 가벼운 벌만은 석방되지 못하니, 진실로 사문(赦文)의 본뜻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진실로 그러하지만, 지금은 행할 수 없다. 옛날에는 신하로서 낙점을 받지 못한 자는 감히 다시 천거하지 못하였는데, 지금은 여러 차례 낙점하지 않더라도 주의(注擬) 가운데 굳이 천거한다. 그러니 애초에 수서(收叙)하여 정사(政事)의 체통을 손상시키지 않느니만 못하다."
하였다.

 

송시길(宋時吉)을 우부승지로, 권도(權濤)를 동부승지로, 조수익(趙壽益)을 집의로, 심재(沈𪗆)를 부교리로, 이경여(李敬輿)를 부제학으로, 이명웅(李命雄)을 대사간으로, 임전(林)을 지평으로, 조중려(趙重呂)를 수찬으로, 심열(沈悅)을 주청사(奏請使)로, 오준(吳竣)을 부사(副使)로 삼았다.

 

1월 10일 무진

비국이 아뢰기를,
"전라도 승인(僧人) 조형(照亨)에 관한 일은, 그 형적을 논하면 조짐을 자라나게 해서는 안 되므로 죄가 반드시 죽여야 하는 데 있습니다만, 그 정상을 따져 보면 은의에 감동하여 뜻이 국난에 나아가 싸우려는 데 있었습니다. 이 두 가지를 참작하여 정상과 법 양쪽을 다 보존해 의승(義僧)의 마음을 꺾지 말고 후일의 폐단을 통렬히 징치하려는 것이 곧 신들의 구구한 소견이었으므로, 신품(申稟)하였던 것입니다. 법을 적용하는 경중에 이르러서는 오직 성상의 재결에 달렸을 뿐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감사(減死)로 논죄하라. 그리고 이른바 ‘의승(義僧)’이란 명호는 반드시 후일의 폐단이 있을 것이다. 무사할 때에는 의승이란 명호를 없애는 것이 옳다."
하였다.

 

1월 12일 경오

해에 겹 햇무리가 있고, 햇무리에 양이(兩珥)가 있으며, 흰 기운이 양이에서 나와서 북방을 가리키고 있었다.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동지경연 이경석(李景奭)이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이조 판서의 중임을 맡고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의 원하는 바는 공도를 밝히고 사심을 끊어버리어 인재들로 하여금 침체됨이 없게 해서 조정에서 각자 그 직분을 거행하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실로 힘이 미치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마땅히 마음가짐을 공평히 하고 어진 인재를 들어 쓰되 신분에 구애되지 말아서 나의 뜻에 부응하라. 그리고 요즘은 낭관이 마음대로 하는 일이 없는가?"
하자, 이경석이 아뢰기를,
"새 제도로 말씀드리면 통색(通塞)003)  할 즈음에 낭관이 간여함이 없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신이 일찍이 참판으로 있을 때에 보니, 한때 청망(淸望)에 처음 주의(注擬)된 자가 6, 7인이 되었으나 또한 일일이 묻지 않으니, 법을 새로 세운 뜻이 없는 것 같았는데, 마침 성상의 하교를 받았기에 감히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그때 신으로 하여금 지제교(知製敎)를 초선(抄選)하게 하였는데, 이는 신이 대제학으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이 말하기를 ‘이것은 한 사람이 선발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잠시 후일을 기다려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번날 이조에서 초선하였으나 신은 그것을 듣지 못하였고, 초선된 사람이 비록 모두 합당하기는 하였으나, 전일 신으로 하여금 초선하게 하던 뜻과는 아주 다릅니다. 신이 본래 인망이 없으면서 염치없이 그 자리에 있은 지 오래 되었으니 문형(文衡)의 소임을 먼저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직하지 말라. 지제교를 초선할 때 어찌 대제학에게 묻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또 그 수효가 너무 많아서 자못 정밀히 초선하는 뜻이 없으니, 해당 관원을 추고하고, 초계(抄啓)한 자는 등용하지 말라."
하자, 이경석이 아뢰기를,
"신이 문형을 사직하는 차자에서 이 실상을 진달하려 하였으나, 배격하는 혐의가 있을까 염려하여 감히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하문을 받고 다만 전일의 규례를 말하였을 뿐입니다. 초선된 사람들은 모두 합당하니, 지금 쓰지 않으면 일이 몹시 거북스럽습니다. 다만, 지제교를 초선할 때 이조 낭관과 상피(相避)의 처지에 있는 자도 초선되었다 하는데, 이것도 전일의 규례에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 또한 마땅치 않은 것이니 추고 중에 넣어야 한다. 또 낭관으로 하여금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하는 법은 뜻이 범연한 것이 아니니, 경은 알아야 할 것이다."
하자, 이경석이 아뢰기를,
"근일 대간(臺諫)의 논계 안에, 감찰(監察)과 금부 도사(禁府都事)를 사태(沙汰)시키라는 청이 있어 이미 윤허를 받았습니다. 도사 중에는 호종한 사람이 많고 준삭(準朔)004)  한 자가 있기에 이르렀으니, 대간의 뜻이 어느 사람에게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감찰은 옛날 전중 어사(殿中御史)로, 사람은 비록 경미하더라도 소임은 중합니다. 전조(銓曹)는 제수하는 것이 소임이고 대간은 규탄해 적발하는 것이 책무입니다. 그런데 모두 이름을 지적해 탄핵하지 않고 해조에 미루어버리니, 조사하여 가리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상이 옳다고 하였다.

