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기축
유성이 관색성(貫索星) 아래에서 나와 포성(匏星) 위로 들어갔다.
주청사가 심양으로 갔다. 그 주문(奏文)에,
"신의 장자 이조(李)009) 는 전비(前妃) 한씨(韓氏)의 소생으로 천성이 본디 인효하고 서열이 적장자(嫡長子)입니다. 신이 이미 재조(再造)의 은혜를 입어 총전(寵典)이 완전하니, 세자 세우는 것을 청해야 마땅하나, 감히 하지 못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상도로 지켜야 할 전장(典章)을 오래도록 거행하지 못하니, 나라 사람들의 마음이 오래도록 더욱 답답해 합니다. 규례에 의거하여 소청을 진달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바입니다. 바라건대, 황상께서는 특별히 해부(該部)에 명하여 고명(誥命)을 내려주게 하여 소방의 종묘로 하여금 붙이는 바가 있고 온 나라 신민이 총광(寵光)을 보게 해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왕비를 봉해 주기를 청하는 주문도 겸해 덧붙였는데, 그 주문에,
"신의 정비(正妃) 한씨가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버려 소상과 대상이 이미 지났는데 배우자가 오래도록 비어 있었습니다. 이에 위로는 종사(宗祀)의 중대함을 생각하고 아래로는 조정 신하들의 소청을 따라 이미 한원 부원군(漢原府院君) 조창원(趙昌遠)의 딸을 계실(繼室)로 삼았습니다. 왕비 봉해 주기를 청하는 것은 실로 예전 전례(典禮)가 있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은고(恩誥)를 내려 주어 동쪽 지방 신민들의 소망을 위로해 주소서."
하였다.
2월 2일 경인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진휼청을 선혜청에다 설치하고 여이징(呂爾徵)을 진휼사로 삼았다.
남한 산성에 사당을 세워 온조왕(溫祚王)을 제사하고 위판(位版)을 고쳐 써서 ‘백제 시조왕(百濟始祖王)’이라 칭하였다.
예조에서 ‘우리 나라의 사서(史書) 및 《여지승람(輿地勝覽)》에 모두 온조왕(溫祚王)으로 썼는데, 세대가 멀어져서 명호 및 시호를 분변할 수 없다.’는 이유로 우리 나라의 사서에 기록된 바에 의거하여 위판에 쓰자고 했는데, 상이 답하기를,
"온조는 이름인 듯한데, 위판에 바로 쓰는 것이 어떠할지?"
했다. 예조가 ‘백제 시조(百濟始祖)’라고 쓰기를 청하니, 상이 ‘왕(王)’자를 더 써 넣도록 명하였다.
호조가 아뢰기를,
"지금 비록 용관(冗官)을 없앴다고는 하나 아직도 많고, 긴치 않은 경비를 없앴다고는 하나 아직도 많습니다. 그리하여 혹 자신은 외방에 있으면서도 국록을 먹는 자가 있고, 혹 변장(邊將)에 이름이 속해 있어서 급료가 아전의 수중에 돌아가는 경우도 있으며, 그 밖에 허비하는 일이 매우 많습니다. 간원의 계사에 의거하여 하나하나 절제하고 줄여서 문서에만 응하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3일 신묘
간원이 아뢰기를,
"속오군(束伍軍)의 부족한 액수는 비국의 계사로 인하여 올 가을 곡식이 익은 뒤에 충정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는 군정(軍政)에 관계되는 중대한 일이니, 진실로 조금도 느슨히 해서는 안 되며 또한 가벼이 의논해서도 안 됩니다. 다만 큰 난리 이후에 큰 흉년까지 들어 간신히 살아남은 백성이 사방으로 흩어졌는데, 이때에 또 찾아내어 군대에 충정(充定)한다면 일은 성취하기 쉽지 않고 한갓 소요스런 폐단만 끼치게 될 것입니다. 지금 만약 연한을 조금 늦추어서 점차로 찾아내어 군대를 충정하면 백성을 어지럽게 하는 폐단이 저절로 없고 군정도 실질적인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다시 참작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경기 고양(高陽) 땅에서 어떤 도적이 밤에 종실(宗室) 대산군(帶山君) 이종윤(李宗胤)의 집에 들어가서 종윤과 최무(崔珷)를 죽였다. 뒤에 그 도적을 잡고 보니, 곧 종윤과 최무의 종이었다. 의금부에서 삼성(三省)을 열어 국문하니 모두 승복하였다. 드디어 주인을 시해한 율(律)로 죽였다.
2월 4일 임진
조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참찬관 이경여(李敬輿)가 아뢰기를,
"경악(經幄)의 신하는 반드시 그 직임에 오래 있어야만 경전을 토론하여 글을 강론하고 학문을 권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삼사(三司)의 관원을 아침에 제수하였다가 저녁에 고치면서 이것을 예사로 보아넘기고 있으니, 참으로 몹시 한심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간은 열흘이나 보름이 넘게 행공하는 자가 없는데, 인재가 부족하니 해조에서 어떻게 갖추어 의망할 수 있겠는가. 정고(呈告)가 분분함이 오늘날보다 더 심한 때가 없었다. 옛날에는 간관의 직임에 임용된 자가 7년 동안이나 재직하기도 하였는데, 지금은 나를 부족하다고 여겨서 버리는 것인가? 아니면 그 직임에 오래 있으면 염치가 없다고 여겨서 그러는 것인가? 폐조(廢朝) 때 ‘천 번 부르고 만 번 부른다.’는 말이 있었는데, 지금 정사(呈辭)하는 사람은 또한 천 번 올리고 만 번 올려 마지않으니, 정원이 어떻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일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으면 반드시 소를 올려 체직을 구할 것이다. 대간은 임금의 허물을 바로잡을 뿐만 아니라, 일국의 헌장(憲章)을 모두 규찰한다. 그런데 이같이 자주 체직하여 온갖 법도가 무너지게 하니, 이는 무슨 마음에서인가. 그리고 사람마다 요·순 같은 성인이 아니니 어찌 일마다 다 착하게 할 수 있겠는가. 대간도 성인이 아니니 어찌 일생 동안 허물이 없을 수 있겠는가. 전에 잘못한 바가 있었더라도 다시 이 직임에 있게 되면 고치고 힘써서 벼슬에 임하여야 할 것이다. 어찌 지난날의 허물을 끌어들여 기어이 면직하려고 한단 말인가. 대신은 모름지기 깊이 생각하여 그 폐단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심열(沈悅)이 아뢰기를,
"대각(臺閣)도 신하입니다. 이렇게 결론을 내린 뒤에 어찌 다시 전의 습관을 되풀이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기강이 땅을 쓸어낸 듯이 없어져 육경(六卿)도 장차 자리가 비게 되었다. 민형남(閔馨男)이 대간의 비평을 받자마자 홍보(洪靌)가 어찌 감히 정사(呈辭)하는가. 이때를 당하여서는 유식한 사람이 더욱 사체를 돌아보아야 하는데, 여러 사람이 모두 이와 같으니, 국사가 어떻게 되겠는가."
하였다. 심열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기를,
"이는 신들의 죄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도 대체만 지킬 것이 아니라, 모든 세상 일에 관계되는 바는 모두 논변해야 한다."
하였다. 대사간 최혜길(崔惠吉)이, 형조 판서 홍보를 되도록 중하게 추고하기를 청하니, 상이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심열이 아뢰기를,
"진휼청을 오늘부터 개국(開局)하였으나, 나아가서 먹는 자는 모두 상인(常人)이나 빌어먹는 무리이고 사족의 과부는 차마 죽을 친히 받아먹지 못한다 합니다. 각부(各部)로 하여금 조사해 내게 하여 마른 양식을 나누어 주어 구제하게 하는 것이 편리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는 것이 편리할 듯하나, 만일 이 길을 열어 놓으면 반드시 간사한 일이 많을 것이다. 선왕조에서 진휼할 때에는 어떻게 처리하였는가?"
하자, 심열이 대답하기를,
"선왕께서 용산(龍山)에 친림하여 마른 양식을 나누어 주시자, 남녀 노약자들이 성상의 덕을 칭송하고 환호하는 것을 신이 직접 보았습니다."
