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무자
우의정 심열, 호조 판서 이명(李溟), 공조 판서 남이공(南以恭), 예조 참의 이덕수(李德洙)가 장릉에서 돌아와 아뢰기를,
"신들이 능침에 달려가서 불이 난 곳을 봉심하였더니, 불이 처음 일어난 곳은 곡장(曲墻) 안으로, 들불이 타들어왔을 리가 없고 또한 횃불의 불똥이 떨어져서 일어난 것도 아닙니다. 엄히 적발하여 다스리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2일 기축
간원이 아뢰기를,
"장릉의 화재는 참으로 극히 놀랍습니다. 호위하는 사람은 사리상 죄를 면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그 사정이 실로 의심할 만한 점이 있는 데이겠습니까. 듣건대, 당직 참봉(參奉)이 멀지 않은 곳에 거처하고 있는데도 그날 밤 숙직하지 않았으며 일이 발생한 뒤에 하인이 달려와 고하자 비로소 첩보(牒報)하였다 합니다. 재랑(齋郞)이 맡은 직분이 어떠한 일인데 돌려가며 숙직하고 교대로 번을 드는 것도 신중히 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통렬히 징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봉 및 수복(守僕) 등을 아울러 잡아다가 국문하여 정죄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형신(刑訊)하려다가 대간과 대신이 구원함을 힘입어 중지하였다.
4월 3일 경인
상이 하교하였다.
"제주에 교체된 내관(內官)이 지금 떠나가야 하니, 여름 옷감을 보내도록 하라."
예조가, 장릉의 잔디[莎草]를 개수할 날짜를 8월 11일로 택정(擇定)하여 아뢰니, 상이 하교하기를,
"풀이 자랄 때에는 가을이나 겨울과는 다르니, 덮은 것을 철거하고 잔디는 개수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하니, 예조가 회계하기를,
"우선 덮은 것을 걷어서 비와 이슬을 맞게 하면 열흘이 지나지 않아서 새싹이 다시 자라나 불탄 흔적이 전혀 없게 될 것이니, 성상의 분부대로 잔디를 개수하지 마소서."
하자, 상이 따랐다.
사복시의 목장에서 거둔 목화 6천 근을 북도로 들여보냈다.
4월 4일 신묘
김영조(金榮祖)를 대사헌으로, 안시현(安時賢)·성이성(成以性)을 장령으로, 임전(林)·성초객(成楚客)을 지평으로, 조경(趙絅)을 사간으로, 김반(金槃)을 부제학으로, 김집(金集)을 집의로, 남노성(南老星)을 교리로, 김익희(金益熙)를 부교리로, 유심(柳淰)·신익전(申翊全)을 수찬으로 삼았다.
경상 감사 이명웅(李命雄)이 하직 인사를 드리니, 상이 불러 보았다. 이명웅이 아뢰기를,
"도내 60주(州)의 성지(城池) 가운데 믿을 만한 곳은 진주·금오(金烏)·천생(天生) 세 곳뿐이고, 이 밖에는 믿을 만한 곳이 없습니다. 올해 농사가 조금 풍작이 되면 성을 쌓을 만한 곳을 가려 수축하고자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성을 쌓을 만한 곳을 살펴보고서 계문하는 것이 가하다."
하자, 이명웅이 또 아뢰기를,
"전에 듣건대, 대마도에서 차인(差人)을 보낸다는 말이 있었는데, 그것이 분명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만일 차인이 오늘날 심양에 관한 일을 묻는다면 어떻게 답합니까. 품지(稟旨)하여 가고자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마땅히 ‘세력이 약하여 대적할 수 없어서 우선 그들과 화의하였다.’고 답해야 할 것이다. 어찌 일시의 치욕을 숨기고 실상대로 서로 고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국사가 이에 이르렀는데도 왜인이 우리를 대접함이 매우 공손하니, 또한 의심스럽다. 평성련(平成連)이 3년 동안 관사에 머물러 있으면서 돌아가지 않으니 필시 우리를 정탐하는 일이 있을 터인데, 우리 나라는 아직도 그 정상을 헤아리지 못하니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경이 그것을 비밀히 살펴서 아뢰어라."
하였다.
호조가 아뢰기를,
"각 아문의 군관 액수가 너무 많으니, 그 수효를 헤아려 감하여 나라의 비용을 줄여야 합니다."
