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일 경신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상이 이르기를,
"반정 초기에 완평 부원군(完平府院君)015) 이 세상에 있어서 흠모하기에 만족함이 있었다. 재국(才局)은 비록 세상 일을 주선하지는 못하였으나, 청백과 충성은 미칠 사람이 없었다."
하니, 특진관 허계(許啓)가 아뢰기를,
"이원익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작고한 상신(相臣) 오윤겸(吳允謙)도 몹시 청백하였으므로 그 자손이 현재 굶주리고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의 청렴한 덕도 매우 귀중하다. 혈기가 쇠퇴해지면 요·순도 게을러졌으니, 사람이 쇠로하면 태만해지는 것이 정상이다. 이 두 사람이 나랏일에 부지런함은 세상에 드문 바이다. 오 정승의 한 아들은 벼슬에 제수하였는데, 굶주리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하니, 여러 사람이 아뢰기를,
"둘째 아들 오달주(吳達周)가 벼슬에 제수되지 못하고 시골에 있습니다."
하였다. 승지 권도(權濤)가 아뢰기를,
"완평 부원군의 첩 자손이 영남 지방에 유락(流落)하여 또한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두 사람의 자손 중에 여느 집사(執事)를 감당할 만한 사람이 있으면 벼슬에 제수하라."
하였다.
이해 봄에 흉년이 들자, 비국이 식년(式年)의 호적 작성을 명년 봄으로 기한을 물려 시끄러운 폐단을 없애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3월 4일 신유
상이 정원에 묻기를,
"근일 진휼을 받은 굶주린 백성이 몇 사람인가?"
하니, 회계하기를,
"진휼청에 물어보았더니, 날마다 죽을 먹인 사람의 수효는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대장을 만들어 표를 준 자는 5백 15인이라 합니다."
하였다.
권임중(權任中)을 장령으로, 이행우(李行遇)를 수찬으로 삼았다.
3월 5일 임술
심액(沈詻)을 도승지로 삼았다.
3월 6일 계해
우박이 내리고, 손방(巽方)에 붉은 기운이 하늘을 비추었다.
우의정 심열이 차자를 올리기를,
"대신이 탁지(度支)016) 를 겸하여 거느리는 것은 조종조에 전혀 없던 일로, 지금 비로소 새로 창건하는 것은 일이 타당하지 못합니다. 참으로 국가에 이익이 있다면 전규(前規)의 유무에 지나치게 구애될 필요가 없으나, 지금 신이 겸임하는 것은 해만 있고 도움은 없습니다. 대개 집에는 존장(尊長)이 둘이 없고 관에는 장관이 둘이 없는 것이니, 명령이 여러 곳에서 나오는 것은 일을 그르치는 길입니다. 신이 일마다 지휘한다면 관의 일을 침범함을 면하지 못하고, 해조가 일마다 신에게 물으면 또한 전적으로 맡겨 성과를 책임지우는 뜻이 아닙니다. 관함(官銜)을 헛되이 띠고 있는 것은 사리에 부당하니 어서 겸임의 명을 거두어 주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3월 7일 갑자
이에 앞서 좌의정 신경진이 경연 석상에서 아뢰기를,
"세자는 지금 곧 나오게 되고 대군(大君)만 홀로 머물러 있게 되니, 모실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재신(宰臣) 한 사람을 들여보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른 대신과 의논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뒤에 대신이 오랫동안 회계하지 않자,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저번에 좌상의 계사로 인하여 다른 대신과 의논하여 처리하라고 하였는데, 그 뒤에 전혀 가타부타 말이 없으니, 그 의도를 알지 못하겠다. 대군은 다른 나라의 사람이 아니니, 영의정과 우의정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재신 중에 적합한 사람을 가려 보내라."
하였다. 영상 최명길, 우상 심열이 빈청에 나아가서 대죄하였다. 이조에서 이행건(李行健)을 뽑아 아뢰니, 상이 고쳐 의망하도록 명하였다. 다시 변삼근(卞三近)을 뽑아 아뢰니, 부빈객(副賓客) 신계영(辛啓榮)이 조리하여 들어가도록 명하였다.
3월 8일 을축
김수현(金壽賢)을 대사헌으로, 조수익(趙壽益)을 집의로, 임득열(林得悅)을 장령으로, 유림(柳琳)을 통제사로 삼았다.
3월 9일 병인
윤휘(尹暉)가 심양에서 돌아왔다.