하였다. 심열이 또 아뢰기를,
"외방에 있는 사람을 의망하지 않는 일은, 성상의 하교가 계셨습니다. 근래에는 사환(仕宦)이 평시와 달라서 외지에서 유리(流離)하는 사람은 관직이 갈리면 곧 돌아가는데 이로 인하여 폐기하는 것은 매우 인재를 수습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서울에 있는 사람만을 취하여 구차하게 주의에 채우고 있으니, 어찌 어려움을 구제하는 정사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대로 국록을 받는 집안이 위란할 때에 국사를 돌아보지 않고 사환에 뜻이 없다. 이러한 무리는 쓰더라도 마음이 공무(公務)에 있지 않으므로 도움되는 바는 없고 오가는 데 번거롭기만 할 것이다. 그래서 주의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하였다. 이경여(李敬輿)가 아뢰기를,
"신이 대사성의 소임을 겸하고 있습니다. 저번에 성균관에 갔더니, 거재(居齋)하는 유생이 50여 인에 이르렀는데, 과거 시험을 치른 뒤에는 반드시 다 흩어져 가버릴 것입니다. 신이 이 소임에 대해 진실로 의의(擬議)할 바가 아니나, 설사 사람을 가려서 임명하더라도 가르칠 대상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떻게 하면 유생들로 하여금 항상 성균관에 머물러 있게 할 수 있겠는가?"
하자, 이경여가 아뢰기를,
"이 큰 난리의 뒤를 당하여 조사(朝士)라도 서울에 있기 어려우니, 유생을 모으기란 형세가 진실로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이 듣건대, 옛날에는 구인재(求仁齋)·지도재(志道齋)·양몽재(養蒙齋)를 두어 과(科)를 나누어 선비를 가르치는 규식으로 삼았다 합니다. 지금도 이 규식을 대충 모방하여, 3과(科)에 각각 20인씩을 정액으로 하고 사학(四學)에 각각 5인씩을 두면 모두 80인이 됩니다. 그들로 하여금 모두 관학(館學)에 모여 3재(齋)에 나누어 거처하게 하되, 거처를 편안하게 하고 늠식(廩食)을 풍족하게 하면 선비를 기르는 방도를 얻게 될 것입니다. 생각건대, 천하의 일은 사람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입니다. 반드시 이를 행하고자 하면 사유(師儒)의 장관인 대사성을 가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처럼 만분의 일도 비슷하지 않은 사람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수 없으니 차임하소서."
하였다. 상이 심열에게 이르기를,
"이 말이 어떠한가?"
하자, 심열이 아뢰기를,
"인재를 배양하는 것은 극히 좋은 뜻이나, 지금처럼 판탕한 때를 당하여 결코 늠료를 풍족하게 하기 어렵습니다. 가을 곡식이 익은 뒤에야 행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성종조에 관학의 유생이 성대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성종 대왕의 지극한 덕이 선비들을 감화시킬 수 있어서였겠으나, 또한 반드시 진작시키는 거조가 있었을 것이다. 무슨 방법을 썼는지 모르겠다."
하자, 심열이 아뢰기를,
"성종조에 문을 숭상한 교화가 지극하고도 극진하였으니, 인재가 성대하게 일어난 것이 마땅합니다. 근래에 국가에 일이 많았으니 문을 존숭할 겨를이 없었음은 형세상 참으로 그러합니다. 그러나 성상께서 유자(儒者)를 높이고 문을 숭상하는 정치가 미진한 바가 있는 듯합니다. 대개 인재를 양성함은 모두 훌륭한 사유(師儒)를 얻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문장과 명망이 이경여보다 나은 사람이 없으니, 오래 맡기어 성공을 책임지우면 반드시 성과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옥당이 차자를 올리기를,
"오늘 조강 때 위에서 강전(講殿)에 나아가시니, 대신 이하가 모두 합문(閤門)에 나아갔는데, 장령 조중려(趙重呂)가 가장 늦게 나왔습니다. 그리고 물러가기를 청할 시각에 이르러서 지체한 잘못이 있었으면서도 허물을 인책하는 일이 없었으니, 장차 어떻게 그대로 대각에 있으면서 관리의 부정을 바로잡고 나라의 체통을 높일 수 있겠습니까. 장령 조중려를 체차하도록 명하소서."
하고, 간원이 또 파직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2월 5일 계사
정원이 아뢰기를,
"전옥서(典獄署)의 죄수 명단을 가져다 상고해 보니 죄인이 무려 50여 인이나 되었습니다. 평상시라도 죄수를 감옥에다 오래도록 지체시켜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기근이 바야흐로 급박하고 돌림병도 치성한 지금이겠습니까. 경중을 분간 처결하는 것이 하루가 급합니다. 그런데 형조 판서 홍보는 병으로 휴가를 청하였고, 참판 허계(許啓)는 상피로 공무를 집행하지 못하며, 참의 이덕수(李德洙)는 외방에 있으면서 미처 오지 못하였으니, 처치하는 일이 있어야 마땅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참판과 참의를 모두 고쳐 차임하라."
하였다.
2월 6일 갑오
유성이 유성(柳星) 아래에서 나와 정성(井星) 위로 들어갔다.
조수익(趙壽益)을 집의로, 홍무적(洪茂績)을 장령으로, 남노성(南老星)·정태제(鄭泰齊)를 정언으로, 허서(許舒)를 사직서 참봉(社稷署參奉)으로 삼았다.
허서는 능창 대군(綾昌大君) 천첩(賤妾)의 사위이다. 능창 대군이 일찍 죽고 후사가 없었는데, 그 딸이 시집갈 나이인 15세가 되자, 상이 불쌍히 여겨 사위를 가려 시집보냈다. 이때에 와서 벼슬을 제수하였다.
황주(黃州)에 판관(判官)을 새로 설치하여 인(印)을 관장하고 백성에게 임하는 것을 일체 북청(北靑)과 경성(鏡城) 판관의 규례에 의거하게 하였다. 영의정 최명길의 의논을 따른 것이다.
비국이 아뢰기를,
"신들이 경연에서 하신 성상의 분부를 듣건대, 기강이 퇴폐된 데 대해 개탄하시며 신들을 책하고 권면하여 진작되게 하시니, 신들은 두려움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대간은 임금의 이목이므로 임금의 잘못을 지적하고 대신을 논핵하는 것이 곧 그 직분입니다. 대각의 사체가 이와 같으므로 비록 대신이라도 규핵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그러나 일이 법에 어긋나면 어찌 대각이라는 이유로 버려두고 논하지 않겠습니까. 전 지평 정지화(鄭知和)는 아버지의 병환을 듣고 강 밖으로 나갔다가 이튿날 돌아와서 즉시 피혐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병환이 있으면 마땅히 휴가를 청하고 가서 보살펴야 할 것인데, 법을 범하고 강밖으로 나갔으니 몹시 그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버지의 병환을 위해 달려가 구료한 것이니, 오히려 핑계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전 정언 이여익(李汝翊)은 병을 핑계하고 당직을 빠졌다가 곧바로 피혐하였으니, 법을 업신여기고 고의로 범한 정상이 몹시 놀랍습니다. 정지화는 되도록 중하게 추고하고 이여익은 법에 의거하여 파직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심양(瀋陽)의 재신(宰臣) 신득연(申得淵)·박로(朴𥶇) 등이 비밀히 치계하기를,