하자, 호위청(扈衛廳)이 아뢰기를,
"대장은 군관이 1백 40명인데 급료를 받는 사람은 60명이고, 당상은 군관이 80명인데 급료를 받는 사람은 30명으로 돌려가며 입직한 지 지금 이미 17년입니다. 그리고 호종(扈從)하고 남한 산성에 들어가서 부모와 처자를 잃어서 의지할 바가 없어 몇 말의 급료만을 바라보고 있으니, 사정이 불쌍한 듯합니다. 갑자기 재감(裁減)하게 하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호종에 참여하지 않은 자는 헤아려 감하라."
하였다. 이때 김류(金瑬)·신경진(申景禛)·구굉(具宏)이 대장으로 있었고, 심기원(沈器遠)·김자점(金自點)·이시백(李時白)이 당상으로 있었다.
4월 5일 임진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참찬관 권도(權濤)가 아뢰었다.
"요즈음 온갖 관아가 해이해져 심지어는 대관(臺官)이 연계할 때에도 전의 계초(啓草)를 가지고 와서 전하고 있습니다. 대간은 임금의 이목인데 종이 한 장 고쳐 쓰는 것도 오히려 싫어하고 꺼리니, 장차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비국이 아뢰기를,
"대사성 이경여(李敬輿)가 선비 양성하는 방도를 탑전에서 진달하였는데, 절목이 매우 자세하니 그 뜻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서울은 예조로 하여금 학문에 뜻을 두고 조행이 있는 사람을 뽑게 하되 인원의 다소에 구애되지 말며, 외방은 팔도의 감사가 한 도 안에서 재능과 조행이 있는 사람을 뽑되 생원·진사·유학을 논하지 말고 뽑아 경상도·전라도·충청도에서는 해마다 각각 5원(員)씩 천거하고 그 나머지 도에서는 각각 3원씩 천거하여 태학(太學)에 올리게 합니다. 그런 다음 지성균관사 이하로 하여금 서로 돌아가며 강론하게 하고, 간혹 제술(製述)로 시험하여, 해마다 조정에서 어진 자와 능한 자를 논해 차례로 등용합니다. 그러면 사방이 보고 느끼는 바가 있어서 선비들이 진작될 것입니다. 별도의 방법으로 권장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특명으로 제술하거나 전강(殿講)에서 강서(講書)할 때 익히 외는 것을 주로 하지 말고 문의(文義)에 능통한 자를 겸해 취하여, 제술이나 강서(講書) 중에 우수한 사람은 전시(殿試)에 곧바로 응시하게 하고 그 다음은 회시(會試)에 곧바로 응시하게 하며, 혹은 분수(分數)를 주면 어찌 크게 고무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강서로 전시에 곧바로 응시하게 하는 것은 아마도 지나친 듯하다. 또 양계(兩界)의 액수가 많은 듯하니 1인씩 감하라."
하였다.
4월 6일 계사
영의정 최명길이 건의하기를,
"육조의 좌랑은 30개월이 되어야 5품에 승진되고 정랑은 30개월이 되어야 4품에 승진되는 것은 국가의 법전인데, 지금은 모두 갑자기 승진하여 직무가 폐기됨이 많습니다. 예전의 법을 밝혀 기한 안에 승진시키지 말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7일 갑오
비국이 청하기를,
"새로 조운(漕運)한 미곡 5천∼6천 석으로 백금을 무역하여 객사(客使)를 지대(支待)하는 비용으로 쓰고 겸하여 도성 백성의 굶주림을 구제하소서. 그리고 지난해에 서량(西糧) 및 세미(稅米)를 관서에 실어들인 것 중 남은 수량이 적지 않으니, 금년의 서방 양곡은 우선 강도(江都)에 두어 뜻밖의 환란에 대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8일 을미
《구황촬요(救荒撮要)》 1책을 반사(頒賜)하였다.
4월 9일 병신
홍진(洪瑱)을 장령으로, 박수문(朴守文)·최문식(崔文湜)을 정언으로, 허적(許積)을 지평으로 삼았다.