 

1월 13일 신미

유성이 진성(軫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다.

 

1월 14일 임신

집의 조수익(趙壽益)이 아뢰기를,
"연신이 지제교의 초선(抄選)에 관한 일로 전관(銓官)을 극력 배척하였는데, 신은 그 당시의 전랑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대개 지제교의 소임은 반드시 한 시대의 재주와 명망이 합당한 자를 뽑아야 하므로, 참으로 낭관 혼자서 사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달, 초출할 때 관안(官案)을 상고하여 성명을 기록해서 당상에게 고하였더니, 참의 정태화(鄭太和)가 판서 남이공(南以恭)과 상의하고 이어서 이름을 죽 가리켜 주었으므로 신이 일체 말한 바에 의하여 썼고, 끝내 한 사람도 그 사이에 더 보태거나 줄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대제학에게 묻지 않은 것은, 또한 곡절이 있습니다. 신이 동료와 처음 이 일에 대해 생각할 때 대제학에게 물어야 마땅할 듯하였으므로 가서 의논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래된 아전을 불러서 전의 규례를 물어보았더니, ‘전부터 본조에서 초출하였지 별도로 가서 의논한 규례는 없다.’ 하였고, 당상도 ‘전의 규례가 이와 같으니, 새로운 규례를 새로 만들기는 어렵다.’고 하였으므로, 마침내 가서 묻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사한(詞翰)의 소임은 관직의 제배와 달라서 오직 문재(文才)가 합당하느냐만을 따지고 상피에는 구애되지 않는 것으로, 전의 규례 또한 그러하였습니다. 옥당(玉堂)의 초록(抄錄)이 중하다고 할 만하나, 초록할 때 상피되는 사람은 다만 손수 권점(圈點)하지 않을 따름이고 상피에 구애되어 참록(參錄)되지 못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니, 그 어찌 이것과 다르겠습니까. 하물며 이 지제교는 전부터 전랑(銓郞)으로서 초출을 받은 자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상피의 법이 없음은 더욱 분명합니다. 신이 이미 남의 현저한 배척을 받았고, 또 추고해야 할 대상 중에 들어 있으니 결코 하루라도 언관의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하고, 대사헌 남이공이 아뢰기를,
"신이 전일 이조 판서로 있을 때 도목 정사가 끝나갈 무렵에 낭청이 20인을 초록하여 신에게 와서 보이기에, 신이 말하기를 ‘이 수효는 너무 많아서 정밀하지 못한 듯하니, 수효를 감소하지 않을 수 없고 문형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더니, 낭청이 곧 하리에게 예전 규례를 물었는데, 하리가 말하기를 ‘독서당(讀書堂)의 초록은 전적으로 문형에게 물어야 하나, 지제교에 이르러서는 원래 본조에서 가서 묻는 규례가 없다.’ 하였습니다. 낭청이 물러가서 동료들과 7인을 감소하였는데, 신의 사위 이원진(李元鎭)이 또한 초록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신이 마음 속으로 매우 혐의하여 곧 삭제하도록 하였더니, 좌중이 모두 말하기를 ‘지제교는 본래 상피가 없으니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신도 생각해 보건대, 고 이산해(李山海)가 전장(銓長)으로 있을 적에 그의 사위 이덕형(李德馨)이 초선에 참여되었으며, 이덕형이 전장으로 있을 적에 그의 동서인 이상홍(李尙弘)도 초선되었었으니, 상피가 없음이 분명합니다. 다만 신이 용렬하고 문재가 없어서 옛날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많은데, 깊이 생각하지 않고 망령되이 규례만 믿고 굳이 삭제하지 못하였으니, 신의 잘못한 바가 추고당한 낭관과 다름이 없습니다. 결단코 잠시도 언관의 자리에 그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헌납 이도(李禂)가 아뢰기를,
"대간이 일을 논함에는 원래 일정한 규례가 없습니다. 지적하여 적발할 수 있는 것이면 지적하여 적발하고 사태를 청할 수 있는 것이면 사태를 청하여, 오직 사체에 합당한지의 여부를 살펴볼 뿐이니, 어찌 이것으로써 책임을 떠민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감찰의 직임은 비록 전중 어사의 호칭을 빌어 띠고 있으나 실제는 서관(庶官)입니다. 전부터 사태하는 것은 분명히 증거할 만한 규례가 있으니, 어찌 이것으로써 다시 대간에게 책임을 미루려고 해서야 되겠습니까. 신의 못남으로 인하여 말이 신임을 받지 못하였으니,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1월 15일 계유