"정월 21일에 심지상(沈志祥)을 봉작(封爵) 하는 일로 조회하는 일이 있었는데, 세자(世子)와 대군(大君)이 가서 참여하였습니다. 궁궐 밖에 막 나아가자, 형부(刑部)의 관원이 5∼6인을 거느리고 와서 강원(講院)의 관원을 만나보기를 요구하였습니다. 사서(司書) 김종일(金宗一)이 나가서 만나보았더니, 형부의 관원이 외진 곳으로 데리고 가서 비밀히 묻기를 ‘조선이 은 2천 6백 냥 및 잡물 7바리를 정명수(鄭命壽)와 김돌시(金乭屎) 등에게 뇌물로 주어 칙사의 행차가 돌아온 뒤에 뒤따라 실어서 들여보냈으며, 또 황제에게 헌납하는 감과 배 각 1천 개를 두 역관이 훔쳐 축냈다고 한다. 심가(沈哥) 성을 가진 사람이 이미 이런 내용으로 아문에 고하였다.’ 하고, 이어서 물목(物目)을 열록(列錄)한 것을 내어보이며 말하기를 ‘이것이 모두 참말인가?’ 하였습니다. 이에 김종일이 모른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신득연이 정뇌경(鄭雷卿)과 궁을 지키고 있었는데, 하인이 홀연히 ‘형부의 관원 등이 문밖에 와서 강원(講院)의 서리(書吏) 강효원(姜孝元)을 불러갔다.’고 보고하였습니다. 강효원이 나간 뒤에 하인이 또 ‘강효원이 형부의 관원이 묻는 것에 대해 자세히 안다고 답하였다.’고 보고하였습니다. 그러자 정뇌경이 자리에 있다가 놀라더니 이윽고 웃으며 말하기를 ‘강효원이 반드시 스스로 담당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조금 뒤에 형부의 관원이 강원의 관원을 만나보려 하자, 정뇌경이 벌떡 일어나며 말하기를 ‘본원(本院)에서 서로 만나 보겠다.’ 하였습니다. 신이 ‘무슨 말로 답하려 하는가?’라고 물었더니, 정뇌경이 답하지 않고 갔습니다. 사람을 시켜 비밀히 탐지해 보았더니, 정뇌경이 형부의 관리와 들어가 앉아서 사람을 물리치고 비밀히 말하였는데, 일체 강효원의 말한 바와 같이 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한참 뒤에 들어오기에 비로소 그 일에 대해 물었더니, 정뇌경이 말하기를 ‘포로로 잡힌 심천로(沈天老)란 자가 정명수·김돌시 두 역관의 일로써 아문에 고발하였는데, 강효원이 그들의 물음으로 인하여 이미 입증하였으므로 나도 굳이 속이지 못하고 사실대로 말하였다.’ 하였습니다. 세자가 그 말을 듣고 크게 놀라 내관(內官) 나업(羅嶪), 선전관 구오(具鏊)에게 명령을 내려 강효원에게 비밀히 물어보게 하였더니, 그 일은 강효원이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 정뇌경과 김종일이 실제로 주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신 등 두 사람 및 관중(館中)의 대소 사람이 모두 알고 있지 못하였으니 장차 헤아릴 수 없는 난처한 일이 있을 것이기에 위아래가 근심하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이틀이 지난 뒤에 형부의 관원이 정명수·김돌시 두 역관을 거느리고 또 관문 밖에 와서 정뇌경 등 3인을 불러 다시 전일의 일을 물었으나, 김종일은 처음에 이미 모른다고 답하였으므로 도로 들어가게 하고, 정뇌경 및 청역(淸譯) 최막동(崔莫同) 등만 남게 하였습니다. 정뇌경의 답한 바는 전일에 비해 더욱 자세하여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자, 형부의 관원이 ‘전후에 증여한 물건을 정뇌경이 직접 보지 아니하였고, 또 증명할 만한 문서가 없으며, 이른바 전해준 사람도 나갔다고 말하니, 이것은 사실이 아닌 듯하다.’ 하고, 드디어 일어나 가버렸습니다.
신들이 세자에게 들어가 아뢰기를 ‘두 역관과 용장(龍將)010) 등이 몹시 성나 있으니 형세가 장차 헤아리기 어렵다. 급히 먼저 서리 강효원을 중죄로 다스리고, 이어서 정뇌경을 출송(黜送)하며 본조(本朝)에 죄를 청하여 그들의 뜻을 풀어야 한다.’ 하였더니, 세자도 그렇게 여겼습니다. 이에 신들이 관문(館門)에 같이 좌정하여 강효원을 잡아내어 대중이 보는 한길에서 되도록 중하게 곤장을 쳤습니다. 형부에서 곧바로 정뇌경과 강효원 등을 불러가고, 얼마 뒤에 또 신 등 두 사람을 부르기에 곧 달려갔습니다. 그랬더니 정뇌경과 두 역관이 뜰 가운데 꿇어앉아 바야흐로 마주 대면하여 따지고 있었는데, 형부의 왕(王)인 질가(質可)와 용장(龍將) 이하 10여 인이 양편으로 나누어 벌여 앉아 있기에 신들이 그 끝에 앉았습니다. 질가가 말하자, 용장이 신들에게 전하기를 ‘정뇌경 등이 두 역관을 모해한 일을 세자 및 재신(宰臣)도 모두 알고 있었는가? 그리고 정뇌경은 「그 문서를 박시랑(朴侍郞)이 머무는 곳에서 태웠다.」 하고 강효원은 「강원(講院)에서 태웠다.」 하는데, 두 사람의 말이 틀리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였습니다. 신들이 국가에 그지없는 화를 끼칠까 두려워 부득이 모른다고 대답하였는데, 질가 이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곧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이에 신들이 세자에게 갖추어 아뢰었습니다.
얼마 뒤에 용장 및 형부의 관원 2인이 갑자기 관문 밖에 이르러 신들 및 정뇌경·강효원을 불러 황제의 말을 전하기를 ‘정뇌경이 두 역관을 모해한 정상은 이미 다 드러났다. 세자와 재신도 알고 있었는가? 국왕이 설사 증여한 바가 있더라도 신하가 고하였다면 이것은 국왕을 모함한 것이다. 조선 백성도 우리 백성이니, 우리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 하고, 곧 사람을 시켜 정뇌경과 강효원의 손을 뒤로 묶었습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세자가 만일 모르고 있었다면 반드시 맹세하고 이곳에서 죽여야 실정을 알 수 있다.’ 하였습니다. 이에 세자가 나가서 보고 말하기를 ‘오로지 황제의 은덕을 입어 편안히 있게 되었는데, 뜻하지 않게도 지금 거느리고 있는 신료가 그 모르는 바를 어거지로 우겨 이러한 망령된 일을 하여 황제의 명을 내리게 하였으니, 더욱 부끄럽고 송구스럽다. 내가 모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재신들도 모두 모르고 있었으니, 맹세는 할 수 있으나, 다만 본국의 법에 죽이고 살리는 일을 세자가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모름지기 국왕에게 아뢴 뒤에 처치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27일에 용장 등 3인이 또 와서 세자로 하여금 꿇어앉아서 황제의 명을 듣게 하고 다시 어제 저녁 때 말한 바를 거듭 이르고 더욱 힐책하며 말하기를 ‘칙서 가운데 「절대로 사사로이 서로 뇌물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다. 국왕이 만일 과연 주었다면 이것은 국왕에게 죄가 있는 것이다. 설사 준 바가 있다 하더라도 그 신하가 고하였다면 이것은 신하가 임금을 고발한 것이며, 관중의 사람 및 세자가 알고 있는데 고발하였다면 이것은 세자도 죄가 있는 것이다. 고발한 자를 죽이지 않으면 이것은 국왕 및 세자가 서로 의논하여 한 것이다. 발명하고자 한다면 맹세하고 죽여야 한다. 세자가 스스로 천단하지 못하여 국왕에게 여쭙겠다는 말은 아주 옳다. 고발한 자를 구류하였다가 사람을 보내 온 뒤에 처단하라.’ 하였습니다. 세자가 답하기를 ‘황제의 명을 진실로 감히 어길 수는 없으나, 다만 여기에서 죽이면 나라 사람들이 보지 못할 것이니, 어떻게 경계가 되겠는가. 우리 나라로 내보내어 엄히 국문해 죄를 바르게 다스려야만 체통을 얻게 될 것이다. 만일 못 믿겠으면 청나라 사람이 함께 가도 된다.’ 하였더니, 세 사람이 같은 목소리로 ‘국왕이 이 일을 알고 있는데 고발하였다면 내보내어 죽이는 것이 가하다. 지금 정뇌경이 여기에 있으면서 스스로 계책을 꾸몄으니, 이곳에 관계된 일이므로 내보낼 수 없다.’ 하였습니다. 그 의도는 대개 핍박하여 반드시 유감을 푼 뒤에야 그만 두려는 것으로, 말하자니 목이 메입니다.
세자가 영을 내리기를 ‘정뇌경은 시강(侍講)한 지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남한 산성을 나와 용감하게 배종(陪從)한 이래로 갖은 고난을 겪으며 공로가 매우 많았는데, 이런 망극한 화를 당하니 몹시 불쌍하다. 몸소 궐하에 나아가서 대죄하고 변명하고자 한다.’ 하므로 신들이 상의하고 들어가 아뢰기를 ‘이 나라의 습속은 죄인을 신구(伸救)하면 문득 동참한 것으로 의심합니다. 저들이 현재 본국이 알고 있었던 것으로 말하고 있으니 결코 가벼이 입을 열 수 없습니다.’ 하니, 드디어 그만두었습니다.