4월 11일 무술
예조가 아뢰기를,
"비국의 계사를 보건대, 선비를 양성하고 인재를 육성하는 방도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신들이 생각건대, 왕정(王政)은 반드시 교화를 먼저 할 일로 삼습니다. 교화를 수립하는 데에는 《소학(小學)》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는데, 연소한 무리들이 과거 급제에 급하여 고서(古書)로 보고 전혀 힘쓰지 않으니, 진실로 조정에서 격려하고 권장하는 일이 없으면 매일 종아리를 때리고 엄히 독려하더라도 그 형세가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만일 이 《소학》으로 강을 시험보이되 4권을 두루 외고 문의에 능통한 사람을 일체 승보시(陞補試)의 제도에 의거하여 윤차로 매양 10인을 취하여 회시(會試)에 응시하도록 하고, 외방은 인원수를 감하는 것으로 항식(恒式)으로 정하여 행하소서. 그렇게 하면 마을의 어린 사람들이 서로서로 권면하여 기질이 변화될 것이니, 어찌 선비를 양성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큰 도움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외방에는 인원 수를 감하는 일은 타당하지 못한 듯하다."
하였다.
4월 12일 기해
유성이 하고성(河鼓星) 아래에서 나와 우성(牛星) 위로 들어갔다.
최혜길(崔惠吉)을 대사간으로, 임담(林墰)을 동부승지로 삼았다.
4월 13일 경자
다시 홍문관으로 하여금 월과(月課)를 제진(製進)하게 하였다.
4월 15일 임인
유성이 천진성(天津星) 아래에서 나와 벽성(壁星) 위로 들어갔다.
4월 16일 계묘
상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활쏘기와 포쏘기를 시험 보였다. 활쏘기 시험에 수석을 한 내금위(內禁衛) 유성익(劉成益)은 당상에 승진하고, 차석을 한 김형상(金亨祥)은 변장에 제수하는 동시에 숙마(熟馬) 1필을 사급하게 하며, 고기생(高起生) 등 10인은 변장에 제수하고, 김예정(金禮正) 등 28인은 각각 활 1장(張) 장편전(長片箭) 1부(部)를 내려 주고, 김중길(金重吉) 등 5인은 모두 회시(會試)에 곧바로 응시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포쏘기 시험에 수석을 한 이신원(李信元)은 당상에 승진하고, 2등 이하는 변장에 제수하는 동시에 아마(兒馬) 1필을 사급하며, 3등 이하는 무명 각 7필씩 내려 주도록 명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곳은 무예를 시험 보이기에 편리하니, 봄에는 2월이나 3월에, 가을에는 8월이나 9월에 항규로 정하여 활쏘기와 포쏘기를 시험 보이라."
하니, 병조 판서 이시백이 아뢰기를,
"금군(禁軍)이 활쏘기와 포쏘기는 해마다 연습하였으나, 난리 뒤에는 말이 없어 기사(騎射)는 연습하지 않았습니다. 지난해 본조가 무명 1백여 동을 제주에 들여보내어 소를 사들이려 하였으나, 우역(牛疫)을 만나 시행하지 못하고 모두 제주에 유치해 두었습니다. 이제 목사로 하여금 이 무명으로 말을 많이 사들여 무사에게 나누어 주어 기사(騎射)를 연습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잘 생각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그 뒤에 비국이, 유성익(劉成益) 등의 상가(賞加)가 과람하다고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헌부가 아뢰기를,
"요즈음 조정이, 혹리(酷吏)를 높여 쓰면서 원망을 피하지 않고 일을 담당한다고 말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풍지(風旨)를 받드는 무리가 강한 자는 기세가 더해지고 약한 자는 미치기를 바라서, 대강(大綱)은 날로 풀어지고 소법(小法)은 날로 조밀해져서 백성이 살아갈 수가 없게 되었으므로 식자들이 한심하게 여긴 지 오래입니다. 판결사 윤겸선(尹兼善)은 천성이 본디 잔혹하여 형장(刑杖)을 지나치게 사용하므로 집에 있을 때에는 종들이 다 흩어졌고 관에 있을 때에는 고을 백성들이 놀라 흩어졌습니다. 고양 군수(高陽郡守)가 되어서는 사적인 분으로 일시에 4인을 장살(杖殺)하였습니다. 국법이 행해졌다면 사판에서 삭제되었을 것인데, 당상에 발탁해서 사송(詞訟)의 소임을 맡기니, 이 무슨 뜻입니까.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답하기를,
"재능이 아까우니 다시는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경상좌도의 감시(監試)에서 시(試)와 부(賦)의 제목을 10여 번이나 고쳐서, 해가 진 뒤에야 짓기 시작하여 이튿날 해가 돋은 뒤에야 파하였습니다. 시관을 파면하고 파방(罷榜)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뢰 대로 하라. 시관은 우선 추고하라."
하였다.