3월 10일 정묘
유성이 천진성(天津星) 아래에서 나와 구진성(鉤陳星) 아래로 들어갔다.
성균관에 거둥하여 알성(謁聖)하고 작헌례(酌獻禮)를 행한 다음, 명륜당(明倫堂)에서 선비를 시험보여 권즙(權諿) 등 7인을 취하고, 하연대(下輦臺)에서 무예를 시험보여 김사길(金士吉) 등 11인을 취하고 그날로 방방(放榜)하였다.
3월 11일 무진
한선(漢船) 3척이 장자도(獐子島)로부터 두모연(豆毛淵)에 이르렀는데 우리 국경과 20여 리 떨어졌다. 의주 부윤이 청인에게 발각될까 두려워하여 부두에 정박하지 못하게 하자 떠나갔다.
허적(許積)·성이성(成以性)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동지중추부사 이경여가 상소하기를,
"신이 일찍이 남쪽 변방에 있을 적에 어류 산성(御留山城)의 형세를 갖추 알고 조금 수축하여 절로 범하기 어려운 형세를 이루었습니다."
하고, 또 자강책(自强策)을 진달하니, 상이 가납하였다.
3월 13일 경오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왕세자 및 빈궁(嬪宮)의 행차가 의주에 당도한 뒤에 행해야 할 절목을 별단(別單)으로 서계하였는데, 그 가운데 승지를 보내어 행차를 호위하는 것은 특명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왕세자가 이역에 건너가 있다가 3년이 지나 환도하니, 대신 1원이 벽제(碧蹄)에 나아가서 맞이하는 것이 실로 사리에 합당합니다. 대신의 뜻이 이와 같으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타당하지 못한 곳은 부표(付標)하여 내리니 시행하지 말라. 또 대신을 보내어 맞이하는 한 조목은 사리상 더욱 불가하다. 사부(師傅) 중에 1인이 가서 보는 것은 혹 가하다."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예조에 계하한 사목을 보니, 부표한 곳이 몇 곳 있는데, 해조의 당상과 낭청이 의주에 나아가는 한 조목도 부표한 데 들어 있으니, 진실로 성상의 뜻이 일로의 폐단을 제거하는 데에서 나온 것임을 알겠습니다. 그러나 신하의 정례(情禮)에 있어서 실로 미안합니다. 어찌 저군(儲君)이 이역으로부터 돌아오는데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 중 한 사람도 경상(境上)에 가서 기다리는 사람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정례가 중대하니 사소한 폐단은 돌아볼 수 없습니다. 당상과 낭청이 함께 나아갈 필요는 없으나, 당상 1원을 보내어 맞이하게 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일인 듯합니다."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3월 14일 신미
재자관(齎咨官) 이응징(李應徵)이 치계하였다.
"신이 심양(瀋陽)에 도착하여 아문에 통보하였더니, 청역(淸譯) 김돌시(金乭屎)가 신의 맡은 일을 묻기에, 신이 답하기를 ‘필선 정뇌경이 공이 있는 사람을 모함한 것 때문에 성상이 진노하여 속히 형률에 의거하여 처단하라고 명하셨으므로 내가 형관(刑官)으로서 명을 받들어 자문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김종일은, 모의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한 방에 같이 거처하면서 일이 나기 전에 발각하지 못한 죄는 면하기 어려우니 또한 잡아갈 것이다. 다만 형살(刑殺)은 막중한 일이므로 황지(皇旨)를 여쭈어서 시행하지 않을 수 없는데, 황제가 멀리 나가서 내가 머물러서 기다려야 하니, 참으로 답답하다.’ 하였더니, 김역(金譯)이 말하기를 ‘황제가 행차하실 적에 반드시 결정한 말이 있었을 것인데, 그것을 듣지 못하였다. 다시 용장(龍將)에게 여쭈어서 알려주겠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정뇌경은 우리들의 원수일 뿐만 아니라, 동궁(東宮)을 속였으니 실로 죄가 크다. 처단을 쾌히 허락한다는 말을 들으니 자못 기쁘게 여겨진다.’ 하였습니다.
청역 하사남(河士男)이 재신에게 몰래 통보하기를 ‘용골대·마부달 두 장군의 말을 들어 보았더니 「조선에서 정뇌경을 구원하는 말을 하면 곧바로 재자관을 몰아내려고 하였는데, 지금 그 말한 바를 들어보니, 머물러 두고서 황제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3월 16일 계유
정광경(鄭廣敬)을 대사간으로, 최문식(崔文湜)을 지평으로, 김익희(金益熙)를 교리로 삼았다.