정뇌경의 계획은 본래 이룡(李龍)·이성시(李聖詩)·김애수(金愛守) 등이 두 역관에게 원한을 맺어 보복하려는 계책에서 나왔으니, 정뇌경이 먼저 스스로 계획을 꾸민 것이 아닙니다. 만일 이 무리들을 이끌어대면 정뇌경의 화가 조금은 풀어질 듯하였으므로 세자가 또 신들로 하여금 이들을 이끌어대어 다시 변명하도록 권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뇌경이 말하기를 ‘이룡 등 전에 실패당한 사람을 서로 고발하여 이끌어대어 옥사가 퍼지게 되면 국가의 화를 거듭 끼칠 것이다.’고 하였으므로 이끌어대도록 강권하지 못하였습니다. 김종일은 질자관(質子舘)에 내보내 놓고 조정의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뇌경·김종일 등이 별도로 소 한 장을 작성하여 시말을 갖추어 아뢰었으므로 모두 별지로 치계합니다."
하였는데, 그 별지는 다음과 같다.
"신들은 어리석고 망령되어 스스로 죄를 지었으니 만 번 죽어도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 신들이 보건대, 청나라가 우리를 대접하는 도리가 대개 관후하였는데, 중간에서 날조하여 반드시 해를 입히려 한 것은 오로지 두 역관의 소위였습니다. 그들은 천부적으로 악독한 성품을 타고났을 뿐만 아니라, 뇌물을 많이 받아서 사람들의 말이 점차 성해지자, 혐의를 멀리할 계책으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신들이 서로 비분해 하면서 말하기를 ‘국력과 백성의 목숨이 두 역관의 손에서 다하게 되었다. 칙사의 행차 때 횡포를 부린 것과 사람을 속바칠 때 농간을 부린 것은 다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곳에서 근심거리가 됨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져 현재 이와 같은 상황이니, 끝내는 어떻게 되겠는가. 이 나라의 모든 모의는 제왕(諸王) 이외에는 용골대(龍骨大)나 마부달(馬夫達)처럼 신임받는 사람도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아문(衙門)의 한 역관이 어찌 이 나라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이겠는가. 그러나 양쪽 사이에 말을 전하는 것은 오로지 이들에게 의지하고 있다. 만일 은혜를 보여 그들이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힘을 다해 그들의 환심을 사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두 역관은 그렇지 않아서, 뇌물을 많이 받으면 해를 심하게 끼치는데, 자신들의 힘이 다만 모자라서 그러한 것이다. 우리를 해쳐서 자신의 위치를 굳히려는 마음에서 온갖 방법을 다하고 있으니, 뇌물을 주고서 끝내 화를 면하지 못하기보다는 차라리 그들을 도모하여 비록 제거하지 못하더라도 청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두 역관이 행중(行中)에 현저히 틈이 있음을 분명히 알게 하는 것도 한 가지 방책이다.’ 하였습니다. 신들의 망녕된 의견은 대개 이와 같았습니다.
작년에 예부(禮部)의 통사(通事) 김애수(金愛守)란 자가 두 역관의 부정 장물(贓物)을 적발하였습니다. 필선(弼善) 민응협(閔應協)이 행중의 노자를 관장하였으므로 형관(刑官)이 민응협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그런데 김애수의 장사(狀辭)에 용골대와 마부달까지 겸해 언급하였으므로 부득이 모른다고 답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약 황제의 명을 일컫고 다시 힐문한다면 민응협도 사실대로 말하려 하였습니다. 형부에서 김애수에게만 태벌(笞罰)을 가하고 두 역관은 풀어주었습니다. 그 후에 역관들 사이에서 두 역관을 좋아하지 않는 자들이 앞을 다투어 서로 적발하고자 하여 신들에게 와서 뜻을 탐색하였는데, 신들은 허술함을 염려하여 모두 응낙하지 않았습니다.
이룡과 이성시는 모두 관서(關西)의 사족으로 본국을 잊지 않은 자입니다. 황제가 서방으로부터 돌아온 지 수일 만에 이성시가 용장(龍將)의 뜻으로 신들에게 와서 말하기를 ‘두 역관이 본국에 온갖 해독을 끼치는데도 공들이 이렇게까지 비호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기에, 신들이 답하기를 ‘쉽지 아니한 일을 어찌 가벼이 응할 수 있겠는가.’ 하였더니, 이성시가 말하기를 ‘이 일은 공들의 한마디 승낙만 얻으면 이루기가 나무가지 꺾어오는 것보다 쉽다. 우리들이 스스로 해내겠다.’ 하기에, 신들이 답하기를 ‘우리들은 다만 말없이 있을 뿐이다.’ 하였습니다. 그 뒤에 이성시가 비밀히 통지하기를 ‘금번 무역해 온 배와 감은 팔고산(八高山)이 공동으로 분배하는 물품인데, 두 역관이 이처럼 도적질하여 줄었다. 이곳은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반드시 고발하는데, 하물며 이것은 들은 자가 많은데이겠는가. 어떤 사람이 「두 역관이 관중(館中)과 의논하고 줄여서 바쳤다.」라고 한다면, 팔고산의 뭇 노여움을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우리들의 이 거사는 오로지 본국 및 공들을 위한 것이니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신들이 이해를 깊이 따져 보지 않고 다만 일이 팔고산이 일제히 분노한 뒤에 발각된다면 관중에서도 스스로 밝히기 어렵다고 여겨 그대로 허락하였습니다. 이성시가 말하기를 ‘반드시 강원(講院)의 하인을 증인으로 삼아야 장사(狀辭)에 증거가 있게 된다.’ 하였습니다. 신들이 강원의 아전 강효원(姜孝元)이 항상 두 역관이 하는 짓을 분하게 여기는 것을 보고 은미한 뜻으로 탐색하였더니, 강효원이 불끈 일어나 담당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이에 강효원으로 하여금 한두 번 이룡의 집에 왕래하게 하여 심천로(沈天老)란 자와 면대하여 언약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들이 두 이씨(李氏)에게 자주 경계하여 절대로 급히 발론하지 말도록 한 것은, 대개 문안사(問安使)가 일을 마치기 전에 어지러운 바가 있을까 염려해서입니다.
사행(使行)이 떠나가던 날 신 김종일(金宗一)이 세자를 모시고 대궐에 나아가고 신 정뇌경이 궁을 지키며 관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형부의 관원 4인이 몽서(蒙書) 1첩(帖)을 가지고 와서 강원의 관원을 여럿이 모인 곳에 불러내었습니다. 재신 박로가 신을 재촉하여 나가서 대답하게 하였습니다. 신 김종일은 여러 사람이 있는 가운데에서 응대하기가 불편하여 모른다고 답하였더니, 형부의 관원이 말하기를 ‘강원의 관원은 문서를 맡은 사람이 아닌가? 어찌하여 모른다고 하는가.’ 하므로, 신이 ‘동료가 그 일을 관장한다. 내가 맡은 일이 아니다.’ 하였습니다. 형관이 관문 밖으로 물러가서 매우 엄하게 사람들을 물리치고 아전 강효원을 불러 물은 뒤에 이어서 신 정뇌경을 불렀습니다. 신이 나가보았더니 ‘황제가 묻는 것이니 숨겨서는 안 된다.’ 하고, 이어서 칙사의 사행 때 두 역관이 의주(義州)에다 복물(卜物)을 유치하였다가 추후에 실어온 곡절 및 배와 감을 훔쳐 축낸 일 등을 가지고 단단히 죄어 들면서 따져 물었습니다. 신이 처음에 누설하기 어려운 기색을 보였더니, 형관이 재삼 재촉하기를 ‘받은 자에게 죄가 있지 준 사람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하므로, 신이 답하기를 ‘그때 내가 마침 명령을 받아 본국 의주에 나갔더니, 통사(通事) 최득남(崔得男)이란 자가 과연 그 말을 하였으나, 유치한 것이 무슨 물품인지는 나도 묻지 않았다. 배와 감은 차원(差員)이 수령해 오던 날 두 역관이 관소에서 감 1천 개 배 1천 개를 덜어내었다. 세자가 말하기를 「국왕이 헌상한 물품을 어찌하여 마음대로 줄이는가.」 하니, 두 역관이 말하기를 「모든 일을 일체 내 말을 믿어야 한다. 설이 가까워지면 저절로 처치될 것이다.」 하였는데, 설 하루 이틀 전에 과연 가져갔다. 이것은 관중에서 아는 바가 아니며, 봉황성(鳳凰城)에서 훔쳐 축낸 물건에 대해서는 더욱 모른다. 사신이 선사한 일에 이르러서는 그들의 입을 빌어 말을 전하니 인정물(人情物)을 줄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죄가 되겠는가.’ 하였더니 4인이 일어나 나갔습니다.