윤이지(尹履之)를 도승지로, 이상형(李尙馨)을 사간으로, 최계훈(崔繼勳)·홍무적(洪茂績)을 장령으로, 김진(金振)을 수찬으로, 권임중(權任中)을 정언으로 삼았다.

 

비국이 아뢰기를,
"지난해 순검사(巡檢使) 임광(任絖)이 파직된 뒤에 본사에서 대임을 차출하기를 청하였더니 ‘명년 봄에 차출하겠다.’는 분부가 계셨습니다. 지금 임광이 이미 서용의 명을 받았으니, 그 소임을 그대로 맡아야 할 듯합니다. 다만, 임광은 천성이 거만하며 아랫사람의 실정을 잘 알지 못하여 남방의 군민들이 자못 좋아하지 않는다 합니다. 절제(節制)하고 호령하는 소임은 모름지기 인심을 얻는 것을 우선으로 삼아야 합니다. 임광의 대임은 변경의 일을 잘 알고 너그러움과 용맹을 겸비한 사람으로 차출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상이 일렀다.
"중일(中日)005)  에 활쏘기와 포쏘기를 시험보이는 법을 변란으로 인하여 오래도록 폐지하고 거행하지 않았으니 앞으로 거행하도록 하라."

 

1월 16일 갑술

옥당이 차자를 올리기를,
"전의 규례가 있는지에 대해 재삼 자세히 물어보았더니, 가서 의논하지 않은 것은 자기의 과실이 아닌 듯하나, 자신이 추감(推勘)당하였으니 그 직임에 그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같이 출사하던 날 이미 서로 물어보는 것으로써 말하였고, 상피(相避)도 아울러 초선(抄選)하는 것은 증거할 만한 규례가 분명히 있으며, 감찰을 태거하는 논의는 여러 사람의 논의에서 나왔으니 형세상 지적하기 어렵습니다. 단지 전의 논의를 따르고 별다른 뜻을 두지 않았으니 무슨 피할 만한 점이 있겠습니까. 남이공·이도는 모두 출사하도록 명하고, 조수익은 체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이도도 체차하라."
하였다.

 

다시 김류를 호위 대장으로 삼고 그의 군관 중 다른 장수에게 분속(分屬)된 자도 아울러 환속하게 하였다.

 

영의정 최명길(崔鳴吉)이 상차하여 병을 이유로 사직하니, 상이 위유(慰諭)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1월 17일 을해

도승지 윤이지(尹履之)가 상소하기를,
"전에 이 직임에 있으면서 망령되이 소회를 진달한 것은 사사로움을 위한 것이 아니었는데, 비방하는 논의가 마구 가해지니, 지금 다시 명기(名器)를 욕되게 할 수 없습니다. 신의 직을 체차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강원 감사 유성증(兪省曾)이 치계하기를,
"돌림병이 북관(北關)으로부터 전염되어 기근 중에 점차 번지는데도 먼 외방에서 약물(藥物)이 없어 구제할 수 없으니, 더욱 답답합니다."
하였는데, 예조가 두 의사(醫司)006)  로 하여금 약물을 넉넉히 보내어 구제하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1월 18일 병자

유성이 정성(井星) 위에서 나와 북두성 아래로 들어갔다. 또 누성(婁星) 아래에서 나와 서방으로 들어갔다.