3월 17일 갑술
전라도 무장현(茂長縣)에 불이 나서 1백 수십여 집이 불탔는데, 감사 구봉서(具鳳瑞)가 아뢰었다. 호조에서, 호역을 감면하고 미곡으로 구휼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3월 18일 을해
빈궁(嬪宮)의 의장(儀仗)이 난리로 인하여 산실되었으므로 병조가 갖추기를 청하니, 답하였다.
"내전(內殿)의 의장을 쓰라."
기로소 당상(耆老所堂上) 우의정 심열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기로소는 조종조에서 창설하였습니다. 태조 대왕께서 친히 임하여 연회를 하사하시고 어휘를 손수 써서 본 기로소에 간직하였으며, 역대 성왕들이 서로 계승하여 은례(恩禮)가 더욱 융숭하였는데, 지금 변란으로 인하여 갑자기 혁파(革罷)하였습니다. 무릇 이 노비와 토지는 모두 조종조에서 하사한 물건으로 임진 왜란 뒤에도 이속(移屬)하는 일이 없었는데, 지금 이와 같이 분할하니, 아마도 예를 사랑하여 존속시키는 뜻이 아닌 듯합니다. 유사에게 명하여 예전대로 도로 주어 조정에서 연로한 사람을 높이는 은전이 폐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3월 19일 병자
양사(兩司)가 【 대사헌 김수현(金壽賢), 장령 최계훈(崔繼勳), 지평 박수문(朴守文), 정언 이회(李禬)이다.】 합계(合啓)하여, 영중추부사 윤방(尹昉)이 묘사(廟社)를 신중하게 받들지 않았다는 이유로 멀리 유배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노병(老病)으로 반쯤 죽은 사람이 필시 미처 살피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이에 앞서 이회가 윤방의 일로 간통(簡通)을 발송하니, 양사가 따르지 않고 모두 인혐하였는데, 옥당에서 모두 출사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이회가 취직(就職)하여 또 전의 소견을 고집하니 양사가 따르지 않고, 대사헌 이현영(李顯英), 대사간 최혜길(崔惠吉), 사간 이상형(李尙馨), 헌납 신익전(申翊全), 정언 정태제(鄭泰齊) 등이 서로 잇따라 사직하여 갈리었는데, 이때에 와서 이회가 김수현 등과 진계(陳啓)한 것이다. 윤방이 참으로 죄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논벌(論罰)한 지 해를 지난 뒤에 또 제기하였으니, 이회가 기회를 타서 탄핵한 것은 본디 논할 거리도 못되거니와, 김수현이 남에게 코가 꿰이어 그대로 따른 것도 가소롭다.
이경여를 이조 참판으로, 정치화(鄭致和)를 집의로, 홍무적(洪茂績)을 장령으로, 민응협(閔應協)을 사간으로, 심재(沈𪗆)를 헌납으로, 성태구(成台耉)를 정언으로, 이행우(李行遇)를 이조 정랑으로, 이상형(李尙馨)을 부교리로, 성이성(成以性)을 수찬으로, 이도장(李道長)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주상이 소대를 명하여 《시전》을 강하였다.
3월 21일 무인
양사가 윤방을 멀리 유배하기를 청하니 삭탈 관직하라고 비답하였다.
장령 홍무적이 아뢰기를,
"기로소는 곧 국가가 태평할 때에 노인을 우대하던 성전(盛典)입니다. 지금 임금이 욕을 당하여 신하가 죽어야 하는 절박한 때를 당한데다가 연사조차 흉년이 들어 제향(祭享)과 어공(御供)도 모두 감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기구(耆舊)의 여러 노신들이 마음을 다해 나라 근심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를 높이고 영화를 자랑하는 일을 다시 설치하기를 스스로 청하니, 보고 듣는 사람치고 누가 괴이히 여기고 놀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기로소(耆老所)의 당해 당상을 무겁게 추고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다시 설치하는 것이 무방하다. 당상은 추고하지 말라."
하고, 이어서 그 계사를 정원에 봉해 내리며 이르기를,
"부표한 곳은 조보(朝報)에 내지 말라."
하였는데, 곧 ‘임금이 욕을 당했다.[主辱]’는 두 글자였다.