하루 뒤에 또 3인이 와서 물었는데, 신의 답한 바는 일체 전일과 같았습니다. 그 3인 가운데 윗자리에 앉은 자는 자못 두 역관을 편들면서 신에게 말하기를 ‘비록 장물이 있다 하더라도 이미 다 써버려서 현재 잡을 수가 없으니 어찌하겠는가.’ 하므로 신이 답하기를 ‘황제께서 묻는 일은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을 수 없지만, 나와 두 역관은 모두 본국 사람으로 아침 저녁으로 서로 본 지가 지금 3년이나 되었으니, 어찌 서로 친애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두 역관이 죄를 면한다면 우리들도 다행이다.’ 하였더니, 세 형관이 말하기를 ‘감과 배의 수효는 필시 아문에 치부해 두었을 것이니 내가 가서 상고해 보겠다.’ 하였습니다.
26일에 아문의 역관들이 와서 신 정뇌경과 강효원을 불러 형부에 가서 전의 일을 물었는데, 신이 대답한 바는 대개 전일의 말과 같았습니다. 곧 또 두 재신(宰臣)을 불러 물었는데, 두 재신이 모른다고 답하였습니다. 어두워진 뒤에 용장(龍將)과 형부의 관원이 와서 말하기를 ‘정뇌경의 말이 재신과 같지 아니하니, 이것은 반드시 혐원으로 인해서 고발한 것이다.’ 하고, 왕복하며 힐책하였는데 일이 마침내 이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신들의 본성이 광망스럽고 경박하여 관중의 위아래 사람에게 의논하지 않고 갑자기 이룡 등의 감언에 속아서 작은 분을 참지 못하고 국가에 큰 욕을 끼친 것입니다. 원하건대, 신들의 죄를 바르게 다스리어 뒷사람들을 경계하소서."
2월 7일 을미
비국의 신하들이, 정뇌경의 일에 대해 논의가 결정되지 않자, 모두 아뢰기를,
"재신이 올린 장계의 뜻에 의거하여 곧장 처리하도록 허락하여 본조의 임금과 신하까지 의심을 받지 않게 하소서."
하였는데, 이조 판서 이경석이 홀로 차자를 올리기를,
"곧바로 저들이 처리하도록 허락하면 단연코 살아날 리가 없습니다. 지금 별도로 사신을 보내어 먼저 놀랍고 사례하는 뜻을 말하고, 본국에 보내어 깊이 신문하여 처치하겠다고 한다면 허락할지도 모릅니다."
하였다. 비국에서 밀갑(密匣)으로 한 장의 계사를 만들어 입계하였다. 상이 대신·비국 당상·삼사 장관을 인견하고 앞에다가 비국의 계사를 놓아두고 묻기를,
"죄없는 사대부를 죽이도록 내맡겨 두는 것은 내 차마 못하겠다. 이밖에 달리 선처할 방도가 없겠는가?"
하자, 좌의정 신경진이 아뢰기를,
"여기에서 쾌히 허락한다면 혹 만분의 일이나마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뜻은 그렇지 않다. 이미 용사하는 사람에게 원한을 맺었고 고발한 일이 또 두 차례에 이르렀으니, 정명수만 깊이 분풀이하려 할 뿐만 아니라, 아문에서도 반드시 후일을 징계하려고 계획할 것이다."
하자, 우의정 심열이 아뢰기를,
"어제 회계할 때에 모두 차마 계사를 만들지 못하였는데, 일이 이미 이에 이르렀으니 선처하기가 극히 어렵습니다. 대개 정뇌경이 동궁을 모시고 호랑이 입 속에 가 있으니 한 걸음만 실수하면 생사가 당장에 판가름 납니다. 그런데 일개 정 역관을 제거하여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이는 국가에 일을 내고 조정에 재앙을 옮길 뿐이니 어찌 죄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일이 이미 이에 이르렀으니 어찌할 수 없습니다. 황제가 매양 관대함으로써 스스로 자랑하였으니, 용서를 받게 된다면 이것은 큰 다행입니다."
하였다. 상이 좌우 신하들에게 묻기를,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능성 부원군(綾城府院君) 구굉(具宏), 예조 판서 이덕형(李德泂), 능천군(綾川君) 구인후(具仁垕), 호조 판서 이명(李溟) 등이 모두 곧바로 쾌히 처단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이경석이 나와 아뢰기를,
"소신의 의견은 이미 차자 안에 다 말하였습니다."
하고, 부제학 이경여(李敬輿)는 아뢰기를,
"정뇌경은 처사가 경망하여 화가 자신에게 미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에 욕을 끼쳤는데, 성상께서 측은하게 여기는 생각이 이와 같으니, 죽은들 또한 무슨 유감이 있겠습니까. 다만 이경석의 말한 바에 의거하여 별사(別使)를 차견해 놀랍고 사과한다는 뜻으로 진달하고, 또 법대로 처치하는 것을 허락하되, 혹 속전(贖錢)을 허락하는 일이 있으면 관에서 그 댓가를 지급하여 주선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눈물을 흘리며 이르기를,
"듣건대, 정뇌경은 노모가 있고 또 독자라 하니, 내가 마음을 가누지 못하겠다. 우리 나라 사람이 이역에서 죽는 것이 누군들 애처롭지 않으랴만, 정뇌경은 경연에 오래 있으면서 친밀하게 서로 접하였는데, 갑자기 이에 이르니, 차마 말하지 못하겠다."
하였는데, 눈물이 어병(御屛)을 적시니, 좌우 신하들이 슬퍼하였다. 이경여가 아뢰기를,
"거듭 생각해 보건대, 사신을 급히 보내는 것이 조금은 도움이 있겠습니다."
하고, 신경진은 아뢰기를,
"사신을 보내더라도 정뇌경의 생사에는 반드시 도움되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뇌경이 어찌하여 정명수가 용장(龍將) 무리와 서로 심복이 된 것을 알지 못하고 이러한 일을 하였단 말인가. 그의 사정을 따져 보면 통분한 정상을 직접 보고 나라를 위해 해독을 제거하려 한 것일 뿐이다. 그런데 마침내 이러한 지경에 빠졌으니 비통한 심정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정뇌경이 남한 산성에서 곧바로 저들 지역으로 갔으므로 그가 교체되어 돌아오기를 기다려 그 노고를 보답하려 하였는데, 어찌 오늘날과 같은 일이 있을 줄을 알았겠는가."
하고, 또 이르기를,
"만일 사신을 보낸다면 방물(方物)이 있어야 하는가?"
하였다. 심열이 아뢰기를,
"반드시 사신을 차송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군관 중에 영리하고 일을 잘 아는 사람을 가려 보내는 것이 편리합니다."
하고, 이명(李溟)이 아뢰기를,
"사신을 보낸다면 저들이 더욱 의심할 터이니 보내지 않느니만 못합니다."
하고, 이경석은 아뢰기를,
"신의 소견은 이와는 다릅니다. 사신을 보내어 진사(陳謝)한다면 탈잡을 만한 말이 있겠으나, 재량해서 조처하기만 청한다면 무슨 거스르는 바가 있겠습니까. 다행히 황제가 허락한다면 용장(龍將)도 어찌 막겠습니까. 또 박형(朴泂)의 말을 들어보면 구류하였다고는 하나 그래도 관소(館所)에 두었으니, 지금 사신을 보내면 혹 풀려나게 할 형세가 있을 것이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혹 우리가 구하려는 뜻이 있는가 하고 의심한다면 도리어 해가 있을 듯하니, 사신을 보내는 것은 과연 불편할 듯하다. 다만 차인(差人)을 보내어 잘 대응하게 하는 것이 옳다."
하고, 또 이르기를,
"김종일의 대임을 속히 차송하여 김종일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나오도록 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이경석이 아뢰기를,
"자문의 끄트머리에 ‘정적이 의심스러운 자를 내보내 주어서 추문 치죄(推問治罪)하게 해 달라.’는 뜻으로 말하려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의 의논이 이와 같으니, 아직은 거론하지 않는 것이 옳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러므로 계사에 부표하여 내려보냈던 것이다. 요즈음 청나라의 뜻을 살펴보니, 속히 거행하면 기뻐하고 느슨히 회보하면 성내니, 비록 재자관(齎咨官)을 차정해 보내더라도 반드시 오늘 중으로 발송하라."