 

1월 19일 정축

김수현(金壽賢)을 도승지로, 송시길(宋時吉)을 동부승지로, 최혜길(崔惠吉)을 대사간으로, 목성선(睦性善)을 집의로, 신익전(申翊全)을 헌납으로, 정지화(鄭知和)·이여익(李汝翊)을 정언으로 삼았다.

 

예조가, 양전(兩殿) 및 세자궁(世子宮)의 단오절(端午節) 방물 물선(方物物膳)을 다시 설행하기를 청하니, 답하였다.
"지난해의 규례에 의하여 하고, 중궁전(中宮殿)에도 봉과(封裹)를 줄이라."

 

1월 21일 기묘

해에 겹 햇무리가 있고 안쪽 햇무리에는 양이(兩珥)가 있으며, 햇무리 위에 관(冠)이 있고 흰 무지개가 햇무리를 꿰어 해를 가리키고 있었다.

 

1월 22일 경진

대사헌 남이공이 병을 이유로 소를 올려 면직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1월 23일 신사

남이웅(南以雄)을 대사헌으로, 이도(李禂)를 교리로, 조중려(趙重呂)를 수찬으로 삼았다.

 

충청 감사 김육(金堉)이 치계하였다.
"공주(公州)에 돌림병이 크게 번져 죽은 사람이 1백 8인입니다. 온 마을이 사망한 경우도 있으며, 이웃 고을에 전염하여 죽은 사람이 또한 서로 잇따르고 있습니다."

 

1월 24일 임오

이보다 앞서 영의정 최명길이 심양(瀋陽)에서 돌아와서 양서(兩西) 일로(一路)의 폐해를 진달하면서, 강음현(江陰縣)이 가장 쇠잔하니 금교참(金郊站)으로 이설(移設)하여 나와 대접하는 폐해를 덜어주기를 청하니, 상이 잠시 3년간 부세를 감면하여 그들로 하여금 경영해서 이설하게 하였다.

 

전라도 방답진(防踏鎭)의 병선이 불탔는데, 상이 그곳의 첨사(僉使)를 장형(杖刑)하고 파면하도록 명하였다.

 

1월 25일 계미

상이 소대(召對)를 명하였다. 《시전》을 강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요즈음 도성 백성의 굶주리는 근심이 매우 급한데, 조정에서도 구제할 계책이 없으니 극히 근심스럽습니다. 남한 산성의 쌀 수천 석을 내어 무명을 무역하되, 시장 가격보다 쌀의 수량을 조금 더 많게 하면 곤궁에 허덕이는 위급한 상황을 다소나마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 또 쌀을 바꾸어 채워 갚게 하면 반드시 남는 바가 있을 것이고 남한 산성에서도 손해가 없게 되어 양쪽이 다 편리할 듯하기에 감히 여쭙니다."
하니, 답하기를,
"수어사(守禦使)에게 물어서 처리하라."
하였다.

 

1월 26일 갑신

우박이 내렸다.

 

이현영(李顯英)을 대사헌으로, 박계영(朴啓榮)을 집의로, 목성선(睦性善)을 교리로 삼았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정건(李廷楗)을 사천(泗川)에 유배하였다. 군사와 백성을 침탈하고 국가의 곡식을 마음대로 쓴 죄 때문이다.

 

이때 비국의 대소 문서 내용이 청국에 관계되어 조금만 기휘(忌諱)할 것이 있으면 작은 궤에다 함봉(緘封)하고 ‘밀갑(密匣)’이라 부르며, 병방 승지만 열어보게 하였다. 그러므로 사관이 제대로 다 기록할 수 없었다.