통제사 유림(柳琳)이 하직 인사를 드리니, 상이 불러 보고서 전선(戰船)의 제도 및 화구(火具)·갑주(甲胄) 등 기계를 갖출 계책에 대해 자세히 묻고, 또 일렀다.
"왜차(倭差) 평성련(平成連)이 오래도록 관중(館中)에 머물고 있으니, 경은 그 사정을 살펴서 아뢰라."
3월 22일 기묘
헌부가 아뢰기를,
"주청 상사(奏請上使) 윤휘(尹暉)가 봉사(奉使)의 일을 삼가지 아니하여, 가마 속에 숨겨 둔 담배[南草]가 봉황성(鳳凰城) 사람에게 발각되어 심양에 보고되었다 합니다. 그런데도 사유를 갖추어 대죄하지 않았으며, 부사 오준(吳竣)이 계문하려 하자 중지하기를 간청하고 종에게 미루면서 또한 명백하게 처치하지 않았습니다. 그 나라를 욕되게 하고 염치가 없는 정상은 말할 거리조차 되지 못하거니와, 시종 덮어버리고 조정을 속인 죄는 통렬히 징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도록 명하고, 금령을 범한 자도 유사로 하여금 수금하여 법률에 의거하여 죄를 정하도록 명하소서. 그리고 오준은 안면에 이끌려서 소견을 굳게 지키지 못하였고, 변방의 신하도 금법을 범한 자를 묶어 보내야 할 터인데도 시종 덮어 두었으니, 부사 오준 및 의주 부윤 황일호(黃一皓)를 아울러 무겁게 추고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계사대로 하라. 윤휘는 파직만 하라."
하였다.
3월 23일 경진
삼남 순검사(三南巡檢使) 박황(朴潢)이 차자를 올려 해상 방어의 기의(機宜)에 대해 논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호남 연해의 여러 고을을 두루 다니면서 물정을 살펴보니. 선인(船人)·어인(漁人)·염호(鹽戶)도 모두 생업을 잃었습니다. 그 연유를 구명해 보았더니, 다른 이유는 없고 다만 세금이 과중해서 그런 것이었습니다. 국가가 불행하여 변란을 누차 겪어 공사간에 1년 쓸 저축이 없습니다. 모든 아문의 징수를 오로지 어인과 염호에 책임지우고, 수령과 변장으로서 재간이 있어 전판(轉販)을 잘하는 자도 어인과 염호에 오로지 책임지우므로, 원래의 세금 이외에 곳곳에서 세금을 거둡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값을 저렴하게 하여 많은 이익을 취하기도 하고 별도로 명목을 만들어 온갖 방법으로 침탈하므로, 해변의 백성이 아내와 자식을 싣고 동서로 옮겨갑니다. 나주(羅州)·영암(靈巖) 등 큰 고을도 염분(鹽盆)과 어선이 얼마 안 되니, 그 나머지 각 고을은 이를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해변의 백성은 모두 배 부리기를 말 부리는 것처럼 하니, 위급할 때 주사(舟師)가 힘을 얻는 것은 오로지 이 무리들에게 의뢰하는데, 오늘날 이와 같이 흩어졌으니, 난리를 당하면 누가 국가를 위하여 급난(急難)에 달려 가겠습니까.
지금 만일 생업을 잃은 백성을 어루만져 그 세입(稅入)을 감하고 그 함부로 징수하는 것을 끊어버리며, 염분을 마음대로 많이 설치하게 하고 어선을 마음대로 조작하게 한다면 1년도 못 되어 연해 지방에 염분과 어선의 수효가 10배는 될 것입니다. 그 중에 응모하여 순검사에게 소속된 자가 있으면 별도로 녹안(錄案)하여 그들로 하여금 삼남의 연해를 곳곳마다 연락하게 하되, 평상시에는 그 세입을 거두어서 군자를 보충하고 유사시에는 군량을 운반하여 다방면으로 조용(調用)하면, 도움되는 바가 어찌 작겠습니까."
하였는데, 비국이 아뢰기를,
"어호(漁戶)와 염호 등을 순검사에게 별도로 소속시키는 것은 전규(前規)가 없습니다."
하니, 시행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3월 24일 신사
호조에 명하여 부비(浮費)를 줄이게 하고, 정조(政曹)에 명하여 긴급하지 않은 벼슬아치를 없애게 하였는데, 감한 것은 의금부의 낭청 1원과 훈련원 습독(訓鍊院習讀) 몇 명뿐이었다.