하고, 또 이르기를,
"만일 속 바치는 것을 허락하면 관소에 저축해 둔 은으로 먼저 지급하고 모자라는 수효는 추후에 보내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 심열이 나아가 아뢰기를,
"소신이 지금 정뇌경의 일로 인하여 다시 진달할 말이 있습니다. 척화(斥和)한 신하들이 폐기된 지 오래되었으나 아직까지 수용(收用)하는 거조가 없습니다. 생각건대, 국가를 계획하고 경영함에는 그 방도가 진실로 다릅니다. 나라를 계획하는 사람은 시의(時議)에 동요되지 않고 기회를 보아 변고에 대처하여야 합니다. 어찌 화의만을 오로지 주장하여 한쪽 부류의 사람을 배척해서야 되겠습니까. 척화를 주장하던 사람이 청나라 사람들로 인해서 죽은 자가 또한 많습니다. 지금 생존한 사람을 석방한다면 인심을 조금은 위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어찌 척화한 것이겠는가. 곧 나라를 그르친 것이다. 표문(表文)을 올려 신하로 칭하는 경우에는 대간이 극력 간쟁하는 것이 참으로 마땅하다. 그러나 그때의 일은 사신을 보내어 화를 늦추려는 계획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 무리들이 그 사이에서 가로막아 국사가 마침내 이에 이르게 하였으니, 죄가 어찌 적겠는가. 이른바 ‘시의에 동요되지 않는다.’는 것도 그렇지가 않다. 대신이, 대간의 논의가 한창 일어나고 있음을 듣고 곧바로 자기의 뜻대로 행하는 것은 형세상 그럴 수 없는 것이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더라도 대각이 논집하고 있으면 임금도 뜻대로 단행할 수 없는데, 대신이 어찌 동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절절이 나라를 그르친 죄를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그때 말한 자가 상서롭지 못한 말을 많이 했었는데, 뒤에 모두 참언(讖言)과 같이 부합되었다. 오늘날에 와서 생각하니 대저 복없는 사람이다."
하고, 상이 성낸 빛을 띠니, 좌우 신하들이 묵묵히 있었다.
정뇌경의 처 윤씨(尹氏)가 금부의 당직자에게 상언하여, 자문 안에 속바치기를 원한다는 한 조목의 말을 첨가해 넣어 조금이나마 가망이 있게 해 달라고 애걸하였는데, 상이 타일러서 보내라고 명하였다.
대사헌 이현영(李顯英)이, 볼모로 가 있는 아들 이휘조(李徽祚)가 정뇌경의 모의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감히 입시하지 못하고 차자를 올려 대죄하고 체직시켜 주기를 애걸하니, 상이 따뜻하게 이르고 허락하지 않았다. 이휘조는 포로로 잡혀간 이룡(李龍)과 사이가 좋았다. 정뇌경과 김종일이 이성시(李聖詩)의 모의를 받아들이고는 작은 쪽지로 이휘조를 불러 말하기를,
"그대가 이룡과 서로 잘 아는가? 여기에서는 형세상 바로 통하기 어려우므로 강효원(姜孝元)을 그대에게 보내겠으니, 그대는 지시해 보내라."
하니, 이휘조가 응낙하고 갔다. 정뇌경·김종일이 강효원을 불러 깨우쳐 말하기를,
"청역(淸譯) 정명수·김돌시(金乭屎)가 해독을 끼침이 무궁하다. 너도 국가의 늠료를 먹고 있으니 어찌 분하지 않겠는가. 이미 제거할 만한 방도를 얻었으니, 만일 어떤 사람이 정문(呈文)하여 아문(衙門)에서 와서 네게 물으면 우리들이 기록해 준 내용대로 답하라."
하였다. 이어서 심천로(沈天老)가 고발한 일로 쪽지에 써서 보여 주고, 강효원을 질자관소(質子館所)에 보내면서 말하기를,
"이휘조에게 서책이 있어 고쳐 쓰고자 하니 네가 가도록 하라."
하였다. 이휘조가 거짓말로 말하기를,
"네게 분(粉)이 있어 사려는 자가 있으니 우리 종과 함께 가라."
하였다. 강효원이 그 종을 따라 어떤 곳에 이르렀는데, 바로 무오년011) 에 포로로 잡혀온 이룡의 집이었다. 5∼6인이 같이 앉아 있었는데, 이룡이 말하기를,
"전일 김애수(金愛守)가 우리 나라를 위해 일을 도모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죄를 받았고, 나도 우리 나라를 위해 일을 도모하다가 죄를 받았으므로 우리 두 사람은 감히 다시 도모할 수 없다. 지금 이공(李公)이 말한 바로 인하여 심천로란 사람을 구하였다. 이 사람은 평소에 송사(訟事)를 잘하였으므로 강원(講院)에서 이미 결정하였다. 조만간에 아문에서 네가 출납한 문서에 대해 불러 물을 것이니, 모름지기 일찍부터 자세히 알고 있었다고 대답하라. 심천로가 여기에 있으니 지금 얼굴을 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강효원이 돌아와서 관중(館中)에 보고한 뒤 수일이 지나서 이휘조가 정뇌경에게 말하기를,
"이룡이 와서 나를 보고 말하기를 ‘강효원을 다시 보내면 답할 말을 가르쳐 주겠다.’ 하였다."
하니, 정뇌경이 강효원을 보내어 그의 말을 듣고 형부의 관리가 와서 물을 때에 이것으로써 답하게 하였는데, 왕복하며 서로 통한 것은 실로 이휘조가 소개함으로 인한 것이라 한다.
2월 8일 병신
상이 소대를 명하여 《시전》을 강하였다.
교리 이도(李禂)가 주일잠(主一箴)을 올리니, 답하기를,
"네가 올린 잠(箴)은 정일(精一)의 도와 조수(操守)의 법이 아닌 것이 없으니, 내가 아침 저녁으로 살펴서 스스로 힘쓰겠다."
하고, 호피(虎皮) 1령(領)을 주어 포상하였다.
윤강(尹絳)을 부교리로, 유영(柳潁)을 부수찬으로, 이계(李烓)를 필선으로, 이경상(李慶相)을 사서로 삼았다.
2월 9일 정유
금부에서 김종일을 잡아오기를 청하니, 하교하였다.
"청나라 사람이 보는 곳에서 쇠사슬로 목을 묶어 오라."
비국이 밀계하기를,
"신들이 전번에 탑전에서 ‘정뇌경의 정상은 가긍하나 죄가 있으니, 형률을 시행하도록 쾌히 허락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으로 진달하였더니, 위에서 특별히 애처로워하는 전교를 내리시면서 ‘본국의 법례(法例)로는, 조정 신하는 반드시 국문하여 처단한다.’는 뜻으로 말을 만들어 자문을 짓게 하셨으므로, 신들이 성상의 뜻을 받들어서 이에 의거하여 지었으나, 개인적으로는 거북하게 여기었는데, 지금 최명길이 탑전에서 올린 말은 곧 신들의 뜻입니다. 성상의 비답을 보건대, ‘청나라 사람들이 불쾌하게 여기겠지만 격노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하교하셨는데, 신들은 그렇지 않다고 여깁니다. 저들이 이미 불쾌한 마음을 품으면 일마다 껄끄럽게 되어, 비록 이로 인하여 군사를 내어 침략하지는 않더라도 갖가지 난처한 근심을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대개 정뇌경의 생사는 자문의 어구가 어떠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황제의 도량에 달렸습니다. 우리 측에서 쾌히 허락하면 혹 죽음을 용서받을 수 있지만, 먼저 애석히 여기는 뜻을 보이면 반드시 더욱더 노여워할 것입니다. 또 황제가 정뇌경을 죽일 수 있는데도 세자로 하여금 처리하게 한 것은, 죽였다는 이름을 담당하지 않으려는 것이고, 겸하여 우리를 시험해 보려는 것입니다. 이 자문 안에 이미 본국으로 돌려주기를 청하는 뜻이 드러났으니, 비록 자세하게 말을 만들더라도 저들이 깨닫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설령 청나라에서 허락한다 하더라도 그 뒤의 처리가 더욱 난처할 것입니다. 자문 안의 어구가 타당하지 못한 곳을 고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자문의 어구는 사체를 진술하였을 뿐이지 특별히 애석하게 여기는 뜻이 없으니, 경들은 과히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무신 이응징(李應徵)을 형조 좌랑으로 가칭하여 회답 자문을 가지고 심양에 들여보내어 필선 정뇌경을 교살하게 하였다. 그 자문은 다음과 같다.