 

1월 27일 을유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승지 조위한(趙緯韓)이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남방에 왕래하여 그 도의 일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비록 병화가 미치지 않은 곳이라도 한재가 매우 참혹하여 백성이 생활을 유지해 갈 수 없게 되었으니 늦봄이 되면 열에 하나도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신의 기억으로는, 계사년007)  과 갑오년 난리 뒤에도 오히려 공사(公私) 창고에 곡식이 있어서 굶주리는 자를 구제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모두 텅 비어 시행할 계책이 없습니다. 진휼을 혹 설행하기는 하더라도 길에서 빌어먹는 사람은 이에 힘입을 수 있으나, 하고많은 생령에게 어찌 두루 미칠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긴급하지 않은 부역은 다 감면하도록 허락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되살아나게 하소서. 그러면 구황하는 정사에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재변은 어느 것인들 걱정스럽지 않겠는가마는 흉년의 재변은 눈앞에 닥친 그지없는 변고이니, 내가 어찌 잠시인들 마음에 잊겠는가. 그러나 반드시 창고에 쌓아놓은 곡식이 있어야 구제할 수 있는데, 팔도가 다같이 흉년이고 내외가 판탕하여 조처할 바를 모르겠으니 어쩌겠는가. 청나라에서 세자를 책봉하는 것을 허락하였으니 지금 만일 그를 청하면 세자가 나올 희망이 있다. 부자의 정을 어찌 억제할 수 있으랴만, 내가 감히 가벼이 허락하지 못하는 것은 이때에 또 책봉사(冊封使)를 지대(支待)하게 되면 백성이 그 명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였다. 동지경연 김반(金槃)이 아뢰기를,
"위에서 백성을 근심하는 분부가 이에 이르시니 듣는 자치고 어느 누가 감읍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세자의 환국은 백성들이 바라는 바입니다. 백성이 비록 부역을 나간다 하더라도 어찌 감히 원망하고 꺼리겠습니까."
하고, 특진관 오준(吳竣)이 아뢰기를,
"일에는 경중이 있으니 백관에게 거둔다 하더라도 불가하지 않습니다."
하고, 조위한은 아뢰기를,
"외방의 교생(校生)으로서 한가로이 노는 자가 참으로 많은데 주리고 곤궁한 근심은 편호(編戶)보다 심합니다. 듣건대, 포목을 거두는 명령이 이 교생들에게까지 미쳤다 하니, 신은 소요하여 원성이 일어남이 민결(民結)을 더 거두는 것보다 심할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그 말이 옳다고 하였다.

 