3월 25일 임오
조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영사 최명길이 나아가 아뢰기를,
"의논하는 자들이 대부분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사정을 탐문하고, 또 병자년의 일을 조용히 바로 말하여 그들의 뜻을 살펴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위엄만 손상할 따름이지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신이 윤겸선(尹兼善)·허휘(許徽)를 천거하여 대임을 맡기고자 합니다. 허휘는 재간이 형조나 한성부의 당상에 임명할 만하고, 윤겸선은 판결사나 병조 참의에 임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이경석·이시백이 번갈아가며 천거하고 칭찬하며 말하기를,
"강명하고 재간이 있기로는 윤겸선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일찍이 죄없는 사람을 함부로 죽인 일 때문에 비난을 받기는 하였으나, 경아문(京衙門)에 있으면 반드시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최명길이 또 황해도 도사 강유(姜瑜)가 병조의 낭관이 될 만하다고 천거하니, 상이 이르기를,
"강유는 전에 속인 일이 있었으므로 쓰지 않았을 뿐이다."
하였다. 또 전 진주 판관(晋州判官) 조공숙(趙公淑)은 그 재능이 감사가 될 만하고, 전 황주 판관(黃州判官) 이기발(李起浡)도 용렬한 무리가 아니어서 재능이 쓸 만하다고 천거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공숙은 역모를 알고서도 고발하지 않았으므로 그를 버렸던 것이고, 이기발은 처사가 오활하다."
하였다. 최명길이 또 아뢰기를,
"병자년에 일을 논한 여러 신하들은 세월이 이미 오래되었으니 지금 풀어 주어 재주와 기량에 따라 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들은 나라의 존망은 도외시하고 명예만을 차지하려 하였으며, 같은 무리끼리는 감싸고 다른 무리는 배격하여 나라가 망하게 하였으니, 매우 가증스럽다. 그처럼 경박한 무리를 쓴들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하였다. 상이 조용히 묻기를,
"지금 민간에서 굶어 죽은 자가 많은가?"
하니, 최명길이 답하기를,
"굶어 죽은 자가 간혹 있으나 금년에는 군사를 출동한 일이 없으므로 백성들이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하고, 이경석이 아뢰기를,
"위에서 굶어 죽은 자를 특별히 물으시니 백성을 근심하는 뜻이 지극합니다. 신이 듣고 본 바로써 진달하겠습니다. 신이 들으니, 어떤 부인이 혼자 살고 있었는데, 굶어서 죽게 되던 날 비통한 말을 벽에 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용궁(龍宮) 등지의 행상(行商)이 한 양반의 집에 들려 밥 지을 쌀을 주었는데, 시간이 오래되어도 밥을 지어 주지 않으므로 상인이 그 밥을 달라고 하였더니, 답하기를 ‘굶은 지가 오래되어 아이들이 앞을 다투어 밥을 가져가는데 차마 빼앗지 못해서 이미 다 없어졌다.’ 하고, 옷으로 보상하기를 청하였는데, 상인이 불쌍히 여겨 받지 않고 양식을 나누어 주고 갔다고 합니다. 그 뒤에 그 상인이 그 마을에 다시 가서 물어 보았더니, 이미 굶어 죽었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수령이 그 녹봉으로 온 경내의 백성을 두루 구제할 수는 없으나, 이처럼 호소할 데가 없는 무리가 그 지방에서 굶어 죽는데도 듣고 보면서 구제하지 못하였으니, 수령된 자가 몹시 통한스럽습니다. 사족이 감히 문을 나가 빌어먹을 수 없어서 이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불쌍합니다. 부인으로서 굶주리는 자에게는 건량(乾粮)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참으로 몹시 놀랍고 참혹하다. 본도의 감사로 하여금 조사하여 처치하게 하라."
하였다.
종실인 해양정(海陽正)의 혼수를 주도록 명하였다. 해양정은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의 아들이다.
승평 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金瑬)가 그의 아버지 김여물(金汝岉)을 정표해 주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김여물은 임진 왜란 때에 신립(申砬)의 종사관으로 달천(達川)에 종군하여 군사가 패하자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광해 초기에 정려하였는데, 반정한 뒤에 그때 정표한 점이 의심할 만한 것이 있다 하여 아울러 바로잡았다. 이때에 이르러 예조에 올리자, 예조가 다시 세우는 것을 허락해 주기를 청하니, 상이 아뢴 대로 시행하도록 명한 것이다.