4월 18일 을사
김광현(金光炫)을 대사간으로, 정홍명(鄭弘溟)을 우부승지로, 민응협(閔應協)을 수찬으로, 유철(兪㯙)을 교리로, 최온(崔蘊)을 비안 현감(比安縣監)으로, 안방준(安邦俊)을 전생서 주부(典牲署主簿)로, 선우협(鮮于浹)을 장악원 주부(掌樂院主簿)로 삼았다. 최온은 남원(南原) 사람이고, 안방준은 나주(羅州) 사람이고 선우협은 평양 사람이다. 이조 판서 이경석(李景奭)의 천거로 6품직에 발탁해 제수하였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4월 19일 병오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4월 20일 정미
노직(老職)의 공명 고신(空名告身)을 경상도에 보내어 곡식을 모집하여 기민을 진휼하게 하였다. 감사 이경증(李景曾)의 청을 따른 것이다.
4월 21일 무신
조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영경연 최명길이 나아가 아뢰기를,
"대강(大綱)과 대법은 선왕의 제도를 준수해야 하나, 변통할 수 있는 것은 반드시 때에 따라 경장(更張)하여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총명한 체하면서 예전 법을 변경하는 것은 예로부터 그르게 여겼다."
하자, 최명길이 아뢰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지모는 미치지 않으면서 경장만 하려 하는 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가령 조종조에서도 지금처럼 폐단이 있었다면 반드시 경장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대전》의 법이 폐기되어 행해지지 않으니, 육조와 한성부의 당상들로 하여금 낭관들과 평상시에 강습하게 하되, 각각 그 해당 업무에서 폐기하고 거행하지 않는 것이 있으면 품지(稟旨)하여 시행하기를 평상시의 고사처럼 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좋다고 하였다. 최명길이 또 아뢰기를,
"당대의 수교(受敎) 중에 후세에 법이 될 만한 것이 많이 있으나 각사에 흩어져 있어 잊어버리게 됩니다. 계해년 이후의 수교 및 승전을 베껴내어 모아서 편집해 간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성종 말년에 《전속록(前續錄)》을 반포하였고, 중종조에 《후속록(後續錄)》을 반포하였는데, 명종조에서 선조조에 이르기까지는 수교(受敎)가 있었으나 율관(律官)이 법을 의논할 때에 마음대로 조종하였습니다. 속담에 ‘숙녹비대전(熟鹿皮大典)’이라 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아뢴 대로 하라고 하고, 또 이르기를,
"해마다 한재가 들어 백성이 모두 굶주리니, 시사를 생각할 때마다 근심스런 마음이 타는 듯하다."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원통한 옥사를 심리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심리하는 일은 내 본뜻이니, 곧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전에 헌부의 계사로 인하여 묘당으로 하여금 신료를 인접하는 절목을 강정하게 하였습니다. 신이 듣건대, 조종조에서는 상참(常參)·조강·주강·석강의 규례가 있었다 하는데 지금은 신하들이 나아가 뵙는 것이 매우 드물어서 아랫사람의 정이 이 때문에 막히고 있습니다. 외부의 의논은 ‘비국의 개좌(開坐)를 빈청으로 옮겨서 날마다 개좌할 수는 없더라도 매월 3일·13일·23일로 정하고 윤대(輪對)의 규례처럼 하여 삼공·육경으로 하여금 이날 일을 주달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상참은 형식에 가깝다. 경연을 자주 개설하면 경들이 일을 주달하기에 매우 편리할 것이다. 특진관은 차서를 뛰어 넘어 입참(入參)하더라도 괜찮다."
하였다.
비국이 형조 판서 홍보(洪靌)가 직무를 폐기한 지 여러 날이 되었다 하여 파면시키기를 요청했는데, 이때는 육경이 질자(質子)021) 를 교대로 심양에 들여보내는 상황이었으므로 홍보가 형조 판서에 제수된 지 몇 달 남짓되어 장차 질자를 보내게 되자 직무를 폐기함으로 인하여 파면당해 소원을 이루려는 것으로 상이 의심하였는데, 일찍이 경연석상에서 편리함을 구하여 고의로 범하는 일에 대한 언급이 있자, 상이 이르기를 "형조 판서의 파면을 청하는 계사와 같은 것이 아닌가." 했었다. 이에 최명길이 두려워하여 다시 논죄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답하지 않았다.
4월 22일 기유
남이웅을 대사헌으로, 심재(沈𪗆)를 부교리로, 유철(兪㯙)을 헌납으로 삼았다.