1월 28일 병술

상이 좌의정 신경진(申景禛), 우의정 심열(沈悅), 호조 판서 이명(李溟)을 인견하고 묻기를,
"지난번 세폐(歲幣)에 관한 일로 묘당이 의계한 바가 있었는데, 그 뜻이 좋은 듯하나 폐단이 없겠는가?"
하니, 신경진이 대답하기를,
"신들이 되풀이하여 생각해 본 결과 민결에다만 전적으로 책임지우면 원망을 반드시 많이 부를 것이니 삼공 이하도 각각 재력을 내어 도우면 백성들이 반드시 동념될 것입니다. 그리고 외방의 신역(身役)이 없는 자는 포목을 내어 한 번(番)의 대역(大役)에 응하게 하였으니, 어찌 원망하고 한탄하는 데에 이르겠습니까. 의계한 뜻은 조금이나마 민결에 대한 폐해를 제거하려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신의 소견이 모두 그러한가?"
하니, 심열이 나아가 아뢰기를,
"신의 의견으로는 소요의 폐단이 또 더 심할까 염려되었기 때문에 일찍이 차자를 올렸습니다. 시정의 백성들에게 앞뒤로 역(役)을 내게 하여 그들을 의지해 마련할 것이 한이 없으니, 한결같이 가혹하게 거두어들이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2품 이상은 급료 받는 것이 조금 많아 포목을 낼 수 있으나, 전임 조관(朝官) 및 6품 이하는 현재 흉년을 당하여 굶주리는 사람이 많으니 재물을 내어 돕도록 책임지우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외방의 품관이나 교생은 모두 전결(田結)로 공역(公役)에 응하는 자입니다. 만일 인구 수효대로 강제로 정하면 원망이 반드시 배는 될 것이니, 민결에 따라 고르게 거두느니만 못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참으로 그렇다. 인구를 계산하여 납입을 독촉하면 반드시 원망을 초래할 것이고, 스스로 납입하도록 내버려 두면 실제 수요가 적을 것이다. 백성이 원망하기를 ‘나라에서 어찌하여 백성에게 고르게 부과하지 않고 이러한 일을 하는가?’라고 한다면, 또한 억지로 징수하기도 곤란하다. 전년에 말[馬]을 바치게 하고 금년에 또 포목을 바치게 하면 유식한 무리는 감히 원망은 하지 못할 것이나, 윗자리에 있는 사람으로서 또한 미안하지 않겠는가. 다만 생각건대 해조에서도 혼자서 마련하기 어려워서 약간의 물품을 외방에 나누어 배정한 것이다. 그러나 종이와 돗자리는 노비의 공포(貢布)에서 덜어내어 무역하고, 피물(皮物)은 편의에 따라 준비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하자, 심열이 아뢰기를,
"새로 일군 밭에서 세(稅)로 낸 면포는, 전부터 상납하는 수효가 1천 9백 동입니다. 올해에는 전결이 줄어들어서 비록 전의 수효에 미치지는 못하나, 이 면포로써 피물을 사들이는 것이 편리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하였다. 이명이 아뢰기를,
"교생에게는 진실로 포목을 징수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상신(相臣)의 의견은 왕자·대신으로부터 3품에 이르기까지 거두어야 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이것 때문에 마음이 불안하다."
하자, 신하들이 아뢰기를,
"오늘날 신하로서 누가 감히 근심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신경진이 아뢰기를,
"급료를 받는 참상(參上) 이상 및 병사·수사·수령에게 모두 포목을 내게 하여 애타고 답답한 정상을 원근에서 알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간략함을 따라서 하되, 변장에겐 거두어서는 더욱 안 된다."
하였다. 심열이 아뢰기를,
"저군(儲君)이 이역에 있은 지 지금 3년이 되었습니다. 지금 주청하더라도 보내주기를 허락할지는 진실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다만 저들이 이미 봄이나 여름쯤에 나간다고 말하였는데, 지금 가을·겨울쯤으로 기다리는 것은 몹시 거북스러운 일이고, 또 ‘주청사의 마부와 말은 아직 서서히 하라.’는 하교가 있었으니, 신은 저들이 혹 우리 나라에서 세자를 가볍게 보는 것으로 여길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머지않아 반드시 장계가 올 것이니, 장계가 오기를 기다려 결정하겠다."
하였다. 상이 승지 김세렴(金世濂)에게 이르기를,
"요즈음 도성 백성들의 굶주림이 저와 같으니 외방의 백성들도 이를 미루어 알 수 있기에 일찍이 각도의 감사로 하여금 진휼하게 하였다. 미곡의 출처와 설국(設局) 등에 관한 일을 어떻게 요리하였는지 아울러 하유하여 물어보라."
하니, 김세렴이 아뢰기를,
"신이 저번에 통화문(通化門)에서 신부(信符)를 차고 출입하는 여인이 매우 많은 것을 보고 물어보았더니 척리(戚里)의 문안비(問安婢)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비록 제왕이 친족을 친애하는 아름다운 뜻이나, 말류의 폐단이 마침내 궁금(宮禁)이 엄하지 않게 될까 염려됩니다. 듣건대, 대전(大殿)·중전의 신부(信符)는 각각 정해진 수효가 있는데, 지금은 점차 많아졌다고 하니 살피시기 바랍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심열이 아뢰기를,
"경기의 백성이 현재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어서 대동미(大同米)를 마련하기 어려우니, 남한 산성의 미곡으로 선혜청에 옮겨 지급하고 가을에 백성에게 거두어서 곧바로 산성으로 수송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1월 29일 정해