3월 26일 계미
상이, 각도에 유시를 내려 홀아비·과부·고아·자식이 없는 사람을 찾아서 굶주림을 진구하고 죽은 시체를 묻어 주도록 명하였다. 이경석의 말을 따른 것이다.
헌부가 아뢰기를,
"왕세자가 환국하는 일은 실로 종묘 사직의 전에 없던 큰 경사이며, 온 나라 신민이 기뻐하며 기대하던 바입니다. 부사(副使)와 서장관은 밤낮으로 가서 7일 만에 의주에 이르렀는데, 윤휘는 가마를 타고 천천히 가서 기한에 미치지 못하여, 어버이를 사모하는 왕세자의 생각으로 하여금 마침내 쓸쓸하게 하였으니, 신민으로서 누가 눈물을 흘리며 분개하지 않겠습니까. 윤휘를 잡아다가 국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휘의 실수가 중하기는 하나, 전일의 공이 작지 아니하니 죄를 감면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3월 27일 갑신
양사가, 윤방을 멀리 유배하는 일로 연달아 계사를 올리니, 중도에 부처하라고 답하였다.
3월 28일 을유
유성이 하고성(河鼓星) 위에서 나와 대각성(大角星) 위로 들어갔다.
3월 29일 병술
유성이 팔곡성(八穀星) 위에서 나와 문창성(文昌星) 위로 들어갔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내관(內官)의 장계는 열어 보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에 심양에 봉사(奉使)한 내관의 장계 안에 비밀히 계달한 일이 많이 있어 외정(外廷)이 알지 못하게 하려고 이 하교가 있었던 것이다.
3월 30일 정해
흰 기운 한 줄기가 건방(乾方)에서 일어나서 남방을 가리켰는데, 길게 하늘에 가득하였다.
장릉(章陵)에 불이나 대왕릉 서북쪽이 반 가량이나 탔다. 상이 변복(變服)하고 중사(中使)와 사관을 보내어 사실을 조사하게 하였다. 또 중신(重臣)을 보내어 위안제(慰安祭)를 지내고, 정전(正殿)을 피해 거처하고 수라상의 반찬을 줄였다. 백관이 아문에 모여 사흘 동안 소복(素服)을 입었다. 예조가 의주(儀注)를 올렸는데, 곡림(哭臨)017) 하는 한 조목이 있었다. 상이 이르기를,
"요즘 관례로는 곡림하는 규례가 없으니 《정원일기(政院日記)》를 상고하여 아뢰어라."
하니, 승지가 ‘병인년018) 3월 14일 선릉(宣陵)019) 에 불이 났을 때 예조의 의주(儀注) 안에 다만 위에서 변복하고 정전을 피해 거처하였을 뿐이고 곡림에 관한 절차가 없다.’ 하여 고쳐 부표하여 아뢰었다. 예조가, 관대(冠帶)를 갖추지 못하였으니 근례에 의하여 흑립(黑笠)·백철릭(白帖裏)·흑대(黑帶)로 예를 행하자고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하교하였다.
"장릉의 화재는 참으로 극히 놀랍고 참혹하다. 본도의 감사로 하여금 의심할 만한 자를 적발하여 캐어 물어 정죄하게 하라."
예조가 아뢰기를,
"장릉 참봉(章陵參奉)이 능 위 혼유석(魂遊石) 사이에서 목패(木牌)를 얻어 본조에 봉해 보내왔는데, 이는 익명서(匿名書)입니다. 마땅히 버려두고 묻지 않아야 하나, 능 위의 변고는 관계되는 바가 매우 중대하므로 곧 열어 보았더니, 목패에 지방(紙榜) 하나를 붙이고서 모두 김포 군수(金浦郡守)가 백성을 학대한 정상을 쓰고 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이는 반드시 간사한 사람이 토주(土主)020) 를 모함하기 위하여 능 위에서 변을 만들어낸 것이니 더욱 통분스럽고 놀랍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우승지 허계(許啓)가 아뢰기를,
"익명서를 서로 전하지 못하게 한 것은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장릉의 지방 목패(紙榜木牌)를 참봉이 해조에 봉해 보낸 것은 이미 극히 부당한데, 해조가 또 본원(本院)에 올린 것은 법례에 어긋납니다. 그러므로 신이 감히 입계하지 못합니다. 해조에 도로 보내어 태워버리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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