4월 24일 신해
목성선(睦性善)을 교리로, 홍무적을 장령으로, 성초객(成楚客)·이극인(李克仁)을 지평으로 삼았다.
도적이 도성 안에서 사람을 죽인 일이 있어 한성부에서 검시(檢屍)하기 위해 참군(參軍) 조필순(曺弼舜)이 그 집에 당도하였는데, 검시도 하기 전에 불량배 수십 인이 크게 소리치며 나와서 몽둥이와 돌로 쳐서 조필순 등이 달아나서 겨우 피하였다.
4월 25일 임자
헌부가 아뢰기를,
"장악원 제조 2원이 모두 무신이니 구인후(具仁垕)의 장악원 제조의 소임을 체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상이 가뭄이 들었을 때 재난을 구제하는 대책에 대해 물었다. 동지경연 이경석(李景奭) 등이, 여러 죄수를 너그럽게 처결하여 하늘의 뜻을 돌리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각각 견해가 있겠지만, 죄 있는 자가 요행히 면한다면 어떻게 하늘의 뜻을 돌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심액이 아뢰기를,
"청나라에서 반포한 역서(曆書)가 큰 달과 작은 달이 차이가 있으니, 역관(曆官)으로 하여금 《시용통서(時用通書)》를 참고하여 절후를 산정(算定)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5월에 국기(國忌)가 있으니 관계되는 바가 작지 않다. 아뢴 대로 상고하도록 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4월 26일 계축
장령 홍무적이 아뢰기를,
"지금 나라 안에 사망한 사람이 많아 형은 그 아우를 잃고, 부녀와 어린이가 뒤엉켜 쓰러져서, 피가 들판에 흐르고 뼈가 골짜기를 메웁니다. 게다가 농사마저 흉년이 들어서 굶어죽은 자가 서로 잇달았습니다. 이에 중외가 허둥지둥하여 아침에 저녁 일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형세가 절박합니다. 그래도 조금 믿을 수 있는 것은 성상께서 위에 계시다는 것뿐입니다. 요즈음 듣건대, 전하께서 화공을 불러 금중(禁中)에 오래 머물러 두고, 꽃과 나무를 재배하고 날마다 완상하고 계시다 하는데, 과연 이러한 일이 있습니까. 이는 모두 쇠퇴한 세대의 용렬한 임금인 진(陳)나라 후주(後主)나 송(宋)나라 휘종(徽宗)·흠종(欽宗)과 같은 임금들이나 하는 일입니다. 성대한 세상의 밝은 임금이 이러한 일을 하였다고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예로부터 임금은 반드시 세 가지에 대해 두려워하였습니다. 상제(上帝)의 진노를 첫 번째로 두려워하였고, 인심이 복종하지 않는 것을 두 번째로 두려워하였으며, 직언을 아뢰지 않는 것을 세 번째로 두려워하였습니다. 이 두려움을 알아서 두려워하는 이는 흥성하고, 이 두려움을 무시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이는 망합니다. 천변과 인심은 참으로 두려운 것이며, 조정에 임금의 잘못을 바른대로 말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은 더욱 두려운 것입니다.
신이 법관으로 있으면서 위로는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나라의 일을 바르게 하지 못하여 전하로 하여금 오락을 탐하게 하고 또 천기(賤伎)·잡류로 하여금 궁중에 출입하게 하는데도 법에 의거하여 잡아다가 주벌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어찌 감히 법부(法府)에 얼굴을 쳐들고 있으면서 전하께서 총애하여 임용하신 성대한 뜻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먼저 신의 직을 삭탈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양사의 여러 관원들이 다물고 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두 인피하니, 모두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옥당이 처치하여 모두 출사하게 하기를 청하니, 따랐다.