"조선 국왕은 중범을 과단(科斷)하는 일로 자문을 보냅니다. 올 정월 28일에 세자를 배종한 재신 박로(朴𥶇) 등이 장계하였는데, 대략 ‘심가 성을 가진 자가 형부에 나아가 고한 서장에 「정명수·김돌시가 몰래 본국의 뇌물을 받았다.」고 하였는데, 형부가 사문(査問)할 때 시강원 문학 정뇌경, 서리 강효원 등이 그 사이에서 참증(參證)하였다. 영장(英將)012) 이 세자의 관소에 이르러 황지(皇志)를 전유(傳諭)하면서 본국에 보고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하였습니다.
당직(當職)이 이에 의거하여 조사하여 본 결과, 일찍이 정축년013) 에 황상께서 소방에 내린 조칙에, 뇌물 주는 것을 깊이 경계하였습니다. 그러니 소방의 군신들이 흠앙(欽仰)하여 가슴에 새겨두고 감히 사사로 주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상국의 사람들도 어찌 감히 금령을 무릅쓰고 사적으로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정뇌경이 두 역관을 모함하려고 이러한 거짓 증언을 하였으니, 그가 무슨 마음을 품고 있는지 실로 모르겠습니다. 강효원은 천한 하례로 원래 지식이 없으니 본디 꾸짖을 거리도 못 됩니다만, 정뇌경은 이름이 유신(儒臣)의 반열에 있고 신의 자식을 따라가 심양에서 입시하고 있으면서, 조심하고 두려워하면서 충실과 정성으로 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감히 고자질을 하여 본국에 일을 만들었습니다. 만일 황조(皇朝)의 밝은 식견으로 사건의 상황을 환하게 보지 않았다면 당직의 부자가 어찌 애매한 허물을 면할 수 있었겠습니까. 생각이 이에 이르니 더욱 마음이 놀랍고 뼈가 저림을 견딜 수 없습니다.
이 사람들의 정상이 이미 드러나서 그 죄가 사형에 해당합니다. 소방의 법례(法例)에 있어서는 모든 중수(重囚)는 으레 잡아다가 옥에 가두어 형신하고 죄안을 만들어 법에 의거하여 처단합니다. 그런데 이 무리들은 현재 상국에 있으면서 죄를 지음이 이와 같고, 이미 형부의 조사를 거쳐 황상께 보고되었으니, 감히 소방의 상규로 처리할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형조 좌랑 이응징(李應徵)을 차견(差遣)하여 밤낮없이 달려가서 소방이 놀랍고 아프게 여기는 뜻을 갖추어 아뢰고, 이어서 정뇌경·강효원을 데려다가 법에 의거하여 처단하려 합니다."
2월 11일 기해
이회(李禬)를 정언으로, 김진(金振)을 수찬으로, 정지화(鄭知和)를 사서로, 이명웅(李命雄)을 경상 감사로 삼았다.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예로부터 치세를 도모하는 임금은 모두 인재를 수습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 목마른 사람들이 물을 구하는 것처럼 하고 신분에 구애됨이 없이 벼슬에 임명하였지, 내외를 구별하여 취하거나 버리기를 오늘날처럼 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외방에 있는 신하들이 어찌 모두 분의를 잊어버리고 스스로 편할 계획만 하겠습니까. 다만 사세에 구애되어 혹 시골로 내려간 뒤에 조정에 이러한 거조가 있다는 말을 듣고, 올라오고 싶으나 스스로 자랑하는 것을 혐의롭게 여긴 것입니다. 사부(士夫)의 염치는 본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아랫사람들을 예우하는 도리에 있어 이와 같이 해서는 마땅하지 않습니다. 근일 조정의 인재가 다한 것은 오로지 이에서 말미암았으므로 식자들의 탄식이 극도에 달했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내외를 논하지 말고 재능에 따라 모두 주의하여 인재를 쓰는 길을 넓히게 하소서."
하였는데, 여러 차례 아뢰니 따랐다.
2월 12일 경자
헌부가 아뢰기를,
"병조 판서 이시백(李時白)이 영승(領僧)에게 분부하여 사찰을 점검한 것은 오로지 걱정거리만을 생각하여 급할 때 써먹으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계책이 주밀하지 못하고 지휘가 허술하여 온 도의 인심을 놀라게 하였으니, 사체로 헤아려 볼 때 견책하여 후일을 징계해야 합당합니다. 그런데 성상께서 넓은 도량으로 포용하여 벌을 시행함이 너무 가벼우므로, 물정이 쾌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파직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체차하라고 답하였다.
영직첩(影職帖)을 충청도에 내려 보내어 곡식을 모집해 굶주린 백성을 진휼하게 하였다.
2월 13일 신축
구굉(具宏)을 병조 판서로, 남이공(南以恭)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일찍이 갑자년014) 에 이괄의 난이 갑자기 일어나 적병이 내지에 깊이 들어와서 대가(大駕)가 파천하였으니, 그때를 당하여 누가 오늘날이 있을 줄 알았겠습니까. 흉역(兇逆)의 무리가 몰래 관망하는 마음을 품었었습니다. 이계(李烓)의 할아버지 이심(李愖)은 그 당시에 판결사(判決事)로 있었는데, 일이 급하게 되자 관인(官印)을 하리에게 주고 달아났으며, 아비 이진영(李晋英)은 그때 공조의 낭관으로 있어서 그로 하여금 나루의 배를 단속하여 왕대비가 나루를 건너는 것에 대비하게 하였는데, 배를 얻은 뒤에 그대로 타고 달아났습니다. 이심 부자의 죄악이 이와 같으니, 이계가 허물을 덮을 만한 선행이 있다 하더라도 실로 용서하기 어려운 바입니다. 더구나 시종의 반열에 있으면서 돌아보지도 않고 달아나 헌신짝을 버리듯 임금을 버렸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처럼 윤기를 저버린 사람이 있겠습니까. 형벌을 내리지 아니한 것만도 법을 잃은 것인데, 어찌 이렇게 윤기를 저버린 사람을 궁료(宮僚)의 소임에 제수하여 이역에 모시고 따라가게 할 수 있겠습니까. 공의가 이와 같으니 어서 체차하소서."
하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2월 14일 임인
겸 병조 판서 구굉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띠고 있는 훈국(訓局)과 총융(摠戎)의 소임도 오히려 감당하기 어려운데, 만일 또 병조 판서의 소임을 띠게 되면 일국의 병권이 모두 신의 몸에 모이게 되니, 더욱 감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청나라 사람이 대어(大魚) 두 마리를 보내왔다. 길이가 3척쯤 되고 크기는 아이의 허리만 하며, 큰 입에 잔 비늘로 그 형상이 매우 괴이하였는데, 몽고 지방에서 나왔다 한다.
2월 15일 계묘
장령 최계훈(崔繼勳)이 상소하기를,
"신은 지난번 필선 이계에 대한 논의에 동료와 의견이 같지 않았습니다. 신의 생각은 ‘이계가 삼사의 직을 거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니, 조정에서 이미 이계의 실정을 알고서도 그 재능을 쓴 것이다. 더구나 이계는 병자년의 변란에 단기로 국난에 달려가서 시종 대가를 호종하였으니, 이계가 국가를 저버리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간통(簡通)할 즈음에 끝내 뜻을 굽혀 구차히 같이하지 아니하였습니다만, 다수의 의견을 따라 논계한 뒤에는 형세상 그대로 무릅쓰고 있기 어렵습니다. 성상께서는 신의 본직을 체차해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너는 사직하지 말고 안심하고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남노성(南老星)을 교리로, 정태제(鄭泰齊)를 정언으로 삼았다.
2월 18일 병오
이시백을 병조 판서로 삼았다.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2월 19일 정미
함경도 백성들이 국경을 넘어 삼을 캐다가 발각되었다. 감사가 조정에 아뢰니, 장형을 가하여 원도(遠道)에 유배하라고 명하였다.
2월 20일 무신
의주 부윤(義州府尹) 황일호(黃一皓)가 치계하였다.