박수문(朴守文)을 지평으로, 김세렴을 이조 참의로, 이후원(李厚源)을 동부승지로, 홍보(洪靌)를 형조 판서로, 김영조(金榮祖)를 동지경연으로 삼았다.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동지경연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남이공(南以恭)이 이조 판서로 있을 때 재능이 있어 수령의 임무를 감당할 만한 사람을 천거한 일이 있었는데, 지금도 더 뽑아 써야 할 자가 6인입니다. 신이 그들의 사람됨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정훤(鄭萱)은 영남 사람인데, 학문뿐만 아니라, 장재(將才)도 있는 자입니다. 황종해(黃宗海)는 목천(木川)에 사는데 인망이 대단히 있고, 안방준(安邦俊)·선우협(鮮于浹)은 모두 학문에 뜻을 두었으니 곧 일국의 선사(善士)입니다."
하니, 상이 묻기를,
"선우협은 어느 지방 사람인가?"
하자, 대답하기를,
"평양 사람으로 기자(箕子)의 후예이니 더욱 수용해야 합니다. 듣건대 그는 역학(易學)에 밝다 하니, 아마도 범상한 유학자는 아닌 듯합니다. 이현룡(李見龍)·한진명(韓振溟)은 모두 학행(學行)으로 사부(師傅)가 되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남은 인재의 부고(府庫)이다. 지금도 혹 산림에 은거하는 선비가 있을 것인데, 혹 듣지 못한 것인가? 어찌 그리도 적적한가."
하니, 이경석이 아뢰기를,
"옛날에는 훌륭한 선비가 있어 사도(斯道)를 밝혀 후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장현광(張顯光)·정경세(鄭經世)도 이미 죽어 학문에 뜻을 두는 사람이 적습니다."
하였다. 이경석이, 수령이 가솔을 지나치게 많이 데리고 가지 못하게 하는 법규를 신명하기를 청하니, 상이 승지에게 하교하기를,
"흉년이 이와 같으니, 가솔을 지나치게 많이 데리고 가는 폐해가 더욱 심하다. 정원은 다시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과거 시험장을 개설할 때 시험장 안과 밖을 엄하게 막아 출입을 금지하는 것은 국시(國試)를 중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저번에 해조의 계청으로 인하여 시관 이하에게 각자 제집에서 음식을 날라다 먹게 한 것은, 비록 폐단을 제거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나, 시험장이 엄하지 아니하여 후일의 폐단을 막기 어렵습니다. 만일 해조로 하여금 약간의 쌀과 반찬을 헤아려 지급하여 관에서 간략하게 제공하게 하면 소비하는 바는 많지 않고 국시 또한 엄해질 것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참작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30일 무자

심양(瀋陽)의 재신(宰臣) 박로(朴𥶇)·신득연(申得淵) 등이 치계하기를,
"회은군(懷恩君)의 딸이 피패(皮牌)의 집으로부터 관소(館所)에 사람을 보내어 세자를 뵙기를 요구하더니, 하루는 과연 몇 명의 종인(從人)을 데리고 와서 양궁(兩宮)을 뵈었습니다. 그 뒤에 피패가 또 신 박로·신득연을 초청하여 주식을 베풀어 대접하였는데, 피패가 좌우 사람을 물리치고 회은군의 딸만 같이 앉게 하고 말하였습니다. 신이 이어서 책봉(冊封)하는 데 대해 언급하니, 피패가 답하기를 ‘세자 세우기를 청하는 것은 국가가 있는 이상 그만둘 수 없는 것으로, 황제의 태자와 국왕의 세자는 진실로 다를 바가 없다. 다만 이 일은 오직 황제의 마음에 달려 있는데, 조선에서 주청한다면 따르지 않을 리가 만무하다. 내가 안의 일을 주관하고 있으니, 또한 안에서 힘을 다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당초 회은군(懷恩君) 덕인(德仁)의 딸이 나이 겨우 15세에 강도(江都)에서 포로가 되었는데, 청나라 한(汗)이 시녀로 삼았습니다. 그 뒤에 피패 박씨(博氏)가 전공이 가장 많았으므로 그녀를 상으로 주었는데, 그녀는 스스로 국족(國族)이라 하여 우리 나라의 일에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하고, 또 치계하기를,
"용장(龍將)008)  이 정명수(鄭命壽)를 시켜 신들에게 말을 전하기를 ‘이곳에서 세자의 책봉을 이미 허락하였으니, 혹 지연시키면 아마도 후회가 있을 듯하다. 주청사를 모름지기 속히 들여보내라.’ 하였습니다. 그의 뜻은 대개 청나라에 곧 전쟁이 있어서 황제가 서방으로 행차할 것이므로 그 전에 주청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였다.

 

청나라에서 자문을 보내기를,
"극동(極東)에 사는 경하창(慶河昌) 및 그의 아들 기라라지(其羅羅只)·둔아(屯阿) 등이 배반하여 웅도(熊島)를 점거하고 공물을 올리려 하지 않는다. 그 지역은 조선 경흥부(慶興府)와 가까워서 항상 왕래하며 교역하니, 수군 1천 명을 출동시켜 웅도를 공략하여 탈취하라."
하였는데, 비국에서 허락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니, 상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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