4월 27일 갑인
관상감이 아뢰기를,
"신들이 초봄에 청나라의 역서가 본국에서 인출한 바와 다른 곳이 있음을 보고 곧 본관상감의 관원으로 하여금 다시 추산(推算)하게 하여 그것이 틀리지 않음을 안 뒤에야 계문하였습니다. 그 뒤에 또 《시용통서(時用通書)》를 보니, 금년의 크고 작은 달이 청나라와 서로 부합되므로 신들이 또 의심을 품었습니다. 이에 본감의 관원으로 하여금 예전 역서를 모으게 하여 병진년022) 이후 갑술년023) 이전의 당력(唐曆) 및 우리 나라의 역서를 친히 고열(考閱)하였더니, 당력과 우리 나라의 역서는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으나, 《시용통서》는 크고 작은 달이 같지 아니함이 많을 뿐만 아니라, 윤달에 이르러서도 달랐습니다. 당력 및 《시용통서》는 모두 중국에서 나왔는데 이처럼 각각 다릅니다. 생각건대, 흠천감(欽天監)에서 간행한 역서는 해마다 추산하여 더욱 정밀하여 어긋남이 없습니다. 그러나 《시용통서》에 이르러서는, 크고 작은 달이 대부분 다를 뿐만 아니라, 윤달도 다르니, 이는 금령을 무릅쓰고 사사로이 지은 데에서 나온 것이며 앞으로의 각년(各年)을 가지고 미리 추산하였으므로 형세상 착오되기 쉬워서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청나라가 반드시 흠천감의 추산하는 법을 참으로 얻지는 못하였을 것이고, 혹은 《시용통서》 가운데 이미 이루어진 법에 의거하여 이 역서를 간행해서 어긋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흠천감에서 반포한 예전 역서를 준칙으로 삼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28일 을묘
한재로 원통한 옥사를 심리하게 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심리라는 것은 죄있는 사람을 조율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가운데 억울한 사람을 자세히 살펴 서계하라."
하니, 형조가 회계하기를,
"현재 수금된 사람의 죄안은 등급을 나누어 서계하니, 예재(睿裁)를 바랍니다. 또 외방의 죄수는 각도의 감사로 하여금 속히 심리하여 아뢰게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집의 김집(金集)이 들어와서 상소하여 해직해 주기를 청하니, 상이 따뜻하게 이르고 윤허하지 않았다.
영의정 최명길이 면대하기를 청하니, 상이 불러 보았다. 최명길이 나아가 아뢰기를,
"저번날 경연 석상에서 ‘자주 경연을 열고 신료가 입시하도록 하라.’는 전교가 계셨으니, 일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대면하기를 청한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므로 신이 먼저 행하고자 하여 감히 들어왔습니다. 지금 나라일이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위에서 근심하고 근로함이 지극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 근래에 하늘의 노여움이 거듭 나타나고 백성의 원망이 더욱 심하니, 이것은 신 같은 자가 정승의 자리에 있어서 그러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재상의 임무는 음양을 다스리고 사시를 순하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침묵하고 대체를 지키는 것으로써 재상의 임무로 여기고 있는데, 신은 그렇지 않다고 여깁니다. 임금의 덕을 도와 인도하고 인재를 모두 천거하며 평범한 사람들로 하여금 살 곳을 얻도록 한 뒤에야 음양을 다스릴 수 있고 사시를 순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침묵하고 대체만 지킬 뿐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참으로 옳은 인재를 얻어 천거하면 국사가 이루어지지 않음을 어찌 걱정하겠는가. 국가에 있어서 요긴한 소임이 셋이 있으니, 이조·병조·호조가 그것이다. 이조가 사람을 잘 쓰고 병조가 군사의 정사를 잘하고 호조가 경비를 잘 쓰면 나라를 다스리는 도에 있어서 여기에다 무엇을 더하겠는가. 헌부에 이르러서는 규정(糾正)하는 도리를 밝혀 간사한 무리로 하여금 조정에 있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동지경연 김수현(金壽賢)이 아뢰기를,
"가뭄이 너무 심하여, 저번날 비는 겨우 먼지만 적시었는데, 제관(祭官)에게 내린 상이 너무 후하였습니다. 반드시 큰 비를 얻은 뒤에 시상하는 것이 곧 선왕조의 구례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몹시 기뻐서 약간 시상하였을 뿐이다."
하였다. 승지 권도(權濤)가 친히 기도를 거행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은 차례가 있으니 형세를 보아서 행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4월 29일 병진
유성이 낭위성(郞位星) 아래에서 나와 진성(軫星) 아래로 들어갔다.
예조가 아뢰기를,
"방금 영릉 참봉(英陵參奉)의 치보를 보니, 이달 28일 새벽에 정자각(丁字閣)이 실화하여 다 타버렸다고 하였습니다. 듣고는 몹시 놀라 등록(謄錄)을 가져다가 상고해 보니, 변복(變服) 및 다른 절차는 없고 위안제(慰安祭)만 거행하고, 또 정부 이하 사람이 가서 살펴보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에 의거하여 거행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또 아뢰기를,
"참봉 및 수호군 등이 실화한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지금은 잠시 묻지 말아 후일의 폐단을 막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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