"한선(漢船) 1척이 녹도(鹿島)로부터 장자도(獐子島) 밖 서쪽 바다로 향하였는데, 압록강 가에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가 났으므로 사람을 시켜 살피게 하였더니, 통원보(通遠堡)의 차장(次將)이 40여 인을 거느리고 막을 치고 유숙하며 말하기를 ‘우리들은 해주위(海州衛)로부터 순찰하여 이곳에 이르렀는데, 한선의 왕래를 초탐(肖探)하기 위해서다.’ 하였습니다."
2월 21일 기유
유성이 헌원성(軒轅星) 아래에서 나와 진성(軫星) 위로 들어갔다.
조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상이 지경연사 이경석(李景奭)과 양사(兩司)에게 이르기를,
"악한 사람을 치고 선한 사람을 찬양하는 것은 대간의 직분이며, 일시의 폐습을 바로잡아 조정으로 하여금 청명하게 하는 것은 해조의 책임이다.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일을 당하여 규피(規避)하는 자를 절대로 거두어 쓰지 않으면 혹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내가 듣건대, 선조(先朝) 때 난리의 초기에 빈곤이 오늘날보다 심하였는데도 서울에 머물며 벼슬하는 사람이 많았다 한다. 지금 사람들은 아침에 관직에서 해임되면 저녁에 시골로 내려가니 누가 나라를 위해 일하겠는가. 대개 그 까닭을 생각해 보니, 지금은 전과 달리 사람들이 나와 환난을 함께 하려 하지 않아서이다. 내가 실로 부끄러워 얼굴이 뜨겁다."
하니, 좌의정 신경진이 아뢰기를,
"사람들이 자신만 편하기를 생각하여 벼슬에서 물러나는 것을 고상하게 여기면서 관직에 오래 있으면 염치가 없다고 말하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대개 시론(時論)이, 서인이 뜻을 얻으면 남인이 떠나가고 남인이 조정에 벼슬하면 서인이 떠나간다고 합니다. 당론으로 서로 모함하고 분의는 전혀 생각지 않으니, 몹시 가증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탄식하면서 이르기를,
"산림 처사는 마음대로 나아가고 떠나갈 수 있지만 벼슬하는 무리는 진실로 이와는 다른데, 어찌 감히 싫어하고 피하여 이 지경에 이르도록 자신만 편하기를 취한단 말인가. 저들이 말하기를 ‘벼슬살이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곧 중국을 잊지 않는 것이다.’고 하면서 스스로 고상한 덕행이라 하나, 이는 먼저 국가를 생각하고 난 다음에 중국을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임을 모르는 것이다."
하였다. 신경진이 아뢰기를,
"웅도(熊島)를 정벌하는 일은 몹시 염려됩니다. 이 뒤로는 조정에서 아마도 북쪽 변경에 대해 항상 걱정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겠다. 이 길이 한번 열리면 뒷날의 흔단이 무궁할 것이다. 윤휘(尹暉)의 의논은 개유(開諭)하여 중지시키자고 하는데, 이 의견이 어떠한가?"
하자, 신경진이 아뢰기를,
"나온 오랑캐는 바로 경하창(慶河昌)과 원수를 맺은 자이므로 반드시 중지할 리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연신(筵臣)이 물러가자 윤대관을 인견하였다.
2월 22일 경술
윤이지(尹履之)를 도승지로, 정태화를 동부승지로, 박계영(朴啓榮)을 집의로, 박돈복(朴敦復)을 장령으로, 이원진(李元鎭)을 부수찬으로, 유철(兪㯙)·유심(柳淰)·이도장(李道長)·신유(申濡)·이지항(李之恒)·김진(金振)·유석(柳碩)·신익전(申翊全)·양만용(梁曼容)·이원진(李元鎭)·최계훈(崔繼勳)·김홍욱(金弘郁)·이회(李禬)·조중려(趙重呂)를 지제교로 삼았다.
2월 23일 신해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2월 24일 임자
유성이 필성(畢星) 위에서 나와 묘성(昴星) 아래로 들어가고 또 천봉성(天棓星) 아래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는데, 붉은 빛이 땅에 비추었다.
한선(漢船)이 용천(龍川)과 철산(鐵山) 두 경계와 사자도(獅子島)·영동도(迎同島)의 사이에 출몰하고, 정족도(鼎足島)로부터 거우도(車牛島) 외양(外洋)으로 향하기도 하였다. 이때 우리 나라가 청나라 사람에게 발각될까 두려워하여 절대로 상통하지 않았고 한선도 감히 연안에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2월 25일 계축
유성이 구진성(鉤陳星) 아래에서 나와 왕량성(王良星) 위로 들어갔다.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지경연 이현영(李顯英)이 나아가 아뢰기를,
"상란(喪亂)된 뒤에, 절의를 위해 죽은 사람을 곧 정표(旌表)하여 빠짐이 없게 해야 하는데, 신이 일찍이 예관(禮官)으로 있으면서 동료 관원이 다 갖추어지지 않아 모여서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지금은 예관이 충원되었으니 속히 거행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말이 매우 타당하니, 이에 의거하여 거행하라."
하였다.
2월 27일 을묘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시독관 윤강(尹絳)이 아뢰기를,
"신은 관직이 낮고 지식도 부족하여 아뢸 것이 없으나, 또한 평소 마음속으로 개탄한 것이 있습니다. 지난번 김상헌(金尙憲)과 정온(鄭蘊)의 일은, 혹 구원한 사람도 있고 혹 공격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대개 서울로 달려와 문안하지 않은 것은 잘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천지는 본래 종일토록 성내는 법이 없으니, 지금 불러 써서 사람들의 바람을 위로해 주는 것이 옳습니다.
정온은, 혼조(昏朝) 때 절의를 지켜 벼슬하지 않고 초야에서 나라를 근심하였으니, 비록 일을 맡아 처리하는 재간은 없으나, 조정에 벼슬하여 시비를 바르게 하는 것은 사람들이 미칠 수 없는 바입니다. 김상헌은, 비록 편협하고 꽉 막힌 병통은 있으나, 절행(節行)은 한 세상을 누를 만합니다. 이 두 사람을 어찌 끝내 버릴 수 있겠습니까. 외간에서 색목(色目)으로 서로 옳으니 그르니 하는 말은 본디 말할 거리도 못 되며, 초야의 공론도 두 사람이 죄를 입고 버려지는 것은 지나치다고 하고 있습니다. "
하고, 참찬관 조위한(趙緯韓)도 아뢰기를,
"이것은 없을 수 없는 공론입니다. 지금 두 사람을 거두어 쓴다면 사기가 반드시 솟아오를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두 사람은 뒤도 안 돌아보고 나 몰라라 떠났으니, 지금 부르더라도 어찌 오려 하겠는가."
하였다.
2월 29일 정사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부제학 이경여(李敬輿)가 나아가 아뢰기를,
"오늘날의 일은, 장차 한결같이 목전의 안일만 탐하여 구차히 세월만 보내려는 것입니까, 아니면 예지(睿志)가 정해져서 때를 기다리며 힘을 길러서 마침내 무슨 일을 크게 하려는 것입니까? 가까이서 모시고 있는 신하도 알지 못하니, 먼 외방의 사람들이야 성상의 뜻을 누가 알겠습니까. 만일 오늘 내일만 구차하게 지내는 것으로 계책을 삼는다면, 신은 오늘날의 임시 안일도 보전하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의 형세는 참으로 극히 어렵다. 이미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일이 많고, 또 기근의 재난을 만났으니, 비록 백성을 보호하고자 하나, 어찌할 계책이 없고 진작시킬 방도도 전혀 어찌할 수 없다."
하자, 이경여가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참으로 마땅합니다만, 뜻을 세움이 견고하면 온갖 법도가 저절로 진작되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의례를 벗어버리고 실정(實政)을 행하기를 힘쓰면, 비록 겉으로는 기미(覊縻)의 계책을 쓰더라도 오늘 한 가지 일을 하고 내일 한 가지 일을 하여 점차 자강(自强)할 수 있는 데 이르게 될 것입니다. 형세가 위태롭고 미약한 것으로 말한다면, 반정(反正)의 거조는 성상께서 친히 담당하신 바인데, 그 당시의 형세가 참으로 하루아침에 위태로움을 바꾸어 편안하게 하기란 어려웠었습니다. 그런데도 오직 성상의 뜻이 이미 정해지고 대의(大義)가 있는 바여서 백성들이 따르기를 마치 물이 아래로 흘러가는 것처럼 하였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가 극히 쇠약해졌으나 어찌 해볼 만한 형세가 없겠습니까."
하니, 상이 묵묵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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